믿음의 3대 훈련 (잠 27:20-22)
한성진목사
20 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21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 22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쪘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겨지지 아니하느니라
이 시간에 “믿음의 3대 훈련”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참고로 성경은 아동 교육에 있어서 체벌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육학적으로 체벌에는 10대 원칙이 있습니다. 1. 먼저 타일러야 한다. 2. 남 앞에서는 하지 않는다. 3. 잘못을 본 그 자리에서 해야 한다. 4. 왜 맞아야 하는지 물어야 한다. 5. 억울하지 않게 해야 한다. 6. 아파야 한다. 7. 신체적 후유증을 남겨서는 안 된다. 8. 감정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 9. 체벌 후 시간을 주고 생각하는 시간을 주되 뉘우칠 땐 다독거려야 한다. 10. 체벌한 후 아이에게 사과하지 않아야 한다. 꼭 참고해야 할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연단도 그러합니다. 이 중에 중요한 것이 왜 연단을 받아야 하는지,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그 의도를 충분히 아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한 연단을 받아도 연단 받는 의도를 알지 못한다면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연단하시는 목적은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하시고, 하나님이 내신 구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과 영생을 얻으며,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게 함으로 성령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한 우리 믿음의 훈련에는 3가지 훈련이 있습니다.
1. 비움의 훈련입니다.
20절 “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우리 인간의 욕심과 눈을 스올과 아바돈에 비유한 말씀입니다. 스올이 뭘까요? 여기 “스올”(쉐올)은 '음부'를 가리키는 말로 죽은 자들의 영혼이 거하는 곳을 가리킵니다. 대체로 지옥을 의미하지만 천국에 간 야곱도 음부에 간다(창37:35)는 말을 쓴바 있듯이 천국과 지옥을 망라한 사후세계를 가리킨 말입니다.
그리고 “아바돈”은 개역성경에선 ‘유명’(幽冥)으로 표기된 말로서 유명(아바돈)은 음부보다 더 깊은 죽음의 세계 신약에서는 '지옥의 가장 깊은 곳', '무저갱' 등을 가리키는 '아폴레이아'로 번역된 말입니다(눅8:31, 계 9:2). 무저갱이란 끝이 없는 큰 구덩이입니다. 그러니까 스올과 아바돈은 채우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곳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의 욕심과 바라는 것이 이와 같다는 말입니다. 욕심이 한이 없어요. 무저갱이란 지옥도 의미하지만, 바로 우리 마음의 끝없는 욕심이 무저갱입니다. 탐욕을 품으면 그 탐욕의 무저갱에 지옥의 불이 타오릅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천국이 있듯이 마음의 지옥도 있습니다. 이 끝없는 욕심, 이것을 죽이는 것이 연단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눅12:15에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셨습니다. 유산 문제, 정당하게 나누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양보하세요. 다투고 싸운다고 이만 상하지 유산이 더 늘어나는 것 아닙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주님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의 곳간만이 아닙니다. 사람들 마음의 곳간에 너무나 많은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래서는 생명적인 삶이 불가능합니다. 예수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삶의 작은 것이라도 만족한 줄 알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딤전6:6-9에 보면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갖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현재에 자족하는 마음, 이것이 경건에 필수입니다. 큰 이익이라 했습니다. 마음에 욕심 버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다 비워야 합니다. 예수로 만족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전부여야 합니다. 하나님 한 분 때문에 즐겁고 감사하고 행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초막이나 빈들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그것으로 천국생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비움의 훈련입니다.
2. 진리의 훈련입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진리에 견고히 서야 합니다. 21절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 이 말씀은 칭찬이 좋으면서도 큰 시험이 되는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극렬한 풀무불 속에서 불순물이 제거되고 순은과 순금이 나오듯 칭찬도 연단의 중요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취미로 사금을 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강이나 산에 가서 널려진 금을 주워 오면 됩니다. 우리 한 번 금 캐러 갈까요? 예를 들면 강의 구비치는 부분, 큰 바위나 풀의 뒷부분이나 아랫부분 등에 있는 모래에 사금이 많이 쌓여있습니다. 금은 다른 물질에 비해 무겁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쟁반 같은 바가지에 물 붓고 쌀에서 돌 추리듯 하면 까만 가루가 나오는데 그것이 사금입니다. 이걸 가져다가 산소불로 녹이면 노란 순금이 나옵니다. 지식만 있으면 여러분 어디 던져놔도 살아갑니다. 장비가 있다면 직업으로 해도 되지만 취미로 해도 용돈은 나온다고 합니다.
본론으로 돌아가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단련함과 같이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한다 했는데,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여기 칭찬은 긍정과 부정 두 면이 있습니다. 먼저 긍정에서 본다면 칭찬은 고래로 춤추게 한다는 말처럼 칭찬은 사람의 기를 살려 낙심하지 않게 하고 적극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줍니다. 동물을 조련할 때도 잘하면 먹이를 주거나 쓰다듬어 주면 훈련이 잘 된다고 합니다. 어린이들이나 초신자에게는 아주 필요 조치입니다.
그렇지만 한 편으로는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칭찬해 주면 교만해진다는 말입니다. 영적생활에 있어서 칭찬이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겸손에 대한 결심과 칭찬에 대한 상식을 갖고 있지만 칭찬을 들으면 왠지 마음이 덜렁거리면서 무너지는 것을 느낍니다. 칭찬하는 순간 사탄의 시험이 침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칭찬은 불같은 시련 못지않게 나를 시련하고 시험하는 훈련의 요소입니다.
그렇다고 칭찬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칭찬은 관심과 격려이기 때문입니다. 칭찬도 해야 합니다. 칭찬에 인색하면 그 역시 교만입니다. 그렇게 수고하고 애써도 당연하다는 식이 되면 얄미울 수도 있어요. 맛있는 음식을 해줘도 맛있다는 말 한 마디 없다면 서운 할 수도 있습니다. 맛이 없으면 수고했다고라도 하세요. 우리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서 칭찬의 딜레마(진퇴양난, 궁지, 난제)가 있어요. 가령 칭찬해 주지 않으면 무관심하거나 매정한 것 같고, 칭찬해주면 상대가 잘못하여 시험 들고 교만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제 생각인데 그래서 조심은 해야 하나 넓은 차원에서 그것까지는 내 소관이 아니란 생각입니다.
중요한 것은 칭찬을 듣는 사람입니다. 칭찬을 듣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저 칭찬은 나에 대한 관심이나 사랑, 그리고 더 잘하라는 격려지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정도 생각하면 적당합니다. 그리고 더 열심히 하시면 됩니다. 혹시 시험이 된다면 상대에 대한 예를 표시한 다음에 마음속에서는 ‘저 말은 나한테 은혜가 되지 않는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칭찬이 있든지 과장되게 높여주든지 간에 중심 지켜야 합니다. 진리 안에 서시라는 말입니다. 은혜처럼 안 보여도 성경이 은혜라고 말하면 은혜가 된다고 말하시고, 은혜처럼 보여도 은혜가 안 되는 거라면 은혜가 안 된다고 생각하세요. 말씀을 삶에 적용하세요. 이것이 진리 훈련입니다.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느 정점에다 세우시든 교만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진리에 서면 어떤 시험도 칭찬도 어떤 영광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불같은 시련보다 더 무서운 칭찬을 이길 수 있다면 그는 진리에 선 사람입니다. 왜 고통스럽습니까? 진리에 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궨한 염려와 걱정, 인간의 생각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 안에서 생각하고 진리 안에서 생각하고 하나님 안에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것이 우리의 경건이 되고 복이 될 것입니다.
3. 믿음과 경외의 훈련입니다.
22절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쪘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겨지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씀은 미련한 자를 교정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여기 공이로 찧는다는 원문의 의미는 아주 가루가 되도록 산산조각이 나게 부순다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곡물은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으면 껍질이 벗겨지고 더 찧으면 현미의 겨까지 벗겨져서 정미가 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거기다 함께 넣고 산산조각이 나게 부숴도 껍질조차 벗겨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미련은 벗겨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신앙에 적용한다면 이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은 변화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중요한 힌트가 “곡물과 함께”라는 말입니다. 요즘도 한방에서 약재 가공법으로 다른 물질을 함께 넣고 볶다가 채로 친다든지 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 중에 '사초'라는 건 약제에다 자갈이나 모래를 넣고 볶다가 볶아지면 약재만 사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냥 볶는 것보다 자갈이나 모래에 열이 달아서 더 잘 볶아집니다. 이런 비슷한 방법이 잠언 시대에도 유행했나 봅니다.
그런데 미련한 죄인의 경우는 곡물로는 안 되고 “예수와 함께” 그리고 "성령과 함께"여야 합니다. 죽는 방법은 먼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롬6:6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이미 못 박혔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에는 스스로 의로우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먼저는 예수 안에서 해결해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과 함께"입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로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 앞에 자신을 온전히 드리세요. 모세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다 광채를 얻었듯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성령으로 변화가 됩니다.
그래서 롬6:13-14에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길입니다. 예배로서 하나님을 높이고 늘 기도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이 은혜 안에 살게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우리를 더 기도하게 하고 더 감사하게 하고 더 회개하게 하고 더 성령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히12:12-14에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고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귀히 여기시고 분초마다 연단하시는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연단의 의도를 알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 의도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미련과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진리에 서고, 예수의 복음을 믿음과 하나님 앞에서의 생활로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더욱 새롭고 온전케 되는 장성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