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님은 경남 함안 출신이다.
전쟁이 나고 마산에서 17살의 나이로 붙들려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다 전역후에 다시 군대에 들어가 3산단에서 시작하여 수송병과로 월남전에도 참가하고 귀국하여 상사까지 달고 전역하여 연금을 받고 있으며 참전용사 수당과 월남 고엽제 6급 수당등 500만원이상을 받고 생활하는 분이다.
처음 전쟁이 나서 함안 진동 일원은 북한군과 미군이 주로 전투르르 하는데 경찰들도 많은 숫자가 투입되어 마산서부를 사수하기 위해 미군이 가장 열심히 전투하고 피해도 많이 난 곳이다.
미군은 '50.8월초에 이곳에 미 제25사단과 해병 5연대를 투입하여 하동에서 진주고개를 넘어 마산으로 진격하는 북한군 6사단을 방어토록 하였으며 "킨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사단급 최초의 공격작전을 감행하게 된다.
미 제24연대에는 우리의 민부대 김성은 부대 경찰이 배속하여 서북산및 전투산일대의 적 을 소탕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봉암리계곡에서 북한군의 매복작전에 말려들어 사삳자 400여명 화포 14문 차량 26대의 대손실을 입게 되는데 여기를 미군들은 "피의 계곡, 또는 포병의 무덤"이라 했다.
여기에 투입된 경찰이 432명 노무자는 500여명이 되었다.
전투산과 서북산 일대는 8월말까지 연일 밤낮 똑같은 방식의 혈전이 되풀이 되면서 서북산 주인은 19차례나 바뀐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그러다 '50.8.31일날 북한군은 7사단을 이곳에 투이하여 2개사단으로 미 25사단을 공격한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함안이 피탈되고 하루종일 미군 전폭기가 출격하여 네이팜탄등 투하로 불바다를 이루게 된다.
사단 후방지역에서는 적 유격대및 오열의 준동이 계속되고 마산형무소 간수들이 공산당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결국 9.10일부터 12,000여명의 마산시민이 LST를 이용하여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계속되는 유엔 공군기들의 폭격으로 북한군의 압력은 5일부터 현저히 줄어들고 전선후방에서만 2,000여며의 북한군을 매장하였다.
"갓뎀산의 진실"
하지만 전투산일대는 여전히 북한군이 장악하고 있어 3일간 수차례 고지로 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게 되면서 미군의 피해는 늘어갔다.
결국 9월15일 인천상륙작전과 연계하여 전투산 필봉등 대대적인 탈환작전이 진행되고 3일만에야 북한군이 물러나면서 그 한여름의 지독한 더위와 시체의 부패하는 냄새, 불타는 네이팜탄의 악취속에서 미군은 22일부터 추격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이때에 바로 미군들이 여항산일대 특히 밑에서 바라보면 큰 바위군이 보이는데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부르던 소리가 "갓뎀 산"이다
이때 용사님은 17살 소년으로 함안에 남아 그 전투를 목격하고 때론 부역자 되어 북한군이 요구하는 짐을 지고 산을 올라야 했다.
"눈에 보이는 미군 시신, 그리고 냄새"
그런 어느날 그 바위군이 있는 8부 능선을 지나는데 비는 퍼붓고 유엔군의 폭탄은 계속 떨어지고 한순간 엎드려 있는데 코 끝을 메우는 냄새가 나서 살펴보니 검은 얼굴의 미군장교가 죽어 있고 그 옆에는 북한군 장교 복장을 한 사람이 또 죽어서 부패되고 있었다.
지금도 그 모습이 확실하게 떠 오른다고 하신다.
"그럼 어르신은 언제 군대에 가게 되었어요?"
"도저히 살기 힘들것 같아서 어느날 마산으로 피난을 떠났다가 국군에게 붙잡혀 갔지요."
"네?, 왜 붙잡혀요. 어린 나이인데 특별치 체구가 크셨나요?"
"너무 못살아 배우지는 못했는데 체구는 그 당시로는 컷다고 봐야지."
"지금 자력표에 보면 '국문해독'이라고 학력이기재 되어 있어요."
"카츄사 되어 미군 부대에 배치받아 흑인 대령의 심부름꾼이 되다."
이 지역을 잘 알아서 인지 미군부대에 들어가 그들이 시키는 잡무를 하게 되는데 영어가 재미있어 손발짓과 그저 행동으로 따라드 보니 조금씩 이해가 되고 그들이 뭘 말하는지 알게 되어 갔다.
이렇게 해서 미군을 따라 다니다 마지막으로는 파주지역으로 들어와 계속하여 미군 대령 밑에서 근무하며 6.25전쟁의 휴전을 맞이 했다.
그러다 보니 총은 쏘아보지도 못하고 전쟁이 끝나는데 죽어서 실려가는 시신만 많이 목격 하였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전역이라는데 다시 군대에 들어가야 했다.
무식이 문제라 아무런 행정서류가 갖추어지지 않아서 미필자가 된 것이다.
"미군부대에 근무하며 글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윤하사는 영어는 하게 되었다."
누가 말하듯 솥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윤하사는 국어는 잘 몰라도 영어는 되었다.
그래서 결국 하사관으로 들어와 수송병과를 택하여 운전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는 운전을 아무나 하지 못하는 시절이아 매력이 있었는데 배치받아 근무하게 된 곳이 3사단 이었다.
18연대 백골부대에 들어와 임무를 수행하다 후생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장사 수환이 있어 이곳 다목리와 육단리 대성산과 복계산 지역에서 숯을 실어서 동송에 갔다 넘기면 한 트럭에 그당시 돈 3만 6천을 받는다.
그때에 와수리, 육단리, 다목리 지역의 돈이 평당 40원하였다. 윤하사는 하루에 많으면 3~4차, 평균 2차분을 처분하여 한차분만 넘기고 본인이 챙기어 함게 일하던 인원들 식사비와 수고비를 주기도 하고 한참 젊은 나이에 본인 욕구 해소에 사용하였다.
전쟁 직후라 집이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 초가집에 보통 아가씨가 적으면 3~4명 보통 5~6명은 있었다 한다.
또한 전쟁과부가 많아서 남자는 절대로 부족하고 그런 시절에 윤하사는 술은 한번도 마신적이 없다.
선천적으로 술은 먹지를 못했고 담배는 수없이 피우다 건강문제로 한 20년전부터 끊었다.
이렇게 하여 생긴 돈으로 일부는 땅을 사서 본인 명의로 재산을 만들어 갔다.
"태권도 심사 자유대련에서 절명한 교관, 윤하사는 단증에서 제외"
그때에 전방에 태권도 바람이 불어 태권도 교관을 하게 되었다. 어릴적 함안에서 도장에 나간 것이조금 도움이 되어 발로 차는 것과 주먹은 자신 있었다.
어느날 승단 심사를 한다하여 1급에서 1단을 따기 위해 명단을 넣고 기다리는데 당시 1군사령부 태권도 교관이 2단에서 3단 심사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둘이 자유 대련이 있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2단이란 교관이 방비가 허술하여 그만 윤하사의 발차기에 걸려들어 쓰러지고 엠브런스에 실려가다 숨지는 일이 벌어졌다.
참 어이없는 사건이지만 윤하사는 사건이 책임은 면했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그래서 태권도를 그만두어 승단증이 없다고 한다.
그러다 월남전에 파병을 신청하여 월남으로 들어가 해병대에 배속되어 운전을 했다.
"죽음 앞에서 앞서지 못하는 중대장을 대신해 본인이 앞장서서 진격하다."
중대장이 겁이 많아서 앞으로 나기지를 못한다.
이미 베트콩에게 포위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수송간부인 본인이 앞장 섰다.
이 전투에서 중대 병력이 거의 전사하고 몇 살아남지 못했는데 윤하사는 살았다.
"윤하사, 160$을 가져오라?" 그리고 날아간 미 은성무공훈장!
전투가 끝나고 얼마 있어 인사과장 송소령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인사과에 가보니 훈장이 나오는데 160$을 내야 된다고 한다.
"아니 무슨 돈내고 훈자을 받습니까?"
"그러는게 있어. 돈을 준비해 와라."
"그렇게는 못 합니다. 안 받으면 말지 돈내고 받는 훈장 싫습니다."
"너 후회한다."
"후회 없습니다. 줄거면 그냥 주시고 아니면 마십시요."
이렇게 해서 그 훈장은 인사과장이 가져가고 윤하사는 목숨만 건졌다.
월남전에서 들어와 92포병대대에 근무하는데 무장탈영병이 발생한다.
B포대 인원이 총을 휴대하여 실탄을 장전하여 본인을 괴롭힌 고참병을 잡아 오라며 대대장 인사과장 정보장교등 여럿의 간부들이 인질처럼 그의 총구 앞에 안정부절 하고 있다.
"5분의 시간을 주겠다. 그때까지 잡아오지 않으면 바로 갈겨버리겠다."
"지금 10시 35분 11:00까지다."
"여기 담배 한개비 피우고 참 기다려 달라." 인사과장 송대위가 담배에 불을 붙여 앞으로 진출하려 한다.
"개수작 무리지말아요, 한 발만 더 오면 쏘아 버립니다."
"4분전~!"
윤중사가 나섰다. 죽기아니면 살기다. 월남전에서 그 베트콩의 공격에서도 살아 났는데 말이다.
"조 상병, 그러지 말고 지금 찾고 있으니 좀 시간을 연장해 주라"
담배를 한개비 불을 붙여 길게 손을 내밀어 준다
벌써 무장탈영에 인질극이 벌어졌다고 상부에 보고 되어 난리가 났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가슴만 타고 있다.
그런데 조상병이 담배를 받으러 손을 내민다.
한손에는 실탄이 장전된 총을 휴대하고 손을 내미는데 이순간 한방에 저 총을 떨어뜨려야만 해결되고 그렇지 않으면 다 죽는 절대절명의 순간이다.
"얖, 총을 잡고 있는 손목을 내리치고 덮쳤다."
아무런 피해없이 무장탈영병을 잡았다.
모두가 놀라서 어떻게 된것인가 의아해 한다.
"그래도 한 때는 태권도 교관이었습니다."
이래서 또 한차례 훈장이 하나 나왔는데 당시 인사과장이 갑종출신인데 받아갔다.
이미 결혼까지 하여 이곳에 살고 있었는데 당시 지휘관과 인사과장이 찾아와서 만나려 했으나 아이들만 만나고 돌아갔단다.
분인은 어디 잠시 떠나가 있었는데 선물꾸러미를 놓고 갔다.
그런 인사장교가 대령까지 달고 얼마전까지 근무하다 이제는 연락이 두절 되었다.
한번의 롯토 당첨과 연금복권 2등 당첨되다.
전역하고 카고를 한대 구입하여 이곳에서 나는 농산물을 직접 의정부에 실고 가 중개상에 넘기는 장사를 했다. 그런데 어떻게 신용도가 인정되어 당시 의정부에서 꽤나 큰 중개상을 독점하게 되어 이익이 많이 생겼다.
당연히 그 중개상 여사장님과 친분이 쌓이고 정마저 들게 되었는데 돈이 많다보니 그 남편분이 바람둥이라 문제가 많았다.
그 많던 재산도 아파트 분양사업을 한답시고 다 날려 먹었단다.
하지만 여사장이 악착같이 일하고 남편을 다독거려 다시 중개상이 제자리를 찾더니 남편분이 죽어서 인생사 새옹지마를 느끼게 되면서 여사장과의 로맨스는 계속 되었다.
여사장이 믿게 된 동기는 속이지 않는 진실된 모습에 반했다고 한다.
통상 물건을 대량으로 넘기다 보면 걷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속은 상품가치가 없는 것이 종종 있기 마련인데 한번도 그런 적이 없이 꾸준히 물건을 대주던 것이 정이 되었다.
그러다 차량 사고가 나기도 하고 믿었던 동료가 돈을 먹고 잠적해 버리기도 하고 별별 사건을 격으면서 한번도 누굴 원망하거나 배반하지 않았다 한다.
"세상사 모두가 돌고 도는 것인데 지나간 일에 얽매이지 말고 지금에 최선을 다하고 남에게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주게 되면 분명 돌아온다는 것이 지금까지 살아온 윤하사의 좌우명이다."
살아보니 절대로 죽지 않는단다.
전쟁터에서도 살아났고 한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지만 영어는 전쟁 통에 하게 되었다.
무식쟁이가 미군부대에서 어느날 포병검열을 나왔는데 뭐라고 하는데 영어를 아무도 못하고 있는데 윤상사가 해결 하기도 했다.
타고 난 체격에 한번도 게을리 살아 본적은 없다고 한다.
군연금을 받고 야채 장사로 그런대로 살고 있던 어느날 롯토 복권 열풍이 불었다.
그래서 본인도 한 번 몇 장 구입했는데 그만 일등이다.
이거 정말 하루아침에 난리가 났다.
아무 말없이 서울에서 돈을 받아서 그 자리에서 3녀1남의 자식에게 똑같이 분배하여 주고 말았다.
본인은 이곳에 사는 농지세 얼마내는 것만 변재하고 말이다.
살다보니 일확천금이 들어온 것이다.
또 그러다 연금복권을 쌌는데 2등이다.
아니 이렇게 운수가 대통이라니 그 두 번의 훈장을 받지 않은 것이 행운을 준것이라 행각한다.
이번에는 돈으로 하여 대부분을 그 복권가계 아주머니에게 다 주어 버렸다.
어느정도 있으면 남에게 줄지도 알아야 한다고 한다고 하신다.
지금 연금에 월남 고엽제 6급에 따른 상이연금과 6.25참전수당등 한달에 500만원이나 들어와 혼자 사는데 풍족하다고 하신다.
딸들은 미국에도 살고 막내인 아들은 연세대를 나와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지금은 특허청에 근무하고 있단다.
아쉬운 것은 할머니가 얼마전 세상을 떠난 것이 아쉽고 한참 시절에 할아버지 품에 안겼던 여인들이 떠나고 일부는 젊은 사내 만났다고 즐겁게 사는 모습이 아름답다 한다.
세상 빙글빙글 도는데 시름없이 살았다 한다.
눈감았다 못 일어나면 그만인데 딸 자식이 잘 되어 있고 본인이 아직 차를 몰고 다니며 목욕탕에도 오고 재행군인회 행사에도 참여하는 지금이 행복이고 보람이라 하다.
그러면서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해야 한다고 한다.
지나고 나면 다 이해되고 용서되는 것들이라며 그 순간의 욱하는 성격을 버려야 오래산다 한다.
욕심으로 돈을 벌려고 해서 버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운명처럼 오는 것이니 열심히 살아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