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지만, 어떤 학생이 수능에서 전국 수석(2004학년도 재학생 수석은 익산고의 고인성)을 했다고 하자. 그러면 한국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머리가 대단히 좋군. 수재야, 아니 천재야. 어릴 때부터 달랐어. 아니, 태몽부터 예사롭지 않았어."
그러나 SAT에서 만점을 맞으면 미국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노력을 많이 했군."
언젠가는 과학분야에서 노벨상이 나오겠지만, 한국인에겐 요원하다. 그럴 풍토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학고와 과기대, 포항공대가 희망이지만, 입시 제도가 큰 걸림돌이다. 우선 과학고에서 필기시험 대신 거의 내신으로 뽑기 때문에 중학교 때 전과목에서 3년 동안 거의 만점을 맞아야 한다. 여기서 머리가 일차로 굳어져 버린다. 조기졸업으로 과기대와 포항공대에 들어갈 수도 있지만, 이미 과학고는 서울대나 의대를 목표로 하는 학생이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영재의 머리가 다시 굳어져 버린다.
천재의 싹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천 명에 한 명 정도는 있다. 문제는 이 싹을 키워 주는 풍토다. 조선시대에는 절대 뉴턴이 나올 수 없고 북한에선 절대 정주영이 나올 수 없다. 그런 천재는 일찌감치 싹을 잘라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천재의 싹이 있는 줄을 본인은 물론 그 누구도 모른 채 그는 그냥 그 시대와 사회에 적응해서 일생을 마치게 된다.
'닫힌 사회'에서는 천재가 클 수가 없다. 사람들이 원하는 수준에 머물고 말기 때문이다. '열린 사회'에서만 천재가 이따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치열한 경쟁과 협동을 통해 뭇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서 그것을 조금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천재와 영재의 차이는? 영재와 수재의 차이는? 그 차이는 미미하다. 그러므로 누구를 천재라고 부르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또한 '닫힌 사회'의 천재는 성인이 되면 거의 범재로 전락하기 때문에 '열린 사회'의 수재보다도 훨씬 못하다.
바둑의 변방국이던 한국이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 이세돌, 박영훈, 송태곤, 최철한 등을 차례로 배출하면서 10년 이상 세계에 우뚝 선 것은 정말 경이적인 일이다. 경제성장과 민주화(넓은 의미, 해방 이후 부단히 발전되었지 이른바 민주화 세력에 의해 독점적으로 발전된 게 전혀 아님, 그들도 일부를 담당했을 따름임)로 바둑만 두고도 먹고 살 수 있는 '열린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우리와 동시대의 북한이나 우리 조상이 살았던 조선과 시공간 양쪽으로 비교해 보면 이 말의 진위는 금방 드러난다. 더욱이 우리 바둑 영웅들은 대부분 고사리 손일 때 발굴되어 그 분야로 모든 머리가 집중적으로 계발될 수 있었다. 중국도 문화혁명의 악몽을 지나고 개혁하고 개방하면서 비로소 바둑 인재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었다. 바둑에도 '열린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한국이 단시간에 일본과 중국을 뛰어넘을 수 있었을까? 이창호 한 사람 때문에? 맞는 말이지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한국이란 고유한 풍토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문화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일본은 무사 사회다. 무사 사회이되 세계로 뻗어간 적은 한 번도 없다. 전국이 무력으로 통일된 16세기말과 산업화에 성공한 19세기말에서 20세기 전반이 일본으로선 절호의 기회였으나 두 번 다 호기롭게 정복의 길로 들어섰지만 역부족으로 물러났다. 이렇게 좌절되었기 때문에 일본은 형식을 중시한다. 다시 말해서 에너지를 외적으로 발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열도 안에서 더 이상 칼을 휘두르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칼은 더 이상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를 노려만 보는 상황이다. 그래서 남에게 절대 폐를 끼치면 안 된다. 만약 그 선을 넘으면 목숨을 건 결투가 벌어진다. 이것은 영주(대명)가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지금도 이것이 체질화되어 일본인은 싸우지 않는다. 목소리도 높이지 않는다. 일본인은 항상 웃음을 띠고 있지만, 스트레스를 배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긴장 속에 살아간다. 한국인은 그래서 일본에 가면 답답해서 미친다.
일본은 무사의 칼이 검도와 유도와 가라테 등 스포츠로 발전한다. 항구의 개방 이후엔 무사의 칼이 야구, 축구, 수영, 육상 등 근대 스포츠로 확대된다. 일본에서는 무사의 전통 때문에 스포츠는 누구나 하는 것이다. 그 저변이 엄청나다. 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과 중국은 일본에 상대가 안 되었다. 그러나 한국이나 중국이 운동을 안 할 때 말이지, 일단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일본을 금방 따라간다. 일본의 약점은 형식을 중시하기 때문에 창의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만약 일본이 16세기말, 17세기초에 한국과 중국을 삼켜 버렸거나 중일전쟁에서 중국을 이기고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을 이겼다면, 그들은 창의력이 만개했을 것이다. 칼을 스포츠가 아니라 전쟁에서 마음껏 휘두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지로 그들이 전쟁에서 진 것도 창의력 부족이었다. 이순신의 창의력과 맥아더의 창의력에 그들은 연전연패했던 것이다.
일본의 400년 바둑사도 전설의 4대 가문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제도가 없었던 한국과 중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열린 사회'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부의 재주 있는 사람에게만 열린 사회였다. 그들보다 뛰어난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근처에도 못 가고 그 재주를 썩혔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끼리 아무리 치열하게 경쟁했다고 해도 거기에는 상상력이, 창의력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주 더디게 조금씩 조금씩 발전했을 게 틀림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바둑계의 '장인'이었지, 바둑계의 '황제'가 아니었다. 황제는 잠재력이 있는 모든 사람이 신분이나 계층에 상관없이 어릴 때부터 똑같이 경쟁하며 협동할 때, 그 중에서 일인자가 태어날 때 탄생하는 법이니까. 일본의 400년 기보를 다 합해도 오늘날 한중일 3국에서 쏟아져 나오는 4년 기보의 양도 안 될 것이다. 한국기원 연구생들이 10년 연구한 것만 쌓아도 그들의 400년 기보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은 재능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지역과 신분과 계층에 관계없이 한데 모여 공부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바둑에 거의 완전히 '열린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선비의 사회요, 붓의 사회요, 입의 사회다. 붓으로 찔러 봐야 옷에 먹물만 묻는다. 보기에 좀 흉할 따름이다. 그래서 마음놓고 입으로 욕하고 비난하고 헐뜯고 음담패설을 늘어놓는다. 죽인다는 말을 예사로 하지만, 파리 한 마리 못 죽인다. 술도 마음대로 마신다. 2차는 기본이고 3차, 4차는 가야 한다. 고주망태가 되어도 아무도 안 잡아간다. 술 주정하면 칼로 단숨에 베어 버릴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한국인은 그래서 브레이크가 없다. 싸웠다 하면 죽기 살기로 싸운다. 어릴 때부터 어리광부리고 떼쓰는 데 다들 도가 튼다. 어느 분야든 풀어놓으면 '제 멋대로'이다. 여기서 '창의력'이 싹 튼다. 또한 싸움에서 실력 못지 않게 중요한 '기'가 세어진다. 한국인은 어릴 때부터 '기' 죽는 것을 제일 싫어하기 때문이다. 공중도덕이고 법이고 자식의 '기' 죽이는 것은 한국인은 용납하지 못한다. '기'가 셀 수밖에 없다.
한국 축구가 일본과 중국에 강했고 강한 이유도 바로 이 '창의력'과 '기' 때문이다. 공은 둥근데 일본인은 공을 모나게 차려고 한다. 포지션을 잘 지키고 감독 말을 잘 듣는다. 한국인은 그렇지 않다. 대체로 공을 둥글게 차지만, 네모나게도 차고 세모나게도 찬다. 포지션도 잘 안 지키고 감독 말도 예사로 어긴다. 그리고 어찌나 '기'가 센지 죽기 살기로 덤빈다. 이걸 우린 흔히 투지라고 불렀다. 실력이 확 차이나면 5:0으로 지지만, 실력이 엇비슷하면 1:0으로 이기거나 1:1로 비긴다. 신나면 3:0으로 이긴다. 강팀도 곧잘 이긴다. 그러나 '기'가 죽으면 비슷한 팀한테도 6:2로 진다. 바둑에서도 이게 잘 나타난다. 한국인은 누구나 '창의력'이 뛰어나고 '기'가 세다. 제 멋대로 자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기응변'에 강하고 '싸움 바둑'에 강하다. 떼쓰는 데 도가 터서 조금만 틈만 보이면 죽기 살기로 덤비기 때문이다. 뺨 한두 대 맞아도 끄떡도 않고 욕 한두 번 얻어먹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울면서도 통박을 굴리고 한 덩이 떡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간다.
중국은 군자와 상인과 도적의 사회요, 허풍의 사회요, 돈의 사회다. 군자가 따로 없고 상인이 따로 없고 도적이 따로 없다. 허풍은 누구나 잘 떤다. 누구나 돈을 밝힌다. 전쟁은 많았지만, 실지로 전쟁은 잘 못한다. 한 줌밖에 안 되는 오랑캐가 쳐들어오면 맥도 못 추고 허풍만 치고 돌아서서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수도 없이 적의 칼에 목이 달아난다. 나라를 통째로 빼앗긴다. 몽골족한테 100년, 만주족한테 260년, 변방이 아니라 통일국가의 식민 지배를 받은 것만 해도 400여년이다. 춘추전국 시대와 삼국 시대, 수당 건국 시에 이들은 가장 잘 싸웠다. 그러나 그 후에 평화가 다시 수백 년 지속되었기 때문에 칼이 다 녹슬어 버렸다. 청구(靑丘)나 열도와는 달리 중원에는 먹을 게 많아서 피 터지게 싸울 필요가 없었다. 대신에 나라가 워낙 크다 보니까 전시든 평화시든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워 자기 목숨은 자기가 지켜야 했다. 군자와도 사귀어야 하고 상인과도 사귀어야 하고 도적과도 사귀어야 했다. 스스로 군자도 되고 상인도 되고 도적도 되어야 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의리'가 가장 중요하다. 친구를 위해서는 처자식도 죽일 수 있고 자기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사회가 중국이다.
이런 전통 때문에 중국인은 바둑도 죽기 살기로 두기 어렵다. 그렇게 아등바등하는 게 체질에 안 맞다. 다짜고짜 칼을 휘두르면 군자는 주춤하고 상인은 흥정하고 도적은 도망간다. 먼 미래를 내다보고 마지막 승리는 자기 것이라며 다음을 기약한다. (실지로 긴 세월을 두고 보면 이들이 승리한다. 이게 정말 무섭다. 중국은 동북공정이란 말을 내세워 과거 역사를 새로 쓰는 척하면서 무인지경인 압록강과 두만강에 군사 1만 5천을 배치하고서 지금 북한을 노리고 있다.) 창의력이 일본보다는 낫지만 한국에는 뒤떨어진다. 창의력은 기본적으로 무엇이 부족해야 생기는 법인데, 중국은 별로 부족한 게 없기 때문이다.
대신 중국은 넓고 크다.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다. 여기에 중국의 가장 큰 저력이 있다. 어딘가에 기인이사가 숨어 있게 마련이다. 가끔 천하를 놀라게 하는 천재가 나타난다. 비록 일본에서 기재를 꽃피웠지만 살아서 전설이 된 오청원과 중일 슈퍼바둑 대회 때의 섭위평이나 조치훈과 후지쓰배 결승을 앞두고 홀연히 사라진 전우평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대개 이런 사람은 생명이 길지 못하거나 비교하기 곤란한 전설의 구름 속에 있다. 돌출적인 천재이거나 주변의 다른 나라에서 천재성을 지닌 사람들이 그 재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에 맹주로 군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미 한 3년 빛나던 천재성이 사라진 후에도 자기가 유일한 천재라며 허풍을 떠는 섭위평을 보면 과연 중국인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중국에서 진짜 천재는 정치계에 나타난다. 세계 인구의 5분의 1을 통치할 그릇은 중국이란 대국이 아니면 그 천재성을 기르기 힘들기 때문이리라. 겉모습은 우습게 보이지만, 한 고조 유방이나 명 태조 주원장도 저 넓은 중원에서 수백 년만에 한번 태어나는 정치의 천재이다. 현대의 모택동과 등소평도 정치의 천재이다. 그 깊고 넓은 속은 누구도 들여다보지 못한다. 어떤 잣대로도 그들을 거의 잴 수가 없다.
학문과 경제에 대해서 '열린 사회'인 미국에서 천재가 부지기수로 나타나서 노벨상을 휩쓸고, 세계 특허를 독과점하면서 세계표준을 휩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보통 사람도 그런 '열린 사회'에서는 아주 좁은 한 분야지만 어느 한 분야에서 천재로 자랄 수 있다. 최대한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영재 교육도 중시하지만 보통 교육도 중시한다. 어디서 천재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함부로 천재란 말을 쓰지 않는다. 노벨상을 받아도 천재란 말은 극도로 아낀다. 노력을 더 중시한다. 또한 하나하나 분석하고 체계화해서 그들을 따라 배운다. 그러면 보통 사람도 천재와 버금가게 된다. 전통이 축적되고 그를 바탕으로 계속 인재가 쏟아진다.
대신 한국은 천재를 숭배한다. 노력보다는 타고난 팔자와 재주를 중시한다.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 천재를 따라 배우려 하지 않는다. 전통이 없다. 지나면 모두 새로 시작해야 한다. 이순신 장군을 숭배하는 사람은 엄청 많지만, 그분의 전략전술과 지도력을 배울 생각을 않는다. 그가 위인전기에는 꼭 등장하지만, 성인용 책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모르기 때문이고 배울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그분은 천재일 뿐이다. 하늘이 낸 인물일 뿐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그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기도의 대상일 뿐이다.
바둑계에서 한국의 고질적인 병폐를 없앴다. 거기선 누구도 천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천재로 인정하길 대단히 꺼린다. 천재라 자처하다가는 뼈도 못 추린다. 하늘 높은 고수라 해도 전혀 기죽지 않고 숨구멍이 아직 덜 여문 아이조차 그의 기보를 샅샅이 분석하여 배우고 감히 고사리 손을 내밀고 도전한다. 일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경쟁한다. 경쟁할 뿐만 아니라 공동 연구라 하여 협동도 경쟁 못지 않게 잘한다. 대신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날 때는 사부, 선배, 형, 아우를 깍듯이 대접하고 챙긴다. 조훈현은 꼭 후배들을 1년에 한번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흥겹게 지낸다. 미국이 '학문에 대해 열린 사회'라면 한국은 '바둑에 대해 열린 사회'이다. 인재가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국은 인간미가 있다. 바둑은 바둑, 인간은 인간이다. 삭막한 미국의 학계보다 훈훈한 한국의 바둑계가 훨씬 낫다.
이창호는 한국의 문화가 거의 긍정적인 측면으로만 작용하여 배출한 걸출한 인물이다. (한국의 문화가 거의 부정적인 측면으로만 작용하여 배출한 인물들은 정치계에 김포 매립지의 쓰레기처럼 그득하다.) 그는 한국의 장점을 골고루 몸에 익힌 큰그릇이다. 전통과 현실을 접목시켜서 '미래의 문'에 한 발을 먼저 들여놓은 사람이다.
그 미래의 문은 바로 '확률'이다.
조치훈의 바둑 철학에 대해 '이기는 철학'이라고 하는 데서 그는 바둑에서 '확률'의 의미를 가장 먼저 안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반 집과 끝내기도 '운'이나 '대세'에 맡기지 않고 한국인특유의 집요함과 창의력으로 현대의 '확률'로 끌어내린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읽고 찾아내어 가장 높은 '확률'의 길을 간다. 항상 반상 전체를 바라본다. 부분적인 모양과 손실은 전체의 조화를 위해서 기꺼이 양보한다. '확률의 미학'으로 보면 그의 바둑은 가장 아름답다. '운명이나 행운의 미학'으로 보면 그의 바둑이 때로 흉하거나 평범해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남들이 '신고전파'나 '후기 낭만파'에 머물러 있을 때 남 먼저 불협화음과 무조음이 뒤섞인 현대 음악으로 옮겨간 사람이다. 소리의 지평선을 넓힌 것이다. 남들이 '사실주의'나 '인상파'에 머물러 있을 때 과감히 '입체파'로 옮겨간 사람이다. 선과 색의 지평선을 넓힌 것이다. 피카소가 사실적인 그림을 못 그려서 동그라미 세모 네모를 동원했을까. 그는 젊었을 때에 사진보다 정교한 그림을 그렸었다. 마찬가지로 이창호가 몰라서 남들이 다 아는 수를 두지 않았던 게 아니다. 피카소가 그림에 입체의 형태로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인간의 내면을 담았듯이 이창호는 '평면의 반상을 입체의 반상'으로 바꾸었다. X축과 Y축에 이어 홀로 Z축을 더 그려놓은 것이다. 그래서 이창호의 '바둑 미학'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경이적인 승률로 10년간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서서히 그의 미학을 이해는 못해도 따라 배우게 되었다. 이제 자기도 모르게 한국은 거의 그의 '확률' 바둑을 둔다. 중국이 뒤따라오고 일본도 서서히 그 뒤를 따라 이창호의 '확률'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과히, "세계가 이창호 뒤를 따른다."
일찌감치 남 먼저 '확률' 바둑을 두었기 때문에 그는 국내 기전이나 국제 기전이나 거의 똑같이 80%에 육박하는 경이적인 승률을 자랑한다. 천재는 100%이겠지만, 그건 보통 사람이나 수재나 영재가 제 능력을 개발하지 않았을 때 이야기이다. 천재 바로 아래의 영재, 그 바로 아래의 수재가 천재 못지 않게 노력할 때 100%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신 70~80%의 '확률'은 가능하다. 이창호는 바로 이 '확률'의 길을 어릴 때부터 뚜벅뚜벅 걸어갔다. 아무도 그가 가는 길을 몰랐다. 그래서 그는 때로 둔재나 범재로 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2004. 7. 4.)
*인류 역사상 천재를 딱 한 사람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이순신 장군을 들겠다. 멀리서 조총 소리만 들어도(임금과 그 가족, 조정대신이 새벽에 쥐새끼처럼 성문을 빠져나가고 이를 안 백성이 궁궐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일삼아 천연요새 한성이 순식간에 폐허가 된 후에 한강을 지키던 겨우 1,000명의 조선군은 왜병이 몇 명 한강에 뛰어들어 수영으로 건널 흉내를 내자 도원수 김명원을 필두로 혼비백산 한 명도 남김없이 달아나 버렸다.) 너나없이 간이 콩알만해져서 달아나는 '붓의 나라'에서 그는 '홀로' '큰 칼'을 차고 '홀로' 군량과 무기와 전선을 마련하고 전라좌수영보다 두 세 배 컸던 경상좌수영, 경상우수영 등 왜병이 나타나면 싸움 한 번 안 하고 장수가 맨 앞장서서 다 달아났지만, '홀로' 군사들이 한 명도 달아나지 않게 다독거리고(명량대첩 때는 군사도 한 명 한 명 직접 모아야 했음), 철저한 훈련과 치밀한 '정보' 분석과 빈틈없는 전략전술과 불굴의 용기와 군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까지 사로잡는 경이적인 '따스한' 지도력으로 싸우면 언제나 '퍼펙트승'을 했다. 적선을 무려 935척이 불태우거나 깨뜨렸지만, 우리 전선은 단 한 척만 잃었을 뿐이다(최석남-구국의 명장 이순신). 그것도 한 장수가 그의 말을 안 듣고 해안 너무 가까이 갔다가 좌초된 것이다. 승률 100%에 손실 0.001%였다. 천재는 모름지기 이런 분이 천재다.
(일본에는 유도에 천재가 한 명 있다. 500년만에 한 번 날까 말까 한다는 무제한급의 산하태유[야마시타 야스히로]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고등학교 때 전국 대회에서 딱 한 번 지고 국내 대회든 국제 대회든 모조리 승리하여 203연승을 했다. 그리고는 은퇴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에겐 비길 수가 없다. 일본은 유도에 '열린 사회'였지만, 조선은 칼에 '닫힌 사회'였기 때문이다.)
첫댓글 이 또한, 군사게시판이 아니라... 다른 게시판이 적절할 듯 싶네요.
그리고, 출처는 밝히는게 글 쓰신분에 대한 예의죠. 알고 계시면서 비밀로 한다는 건 뒤가 구려서인가요?
여기다 올린것보니 비밀인가 보죠. 비밀에서 퍼온글은 죄다 내용과 관계없이 군사게시판이다 라는.... 그건 그렇구 이제 게시판 통합된겁니까? 모르고 하신일인지 알고도 꾸준히 하시는일인줄 몰라도 웬만하면 게시판좀 구분합시다 군사지기님
경제게시판에서는 정치적인글 올린다고 한소리 듣고계시더만 님도 참 어디에다 올릴지 구별이 안되시는가 봅니다. 읽어나보고 올리시면 그래도 대충 답이 나올텐데...
이글은 좀 너무 갖다 붙인 것같네요. 솔직히
군사 지기님 이런글에 혹할정도로 군사 게시판의 수준이 낮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이런식의 글은 주로 짱깨놈들이 자기네들 자화자찬 할때 쓰는 방식이죠...
80년대 글 올리지좀 마세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