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은행나무 / 석위수
조선시대 사립 교육기관이었던 서원은 내 관심사다. 한글보다 한문을 먼저 깨우친 유년기의 기억 때문이리라. 한학자이신 조부님은 글공부 도중에 서원의 내력과 이로 인한 문중(文中)간의 세(勢) 대결양상 이야기를 종종 들려주셨다.
2023년 《수필과 비평》 하계세미나 계획표에 도동서원 탐방 계획이 들어 있기에 즉시 참가 신청을 했다. 인터넷을 뒤지며 서원 내력을 찾아보는 중에 서원 입구에 있는 500년이 넘었다는 은행나무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세미나 이튿날 오전, 서원에 도착했다. 무더위도 잊은 채 입구에서 전체를 바라보니 건물들은 본래의 모습에 가깝게 재건축이나 보수로 잘 유지되는 것 같았다. 서원 입구 왼쪽에 대장군 같이 우뚝 서 있는 은행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다른 지역에서 본 나무와는 형체가 많이 달랐다. 위로 치솟은 것이 대부분인데 옆으로 벌어져있었다. 토질이 좋아서라는 설과 낙동강가라 물이 풍부해서라는 설도 있다고 해설사가 설명했다. 여러 개의 인조 보조 기둥이 굵은 가지들을 바치고 있었다. 장엄하면서도 애처롭게 보여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큰 산을 넘어 수죽2리(속명은 대방이)에 있는 고목 은행나무가 늦가을이 되면 또래들 만남의 명소였다. 하트 모양의 짙은 노란색 잎을 주워 책갈피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은행나무 묘목을 구해 우리 집 장독대 옆에 심었다. 토질과 수분이 성장하기에 좋은 탓인지 잘 자랐다. 결혼할 때쯤엔 둥치 직경이 15센티 정도 되는 제법 큰 나무가 되었다. 아내가 신행 왔을 때 자랑했다.
“이 은행나무는 초등학교 때 내가 심었다오. 노란 잎을 책갈피 하려고 심었었는데 성장 속도가 빨라서 걱정이라오. 10년만 더 지나면 그늘이 지붕을 덮어 기와 수명을 단축시킬까봐 걱정이네요. 은행나무를 심기 전엔 그 자리에 수양버드나무를 심었더니 성장 속도가 너무 빨랐어요. 늘어진 줄기들이 장독대를 덮을 기세라 집 앞 공터로 옮겼지요. 여름철에 소를 매어 놓았더니 뿌리가 흔들려 죽어버렸던 아픈 기억도 있다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새색시는 은행나무를 만지며 은은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너는 무슨 나무든 심기만 하면 잘 자라는구나. 손기술이 뛰어난 건지 정성으로 돌봐서 그런지 참 신기하다”고 어머니는 종종 말씀하셨다. 버드나무에 이어서 은행나무도 잘 자라니 대견스러웠나 보다.
부모님 생전, 생신이나 명절에 고향집에 가면 자식들에게도 자랑 했다. 단풍철엔 노란 잎이 탐스럽고 꼿꼿하게 자라는 특징까지 설명하면 아이들은 이해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고향집을 지키던 동생 부부가 도시로 떠나니 60년 이상 된 빈 집은 빠르게 낡아 보기에도 초라했다. 태풍이 부는 날이면 쓰러질까봐 노심초사했다. 젊은 시절, 부모님이 일본에서 힘겹게 돈을 벌어서 건축한 집이라 자손대대로 보존하고 싶었다.
서까래와 집 외형만 살려 재건축하기로 결론을 내고 나니 은행나무는 위치할 곳이 마땅치 않아 고민하다 집 앞 담장 가까이에 옮겨심기로 했다. 새로이 건축한 멋진 기와집은 조부님의 호를 딴 손자들 명의의 종중 재실로 등기까지 마무리했다.
은행나무는 무성한 가지를 쳐내고 굴삭기를 동원해 옮겨 심었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잘 안착했다. 가을철 샛노란 잎으로 단풍이 들 땐 어릴 적 추억이 파노라마가 되어 감성을 자극했다. 다시 성장의 속도를 찾을 즈음 뿌리가 담장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염려의 말들이 오갔다. 고민 끝에 정원사를 초빙하여 안락사 시켰다. 이제는 둥치와 앙상한 가지들만 남아있다. 고사목 가지 끝에 매달려 있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내 생전동안 기억하리라.
도동서원 앞의 은행나무를 보니 회한이 엄습해 왔다. 자손대대로 물려 줄 고향집인데 일순간의 짧은 생각에 어리석은 결정을 한 것 같아 후회스럽다. 몇 백 년 후의 후손들이 33대 조부가 손수 심은 은행나무를 보고 즐기면서 노란 은행잎은 주워 책갈피로 쓸 수도 있을 고귀한 기회를 빼앗은 것 같다.
몇 년 전에 아내의 권유로 대봉 감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아내는 은행나무 꼴이 될 수 있다며 화단의 좁은 곳에 심지 말자고 제안을 했건만 묵살한 것이 후회가 된다. 언젠가는 대봉 감나무도 거목이 될 터인데...
벌써 불안이 밀려온다. 묘목일 때만 생각하고 곁에 있는 은행나무 일생을 타산지석으로 삼지 않았던 어리석음을 탓한다.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어디 한 두 가지랴. ‘버스 놓치면 택시 타면 된다.’는 신조어가 생각난다. 후손들에게 물려줄 더 멋진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를 기대해 본다.
첫댓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