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龜村先生文集/ 유명조선국 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류공묘갈명 병서
有明朝鮮國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柳公碣銘 幷序
융경(隆慶) 5년(1571년 선조 4년) 5월에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유공(柳公)이 장계(狀啓)하기를, “신은 병이 심하여 직무를 볼 수가 없으니, 돌아가 서울에서 죽기를 원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련하게 여기고 허락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고쳐 제수하였는데, 공이 병으로 들것에 실려 돌아오다가 장단부(長湍府) 초현리(招賢里) 민가에서 졸(卒)하였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임금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달려가 관(棺)을 내려 염(殮)을 하게 하고, 상여가 성(城) 밖에 이르자 조부(弔賻)를 의례대로 내리고 연로(沿路)에서 그 상여를 호위하여 돌아가게 하였다. 11월에 안동(安東) 천등산(天燈山) 선영(先塋) 곁에 반장(返葬)하였다. 18년 후에 묘석(墓石)이 갖추어지매 족질(族姪)인 전(前) 예조 판서(禮曹判書) 류성룡(柳成龍)이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공의 휘(諱)는 경심(景深)이요, 자(字)는 태호(太浩)이다. 휘 백(伯)ㆍ휘 난옥(蘭玉)ㆍ휘 보(葆)는 모두 고려(高麗) 때 벼슬하였고, 휘 종혜(從惠)는 우리 조선에 들어와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전서의 아들은 사정(司正) 휘 홍(洪)이요, 사정의 아들은 호군(護軍)으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된 휘 소(沼)인데 이분이 공의 증조이다. 할아버지 휘 자온(子溫)은 진사(進士)로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추증되었고, 아버지 휘 공권(公權)은 공조 정랑(工曹正郞)으로 공이 귀하게 되어 가선 대부(嘉善大夫)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는 영양 남씨(英陽南氏)이다.
공은 사람됨이 호탕하고 준걸스러워 어려서부터 이미 우뚝하여 두각(頭角)을 나타내어 과거 시험장에서 글을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정유년(丁酉年, 1537년 중종 32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갑진년(甲辰年, 1544년 중종 39년)에 처음 벼슬하여 승문원에 선보(選補)되었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ㆍ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천수(薦授)되었다. 권 충정공(權忠定公, 권벌(權橃))이 원상(院相)으로 승정원에 들어와 공이 민첩하여 막힘이 없는 것을 볼 때마다 “유씨 집안에 훌륭한 자식을 두었다.”고 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문유(文儒)의 책문(策問) 시험에서 공의 대책(對策)이 1등이었다. 공조 좌랑으로 있다가 사간원 정언으로 옮기니, 화려한 명성이 떠들썩하였다.
정미년(丁未年, 1547년 명종 2년)에 예조 좌랑을 거쳐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는데, 당시에 국정을 쥐고 있던 권간(權奸)이 을사 사화(乙巳士禍)가 끝나지 않은 것을 꾸며 위엄을 부리고 있었다. 그가 공이 후진(後進)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것을 보고는 농락(籠絡)하고자 하여 여러 차례 은근한 뜻을 보였으나 공은 더욱 끊어버리고 교통하지 않았으며, 또 그를 위해 응견(鷹犬) 노릇을 하는 자를 만나면 면전에서 꾸짖어 모두 크게 유감을 가졌는데 9월에 대간(臺諫)이 권간의 뜻을 받들어 논핵하여 파직시켰다. 이때부터 공은 시골에서 5년 동안 칩거하였다. 신해년(辛亥年, 1551년 명종 6년)에 회인 현감(懷仁縣監)에 서용되고, 계축년(癸丑年, 1553년 명종 8년)에는 유신 현감(惟新縣監)으로 옮겼다. 병진년(丙辰年, 1556년 명종 11년)에는 사유(師儒)로 징소(徵召)되었으며 얼마 후 호조 정랑(戶曹正郞)ㆍ군기 시 첨정(軍器寺僉正)을 지냈다. 무오년(戊午年, 1558년 명종 13년)에는 종사관(從事官)으로 남변(南邊)을 순행하다가 돌아오기도 전에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종성 부사(鍾城府使)를 제배하였다가 곧 정주 목사(定州牧使)로 고쳐 제수하였다. 윤원형(尹元衡)이 사사로이 공에게 부탁하여 백성을 동원해서 바다에 둑을 막아 전답을 만들게 하려 하자 공이 말하기를, “공사(公事)가 바야흐로 많아서 인력을 줄 수가 없다.”고 하니, 윤원형의 얼굴색이 붉어졌다. 며칠 후 대론(臺論)으로 인하여 그대로 종성으로 부임하니, 당시 공론이 매우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공은 당국자에게 미움을 받아 오랫동안 낮은 자리에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주성(定州城)을 쌓게 되어 공을 천거해 제수한 것이나 마침내 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종성에 있은 지 1년 만에 재상(災傷) 조사를 사실대로 하지 않았다고 하여 파직되었다. 경신년(庚申年, 1560년 명종 15년)에는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되었다.
공의 재능은 마땅하지 않은 바가 없었는데 특히 어려운 고을을 잘 다스렸다. 회인 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현이 매우 잔폐(殘廢)해서 이민(吏民) 역시도 맨몸으로 어찌할 수가 없어 창고에 며칠 분의 비축도 없었다. 공이 그곳에 있은 지 1년 남짓에 고을이 마침내 완실(完實)하게 되었다. 유신현은 호로(湖路)의 가장 큰 고을로 장부와 문서가 복잡하여 전에 수령(守令)으로 온 자들은 정무(政務)에 바빠 밤늦게 밥을 먹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처리하다가 해가 지면 촛불을 밝히고 처리해도 다 마치지 못하였다. 공이 처음 도착하자 신구(新舊) 문서가 어깨 높이까지 차고, 첩(牒)을 가지고 소송을 하러 온 자들이 뜰에 가득하여 매우 시끄러웠는데 공이 자재로 시원스럽게 처리하니, 해가 채 기울기 전에 다 처리하고 손님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활을 쏘며 즐겼다. 그러자 늙은 아전들이 모두 놀라며 전에 없던 바라고 하여 빛나는 정사가 더 드러났으며 의지할 데 없는 자를 보살펴 주고 강호(强豪)를 채찍질하니, 경내가 숙연해졌다. 임기가 차서 돌아오는데 어떤 사람이 공이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되었다고 잘못 전하였다. 나주의 아전 가운데 집 규모가 제도를 넘는 자가 있었는데 매우 걱정하다가 즉시 헐어버렸으니, 위엄있는 명령으로 사람을 복종시킴이 이와 같았다.
계해년(癸亥年, 1563년 명종 18년)에 재차 정주 목사가 되었다가 얼마 후 의주(義州)로 옮겨서는 창고의 남은 곡식을 내어 네 문에 옹성(甕城)을 쌓았다. 1년 만에 회령 부사(會寧府使)로 승진하여 곧 북도 절도사(北道節度使)가 되었다. 서울로 돌아와서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정묘년(丁卯年, 1567년 선조 즉위년) 6월에 빈전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를 겸하여 대행왕(大行王)의 상사(喪事)를 다스렸는데 모두 즉시 처리하였다. 이때 새 황제(皇帝)가 등극(登極)해 조사(詔使)가 오게 되어 조서(詔書)를 맞이하는 복색(服色)을 의논하면서 모두 흰색으로 하고자 하였는데, 공만이 혼자 말하기를, “조서를 반포하는 것은 천하의 큰 경사이니, 하국(下國)에 국상이 있다고 하여 이를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권도(權道)를 써서 길례(吉禮)로 해야지, 그렇지 않다가는 중국인의 비웃음을 살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얼마 후에 ≪두씨통전(杜氏通典)≫의 설을 얻어보니, 공의 말과 대략 같아서 의논이 드디어 정해졌는데 공의 밝고 통달한 지식이 이와 같았다. 9월에 경사(京師)에 가서 성절(聖節)을 하례하였다.
무진년(戊辰年, 1568년 선조 원년)에 호조 참판으로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官)을 겸하였고, 10월에는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 되니, 퇴폐한 기강이 거의 진작되게 되었는데, 어떤 일로 인하여 면직되었다. 신미년(辛未年, 1571년 선조 6년)에 병조 참판이 되었다. 3월에 서도(西道)에 방백(方伯)이 결원이 생겨 조정에서 서쪽 변방을 걱정했는데, 중의(衆議)가 공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여 마침내 공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이때 공은 이미 병이 나서 가마를 타고 가다가 즉시 돌아오는 길에서 더 위독해져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듣는 자들이 모두 슬퍼하고 탄식하면서 나라가 인재를 잃었다고 말하였다. 죽음에 임해서도 집안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정신이 조금도 흩어지지 않고 또렷하였다.
이에 앞서 아버지 정랑공(正郞公)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갔다가 연경(燕京)에서 죽었고, 부인 남씨(南氏)가 슬퍼한 나머지 몸이 수척해지더니 이어 세상을 떠났다. 공은 형제 가운데 맏이로서 어린 동생과 누이를 양육하여 모두 성인으로 장성시켰고, 우애가 독실하여 사람들 사이에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공은 향년(享年)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은 슬하에 1남 9녀를 두었다. 사위는 전해(全海), 윤대명(尹大鳴), 감역(監役) 양천우(梁天遇), 진사(進士) 장우(張遇), 최확(崔確), 진사 이징(李懲), 정자(正字) 여대로(呂大老), 조당(趙瑭), 이의(李檥)이고, 아들은 유성귀(柳成龜)이다.
전해는 아들이 여섯인데, 전성헌(全成憲)ㆍ전사헌(全士憲)이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고, 딸은 둘인데 하나는 정랑 배응경(裵應褧)에게 출가하고 하나는 사인(士人) 권섬(權暹)에게 출가하였다. 양천우는 자녀가 여덟인데, 아들은 양산급(梁山岌)ㆍ양산두(梁山)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최확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최몽윤(崔夢尹)ㆍ최몽열(崔夢說)ㆍ최몽량(崔夢亮)이다. 여대로는 자녀 여섯을 두었는데, 아들은 여사겸(呂師謙)이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며, 이의는 딸 둘을 두었는데 어리다. 공의 아들 유성귀는 일찍 죽고 아들 유암(柳嵒) 하나만 남겼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5석(石)되는 활이 있으면 그 힘이 일곱 겹 갑옷을 뚫을 수 있고, 막야(莫邪)의 칼날 있으면 그 예리함이 무소의 가죽을 끊을 수 있으며, 1백 아름의 나무가 있으면 그 재목은 무너지려는 큰 집을 지탱할 수 있다네. 있는데도 그 귀함을 알지 못하고, 알더라도 다 쓰지 못하니, 이는 운명(運命)인데 어찌하겠는가? 그래도 뒷날의 경사는 이에 의지할 것이로다.
有明朝鮮國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柳公碣銘 幷序 [柳成龍]
隆慶五年五月。平安道觀察使柳公狀啓。臣病甚不能莅事。願歸死京輦。上憫而許之。改授同知中樞府事。公曳病還。卒于長湍府之招賢里民舍。訃聞上命有司馳賜棺以斂。喪至城外。吊賻如儀。下一路護其歸。十一月返葬于安東天燈山先塋之側。後十八年而墓石具。族姪前禮曹判書柳成龍叙而銘之曰。公諱景深字太浩。有諱栢諱欄玉諱葆。俱仕麗。諱從惠入我朝爲工曹典書。典書之子司正諱洪。司正之子護軍贈司僕正諱沼。是公曾祖。祖諱子溫。進士贈刑曹參議。考諱公權。工曹正郞。公貴贈嘉善大夫禮曹參判。妣英陽南氏。公爲人豪爽俊邁。自幼已嶄然出頭角。有聲塲屋間。得丁酉司馬。甲辰釋褐。選補承文院。薦授藝文檢閱承政院注書。權忠定公以院相入院。每見公通敏無滯。必嘖嘖言柳氏有子。策文儒。公對第一。佐郞工曹。轉司諫院正言。華聞藹蔚。丁未由禮曹佐郞拜弘文館修撰。時權奸秉國。構會乙巳事未已。以立威。見公翹楚後進中。欲籠絡之。屢示慇懃。公愈閉絶不通。又遇其爲鷹犬者面數之。皆大憾焉。九月臺諫承風劾罷。自是公屛居林下者五年。辛亥叙懷仁縣監。癸丑移惟新。丙辰以師儒徵。俄正郞地部僉正軍器。戊午從事廵南邊。未還陞通政鍾城府使。旋改定州牧使。尹元衡私囑公發民堰海爲田。公曰公事方殷。力不給也。元衡面色騂然。數日以臺論仍赴鍾城。時公論重惜公厄秉權者久冗卑。至是築定州城。擧公授之。卒不果行。在鍾一年。驗災傷失實罷。庚申爲光州牧使。公才無所不宜。尤長於理劇。其在懷仁縣。殘破甚。吏民赤立無吊。倉無數日畜。公居年餘。邑遂以完。惟新於湖路最巨。簿領雲委。前爲守宰者旰食流汗。晷盡繼以燭。猶不能了。公始至。新舊案沒肩。持牒號訴者充庭陛囂甚。公左右决遣沛如也。日未昃。與賓客飮射爲樂。老吏皆驚。以爲古未有也。爲光政益著。喣濡㷀寡。鞭撻強豪。一境肅然。期滿且還也。或有誤傳公爲羅州牧使者。羅州吏有第舍踰制。懼甚卽撤毁。威令之服人如此。癸亥再爲定州。尋移義州。發倉庫之剩。築四門擁城。一年陞會寧府使。卽爲北道節度使。還京同知樞府。丁卯六月。兼殯殿都監提調。治大行喪事皆立辦。時新皇帝登極詔至。議迎詔服色。衆皆欲素。公獨曰頒詔天下大慶。不可以下國之喪加之。當權吉。不然恐爲華人笑。旣而得杜氏通典說。與公言略同。議遂定。公之明智達識類如此。九月如京師賀聖節。戊辰以戶曹參判兼都揔府副揔管。十月爲司憲府大司憲。頹綱幾振。以事免。辛未兵曹參判。三月西道缺方伯。朝廷方有西顧憂。衆議非公不可。遂授公。時公已有病。輿行卽還。在道漸劇。遂不能起。聞者莫不傷嘆。以爲國家失人矣。臨絶無一語及家事。神識不爽曠如也。始正郞公以書狀歿於燕都。南夫人毁繼歿。公於兄弟爲長。養弱弟妹皆得成立。友愛悃悃。人無間言。公享年五十六。有九女一男。壻全海,尹大鳴,監役梁天遇,進士張遇,崔確,進士李懲,正字呂大老,趙瑭,李檥。男成龜。全海有子六成憲,士憲。餘皆幼。女二。一歸正郞裵應褧。一歸士人權暹。天遇有子女八人。子山岌,山㞳,山嵂。餘幼。確有子三夢尹,夢說,夢亮。大老有子女六人。子師謙。餘皆幼。檥二女幼。成龜早死。只有一子巖。銘曰。
有五石之弓。其力足以穿七札。有莫邪之刃。其利足以斷犀革。有百圍之木。其材足以支大廈之將覆。有之而莫知其貴。知之而未盡其用。命也如何。尙後慶之是㙲。
資憲大夫。前禮曹判書兼同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提學柳成龍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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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柳節-敦升-挺莊-伯-蘭玉-葆-從惠-洪-沼-子溫-公權(正郞)-景深(龜村)-壻 全海(鶴溪)-成憲(承訓郞)-有欽-是恒-壻 柳相時-錫龜-正源(三山,大司諫)-萬休-徽文(好古窩)-致祖-壻 李晼(外曾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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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
훌륭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譜學정리를 잘할 수 있을까요^^
@류현우 저의 존재의 뿌리를 찾고자 소일 삼아 매일매일 하고 있습니다.
평안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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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郞公께서는 제 선조와 文科 同榜을 하셨습니다.
종문씨 훌륭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