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슬산 용연사 琵瑟山 龍淵寺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
용연사 일주문
달성 용연사 삼층석탑(達城 龍淵寺 三層石塔)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8호
용연사 극락전 앞에 서 있는 탑으로, 1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바닥돌은 후대에 새로운 돌로 보수한 상태이며, 기단과 탑신의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낙수면이 짧고 처마가 얇은데 비해 밑면에 새긴 4단의 받침이 높직하다.
극락전의 장중한 규모에 비해 석탑의 높이가 2.6m로 너무 작아 서로 잘 조화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이 1층으로 줄어들고,
지붕돌의 조각양식이 변화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 용연사 삼층석탑
이 삼층석탑은 높이 3.2m로 2중 바닥에 몸체와 지붕을 각각 하나의 돌로 세웠다.
재료는 화강암이고, 아래 기단은 보수한 것이다. 아래 기단은 바닥돌에 바로 2단의 괴임을 했다.
위 기단 돌은 4매로 구성되었고,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을 조각하여 드러냈다.
지붕에서 물이 떨어지는 면이 짧고 기단의 폭이 짧아 신라탑의 기본형에서 많이 벗어난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914년(신덕왕 3)에 보양화상(寶壤和尙)이 창건하였고, 1419년(세종 1)에 천일(天日)이 중건.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1603년(선조 36)에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인잠(印岑)·탄옥(坦玉)·경천(敬天) 등에게 명하여 중창하도록 하였다.
1621년(광해군 13)에 범종각을 건립하였고, 1650년(효종 1)에는 불이 나서 법당과 요사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
다음해 계환(戒環)·여휘(麗輝) 등이 설선당(說禪堂)과 심검당(尋劍堂)을 건립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일언(一彦)과 학신(學信)이 동상실(東上室)과 서상실(西上室)을 건립하였다.
1653년에는 홍묵(弘默)이 대웅전을, 승안(勝安)이 명부전을 건립하였으며,
다음해에는 일주(一珠)가 만월루(滿月樓)를 건립하였다.
1655년에는 희감(熙鑑)과 홍묵이 함허당(含虛堂)과 관정료(灌頂寮)를 건립하였고, 다음해에는 청진(淸振)이 관음전을 건립하였다.
1657년에는 계홍(戒弘)이 반상료(返常寮)를, 1658년에는 도행(道行)이 명월당(明月堂)을, 1659년에는 학신이
향로전(香爐殿)을 건립하였고, 1660년(현종 1)에는 일순(一淳)이 약사전을, 1661년에는 계홍이 두월료(斗月寮)를 건립하였다.
1668년에는 대종(大鐘)과 금구(金口)를 주성하였으며, 1670년에는 천왕문 앞의 석교가 완성되었고,
1672년에는 법고(法鼓)를 완성하였다. 1673년에는 자진(自珍)이 세존부도(世尊浮屠)와 비석을 건립하였다.
1674년에는 부도암을, 1675년(숙종 1)에는 사리각(舍利閣)을 건립하였으며, 또 용문교와 법당의 중종(中鐘)을 차례로 완성하였다.
1682년에 천왕문을, 1688년에 응진전(應眞殿)과 16나한을 조성하였으며, 1693년에 영류당(咏流堂)을,
1695년에는 일주문을 건립하였고, 1711년에 시왕탱(十王幀)을 봉안하고 명부전을 단청하였다.
1722년(경종 2)에는 찬화(粲和)에 의해 대웅전과 종각이 중수되었다. 이들 전각은 무려 200여 칸에 달하였으며,
거주하는 승려는 500여 명이나 되었다. 1726년(영조 2)에 대웅전과 동·서 별실, 좌·우 승당이 다시 불탔으나,
1728년 혜조(惠照)가 찬화와 더불어 중건하였다.
적멸보궁 가는 길
비슬산 용연사 적멸보궁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한 보물 제539호 석조계단(石造戒壇)
. 이 사리는 원래 통도사에 있던 것으로, 사명대사가 제자 청진(淸振)을 시켜 이 절에 봉안한 것이다.
이 계단은 1673년에 완성되었으며, 통도사 불사리계단(佛舍利戒壇)의 형태를 본떠 만들었다.
용연사 부도전
용연사 일주문
용연사 진입로 벚꽃
첫댓글 역사적 고찰 상세한 설명과 더블어 공부 많이 합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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