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석가모니
법정 옮김
2565.1.26.
30. 손가락을 자른 청년의 출가
방심 못할 시대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옹은 종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특히 부처님에 대해서는 그 수행 시절에도 친히 만나 매우 존경하게 된 터라, 깨달음을 얻어 포교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신자ㅏ 되어 그 가르침에 귀의했다. 그리고 부처님과 그 교단을 위해 후원하는 바가 많았다. 따라서 마가다는 불교의 발전상 최초의 중요한 기반이었다.
빔비사라왕의 아드로서 후계자가 딘 아자타샤트루왕은 아버지에게서 폭력으로 왕권을 빼앗고 권력을 확장한 실력자다. 그는 처음에는 불교를 믿지 않았으나 세속적인 정책에 대해 부처님의 의견을 물었고, 부처님이 입적사신 뒤에는 그 유골을 무력으로써 요구한 왕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훗날의 이야기다.
코살라국 프라세나지트왕의 누이동생 코살라 데비는 빔비사라왕의 비가 되었으나, 다른 후비인 바이데히가 낳은 아자타샤트루가 폭력으로 왕위를 찬탈하자 자결하고 말았다. 이 일이 원인이 되어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귀에 프라세나지트왕도 자기 아들인 비두다바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아쟈타샤트루에게 의지하려고 마가다의 수도 라자그리하의 성문 밖까지 창자갔다가 최후를 마쳤다. 이 비두다바왕은 부처님의 조국 카릴라바스투를 공격해 석가족을 멸망시켰으나, 얼마 안가 마가다국에 패배했다. 부처님 시대의 북인도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다사다난한 시기였다.
꽃다발을 만드는 여인
처음 마가다국에서 포교 활동을 시작한 부처님은 코살라국의 수도 슈라바스티에 사는 큰 부자 수닷타의 초청을 받고 그 고장으로 갔다. 그곳 근교에 지은 기원정사는 규모나 설비에서 다른 곳에 비길 데 없이 훌륭한 곳이었다. 현재 사헤트 마헤트 근처에서 발굴된 유적을 보더라도 <율장 대품>등의 기록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수닷타 외에 바이샤카라는 여성도 부처님의 독실한 신자였따. 이 여성은 프라세나지트왕으로 하여금 빔비사라왕에게 간청해 그 영토 안인 사케타로 옮겨 오도록 한 부자 다난자야의 딸이다. 그녀는 슈라바스티의 부자 마가라의 집에 며느리로 들어가 시댁 집안을 불교로 개종시켰다.
슈라바스티에는 처음에는 불교 신자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바라문교는 고대의 이란, 그리스, 로마, 게르만 등 여러 민족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짐승을 잡아 신들에게 재물로 바쳐서 신들의 은총을 구하는 종교였다. 프라세나지트왕도 원래는 그와 같은 바라문교의 신자였다.
이 왕은 어느 날 밤 이상한 꿈을 계속 꾸었고, 날이 새자 학자인 바라문들을 불러 의논했다. 바라문들은 왕의 몸에 위험이 닥칠 것이라고 예연하고, 이 재난을 피하려면 태자 내외를 비롯해 왕이 사랑하는 후비들과 시종,대신들을 모두 죽여 신들에게 바치고 보물이며 귀중한 도구들을 모두 불태워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렇지만 왕은 그 일을 난처하게 생각하고 옹비인 말리카에게 상의했다. 그러자 불교 신자였던 말리카는 기원정사에 가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으라고 권했다. 거기에서 이해할 만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은 왕은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프라세나지트왕이 불교를 신앙하게 된데는 이처럼 말리카 부인의 영향이 컸다.
말리카는 보래 화원 관리인의 딸로 지체가 낮은 여인이었따. 말리카라는 이름은 '꽃다발을 만든 여인'이라는 뜻이다.
어느 날 아침 말리바는 부처님을 만나 꽃을 바쳤는데,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날 프라세나지트왕은 성밖에 나왔다가 몹시 지쳐 홀로 화원에 들어가서 쉬려고 한다. 그때 말리카는 그 사람이 왕인 줄도 모르고 정성껏 시중을 들었다.
왕은 아주 만조해하며 그날로 말리카를 왕비로 삼았다.
말리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왕의 신앙을 불교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프라세나지트왕이 불교 신자로 귀의한 것은 이렇듯 오로지 말리카의 공이었다.
말리카는 딸 하나를 낳았다. 일설에 의하면, 이 아이가 후에 아요디아국의 왕비가 되었으며 <승만경>의 주인공인 승만 부인이라고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설이 있다.
말리카비는 프라세나지트왕을 정성껏 도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교단을 공양하는 데 힘썼다.
프라세나지트왕은 말리카비 외에도 석가족에게 후비를 맞아들였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따.
프라세나지트왕은 슈라바스티를 비롯해 그의 영토 안에 불교 신자가 많아진 것을 보고 석가족에서 후비를 맞았으며 해 그 뜻을 전했다. 석가족은 이 요청을 듣고 난처하게 여겼다. 그들은 예전부터 동족 결혼만을 고수해 다른 종족과 결혼하는 일이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살라는 강대국이었으므로 함부로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마하나만이 종한테서 낳은 딸 바사바를 프하세나지트왕의 후비로 보냈따. 이 마하나만은 출가한 같은 이름의 비구와는 다른 사람이다.
지장화 사경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