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윤실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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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서 살펴 본 공평과 정의의 개념
김 근 주 전임연구위원〡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비유이지만, 사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 백성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포도나무에 비유하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이사야 5장1-7절, 시편 80편, 그리고 에스겔 17장 7-10절 등이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본문들이다(참고. 사27:2-6; 렘 2:21; 12:10; 겔 15:1-8; 호 10:1). 그러나 대부분의 본문들은 포도원 혹은 포도나무에 임한 재앙에 초점이 있는 반면, 이사야서 5장의 본문은 이러한 재앙이 임하게 된 까닭을 강조하여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두드러지며 다른 포도원과 포도나무 본문의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주제적인 면뿐 아니라, 본문의 형성 시기에 있어서도 가장 이른 시기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사야서 5장의 본문은 포도원에 관한 구약 본문 전체의 배경이 되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를 이렇듯 포도나무에 비유하는 것은 고대 근동의 문헌들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도 이사야서 5장의 포도원의 노래 본문은 특별하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5장과 같은 포도나무 비유의 근본적인 배경은 이사야 5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사야 5장에 등장하는 포도원의 노래는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 기울인 정성을 여
러 동사들을 통하여 상세하게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정성의 결과는 뜻밖에도 이 포도나무에 맺힌 “들포도”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기대와 예상이 무참하게 짓밟히는 반전을 보여준다. 포도원주인이 포도원에 대해 제기한 재판의 형식을 띠고 있는 3절 이하의 본문을 통해 포도원 주인은 이 포도원을 뒤엎기로 결정하며 이 포도원에 대한 주인의 행동 역시 상당히 인상적인 일련의 동사들을 통해 표현된다. 그야말로 주인은 이 포도원을 아무런 기대할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황폐케 한다. 마지막 7절은 포도원의 노래에 대한 풀이로서, 이 노래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 백성 이스라엘에게 이르시는 말씀이 선포된다. 포도나무를 심고 최선을 다해 가꾼 주인이 그에 합당한 좋은 포도 열매를 기대하듯이,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포도나무를 심고 가꾸신 하나님께서 이들에게도 좋은 열매 맺기를 기대하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돌보시고 인도하신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사야서의 본문은 포도열매에 해당하는 것이 “공평과 정의”임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공평과 정의가 무엇인지는 이 표현들의 반대 개념이 무엇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것들은 “포학(폭력)과 부르짖음”이다. 이러한 폭력과 부르짖음은 사 3:13-15에서 볼 수 있다. 5장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은 공평과 정의이다. 하나님께서 불러내시고 구별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찾으시는 열매는 다름 아닌 공평과 정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평과 정의는 어떤 사회적인 실천 또는 구제의 차원을 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원하시는 전부이다.
1. 공평과 정의
공평과 정의는 기본적으로 관계적 개념이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미슈파트”와 “쩨다카”이다. 대부분의 구절들에서 “미슈파트와 쩨다카”의 순서로 나오고, 창 18:19;신 33:21; 시 33:5; 시 37:6; 72:2; 89:14; 103:6; 잠 1:3; 2:9; 8:20; 16:8; 21:3; 사 58:2; 렘 22:13; 호 2:19에서는 순서가 바뀌어 있다. 이 어구는 구약성경에 빈번하게 등장하지만 번역 성경에서 여러 단어들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이 어구의 중요성이 잘 인식되지 않고 있다. 개역개정판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정의와 공의”로 번역되어 있지만, 여전히 몇몇 경우들에는 다양하게 옮겨져 있다: 창 18:19(“공도와 의”-개정초판들에서는 “공의와 정의”); 신 33:21(“법도와 공의”); 시 36:6(“심판과 의”); 37:6(“공의와 의”); 72:1(“판단력과 공의”); 103:6(각각의 복수형들이 쓰이면서 “공의와 심판”; 잠 8:20(“공의와 정의”); 사 56:1(“정의와 의”); 58:2(“규례와 공의”).
이 두 단어의 각각의 의미에 대해서는 위에 소개하였던 개역 성경의 여러 표현들과 본문들에서 짐작할 수 있다. “쩨다카”는 인간의 절대적인 윤리 기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관계적인 개념이며,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관계가 하나님, 그리고 이웃임을 생각할 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연관된 개념이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규례를 따라 올바르게 살아갈 때 그는 의롭다(신 6:25).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요구 하시는 바 올바른 믿음의 행위를 보였고, 하나님은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 15:6). 이 의로움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규례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순종과 준수에서 주어지는 의로움이며 그런 점에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비롯된 의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 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자신의 판단으로 판단하거나 제한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을 일러 하나님께서 보시는 사람의 의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형편을 생각하면 하늘의 별처럼 자손이 많아지리라는 말을 결코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자신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말씀을 믿은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셨다. 나의 경험과 수준으로 하나님을 제한하지 않고, 우리의 처지를 따라 제약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것이 현실인 줄 믿는 것이며, 그를 소망하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의 의로움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맺을 수 있는 올바른 관계의 핵심이다. 사람이 무엇으로, 어떤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의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은 강하고 크시며 위대하시다. 그러므로 사람이 드릴 수 있는 최선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의 행하심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울이 증거하고 있는 믿음으로 얻는 의로움이기도 하다.
한편 어떤 사람이 이웃에게 대해 “쩨다카/체데크”를 행한다는 것은 그가 이웃에 대해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이다(시 15:2). 그래서 그는 이웃을 참소치 않으며, 행악지 않고, 훼방치 않는다(시 15:3-5). 주리고 어려운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고 그들을 도울 때, 그는 의로운 사람이다(사 58:8-9; 겔 18:5-9). 에스겔 18:5-9에서 “법과 의”로 번역된 용어는 “미슈파트”와 “쩨다카”며 이를 행하는 자는 “의인”(짯디크)이다. 결국 “쩨다카”는 이웃에 대한 올바른 행실 곧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삶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웃에 대한 이러한 진실한 자세는 경제적인 거래에서도 일관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상거래의 기본은 “쩨다카의 저울”이다(레 19:36; 신 25:15; 겔 45:10). 그런 점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로움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여기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돈을 빌렸고 그 저당으로 그의 옷가지를 받았다 하더라도 해 질 때에는 그에게 돌려준다. 그래야 그 사람이 추위 속에 옷을 입고 잘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웃이 당한 어려운 처지에 마음을 같이 하여 옷을 돌려줄 때, 이것이 그 사람에게 “쩨다카”가 될 것이다(신 24:13). 그런 점에서 “쩨다카”는 마음이면서 동시에 행동임을 알 수 있다. 이웃과 공감한다면 어떻게 그에 부합한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비록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마치 내가 그 일을 당한 것처럼 함께 슬퍼하고 우는 것이 이웃을 향한 의로움이며, 내가 싫은 일을 이웃에게 시키지 않고,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대접한다. 왜냐하면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황금률은 실상 구약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쩨다카”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하나님의 행하심을 가리켜 “쩨다카”를 사용하기도 한다. 시편 71편 2절에서 시편기자는 “주의 의(쩨다카)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라고 기도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쩨다카”야말로 시편 기자가 의지하고 사모하는 근거임을 볼 수 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보시고 사람의 형편과 처지의 곤고함을 보시며 불쌍히 여기신다. 사람의 중보자 없음을 보시고 안타까워하신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는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던 것에 비교될 수 있다(마 9:36; 막 6:34). 하나님께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며 사람의 처지에 같은 마음을 품으신 것이 하나님의 의로움이시니,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사람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근거가 된다. 시편 구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그의 구원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쩨다카”는 마음을 같이 하는 것, 동의하는 것과 연관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는 인간의 의로움이다. 그리고 인간의 처지를 보고서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바로잡으시고 건지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움이며 그래서 많은 경우 하나님의 “쩨다카”는 하나님의 구원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사 56:1; 62:1). 이웃에 대해 정의를 행한다는 것은 단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함만이 아니라, 다른 이의 어려운 처지에 대한 긍휼이 우선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정의 개념에서 구약의 “쩨다카”는 긍휼이 포함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공감”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해 “미슈파트”는 하나님의 법도에 근거해 이루어지는 올바른 사회 질서를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이 단어는 ‘법, 재판, 규례 혹은 심판’까지 넓은 의미 영역을 지니게 된다. “쩨다카”와 “미슈파트”가 다루어지는 구약에서의 주된 현장은 다름 아닌 “성문”이다. 성문은 이스라엘의 공동체 생활의 중심지로서, 누군가의 덕행에 대한 공개적인 칭찬이 이루어지기도 하고(잠 31:23),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하며(왕하 7:1), 때로 우물이 존재하기도 했다(삼하 23:15). 그러나 성문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재판’이었다. 보아스가 성문에서 장로들에게 문제를 이야기하고 룻을 아내로 맞아들였다(룻 4:1이하). 그의 말을 들은 장로들과 모든 백성들이 증인이 되어 문제가 된 상황을 판결하고 해결한다(룻 4:11; 신 25:7). 부모에게 문제가 되는 자녀가 있어 징계하여도 듣지 아니하면 그 부모는 그 아이들 데리고 성문으로 가서 성읍의 장로들에게 자초지종을 고한다. 장로들은 이를 듣고 판정하며 장로의 판정을 따라 성읍 사람들이 집행한다(신 21:18-21). 부부 간에 문제가 생긴 경우에도 이 같이 성문으로 나가서 성읍 장로들에게 아뢰고 그에 합당하게 판결한다. 장로들의 판결의 권위는 절대적이었으며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었다(신 22:13-21). 이것이 이스라엘 가운데 죄를 제거하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성문에서 올바른 판결이 내려지지 않으면 사회 전체에 죄가 만연케 된다. 가령, 누군가가 자신의 가난한 처지로 인해 억울한 일을 겪게 되었을 때, 그는 성문으로 나아가 성읍의 장로들이 앉은 곳에서 호소한다. 그의 이웃들은 그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그를 불쌍히 여기면서 그를 위해 옳고 그른 것을 증언해준다. 이렇게 행하는 것을 가리켜 쩨다카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읍의 장로들은 이 호소를 듣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결하되, 이 가난한 사람을 억울케 한 사람들의 외모나 그들이 몰래 가져다주는 뇌물에 현혹되지 않은 채 곧게 판결해야 한다. 이러한 판결이야말로 “미슈파트”를 행하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그 가난한 자의 억울함이 풀려질 때, 그 사회는 “미슈파트”가 살아있는 사회, “쩨다카”와 “미슈파트”가 실행되는 사회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외모와 뇌물은 이 판결을 굽게 하는 최대의 방해요소이다. 외모와 뇌물에 좌우되지 않는 재판은 공의로운 재판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과 지도자들을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신 16:18-20)
그러나 외모와 뇌물에 따른 판결로 인해 그 억울함이 풀려지지 않을 때, 억울한 사람들은 이제 그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 외에는 달리 의지할 데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그 부르짖음을 듣고 친히 미슈파트를 세우시며 불의를 징벌하고 책망하며 나아가 때로 그 성읍 전체를 진멸하신다. 소돔과 고모라가 겪은 일은 바로 그러한 부르짖음의 결과이다. 이방인, 고아, 과부를 압제할 때 그들이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 여기서의 부르짖음은 법적 도움을 위한 부르짖음이다(롤프 렌토르프, 하경택 옮김, 「구약정경신학」, 181p). 그러므로 이들이 법정에서 제기하는 소송은 부르짖음이다. 가난한 자들의 소송은 부르짖음이다. 그것을 세상 법정이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다루시며 진멸하실 것이다.
‘재판하다’는 구약에서 대체로 ‘다스리다’는 의미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재판은 통치자의 가장 중요한 업무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잠 31:8-9). 재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억울한 사정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세상에 사사로운 복수가 확산되든지, 오로지 힘을 키워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세상이 될 것이며, 그러한 세상은 약한 자들에게는 지옥과 같은 세상일 것이다. 이 모든 일은 재판 기능의 약화와 쇠퇴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국가 권력이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미슈파트의 구현, 억울한 일이 없도록 법적•제도적 틀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국가 권력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 부분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일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미슈파트와 쩨다카 준수 여부는 그 사회의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통해 정면으로 드러난다.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케 하면 하나님께서 명하신 공의(미슈파트)가 세워지지 못한다(암 5:12,15). 이렇게 궁핍한 자가 억울케 되는 주된 원인은 뇌물이다(암 5:12). 외모와 뇌물은 단순히 사회 정의와 연관된 어떤 요소이지 않다. 외모와 뇌물을 보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외모를 보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그러면 목소리 큰 사람이 다일 것이다. 죄인을 건지시며 불쌍히 여기심도 이와 연관된다. 그러므로 외모와 뇌물에 좌우되지 않는 것은 단순한 윤리사항이지 않으며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연관된 근본적인 사항이다.
정의가 두 당사자 사이의 관계에 초점이 있다면, 공평은 이 사이의 문제가 불편부당하게 처리되는 틀과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단어는 곧잘 ‘공평과 정의’ 전체를 대표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는 점도 주의해야 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편 구절은 이를 잘 보여준다.
“네 의(“쩨데크”)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 네 공의(“미슈파트”)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 37:6)
위 구절의 전반절과 후반절이 서로 동의 평행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반절에 쓰인 “쩨데크”와 후반절에 쓰인 “미슈파트”는 사실상 동의어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미슈파트와 쩨데크/ 쩨다카는 두 단어이지만 사실 한 단어처럼 역할 한다(hendiadys)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가운데 어느 한 단어가 쓰인 경우에 실제로는 두 단어가 포괄하고자 하는 전부를 대신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공평과 정의는 법대로의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그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다. 구약에서 공평을 의미하는 미슈파트가 “인애” 혹은 “자비”를 의미하는 “헤세드”와 함께 쓰이는 것에서도 이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미슈파트의 짝인 쩨다카의 의미의 핵심에 있는 것이 이러한 긍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하나님 나라의 기둥으로서의 공평과 정의
그런데,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이상에서 언급되는 공평과 정의가 단지 인간적인 덕목이 아니라는 점이다. 구약 성경은 공평과 정의가 하나님의 보좌의 두 기둥임을 말하고 있다: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시 89:14)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들렸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시 97:2)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시 33:5)
하나님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왕이 되어 통치하시는 나라, 즉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왕이 되셔서 다스리시되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신다(시 99:4 “왕의 능력은 공의를 사랑하는 것이라 주께서 공평을 견고히 세우시고 야곱 중에서 공과 의를 행하시도다”). 그러므로 공평과 정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 하나님 나라의 핵심인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그가 행하시는 미슈파트로 말미암아 자신을 알게 하신다(시 9:16). 사람 가운데 드러나시는 하나님은 미슈파트를 행하심을 통해 드러내신다. 그러나 악인은 그 행하는 일에 스스로 걸려들게 된다. 행함을 통해 드러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행함은 바로 미슈파트의 행함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제까지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막상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를 이야기할 때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상당히 애매했었다고 할 수 있다. 공평과 정의는 하나님의 통치의 원칙들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하나님 나라는 공평과 정의의 나라이며, 공평과 정의는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이 단어들이 곧잘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을 의미하는 “헤세드”와 함께 쓰이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의 이러한 특징을 아는 것이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헤세드”)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니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4)
3.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공평과 정의의 삶으로 부르셨다는 것은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이 표현들이 구약에 얼마나 널리 쓰이고 있는지 보았거니와, 그 최초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을 설명하는 본문에서 볼 수 있다. 흔히 아브라함에 관한 말씀을 나눌 때에는 땅과 자손을 약속하신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게 되지만, 창 18:18-19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을 약속하신 목적에 대해 그리고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에 대해 알려주고 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그는 그 주신 땅에서 그 주신 자손에게 명하여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삶을 살도록 부름 받은 존재이다. 공평과 정의를 행할 공간이 필요하기에 땅이 약속되며, 공평과 정의를 행할 주체가 필요하기에 자손이 약속된다. 그런 점에서 구약성경 전체에서 강조되고 있는 기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은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와 바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가운데 하나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게 될 때에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된다는 약속이다(창 12:3).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땅과 자손의 약속은 하나님의 사람들만을 풍성하게 하고 그들만이 복을 누리게 하지 않고 땅의 모든 족속에게 하나님의 그 복이 넘쳐흐르게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땅에서 자손과 더불어 공평과 정의를 행하며 살아가며 그로인한 복은 열방에게 미친다. 하나님께 순종함에 있어서 배타적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음에 있어서는 배타적이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땅의 모든 사람이 복을 받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는 요셉이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요셉의 삶은 고난에 가득 찬 삶이었지만, 그의 고난과 낮아짐을 통해 그가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은 복을 받게 된다.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어도 요셉은 애굽의 토지 개혁을 단행하면서 모든 애굽 거주인들을 왕 앞에 평등한 이들로 세웠으며 토지를 개인의 사유로부터 해방시키되 오직 경작권만을 지니도록 하였다. 그로 인해 애굽과 인근에 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었다. 참으로 요셉의 고난과 순종은 전적으로 땅의 모든 사람-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창 50:20).
근동의 법들에서도 공평과 정의에 대한 요구가 있음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그런데 근동 법들에서 이러한 정의는 왕들에게 요구되는 사항이었지만, 구약성경에서 이 정의는 아브라함에게 처음 주신 명령으로 등장한다. 여기에 근동법과 구약의 또 다른 차이가 있다. 구약에서 공평과 정의는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법이며, 근동법과 비교하자면 아브라함과 그 후손은 왕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명령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인 다윗을 통해 이어져 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4. 다윗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에게 공평과 정의를 지켜 행할 것을 명령하신다. 이스라엘은 그 가장 강하던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도 앗수르의 세력의 반도 되지 않았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삼하 5:10)
“…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삼하 8:14)
이러한 말씀은 다윗의 이스라엘이 세계 최강국이 되었음을 의미하지 않으며 세계 최대의 면적을 지니게 되었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만군의 여호와”는 “모든 군대의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쟁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래서 아예 다윗은 그러한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앗수르와 바벨론, 세계의 강국들은 힘이 강해지면 다른 나라를 침공하고 정복하고 차지하기를 시도하지만, 다윗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신 범위를 넘어서 침략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강성함은 세상 나라의 강성함과 다르다. 다윗이 어디를가든지 이기게 하셨다는 사무엘하 8장 14절의 말씀에 이어지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쌔”(삼하 8:15)
다윗의 이스라엘은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 공평과 정의가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까닭이다. 세상에서 제일 센 나라가 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며, 세상에서 제일 큰 교회를 만들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기독교인의 수가 가장 많은 나라를 이루라고 부르신 것도 아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앗수르의 방식을 배워야 할 것이다. 아하스가 나라의 위기를 겪으면서 예루살렘 성전에 앗수르의 제단을 본 뜬 제단을 만들어서 거기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것으로 그 돌파구를 모색하였듯이(왕상 16:10-16), 우리도 교회 안에 온통 앗수르의 방식, 세상 방식을 끌어들여서 세상을 본떠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부르신 까닭은 그 나라 안에서 모든 백성들이 각자의 기업을 누리고 살면서 공평과 정의가 그 가운데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구약에서 종종 반복되는 ‘각자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거하는 삶’도 이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왕상 4:25; 미 4:4; 슥 3:10). 각자 자신의 기업에서 자신의 가족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은 개인주의적이고 가족중심주의적인 가치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기업에서 그 자손과 더불어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레위기의 절기 본문들에서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의 의미와도 통한다(레 23:3,14,21,31). 그리고 희년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자신들의 거주지를 잃어버린 이들을 위해 그 거주하는 기업을 회복시켜 그 땅에 거하게 하는 절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백성의 표지는 크기나 넓이에 달려 있지 않되, 자신들에게 주어진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원칙, 공평과 정의를 실행하는 삶에 달려 있다.
그런 점에서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삶은 이 세상을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본받는 삶인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삶은 한 마디로 “하나님을 본받는 삶(Imitation of God)”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예수께서 명령하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