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19일. 극도의 긴장감이 대심판정 안을 휘감은 가운데 헌법재판소장의 계속된 낭독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결국 이 사건은 헌법과 헌법재판소법에서 정한 정당해산에 필요한 6인 이상의 찬성이 있으므로 주문과 같이 결정합니다. 주문을 선고하겠습니다. 주문 1 피청구인 통합진보당을 해산한다. 2. 피청구인소속 국회의원들은 그 의원직을 상실한다…”
서정갑(徐貞甲), 徐錫九(서석구), 고영주(高永宙) 이 3人의 애국자와 함께 반역(反逆)의 세월을 맨주먹으로 싸워온 조갑제(趙甲濟)선생의 소감처럼 그것은 역사의 천둥소리와 같은 결정이었다.
2012年 大選
꼭 2년 전이다. 그날도 세상은 지금처럼 패배와 승리에서 오는 감정의 목소리로 넘치고 있었다. 저녁 무렵 집근처에 있는 점포 한군데에 들렀다. 그 전에도 몇 번 갔었던 이곳은 커피나 라면을 그야말로 되는대로 파는 곳이었다. 이곳에 처음 가게 되었던 것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내가 사는 곳 근처 한쪽은 밤이면 컴컴해졌다. 예전엔 큰 공장이 하나 있었는데 이 공장이 옮겨가고 난후부터였다. 이 컴컴한 데에 그것도 허름한 창고 위 2층에 점포하나가 달랑 들어섰으니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점포라고 보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안에 있는 집기류 중에 쓸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폐허에 가까웠다. 손님이 올 리 없어 보였다. 여기서 60대 아주머니 한분이 장사를 하고 있었다. 하도 딱해 보여 몇 번 갔는데 그러다보니 아주머니는 자신이 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말하게 되었다. 남편도 자식도 없다던 아주머니는 모든 것을 잃고 오갈 데가 없어 과거에 알던 지인의 매각되지 않고 있는 건물 2층에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그날은 자연스럽게 대선(大選) 이야기가 나왔다. 아주머니는 불현듯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나는예, 박근혜 안 되면 죽을라고 했습니더.”
자신의 일도 아닌데 죽으려고까지 했다니.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주머니는 말했다.
“내가 서울 언니 집에 살 때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셨는데, 그때 얼매나 울었는지 모릅니더.”
아주머니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주소 이전을 해놓지 못해 새벽부터 주민등록상 주소지까지 투표하러 갔다고 했다. 들어보니 제법 먼 거리였다. 몇 천원 버는 것도 아쉬울 텐데, 나로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투표하러 가니깐요 동네 나이 많은 사람들이 벌써부터 줄을 서 있데요.”
아주머니는 눈앞에 상황이 펼쳐져 있는 것 같이 흥분해서 말했다.
“아이고 말 마이소. 동네 계란집 할매는요 나이가 팔순인데 사람들이 줄서 있는 쪽에다가 두 손을 이리 들고요. ‘박근혜 찍으소이, 박근혜 찍으소이’ 하고요. 할배들도 표 찍고 가지도 안하고 서서 박근혜가 돼야 된데이 하고요. 하이고 참…”
어떤 전율 같은 것을 느꼈다. 그 세대들이 그렇게까지 투표하려 했던 것은 왜일까.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절박하게 했던 것일까…
左派 全盛時代
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한(恨)풀이를 시작했다. 6.15 남북수뇌부회담은 그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문제의 통합진보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은 DJ가 평양을 방문하기 6개월 전인 2000년 1월 탄생했다. 생겨서는 아니 될 반역도당(反逆徒黨)이 좌경화(左傾化) 물결 속에 버젓이 양지로 기어 나온 것이다.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리어지기도 하는 DJ, 노무현 정권 시절. 좌파(左派)는 지속적으로 우리 사회를 장악할 수 있는 토대를 형성했다. 그들은 이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좌익화(左翼化)를 꾀했다.
당시 정권은 사면권(赦免權)을 남발하여 국가보안법, 집회 · 시위법 위반 전과자가 공직에 진출할 길을 열어주었다. 그 덕에 전과자들은 국회의원이 되었다. 심지어 구(舊)서울지검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여 구속된 전력이 있는 운동권 대학생이 검사가 되어 자신이 구속되었던 그 서울중앙지검에 첫 발령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그런 흐름으로 법원, 검찰, 경찰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국가조직 내에 극심한 이념대립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합법화 되고 전국공무원노조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여기에는 특정 이념으로 무장한 민주노동당 세력의 뒷받침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우리 사회가 좌경화(左傾化) 되는데 브레인 역할을 했다.
정권의 비호 속에 좌파정당(左派政黨)과 그 세력의 힘은 점차 강력해졌다. 기업에서는 노조(勞組)가 득세(得勢)했고 공직사회에서는 전공노(全公勞)가 각 기관장, 간부들을 흔들어 댔다. 전교조(全敎組)는 어린이와 학생들의 머릿속에 이른바 ‘민족해방(民族解放)’ 개념을 집어넣고 분단(分斷)의 원인을 판단 못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美國을 원수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서구식 개인주의를 과하게 주입시켜 부모나 스승의 정당한 지적조차 부당한 간섭으로 여길 정도로 저항정신(抵抗精神)을 고취시켰다.
좌파(左派)가 각 대학을 장악하다시피 하여 교직은 물론 행정직까지 주요 자리를 휩쓸 정도가 되었다. 그런 학교에서 배운 수많은 학생들이 언론계로 문화계로 학계로 뻗어나가 기자, PD, 선생, 배우, 포털사이트 대표자가 되었다.
좌파는 언론, 출판, 문화계를 장악한 다음 좌파의 주장만이 진실이며 우파(右派)의 주장은 거짓, 권위주의, 親日, 위선(僞善)덩어리로 만들어 버렸다. 우파의 논리를 들으래야 들을 수 없도록 좌파정보로 온 세상을 뒤덮어 놓았다.
북한식 사회주의이념을 기반으로 한 ‘남북연방제 통일건설’이라 불러야 마땅한 행위가 좌파의 선동에 의해 ‘민족화해’ ‘평화구현’이란 말로 둔갑했다. 자유민주주의와 양립(兩立)할 수 없는, 주체사상에 입각(立脚)한 인민민주주의가 버젓이 ‘민주주의’라 불리어졌다. ‘남북 인민’이 강조되면서 분단 현실도 잊혀져갔다.
그들은 해방 후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를 제외한 모두를 친일파로 여기게끔 치밀하고 집요한 교육을 실시하고 그것을 정설로 만들어 나가는데 死力(사력)을 다했다. 이를 토대로 우리의 건국(建國)을 부정했다. 李承晩과 朴正熙를 親日이란 단어에 가둬넣어 ‘역적(逆賊)’ 이미지를 씌우고 그 통치(統治)시기를 역적, 독재자가 통치한 시기라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런 다음 ‘역적 정부를 상대로 한 데모라면 어떠한 것도 정당하다’고 여기도록 만들었고 간첩에 대한 검거, 수사는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강압행위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친 · 종북적(親 · 從北的) 국회의원들을 통해 과거 반정부시위를 했던 이들에게 일종의 보상을 해 줄 수 있는 法(법)을 만들었다. 각종 과거사 위원회를 만들어 실질적 반국가사범 대해 내려진 수많은 확정판결을 그 당사자의 주장을 주근거로 造作(조작)이라 간주하였다. 그런 결정을 통해 재심(再審)을 받도록 하여 무죄(無罪) 받을 길을 열어주었다. 이렇게 뒤집힌 사건의 배상(賠償)은 그들의 배를 불려 주었다.
그들은 그렇게 한풀이를 했다. 헌법(憲法)을 부정하고 국가보안법을 없애려 했다. 이 나라 건국과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부정하려 했다. 북괴가 인민해방을 외치며 남침하여 이 땅을 초토화 시켰듯이, 자연보호를 외치던 자들이 북아현 숲을 말살시켰듯이 그들은 ‘민주주의’ ‘민족’ ‘서민’을 외치며 건국 · 산업화 세력이 일궈온 모든 것을 말살시키려 했다. 그 핵심에는 민주노동당 세력과 이른바 운동권 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애국시민과 함께 일어선 국민행동본부
그들의 반역적(反逆的) 전횡에 저변(底邊)의 국민들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런 속에서 대한민국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국민행동본부는 그렇게 탄생했다. 국민행동본부는 애국시민들과 힘을 합쳐 좌파세력과 싸웠다. 국가보안법 폐지 획책을 국민과 함께 맨주먹으로 막아냈다. 이렇게 싸우느라 쇠약해져 세상을 떠난 시민도 있다. 봉태홍 선생이다.
노무현 정권시절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하나를 든다. 2005년 8월의 일이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이해찬 씨는 “(인공기를) 훼손 또는 소각한다든가 하는 행위에 대해 정부가 관대하게 넘길 때는 지났다”며 8.15기념 남북공동행사기간에 인공기를 소각하는 것에 대해 “아주 단호한 조치를 취하도록 경찰에 지시해 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2005년 8월 14일. 봉태홍 라이트 코리아 대표는 남북축구 경기에 앞서 월드컵 상암경기장 앞에서 행인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다가 봉변을 당했다. 다름 아닌 우리 경찰에게. 당시 경찰은 봉 대표가 들고 있던 태극기 수백 개를 빼앗았다. 태극기를 뺏긴 봉 대표는 그 주변에서 태극기 배포를 비난하던 종북깡패가 던진 얼음물병에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가 됐다. 경찰은 물병 투척자를 검거하기는커녕 봉 대표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응급조치도 않고 몇 시간을 감금하다시피 했다.
反逆으로 가는 길목을 막아서다
좌파정권 시절. 국민행동본부와 조갑제 선생은 좌경화(左傾化)를 막기 위해 온몸을 던졌다. 저변 국민들의 상식적 분노를 등에 업은 우파진영의 목소리는 울림이 컸다. 좌익(左翼)은 폭력을 써가면서까지 우파의 입을 막으려 했다. 2003년 8월 소위 親盧 진영 행동대장격인 명계남은 서울 광화문 코리아나 호텔 앞에서 조갑제 선생과 서정갑 선생에게 테러를 시도하기까지 했다. 이런 수작에 굴하지 않고 조 선생과 서 본부장은 좌익을 더욱 압박해 들어갔다.
2004년 6월 서정갑 국민행동본부장은 서석구 변호사에게 청원서 작성을 부탁, 법무부에 민주노동당 해산을 청원하였다. 좌파정부 시절이니만큼 이 청원은 기각되었다. 이런 식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우파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국민들에게 좌익의 반역성을 지속적으로 알렸다. 노무현 정권의 실정(失政)과 우파의 노력의 결실로 2007년 대선에서 좌파는 패했다. 노무현 정권 때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이병완(李炳浣) 씨는 2007년 대선의 주역으로 ‘서정갑’ ‘조갑제’를 꼽을 정도였다.
반역정당(反逆政黨)에 대한 국민행동본부의 해산 청원은 멈췄던 것이 아니었다. 서정갑 본부장은 고영주 변호사와 힘을 합쳐 민주노동당 해산에 힘썼다. 고영주 변호사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종북좌익(從北左翼) 척결에 나섰다. 국민행동본부와 고 변호사는 기자회견, 국민서명 운동을 벌이는 등 줄기차게 민노당 해산을 주장했으며, 고 변호사는 수차례 민노당에 대한 해산 청원서를 썼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명박 정부는 보수세력(保守勢力)이 무엇 때문에 자신들을 지지한 것인지에 대해 무심했다. 그들은 종북좌파(從北左派)의 속성을 잘 몰랐다. 종북좌파는 철퇴를 맞아 붕괴되기 전에는 절대 특유의 준동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광우병 사태 때 이명박 정부는 좌파세력의 주장에 한 번쯤 귀기울여주면 그들이 정부의 진정성을 알아 줄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종북좌파는 오히려 그때부터 정부를 만만하게 보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는 집권 내내 좌파세력의 기승(氣勝)에 애를 먹었다.
‘朴槿惠’의 의미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좌파는 총궐기 했다. 빼앗긴 권력을 찾아 6.15, 10.4 선언에 대한 후속조치를 이행하려 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진보적이고 민주적이며 깨어있다고 했다. 보수세력을 낡고 무지하며 非민주적이라 했다.
보수세력은 이명박 정부로부터 외면 받다시피 했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싸웠다. 이런 보수세력과 함께 저변의 국민들이 일어섰다. 자칭 진보세력이 업신여긴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까지 일어선 것이다. 2012년 12월 19일 이 땅의 어른들이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을 지켰다.
2012년 대선 후 정치 평론가들 중 상당수는 저학력 고령층이 어째서 박근혜 후보를 그렇게까지 지지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했다. 처해진 형편으로 보면 진보(進步)후보를 뽑아야 하는데 박 후보를 찍은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다. ‘박정희’에 대한 향수 때문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데가 많다고 하는 이도 있었다.
2년 전 오늘. 집근처 점포의 아주머니를 보며 느낀 것이 있었다. 그 세대들은 자신들이 살아왔던 시대를 긍정(肯定)하고 있었다. 그때는 고생 속에서도 희망과 꿈이 있었다고 했다. 오늘날 어른들은 진보를 표방하는 좌파세력이 당신들이 살아왔던 시대를 부정하고 당신들을 무시하고 가르치려 하는 것에서 모멸감을 느끼고 있었다. 좌파세력의 위선적, 반역적, 오만방자한 행태에 치를 떨고 있었다. 어른들에게 있어 박근혜라는 인물은 위대한 인물도 아니요 뛰어난 정치가도 아니었다. 이제는 동정(同情)의 대상도 아니었다. 어른들에게 있어 ‘박근혜’는 당신들의 젊은 날에 대한 '긍정'이었던 것이다.
利敵政黨의 숨통을 끊고
민노당은 통합진보당으로 당명(黨名)을 바꾸었다. 고영주 변호사는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반역정당(反逆政黨)에 대한 해산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젠 통진당 해산 청원서를 제출한 것. 한편 원세훈과 남재준의 국정원은 언론의 비방과 일부 국민의 냉대 속에서도 묵묵히 본연의 임무를 수행, 이석기 일당의 내란음모를 적발했다.
반역(反逆)의 기운이 쇠했기 때문일까. 결국 박근혜 정부는 특별조사 팀을 구성하고 고영주 변호사의 청원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2013년 11월 5일 드디어 법무부는 헌법재판소에 통합진보당 정당해산 심판청구를 하였다. 국민행동본부가 민노당 해산 청원에 나서고부터 9년만이었다.
법무부의 정당해산 심판청구 요지를 살펴보면 고영주 변호사가 제출한 청원서 요지와 거의 흡사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전에 작성된 민주노동당에 대한 해산 청원서도 상당한 근거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과거 정부가 이적정당(利敵政黨)을 방치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물론 박근혜 정권 법무부는 고영주 변호사의 청원서를 검토, 이를 토대로 심판청구를 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통진당 해산 심판청구를 한 법무부의 위헌정당대책 TF팀원 9명은 헌법재판소의 심리가 진행되는 약 1년 동안 매일 자정이 넘은 시각에 퇴근하다시피 했다. 이들이 제출한 서면증거는 무려 3천 건 가까이 됐다.
국민행동본부, 조갑제닷컴, 그밖에 보수단체도 보고만 있지 않았다. 헌재를 향해 통진당 해산을 강력히 주장했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 정점식 검사장, 법무부 TF팀은 마지막까지 통진당 해산에 진력(盡力)을 다했다.
국민들은 통진당의 본모습을 알고서 경악했다. 그간 보수세력을 무턱대고 극우(極右)라던 이들도 조금씩 각성(覺醒)하기 시작했다. 여론은 반역세력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같은 시각 헌법재판소는 법무부의 치밀한 입증 쪽에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은 이러한 기류에 역행, 통진당 해산에 사실상 반대하는 입장을 내놓았다. 자신들이 반역자들을 국회의원으로 만들어 준 것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국민의 뜻을 거스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통합진보당 정당해산 심판 선고의 날이 다가왔다. 2014년 12월 19일 오전. 헌법재판소 앞에는 보수시민들과 통합진보당원들이 몰려들었다. 저마다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다. 경찰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국민들도 TV앞에 몰려들었다. 오전 10시 5분경 박한철 헌재소장은 결정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숨을 죽였다. 10시 37분경 헌재소장의 낭독은 마무리 되었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헌법재판소 앞 보수시민들은 일제히 ‘와’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TV를 시청하던 애국시민들도 환호했다.
대한민국이 승리했다. 가슴이 벅찼다. 암(癌) 덩어리 하나를 도려냈구나 싶었다. 어른들이 젊은 반역자들을 이겨냈구나 싶었다. 문득 서정갑, 서석구, 고영주, 조갑제 선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인터넷 속 사진을 통해 본 그들의 최근 모습은 10년 전보다 머리카락이 더 하얘져 있었다. 그들은 앞으로 무엇을 준비할까. 분명 무언가를 위해 또 싸울 것이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2014년은 마무리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