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존경하는 사촌 형님의 글입니다.
[칼럼] 송상일의 세상읽기
조씨 사건과 미국적 모순
입력날짜 : 2007. 04.20.
한국인의 머리털이 검은 것은 자연현상이다. 반면에 한국인의 노랑머리는 문화현상이다. 즉 그것은 이 시대를 사는 어떤 한국인들의 어떤 의식을 한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 의식이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다. 한국인의 노랑머리는 20세기의 어느 시점 이후 정치·경제·문화적으로 미국의 세계체제 가운데 놓인 대한민국의 착잡(錯雜)한 위상에 의해 채색된 것이다.
필자의 말이 과장처럼 들리는가. 백 년, 혹은 천 년 뒤 사람들이 땅을 파다 노랑머리 한국인 미라를 꺼냈다고 가상해 보자. 학자들은 그 노랑물이 든 머리카락에서 백 년, 혹은 천 년 전의 대한민국에 대해 실로 많은 사실을 읽어낼 텐데, 그 중에는 방금 필자가 말한 사실도 틀림없이 포함될 것이다.
조승희씨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서론이 길어졌다. 조씨 사건이 나자 미국에 사는 한인들이 불안해 한다고 한다. 실제로 길을 가다 봉변(逢變)을 당한 동포도 있는 모양이다. 사진 속의 조씨는 검은 머리다. 자연이 한국인에게 준 머리 색깔이다. 그러나 그는 8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23살이 되도록 미국인으로 살았다. 머리칼만 검을 뿐이지, 법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그는 미국인이다. 그리고 인격은 자연보다는 문화에 의해 더 많은 부분이 결정된다. 이번 사건에서 한국과 한국사람은 애꿎은 피해자다.
어쩌면 조씨 역시 미국이라는 모순 속에서 인격이 으깨진 것일 수 있다. 마치 맷돌의 두 짝 사이에 휩쓸린 낟알이 갈려 부서지듯이-. 다인종(多人種)이 더불어 살도록 한 헌법과 소수민족은 3등 국민으로 살아야 하는 현실의 괴리(乖離), 원칙과 실제 사이의 미국적 모순이 이 사건의 얼개를 이루는 것일지도 모른다.
총(銃) 문제도 그렇다. 문제가 많은 나라에 총까지 가까워, 당연히 사고가 잦다. 건강에 해롭다며 담배에 대해서는 전쟁을 선포하면서 총기는 감히 규제 못하는 이상한 나라가 미국이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그렇다고 다 조씨처럼 사고를 치는 건 아니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긴 가드레일이 없다고 모든 자동차가 절벽 밑으로 구르는 건 아니다. 그래도 사고가 나면 사람들은 말한다. 가드레일이 없어 사고를 불렀다고. 미국에서 산다는 것은 가드레일 없는 절벽 위 고속도로를 달리는 거나 같다.
<편집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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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가 정치에 서툰 이유
입력날짜 : 2007. 05.04.
어스름 속에서 뭔가를 보았다. 이럴 때는 조심하는 것이 상책이다. 뱀인가 했는데 나중에 보니 새끼줄이면, 가던 길을 계속 가면 된다. 그러나 새끼줄인가 해서 덥썩 잡은 것이 뱀이면 큰일이다.
생존본능은 낯선 것은 일단 위험한 것으로 간주(看做)토록 훈련시킨다. '안다'는 것은 대상을 낯선 상태에서 익숙한 상태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지식은 대상을 손쉬운 것으로 만드는 것, 즉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은 권력"이라는 주장이 가능해지는 지경이 바로 이 근처다.
그런데 학자는 많이 아는 사람 내지 많이 알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하나, 학자는 사물-사람을 포함해서-을 장악(掌握)하려는 사람, 즉 지배하려는 사람인 것이다. 지식욕은 곧 권력의지다. 그렇다면 학자가 정치권력의 주변을 기웃거리는 것도 퍽 있음직한 일이다.
그러나 하고 싶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생의 대부분을 글 쓰며 산 필자가 늘 염두에 두는 지침이 하나 있다. "쓰고 싶은 것을 쓰려 말고, 쓸 수 있는 것을 쓰라"는 글쓰기 금언이 그것이다. 학자의 권력의지도 그럴 것이다. 자신이 터득한 지식에 따라 세상을 바꿔 놓고 싶은 욕구가 왜 없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십중팔구 '하고 싶은' 것일 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회귀형 실물경제보다 미래지향적 지식이 더 중요하다"고 일갈(一喝)했던 정운찬 전 서울대총장 역시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잠시 혼동했던 것이다. 정치학을 잘 안다고 정치를 잘한다면, 대통령 출마 자격을 정치학 박사로 제한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경제라고 다르겠는가.
필자는 학자와 정치는 대체로 안 맞는다고 보는 사람이다. 웬고하면, 학문은 정연(整然)을 추구하는 반면에, 정치는 모순의 장(場)이기 때문이다. 근대 정치사상사에서 만나게 되는 두 거물이 있다. 홉스와 로크다. 홉스의 논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빈틈이 없다. 그 결과 그는 괴물과 같은 군주독재의 옹호자가 됐다.
반면에 로크의 이론은 허점 투성이다. 버트랜드 러셀에 의하면, 모순에 너그러운 로크의 그 점이 현실정치에서는 민주주의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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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이중규범
입력날짜 : 2007. 04.30.
TV 드라마 '애인'. 기억하시는가. 남자 주인공은 유동근씨가 맡아 연기했다. 여자 주인공은 기억이 잘 안 난다. 황신혜씨였음직하다. 소위 불륜 드라마였는데, 거기에서 여주공이 하는 말이다. "나는 민석씨를 사랑해요. 하지만 그만큼 내 남편과 아이도 사랑하지요. 민석씨를 내 곁에 머물게 하기 위해 내 가족을 포기(抛棄)할 수는 없어요. 또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민석씨를 멀리할 수도 없어요."
남편과 딸이 있는 여자가, 옛날의 남자와 다시 사랑에 빠져 술회(述懷)하는 넋두리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말인가. 여자는, 마치 중세의 철학 우화에 나오는 뷔리당의 당나귀와 같은 입장이다. 양쪽에 놓인 건초더미 중간에서 어느 쪽으로 갈 지를 못 정해 굶어 죽은 당나귀 이야기다.
실은 필자는 그 드라마를 보지 못하고 소문만 들었다. 앞에 인용한 극중 대사(臺詞)도 실은 어느 논문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현대 한국사회의 이중가치체제'(신수진·최준식 공저)라는 논문이다. 이중가치체제란, 같은 상황에 성격이 다른 두 개의 규범이 공존하며 때에 따라, 사람에 따라 적용되는 경우를 가리킨다. 이런 경향은 어느 나라에나 다 있지만, 논자들에 의하면 특히 한국사회에서 두드러지다고 한다.
그 말이 맞다면 그것은 우리 역사의 파행(跛行)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지사이자 독재자다. 독립지사라는 점에서는 존경을 받지만 독재자라는 점에서는 비난을 받는다. 미국은 대한민국의 어떤 국민들에게 평화의 사도지만, 어떤 국민들에게는 악의 축이다. 대한민국 대학생들에게 삼성은 일하고 싶은 직장 1순위이자 욕도 가장 많이 먹는 기업이다 등등.
삼성에서 밥 먹는 입이 몇 명인지 필자는 자료가 없어 모른다. 현대·기아차 덕분에 먹고 사는-1, 2, 3차 협력업체까지 합쳐서- 근로자의 통계는 신문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 숫자는 기억이 난다. 60만명이다. 그런데도 지난해 조사된 우리나라 국민의 기업에 대한 호감도는 100점 만점에 50점이다. 과히 높다고 할 수 없는 점수다.
역사처럼 거창한 이유 외에, 실로 하찮은 일로 기업의 점수가 왕창 깎이기도 한다. 예컨대 회장님이 아이들 싸움에 끼어드는 따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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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마리 토끼-개방과 정체성
입력날짜 : 2007. 04.13.
어제자 ㄷ일보에, '대통령이 진작 영어에 눈떴다면' 우리나라가 좀더 (낫게) 달라졌을 거라는 취지의 논설위원 칼럼이 실렸다. 앞으로 이 나라에서 지도자가 되려는 꿈을 가진 사람은 (영어에 뒤늦게 눈뜬) 노 대통령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는 대목도 있다. 망발이다. 필자는 지난번 글에서 영어와 '세계와의 소통'과는 직접적 연관성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했다.
영어 공부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다. 영어가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배워 유용하게 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온국민이 영어 강박증에 짓눌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못 된다. 그런데 지난번 필자의 글은 제목이 '영어, 꼭 해야 하나'였다. 영어를 배워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묻는 ○×문제로 오해받을 수 있는 제목이었다. 필자의 불찰이다.
본론으로 돌아가, 앞의 칼럼은 영어에 일찍 눈떠야 대한민국에서 지도자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기왕이면 영어이름도 하나 가짐직하다. 그래서 그런가, 영어학원에 다니는 어린이들은 대개가 영어이름을 갖고 있다. 내 아이에게 부르기 좋고 뜻도 그럴듯한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 것은 부모의 상정일 것이다. 그런 부모들을 위해 영어로 작명해 주는 인터넷 사이트도 여럿 있다.
토인비는 그의 '역사의 연구'에서, 스칸디나비아 문명이 중도에 유산(流産)하게 된 원인에 대해 썼다. 그는 그 원인으로 그들의 놀라운 개방성을 들었다. 특히 그들의 지도층 사이에서는 적국의 왕인 샤를르 마뉴를 동경하여 자식들에게 '카를로스'니 '마그누스'니 하는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유행이었다.
반면에 막부(幕府)의 일본은 서양인을 내쫓고 쇄국으로 갔다. 그러나 대원군의 쇄국과는 달랐다. 일본은 쇄국을 하되 선택적으로 개방을 함으로써 정체성과 근대화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을 수가 있었다.
우리는 어떤가. 한편에서는 무조건 닫아야 산다고 하고, 한편에서는 무조건 열어야 산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이른바 '다선(多線)적 진화'에 대한 인식과 감각이 좀 부족한 듯하다. 같은 목적지를 가도, 이 사람은 이 길로, 저 사람은 저 길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우리는 아직 낯이 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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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꼭 해야 하나
입력날짜 : 2007. 04.11.
노무현 대통령이 교육방송에 나와 "영어도 잘하는 나라가 되자"고 했다. "우리는 세계와 호흡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고, 세계와 호흡하기 위해서는 영어가 꼭 필요하다"고 했다. 최근 대통령에게 호의적으로 돌변한 ㅈ일보-서울에서 나오는-는 이번에도 즉각 지지 사설을 내놨다.
ㅈ일보는 국민들이 영어를 잘해서 잘 살게 된 예로 핀란드를 들었다. 논리학에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誤謬)'라고 부르는 논법이다. 반증(反證)은 쉽다. 거명하여 예를 들기가 좀 뭐하나, 필리핀 국민도 영어를 잘하지만 그다지 잘 사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일본 국민이 영어를 잘해서 잘 사는 것도 아닐 것이다. 일본 국민은 대체로 우리보다 영어를 못한다. 적어도 더 잘하지는 않는다.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꼭' 영어가 필요하다는 것도 과장법이다. 추기경이자 위대한 인문학자였던 존 헨리 뉴먼이 그의 명저 '동의(同意)의 원리'에서 든 예를 소개한다. 프랑스어로 된 경제학 책을, 프랑스어는 알지만 경제학은 모르는 영국 고등학생이 영어로 옮겼다고 하자. 그리고 영역된 그것을, 프랑스어를 모르는 영국 경제학자가 읽는다고 하자. 고등학생은 프랑스어는 알지만 거기에 담긴 뜻은 알지 못한다. 반면에 경제학자는 프랑스어는 모르지만 영역만 읽고도 그 내용을 안다. 적어도 짐작할 수는 있다.
동의의 원리가 그렇다면, 세계와-미국과도-소통하기 위해 꼭 영어를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영어는 전문적인 번역가·통역가를 키워 맡기고, 나머지 국민은 영어 공부에 들이는 시간과 정력을 자기 분야에 쏟는 것이 더 능률적이고 경제적일 수도 있다.
차제(此際)에, 학문의 원서 콤플렉스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고 가자. 우리 대학사회는, 논문의 참고문헌은 소위'원서'라야 한다는 고정관념 내지 강박증이 있다. 미국 대학에서 나오는 논문들은 칸트와 헤겔, 원효와 퇴계까지도 영역본을 인용하고 참고문헌에 올리는 것이 자연스럽다. 일본과 중국의 학자들도 일역(日譯) 혹은 한역(漢譯)된 서양 텍스트를 쓰는 것을 우리처럼 꺼리거나 겁내지 않는다.
우리 대학의 원서 사대주의는 학문적인 이유보다는 '내 마음의 식민주의'의 반영일 공산이 아주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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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여옥씨에게서 배울 점
입력날짜 : 2007. 04.06.
좌파세계에서도 극좌는 이단(異端) 취급을 당한다. 극좌주의는 대중으로 하여금 좌파를 등지게 만들고, 지배계급을 필요 이상으로 겁줘 탄압을 자초함으로써 혁명에 걸림돌이 된다.
우파 쪽에서도 극우는 반갑지 않다. 그래서 앤 쿨터는 미국의 대표적 우익지 '내셔널 리뷰'에서 해고당했다. 9·11이 나자 그녀는 "이슬람 국가를 공격해 그 지도자를 죽이고, 그 국민을 기독교로 개종시켜야 한다"고 썼다. 앤드루 샐리번 같은 이도 그녀의 글쓰기가 우익에 역효과를 낸다며 비판했다. 샐리번 씨는 우리나라로 하면 조갑제씨 같은 유명 보수 논객이다.
그러나 앤 쿨터는 남의 눈총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 악명도 돈이 되는 세상이다. 극우가 우익에는 도움이 안 될지 모르나, 그녀를 돈방석에 앉혀 주었다. 흥행의 비결은 독설과 비속어(卑俗語)다. 힐러리에게는 "야심 때문에 남편의 불륜에 눈감은 쓰레기"라고 했다. 매번 이런 식이다.
전여옥씨의 독설도 손색이 없다. 대통령을 지낸 분에게 치매 운운 했을 때는 한나라당에서조차 '과했다'는 반응이었다. 최근에는 택시기사가 분신한 사건에 대해, 왜 좌파 지도부는 분신하지 않고 '막장인생'이 몸을 던져야 하느냐고 말해 국민을 으악케 했다. 이 발언을 소개하며 어느 진보 신문의 기자는 "전여옥씨의 발언 중 8할 이상에서 정신적 독극물이 검출된다"고 썼다.
필자도 앤 쿨터나 전씨의 타입은 취향에 안 맞는다. 그들의 우향(右向)이 싫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극단(極端)이 싫다. 한미 FTA에 대한 그녀의 오버액션도 그림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그녀가 한 가지는 지켰다. 정책에 대한 충실이다. 그녀는 노 대통령을 도와야 한다고 했다. 노 대통령이 반미를 할 때는 미웠지만, 친미를 하니까 갑자기 예뻐 보인 것이다. 필자의 눈에 말고, 그녀의 눈에 말이다.
신당 추진하는 분들은 그 점이 모호하다. 그들은 새 연금법에 대한 국회 표결에서 기권표를 던졌다. 그 결과 새 연금법은 부결됐다. 신문들의 분석 기사에 의하면, 그들이 기권을 한 것은 유시민 복지부장관을 물먹인 거라고 한다. 만일 그랬다면 정책보다 사람을 표결에 부쳤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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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말리는 도올
도올 김용옥 교수는 기독교를 '까는' 데 재미를 붙였다. 덩달아 신이 난 것은 매스컴이다. 그가 한마디 할 때마다 매스컴은 새로운 행성(行星)이라도 나타난 듯 흥분한다. 제목의 크기는 편집자가 받은 심적 충격의 크기를 반영한다. 도올의 어떤 주장이 매스컴을 그토록 놀라게 하는 것일까. 필자는 그 점이 궁금하다.
구약은 그들의 민족신과 유대인 사이의 계약이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떼어 버려야 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칙령(勅令)에 의해 공인 받은 기독교는 '황제의 종교'이지 순수한 '예수교'가 아니다. 삼위일체 교리도 예수의 왜곡이다. 신 존재 증명 운운하는 스콜라철학은 헬레니즘에 속하며, 기독교와는 무관하다.
도올의 기독교 비판은 대충 이상과 같은 것이다. 이런 류의 주장에 매스컴들이 놀라워한다는 그 점이 필자는 놀랍다. 도올의 이야기는, 기독교 교리사나 교회사를 한 권이라도 읽어 본 사람은 다 아는 내용이다. 지난 2000년간 번번히 있었던 이야기들이고, 번번히 반박당한 이야기들이다.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니 놀랄 일도 없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을 놀래 주는 방법을 안다. 그는 묵은 술을 새 부대에 넣어 파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철이 한참 지난 상식을 포장만 바꿔 마치 신상품(新商品)인 양 들이대는 데 그는 천재적이다. 해묵은 주장을 신선하게 보이도록 하는 수법은 주로 세 가지다.
첫째, 거침없는 험구(險口)다. 선무당이 우선 호통부터 쳐서 손님을 기죽이는 수법이다. 둘째, 과장법이다. 그에 의하면, 밀라노 칙령으로 공인된 기독교는 '순수한' 정치적 타협이었고 술수였다. 그러므로 그 이후의 기독교는 '순수한' 예수의 종교가 아니다. 이런 식이다. 증류수라야 식수로 쓸 수 있다는 식인데, 역사의 성장-혹은 성장하는 역사-를 무시하는 정태주의(靜態主義) 사고다. 셋째, 반론이 이미 나와 있는 사실은 가급적 숨긴다. 그 결과, '모르는' 사람에게 그의 주장은 반론이 없는 진리처럼 보인다.
서두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뻔한 주장에 매스컴들이 춤추는 이유가 뭘까. 그 방면에 대한 공부가 없어서다. 모르니까 묵은 이야기를 새 이이야기인 줄 알고 화들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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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책읽기
최근 어느 신문에, 노무현 대통령의 애독서 목록(目錄)이 소개됐다. 당연히 정치와 경제 서적이 많았지만, '칼의 노래' 같은 소설도 끼어 있었다. 이순신 이야기다. 탄핵 위기로 내몰렸을 때 대통령이 '다시' 꺼내 읽었다는 소설이다. 12척으로 330척의 적선(敵船)과 맞섰던 충무공의 상황에 자신의 상황을 오버랩시키며 읽었음직하다.
그가 무슨 책을 읽는가를 살펴보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손수 쓴 책만큼이겠는가. 그가 쓴 책에는 그의 생각이 직접 드러나 있게 마련이다.
책의 제목은 '노무현이 만난 링컨'이다. 물론 저자는 노무현씨이고, 발행연도는 2001년이다. 2001년이면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이다. 책의 머리말에는 링컨과 동시대인이었던 프레데릭 더글라스의 말이 길게 인용돼 있다. 그 일부를 떼어 옮긴다.
"대통령직에 있는 동안 링컨보다 더 맹렬한 공격을 받은 위대한 공직자는 없다. 자기 진영의 내부와 외부, 그리고 반대편 진영에서 강력하고 신속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는 노예제 폐지자의 공격을 받았다. 노예 소유주에게도 공격을 받았다."
책의 꼬리말에는 이런 사실도 소개됐다. "링컨이 대통령직에 있던 당시, 언론은 종종 링컨을 '독재자, 폭군'으로 불렀다. 링컨의 고향에서 발행되는 신문조차 그를 '미국의 공직을 불명예스럽게 만든, 가장 간교하고 가장 정직치 못한 정치가로 욕했다."
링컨에 관한 이야기지만, 저자 자신의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도 읽힌다. '대통령의 당(黨)'에서 대통령이 스스로 탈당을 해야 할 만큼 그의 형편은 곤고(困苦)하다. 야당은 물론이고 '자기 진영의 내부와 외부'로부터, 그리고 보수 뿐 아니라 진보로부터도 공격받고 외면당하는 대통령의 지금 형편을, 이 책은 마치 컬러 복사기로 복사한 듯 미리 그려내고 있다. 대통령과 신문의 불화를 언급한 대목에 이르면 더욱 그렇다.
이 책의 저자는 나중에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됐다. 링컨을 닮고 싶었던 저자는 혹시 링컨의 곤경까지도 닮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대통령이 처한 어려움은 의식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초한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한순간 필자의 뇌리를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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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일처제 논술공부
입력날짜 : 2007. 03.23.
몇 해전 책을 한 권 냈더니,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이라는 곳에서 연락이 왔다. 한국어 형태를 연구하는 데 자료로 쓰고 싶은데, 괜찮겠냐는 것이었다. 괜찮다고 대답은 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종종 주어를 빼 먹는 등, 필자의 한국어에 일탈(逸脫)이 많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짐작컨대 바로 그 점, '문제가 많은 한국어'가 연구자의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그런 필자이니 글쓰기에 대해서는 되도록 말을 삼가는 편이다. 그러나 신문 같은 데 실리는 논술 지도도 썩 현실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논술을 잘 쓰고 싶으면 많이 읽고 많이 써 보라고 권한다. 꼭 읽어야 할 책 100권을 소개한 곳도 있다. 내신(內申) 살피랴 수능 준비하랴 밤잠도 아끼는 수험생에게 100권을 읽고 100번씩 써 보라는 주문은 무리다.
필자도 나름대로 방법이 있긴 한데, 남에게도 그것이 유효할지는 알 수 없다. 필자에게 약이 남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다. 필자가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 책읽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글자 그대로 독창적인 존재는 창조주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나 누군가를 모방하며 산다. 그것은 흠이 아니다. 오히려 줏대 있게 살려면-줏대 있는 글쓰기를 위해서도-따라 해 볼 모델이 있어야 한다. 젊은 날 필자의 글쓰기 모델은 파울 틸리히였다. 그를 되풀이해 읽으며 필자는 생각하는 법과 글쓰는 법을 배웠다. 독일인이 늙어서 배운 틸리히의 영어는 단문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필자가 단문을 쓰는 것은 아마도 그 영향일 것이다.
성실한 남편이 아내 하나만 사랑하듯, 줏대 있는 글을 쓰기 위해서 우선 한 저술가의 생각, 논리, 문체에 능통해질 필요가 있다. 많이 읽고 많이 써 보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논술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한국소설사에서 '감수성의 혁명'을 주도할 당시 김승옥 씨의 책상머리에는 늘 '마르테의 수기'가 있었다고 한다. 소설가 신경숙 씨는 김동리 소설을 필사(筆寫)하며 쓰는 공부를 했다.
아내 한 사람에게 충실하되 다른 여성의 아름다움에도 거리낌없이 경탄할 줄 알게 되면, 글쓰기 공부가 끝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한 전범(典模)에게 정통하고 난 다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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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科와 고양이科
입력날짜 : 2007. 02.05.
그는 노무현 대통령을 개과(科)라고 했다. '개'가 아니라 '개과'다. 한편 이회창 씨와 고건 씨는 고양이과로 분류됐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기자들과 밥을 먹으며 가볍게 던진 말이다. 그는 사람은 누구나 개과나 고양이과로 분류된다고 했다. 부연설명에 따르면, 개과는 붙임성이 좋아 주변과 잘 어울린다. 고양이과는 깍쟁이로 친화력이 떨어진다.
유 청장은 유시민 보건복지장관도 개과에 넣었다. 전업(專業) 국회의원 시절 유 장관은 못 말리는 싸움꾼이었다. 그렇지만 틀림없는 개과라고 했다. 유 장관이 백수(白手) 시절 딱 한 번 그와 대취(大醉)한 적이 있는데, 밤은 늦고 잘 곳이 마땅치 않다는 그를 필자의 집에서 하룻밤 재워 보낸 적이 있었다. 낮선 손님 데려오는 걸 질색하는 필자의 아내에게 아침밥까지 잘 얻어 먹고 떠난 걸 보면 개과가 틀림없을 것이다.
개와 고양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프랑스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가 쓴 재치있는 글이 있다. 그의 비교에 의하면, 고독한 동물인 고양이는 동족을 피한다. 반면에 개는 동족을 열심히 찾는다. 유 청장의 관점과 혹사(酷似)하다. 유 청장이 투르니에를 읽고 한 이야기일 수 있다.
거꾸로 생각할 수도 있다. 개들이 동족을 열심히 찾는 것은 그만큼 외로움을 탄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고독한 동물은 고양이가 아니라 개다. 어쨌든 개가 친화적 -내지 동화적-인 것은 사실이다. 한 마리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다 따라 짖는다. 그러나 고양이는 주로 혼자서 운다. 그런데 왜 개는 '짖고' 고양이는 '우는' 것일까.
투르니에는 소설가다. 허구(虛構)와 함께 사는 사람인 것이다. 한편 자연과학자 콘라드 로렌츠가 있다. 동물 비교행동학자다. 그 방면의 업적으로 노벨상도 받았다. 그런 그가 개와 고양이에 대해 쓴 것이 없을 리 없다.
로렌츠는, 개와 고양이 사이에 사랑이 싹트기 어려운 것은 '언어적 곤란' 때문이라고 한다. 개와 고양이는 상대방의 표정과 동작을 읽을 능력이 없어 늘 서로 오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말 못하는 짐승을 탓할까. 더욱 딱한 것은 언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개와 고양이처럼 지내는 인간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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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되고, 우린 안 되는 것
노무현 대통령이 기어이 개헌 시안을 내놨다. 대통령을 4년 하고 국민이 뽑아주면 한 번 더 할 수 있도록 하자는 내용의 개헌안이다.
시안 발표 직후 나온 ㅎ일보-서울에서 발행되는-의 사설은 제목이 '안 될 줄 알면서도 던진 개헌 시안'이었다. 제호가 '센터'인 ㅈ일보의 사설 제목은 '개헌안 부결되면 대통령 책임질 건가'였다. 이렇게 신문들은 대통령의 개헌 발의(發議)가 헛물켤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어투다.
여론조사 결과는 꼭 그렇지도 않아, 찬반이 엇비슷하다. 그러나 여론은 버금의 일이다. 열쇠는 국회의 손에 있는데, 열린우리당을 뺀 나머지 당은 모두 '불가' 쪽에 표를 던질 기세다. 이렇게 되면 대통령은 뜻을 이룰 가망이 희박(稀薄)하다.
이런 사실들을 대통령이 모를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기어이 해 보겠다고 한다. ㅎ일보의 말처럼 '안 될 줄 알면서도'요, ㅈ일보의 말처럼 '아니면 말고'의 심산인가. 아무렴 그럴 리야.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중 개헌이 '역사적 책무'라고 했다. 그는 역사를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신문이나 야당 등 당장(當場)의 존재들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역사는 약손과 같다. 좌절의 쓰라린 상처를 섬섬옥수(纖纖玉手) 다정한 손길로 어루만지며 역사는 속삭인다. "오늘 너는 패배자지만, 내일은 승리자가 돼 있을 것이다." 달리 보면, 그것은 역사의 평가밖에 달리 기댈 곳이 없을 만큼 대통령이 처한 현실이 고단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미국 같으면 이럴 때 대통령이 의회 지도자와 야당 거물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처리'를 부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것이 명분 있는 일이면 야당도 들어주고, 그런 야당의 아량(雅量)을 국민들은 칭송해 마지 않는다. 그런 일이 어째서 미국은 되고, 우리는 안 되는가.
미국 정치에서 여야는 맞수 관계다. 반면에 우리의 그것은 적대 관계다. 누구의 책임인지는 모르나, 상황이 그렇다. 맞수에게 승복하는 것은 미덕일 수 있다. 그러나 적과는 내통이요 이적(利敵) 행위가 될 뿐이다. 대통령이 던진 공을 야당의 그 누구도 선뜻 손에 쥘 수가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이것이 우리 정치의 절망적인 모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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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에 대하여
일본 황실에서는 매 11월 23일 신상제(新嘗祭)라는 것을 지낸다. 그 해 처음 거둔 쌀을 신들에게 바치고 함께 나눠 먹는 행사다. 천주교 미사에서 신성한 빵을 신자들이 나눠 먹는 것과 비슷하다. 미사의 빵이나 신상제의 쌀은 그저 식량이 아니다. 신성한 실체다.
쌀을 다스리는 자가 나라를 다스렸다. '천황'은 황궁에 논을 만들어 손수 묘를 심는 시늉도 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쌀의 주재자(主宰者)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의 왕들도 궁중 논에서 농사를 지어 스스로 농신(農神)인 것을 과시했다. 농민과 수고를 함께 한다는 뜻도 있었다.
동남북아에 두루 퍼져 있는 수락(穗落) 신화에 의하면, 새가 하늘에서 볍씨를 물어다 줘 비로소 인류가 농사를 짓게 됐다고 한다. 쌀이 하늘에서 왔다는 사상이다. 쌀을 영혼이 깃든 인격적 존재로 대하는 도령(稻靈) 사상도 있다.
자동차를 팔아 번 달러로 미국쌀을 사다 먹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쌀농사를 짓고 먹어온 민족에게 쌀은 경제적으로만 셈할 수 없는 신성한 무엇이다. 그러므로 쌀은 경제적으로 뿐 아니라 종교학으로 다뤄야 할 문제인 것이다.
어쨌거나 쌀은 앞날이 평탄치 않아 보인다. 종교에 불어닥친 세속화(世俗化) 바람은 쌀을 둘러쌌던 신성한 후광(後光)까지 날려 버리는 추세다. 일본은 식량자급을 사실상 포기한 상태다. 일본의 농업인구는 노동인구의 4% 이하다. 그런데 정치가들에게 인구는 곧 표(票)다. 표도 안 되는 곳을 지키기 위해 표 되는 곳을 희생시킬 정치가가 있을 것인가.
우리나라는 아직 버틸 생각이다. 국무총리 지명자는 "쌀 포함 땐 한미 FTA가 깨진다"고 호언했다. 말을 하는 지명자의 표정과 음성은 마치 순교까지도 각오한 듯 엄숙하고 단호했다. 그걸 보며 필자의 마음 한 구석에서 두 가지 기우가 모닥불 연기처럼 피어 올랐다.
첫째, 저 말이 지켜질까 하는 기우. "직을 걸고 쌀만은 지키겠다"던 대통령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임기중 우리 밥상 위에 '칼로스'쌀로 지은 밥이 올라왔다. 둘째, 지켜도 문제일 수 있다는 기우. 한 마리 양을 지키기 위해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는 버림 받는 것 아닐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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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일의 세상읽기] 김연아 품새의 뿌리
김연아의 목에는 동메달이 걸렸다. 금과 은은 모두 일본이 가져 갔다. 그날의 경기를 필자도 봤다. 김연아가 넘어지는 장면도 물론 봤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반면에 일본선수 아사다 마오는 모든 과정을 완벽히 해냈다. 경기를 마친 아사다는 펑펑 울었다. 스스로 대견스러워 쏟는 눈물이었다.
그러나 필자의 눈에는 김연아의 연기가 더 눈부셨다. 같은 편이라서? 감정에 휘둘리기에 필자는 감성 훈련이 꽤 돼 있는 편이다. 그럼 피겨를 잘 몰라서? 그건 그럴 수 있다. 그렇다면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김연아의 캐나다인 코치의 말이다. "연아는 품새(shape)가 좋다. 물 흐르는 듯한 부드러움이 연아의 가장 큰 장점이다. 억세고 직선적인 아사다 마오나 미셸 콴과는 다르다."
카타리나 비트가 있었다. 기억할 것이다. 84년, 88년 올림픽에서 거푸 금메달을 땄던 동독(東獨) 피겨 선수다. 탱고 리듬에 맞춰 뿜어내는 열정의 파워가 굉장했다. '억세고 직선적'인 피겨라면 그 정점에 비트가 있고, 콴이나 아사다는 좀더 세련되긴 했으나 비트의 재해석 내지 각주(脚註)라고 할 것이다.
김연아는 그들과 '카테고리'가 다르다. 두 번씩이나 엉덩방아를 찧은 김연아 앞에서 아사다의 '완벽'이 오히려 빛이 바랬던 이유가 이로써 설명된다. 그리고 그런 '카테고리'의 차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기인할 것이다. 아사다 마오는 어릴 때부터 발레를 공부했다고 한다. 김연아는 춤을 배운 적이 없다.
발레는 서양춤이다. 서양춤은 고딕 성당처럼 하늘 지향적이다. 깡총깡총 뛰는 발레 동작은 지구의 중력(重力)을 박차는 행동이다. 발레를 배운 적 없는 김연아가 트리플 악셀(공중 3회전반)이나 쿼드러플(공중 4회전)에 약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반면에 한국춤은 대지에 충실하려고 한다. 님을 향해 달려갈 때도 무용수의 발은 땅을 쓸며 이동한다.
'물 흐르는 듯한 부드러움'은 한국춤 고유의 품새다. 1939년 최승희의 유럽 공연을 보고 프랑스의 '피가로'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조각과 같은 선과 놀랍도록 유연한 손의 표현력으로 그녀는 열반(涅槃)과 미소와 눈물과 황홀함을 불러일으킨다." 김연아의 '춤'이 그랬다. <편집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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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일 약력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평론]
전 제민일보 논설위원
현 한라일보 편집고문
첫댓글 저번 날에 읽고 가면서 역~~시! 감탄했었습니다. 목사님의 친형님이신 줄 알고 있었는데...,참 부럽습니다. 저는 사촌도 없이 자랐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