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비오 파스]시적 계시(1)
종교처럼 시도 인간의 원초적 상황, 즉 인간이란 잔혹하고 냉담
한 세계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과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유한
한 시간밖에 살지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시인도 나름의 부정적인 경로로 언어의 가장자리에 닿는다. 그 가
장자리는 침묵이며 백지다. 침묵은 매끄럽고 조밀한 수면의 호수와
같다. 말들은 그 수면 아래 잠겨 있따. 잠수하여 바닥에까지 이르러
입을 다물고 기다려야 한다. 빔 다음에 충만함이 오듯이, 영감은 불
모의 상태 다음에 온다. 시적인 말은 가뭄의 시기를 거쳐 움튼다.
그러나 시의 구체적 내용이 어떤 식으로 표현되든지 간에, 시 언어
는 이 땅 위의 삶을 긍정한다. 다시 말해, 시편 개개의 내용과는 관
계없이 시적 행위, 시를 쓰는 일, 시인의 언표는 어떤 해석이 아니
라 본래부터 인간 조건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 혹은 저것에 대해,
아킬레스 혹은 장미에 대해, 죽음 혹은 삶에 대해, 빛 혹은 파도에
대해, 죄 혹은 무죄에 대해 말하거나 간에, 시적 언어는 리듬이며
끊임없이 솟아나고 소생하는 시간성이다. 그것은 리듬이면서 또한
대립되는 것들을, 삶과 죽음을 한마디로 껴안는 이미지다. 실존 그
자체처럼, 한껏 고양된 순간에조차도 그 안에 죽음의 이미지를 품
고 있는 삶처럼, 시간의 흐름인 시 언어는 죽음과 삶을 동시에 긍정
한다.
시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판단도 아니고 해석도 아니다. 솟구쳐
오르는 리듬과 이미지가 표현하는 것은 단지 우리 자신일 뿐이다.
시의 단어가 갖는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드러내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조건이다. 여기서 미리 말
해둘 것은, 개개의 시 작품의 의미와 시를 쓰는 것의 의미는 서로
다르며, 우리가 주목을 끄는 것은 시인이 시를 쓰고 독자들이그것
을 다시 살려내는 시적 행위의 의미인 것이지, 이런 혹은 저런 시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이제, 시가 원초적인 인간의 조
건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시를 쓴다는 것이 인간의 결핍 혹은 근원
적인 결함에 대한 판단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인간의 근원적 조건
은 본질적으로 결함을 갖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우연적이며 유한하
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계 앞에서 놀라는 것은, 세계가 낯설고 황량
하기 때문이다. 세계가 우리에게 무관심하다고 느끼는 것은, 세계
속에서 인간이 갖는 의미란 고작해야 인간의 존재 가능성이 세계에
부여하는 의미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그
리고 이러한 가능성은 곧 죽음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나자마
자 곧 죽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간의 삶은 낯설고 황
량한 곳에 머물러 있는 극도의 불유쾌한 상태에 놓여 있다. 인간의
삶이 불유쾌한 것은, 인간이 향해가는 곳이 무이며 비존재이기 때
문이다. 인간의 '결핍' 혹은 '부재' 는 원천적인 것이지 후천적으
로 연유되는 것이 아니며, 결핍 그 자체가 인간의 존재 방법이다.
다시 말해 결핍은 인간의 근원적 조건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하이데거는 오토와
일치하는 것 같다. "(인간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
의 존재란 "현재를 사는,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는, 즉 죽을 운명"이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확실히 인간에게 신의 완전함이라는 관념
은 배제되어 있으면, 근거 없는 결핍과 구원 없는 부채가 주어졌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빚지거나 혹은 결핍의 상태
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것은 갚을 길 없는 부채이며 지울 수 없는
오점이다. [인생은 꿈이다]를 쓴 스페인의 극작가 칼데론과 불교가
말하는 바는 옳다. 인간의 가장 큰 죄는 태어난 것인데, 왜냐하면 모든
태어남은 이미 죽음을 상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해석이 가
져온 역할을 우리에게 목포한 하이데거의 분석은 결국 우리가 속고
있었음을 알게 해주었다. 만일 시를 쓴다는 것이 진실로 인간의 원초
적이고 영원한 조건을 발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핍을 인정하는
것이다.
시적 계시(2)
[존재와 시간] 그리고 또 다른 책 득히 [형이상학이란 무엇인
가?]에서 더욱 적절히 보여주는 것처럼, 하이데거 스스로 이러한
'비존재', 즉 이간의 존재가 언젠가는 끝난다는 부정적 사실이 결
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
혹은 무엇인가 결핍된 존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결핍
된 그 어떤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이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
다면 죽음은 인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며, 밖에서부터 인간에게 찾
아오는 이상한 일도 아니다. 만일 죽음이 우리의 일부분이 아니라
고 여긴다면, 유일하게 가능한 태도는 금욕주의적인 태도다. 우리
가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죽음을 두려워하며 죽음이 인간 사유의 중심을 차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죽음은 우리와 분리될 수 없다. 죽음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다. 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다. 그
리고 생명을 가진 것은 모두 죽는 것처럼, 죽음이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삶 자체에 포함되어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죽음은 인간 삶의 결핍이 아니라, 반대로 삶을 완성시킨다. 산다는
것은 앞으로 향해 나아가는 것, 낯선 것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며 이
러한 전진은 우리 자신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
은 죽음을 직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
끊임없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낯선 것을 만나는 것은 긍정적
이다. 죽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열려 있는 공간, 즉 빔
이다. 산다는 것은 죽음에 던져져 있음에 근거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죽음은 단지 삶 안에서, 삶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태어남이 죽음
을 암시하는 것이라면, 죽음 역시 태어남을 끌어안고 있다. 만일 태어
남이 소극성으로 가득 차 있다면, 죽음은 적극성을 띠는 것인데, 왜냐
하면 태어남이 죽음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에 둘러싸여 있
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삶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삶과 죽음, 존재 혹은 무는 별개의 실체나 사물이 아니다. 부정
과 긍정, 결핍과 충만은 우리 안에 공존한다. 아니 바로 우리다. 존
재는 비존재를 암시한다. 그리고 비존재는 존재를 암시한다. 하이
데거가 존재란 무의 체험으로부터 솟아오르거나 혹은 싹튼다고 단
언했을 때,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틀림없이 이것이었다. 결국 그 인
간은 스스로를 관조하자마자, 자신이 의미 없는 사물들과 대상들의
총체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자신도 하나의
사물에 불과하며, 모든 것이 각자 속으로 침잠하며, 모든 것이 표류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의미가 부재한다는 것은, 인간은 사물들과 세
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지만 그 의미란 바로 죽음밖에 없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게 됨으로써 비롯된다.
혼돈으로의 추락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이다. 우리 자신이
무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무에 이름을 붙인다면-실제로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무는 존재의 빛으로 반짝일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을 마주하고 사는 것은 삶 속에 죽음을 끼워넣는 것
과 같기 때무이다. 존재는 무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에, 그리고 죽음
은 삶으로부터 태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무에 이름을 붙일 수 있으
면 죽음과 삶을 재통합 할 수 있다. 우리는 존재를 통해서 무로 다가
갈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한 부정의 초월이기도 하다. 부정과 긍정은
하나의 분리 불가분한 핵을 형성한다. "우리는 존재의 가능성이기
때문에 비존재의 가능성이다"라는 구문은 뒤집어서 말해도 옳다.
시적 계시 (3)
고뇌가 우리를 우리 자신과 만나도록 해주는 유일한 통로는 아니
다. 보들레르는 권태가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에 대해서 언
급했다. 좌초한 의식이 물결의 단조로운 부딪힘만을 반영하는 동
안, 우주는 불결한 회색빛의 바다처럼 표류하며 흘러간다. 권태로
운 사람은 '아무 일도 없어'라고 말하고, 실제로 의식이 소멸한 바
다 위에서 유일하게 반짝이는 것은 무다. 현대 세계에서 매우 빈번
한 상황인 군중 속의 고독 또한 이런 상황에 포함된다. 처음에 그는
군중과 떨어져 있다고 느낀다. 군중들의 행위가 무분별하고 기계적
인 행동으로 전락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는 자신의 의식 속으로
도피한다. 그러나 의식은 갈라지고 그에게 심연을 드러낸다. 그 또
한 전락하고 죽음을 향하여 표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든 상태에는 일종의 주지적인 조수의 흐름이 있다. 인간의 하찮
음의 드러남은 존재의 드러남으로 변한다. 죽음과 삶, 우리는 살면
서 죽고, 죽으면서 산다.
사랑의 경험은 대립되는 것들이 순간적이지만 완전하게 합일 되
는 것을 섬광처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한 합일이 존재다. 하
이데거도, 사랑하는 그녀의 모습 앞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우리 자
신과의 만남으로 인도해줄 수 있는 통로 중의 하나라고 지적했다.
자신의 생각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는 않았지만, 하이데거가 우리
모두가 전부터 막연히 알고 있는 것을 확신했다는 것을 주목할 만
하다. 사랑 혹은 사랑의 기쁨은 존재의 드러냄이다. 인간의 모든 움
직임들처럼, 사랑은 찾아가는 것이다. 기다림의 과정에서 우리의
전全 존재는 앞으로 향한다. 그것은 열망이며, 아직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채 끝내 얻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하나의 가능성인 어떤 것
-그녀의 출현-을 향한 쏠림이다. 기다림은 우리를 잠 못 들게 한다.
즉, 자신 밖으로 나와서 서성이게 하는 것이다. 일 분 전만 해도, 우리
는 우리의 세계에 정착하여 사물과 존재들 사이에 거리를 느끼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움직였다. 이제 초초함과 열망이 증가할수
록, 풍경은 우리로부터 멀어져가고, 마주선 벽들과사물들은 뒤로 물러
서서 자신 속으로 숨으며, 시계는 더욱 느리게 간다. 모든 것이 우리가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별개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세계는 낯선 것이 된다.
어제 우리는 홀로 있다. 기다림 자체도 절망으로 변한다. 왜냐하면 만
남의 희망이 확실한 고독으로 번복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오지 않을 것
이다. 아무도 없으리라. 아무도 없다. 나 자신 역시 아무도 아니다. 우리
발 밑에 무가 열린다. 그리고 그 순간에 예기치 않은 일, 이제는 기대
하지도 않는 일 일어난다. 사랑하는 사람의 급작스러운 출현이 가져다
주는 기쁨은 기절할 것만 같은 것이다. 땅이 꺼지고, 말문이 막히며,
기쁨으로 호흡이 멈춘다.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순간, 모든 것이
정지한다. 자기 자신 속으로 무겁게 떨어져 내리던 , 뚫고 들어갈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고, 이름붙일 수도없는 세계가 갑자기 일어서고, 솟아올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향해 비상한다. 세계는 누군가의 눈길에 의해
자성을 띠게 되고, 신비로운 균형의 상태를 이룬다. 모든 것은 의미를 상실
했고, 우리는 난폭한 실존의 벼랑 끝에 놓여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은 빛을
발하고, 의미를 획득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출현이 존재를 회복시킨다. 더
적절히 말하면, 혼돈 속으로 추락하던 존재를 끄집어내서 새롭게 창조한
다. 존재는 무로부터 태어난다. 그러나 네가 나를 쳐다봐주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다시혼돈으로 추락하고 나 역시 그 속으로 떨어진다. 그것은
팽팽한 긴장이며, 심연 속에서 춤추는 것이고, 칼날 위를 걷는 것이다.
세계를 푸는 암호, 나 자신을 푸는 암호, 존재의 암호인 너는 여기, 바로
내 눈앞에 있다.
시적 계시 (4)
땅속 깊은 곳의 물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파도가 해변을 덮는 것처럼, 현존은 표면으로 떠오른다. 모든 것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고동친다. 존재와 겉모습은 하나이며 동일하다. 숨겨진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은 자신으로 충만해져서 빛을 발하며 자신을 나타낸다. 존재의 조수. 존재의 물질에 기끌려서 나는 너에게로 다가가서, 너의 가슴을 만지고, 너의 피부를 쓰다듬고, 네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세계는 사라진다. 이제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없다.사물과 사물의 이름, 숫자, 기호는 우리 발 밑에 떨어진다. 이제 우리는 말을 벗어 던졌다. 우리 이름을 잊어버리고 대명사들을 서로 혼동되고 얽힌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우리는 위를 향해 솟구쳐 오른다. 이름과 형태가 흘러가며 소실되는 동안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 얽매여 추락한다. 강 아래 쪽으로 , 강 위 쪽으로, 너의 얼굴은 도망친다. 현존은 자신 속에 잠겨, 발판을 잃는다. 몸은 몸을 잃는다. 존재는 무로 떨어져 내린다. 존재는 무다. 무는 존재다. 나는 눈을 뜬다. 낯선 몸이 눈앞에 있다. 존재는 다시 숨어버리고 겉모습이 나를 둘러싼다.그 순간에 질문이 솟아오를 수 있다. 그 질문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낯선 그 모습 뒤에 숨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가하는 고문이며 가학이다. 그러한 질문은 큰 사랑의 절망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그 모습 뒤에는 아무것도 없기 대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렇게 공허한 모습으로부터 존재가 일어선다.
사랑은 죽음으로 귀결되지만, 우리는 태어나면서 그 죽음으로부터 빠져나온다. 사랑은 죽음이며 탄생이다. 마차도는 "여인은 존재의 이면이다"라고 말했다. 여인은 순수한 현존이며 존재는 그 속에서 떠오르며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속에 가라앉으며 숨는다. 이렇게 사랑은 존재와 무의식시적 드러냄이다. 그 드러냄은 수동적 드러냄, 즉 연극 공연처럼 우리 눈앞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참여하는 어떤 것이며 우리가 우리를 만들어가는 어떤 것이다. 사랑은 존재의 창조다. 그때 창조되어지는 존재는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창조할 때 우리를 소멸시키며, 소멸시킬 때 창조한다.
자연 앞에서의 우리의 행위도 이와 비슷한 변증법을 보여준다. 바다를 바라보거나 혹은 산을 마주볼 때, 숲 속에 파묻혔을 때 혹은계곡의 입구에 섰을 때, 우리가 첫번째 느끼는 감정은 낯설음 혹은 분리의 감정이다. 우리는 달라진 것을 느낀다. 자연은 스스로의 실존을 보유하는 우리와 다른 어떤 것으로 모습을 나탄낸다. 이러한 떨어져 있음은 곧 적대감으로 변한다. 나뭇가지들은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한다. 수풀 속에서는 누군가 우리를 엿본다. 모르는 생물체들이 우리를 위협하거나 비웃는다. 반대의 상황이 일어날 수 도 있다. 자연은 자신 속으로 몸을 춤츠리고 파도는 무심하게 밀려왔다 밀려간다. 바위는 더 견고해지고 불투명해지며, 사막은 더욱 텅 비며 깊이를 알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문을 닫아버린 수많은 실존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 대한 관조가 지속되고 두려움이 우리를 마비시키면,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감정에서 그 반대의 상태로 넘어간다. 파도의 리듬은 우리 몸 속의 피의 리듬과 박자를 맞춘다. 바위들의 침묵은 우리 자신의 침묵이다. 모래 위를 것는 것은 모래처럼 무한하게 펼쳐진 우리의 의식을 걷는 것이다. 숲의 두런거림은 우리에게 넌지시 말을 한다. 우리는 전체의 부분을 이룬다. 존재는 무로부터 솟아오른다. 동일한 리듬이 우리를 움직이고, 동일한 리듬이 우리를 둘러싼다. 일본의 하이쿠 시인 부손이 아름답게 노래한 것처럼 사물들은 서로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
흰 국화꽃 앞에서
가위는 한 순간
망설인다.
그 순간은 존재의 통일성을 드러낸다. 정중동, 죽음은 별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죽음이 곧 삶이다. 우리를 존재의 창조로 이끌어가는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의 깨달음이다. 무에 던져진 인간은 무에 맞서서 자신을 창조한다.
[옥타비오 파스]시적 계시 (5)
시적 경험은 우리의 근원적인 조건의 드러냄이다. 그리고 그러한 드러냄은 언제나 우리 자신의 창조로 귀결된다. 그 드러냄은 저기 낯설게 있는 어떤 외부의 것을 발견하지 않는다. 그것이 발견하는것은 드러나려고 하는 것, 즉 존재 그 자체의 창조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인은 존재를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이 모순이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란 우리의 실존이 의지하고 있는 이미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아무것에도 의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존재의 근거는 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존재는 매순간마다 자기 자신을 붙잡고 스스로를 창조해가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우리의 존재는 단지 존재의 가능성에 근거할 뿐이다. 존재란 되어지는 수밖에 없다. 존재의 원초적 결핍-수동성의 근거-은 존재로 하여금 자신을 넘치거나 혹은 충만하게 창조하도록 강요한다. 인간은 존재의 부족이지만, 또한 존재의 정복이기도 하다. 인간은 존재에 이름을 붙이고, 창조하도록 던져져 있다. 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인간 조건의 힘이 근거한다. 결국, 우리의 원초적인 조건은 단지 부족도 아니고 넘침도 아니며, 가능성이다. 인간의 자유는 가능성에 근거하며,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한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것이다. 시인이 드러내는 것은 자신을 창조해가는 인간이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우리의 실존이 존재하며, 실존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근원적 조건이 의탁할 곳 없이 버림받은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우리 스스로의 존재를 정복하는 가능성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써 그러한 비전에 도달할 수 있으며, 그걸게 인간의조건을 초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조건은 초월을 요구하며, 우리 스스로를 초월하는 것이 곧 삶이기 때문이다. 시 쓰기가 보여주는 것은, 죽을 운명이라는 것이 인간 조건의 양면성 중의 한 면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또 다른 한 면은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태어남은 죽음을 포함한다. 그러나 죽음과 삶이 서로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태어남은 부족과 형벌의 동의어가 아님을 알게 된다. 이것이 시를 쓴다는 것의 최종적 의미일 것이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시는 가능성을 연다. 그 가능성은 종교가 말하는 영원한 삶이나 철학이 말하느영원한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껴안고 포함하는 삶이고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인 존재이다. 시적 이율 배반은 우리의 근원적 조건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며 충만하게 실현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존재의 가능성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시적 창조는 그러한 가능성 중의 하나다. 시가 긍정하는 것은, 몽테뉴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삶이 "죽음을 예비하는 것"도 아니며, 실존적 분석이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이란 "죽음을 우한 존재"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실존은 우리의 조건이 삶과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반대되는 것들의 화해 가능성을 포함한다. 니체는 그리스 사람들이 비극을 발명하게 된 것은 건강이 넘친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렇다. 삶을 최고로 찬양하며 사는 사람들만이 비극적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충만하게 산다는 것은 죽음을 산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브로통이 말하는 그러한 상태, 즉 "삶과 죽음, 실제와 상상, 과거의미래,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과 불가능 한 것, 녹은 것과 낮은 것이 모순되게 느껴지지 않는 상태"는 영원한 삶도 아니고, 시간 밖 저기에 있는 삶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며 여기에 있다. 그것은 자신을 이루고 있는 모든 대립적인 것을 껴안도록 운명지어진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왜냐ㅕ하면 태어났을 때 이미 자신 안에 그것들을 모두 가지고 있었으며, 이미 인간이 그것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자신이면서 타자다. 타자들이다. 타자들을 나타내고 타자들을 실현하는 것이 인간의 과업이며 시인의 과업이다. 시는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니체게 '비할 바 없는 삶의 생동감'이라고 칭했던 것을 엿보게 한다. 시적 경험은 존재의 샘을 여는 것이다. 한 순간이며 결코 어느 순간도 아닌 순간, 한 순간이며 영원한 순간, 과거이며 미래인 현재의 순간, 한 순간 태어나고 죽는 것, 그 순간 속에서 우리는 삶이며 죽음이고, 이것이며 저것이다.
시의 말과 종교의 말은 역사를 통해 혼동되어왔따. 그러나 종교적 계시는, 적어도 그것이 말인 한에 있어서, 원초적 행동이 아니라 그애 대한 해석이다. 반대로, 시는 인간 조건의 계시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에 의한 인간의 창조가 된다. 계시는 창조다. 시적 언어는 인간의 역설적인 조건, 즉 타자성을 드러내며, 그럼으로써 현재의 자신을 실현시킨다. 인간에게 존립 근거를 주는 것은 종교의 경전이 아니라 시적 언어다. 인간을 세우고 인간 스스로를 드러내주는 행동은 시다.
요컨대, 종교적 경험과 시적 경험은 공통된 기원을 갖는다. 그것들의 역사적 표현들 -시, 신화, 기도문, 주문, 찬가, 연극 공연, 제의 등-은 종종 구별 불가능하다. 결국, 양자는 우리를 구성하는 '타자성'에 대한 경험이다. 그러나 종교는 신학 안에서 영감을 해석하고 재단하며 체계화하고, 동시에 교회는 그러한 결과들을 독점한다. 시는 모든 생명이 품고 있는 존재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시는 인간을 재창조하며, 삶 아니면 죽음이라는 분열적인 모습이 아니라 백열의 단 한순간에 삶과 죽음이 총체가 되는 인간의 진실한 조건을 깨닫고 받아들이도록 한다.
첫댓글 활과 리라....시는 선택 받은 자들의 빵이자 저주 받은 양식이다.. 한 번 빵맛에 길들여 지면 금단의 양식이 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