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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중국 운남성 차마고도및 옥룡설산 6일차
1,투어 : 중국 운남성 차마고도및 옥룡설산
2,일시 : 2019년 05월30일~06월4일(5박6일)
3,인원 : 8명+1명(게스트/이상훈/광주)
(김용근/최경옥님, 하진수/정귀옥님,홍무영,이종률,김승곤/제숙란)
● 2019년 6월 4일----------------------------------
○ 가원 국제호텔(家园国际酒店)(09:00)
○ 성도무후사(成都武侯祠)(09:50)
○ 금리 거리 (锦里街, Jinli Street)(10:30)
○ 식사(11:45)
○ 성도국제공항 (成都双流国际机场, ChengDu International Airport)(13:30)
○ 성도국제공항 (成都双流国际机场, ChengDu International Airport) 출발(15:30)
○ 인천국제공항 (仁川國際空港, Incheon International Airport) (19:50)
○ 인천공항 공항철도(20:58)
○ 서울역(22:00)
○ 울산도착(6/5 00:15)
4.줄거리
7,8,9란다.
참 오랜만에 듣던 소리다.
투어 패키지를 가면 흔히들 가이드들이 쓰는 이야기이다.
07시 알람, 08시 식사, 09시 출발이라는 이야기이다.
중국인들이 한국관광객들을 빗대어 했던 이야기도 있다.
닭보다 일찍 일어 나야 하고
돼지도 안먹는 생채소를 먹으야 하고
말보다 빨리 달려야 한다는이야긴 공공연하게 니오는 이야기다.
오늘 아침에도 수화물을 정리하고 체크아웃을 하고 버스에 타야 한다는 가이드 이야기다.
오늘 오후 성도를 출발해서 한국으로 가야하기에...
엊그제 왔건만 벌써 가야하는가라는 볼멘소리가 여기저기 들린다.
09시 호텔을 출발하는 성도에서 투어는 무후사와 그옆 금리 거리이다.
그리고 식사후 공항으로 이동
성도공항을 출발하는일만 남았다.
성도에서 첫 투어는 무후사다.
개인적으로는 3번째다.
버스는 호텔을 빠져나와 약 3~40분간의 운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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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원 국제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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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무후사(成都武侯祠) 여객 중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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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열묘(漢昭烈廟)
촉나라의 황제 한소열 황제(유비)을 모신 사당이다.
유비가 죽은후의 시효인 소열에서 유래한 한소열묘(漢昭烈廟) 현판이 걸려있다.
그리고
정문을 들어서면 유비를 기린 유비전(劉備殿)이 나오는데 유비전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 명랑천고(眀良千古)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는 명군양신 유전천고(眀君良臣, 流传千古)의 줄임말로, 명군과 어진 신하가 만나 오래도록 모범이 됐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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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천고(眀良千古)
밝을명자의 날일대신 눈목을 쓴 이유는 사람보는 안목이 뛰어 나다는 뜻으로 풀이한다고 한다.
명랑천고(眀良千古)의 명자를 자세히 보면 눈목 변의 밝을 명(眀)으로 쓰여 있다.
날일 변의 명(明)은 자연의 밝음이지만, 눈목 변의 명(眀)은 인지의 밝음으로 유비의 인덕이 더욱 빛났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유비상 오른쪽이 텅 비어 있는 것이다.
원래 유비전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아들 유선(劉禪)의 좌상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유선상을 훼손해 버렸다고 한다.
한동안 새로 만들고 없어지기가 반복되다가 청나라에 들어와 중건할 때 유선상을 아예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하여
유비상 왼쪽에는 유비의 손자인 유심(劉諶)의 상이 있다.
제갈량이 죽고 위나라 대군이 침범하자 유선은 목숨이 아까워 옥새를 들고 나가 항복하려 한다.
하지만 유심은 이를 극렬히 반대하고 청두의 군사를 모두 모아 결사항전하려 했으나 유선과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유심은 유비 묘를 찾아와 대성통곡한다.
집으로 돌아가서는 처자식을 모두 죽이고 자신도 자결함으로써 촉한 남아의 기개를 보여준다는 삼국지 내용이다..
그리고
유비상이 있는 대청의 양 옆 방에는 관우와 장비의 상이 배치되어 있다.
유비, 관우, 장비는 도원에 모여 같은 장소, 같은 날에 죽을 것을 결의한다.
비록 삼형제는 한날한시에 죽지는 못했지만, 대업 성취를 위해 전력투구한 그들의 기개와 절개는 지금도 무후사 유비전에 흘러넘친다.
유비전 대청과 이어진 좌우 긴 회랑에는 문신과 무장 28좌상이 있다.
문신상에는 염통을 위시하여 14명의 촉한 문신들이,
무장상에는 조자룡을 좌장으로 14명의 촉한 무신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실로 삼국지에 등장하는 촉한의 기라성 같은 영웅호걸들을 모두 만날 수 있는 장소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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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161~223)
자는 현덕으로 후한 연희 4년 하북성 탁주에서 태워나 홀어머니 밑에서 태어나 짚신을 삼아 팔아 생계를 이어가다 관우와 장비을 만나 도원 결의
그리고 당대의 최고의 책사 제갈량과 방통을 만나 221년 60세에 나라를 세워 촉 위 오의 삼국시대를 열었지만 2대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221년 성도에서 황제로 칭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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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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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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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사표(出師表)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제갈량이 위나라 정벌에 나서면서 후주(後主) 유선에 바친 출사표는 고금의 명문으로 통한다.
후대 수많은 문인들이 출사표를 되새겨 남겼지만, 무후사의 출사표는 남송의 장군 악비(岳飛)가 쓴 친필이다.
악비가 쓴 출사표는 처음에는 해서체로 단정하게 써나가다가 뒤로 가면 행서체로 바뀐다.
악비는 북방 유목민족에게 시달림을 당했던 남송의 현실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했기에,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출사표를 써내려간 것이라는 설명이다.
비문은 제갈량이 마속의 목을 벨때 마속이 죽어도 한이 없다고 목을 내놓은 일과 제갈량에 의해 유배된 요립이 제갈량의 부고를 듣고 통곡했다는 일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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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후사 현판이다.
제갈량의 관작이 살아 있을 때는 무향후(武鄕侯), 죽은 후에는 충무후(忠武侯)인데
줄여서 무후(武侯) 하고 그 사당을 사(詞)자를 붙여 무후사라한다.
무후사가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7세기 청나라 강희제 때이다. 명나라 말기 농민봉기로 폐허가 된 무후사를 강희제가 직접 명령하여 대대적으로 중건, 확장한다
제갈량은 촉한의 재상이고 생전에 "무향후(武鄕侯)"로 봉받았으며 사후 "충무후(忠武侯)"라는 이름을 얻어 그의 사당은 이름이 무후사이다.
최초의 무후사는 제갈량이 타계한 장소인 섬서에 세워졌지만 오늘날 가장 영향력이 큰 무후사는 서진(西晉) 초반인 260년대에 신축한 성도의 무후사이다.
무후사의 건물은 1672년 청(淸)나라때 개축한 건물이다. 1961년, 무후사는 중국 중점문화재 업체로 선정, 1984년 박물관으로 되었으며 2008년, 중국 1급 박물관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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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우주(名垂宇宙).
이름이 온 우주에 널리 빛난다’라는 뜻으로, 당나라 시인 두보가 무후사에 들러 제갈량을 기리기 위해 쓴 시의 한 대목이라고 한다
제갈량전 안에 들어가면 제갈량상이 중앙에 앉아 있다.
오늘날까지 제갈량이 만인의 존경을 받는 것은 유비를 위한 무한한 충성심 때문만은 아니다.
정치와 평소 생활에서 백성들을 아꼈기 때문이다.
전투를 벌여 적의 성을 함락하는 것보다 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스스로 성문을 열게 하는 위민(爲民)정책은 제갈량의 기본 통치철학이기도 하다.
제갈량은 전쟁 포로를 인간적으로 처우하고 점령지 주민을 우대하여 짧은 시일에 촉한의 영역을 넓혀나간다.
후대인들이 제갈량전 안에 남긴 편액과 현판은 이런 제갈량의 애민(愛民)사상을 기리고 찬양하는 내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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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은 후주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린 뒤 위나라 정벌에 나섰다가 234년 오장원(五丈原)에서 병사한다.
제갈량은 유언으로 담을 치지 말고, 석물을 쓰지 말며, 모든 제물도 없이 하라.고 당부한다.
실제로 산시(陝西)성 딩준산(定軍山)에 위치한 제갈량묘는 명성에 비해 작고 단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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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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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아들 제갈첨과 손자 제갈상도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위군에 포위당했지만, 항복하지 않고 돌파를 시도하다 결국 전사한다.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촉한의 군사(軍師)가 된 제갈량을 포함하여 3대가 촉에 대한 충성을 최후까지 다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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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후사에 조성된 유비묘인 '한소열묘'(漢昭烈廟)는 1,7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곳이다.
황릉이라 분위기가 엄숙하고 규모가 엄청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무덤가는 숲길이 아름답기 그지없고 세상에 기세를 떨쳤던 데 비해 무덤이 작은 편이다.
그것이 죽기 전 유비의 유지였다니, 후대의 존경과 사랑을 길이 받을 만하다.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높이 12m의 무덤 위는 나무와 덩굴이 무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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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를 죽음으로 이끈 것은 이릉(夷陵) 전투 때문이다.
유비는 관우의 죽음에 대한 응징과 형주 탈환을 목적으로 대군을 동원해 오(吳)나라를 침공한다.
촉한으로서는 삼국의 균형을 깨고, 삼국 쟁패전에서 역전을 기대하는 건곤일척의 승부수였으나 오나라 육손이 유비군을 궤멸시킨다.
이 때 패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비는 63살의 나이에 병사하여 이곳 혜릉(惠陵)으로 이장된다.
무덤에 손을 댄 도굴꾼이 줄지어 횡사하면서 1,70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도굴당하지 않은 혜릉. 감(甘)부인과 오(吳)부인도 같이 묻혀 있다.
작은 벽돌을 촘촘하게 원형으로 두른 담은 지난 쓰촨 대지진 때도 무사했다.
벽돌 하나하나 마다 벽공들 이름이 드문드문 새겨져 있는데, 벽이 허물어지면 벽공은 물론 그의 가족들의 목숨까지 담보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벽공이 이름을 새긴 1,700여 년 전 그 순간의 긴장과 두려움, 그리고 장인 정신이 고스란히 느껴지면서 마음 한구석이 짠해온다.
이 능묘는 제갈량이 유비를 위해 선택한 자리이다.
청나라 건륭년간에 세운 "한소열황제지릉(漢昭烈皇帝之陵)" 묘비가 세워진 무덤에는 유비와 두 부인이 합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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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중의 삼국지.....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한번쯤은 읽어 보았을 삼국지....
같은날 함께 죽기를 다짐했던 도원 결의
관우가 형주싸움에서 조조와 손을 집은 손권에게 죽임을 당하자 자기 성질을 억누르지 못한 장비마져 부하인 범강과 장달에게 허무한죽임을 당했다는 비보를 접한 유비는 복수심에 제갈량의 만류에도 불구 촉나라 수도인 성도를 제갈량에게 맡기고
손권인 오나라를 치기위해 진군하지만 222년 6월 전투에서 더위를 피해 숲속에 주둔해 있던 유비의 군사들은 손권의 부하에게 철저하게 패배 한다.
그리고 간산히 살아온 유비는 의형제를 잃은 슬픔에 또 손권의 함정에 군사를 잃은 슬픔에 223년 4월 제갈량에게 후사를 맡기고 사천성 중경에서 생을 마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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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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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錦里) 거리
지난 2004년 개장한 진리구지에 촉한시대 거리를 재현해놓은 풍물거리 라고 한다.
중국 진한 시대, 그리고 삼국시대, 그리고 명청 시대의 저잣거리를 그대로 재현했다 하는데 기념품 판매처나 전통 간식을 먹을수있는 음식거리다.
입구에 들어서면 건물에 매달린 홍등이 축제 분위기를 연출한다.
기념품 숍에서는 가면, 수공예품, 인형, 골동품, 미술품 등 각종 상품들이 눈길을 붙잡고 노천카페와 음식점에서는 꼬치구이, 국수, 솜사탕 등이 여행자를 유혹한다.
매운 음식으로 유명한 쓰촨 지방의 성도이니 만큼 우리 입맛에 맞는 음식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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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錦里) 거리를 끝으로 짧은 청두(Chengdu)투어가 끝나는셈이다.
일찍이 삼국 시대 때 유비가 세운 촉나라의 수도로, 유구한 역사와 문화유산을 간직한 도시이다.
예부터 청두 일대에는 관중 평원을 능가할 정도로 비옥한 청두 평원이 펼쳐져 강과 산과 들녘에서 나는 물자가 풍부하다.
이 때문에 하늘이 내린 풍요의 땅이란 뜻으로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 불린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 최고의 명주 오량액,수정방등 이곳 청구에서 제조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마오타이는 이웃 귀주성에서 제조 하고 있지만...
하여튼 하늘이 내린 풍요의 땅인것만큼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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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으로 출발하기전에 이른 식사를한다는데...
전화예약은 받았지만 전혀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
심져 불도켜지 않은 상태에서..
그러니 우리가이드(조선족/전향옥) 열받았다.
식사는 매운맞과 덜매운맞의 육슈에 샤브샤브다.
전에 왓을때 사천성의 샤브샤브땐 제피가 가득 들은 육수였는데 오늘은 그보다 덜한그냥 고추만 들었던 생각이다.
어째튼 사천의 식사 맛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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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브샤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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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이다.
한 30분 걸렸나.
13시 30분이다.
입구부터 보안 검사다
모든 수화물을 X-RAY를 투시해야 한다고
그리 세밀하게 한건 아니고 그냥 대충 대충이다.
곧장 티켓팅과 더불어 수화물 붙이고 또 출국심사와 더불어 다시한번더 보안검사....
비행기 타는일만 남았다.
15시30분...
딜레이 된다는 그런 이야기는 아직 없다.
계획상 정시에 출발해야 하는데 라며 마음 졸이고 또 졸이는데
모든게 정상적이다.
15시 30분....사천항공은 청두공항을 박차고 오른다.
우리의 LCC 항공은 기내식이 없어진지 오래지만 중국의 LCC 는 기내식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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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간 19시 50분 인천공항에 착륙한다.
20시 58분 공항철도를 타려면 어느정도 여유는 있지만 수화물이 제때 나와야 가능한 이야기다.
그런데 사천항공은 착륙후 한 20여분 갔던것 같다.
그리고 버스로 실어나르는 게이트도 없는 그런곳이다.
어째거나 입국 신고와 함께 수화물을 찾는데....
참 욕나온다.
일행중 잘반만 나오고 절반은 나오질 않는다.
하여 일행들에게 먼저 공항철도 입구에 가 있으라하고 마지막에 나오는 수화물을 찾아 거의 뛰다시피 도착한 공항철도 입구 ...
8분 남았다.
왜냐구
58분 공항철도 급행을 타야 서울역에 도착하면 9시 40분이라 22시 출발하는 울산행 KTX를 탈수 있기 때문이다.
20시 58분 티켓팅후 공항철도 급행은 40분후 서울역에 내려 놓는다.
식사하기엔 너무늦은 시간이라 서울역에서 꼬마김밥과 물을 구입
2200 서울역을 출발
다음날 12시 15분에 울산 도착하면서 5박 7일간의 투어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