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호텔, 130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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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물포에 첫 호텔이 들어섰다. 그러나 그 호텔은 사라졌고 이제 기록만 몇 줄 남아 있다. 당시 배에서 내린 외래인들은 서울까지 가는 차편이 마땅치 않았기에 항구에서 하루를 묵어야만 했다. 숙소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1883년 4월 ‘대불호텔’이 문을 열었다. 일본명으로 ‘다이부츠(大佛, DAIBUTSU) 호텔’이었다. 선박을 상대로 식료품 등 물자 공급업자로 치부한 호리 리키타로(掘力太郞)가 세우고 운영하는 호텔이었다. 뚱뚱했던 호리는 다이부츠라고 불렸는데, 그 별명을 그대로 호텔이름으로 정했다고 한다.
호리는 인천이 개항되자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주했다. 호리는 1884년 11월 3일 고바야시(小林) 영사의 보고서에 처음 언급되었다. 이주지는 제물포 개항장 일본 거류지 제11호지(일제강점기 하, 本町 1-1번지)였다.
아펜젤러 목사는 개항 2년 후인 1885년 4월 5일 인천항에 첫발을 내디뎠는데, 그날 비망록에서
“일본인, 중국인 그리고 한국인들 한복판에서 짐들이 옮겨지고 있었다. 사이부쭈(대불)호텔로 향했다…. 잠은 잘 잤다. 비록 미국 호텔만큼 원기를 회복시켜 주지는 않았지만 기선보다는 한결 나았다.”
고 하고 있다(아펜젤러, 이만열 편, 『한국에 온 첫 선교사』, 270쪽,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5). 이어 아펜젤러의 다른 자료(아펜젤러, 『캘리포니아 크리스천의 주장』, 롯데호텔 30주년 자료 54쪽)는,
“호텔방은 편안할 정도로 컸다. 그러나 몹시 더웠다. 저녁 식사를 위해 우리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테이블에 앉은 우리 앞으로 서양음식이 놓였다고 하고 있다.
대불호텔의 방은 그런대로 괜찮았던 것 같다. 미국식 운영을 하고 있었는데 호텔은 침대, 의자식이었고, 영어가 통하고, 미국식 음식을 내놨다. 식당은 아마도 1층에 있었던 것 같다. 호텔이 성업하자 호텔 주인은 호텔을 조금 더 크게 고쳐지었다. 『인천부사』(1933.8)는 이 호텔 건물을 호리상회의 주인 호리 리키타로가 1887년 착공, 1888년 준공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현재의 인천광역시 중구 중앙동 1가 18번지 일대). 지상 3층 벽돌 건물로 객실 11 개를 갖춘 것이다. 객실의 등급은 3등급으로 숙박 요금은 상등 2원 50 전, 중등 2원, 하등 1원 50전이었다. 중화루가 된 대불호텔
대불호텔은 초기 15년간 성업하고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며 쇠락하 기 시작했다. 그러자 1918년 호리 리키타로의 아들 호리 규타로(掘久 太郞)가 중국인들에게 매각했다. 1919년 호텔은 폐업했고 이후 중화루 (中華樓)란 이름의 중국 음식점으로 운영되었다. 중화루는 인근 선린 동 공화춘(共和春) 그리고 동흥루(同興樓)와 함께 인천 3대 중국 요릿 집이었다. 중화루 주변은 외국인들과 일본인들의 유흥지였다. ‘중화루 위 중국인 가옥에서는 외인들과 상대해서 매춘하는 일본 여자가 스트 립퍼-로 땐스도 해서 음탕을 극행했다는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고일, 『인천금석(仁川今昔)』, 10쪽, 주간인천사, 1955). 그리고 1978년 7월 초순 철거되어 주차장으로 사용되었다. 대불호텔 평면 약도면은 《공간》지(74호, 1973.4)에 실려 있다 (윤일주, 최성연, 이경성 대담, 인하대 건축과, 1973.4). 중화루라는 간판은 인천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최성연 선생 은 대불호텔 때부터 있던 피아노가 중화루 때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최성연, 『개항과 양관역정』, 105-107쪽, 인천, 경 기문화사, 1959).
이제 옛 호텔을 다시 복원
대불호텔 터의 소유자는 2011년 3월 이 터에 새로운 건물 (중앙프라자) 신축공사 건축허가를 받아 공사를 진행하였 다. 그러다 5월 터파기 공사를 진행 중 지하에서 기단 등 유구가 발견되어 공사는 중단되었고, 인천시는 이 터의 발 굴 조사를 진행했다. 지하 1미터에서 벽돌 기초 유구가 잔 존하고 있었다. 이 터는 인천의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곳인데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잊혀진 공간으로 남겨져 있 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오히려 지금 우리는 그 유구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같은 해 9월 발굴조사 결과를 문화재청에 제출했고, 10월 문화재청 매장문화재 분과위원회는 건물 유구를 매장문화 재로 보존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 터는 땅 소유주가 문 화재로 활용하라는 취지로 중구청에 기부채납 한 상태이 다.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현재 관계자들은 복원 시 1880 년대 초기 호텔 모습을 재현하라는 안과 전시관 등 문화시설로 하라는 안을 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당해 지역의 관계자 의 견 수렴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현재 중구청에서 「대불호텔 터 활용기본계획 및 문화재 현상변경 허용기준 학술연구-대 불호텔 터 활용기본계획」(2014.4)을 작성했다. 이 호텔의 복원은 인천광역시 중구청만의 문제는 아니다. 문화재청, 문화체 육관광부의 관심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계획대로라면 2015년 연말 우리는 이 호텔을 다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근현 대사에서 호텔의 첫걸음이 띄어진 장소를 다시 찾고 싶다. 발굴 현장. 지하 기초부분 벽돌 벽체 유구가 잘 남아 있다.100년 전의 유구가 이렇게 잘 남아 있는 곳은 없다. - 글⋅김정동 (우리근대건축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