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 (1841년 10월 16일~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하급 사무라이의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 이토(伊藤) 씨를 이어받았다. 이름을 히로부미(博文)로 개명한 것은 (메이지 유신 : 일본 메이지 천황[明治 天皇] 때 군주제를 부활시키고 근대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실시한 변혁의 총칭. (출처 : 두산백과))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찍이 당시 유행하던 (존왕양이론 : 국왕을 받들자는 존왕론과 이민족을 물리치자는 양이론을 합한 것. (출처 : Basic 고교생을 위한 세계사 용어사전 존왕양이 운동)) 존왕양이론에 심취하여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세운 쇼카손주쿠(松下村塾) : 조선 침략론인 '정한론'(征韓論) 을 펼친 요시다 쇼인이 설립한 사설학당.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일으킨 일본 국가 지도자들을 양성한 곳이다. (출처 : 연합뉴스 "日군함도·쇼카손주쿠 이면에 숨겨진 침략 역사 아시나요"))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공부하였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는 1863년 영국 유학을 다녀온 후 이때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개국론 : 문호를 개방하여 외국과 교류하자는 주장 (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개국론으로 돌아섰다. 그는 메이지유신에 참가하였으며 1868년 성립된 신정부의 외국 사무담당을 맡아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885년 일본에 내각제도가 처음 만들어지자 이토 히로부미는 45세의 나이로 초대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는 이후 1909년 사망할 때까지 약 25년간 총리대신과 추밀원 의장 등의 자리를 오가면서 늘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
일본의 조선 침략과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11월 9일 특파대사(特派大使)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는 1905년 9월 5일 체결된 포츠머스조약으로 러일전쟁에서의 승리가 확정된 지 약 두 달여 만의 일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유력한 경쟁자를 몰아낸 후 한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해 그를 한국에 파견한 것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서울에 도착한 다음 날 고종을 알현하고 “특파대사의 지휘에 따르라”라는 내용을 담은 일본 국왕의 친서를 (봉정 : 문서나 문집 따위를 삼가 받들어 올림. (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봉정하여 1차로 협박하였다. 그리고 그는 11월 15일 재차 알현하여 외교권 이양 등의 내용을 담은 협약안을 고종에게 들이밀었다. 고종은 이 협약안에 반대하였고 정부 대신 가운데에도 반대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주한일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와 함께 세 번이나 고종을 배알하고 정부 대신들과 숙의하여 원만한 해결을 볼 것을 재촉하며 재차 협박을 가했다. 결국, 이토 히로부미는 조약 체결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다시 회의를 열었고,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외부대신 박제순을 비롯한 다섯 대신 ((을사오적 : 을사조약(을사늑약)에 찬성하고 서명한 다섯 명의 대신들(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출처 : 한국사 사전 3 – 나라와 민족 · 기구와 단체 · 역사 인물)을사오적)의 서명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고종은 이 협약을 재가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 협약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이 협약을 ‘제2차 한일협약’ 혹은 ‘을사조약’, ‘을사늑약’ 등으로 부른다. 이 협약에 따라 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하여 외국에 있던 대한제국의 공사관은 모두 폐쇄되었으며 서울에 주재하던 각국 공사관도 모두 철수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 협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906년 2월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그가 스스로 초대 통감이 되었다. 이후 그는 외교뿐 아니라 내정에까지 깊숙이 개입하면서 대한제국에 대한 접수 공작을 본격화하였다. 이러한 이토 히로부미의 행보는 1907년 7월에 있었던 (헤이그 특사 사건 :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일제에 의해 강제 체결된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에게 호소한 외교 활동.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말미암아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는 이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협박하여 퇴위를 강요하였으며 대신 순종을 즉위시켰다. 그는 1907년 체결된 (한일신협약 : 1907년 7월 24일,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점하기 위해 체결한 불평등조약. 이 조약으로 일본은 입법, 사법 및 고등 관리의 임면 등 대한제국의 내정을 실질적으로 장악.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일신협약에 근거하여 각 부처의 차관에 일본인을 임명하도록 하여 이른바 차관정치를 통해 한국의 국정을 한 손에 장악하였다. 이후 군대해산과 경찰권 위임 등을 통해 대한제국을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게 했다. 이렇게 일제의 대한제국에 대한 침탈은 주도면밀하게 이루어졌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저격당해 사망하였다. 그를 처단한 인물은 안중근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한 것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가 안중근의 총을 맞은 것도 코코프체프와의 열차 회담을 마친 직후 역 플랫폼에서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러시아 재무장관을 만나게 된 것은 이 무렵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가 크게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있었는데(영일동맹) 영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개선됨에 따라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도 서서히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 사이에서는 외교협상이 시작되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간 것도 이러한 외교협상을 위해서였다. 이렇게 이토가 죽고 난 뒤 일제의 침략은 더욱 노골화되어 (한일병합조약(한국병합조약) : 1910년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넘겨줌을 규정함.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일병합조약(한국병합조약)이 체결되기에 이르렀으며 이에 맞서기 위한 독립운동도 보다 본격화되었다.
(출처 : 우리역사넷 한국사 연대기 > 근대 > 이토 히로부미, 지식백과 일본 관료 이토 히로부미 (글 김도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을사조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