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리정사’ 명칭 검토에 대한 의견서
자문을 의뢰받은 우리 세 명은 다음과 같이 의견을 모았습니다.
1. 자문위원들은 각각 ‘신재효의 집’, ‘신재효 기념 판소리 공원’, ‘신재효 판소리 마을’을 제안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각 위원들의 제안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 각 위원들의 의견은 제안서에 설명한 대로 충분한 근거를 획득하고 있습니다. 이를 검토한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신재효의 집’은 특정 건축물만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 범위가 너무 작습니다. 따라서 새롭게 재현된 공간 전체를 아우르기에는 미흡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2) ‘신재효 기념 판소리 공원’은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는 동리 신재효 고택, 판소리박물관, 동리국악당과 새롭게 건축된 공간 등을 아우르는 열린 공간의 이름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타당한 명칭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다만 ‘기념’이라는 용어는 신재효라는 명칭 자체가 신재효를 기념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삭제해도 괜찮다는 생각입니 다. 다만 영문 표기에는 ‘memorial’을 넣어 그 의미를 부각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 니다.
3) ‘신재효 판소리 마을’은 그 앞에 있는 문화의 전당이나 군립 도서관, 그리고 한옥 마을 등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사용되었을 때, 고창읍성이나 문화의 전당, 군립 도서관 등이 ‘신재효 판소리 마을’ 에 포함됨으로써 그 독자적인 성격이 묻혀지게 된다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3.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새로이 재현되는 신재효 선생의 거주 공간과 판소리박물관, 동리국악당 등 판소리 관련 시설물을 통칭하는 이름으로 ‘신재효 판소리 공원(Shin Jaehyo Memorial Pansori Park)’을 제안합니다. ‘공원’의 개념이 누구나 자유롭게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신재효 선생을 기념하고 즐겁게 동참하는 열린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4. 이러한 명칭의 제정과 함께, ‘판소리박물관’, ‘동리국악당’, ‘동리 신재효 고택’과 같이 새롭게 건축된 각 건물의 이름을 부여하는 작업이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관리사무실이나 득음실, 체험실 등은 그 용도를 설명하는 것이지, 건물의 명칭을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부용헌’, ‘채선의 방’과 같이 그 건물을 가리키는 이름을 부여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 각 건물의 기둥에 신재효 선생의 시구로 주련을 설치하는 것도 그 품격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새롭게 위원회를 결성하여 진지하게 검토한 후 결정하시기를 제안합니다.
첨부: 자문의견서 3부
복원(재현)된 동리정사의 명칭 검토 필요성에 관하여
정병헌(전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현재 신재효 선생이 거주하였던 공간의 복원, 재현 사업이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업을 ‘동리정사(桐里精舍) 재현사업’, ‘동리정사(桐里精舍) 복원’과 같이 부르고, 이를 추진하는 주체를 ‘(가)동리정사 복원(재현)추진위원회’로 설정하면서, 그 명칭을 ‘동리정사’로 규정하는 것에 대한 동의가 대체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이 사업이 완료되었을 때, 그 명칭은 당연히 ‘동리정사’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에서 그 명칭을 ‘동리정사’로 확정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하여 검토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첫째, ‘동리정사(桐里精舍)’는 선생 사후(死後) 작성한 <동리선생행장(桐里先生行狀)>에 ‘고종 갑신 십일월 육일 선생 졸우 동리정사 향년 칠십삼(高宗甲申十一月六日先生卒于桐里精舍享年七十三)’으로 기록한 이래, 선생의 거주 공간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때 사용한 ‘동리정사’는 선생의 거주 공간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이 아니라, 선생이 돌아가신 특정 공간만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하였습니다. 행장을 작성하신 오의균 선생이 선생을 추모하는 뜻에서 거주하신 공간을 ‘동리정사’로 지어 올렸던 것입니다. 구체적인 명칭을 사용하여 부르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에 이후 그 명칭을 후손들이 지속적으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둘째, 선생 자신이 ‘동리정사’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습니다. 선생이 살아계신 동안의 명칭은 ‘신호장댁’ 등으로 불렀을 뿐 어디에서도 그 명칭을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사(精舍)’라는 용어는 ‘학문을 가르치려고 지은 집, 정신을 수양하는 곳, 사찰(寺刹)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사는 대체로 인가에서는 떨어진 곳에 지어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행장을 지은 당시에는 ‘동리정사’라는 명칭이 선생을 드높이는 의미로 받아들였지만, 현재에는 오히려 선생의 실용적이고 검박한 삶을 오도(誤導)할 우려도 있을 것입니다.
셋째, ‘동리정사(桐里精舍)’라는 명칭은 기성의 한문(漢文)세대에게는 익숙한 명칭이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한글세대에게는 그 의미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용어입니다. 동리선생의 자(字)인 백원(百源)이나 호(號)인 동리(桐里)는 그 당시에는 사용하여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지만, 지금은 별로 통용되지 않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동리’라는 명칭은 선생을 설명하는 경우 사용될 수 있지만, 일상적으로 불러야 할 건물의 명칭에 사용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정사‘라는 말은 대체로 ’사찰‘을 가리키는 말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실정입니다. 그래서 현재 남아 있는 사랑채를 ‘국가 민속문화재 제 39호’로 지정하면서, 그 명칭은 ‘고창 동리 신재효 고택’으로 특정하였던 것입니다.
넷째, 전통 가옥은 과거의 것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세대는 물론 미래를 아우르는 통합적인 문화유산으로 존재합니다. 특히 신재효 선생이 거주하였던 공간을 다시 복원, 재현한 의미는 신재효 선생의 정신과 업적이 현재와 미래에도 여전히 통용되는 소중한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명칭도 현재와 미래를 아우를 수 있는 것으로 제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다섯째, 더구나 우리 고창은 신재효 선생의 업적을 고창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나아가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곳을 찾는 많은 내외국인들에게도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보편적인 명칭으로 제정하는 것이 신재효 선생을 널리 알리는데 효과적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판소리박물관’과 같이 스스럼없이 사용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명칭을 사용한 전례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효석문학관’이나 ‘황순원문학관’, 괴테의 생가인 ‘Goethe House’나 셰익스피어가 생장한 곳을 ‘Shakespeare Birthplace’로 명명한 것처럼 ‘신재효’라는 이름을 전면에 내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 찾아올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에게 한국의 판소리와 신재효 선생을 알리기 위하여는 이에 부응할 수 있는 ‘신재효의 집’으로 제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앞으로 ‘신재효의 집(Shin Jaehyo’s House)’에서 전개할 사업은 당연히 판소리와 관련된 것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판소리를 설명함에 있어 ‘신재효’라는 명칭은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판소리’와 ‘신재효’는 이 건물을 가리키는 핵심어일 것입니다. 복원이 완료되어 거주 공간을 가리키는 명칭이 확정되기 전에 이에 대한 진지한 검토를 통하여 합당한 명칭이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신재효 기념 공간의 명칭에 대한 의견
이훈상(동아대 사학과 명예교수)
군청에서 추진한 이른바 ‘신재효정사’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자문위원 이훈상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합니다.
I
먼저 정사라는 용어는 역사 사실과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신재효 선생의 생애 및 미덕을 기리는 데에도 어긋납니다. 이미 정병헌 교수께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정사는 기본적으로 강학 내지 수양을 하는 공간입니다. 나아가 일상 거주지와도 멀리 떨어진 곳에 건립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원래는 양반 가문들에서 정사를 건립하였으나, 19세기 후반 이후 향리들도 이를 따르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고창의 경우 신재효와 각별히 절친한 향리 가문 출신 은수룡(殷壽龍)은 금서재(琴書齋)를, 인접한 무장의 향리 출신 죽재(竹齋) 진원근(陳元根 1823~1887)은 龍峴亭을 지었습니다. 이들은 강학과 서재를 겸하는 등 정사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추정됩니다.
그렇지만 신재효 선생은 그의 재부를 이 같은 공간을 따로 마련하는 데 소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최근 신재효와 관련된 각종 고문서 기록을 발굴, 그와 관련된 다양한 면모를 체계적으로 밝힐 수 있어 분명해졌습니다. 그리하여 그 자신이 이른바 정사를 따로 마련하지 않은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사라는 용어가 나오는 오의균의 행장은 신재효 사후 한 세대 후에 편찬한 족보를 위하여 쓰인 것으로서, 이것은 신재효의 질박한 모습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주목할 사실은 많은 이들이 그토록 칭송한 신재효의 검소함과 검약이 바로 광대를 기르는 것으로 이어진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충분히 당대의 분위기를 좇아 정사를 따로 마련할 수 있음에도 신재효는 이것을 따르지 않고 근검 절약하여 광대 양성에 돈을 쓴 것입니다. 따라서 정사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신재효의 탁월한 미덕까지 왜곡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정병헌 교수님께서 문제를 제기한 것은 큰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II
이번에 건립된 일련의 각종 건축물들을 비롯하여 정원 등을 아우르는 적절한 총칭을 찾는 것은 고창 군청과 고창 군민의 염원을 잘 마무리하는 관건일 것입니다. 저는 이와 관련된 몇 가지 소중한 경험이 있지만, 새로운 작업을 할 때마다 여전히 매우 많은 상상력과 조사 연구를 요구하는 어려운 과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새로 조성한 지역과 인접 지역에 기왕에 존재하는 동리국악당, 신재효 고택, 그리고 판소리 박물관(그 옆의 미술관도)을 함께 묶어서 논의 방향을 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번에 새로 건립했거나 조성한 건축물과 조경 등 외에도 기왕에 존재했던 모든 신재효 및 판소리 등과 관련된 모든 것을 통칭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이들 각각의 중요한 특징 중에서 공통적인 것을 적출하면 바로 신재효와 판소리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두 가지중 어느 하나도 빠질 수 없지요. 이 점에서 저의 견해는 정병헌 선생님의 견해와도 일치합니다. 이 같은 일련의 논의를 토대로 본 자문위원은 기왕에 존재하는 동리국악당, 신재효 고택, 그리고 판소리 박물관(그 옆의 미술관까지)을 비롯하여 새로 조성한 각종 건축물과 조경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호칭으로서 “신재효 기념 판소리공원”을 제안합니다.
전체 구도에서 볼 때 “신재효 기념 판소리공원”은 고창군을 대표하는 인접한 모양성과 더불어 상보 관계에 놓이면서 양자의 상생은 더욱 두드러질 것입니다. 이것은 관광과 문화의 상호 촉진에도 여러 모로 기여할 것이라 믿습니다.
III
“신재효 기념 판소리공원”으로 호칭을 정하는 작업과 더불어 또 다른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새로운 건축물에도 호칭을 부여하는 작업입니다. 제안서 속의 명칭인 득음실, 체험실, 세미나실, 정자 등은 용도일 뿐 내용과 의미를 담지 못합니다. 다만 이 명칭을 정하는 것은 전문가들로 따로 위원회를 만들어서 과거와 미래를 오고가는 심도있는 대화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새로운 건축물은 이 같은 과정을 통하여 비로소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새로운 신재효 가문 전승 고문서의 발굴 덕분에 새로운 지평이 열렸습니다. 그 중 하나가 정자의 호칭입니다. 당시의 고문서 기록에는 이것이 “부용헌(芙蓉軒)”으로 호칭한다는 사실이 여러 곳에 밝혀 있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각종 시문에는 신재효 선생께서 그 주변에 이식한 각종 화채와 나무도 밝혀져 있습니다. 과거의 경관을 재현하는 데에는 더 많은 조사 연구가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를 따르려는 노력은 중요합니다.
또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신재효 선생을 중심으로 한 시회(詩會)가 부용헌에서 열렸고 이때의 시문(詩文)도 여럿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각종 건축물의 주련으로 이들 시문 중에서 선택하여 사용하면 “신재효 기념 판소리공원”은 더욱 우아해질 것입니다. 신재효 선생은 노래나 검약만이 아니라 시도 탁월하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지고 있습니다. “신재효 기념 판소리공원”에는 소리만이 아니라, 검약을 통한 광대 양성이라는 미덕과 더불어 시도 함께 어우러지기를 기대합니다. 마지막을 잘 마무리하는 섬세함이 이러한 면모를 살리는 데 집중되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동리정사(桐里精舍)’ 명칭에 관한 의견
이찬규(중앙대학교 교수)
1. 동리정사의 기원과 연혁
조선 최초의 판소리학당인 동리정사는 1850년대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신재효 선생이 널따란 집을 자신의 호를 따서 그 안에 소리청을 만든 곳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최초의 여류 국창인 진채선 등 전국의 소리꾼들을 불러 모아 숙식을 제공하며 판소리 사설을 일일이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으며, 여생을 마친 1884년(고종 21)까지 기거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대에는 문하에 많은 광대들과 소리를 배우러 온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며, 그 전체 부지만 4000여평에 이르며 중앙의 석가산(石假山)과 연못을 중심으로 안채와 연당, 정자, 행랑채, 장례당 등의 가옥이 있었다. 동리정사는 일가친척이나, 기생, 광대, 수습생들이 머물던 처소 등 대략 50여 가구가 한 울타리 안에서 집단 공동체 생활을 했던 것으로 전해져 그 규모가 하나의 마을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의 아들이 1899년(광무 3)에 중수하였고, 1973년에 지방기념물 제 5호로 지정되었고, 1979년에는 중요민속자료 제 39호로 지정되어 일부만 보수, 정화하였으며, 1988년 연못과 담장의 석축을 보수, 1992년에는 본채와 사주문을 보수하고, 담장 및 내부 마당을 정비하였으며, 현재 초가 6칸(중요민속자료 39호) 사랑채만 남아 오늘에 전해진다.
2. ‘동리정사’ 명칭 현대화의 필요성
1) 동리정사 명칭의 한계 – ‘동리정사’ 복원 사업은 향후 고창군의 문화 진흥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어야 함. 그러기 위해서는 동리정사가 문화진흥의 심장 역할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음. 그런데 ‘동리’라는 명칭은 ‘신재효’보다는 알려지 않은 명칭일뿐더러 ‘동리정사’라는 이름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직관적으로 알기 어려운 점이 있음. 또한 ‘동리정사(東籬精舍)’라는 동일한 명칭이 2015년 11월 20일 안동시의 문화유산 제99호로 지정되어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지내리에 있어서 혼동의 우려도 있다.
2) ‘신재효’ 성함의 문화적 가치 구현 - ‘신재효’라는 이름은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여 전국민이 어느 정도는 익숙할뿐더러 고창이 타 지역과의 판소리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신재효’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음.
3) ‘동리’ 아호 사용의 문제점 – 19세기 신재효 선생이 ‘동리정사’라고 칭할 때는 아호가 통용되던 시기이고, 현재와 미래에는 ‘아호’ 문화가 없어 ‘동리’를 사용할 가능성이 적음. 따라서 현대인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고, 호기심을 가질 수 있는 명칭을 사용해야 함.
4) ‘판소리’를 부각 - 고창이 여러 국악 분야 중 ‘판소리’ 성지로서의 지위를 가지기 위해서는 ‘신재효’와 ‘판소리’를 직접 연결시킬 필요가 있음. ‘국악’이라는 포괄적인 음악보다는 ‘목소리’ 전통 공연 예술로서 특화시켜 나갈 필요가 있음.
5) ‘소리’의 보편성 확보 – 판소리는 ‘소리’라고도 하는데, 이를 적극 활용하여 ‘목소리’ 예술로 승화시켜나갈 필요가 있음. 목소리로 하는 예술은 전세계에서 ‘노래’라는 형식으로 불려지기 때문에 보편성을 지니고 있음.
6) ‘정사’를 ‘문화관’으로 - ‘정사(精舍)’는 현재 세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어서 현재 추진하고 있는 복원 사업의 방향과는 잘 맞지 않음.
정사(精舍) <1> 학문을 가르치기 위하여 마련한 집. <2> 명사 정신을 수양하는 곳. <3> 명사 승려가 불상을 모시고 불도(佛道)를 닦으며 교법을 펴는 집. |
또한 사람들이 ‘정사’라는 말을 들으면 ‘정사(情事)’를 연상할 수 있어 희화될 가능성이 있음.
판소리는 단순히 공연 예술을 넘어 하나의 ‘전통 문화’로 승화되어야 함. ‘판소리’가 지닌 문화적 속성을 적극 발굴하여 판소리를 보다 종합 예술인 ‘판소리 문화’로 확대시켜 나가야 관광 사업 등과 연계되어 확장성이 있음.
7) ‘마당’과 ‘마을’ - 신재효 선생이 정리한 판소리 여섯 마당은 공간으로서의 ‘마당’과 연결되며, ‘마당’은 연결되어 ‘마을’을 이룬다. 실제 복원 사업에서도 여러 집채가 지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그 기능도 다양할 것이므로 ‘마을’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임. 이렇게 하면 판소리 마을에서 판소리 마당이 펼쳐지고, 그 마을에서 다양한 판소리 문화가 이루어진다는 설명이 적절해진다.
8) 위 사항을 종합하여 ‘동리정사(桐里精舍)’를 ‘신재효 판소리 마을’(줄여서 신판마을, The Village of Shin Jae Hyo-Pansori)’로 명명할 것을 제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