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원파의 현재 상태
구원파는 크게 권신찬 계열, 이요한(본명 이복칠) 계열, 박옥수 계열 등 3개파로 크게 분류할 수 있고, 유사한 교리와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그 외에도 있다.
1.1 권신찬 계열(기독교복음침례회)
오대양사건과 (주)세모와 관련설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본부는 서울 용산구 한강로 1가 231-23 서울교회로서 통상 삼각지 교회로 불린다.
1.2 이요한 계열(대한예수교침례회)
교회의 헌금을 사업에 전용하는 것을 문제삼아서 권신찬 계열에서 분리되어 나왔다. 본부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 239-1 삼원빌딩 4층 서울교회이다.
1.3 박옥수 계열(대한예수교침례회)
박옥수는 중학교 3학년 중퇴생으로서 어떻게 목사가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을 주제로 전국순회집회를 하고 있는데 본부는 대전 한밭중앙교회이다.
2. 구원파의 주장과 해설
최근에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10단계 질문서'가 있는데 이는 그들이 기성교회 신자들을 어떤 점에서 공격하는지 잘 보여준다.
① 선생님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확실히 알고 믿습니까?
② 선생님은 거듭나셨습니까?
③ 성령님이 마음 속에 계심을 믿습니까?
④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확신하십니까?
⑤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⑥ 모든 죄가 용서되었습니까?
⑦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은 아닙니까?
⑧ 구원받는 것이 확신되어집니까?
⑨ 재림주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⑩ 구원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2.1 "이미 구원받았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 회개를 계속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증거다"는 주장에 대해서
▼ 구원파의 주장
회개란 '돌이킨다'는 말로써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한 번 돌이켰기 때문에 더 이상 돌이킬 필요가 없다. 이미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다 사했으므로 회개를 계속한다는 것은 사죄의 확신이 없는 증거이므로 구원받지 못한 지옥의 자식이라고 한다. 그래서 주기도문도 외우지 않는다.('우리의 죄를 사해 주옵시고'라는 부분 때문에 외우지 않는데, 이 부분을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다'는 내용으로 바꾸어서 외우기도 한다.) 사죄를 간구하는 기도도 하지 않는다. 이 말들은 논리에 맞는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회개하는 고통이 없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기에 매력적이다. 영적 투쟁을 할려고 하는데 잘 하지 못할 때 이 말을 듣게 되면 그 논리와 확신에 넘어가기 쉽다.
▲ 해설
구원을 위한 단 1회적 회개(히6:1 이하)와 성화를 위한 반복적인 회개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시 51편, 삼하 24:10, 요13:8-10, 요일1:8-10) 또한 죄에 대한 참된 통회와 회개는 믿음에서 온다는 것을 모르는 자들이다. 구원파의 주장은 결국 회개하는 싫어하는 인간의 본성을 합리화하며 자유롭게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2.2 죄인이라고 고백하면 지옥으로 간다는 주장에 대해서
▼ 구원파의 주장
'죄인이냐 의인이냐'를 물어서 죄인이라고 하면 천국은 의인만 가는 곳이요, 지옥은 죄인이 가는 곳이니 지옥에 간다.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해야만 구원받았다.
▲ 해설
산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고 성령의 역사 속에서 성화되어 간다. 이땅에서 사는 동안 완전히 성화되지 못했기에 죄악과 허물과 실수 가운데서 살게 된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바울도 자신의 죄인됨을 과거 시제로 고백했을 뿐 아니라(딤전1:13), 현재 시제로 고백하고 있다(딤전1:15). 현재 시제에서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다. 바울이 죄인 중의 괴수이면 어느 누가 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구원파는 이에 대해서 디모데전서 1:15절 원문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잘못되었다고 하지만, 현재 번역이 원문과 일치함이 확인되었다.
2.3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교회의 제도에 얽매일 필요가 없고, 주일성수, 새벽기도, 십일조는 율법의 소산이다"는 주장에 대해서
▼ 구원파의 주장
믿음으로 구원받았는데, 왜 주일 성수, 새벽기도, 십일조와 같은 율법의 소산들을 행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제 믿음 안에서 자유를 얻었는데, 다시 율법적인 생활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 해설
구원은 믿음으로 값없이 얻는 은총이므로 구원얻는 조건으로 다른 무엇을 첨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 교회의 제도가 필요없다고 할 수는 없다. 구원받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서의 질서를 지켜야 하며,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마련해 주신 교회의 제도와 법을 더욱 존중해야 한다. 이는 교회의 모델이 되는 초대교회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다(행2:46). 교회는 신앙성장과 교제를 위한 것이다. 주일 성수, 새벽 기도, 십일조 등은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땅한 의무이며 은혜받는 통로이다(눅11:42). 그러므로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이것들을 버려야 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 더욱 이를 힘써 행해야 한다.
2.4 "이미 구원받았으니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
▼ 구원파의 주장
예수님께서 힘든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모두 하셨다. 우리는 이제 그 은혜를 누리기만 하면 된다. 십자가를 지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어 보고자 하는 어리석고 교만한 행동이다. 설령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죄를 지어도 죄로 정죄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렇게 힘들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자 하는가?
▲ 해설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없다.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롬1:17)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고 말씀하셨다. 구원을 위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셨지만, 선교를 위해서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는 선교를 위해서 고난과 희생, 섬김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을 섬기는 길이요, 그의 명령에 복종하는 길이다(히13:12,13).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은 죄를 범해도 죄로 정죄되지 않으므로 죄를 범치 않기 위해서 애써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은 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는 유혹에 동요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이러한 자들을 엄히 경고하고 있다(빌2:12, 갈5:13). 구원파의 주장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육신의 편안함을 따라 살고자 하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논리이다.
2.5 "깨달음을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주장에 대해서
▼ 구원파의 주장
권신찬씨가 '죄사함을 깨닫고', 이요한씨가 '복음을 깨닫고', 박옥수씨가 '거듭난 체험'을 했다는 것은 다 같은 뜻으로서 '깨닫고 거듭나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깨닫고 거듭난 시각, 곧 구원받은 시각(영적 생일)을 알아야 한다. 육적 생일을 기억하는 것과 같이 영적 생일을 기억해야 구원받은 증거가 확실하다.
▲ 해설
구원파의 주장에 따르면 육적 생일은 부모나 타인에 의해서 알 수밖에 없는데 영적 생일도 타인이 가르쳐 주어야 알 수 있다는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구원파가 유치하게 나오니 해설도 유치한 수준으로 낮아진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그 깨달음은 믿음에서 오는 것으로 깨달음 자체가 구원을 얻게 하는 것처럼 주장하여 영지주의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성경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입하여 구원에 이르고 그 믿음이 성령으로 인쳐질 때 구원받는다고 하였다.(롬8:11,롬10:10)
3. 구원파에 대한 결론
믿음의 한 가지 기능인 깨달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들의 주장은 영지주의적 사고임에 틀림이 없다. 또한 구원의 확신이 곧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점은 구원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처사인 동시에 성령으로 인쳐진 자가 구원을 받았다는 로마서 진리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또한 구원을 위한 단 1회적 회개와 성화를 위한 반복적 회개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나,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하면 지옥에 간다는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명백한 이단인 것이다.
4. 사람들은 왜 구원파에 빠지며 우리의 대처방안은 무엇인가?
구원파와 같은 오류에 빠지기 쉬운 것은 처음에 받은 예수님의 은혜와 평안과 기쁨이 사라지고, 죄의식이 찾아올 때 그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으며 고민하는 경우이다. 특히 반복해서 죄를 짓고, 회개해도 현재 상태가 별로 달라지지 않을 때 '내가 구원받았는가'하는 의심이 든다. 이때 우리는 이성의 논리에 맞다고 해서 구원파와 같은 사상에 빠질 것이 아니라 성경을 깊이 연구하며 성경이 말하는 구원을 알아야 한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때 구원은 즉각성과 점진성 2가지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 구원의 즉각성(혹은 일회성, 영원성)은 말 그대로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요한복음 3장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거듭남이다. 예수님을 만난 우리는 누구나 이런 은혜가 있고, 체험이 있다. 반면 구원의 점진성은 천국에 가서 우리가 완전히 성화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보는 것이다(빌1:19, 빌2:12). 그렇기에 천국에 가서 완전히 성화될 때까지 이땅에서는 죄악과 허물을 회개하면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번민과 갈등을 겪게 된다. 그러나 그런 번민과 갈등은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당연한 과정이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여서 나의 구원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연약해서 죄에 넘어질 때 십자가를 생각하며 회개하고 이렇게 연약하고 허물진 자신을 위해 이땅에 오신 예수님께 감사하면 된다. 이때 은혜의 세계를 깊이 체험케 되며 구원을 더욱 확신케 된다. 그리고 그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고자 죄를 회개하고 멀리하며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배우는 삶을 살게 된다.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배울 때 사탄이 어떤 논리를 가지고 유혹하며 공격해도 흔들리지 않게 된다. 구원파에 빠진 모든 사람들의 구원과 더 이상 사람들이 구원파에 빠지지 않길 빌면서.......
참고 성경 구절
(가나다 순)
■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 누가복음 11:42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 디모데전서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로마서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로마서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빌립보서 1:19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고로
■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 사무엘하 24:10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 시편 51:9, 11, 17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지은 시편)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 다윗은 성신(성령)을 받고 분명히 구원받은 자였지만, 죄사함을 간구하고 있다.
■ 요한복음 13:8-10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 요한일서 1:8-10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 히브리서 6: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 히브리서 13:12,13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
구원파를 경계하라 2
<목 차>
1. 구원파의 유래
2. 구원파의 갈래
3. 구원파의 교리
1. 구원지상주의자 박씨
2. 죄와 범죄를 잘 못 구별함으로 회개의 단회성 주장
3. 그들의 구원 확증 방법
4. 끝맺으며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가 일어났었나니
이와같이 너희들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베드로후서 2:1)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언 1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예수님 이외에)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사도행전4:12)
1. 구원파의 유래
세칭 구원파로 알려진 기독교 복음 침례회(교주:권 신찬)는 기존 침례교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처음에는 <한국 평신도 복음 선교회>라는 평신도 단체의인상이 풍기는 이름으로 전국 곳곳에서 기성교회와 좌충우돌 하면서 그 명백을 이어 오다가 1981년에 접어들어 <기독교 복음 침례회>로 간판을 갈아 달았을 뿐이다.
장로교 목사로 출발했던 권씨였지만, 재침례를 주장하고 기성교회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결국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 경북노회에서 목사직을 면직 당하였다. 그후 권씨는 기성교회에 대한 앙심(?)을 품고 그때부터 더욱 본격적으로 기성교회를 파괴, 혼란을 야기시키는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권씨는 그후 칠성교회에서 아무 교파도 없는 독립교회 생활을 하면서 전전하다가 1966년 인천복음주의 방송국(극동방송의 전신)의 전도과장으로 들어가 아침마다 이 방송의 프로인 <은혜의 아침>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자신의 구원 교리를 암암리에 전했다. 해마다 여름에는 청취자 수양회라는 명목으로 불광동에 있는 수양관을 빌어 집회를 하면서 권씨는 자신을 파직한 기성교회의 바탕부터 뒤집어 엎어버릴듯한 비방으로 기성교회와의 충돌이 본격화 되었다.
이때 권씨를 추종하던 무리들은 전남 목포, 전북 임실, 경북 안동, 포항등 전국 곳곳에서 가정을 등지기도 하고, 섬기던 교회를 떠나기도 해서 물의를 빚었고, 심지어는 평화로운 교회가 그들의 손에 넘어 가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했다.
그러다 어떤 공식 명칭이 없어 깨달음파, 골방파, 구원파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워지던 이 집단은 극동방송을 장악하려는 음모가 표면화 되면서 마침내는 극동방송국으로부터 추방되어 버리게 된 것이다.
3. 구원파의 교리 (박옥수파의 교리를 中心으로)
권신찬파나 이요한파와 그 교리가 대동소이(大同小異) 하므로 여기서는 최근에 적지않은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박옥수파를 중심으로 다루겠다.
박옥수가 언제 신학을 했는지, 어떻게 목사가 되었는지, 어떻게 대한 예수교 침례회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자신이 밝힌 바에 의하면, 1962년 거듭난 후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20여년 간 교파를 초월하여 말씀의 종으로 전국 각지에서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분명하게 증거하여 평신도는 물론 목회자들도 죄사함을 받고 거듭나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돕고 있으며, 현재는 서울 제일 교회 담임목사로 시무 중이라고 밝히고 있다.(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박옥수저,기독교 문서 선교회 1987.5)
권신찬씨와 같은 종말론이나, 기성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흔적은 있으나 아직껏 <교회론>이라고 할 만한 사상적인 체계는 없다. 그런데 구원론에 있어서는 기독교 복음 침례회의 권신찬씨와 대한 예수교 침례회의 이요한씨와 별 차이가 없으면서도(실지 아무 차이도 없다) 자신들은 구원파가 아니라 한다.
현재도 박씨와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의 설교 속에 자주 인용 되고 있는 미국 선교사 딕욕이라는 사람이 있다. 잠시 세사람의 말을 들어보자.
딕 욕; "한국에 내가 만든 수제자가 열명 있는데,
그 중의 한 명이 박옥수요, 또한명이 유병언이다."
박옥수; "나는 유병언씨를 잘 안다....
그러나 권신찬씨는 모르며,
그의 구원파와는 관계도 없고 또 전혀 다르다."
권신찬; "1962.8.3 주암산 기도원에서 수양회가 열렸는데,
그때 미국 선교사 딕욕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고,
울면서 기도하며....."
1. 구원지상주의자 박씨
물론 구원은 너무너무 중요하다. 그러나 구원은 두가지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하나는 넓은 의미의 구원이요, 하나는 좁은 의미의 구원이다. 구원의 단계와 서정을 여러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하는데, 요약하면 거듭남으로써의 구원(중생)과 그 후에 따르는 성화의 구원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그 세세한 것을 다 말할 수는 없다. 단지 생명이 태어난 이후에는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태어남이란 태어나기 전까지에는 모든 것처럼 보이지만, 일단 태어나면 그것은 모든 것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지 않는가! 기독인에게 중생과 구원의 확신처럼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런데도 그것들은 그리스도도의 초보이니, 버리고 완전한데로 나아가라고 하였다.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히브리서 6:1,2)
2. 죄와 범죄를 잘 못 구별함으로 회개의 단회성 주장
박씨는 요한일서 1:9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도둑질, 거짓말, 살인, 간음이 죄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 입니다.감기의 결과로 콧물 기침을 한다고 해서 콧물과 기침이 곧 감기는 아니듯이 죄와 범죄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많은 기독인들은 죄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범죄만 해결하려 합니다. 요한일서 1:9에서 '범죄를 자백하면'이라 하지 않고 '죄를 자백하면'이라 하지않았읍니까?"라고.....
이것이 그의 사상의 핵심이다. 아니 다른 구원파에서도 함께 주장하는 소위 <회개의 단일성>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각자의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을 받으면 그 후로는 죄는 용서 되었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이고, 회개하는 자는 아직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니 구원 받지 못한 증거라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혹시라도 옳지는 않을까'하는 호기심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조용히 성경으로 귀를 기울여 보자.
박씨말처럼 성경은 죄와 범죄를 구분하고 있는가?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선입견에 의한 것이다.
그 증거를 몇군데 살펴 보자.
1) 시편 51편- 그가 가장 많이 인용하는 성경이다. 그는 자기 필요에 의해 여러번 말했건만 스스로 자기 귀를 막고,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4절에서,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피흘린 범죄>의 오기(誤記)란 말인가?
만일 이것이 그의 말대로 <범죄>라고 해야 하는데, <죄>라고 기록된 것이라면 이는 누구의 실수인가?번역 과정에서? 아니다.성경을 기록한 사람들????? 이도 물론 아니다..
성경의 저자가 누군가?
"예언(성경)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1:21)라 하지 않았는가.이 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성령의 저자이신 성령님을 부인하면,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깡그리 부인하는 것이고,내가 <죄>와 <범죄> 사이에서 헤매이는 순간 결국은 나의 믿음 마저도 사라지는 것이다.
**성경이 구별하지 않는 것을
왜, 억지로 구분하려 하는지.. **
2)삼하24:10- 다윗이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하신 인구계수를 함으로 하나님께 교만의 죄를 범하였다. 그 후에, "그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했다. 박씨의 말과는 정반대다. 죄가 있어서 인구계수의 범죄를 했다고 해야 할 터인데....
3)마 6:12- 주기도문의 일부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했다. 박씨 말대로 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었다"는 말은 불가능 하다. 또한 박씨의 말을 인정하면 우리 인간이 인간에게 범죄할 수는 있어도 죄를 지었다는 말은 불가능할 것이다. 더욱이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죄(박씨의 말대로 하면 범죄도 아닌 죄를) 용서해 줄 수 있겠는가?
☞죄와 범죄를 구분함으로 예수님을 믿고 죄의 문제를 해결함으로 구원을 받으며, 그래서 이제 다시는 죄의 문제에는 시달릴(?) 필요도 없고, 따라서 회개할 필요도 없다는 것은 한낱 말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이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가 합리화되어 버린다. 회개 무용론은 예수님의 사죄를 강조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율법 폐기론에 빠지게 되고, 심지어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게 된다.
결국 인간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사실상 조롱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미 목욕한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없다"(요 13:10)하시지 않았는가,즉, "이미 목욕을 한사람일지라도 발은 씻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기에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주님을 만났고, 또 자신의 죄를 낱낱이 회개하였던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한 것이다.그것도 과거 시제가 아닌 현재시제로 말이다.(딤전 1:15)
3. 그들의 구원 확증 방법
1)이들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자기들만 구원에 대한 전용특허를 받은 양 묻기를 즐겨하고 조금이라도 기분 나빠하거나 대답을 회피하면 구원 받지 못한 자로 정죄해 버린다. 그러나 이것은 먼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주권을 무시하는 교만의 죄요, 다음에는 질문하는 자신들만이 구원을 시험할 수 있는 시험관이라도 되는 듯한 행동을 하는 교만을 범하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에 구원의 확증이 생기는데도 말이다....
2)또, 이들은 구원 받은 연도, 월, 일, 장소를 묻는다. 성경은 즉각적인 구원을 말하고 있다. 삭개오, 강도, 간수장이가 그렇다. 그러나 점진적인 구원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점진적인 구원은 인정하질 않는다. 이런 일화가 있다. 구원파에 속한 자가 어떤 성도에게 구원을 받았냐고 묻자, 받았다고 했더니, 그러면 언제, 어디서 받았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모른다고 대답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내가 언제부터 자전거를 타게 되었는지 알 수 없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내가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것이오"
사실 구원은 현재가 중요하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말씀이 주관적인 내 확신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4. 끝맺으며...
이 외에도 <성경 해석 방법>, <종말사상>등에서도 많은 오류가 있으나 생략하겠다. 아마 <구원파>라는 말에서 먼저 풍기듯, 그들의 <구원관>이나 그에따른 <회개 무용론>에 대해서만 어느 정도 알아도 충분할 것이다.
사단은 때로는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믿는 이들을 유혹한다.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이단의 무리일 수록 성경 말씀을 너무 잘 아는 것 같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꼭 성경을 들먹인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다 짝이 있다"(사 34:16) 하지 않았는가!
내 안경을 벗기 전에는 결코 그 의미를 바로 볼 수가 없다.
내가 혹 색깔있는 안경을 썼다면, 더더욱.....
에덴에서 아담과 이브를 유혹할 때도,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사단은 말씀을 이용했음을 상기하자.
"하나님이 ..... 하시더냐?"
"기록하였으되....."라고 사단은 아담과 이브에게 그리고 예수님에게 다가 왔다.
물론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감정의 안경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기에 넘어졌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말씀의 그릇된 인용을 또한 말씀으로 물리치시고 유혹을 이기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