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13명의 단출한 산꾼들을 태운 버스는 경부고속도로 대전요금소로 진입하면서 차내에 불이 꺼지고 모두들 토막잠을 청한다. 버스는 전조등 불빛으로 어두움을 밀어내며 거침없이 질주한다. 남이분기점에서 중부고속도로로 갈아타고 호법분기점에서 다시 영동고속도로로 갈아타서 달리다가 문막휴게소에서 10여분 정차한 후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탄다. 경부-중부-영동-중앙 고속도로를 질주한 버스는 홍천요금소를 빠져나와 삼거리 갈림길에서 좌회전하여 44번 국도를 타고 속초방향으로 향한다.
한계령은 잘 알려진 대로 양양과 인제를 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꾸불꾸불한 도로 중의 하나이다. 한계령을 두고 고갯마루 양쪽에서 달리 불렀다. 한계리 사람들은 한계령이라 불렀지만, 오색 사람들은 오색령이라 불렀다. 인제군 원통에서 한계령으로 오르는 도로 위쪽에 한계산성(寒溪山城)과 한계사지(寒溪寺址)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또한 한계산성이 신라 말 마의태자에 얽힌 안타까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과, 한계사지가 내설악 백담사의 원조에 해당하는 사찰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새벽 2시 40분 한계령 휴게소에서 하차하여 산행준비를 마치고 과일 한 조각씩 나누어 먹으며 입산시간을 기다린다.
3시 정각. 들머리로 들어선다. 산행은 한계령휴게소 뒤 설악루로 오르는 시멘트 계단을 오르면서 시작된다. 이름하여 108계단인데, 번뇌를 털어 내는 계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번뇌 덩어리인 것 같다. 고개 마루턱에 설악루가 있고 오른쪽으로 도로 공사중 희생된 영혼들의 명복을 비는 위령비가 서 있다.
한계령 휴게소 1km 이정표를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서야 서북릉 삼거리에 올라선다.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귀때기청봉(1.6km) 거쳐 대승령(6.7km)으로, 오른쪽 길을 따르면 끝청(4.2km)을 거쳐 대청봉(6km)으로 이어진다.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물 한 모금으로 거치러진 숨을 고르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고 진행한다.
중청대피소 2.6km 이정표가 서 있는 안부를 지나고 30분 정도 진행하여 중청대피소 0.6km 이정표가 있는 끝청(해발 1604m)에 도착한다.
오색과 중청 갈림 지점으로 설악산 전체를 감상하기 최적의 장소이다. 산 아래를 안개로 채우고 설악의 봉우리들을 하늘 높이 들어올리고 있다. 대자연이 마치 하얀 휘장을 두른 것처럼 신비롭다.
멀리 솟구친 귀때기청봉은 한쪽 귀때기에 있어서 귀때기청봉이라 불린다. 귀때기청봉이라는 이름에는 재미있는 유래가 있다. 귀때기청봉은 자신이 설악산에서 가장 높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귀때기청봉은 대청봉 앞에서 자신이 더 높은 봉우리라고 뽐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대청봉은 느닷없이 귀때기를 한 대 올려 부쳤다. 그 바람에 귀때기청봉은 대청봉에서 멀리 떨어진 지금의 이곳까지 날아와 버렸다고 한다.
중청의 허리를 돌아 끝청갈림길(해발1600m)에 도착한다. 왼쪽은 소청봉(0.4km)으로, 오른쪽은 대청봉(0.6km)으로 갈라진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고 곧바로 중청대피소에 도착한다. 대피소가 한산하다. 간식으로 허기만 속이고 배낭을 내려놓고 맨몸으로 대청봉을 오른다. 우리나라 척추를 이루는 백두대간의 중심에 있는 설악산의 대청봉(1708m) 주변은 운해에 갇혀 안타깝게도 깨어날 줄을 모르고, 금강초롱과 바람꽃 등 들꽃만이 산객을 반긴다.
조선 시대 정조 때 성해응(1760-1839)은 자신이 지은 지리서 ‘동국명산기’에서 ‘멀리서 보면 청색으로 보였기 때문에 청봉으로 불렀다’고 대청봉의 유래를 설명한다. 또 ‘대청봉은 ‘봉정(鳳頂)산의 끝’으로도 불렸는데 국내 사찰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봉정암의 이름도 여기서 나온 것’이라고 소개한다.
한가위에 덮이기 시작한 눈이 하지에 이르러 녹는다하여 설악이라 한다<동국여지승람>
산마루에 오래도록 눈이 덮이고 암석이 눈같이 희다고 하여 설악이라 이름 짓게 되었다<증보문헌비고>
주봉인 대청봉(1708m)과 북쪽의 마등령· 미시령, 서쪽의 한계령에 이르는 능선을 설악 산맥이라 하며, 그 서쪽 지역을 내설악, 동쪽 지역을 외설악으로 나눈다. 대청봉의 동북쪽에 있는 화채봉과 서쪽에 있는 귀때기청봉, 대승령, 그리고 안산을 경계로 그 남쪽을 남설악이라 한다.
대청봉 정상 표지석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짧은 만남 진한 추억을 봉우리에 묻어두고 다시 빠른 걸음으로 중청대피소로 내려선다. 중청봉의 레이더 기지에 둥그런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중청대피소에서 본 대청봉은 마치 피라미드처럼 대칭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형상이다.
중청대피소에 도착하여 조금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눈앞에 펼쳐지는 대자연의 파노라마를 감상하며 휴식을 취한다.
모두들 행복한 표정이다. 살면서 가장 값진 시간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소청봉으로 발길을 옮긴다. 1분쯤 지나면 끝청갈림길(해발1600m)이다. 왼쪽은 한계령(7.7km) 가는 길이다. 지나온 길이다. 오른쪽 중청봉 허리를 돌면 바위 조망지대가 나타나고 설악의 꽃으로 불리는 공룡능선과 용아장성이 유혹한다. 소청으로 내려가는 길은 완만한 능선을 따라 조망도 아주 좋다.
소청봉(해발1550m)에 도착한다. 갈림길에서 왼쪽은 소청대피소 0.4km 백담사 11.7km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희운각대피소 1.3km 비선대 6.8km로 가는 길이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선다. 소청봉에서 희운각에 이르는 1.3km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급경사의 내리막이지만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내려가던 길에 조망바위가 나타나고 등 갈기를 날카롭게 세운 용의 모습과 무너미고개 위의 신선봉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설악은 세계 다른 나라 어느 산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긴 철계단을 내려와 다리를 건너 희운각 대피소에 도착한다.
공룡릉은 보통 마등령에서부터 희운각대피소 앞 무너미고개까지의 능선구간(5.1km)을 가리키는데, 설악산을 거쳐가는 백두대간의 등줄기인 이 능선을 경계로 동쪽지역을 외설악, 서쪽지역을 내설악이라 부르며, 그 생긴 모습이 공룡이 용솟음치는 것처럼 힘차고 장쾌하게 보인다하여 공룡릉(恐龍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천화대(天花臺)에 우뚝 솟아오른 범봉은 설악산 암릉의 상징이라 할 만큼 수려하다.
희운각 대피소를 지은 사람은 ‘최태목’이라는 분이다. 산을 좋아한 아들이 어느 해 겨울 희운각 위에서 불행하게도 조난을 당하여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대피소가 있었으면 살았을 아들을 생각하며 또 다른 조난을 막기 위하여 최씨가 지은 대피소라고 한다. ‘희운(熹雲)’은 최씨의 호. 설악산이 5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이전의 이야기라고 한다. (희운각 매점에서 채록)
식수를 보충한 후 대피소 나무 식탁에서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한다. 다람쥐들이 몰려든다. 심지어 견과류를 먹으려고 사람 손바닥 위에까지 올려온다. 휴식을 마치고 무너미고개로 향한다.
5분 정도 지나 무너미고개(해발1020m)에 선다. 갈림길이다. 왼쪽이 공룡능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천불동계곡을 거쳐 비선대로 가는 길이다. 천불동계곡과 가야동(伽倻洞)계곡의 경계에 위치하여 내외설악을 구분 짓는 곳이다. 무너미의 무는 물에서, 너미는 넘는다(건넌다)에서 왔다. 물을 넘는다(건넌다)란 뜻의 무너미를 한자(漢字)로 수유(水蹂), 수월(水越)이라고도 표기하는데, 이 지명도 전국에 무수히 많이 분포한다.
내설악의 수렴동과 쌍벽을 이루는 천불동(千佛洞)계곡은 계곡 양쪽의 기암절벽에 천태만상의 바위봉우리가 천 개의 불상이 늘어서 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 외설악의 비선대에서부터 대청봉에 이르는 8km의 중심계곡으로 설악골 계곡이라고도 한다. 하늘을 떠받드는 듯한 봉우리, 골짜기마다 걸린 수많은 폭포, 거울보다도 맑은 연못 등이 함께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그래서 수직절리(垂直節理 : 천불동 골짜기의 뾰족한 바위 봉우리가 모두 수직으로 갈라져서 온갖 형상을 하고 있다)라 한다.
정면과 오른쪽으로 소나무와 기암절벽이 어우러져 멎진 절경을 이루며 나그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칼로 자른 듯이 솟구친 암벽이 깊은 골 양편으로 끝없이 이어져 있고, 그 암벽에는 소나무가 그림 속 풍경처럼 자라고 있다. 발길을 옮길 때마다 하늘 높이 솟구친 암봉이 갖은 형상으로 다가섰다가 뒤로 멀어져 간다. 기이한 암벽들이 마치 병풍을 펼쳐놓은 듯하다.
곧바로 위태롭게 석벽에 설치한 철계단을 내려서면 천당(天堂)폭포와 만난다. 속세에서 온갖 고난을 겪다가 이곳에 이르면 마치 천당에 온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0분 정도 내려서면 오른쪽으로 양폭포가 보이고 양폭대피소에 다다른다. 예전 양폭대피소는 2012년 1월 화재로 전소되고, 이듬해 다시 건축한 것이다. 양폭포는 천불동계곡의 대표적인 폭포로 음(陰)폭포와 이웃하여 있는데, 양폭포는 겉에 있으므로 양(陽)폭포이고, 음폭포는 음폭(陰瀑)골에 들어가서 속에 있으므로 음(陰)폭포이라 한다. 현재는 줄여서 부르는 양폭(陽瀑)이라는 말이 더 널리 쓰인다.
양폭에는 산장이 자리잡고 있어 등산객들의 피로감을 풀게 해주는 장소가 되고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곳이기도 하다. 7-8분 정도 완만한 길을 따라 내려서면 오련폭포(670m)가 긴 철계단 옆으로 이어진다. 철계단을 다 내려서면 좁은 계곡을 따라 오련(五連)폭포가 한 눈에 조망된다.
귀면암과 양폭포 사이의 깎아지른 듯한 바위 협곡 사이에 5개의 폭포가 연이어 떨어지며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전에는 폭포 일대의 암벽을 천불동계곡 앞문의 수문장 같다고 하여 앞문다지라고도 하였다. 무성한 숲과 나무가 폭포를 감싸고 있고 맑고 깨끗한 물이 골짜기를 흐르는 선경이다. 용비승천(龍飛昇天 : 설악산 폭포 물줄기를 바라보면, 물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물이 올라가는 듯하여 마치 용이 승천하는 것 같다)이라 한다.
낙석의 위험 때문에 안전 그물망이 설치되어 있다.
칠선골입구(해발 580m)에 다다른다. 양폭대피소 0.9km 비선대 2.9km 이정표가 있다. 20여분 내려서면 귀면암(해발 420m)에 도착한다. 안내판과 비선대 1.5km 이정표가 보인다.
귀면암(鬼面岩)은 생김새가 무시무시한 귀신 얼굴 모양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귀면암이라는 이름은 근래에 붙여진 것이고, 원래 옛날에는 천불동계곡의 입구에 버티고 서서 마치 수문장의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겉문다지' 또는 '겉문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조금 더 내려서면 이호담(二壺潭)과 만난다. 배가 불룩한 병 모양의 아담한 담이 2개가 있어 이호담이라고 한다. 곧이어 잦은바위골입구(해발 440m)에 다다른다. 비선대 1km 대청봉 7km 이정표가 반긴다. 문수담을 지난다. 문수담(文殊潭)은 문수보살이 목욕을 한 곳이라고 하며, 일명 문주담(文珠潭)이라고도 한다.
비선대 앞에 우뚝 솟아있는 삼각모양의 돌 봉우리를 세존봉(일명 장군봉)이라 하며, 깎아지른 듯한 큰 돌산 허리에 위치한 자연 동굴인 금강굴은 1400여 년 전에 원효스님이 수행했던 곳이라 전한다. 예전 기억으로는 조그만 굴 안에 불상이 놓여있고 소원기도를 드린 촛불들이 켜져 있었다. 암벽 등반을 하고 있는 모습은 보기에도 아찔하다.
비선대란 이름은 연속된 바위에 폭포를 이루는 광경이 마치 우의(羽衣) 자락이 펄럭이는 것 같으며 마고선녀(麻姑仙女)가 이곳에서 하늘로 승천하였다고 하는 전설에 따라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기암절벽 사이에 넓은 바위가 못을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예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자연을 감상하고 시문을 남겼으며 넓은 바위에는 많은 글자를 새겨 놓았다.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불운의 혁명가 김옥균의 이름도 눈에 띤다.
비선대와 와선대 주변에 자리잡고 있던 비선산장과 산악인의 집(청원정휴게소)을 비롯하여 길가 노점상은 모두 철거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다.
소공원 2.5km 이정표를 지나 금강교를 건너면 왼쪽으로 신흥사 통일대불이 보인다. 신흥사에서 설악산 관광객을 위해 건립했다는 거대한 청동좌불은 둥그렇게 단을 쌓아 그 위에 모셨고 정면으로는 큰 석등 2개와 향로가 세워져 있다. 이정표에는 대청봉 10.2km, 비선대 2.7km, 금강굴 3.3km, 울산바위 3.4km, 흔들바위 2.9km, 신흥사 0.2km 라고 되어있다.
12시간 동안 설악의 품에 안겨 창조주의 멋진 작품 세계를 감상하며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어 그저 감사하다.
첫댓글 아주 조으네 포주도멋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