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回想)
내 고향 높은대미
높은대미는 주월산 자락 동쪽으로 뻗은, 상현달 같은 대나무 동산이 옹기종기 스무호 남짓 집들을 품고 있는 자그마한 마을이다. 마을 가운데로 주월산에서 시작된 냇물이 남으로 흘러내리며 응달과 양달로 터를 갈라놓는다. 대나무 동산 뒤쪽으로는 아랫녘에 돌마들이, 윗녘에 가운데뜸이 있고, 꼬막 껍데기 엎어져 있듯 초가집들이 모여 있다. 높은대미 초입, 냇가를 끼고 둥그렇게 가지를 늘어뜨린 사장나무 아래에 서면 널찍한 들판을 넘어 멀리 봉두산 앞쪽으로 기차역이 보이고, 그 오른쪽으로는 철마다 색깔이 바뀌며 득량만에서 불어오는 해풍에 넘실거리는 조성 들판이 눈에 꽉차게 들어온다.
뜨거운 여름 방학. 점심 때를 지나면 사장나무 가지가지마다 달라붙어 무리지어 뱉어내는 매미 울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그 큰 그늘 아래 줄지어 개울에 네 발 담그고, 게슴츠레 눈을 내리깔고서, 꼬리를 찰싹거리며 널찍한 엉덩이에 들러붙는 쇠파리를 쫒던 소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때 맞춰서 '음머'하고 마치 시계 종소리처럼 시각을 알려주면, 그때서야 우리는 하던 구슬치기를 그만두고 개울가 풀섶과 아카시아나무 밑동에 메어진 쇠고삐들을 풀어냈다. 제 먼저 알아차리고 앞장서는 소들을 따라 한 줄로 짚은골(깊은골)로 향해 철벅거리거나 미끄덕거리는 다이야표 혹은 기차표 검정고무신을 끌고 다랭이논 사잇길을 올라갔다. 연신 찰싹거리는 꼬리를 피해 쇠파리는 움찔움찔거리는 소 엉덩짝 주변을 맴돌고, 겨우 소 뒷다리 정갱이 높이만 한 키작은 아이들이 고삐를 길게 늘여뜨리고 몇 걸음 뒤에서 소를 따라 오른다. 소뜯기러 주월산 자락을 오르는 것이다. 뚱네집을 돌아올라설 때 쯤이면 멀리서 ‘빠앙’ 하고 두시반 기차가 벌교쪽 터널에서 나와 수당을 지나 조성리역쪽으로 내려간다. 얼마전부터 하동 섬진강 철교를 놓아 순천에서 진주까지 단절되었던 철로가 이어져 개통된 경전선으로 디젤기관차가 다니는 것이다. 불과 몇 년전 부모를 따라 외갓집에 가는 길에 나섰다가 마주한 우리집 집채보다 더 큰 화통기관차는 내 뇌리엔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잡았는데 나중에 국민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이놈 이름이 ‘미카’라는 것을 알았다. 시커먼 대가리에서 위로는 검은 연기를 뿜어내고 옆으로는 푹푹 굉음과 함께 허연 김을 내뱉다가 느닷없이 '뙤엑'하고 기적을 울릴때 깜짝 놀라 엄마 치맛자락을 움켜잡고 엄마 뒤로 숨어 귀를 막았었지.... 기차 생각에 순간 얼빠져 있을 때 갑자기 소고삐를 잡은 손아귀에 탱탱한 긴장감이 오는 듯 하더니 낮게 '우두둑'하는 소리가 났다. 이놈의 소가 길옆 논두렁 콩잎을 혀를 길게 내밀어 잽싸게 한 웅큼 훑어내고 있었다. 고삐로 힘껏 코뚜레를 낚아채 고개를 바로 돌려놓고 나서 엉덩짝을 후려패 주지만, 요놈은 얼른 포기하지 않고, 입을 더 크게 벌리는 동시에 혀를 더 길게 빼고 돌려꼬아서 한 주먹은 됨직한 콩줄기를 냉큼 더 훑어베어낸 후, 고삐끈 채찍으로 후려치는 나에게 큰 두 눈을 부릅떠 부라리고 나서, 고개를 돌려 가던 길을 올라간다. 요리조리 꾸불꾸불 이어진 비탈진 다락논 사이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파리 쫒는 쇠꼬리 찰싹임과 검정고무신의 터덜거리는 박자에 맞추어 근 한시간을 오르다 보면 드디어 짚은골에 다다른다. 마른 잔솔이 우거진 비탈진 숲길을 지나느라 턱에 찬 숨을 내뱉기도 전에, 고삐줄이 팽팽해지며 제 먼저 개울가로 나를 끌고가는 소에게 계곡물을 등에 끼얹어주고, 고삐를 두 뿔에 둘둘 말아주면, 녀석들은 지네들끼리 어울려 풀을 뜯으러 흩어진다. 이 땅에서 일본놈들이 물러간 뒤에 이어진 여순반란사건을 겪으며 주월산은 변변한 큰나무 한 그루 없이 헐벗은 채 온통 억새풀과 잡초들로 덮여있어 자연목장인 셈이었다. 소를 풀어놓고 나면 아이들은 걸쳤던 것들을 거리낌없이 벗어던지고 물장난 삼아 피리(송사리) 혹은 가제를 잡거나, 때죽물을 풀어 천렵을 하려고 때죽을 따러 가기도 했다. 계곡물을 얼굴에 끼얹고 나서 오른편 경사가 급한 언덕배기에 있는 제법 크고 널찍하고 동남쪽을 향해 열려있는 바위에 오르면, 멀리 봉두산과 기차길이 보이고 그 아래쪽으로 신작로가 보인다. 그 바위 위에서 그늘지고 평평한 틈을 찾아 앉아보지만 볕에 달구어진지 오래되지 않은 바위바닥에서 훅 열기가 올라온다. 생각없이 산, 들, 길과 집들이 넓게 펼쳐진 한적한 풍경을 보다가 무료함을 느낄때 쯤, 수평선처럼 횡으로 늘어선 포플러 가로수 신작로길에 하얗게 먼지구름이 일었다. 이 자갈길 신작로가 국도2호선이라는 것을 내가 알게 된 시기는 아스팔트로 포장되고 난 고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으니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나서도 한참 후엣 일이다. 오래전부터 득량에 수력발전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작로가 포장된 그즈음에서야 내고향 높은대미에 전깃불도 켜지게 되었고, 남폿불과 호롱불 시대와 발동기 정미소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포플러 가로수 너머로 멀리 방조제 제방너머에서 피어오르는 뭉게구름을 보고 있자니 개미 몇 놈이 비스듬히 세워진 내 다리를 기어오르며 간지럽힌다. 개미를 털어내고 눈을 돌려보니 대여섯 걸음 옆에 보랏빛 별꽃이 보인다. 집에서부터 손에 들려있는 자루 짧은 창으로 별꽃 줄기밑동에 대고 푸욱 쑤셔 제끼니 희멀건 뿌리가 몸을 드러낸다. 도라지. 꽃채로 뽑아들고 둘러보면 한 발짝도 안되는 곳에 미처 터지지 않은 꽃봉오리가 있고 그 언저리엔 딱주도 기세 좋게 군데군데 서 있다. 딱주에 묻은 흙을 털어낸 후 껍질을 벗기고 베어물면 달짝지근함이 입안에 퍼진다. 발걸음은 이내 산그늘이 진 오리나무 숲속, 줄기와 잎 여기저기 가시가 가득하지만 빨간 산딸기 앞으로 옮겨가면서, 한 눈으론 별꽃을 더듬는다. 빨갛게 잘 익은 열매만 따모아 입에 털어넣으면서 별꽃들을 모으다 보면 어느새 망태기는 제법 불룩해지고 두 발은 가매봉 등성이에 올라 있다. 멀리 득량만이 방조제 앞쪽으로 허옇게 펼쳐보이고 벼논으로 가득한 들판은 바다쪽에서 불어올라오는 바람에 일렁인다. 뉘엿뉘엿 서쪽산을 넘어서던 해가 산을 넘으면 이내 해거름판이 될터이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처음 소들을 놓아준 자리로 다시 돌아오면 약속이나 한듯이 배를 채운 소들이 다시 모여들고, 서서 혹은 누워서 되새김질을 하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뿔에 돌돌 말아논 고삐를 다시 풀어 잡으면 소는 아까 왔던 길을 스스로 앞장서 잘도 내려간다. 내려오는 길. 또 다시 길 옆 논가장자리의 벼나 콩잎을 탐내며 해찰을 부리는 녀석과 싱갱이를 하면서 찰싹찰싹 고삐를 휘두르다 보면 어느새 뚱네집. 대나무숲 너머로 어둑어둑한 응달쪽 집들 굴뚝에선 연기가 오른다. 여름 저녁 연기는 파랗게 피어올랐다. 파란 연기엔 팥죽 냄새가 베어있는 듯하다. 파란 연기가 집 뒤안에 세워진 굴뚝이 아닌 우리집 마당쪽에서 피어오르는 날에는 마당에 걸쳐진 양은 솥에서 팥죽이 끓고 있었다. 갑자기 배가 고파지고 침이 고인다. 고삐를 흔들어 소 걸음을 재촉하고 이내 대문에 들어서면, 할머니는 벌써 토방 앞에 펼쳐진 평상 옆에 모깃불을 피우고 계신다. 도라지와 딱주가 담긴 망태기를 내려놓으면 할머니는 "아고 내새끼’하면서 엉덩이를 토닥이신다. 어두움이 내려앉기 전에 남포에 불이 붙여지고, 마당 대나무 평상에는 팥죽상이 펼쳐진다. 두텁고 길죽한 밀가루칼국수 끝자락이 볼따구를 스치고 입속으로 빨려들어간다. 푸른 모깃불 연기사이로 총총한 별을 보다가 눈꺼풀이 내려올 때면 늘 '왱'하니 모기가 달려들어 졸음을 깨운다. 개똥벌레 몇 마리가 개울가 담장을 넘어 날아오르다가 다시 개울쪽으로 사라진다. 매케했던 모깃불 연기가 점차 사그라들고나면, 마루에 친 모기장 속에서 여름밤은 깊어 가고, 장끄방 장독 위 양푼에 남겨놓은 팥죽엔 별이 쏟아진다.
유학길
국민학교 4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 광주로 전학을 가게되었다. 전깃불도 없고 2층건물 하나 없던 시골에서 자라던 촌놈이 설레임을 가득안고 이른바 유학길에 올랐다. 남광주역에서 철뚝길을 따라 도내기시장에 이르러 철뚝길 아래 말똥냄새 지독한 마굿간 골목 어귀 셋방에서 유학생활은 시작되었다. 장남을 서중에 보내는 것이 꿈이었던 아버지는 반드시 서석국민학교로 전학을 시켜야만 했다. 전에 다니던 조성북국교도 역사도 제법 있고 학생수가 시골치고는 꽤 컸었지만 촌놈의 눈에 비친 서석국민학교는 그와는 비교도 안되게 크고 오래된 학교였고, 무엇보다 서중을 가장 많이 들어가는 명문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럴필요가 없었다. 이름하여 중학교평준화가 시행되어 서중도 없어지고 중학교는 뺑뺑이로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은행알이 자식의 운명을 결정할 줄 라디오도 없던 시골에서 미리 알 수는 없었다. 겨울 어느날 추첨기 구멍에서 톡 떨어진 은행알을 주워든 얼마 후, 흙 먼지 날리는 무논을 가로지른 자갈길 왼쪽에, 을씨년스럽게 콘크리트 건물만 달랑 올라앉은 황토자갈밭에서 까만 교복을 입고 언손을 부벼가며 이른바 입학식을 치렀다. 새로 생긴 학교라서 학생은 1학년인 우리가 전부였고, 미처 다 짓지 못한 교사건물은 해가 가면서 차츰 커지거나 높아져갔고, 우리가 3학년으로 올라갈 때쯤 겨우 건축이 마무리 되었다. 공부시간표에는 중간체조란 것이 자주 들어 있었고 지루하기만한 아침조회시간도 자주있었다. 이때마다 우리들은 삼태기와 호미로 자갈을 캐고 날랐고 그런 날들이 늘어가면서 그럴싸한 운동장이 완성되고, 중간체조도 드문드문 해졌다. 아무튼 그 당시는 키와 덩치가 작은 편이어서 애들 사이에 끼여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지만 버스를 타고 통학할 수 밖에 없었다. 차며 사람에 시달려 후줄근해질 대로 후줄근해 진 등교길과 하교길이었기에 자가용으로 통학하는 우리반 어떤 애가 더욱 부러울 수 밖에 없었다. 날씨가 좋은 날엔 가끔씩 몇몇 동무들과 어울려서 배고픈다리와 조대병원을 넘어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였지만, 굳이 도내기시장 부근에서 셋방살이하면서까지 멀리 고생하며 통학할 이유가 없었기에, 그해 가을이 지나고 초겨울 무렵에 남국민학교 뒤 중학교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고, 고통스런 버스통학은 막을 내렸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버스통학은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학교가 시내를 벗어나 시골이나 마찬가지인 외곽에 있었기에 우리학교까지 닿는 버스는 중간에 여러 학교의 입구를 거쳐야 했으며, 그중에는 여고도 있었으므로 벌써 턱아리와 인중이 거뭇거뭇하고 덩치가 크거나 제법 나이든 어른같은 아이들은 버스안에서 생겨난 얘기들을 자랑삼아 쏟아놓고 있었고, 아직 어린 티를 못벗은 아이들은 그런 추억담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지는 시절이었다.
토요일마다 오후 세시쯤 사람들로 붐비는 남광주역은 온통 북새통이다. 나주.화순.보성쪽으로 갈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와 역전에 장사진을 치고, 광주역에서 출발한 기차가 도내기 시장쪽으로부터 건널목을 넘어 플래포옴으로 들어올 때는 갑자기 많은 인파가 문쪽으로 몰리느라 승차출입문 주변은 거의 아수라장이 되곤 했다. 광주역에서 시발한 완행기차는 이미 좌석이 거의 꽉 찼지만 그래도 한 두자리 좌석 혹은 몇 사람 낄 공간은 남아있어 서로 먼저 차지하려고 그 난리법석인 것이다. 언감생심, 좌석을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어려웠으므로 발디딜틈이 없도록 꽉찬 객실은 차치하고 승차계단 난간에 매달리는 것 만도 행운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시 십분 쯤 출발해야하는 여수행 완행은 보통 세시반을 넘어서야 쇠바퀴를 굴리며 남광주역을 힘겹게 떠나갔다. 차가 떠난 뒤에도 플래포옴에는 미처 차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이 남아 있기도 하였다. 다음 기차는 세 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했었기에 모두 사생결단하듯 세시 차를 탔다. 햇볕이 작열하는 여름날 토요일 오후, 발 한짝 끼어들일 틈이 없도록 빼곡하여 옴쭉달싹할 수 없고, 시큼 텁텁한 땀냄새로 가득찬 여수행 완행열차 속은 가히 지옥이라 할 만 했다. 콧구멍이 겨우 어른 겨드랑이 높이에 닿는 나는 간혹 꼰지발을 하고 고개를 쳐들어 콧구멍을 위로 향해 숨을 들였지만, 그 냄새는 사람 몸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한꺼번에 쏟아져나온 냄새인 양 특이하고 고약했다. 남평, 앵남, 화순역에서 몇 사람이 내리고 나서야 달리는 기차 열려진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구리고 시큼한 냄새를 걷어갇다. 만수, 입교, 이양을 지나면 하나 둘 자리가 나곤 했고, 보성역에 닿으면 빈 자리가 꽤 늘어났다. 토요일마다 이 완행 열차는 단선으로 이백리 길, 열여섯개 역을 예정보다 보통 두 시간 남짓 더 걸려 해거름 무렵에야 조성리역에 들어섰다. 기차도, 사람도 곤죽이 된 채로... 그나마 이것은 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이었다. 국민학교 육학년 중반 쯤에 ‘뙤엑’하며 날카롭고 경망스러운 소리를 내며, 이따금 오르막길에서는 숨을 헐떡이다가 멈춰 서 버리던, 시커먼 화통기차 미카는 묵직한 배기음을 가진 힘좋은 디젤기관차로 바뀌었고, 이 미제 디젤기관차는 나름 오르막도 거침이 없었다. 디젤기관차는 가히 혁명이었다. 네 시간 반 길을 세시간 이내로 주파하였으니 말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디젤기관차는 경부선에서 퇴역한 노털이었다.
가슴앓이
중학교 삼학년 쯤이었을까, 어느 늦여름 일요일 아침. 툇마루에까지 파고든 아침 볕에 눈을 떴다. 잠을 설쳐 찌뿌둥한 가운데 어제 일이 떠올랐다. 어제 학교를 파하고 갈등 끝에 남광주역에서 오후 여섯시 기차를 타고 조성리역에 내려 대합실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니 아홉시 반이다. 이제부터 한참 논길을 걸어 높은대미 집까지 오리길을 가야한다. 어깨에 걸머진 커다란 노랑가방이 거추장스럽다. 신작로를 벗어나 옆길로 들어서면 구장터 대밭너머 고내마을 뒤쪽으로는 초가을 상현달이 넘어갈 듯 떠있다. 맑은 달빛을 받으며 반짝이는 풀잎사이를 걷는데 풀이 발에 스치면서 벌써 풀에 내린 이슬이 운동화를 적신다. 시거리 가까이쯤 왔는데 문득 물크덩하고 뭔가 발에 밟힌다. 가슴이 철렁하고 깜짝 놀라 두어 걸음 앞으로 펄쩍 뛴 다음 뒤돌아 보니 어두컴컴한 풀숲에서 뭔가 꿈틀거린다. 구부러지고 거뭇하고 긴 것이 얼핏 봐도 이슬 맞으러 나온 뱀이다. 소름이 쫙 끼친다. 콩알만해진 가슴을 쓸어내리고 얼른 고개를 돌려 뒤도 안돌아보고 잰걸음을 옮기니 금방 시(세)거리 냇가다. 징검다리를 뛰어건너고 나니 잠시 풀벌레 울음소리가 그치고 정적이 감도는데 반딧불이 몇마리가 요리조리 별빛을 희롱하며 앞서 날아간다. 반딧불이를 좇아 뛰고 나니 어느새 집앞 사장나무 밑이다. 산에 가려져 상현달은 이미 산그늘을 길게 늘여놓고 풀벌레 소리만 요란한다. 시장기가 몰려왔다. 지난 주에 집에 내려와서 반찬거리며 용돈이며 이번주는 오지않아도 될 만큼 챙겨갔기에 이번주는 내려오지 않을 줄 알고 밥도 남아있지 않을터였다. 사장나무로부터 개울길을 따라 오르면 바위사이로 물떨어지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바람에 대나무잎이 소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우리집 대문앞이다. 대문은 열려있다. 가만히 마당으로 들어섰다. 호롱불 불빛에 불그스레 물든 안방문 창호지에 흐끄므레한 그림자가 스치더니 이내 문이 열리며 희미한 그림자가 마루로 나서는가 했더니 토방으로, 마당으로 내려온다. “오매 니 오냐.” 어머니다. 기별도, 기척도 없이 들어왔는데 내가 오는 줄 도대체 어떻게 아셨을까. 잠시 멍해져 있다가 마루로 오르니 그 사이 어머니는 정지간에서 밥상을 차려나오신다. 나중에 알게되었지만 솥단지 속에 항상 밥 한 그릇쯤은 남겨두셨던 모양이다. 늦은 저녁을 먹고난 후에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으셨다. 아마 돌마들 주막에서 동네분들하고 어울려 육자배기 한자락에 장단을 맞추고 계시리라. 내일 아침 아버지로부터 돈 타낼 궁리를 하면서 잠이 들었던 어제밤이었다. 전학온 대부분의 촌놈들은 넉넉한 형편이 아니어서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처럼 여유를 부리거나 돈을 허투로 쓸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 혹은 전해들어 터득하게 된, 돈 타내는 방법은 도농간에 큰 차이가 없었다.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책을 구입한다는 구실이었고, 이 땅의 부모들은 아이들 기죽이지 않으려고 거짓말인 줄 뻔히 알고 있거나, 매번 당하면서도 책구입 비용만큼은 챙겨주었던 때라 나 또한 그런 방법을 써보기로 하고, 꼭 사보아야 할 책이 있는 것처럼 말을 꾸며대기로 작정했던 것이 어제밤 잠들기전이었다. 눈치를 채셨는지 어머니는 새벽부터 안절부절하며 남새밭으로, 가운데뜸 콩밭으로 종종걸음을 치며 왔다갔다 하신다. 필경 동네 다른 아낙네도 들리셨을 것이다. 도대체 한 여름에 이 농촌구석에서 돈 될거라곤 논이건 밭이건 간에 없었다. 아침에 아버지를 뵀지만 도저히 입이 떼지질 않았었다. 그렇게 침묵의 시간들은 흘러갔다. 정오를 알리는 사이렌(어른들은 오보라고 불렀다)이 울린지도 오래 전이고 방의 괘종시계는 벌써 한 시, 점심 상이 마루에 나오고 나서 드디어 아버지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책, 아니 돈에 관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보리수확이 끝난 지도 오래전이고 논의 나락이 패려면 아직 한참이나 기다려야 하는 지금 이 촌구석에 돈이란 종자가 남아 있을리가 없었다. 그나마 쌀독아지 밑바닥까지 싺싹 긁어 훑어간 것이 지난 주가 아니던가. 두시반 기차를 탈려면 점심때까지는 아버지한테서 돈을 타내야 하는데 도저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윽고 점심때가 되었다. 말을 못 꺼내고 주저하고 있는 나를 보며 아버지도 이미 어머니처럼 내 머리속을 훤히 꿰뚫고 있을 테지만 아무 말씀이 없다. 뻔한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 열린 방문 사이로 벽시계를 쳐다보는 것만이 나의 대화였다. 두시 반 기차를 탈려면 한시반까지는 집에서 나서야 하는데 똑딱똑딱 시계추 왔다갔다하는 소리만 정적을 깨고 있고, 종종거리는 어머니 발걸음 소리만 요리조리 통통 튄다. 아버지와 나 사이엔 무거운 침묵의 대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정적을 깬 한 마디는 차시간에 다급해진 어머니 입으로부터 조심스럽게 튀어나왔다. 노랑가방 속에 김치며 채소며 옷가지 등을 꾹꾹 눌러넣고 퉁퉁해진 가방의 자크를 억지로 댕겨잡고 채우고 나서, 한숨처럼 튀어나온 한 음절이 '차'였다. 이 한 음절 뒤로 이어져야 할 말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정적이 깨진 순간, 아버지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듯 벌떡 일어서서 순식간에 마당 앞쪽 돌담장에 기대어진 바지게작대기를 거머쥐고 사지멀쩡한 벙어리, 나를 향해 내닫고 있었다. 여태까지 아버지 손에 회초리나 매가 들린 것을 본 적이 없었던지라 아버지의 화가 극에 달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이어서 내 대변인인 어머니는 “차비라도...예에”하고 말꼬리를 올렸고, 그러자마자 바지게작대기는 내 다리를 절단낼 태세로 내려쳐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대문을 뛰쳐나가 사장나무를 지나 단숨에 시거리까지 당도하고 나서야 긴 숨을 내뱉고 천천히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면서 소심하고 떳떳하지 못한 자식놈이 얼마나 한심했으면 그렇게까지 격노하셨을까 설핏 이해가 되는 듯 할 즈음, 뒤쪽 멀리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아야!’. 뒤돌아보니 그 큰 노랑가방을 머리에 이고 뛰어오시는 어머니가 동네어귀에 보였다. 눈물이 왈칵 나서 잠시 하늘을 보며 그 자리에 서 있으니 숨 가쁘게 달려오신 어머니, 아! 그런데 그 발에는 신발이 없었다! 아무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바쁜 어머니 발걸음에 맞추어 구 장터 쯤 왔을 때 멀리 기적소리가 났다. 벌교쪽에서 굴을 빠져나오면서 내지르는 기차기적이 틀림없다. 여섯 시에 광주로 가는 막차가 있지만 지원동 자취방까지 도착하려면 너무 늦을 터인지라 지금의 저 두시반 기차를 태워야한다. 어머니는 노랑가방을 머리에 인 채로 역을 향해 내닫는다.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 기차에 나를 올려놓고 나서 몸베 속주머니를 뒤져 꼬깃꼬깃 접힌 지폐 몇 장을 내 손아귀에 가만히 쥐어주신다. “아껴써라”. 두 눈에 눈물이 가득한 채, 그 한마디를 뒤로하고 기차 바퀴는 이내 구르기 시작한다. 역사 쪽으로 돌아서는 어머니 발에는 여전히 신이 없다. 잰 걸음으로 되짚어 돌아가는 모습이 차창밖으로 쓸쓸하게 아른거린다. 남광주역에 내린 녀석은 한 손으로 들기에는 너무 벅찬 노랑가방을 낑낑대며 몇 걸음 걷다가 손을 바꾸어 가면서 좁은 골목길을 들어선 후 버스정류장을 향해 간다. 두 분 속을 까맣게 태운 하루가 또 저물고 있었다.
에필로그
눈물과 가슴앓이로 키워진 나는 그 다음 해에 서중 대신 일고에 입학했다. 그때 어머니가 손에 쥐어주신 돈이 책을 사거나 공부를 하는데 쓰였는지는 기억에 없고, 그 일이 있은 후로도 부모님 가슴속을 숯으로 만든 일이 허다했지만, 일고에 입학한 것만으로 모든 아픔은 치유가 되었고, 그래서 나는 용서가 되었으며 동네에서는 효자가 되었다. 나이들면서 주변머리는 조금 달라졌겠으나 소심하고 내성적인 내 성격은 지금도 여전한 것을 보면 이건 분명 타고난 유전자 때문이리라. 가방무게가 어머니의 사랑 무게였다는 것을 어렴풋이 나마 알게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한참이나 경험하고 나서이다. 아니 내 자식이 그때 나만큼 자라난 즈음이었을 것이다. 사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길거리에서 노랑가방을 보게되면 그때 생각에 눈물이 핑돈다. 팔순의 어머니는 오늘날까지도 못난 이 자식과 헤어질 때마다 뒤돌아서서 눈물을 훔치시고, 안부차 전화라도 드리고 끊을라치면 전화 저쪽에서 잠긴 목소리를 감추신다. 그런데도 여태까지 나는 어머니 그 발에 새 신을 못 신겨들였다. 십년전 설 다음날, 아버지가 병원에서 내곁을 떠나실 때 귀에 대고 다짐하듯 약속을 드렸지만 난 아직도 아버지와의 약속도 못 지키고 있다. 사십여년전 그 바지게작대기를 피해 달아났던 소심하고 떳떳하지 못했던 기억과 함께 여러 부끄러운 기억들이 몰려온다. 얼마나 많이 두 분의 가슴을 후벼파 놓았는지 높은대미 대나무 숲은 알고있으리라. 얼마가 될런지 모르지만 남은 시간동안 높은대미 개울가 바위마다, 대나무 마디마다 새기고 감추어진 사연들을 다 끄집어내 풀어보고 싶지만, 머리털 세어진 몸은 여태 객지를 떠돌고 있어 조바심만 앞서고, 혹여 부질없는 생각이 될까 봐 두렵다. 지금 아버지는 높은대미 주월산 자락에 누워서 동쪽 두방산에서 떠오르는 해와 득량만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파랗게 너울거리는 들판을 바라보며 홀로 고향을 지키고 계신다. <끝>
2016.7.6.
첫댓글 김기남 작가님
글쟁이는 쩌리가라네요~~
감명깊게 잘읽었습니다
그랴?. 니도 써 봐.
@높은대미 자서전 내셔도 되겠어요^^
마니 눈물나네요~~
글씨 차곡차곡 큰소리로 읽어내려가다 어느순간 목이메어와 흔들리는 눈으로만 끝까지 읽어 보았습니다. 익숙한 배경속에 형님의 눈과 맘으로 표현된 수십년전의 일들이 실사화면처럼 떠올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