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추억 #34, 김해교회 건축
세칭 동방교의 지교회중 하나로 김해에 교회가 있었고 그곳에 엘리에스라는 여자 전도사가 있었다. 당시 나이는 30대 말 정도 되었을까, 세칭 동방교의 사이비 이단사설 교리에 빠져 어린 자녀 둘을 팽개치고 빈집초월(세칭 동방교에서 신앙심이 투철해서 무단가출하여 집을 나오는 것을 말하는 은어-隱語)하여 가정과 남편, 아이들과 연락을 끊고 세칭 동방교에 충성하고 있던 신도였다.
그때도 나는 그분을 볼때마다 가슴이 아픈 기억이 있다. 생때같은 자식을 어찌 떼어놓고 이렇게 할 수가 있을까, 믿음이 대단한 분이구나, 연민과 선망이 교차되는 그런 분이었다. 초가같은 집 한채를 빌려서 시작한 개척교회가 김해여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신도들이 차츰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수용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어 그 집을 구입하여 허물고 새로 교회건물을 건축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이름만 교회건축이지 지금 생각하면 장난같은 수준이다. 보로크로 벽을 쌓고 목재로 갓슈틀을 만들어 올리고 스레트 지붕을 얹는 작업이다.
서울 대기처(천국 가기위해 이땅에 임시로 머물며 대기하는 곳, 집을 나온 세칭 동방교 신도들이 집단으로 머무는 곳을 말하는 은어-隱語)에서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던 명명(세칭 동방교에서 지성을 바치고 받는 새 이름)이 아벨이라고 하는 키가 자그마한 청년 목수가 지원을 내려왔다. 여기에 작업일꾼으로 명명이 누가, 디몬, 미리암이라고 하는 내 또래 친구들이 동원되었다.
20대의 청년 세사람과 서울에서 지원 온 목수 한 사람이 그곳에서 몇 달 간 숙식을 해결하면서 완전 노력봉사 수작업 건축을 하게 되었다. 마당 중앙에 있던 감나무를 뽑아내기 위하여 밧줄로 묶어 여학생 수십명이 달라붙어 당기니 그 뿌리가 쑤욱 뽑히더라... 집에서 철물점을 운영하는 여학생 신도가 자기 집에서 온갖 철물 자재들을 훔쳐와 성전 건축에 힘을 보탰다... 목수 아론이 별것도 아닌 일을 상부에 고자질해서 '누가'와 '미리암'이 한판 붙을뻔 했다... 그때 김해여고 여학생 중에 참 예쁜 학생이 있었는데 등... 그때의 일화들을 내 친구 '누가'는 우리가 가끔 모일때 마다 틈만나면 줄기차게 수십번 무용담을 쏟아내곤 한다.
건축이 완공된 날, 마침 그날이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기억된다. 나는 김해교회의 헌당 집회에 초청강사가 되어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집회의 초청강사로서 무슨 소리를 지껄였는지는 기억조차 없지만 그날 크리스마스 캐롤을 은은하게 불렀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저들밖에 한 밤중에 양틈에 자던 목자들
천사들이 전하여준 주 나신 소식 들었네
노엘 노오엘 노엘 노오엘 이스라엘 와앙이 나아셨네
지금도 들리는 듯한 추억속의 찬송가다.
40여년이 흐른 요즈음 그 김해교회, 지금은 김해 성해장로교회라고 이름을 바꾼 그곳에 내 친구 '누가'가 다시 리모델링 공사를 하고 있다. 물론 그때 그 장소도 아니고 그 건물도 아니다. 그때 그 건물은 재건축으로 헐리고 어떤곳에 새로 건축했다가 그것을 팔아 다른곳에 기존 건물 하나를 새로 구입해서 예배당으로 장만했는데 그것을 ‘전기와 건축업’을 동시에 하고 있는 내 친구 '누가'와 연결이 되어 리모델링 공사를 맡게 된 것이다. 기이한 인연이다.
그 김해의 세칭 동방교, 대한예수교 장로회 성해교회에 K라는 남자 신도가 있다. 한국전력에 근무하다가 근래에 세칭 동방교에 전도를 받아 신도가 된 이른바 신성민이다. 즉 전설같은 옛날 역사를 모르고 그야말로 교주 노광공을 교단의 창시자 정도로만 알고 있으면서 교주 노광공을 직접 만났던 구성민들을 아득한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열혈신자다. 이제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때가 되지 않았는냐고 하면서 구성민들이 세칭 동방교로 돌아오도록 간절히 애태우는 어찌보면 순수하기도 하지만 다른 면은 잘 몰라도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에 매여있는 그의 처지를 볼때에는 한심하기도 한 친구다.
일반교회는 재미가 없어서 다닐 수 없다고 한다. 교회를 재미로 다니는가 보다. 한번은 전기 고장 수리차 세칭 동방교의 김해교회에 가는 내 친구를 한번 따라가 보았더니 성전안에서 두손을 모아 스님들처럼 합장을 하고 고양이 걸음걸이로 살풋살풋 걸음을 옮기면서 온갖 예를 제단을 향해 표하고 있었다. 무당집의 미신같은 모습이다. 옛날의 내 모습이기도 하다. 전기 고장수리를 마치고 뚜벅뚜벅 걸어나오니 엉덩이를 제단쪽으로 보이지 말고 뒷걸음쳐 나오라고 하면서 무슨 큰 일이나 난것처럼 기겁을 한다. 아랑곳 하지않고 그냥 씨~익 웃으면서 걸어나왔다.
어느 한 종교, 그것이 설령 이단사이비 집단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빠지게 되면 빠져 나오기가 여사 어려운 것이 아닌가 보다. 나도 그랬으니까. 사고의 경직. . . 아마 그런것인듯 하다. 자신의 행위와 사고방식도 얼마든지 잘못된 것일 수 있고 잘못된 아집과 논리, 말도 안되는 엉터리 교리에 매여 있다고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고 자신에게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는 여유로운 마음은 한 차원 높은 자신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람이 나이를 헛먹는 것만은 아니기에 이런 친구들도 하루빨리 미신같은 세칭 동방교,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을 탈피하여 상식을 존중하는 인간본연의 자세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종교는 미신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미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칭 동방교의 그 김해교회는 몇 군데의 장소 이전을 거쳐 지금은 김해시 외동의 김해농고 뒤편에 대한예수교 장로회 성해장로교회라는 간판을 버젓히 달아놓고 외형과 형태는 여느 일반 기독교 예배당과 다를것 없이 꾸며놓고 세월은 흘렀으나 그때 그 사람들 위주로 운영되고 있다.
일정기간이 지나면 본부(총회)에서 인사명령으로 자리를 이동시키는 목사, 전도사등 교역자란 신도들도 옛 세칭 동방교의 세뇌를 벗어나지 못한 골수분자, 즉 나이가 들어 오갈데 없는 옛날의 대기자나 연단선님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상대적으로 남자의 수가 월등히 적다보니 여자들에게도 목사나 전도사의 칭호를 주어 목회활동이랍시고 시키면서 한곳에 자리를 틀고 앉아 있을 수 없도록 절대 한자리에 오래 두지 않는다.
그리고 개방성을 가지는 일반교회와는 달리 외부 일반인은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철저히 통제되고 있다. 누구든지 한번 가보라, 벨을 눌러 신원을 확인하고야 문을 열어주는 시스템이다. 이는 서울의 가회동 세칭 동방교 한빛교회, 대전지법 대덕등기소 옆에 제법 아담하게 지어놓은 세칭 동방교 대전 청록교회, 부산의 문현동에 있는 세칭 동방교 부산 문현동 한빛교회, 부산의 만덕에서 남해고속도로 진입로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그 도로변에 위치해 있는 세칭 동방교 구포 성신교회(옛날의 세칭 동방교 사상8교회와 구포11교회가 통합한 곳)등도 마찬가지다.
부산의 사하초등학교 서편 언덕빼기 가파른 계단길을 올라가 개인 단독주택들 속에 숨어서 대문위에 겨우 쬐그마한 간판 하나 달랑 붙여놓은 세칭 동방교 명지교회(명지9교회가 이전한 곳)도 외부인은 아예 출입할 수 없도록 대문은 항상 굳게 잠겨져 있고, 지하철 온천장역에서 금강공원으로 들어가는 식물원로 초입에 위치한 세칭 동방교의 동래산성교회도 CCTV가 설치되어있다는 경고와 함께 외부인의 출입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몇 군데 개별적으로 개설되어있는 교회 인터넷 홈페이지도 외부인의 접속은 아예 차단되어 있다.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방어적, 폐쇄적으로 만들었는가, 무엇이든 감추고 싶은 사람은 아무것도 드러내기 싫어하는 법이다. 여타 여러 지방에 흩어져 있는 옛 세칭 동방교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교회랄것도 없는 소수의 인원이 드나드는 초라한 규모(이단의 추억 # 7, 위장, 그 외양과 내부 참조)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한동네 사는 주민이라도 그곳이 세칭 동방교의 집회장소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