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여인 / 강길용
사람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아름답다. 아침이면 덜 깬 눈으로 직장으로 달려가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내가 아름답게 생각하는 여인은 힘차게 자신의 일을 할 줄 아는 여인이다. 어딘지 모르게 내숭을 떨고 속마음을 숨길 줄 알면서도 어디서 건 당당한 여자가 아름답다. 가끔 여자다움이 너무 지나쳐 자신이 아름답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여인들은 좋아하질 않는다.
나는 날마다 전철을 타고 회사로 출근한다. 을지로 3가에 있는 회사를 향하여 가다 보면 날마다 만나는 직장을 다니는 여인들을 늘 만난다. 얼굴이 아름다운 여인들도 있고 키가 큰 여인들도 있다. 또 매력적인 여인이 있는가 하면 얼굴이 잘 생기지 못한 여인이 있다. 또 남자들이 잘 따라 다닐 것 같은 아름다움이 있고 냉소적이고 차가운 여인이 있다.
그러나 그 여인들 모두의 가슴에는 잔잔히 흐르는 사랑의 노래와 그리움이 있다. 당당하게 아닌 듯 하면서도 누군가가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여인의 속마음이 보인다. 날마다 계단을 뛰어오르는 모습을 보면 무척이나 아름답다. 삶의 현장으로 자기를 찾아서 줄기차게 달려가기 때문이다. 밀고 밀리는 몸싸움을 끝내 이겨내고 자기가 서야 할 자리에서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삶을 가꾸는 진지함에 나는 감동을 받는다. 때로는 그녀들이 달려가는 계단에 부딪치는 구두의 뒤 굽이 내는 소리가 귀를 찢어 질듯 시끄럽게 하여도 탓하고 싶지가 않다.
전철 안에서 잠을 자는 모습보다는 그래도 손에 들려 있는 소설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모습이 더 아름답다. 그것은 얼굴이 주는 미모와는 상관없는 아름다움이다. 진지함에 사로잡혀 하나라도 더 좋은 것을 찾기 위하여, 책 속에 푹 빠져 있는 모습이 감미로움을 더해 준다.
일하는 여인들, 언제나 스스로를 지키며 꿋꿋이 사는 여인들, 그들의 눈동자와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그리고 작지만 힘차게 움직이는 손끝이 아름답다. 앉아서 졸고 있는 사람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도 하나의 버릇이다. 자신의 몸가짐을 하기에 따라서 아름다움이 사라지기도 하고 샘솟듯이 넘쳐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작아 보이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다.
지금은 그만두었지만 내가 출근하는 회사의 경리를 보는 여직원이 있었다.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다. 그녀가 얼굴이 잘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정도의 몸매를 간직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언제나 일을 할 때의 모습에서 진지암이 진하게 묻어 났다. 잠시 일을 하더라도 흠뻑 빠져 일을 한다. 때로는 전화 벨이 울리는 소리도 깜빡 잊을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항상 잘 해주려고 노력을 하였다.
그녀가 회사에 들어온 것은 지난해 1월쯤이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것은 아니지만 아직은 앳된 모습에 서울 토박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촌스런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업무도 서툴었지만 그런 여인이 어떻게 일을 잘 할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시간을 두고 지켜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서툴지만 진지하게 일을 하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잘 모르는 일이 많아서 꾀나 고생을 하였지만 그녀는 불평을 하지 않고 하나씩 배워 나가며 잘 적응을 해 나갔다. 그러다 한달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나는 너무 힘들게 일을 하는 것 같아서 찬찬히 일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윗사람에게 보고를 하는 일에서부터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 금전을 다루는 원칙, 그리고 회사의 전반적인 분위기 등을 알려주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그녀는 늘 나에게 상의를 해서 일을 처리했다. 사실 나는 취재부 차장이었고 그녀는 경리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업무상 관계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내가 군 생활하면서 경험했던 일들을 상기하며 이것저것 알려주었을 때 그녀는 무척이나 고맙게 생각하는 것 같았고 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열심히 일을 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녀는 6개월도 채 안되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척척 잘 하는 여인으로 주위의 칭찬이 자자하게 되었다.
언젠가 그녀와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녀는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 하였지만 그 속에는 삶의 진실이 담겨져 있었다.
"강차장님이 하라는 대로하면 일이 쉽고 편하게 잘 되는 것 같아요."
"뭘 내가 제대로 알려준 것도 없고 나도 배우며 일하는 사람인데...."
"아닌 것 같은데요. 제가 요즘 많이 도움을 받고 있어요. 그리고 강차장님은 좋은 분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래? 나 낙하산 태우는 건 아니겠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고 그래서 내가 조금 알려준 것뿐 이야. 모두 자신이 잘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도움을 주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언제나 제자리걸음이지. 자기가 노력하는 만큼 한발 앞으로 나가는 거지."
"네, 그런 것 같아요. 전 늘 강차장님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런 이야기를 하며 커피를 마시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사무실로 들어온 그녀는 나와 점심을 먹으며 나누었던 이야기는 없었던 것처럼 자신의 일에 풀 빠져들었다. 가끔 농담도 하고 그랬지만 그녀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받아 주었다.
그녀는 지금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열심히, 한여름의 땀 흐르는 이마를 닦으며 책 속에 묻혀 지낼 것이다. 지금도 가끔 그녀가 앉았던 자리를 보면 진지한 아름다움을 지닌 채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아마 그녀가 그렇게 일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그녀에 대한 나의 기억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촌스런 모습만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꼽으라면 한창 잘 나간다는 모델 누구누구, 탤런트 누구누구보다는 그녀의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자신만이 최고인 듯이 흔들거리며 다니지만 속이 비어 있는 허영 덩어리 여인들보다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여인이 몇 배 더 아름답다. 그렇다고 그녀가 비굴하게 일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말이다.
1996. 6. 22 月山 康吉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