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이것은 분명히 연극이다. 곁에서 이것을 지켜보는 북궁천은 이런 단엽의 유치한 연극에 실소를 머금었다.
(도대체 어찌된 위인인가? 지금 저런 모습은 전과는 전혀 다른 방탕한 것이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인간이로군.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저 유치한 연극에 천하의 무심녀인 백빙이 속아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야.)
백빙은 어린아이라도 할 수 있는 단엽의 연극에 그대로 말려들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 가득 서린 처량한 빛. 눈에는 눈물마저 글썽이고 있으니, 바로 이것이 단엽의 마력인 것이다. 북궁천도이해 못하고 누구도 이해
못할 오직 단엽만의 마력인 것이다. 이런 마력으로 인해 천하의 어떤 여인도 단엽을 한번 보면 그대로 맥을 못 추고 사랑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휴! 정말 내가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소?]
단엽은 더욱 처량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물었다. 아마도 이것이 그가 노렸던 목적이 담긴 물음일 것이다. 백빙은 탄식했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다면 있는 것이오?]
[그래요. 당신이 교주에게 복종하면 살 수 있지요.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에요.]
[아아...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이오?]
[없어요.]
[어쩔 수가 없는가? 어쩔 수 없이 낭자를 다시 볼 수가 없는 것인가?]
백빙은 통로를 따라 걸을 뿐 말이 없었다. 그녀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러
다 문득,
[당신은 정말 소녀를 다시 만나고 싶으신가요?]
그녀는 단엽을 그윽이 올려다보며 물었따. 단엽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백빙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무엇인가 결심한 듯 말했다.
[거듭 말하지만 당신이 천마교주에게 복종치 않는다면 살아나올 방법은 없어요. 그러나 만약 당신이 마황성을 빠져나와 이곳에 이른다면 소녀의 관할 구역 안에 이른다면 소녀는 책임지고 당신을 이곳에서 나가게 해드리겠습니다.]
도대체 그녀가 언제 단엽을 보았다고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북궁천의 얼굴에도 놀라움의 빛이 스쳐가고 있었다.
(저...저럴 수가...저것도 저 자의 능력 가운데 일부라고 해야 하는가? 간단히 참으로 간단히 한 여인을 사로잡는 능력... 대단하다고 해야 하는가?)
그는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단엽은 한 술 더 뜨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곳까지 빠져나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오. 그렇지 않소?]
백빙은 고개만을 끄덕였다. 단엽의 표정은 금시 시무룩해졌다. 통로는 길고 길었다.
반월형의 검은 대리식 통로, 단엽을 비롯한 북궁천 백빙의 발걸음 소리만이 적막을 깰 통로는 죽음과 같은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단엽이 침묵을 깼다.
[대체 천마교주란 인간은 어떤 인간이며 마황성이란 어떤 곳이오? 다른 의도가 있어 묻는 것은 아니오. 과연 내가 살아나올 수 있나를 판단하기 위해 알고 싶을 뿐이오. 그리고 나의 능력이 이분 부가주와 같은 정도라 가정한다면 거기에서 빠져나올 확률은 어느 정도나 되오?]
백빙은 말없이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 대답은 오직 신만이 할 수 있겠지요. 교주의 힘은 강합니다. 이 땅에 신이 있다면 그 신에 가장 가깝게 접근한 분일 것입니다.]
[그 정도요?]
[그래요. 단지 그분만이 무서운 힘을 소유하고 계신 것은 아니지요. 부교주의 능력은 우리 만빙담을 비롯한 백사지대와 만겁뇌, 고해동을 무력하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것입니다. 부교주의 아래에는 천마사존이 있습니다. 천마사존이란 다름이 아니라 소녀를 비롯한 사대뇌옥의 수뇌들로 구성이 되어 있지요. 그 가운데 백사혼이 죽음을 당했으니 천마삼존이라 해야겠군요. 그러나 겉으로는 천마삼존이 부교주의 아래로 서열 삼위를 이루고 있지만 기실은 천마십대장로가 우리 천마삼존보다 더욱 무서운 힘을 발휘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단엽은 의혹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대체 그들은 누구요? 당신들 사대뇌옥의 수뇌들은 천하를 오시할 만큼 가공할 무공을 지니고 있는데... 그들의 능력이 당신들의 위라는 말이오?]
[모릅니다.]
백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되어 있지요. 물론 천마십대장로에 관해서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신비스러우며 그 활동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도대체 그들의 진정한 능력은 어느 정도이며 항시 검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들의 진면목이 어떠한지 그들이 마황성 내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대단한 인물들인 것 같소이다.]
[대단한 인물들이지요. 그들 십 인에게 이곳에 운집한 십만 마인들 대부분이 귀속된 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대단한 능력이 있는 것이 분명하지요.]
[음...]
단엽은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나 북궁천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지 말없이 단엽의 뒤만을 따를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기가 답답했던지 한 마디를 던졌다.
[그들은 서궁세가의 인물들이오.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서궁세가의 십대
가신들이오.]
[서궁세가의 십대가신?]
단엽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백빙이 모르고 있는 사실을 저 자가 알고 있다니... 보아하니 저 자는 마황성의 실체에 대해 거의 대부분을 파악한 것 같군.)
이때, 북궁천은 한 마디를 더 던졌다.
[그들이 서궁세가의 십대가신인 이상 그 능력이 대단함은 당연하오. 어쩌면 그들은 천마교의 이백년 세월 응축된 힘 그 이상일 것이오.]
단엽은 궁금한 듯 물었다.
[북궁세가의 십대가신과 비교하면 어떻소?]
북궁천은 고개를 저었다.
[북궁세가의 십대가신 가운데 일곱이 죽음을 당했소. 그것으로써 서궁세가의 십대가신이 한단계 위임이 입증된 것이오.]
[하지만 북궁세가의 칠대가신은 그들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질 않소?]
[물론이오. 그러나 천하의 어떤 고수라해도 서궁세가의 십대가신 가운데 삼인 이상을 거의 같은 시간대에 죽일 수는 없소.]
[아...그렇다면 북궁세가의 칠대가신은 거의 같은 시간에 한사람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는 말이오?]
[그렇소.]
북궁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엽은 빙후로부터 신비의 여인이 북궁세가의 칠대가신을 죽였음을 전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거의 같은 시간에 죽음을 당했으리라고는 알지 못했다.
[부가주, 당신은 칠대가신을 죽인 여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으시오?]
[물론이오.]
북궁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엽은 가볍게 탄성을 발했다.
[오..그 여인은 누구요? 누군데 그렇게 무공이 고강한 것이오?]
[백빙이 말한 소위 천마교의 부교주요.]
[천마교의 부교주?]
[그렇소.]
단엽은 놀랍다는 듯 두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혹 그 여인의 진정한 정체에 대해서도 알고 있소?]
[그렇소.]
[누구요?]
[군협천의 소가주인 철류향이란 여인이오.]
[그...그럴리가?]
단엽은 그야말로 기절할 만큼 놀랐다. 군협천의 소가주가 천마교의 부교
주로 변신해 있으니 이거야 말로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믿을 수가 없을 것이오. 그러나 믿어야 하오. 바로 그것이 서궁세가의 거대한 잠재력이기 때문이오. 철류향은 삼 년 전 군협천의 최고무학인 군협삼대무학을 연성키 위해 군협동에 들었소. 그러나 정도보다도 사도에 가까운 그 무공을 끝내 연성치 못하고 그 여인은 주화입마에 빠지고 말았소. 최후로 넘어야 할 심마의 단계를 넘지 못한 것이오. 그리하여 그 여인은 마성에 젖은 채 자신의 이지를 상실했고 지금은 서궁세가의 노리개가 되어 있는 것이오.]
단엽은 내심 솟아오르는 전율에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그는 바삐 물었다.
[한 가지만 더 물읍시다. 서궁세가와 군협천은 본래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었던 것은 아니오?]
북궁천은 빙그레 웃었다.
[당신은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오?]
[군협동이라 하면 군협천 내의 금지일 텐데... 그곳에서 주화입마당한 철류향이 서궁세가의 인물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런 짐작을 하게 된 것이오. 서궁세가가 군협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다면 철류향이 주화입마 당한 것을 그들이 어찌 알았겠으며 어찌 철류향을 거둘 수 있었겠소. 더군다나 군협천의 금지에서 일어난 일을 더더욱 그들이 알 수 없었을 것이오.]
[대단한 추리력이며 상상력이오.]
북궁천의 눈에 은은히 감탄의 기색이 떠올랐다. 단엽은 북궁천의 말이 자신의 물음에 대한 시인임을 느끼며 말했다.
[언제인가 나는 한 사람으로부터 군협천의 모든 문서와 명령서들이 조작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 문서와 명령서를 조작할 수 있는 인물은 군협천 내부의 인물이라는 확신이 들며 바로 그들 조작자들과 서궁세가의 인물이 관련이 있다는 또 하나의 확신이 서는데 어떻소? 그렇지 않소?]
이렇듯 단엽이 질문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퍼부어대는 것은 이 기회에 북궁천이 알고 있는 방대한 무림대소사의 지식을 이용하여 자신의 의문을 풀어 보기 위함이었다.
아니, 그 의혹은 단지 자신 개인만의 의혹이 아니라 무림전체가 안고 있는 거대한 음모였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 가지 애석한 것은, 단엽이 군협천의 내부조직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단엽이 군협천의 내부조직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만 있었던들 그는 쉽게 서궁세가의 실체에 대해 파악을 했을 것이다.
이때, 북궁천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뚜렷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백빙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백빙의 얼굴에는 은은히 경악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북궁천이라는 이 인물이 이렇듯 많은 것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 있어서 북궁천의 말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단엽에게로 향해 있었기에. 그녀는 어찌하면 단엽을 이 사지에서 구해낼 수 있을까에 고심하고 또 고심하고 있었다.
문득, 북궁천이 입을 열었다.
[단엽... 당신은 역시 서궁세가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소. 그러나 더 이상 나를 통해 알려 하지 마시오. 당신이 알려 하지 않아도 곧 모든 것을 알게 될 터이니.... 아시겠소? 당신은 천마교의 부활을 막으려는 나의 적이오. 비록 서궁세가의 인물들이 지금은 나의 적으로 있지만... 천마교의 부활을 노린다는 점에 있어서는 우린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이오.]
[그래서 나보다는 그들과 당신네들이 더욱 가까운 사이라는 말 같은데.]
[핫하하... 그렇소.]
북궁천은 낭랑하게 웃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단엽은 신비롭게 웃었다.
[당신은 알 수 없는 사람이오. 당신으로부터 나는 같은 말을 몇 차례나 들어야 했소. 나와 당신은 적이기에 천마교를 비롯한 서궁세가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가 없다는 이 말... 그러나 당신은 은연중 많은 말을 내게 했소.]
[핫하하... 내가 그랬소?]
[부가주, 솔직해지는 것이 어떻소?]
[무엇을 말이오?]
[당신은 내게 한 가지를 바라고 있을 것이오. 적당히 천마교와 서궁세가의 비밀을 내게 흘려 나로 하여금 당신을 대신하여 그들을 상대케 하려는 것이 아니오?]
[핫하하...]
북궁천은 대답대신 낭랑하게 웃었다. 그것은 분명 시인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는 단엽의 예리한 심기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내 이자를 나보다 낮게 평가하지는 않았지만 높게도 평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나는 다소 나의 생각을 수정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 분명히 저자는 나의 위일 수도 있다는...)
전율인가. 그의 가슴에 일고 있는 이 기이한 떨림은... 이때,
[이젠 다 왔어요.]
백빙의 음성이 돌연 두 사람의 상념을 깨웠다.
순간, 북궁천과 단엽은 동시에 전면을 응시했다. 길고 길었던 검은 대리석 로는 끝이 나 있었다.
대신 거대하게 펼쳐진 지하세계. 북궁천과 단엽은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성. 마치 그림 속의 고성처럼 건축양식등이 지극히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성 한 채가 이 거대한 지하광장 속에 마치 괴물처럼 우뚝 자리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성은 지상의 천마성과 구조 등이 거의 흡사했다. 북궁천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이럴 수가...천마성의 아래에 이런 거대한 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니...
내 지난 삼년동안 천마성에서 생활했건만 이 성의 존재를 전혀 느끼지도 못했다. 서궁세가...그들이 이토록 치밀하고 완벽할 줄이야.]
그는 고성을 살피며 침음성을 연신 흘렸다.
[더군다나...이 고성은 근래에 건축된 것이 아닌 거의 백여 년 이전에 건축된 듯하니... 무섭다. 그 오랜 세월동안 이 고성을 철저히 비밀에 둔 그들의 인내도 무섭지만 우리 북궁세가의 이목마저 완벽하게 속여 넘긴 그들의 철저함이 더욱 무섭다.]
단엽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오? 이 성이 마황성이고 당신의 말대로 수십년 전, 아니 백여 년 이전에 건축된 것이라면 불과 수일 내에 만들어졌다는 이곳의 통로는 어찌된 것이오?]
북궁천은 당연한 의혹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짐작이 맞는다면... 이 고성은 완성된 후 철저히 폐쇄가 되었을 것이오. 그 통로까지도... 통로는 단지 폐쇄된 정도가 아니라 붕괴시켰을 것이고 그것을 근래 들어 다시 복원하였을 것이오.]
단엽은 자신의 생각과 북궁천의 생각이 일치함을 보았다. 이때, 백빙이 입을 열었다.
[이제 당신들을 이곳에 모셨으니 나의 임무는 끝난 셈이에요.]
단엽은 바삐 물었다.
[그렇다면 우린 이제 어찌해야 하는 것이오. 도대체 천마교주를 만나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백빙은 단엽을 빨아들일 듯이 응시하며 말했다.
[두 분을 교주에게 모시고 갈 인물이 곧 나타날 것입니다.]
[아...그렇다면 낭자께서는 그만 가 보시오.]
단엽은 이제 백빙과는 볼 일이 끝났다는 듯 간단하게 말했다.
그러자, 백빙은 옷깃을 매만지며 우물쭈물한다. 그녀는 한동안 그렇게 서 있다가 간신히 몇마디를 꺼내었다.
[몸 조심하셔야 합니다. 소녀는 당신이 나오길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단엽은 손을 내저었다.
[아무래도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소.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여기를 빠져나갈 확률은 전혀 없는 것 같소. 그러니 당신이 애써 나를 기다릴 이유가 없는 것이오.]
단엽은 솔직하게 말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듣는 백빙은 자신 없어 하는 단엽의 태도가 야속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단엽의 얼굴을 한동안 처량한 눈빛으로 주시하다가 탄식했다.
[그래도...소녀는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녀의 얼음조각 같은 무심한 두 눈에 언뜻 맺혔다 사라지는 눈물.
북궁천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탄식했다.
[여인에게 있어 사랑으로 인한 상처는 쉽게 치유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당신은 좀 더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소.]
단엽은 빙그레 웃었다.
[부가주, 당신은 저 여인을 동정하는 것이오?]
[그럴지도 모르오.]
[의외로 당신은 여인에게 약한 면이 있는 것 같소이다. 당신 같은 부류의 인물이 여인에게 빠지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말지. 사랑이란 하나의 약속과 같은 것이오. 그 약속이란 정신적으로 완전하게 맺어져야 하는 것이며 그 약속은 단지 보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오. 무슨 말인지 아시겠소? 백빙의 나에 대한 사랑은 나의 외모를 보는 것으로 만들어진 한 순간의 욕망이지 사랑은 아니라는 뜻이오.]
[대단한 사랑의 논리구료.]
북궁천은 혀를 내둘렀다. 단엽은 빙그레 웃었다.
[사랑으로 인한 상처는 쉽게 치유될 수 없는 것이지만... 욕망으로 인한 상처는 쉽게 치유가 되는 것이 아니겠소?]
[핫하하... 되었소. 이제 그만 하시오. 더 이상 당신의 말을 들었다간 아마 나는 평생 가도 사랑을 못해 보겠소이다. 원 사랑이란 것이 그렇게 어려운 논리 속에 들어있을 줄이야.]
북궁천은 이렇게 말하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단엽 당신은 진정한 사랑을 해보셨소?]
단엽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실은... 내게는 사랑의 경험이 전혀 없소이다.]
[그럴 리가...]
[정말이오.]
순간 두 사람은 마주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사랑의 경험이 전혀 없는 단엽이 줄줄이 사랑의 논리를 늘어놓은 것이나, 그것을 듣고 감탄에 감탄을 거듭한 북궁천. 끝내 두 사람은 웃고 만다. 이런 여유, 마황성이라는 실로 무서운 집단 속에서 어쩌면 죽어야 할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곳에서 그들은 이처럼 여유를 부리고 있으니...
이것은 그들 두 사람이었기에 부릴 수 있는 여유가 아닌가 싶었다.
이때, 그들은 동시에 시선을 한 곳에 고정시켰다. 천천히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한 사람. 짙푸른 청의에 목에 푸른 염주를 걸고 있는 노인. 그의 두 눈에는 은은히 푸른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바로 고해동의 수뇌인 청목사승인 것이다.
마황성. 천마교의 총단인 천마성 아래에 자리 잡은 고성. 그 건축양식과 구조 등은 천마성과 너무도 흡사하다. 그 출입구는 천마성에 도사린 마황루, 세인들이 알고 있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마황루 뿐이었다.
잠시 후, 성문 안으로 들어선 단엽과 북궁천은 청목사승에 의해 한 거대한 전각 앞에 안내되었다.
단엽과 북궁천은 바로 이 전각이 이곳 마황성주이자 또 한명의 천마교주의 거처임을 직감했다.
정적... 보이는 사람 하나 없고 전각 전체는 숨 막히도록 무거운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이때다.
돌연, 스스스... 어느 구석에 숨어 있었는지 무수한 흑의인이 쏟아져 나와 길 양쪽에 질서 있게 도열하는 것이었다. 대충 헤아려 보기에도 그 숫자는 물경 일천여 명에 가까웠으며 이 많은 사람이 움직이는 데도 옷자락 스치는 소리조차 일지 않았다. 칼날을 심어놓은 듯 예리하게 번뜩이는 눈빛과 눈빛!
장내는 일시 시간과 공기의 흐름마저 정지한 듯 숨막힐 듯한 긴장에 휩싸였다.
이때, 스르릉... 전각의 육중한 문이 미끄러지듯 좌우로 갈라지고 그 속에서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우측의 인물, 일신에 단아하게 백의를 휘감고 있는 그는 이십삼 사세 가량의 청년이었다.
용모는 가히 눈이 부실 지경.
짙은 눈썹은 은연 중 남아의 힘찬 기개를 풍기고 있었으며 그 아래 두 눈은
차가움과 뜨거운 열정을 함께 풍기고 있었다. 콧날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채 뚜렷한 윤곽을 지녔으며 입술은 꽃잎과 같고 연농농한 매혹을 풍긴다. 게다가 청년의 피부는 여인의 속살처럼 희고 투명하기조차 했다. 그 백의의 중앙에 거대하게 수 놓여진 두 글자는 <천마>였다.
바로 천마교주임을 말하는 것이었다.
(천마교주가 일개 청년이었던가?)
단엽은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때, 북궁천의 나직한 음성이 그의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저 인물은 적용운이라 하며, 이곳 마황성인들이 말하는 천마교주이기도 하오.]
(적용운이라..)
[그리고 그는 군협천에서 사마운이란 이름으로 십 수 년간 생활했던 인물이오.]
북궁천은 백의청년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했다.
사마운, 군협천의 대장로인 사마헌에 의해 키워진 사마운이 바로 이 백의청년, 즉 천마교주였던 것이다.
한때는 군협천 최고의 기재라 불리울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었던 그. 인간을 포용하는 능력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매사에 완벽을 추구하던 특이한 기질의 그는 언제인가 자신을 키워주었던 대장로 사마헌을 죽인 후 군협천을 떠났었고 지금은 이처럼 천마교주로 완벽한 변신을 이룬 채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에 대한 대강의 것을 듣고 난 단엽, 그는 새삼스레 적용운을 주시했다.
(과거 대과헌에서 죽었던 천마교의 제 십칠대교주 적용사우 직계 후손이 저 인물이라니... 아아... 그런 그를 군협천의 대장로 사마헌이 군협천에서 줄곧 기른 것은... 득보다도 실을 자초하는 행위였다.)
단엽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사마헌을 원망했다.
(그가 좀 더 현명하게 처신했다면... 이런 무서운 결과를 미연에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때, 북궁천의 음성이 다시 단엽의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그 음성은 전음이었기 때문에 오직 단엽만이 들을 수 있었다.
[적용운의 왼쪽에 있는 여인이 바로 문제의 철류향이오. 군협천의 소천주의 지고한 신분인 그녀이나... 이제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이곳의 부교주일 뿐이오. 어떻소? 당신은 지금 중원제일의 미녀를 보고 있는 것이오. 그녀는 이 시대의 가장 완벽한 미녀이오.]
단엽의 눈에 은은히 감탄의 빛이 어리고 있었다. 적용운의 왼쪽에 선 여인, 일신에는 자의를 걸치고 있는데 그녀의 일신에 감도는 황족처럼 고아한 귀품, 그린 듯한 아미와 콧날, 얼굴 윤곽이 완벽한 조각품처럼 섬세하고 선명하다.
시리다. 여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대로 눈이 아릴 정도로 눈부셨다. 삼단 같은 흑발은 치렁치렁 아래로 흘러내려 미풍에 하늘하늘 휘날리고 있었고 팔소매 아래로 드러난 두 손은 희다못해 차라리 푸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두 눈은 마치 백치처럼 잔뜩 풀어져 있어 어딘가 정상이 아니라는 인상을 준다.
(오오...아름답다... 저런 미인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었다니...)
단엽은 입을 딱 벌렸다. 그의 눈빛은 꿈결처럼 몽롱하게 풀어져 있었다.
(운명이다. 나의 본능이 저 여인과의 만남을 운명이라 말하고 있다.)
병... 단엽의 그 고질적인 병이 또 발작하는가 보다.
(저 여인은 이곳에 있어서는 아니 된다. 내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여인을 이곳에서 구해주리라.)
단엽은 철류향에게 한 가닥 연민의 정을 느꼈다. 그러나 철류향은 이런 단엽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풀어진 눈빛으로 멍하니 허공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떻소? 두 분은 나와 산책이라도 하는 것이?]
적용운은 단엽과 북궁천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그런 그는 무림인이 아닌
유생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몸에서는 그 어떤 마기와 사기는 엿보이지가 않았다.
북궁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오. 기꺼이 당신의 제안을 따르겠소이다.]
적용운은 빙그레 웃었다.
[우리는 할 말이 많을 것이오. 당신은 내게...나는 당신에게...]
[그렇소.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해야 할 말이기도 하오.]
[그렇다면 걸읍시다. 정실에서 말하는 것보다야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훨씬 부드러울 것이오.]
적용운은 이렇게 말한 후 단엽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단엽이시오?]
[그렇소.]
단엽은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였다.
[당신은 대단한 미남자구려. 질투가 날 정도로...]
적용운은 단엽의 얼굴을 보며 찬사를 보냈다. 단엽은 빙그레 웃었다.
[고맙소. 그러나 내가 보기엔 당신의 얼굴이야말로 완벽하오.]
[핫하하... 되었소.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눈다면 우리는 원만하게 서로
의 불만을 해소할 수가 있을 것이오.]
적용운은 말을 하며 천천히 걸었다. 그의 뒤를 철류향이 따랐고, 도열해
있던 일천 명의 흑의무사들은 그 순간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북궁천과 단엽은 의외로 적용운이 부드럽게 나오자 다분히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서로 마주보더니 이내 적용운과 철류향의 뒤를 따랐다.
마황성의 거리는 어두웠다. 그러나 아주 어둡지만은 않은 것은 이 거대한 지하광장의 천정에 수십여 개의 야명주가 흐릿한 빛을 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벅저벅...
깊은 적막을 깨는 발걸음 소리. 적용운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내게는 쌍둥이 동생이 하나 있소. 그 아이의 이름은 적용화. 불쌍한 아이라오. 나이 팔세에 천마교의 패망과 부친인 적용사우의 죽음을 봐야 했던 우리는 그때 운명처럼 헤어졌소. 외증조부인 군협천의 대장로 사마헌에 의해 나는 군협천으로 이끌려 갔고 그 아이는 이름 모를 촌부에게 맡겨졌던 것이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같은 뱃속에서 태어났지만 다른 환경에서 자라야 했던 것이오. 나는 그런대로 부귀를 누리며 호화로운 생활을 누릴 수가 있었지만 그 아이는 비참한 생활을 했을 것이오. 그런 다른 환경에서 십수 년의 성장... 어쨌든 우리는 천마교의 부활이라는 전제하에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소. 물론 아직은 만나지 않았지만... 서로 다른 환경에서의 생활이었지만 잊을 수는 없었던 것이오. 천마교의 패망과 대과헌으로 잡혀가시는 아버님의 비참한 모습. 그리고 어머님의 죽음. 우리는 헤어질 당시에 복수를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것이오. 비록 군협천에서의 생활이 내게는 사치스러운 것이었으나 나는 한시도 복수를 잊어 본 적이 없었소.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군협천의 많은 것을 흡수하려 했고 그 안의 많은 무공을 내 것으로 만들었소. 허나 자라온 환경이야 어찌됐든 그것은 지나간 과거지사이오. 문제는 현실이며 나와 그 아이의 관계이오. 자라온 환경이 다른 만큼... 그 세월이 길었던 만큼... 우리에게는 쉽게 허물 수 없는 벽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오. 그 아이에게는 그 아이 나름대로의 사고방식. 내게는 내 나름대로의 사고방식. 그리고 그 아이의 주위에는 북궁세가라는 무서운 힘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내게는 서궁세가라는 힘이 존재하고 있었소. 우리는 필요에 의해 그 힘과 규합한 것이나 바로 그것이 허물 수 없는 벽이 되고 말았던 것이오.]
적용운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마치 천만근의 굴레를 뒤집어 쓴 듯... 그의 음성은 나직했고 담담했으나 단엽과 북궁천에게는 결코 나직하지도 담담하게도 느껴지지 않는 것은. 지금 적용운의 말이 피토하는 듯한 절규처럼 들렸기 때문이리라.
그가 군협천에서 보낸 십 수 년의 세월. 그 세월을 어찌 부귀 속에서 생활했다고 볼 수 있겠으며 그 한 몸에 가득 지닌 한과 증오가 어찌 망각되어질 수가 있었겠는가. 오히려 그 세월은 그에게 한과 증오와 저주를 키웠을 것이며, 누구에게도 함부로 마음을 터놓고 말할 수 없는 자신만의 한과 증오를 지금 토하는 그의 심중에 있는 말은 그래서 더욱 처절하게 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북궁세가와 서궁세가가 하나가 될 수 없듯... 나와 그 아이 역시 쉽게 하나가 될 수 없음은 우리에게 주어진 비극일 것이며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오. 물론 우리 남매는 천마교의 부활을 간절히 원하고 있소. 그러나 북궁세가와 서궁세가가 동시에 이일에 개입한 이상 천마교의 부활은 전혀 그 가능성이 없어지고 마는 것이오. 길은 오직 하나요. 북궁세가와 서궁세가 가운데 한 가문이 이일에서 손을 떼는 것이오. 아니면 한 가문이 다른 가문에 귀속이 되어야 하오. 대화를 통해서 물론 이 일을 원만히 해결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 라고 반문할 수도 있소. 그러나 수십 수백 번을 더 생각해도 결론은 역시 하나였소. 대화로서는 원만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 생각해 보시오. 일천 년 이상의 역사와 전통을 지닌 두 가문 가운데 어느 가문이 한 가문 아래 귀속이 되길 바라겠으며 두 가문 가운데 이 일에서 손을 떼려하겠소? 그렇다고 내가 서궁세가를 버릴 수 있겠으며 그 아이가 어찌 북궁세가를 버릴 수가 있겠소? 이런 상태에서 우리 남매의 만남은 불화합과 불행과 비극을 초래할 뿐이오. 나는 그것을 원치 않았소. 그 아이의 가슴에 행여 못을 박는 행위는... 나를 위해 희생한 그 아이에게 차마 못할 짓이 아니겠소. 방법은 한 가지였소. 그 아이를 만나기 전 힘으로 북궁세가를 제거하는 것이었소. 북궁세가만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남매는 원만한 화합을 이룰 수가 있다고 생각했소. 물론 이 방법도 그 아이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기는 하겠으나 힘에 있어서 절대 우위에 있는 이 오라비를 결국 순종하며 따르게 될 것이오.]
적용운의 말은 여기에서 잠시 멈추었다. 동시에 걸음도 멎었다. 한 회백색 건물의 입구였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시선은 느릿하게 북궁천에게로 향했다.
[이제 아시겠소? 왜 당신네 북궁세가의 칠대가신이 죽어야 했는지를?]
이제까지 담담하기만 했던 그의 음성에 한 가닥 무서운 한기가 배어 있었다. 북궁천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오.]
[물론 알고 있겠지. 적어도 북궁세가가 모르는 일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으니...]
적용운의 입가에 싸늘한 냉기가 맺히듯 피어올랐다. 그리고 시선을 허공으로 던지며 말을 했다.
[그렇다면 그대가 죽어야 함도 알고 이곳을 찾았겠군.]
북궁천은 의외로 담담했다.
[당신의 말은 나를 죽일 자신이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그런가?]
이제까지와는 달리 두 사람의 말투는 거칠어졌다. 더불어 장내는 무서울 정도로 팽팽한 기장으로 뒤덮였다.
적용운은 비릿하게 웃는다.
[그 말은 이곳에서 그대가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처럼 들리는데?]
[물론이다. 누구도 내가 원하지 않는 이상 나를 죽일 수는 없다.]
북궁천은 누가 들어도 고개를 저을 말을 던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자부심이며 오기였다. 적어도 그는 북궁세가 사상 가장 뛰어난 기재이므로..
[으핫하하하하...]
적용운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앙천광소를 토했다. 그 광소에 마황성 전체가 마치 지진을 만난 듯 뒤흔들렸다.
(무서운 공력이로군.)
단엽은 적용운의 웃음에 담긴 공력이 엄청난 것임을 느끼며 관심 어린 눈길로 북궁천과 적용운을 주시했다.
적용운은 문득 웃음을 뚝 그치며 차갑게 말했다.
[그대가 무엇을 믿고 그리 큰소리를 치는지는 두고 보겠다.]
이어, 그는 회백색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은 마황성의 유일한 뇌옥이다. 그대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이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단엽은 빙그레 웃었다.
[그대들이라면... 이 단엽도 포함이 되는 말 같은데...그렇소?]
[물론이다.]
적용운은 간단히 대답했다. 단엽은 북궁천을 바라보며 넌지시 말했다.
[어절 수 없이 우리는 한 배를 타고 말았군.]
[그렇게 되었소.]
북궁천은 희미하게 웃었다. 단엽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결국 당신이 원하는 그대로 되고 말았소. 그대는 나를 이용해 이들을 상대하려 했었으니...]
[핫하하...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가 아니오? 당신 또한 나를 이용해 천마교의 부활을 막고자 했던 것이오.]
북궁천은 소리 내어 웃었고 단엽 역시 낭랑하게 웃었다.
스스스....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북궁천과 단엽을 중심으로 실로 수백여 명의 인물들이 소리 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적용운의 거처에서 잠시 도열해 있다가 사라진 물경 일천 명을 헤아리는 흑의무사들이었다.
일천 명이 움직임에도 옷자락 스치는 소리조차 일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이 고도로 숙련된 고수들임을 대변하는 것. 그러나 북궁천과 단엽은 태연했다.
[이 정도로 본인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지.]
북궁천은 조소를 날렸다. 순간, 그의 손에 들려진 노을빛 검.
파아아...
그 검은 그대로 흑의무사들을 향해 뻗어 나갔다. 단 일검이었지만 거기서 무섭게 폭출되는 검기는 그야말로 수백 가닥... 이 검법이 바로 북궁세가 사상 그 누구도 연성치 못했다는 사령전린검법이었다.
[크아악! 컥! 으악!]
흑의무사들의 몸놀림은 무섭게 빨랐다. 검이 뻗어지는 그 순간에 그들은 마치 썰물처럼 뒤로 물러서고 있었으나 북궁천은 그보다 더욱 빨랐고 십여명의 흑의무사들이 수십 조각으로 갈라지며 사비팔산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지 시작이었다.
[핫하하하...]
북궁천은 낭랑히 웃으며 허공을 신형을 날렸고 다음 순간 그의 검은 폭풍
처럼 흑의무사들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비명. 흑의 무사들은 미처 손도 써
보지 못한 채 썩은 짚단처럼 죽어갔다.
[으음... 과연 큰소리 칠만 하군.]
적용운의 눈빛이 미미한 떨림을 보였다. 그러나 철류향은 여전히 무표정하다.
단지 허공에 자욱한 피안개를 볼 때마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무서운 마기가 피어나는 것이었다. 피를 볼 때마다 그녀는 묘하게도 쾌감에 젖는 듯한 표정을 짓기까지 한다.
적용운의 표정은 다시 일변했다. 단엽 그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그는 또다시 놀라고 있었다.
[핫하하... 이런 조무래기 정도로는 우리를 결코 저 뇌옥에 집어넣을 수가 없다.]
낭랑한 대소에 이어 단엽의 신형은 허공을 날았고 동시에 그는 허공에서 수십번의 방위이동을 했다. 스스스... 방위이동과 동시에 그는 천마도를 휘둘렀다.
[크악! 우욱! 크아아!]
수십여 명의 흑의고수들이 뻗어낸 검은 무서운 기세로 단엽을 향해 날아들었으나 그 검은 미처 단엽의 몸에 닿기도 전에 수십조각으로 갈라져 허공을 날았고, 동시에 흑의무사들의 몸은 천마도에서 분출된 도기에 의해 수직으로 잘라진 채 바닥에 널브러지고 있었다.
참혹했다. 도저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일천 명의 흑의 무사 가운데 순식간에 백여 명이 북궁천과 단엽 두 사람에 의해 비참하게 죽었다.
이때, 단엽을 바라보는 북궁천의 얼굴에는 놀라움의 빛이 스치고 있었다.
(저 도법은 천마교 사상 최강의 무공이라는 천마도법이 아닌가? 그가 어찌 저 무공을 알고 있단 말인가? 도대체 그의 진정한 신분이 무엇이기에?)
그의 눈에 보이는 단엽은 강했다. 그 자신이 약간은 위축이 될 정도로.
[우우우! 우우!]
돌연 장내를 향해 날아드는 엄청난 장소성이 있었다.
이어 허공을 미끄러져 단엽과 북궁천을 향해 날아드는 십 인이 있었다.
먹빛 검은 유삼에 얼굴은 검은 면사에 가려진 그들. 허공이 평지라도 되는지 유유히 허공을 걷고 있었으니 그것을 일컬어 전설의 능공허보라 하던가. 적어도 이백년의 공력을 일신에 지녔을 때만이 흉내낼 수 있다는 그 전설의 능공허보를 단 한사람도 아닌 열 사람이 동시에 전개하고 있었다. 단엽과 북궁천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들 역시 십 인의 출현에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대..대단한 고수들이다.)
(적어도 저들 개개인의 무공은 무림칠대뇌옥의 수뇌들 위다.)
그러나, 단엽은 그들을 모르고 있었으나 북궁천은 그들을 알고 있었다.
[저들이 바로 천마십대장로요. 조심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