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마태복음 27:21-26
참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하시길 빕니다. 제가 자주 순례길이라는 말씀을 드리는데, 길은 삶의 은유로 자주 사용됩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어딘가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갈 때도 있고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갈 때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누구도 어제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시간의 불가역성’이라고 하지요. 제아무리 어제의 기억이 아름답다 해도 우리는 오늘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거꾸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어제의 기억이 아무리 참담하다 해도 오늘은 새 삶의 가능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한 길은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길’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그 길이야말로 진리이고 생명임을 믿기에 우리는 그 길을 걷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잘 걷고 계신지요?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이제 사순절이 한 주 남았습니다. 골고다 언덕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시는 주님의 그 길을 잘 따라 걸으시기 바랍니다.
갈릴리라는 팔레스타인의 변방에서 시작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들불처럼 번져 마침내 예루살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서두르는 법 없이 하염없이 걷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서셨습니다. 오래전부터 예수의 소문을 들었던 이들은 뭔가 진기한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 예수의 일행을 뒤쫓았습니다. 메시야가 오셨다는 감격에 어떤 이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 위에 올려놓고 혹은 길에 깔기도 했고, 다른 이들은 올리브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습니다. 이상한 흥분감이 사람들 사이에 번져갔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선창을 하듯 외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21:9) 온 도시가 들떠서 물었습니다. “대체 이 사람이 누구냐?” 사람들은 그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신 예언자 예수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뭔가 기대하는 바가 있었기에 대단한 흥분 상태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그런 흥분된 모습과는 달리 예수님은 더욱 깊은 침묵 속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어쩌면 지난 3년 동안 일어난 일들을 반추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일,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갈릴리의 어촌 마을을 두루 찾아다니시며 가난하고 불쌍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벗이 되어 살려고 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을 것입니다. 주님은 절망으로 인해 파리하게 변해버린 사람들의 가슴에 하나님 나라의 불을 질렀습니다. 잘난 사람들에게 짓눌리고, 무시당하는 것을 숙명이려니 여기고 있던 그들에게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새로운 꿈을 심어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당시 종교가 만들어 놓은 금기를 위반하곤 했습니다. 안식일에도 병을 고쳐 주셨고, 율법이 부정한 이들로 규정한 이들과 접촉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셨고, 그들의 식탁에 즐거이 앉으셨습니다.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온갖 율법 조문으로 옭아매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성전 체제를 부정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신학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율법 조문을 자유롭게 해석하기도 하셨습니다. 민중들은 그런 예수님에게서 빛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그런 행태는 기존 체제의 입장에서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정결 예법이나 성전 체제를 비판하는 일은 금기의 영역에 속했습니다. 꺼리어 피한다는 의미의 금기(禁忌)는 사실 적절한 사회 질서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는 곳에서 사회 통제의 한 방식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금기를 위반하는 것은 곧 사회 질서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금기의 영역을 수시로 넘나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은 위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을 치유하고, 일으켜 세우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고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어찌 보면 모든 금기가 집약되어있는 곳인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금기를 만들고 그 금기 뒤에 숨어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던 지도자들은 예수라고 하는 존재가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평생을 엎드려 살아온 이들이 일어서기 시작하면 자기들이 서 있는 토대가 흔들릴 터이니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은 죽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오셨다는 해묵은 믿음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십자가는 예수님이 선택한 삶의 결과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살기를 원하는 생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와 다른 것은 우리는 살기 위해 죽음을 피하지만, 주님은 살기 위해 죽음을 향해 나아갔다는 차이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살기 위해’라는 말 앞에는 단어 하나가 추가되어야 합니다. ‘참으로’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참으로 살기 위해 죽음을 향해 나아갔다. 참되게 사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길임을 보여주기 위해 주님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지도자들의 음모에 따라 빌라도에게 넘겨지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면서 제시한 죄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민족을 오도하고,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고, 자칭 그리스도 곧 왕이라고 하였습니다.”(눅23:2)
“그 사람은 갈릴리에서 시작해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온 유대를 누비면서 가르치며 백성을 선동하고 있습니다.”(눅23:5)
질서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선동일 텐데,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가장 위험한 정치범으로서의 면모를 씌우고 있습니다. 예수 운동을 위험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이 동원한 수사는 치밀합니다. 민족을 오도한다, 백성을 선동한다,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자칭했다면서 그 말의 속뜻은 ‘왕’이라는 해석까지 친절하게 덧붙입니다. 예수가 대단히 위험한 사람임을 거듭거듭 상기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덧씌워진 혐의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사실과 부합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멋대로 왜곡하여 자기들이 파놓은 함정에 끼워 넣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그런 공소장에 대해 예수님에게 변론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침묵하십니다. 이미 말의 부질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이 낯선 사나이의 깊은 침묵에 당황했습니다. 가만히 보아하니 주눅 들린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자포자기의 심정인 것 같지도 않고, 또 자기를 고발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한없이 고요하기만 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빌라도는 당혹했습니다. 이슬람의 신비주의 시인인 칼릴 지브란은 『사람의 아들』에서 예수님을 만난 빌라도의 당혹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심문을 했지만 그는 대답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 속에는 불쌍히 여기는 빛이 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자기가 내 통치자요 재판장이기나 한 것처럼.”
자기보다 위대한 정신이 자기 앞에 서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끼는 사람의 당혹감을 칼릴 지브란은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성경은 빌라도가 예수의 침묵을 매우 이상히 여겼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상히 여겼다’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이적을 본 사람들의 반응을 전할 때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침묵하고 계신 예수님에게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위엄, 즉 신적인 권위를 보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깊은 침묵을 통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난처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면 결정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도 살기를 원하는 여느 사람과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의 생명을 거두면 됐습니다. 그것은 빌라도에게는 익숙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인 고려와 양심의 법 사이에서 갈등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요청을 뿌리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과 사이라도 틀어지면, 그래서 그들이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자신의 정치적 평판에 손상을 입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예수를 처벌할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다른 힘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는,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정치적으로 지혜로운 처신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당당하지는 못합니다. 그는 그렇게 해서 자기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합니다. 혹시라도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의 책임을 예수를 고발한 사람들에게 전가할 장치를 마련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동을 받은 사람들은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합니다. 악한 생각이 들어가면 사람은 언제든 악마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생명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들이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이를 제거하기 위해 서슴없이 죽음의 편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때로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오늘 성경은 섬뜩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가장 잘 믿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나의 잘 믿음이 누군가의 생명을 거두는 폭력으로 바뀔 수 있음을 오늘 성경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십자가 처형은 로마 체제에 지속적으로 저항해온 사람들이나 반역자들에게 부과되는 형벌이 아닙니까? 오랫동안 고통이 지속되고, 사람들 앞에서 죽어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십자가 처형은 제국주의가 사람들을 길들이기 위해 고안해 낸 악마적 처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고발하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어쩌면 많은 무고한 이들과 애국자들이 십자가에 처형되는 현실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던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들의 이해가 걸린 사안 앞에서는 이렇게도 쉽게 악의 편에 가담합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우리도 지금 이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예수는,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이 물음에 대한 반응으로 두 가지 태도가 나타납니다. 첫째는 방관입니다. 빌라도의 아내는 남편에게 전갈을 보내 지난밤 꿈에 그 사람 때문에 몹시 괴로웠다면서 그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빌라도는 물을 가져다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씻고는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손을 씻는다고 해서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불의와 공모 혹은 방조함으로써 책임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그 일을 통해 자기 자신을 파멸시켰습니다.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서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하는 것은, 당장은 편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태도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자기들의 적을 없애는 것입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제거하는 일에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들은 빌라도에게 오긴 전에 공의회를 소집하여 예수에 대한 대책을 숙의합니다. “이 사람이 표징을 많이 행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약탈할 것입니다.”(요11:47-48) 그러자 노회한 대제사장 가야바가 말합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 그들은 민족 전체를 위한다는 명분을 세워 예수 죽이기를 공모합니다. 산술적으로 보면 현명한 선택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종교는 절대로 이래서는 안 됩니다. 유대교의 오랜 가르침은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해왔습니다. 유대인 철학자이자 랍비인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누가 사람이냐?』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만일 적들이 모여 있는 여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모두 욕보지 않으려면 너희 가운데 하나를 우리에게 보내라’고 한다면 그들이 와서 모두를 욕보이게 할지언정 어느 한 여자를 뽑아서 욕보게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성서의 가르침이고,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모두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한 사람을 뽑아서 희생시키는 것은 폭력입니다.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은 그 폭력을 서슴없이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민족을 살린다는 그릇된 명분으로 예수를 죽임의 벼랑으로 내몰았습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임을, 자기 종교에 대한 부정임을, 하나님에 대한 부정임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예수는 복음서에서 증언되고 있는 그 예수님이 맞습니까? 우리는 다른 예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통렬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 주신 분에게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는 데는,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갈1:6)
사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다른 복음은 ‘할례와 율법주의’를 강조하는 이들의 가르침을 가리키고 있지만, 지금 우리는 또 다른 의미의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콘스탄틴 황제 이후 기독교는 특권을 누리는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에서 증언되고 있는 예수는 참 불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예수를 제거해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는 한 가지 길을 발견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지요? 첫째는 모른 척하고 방관하는 것이고, 둘째는 적극적으로 제거하는 일이었는데, 교회가 세 번째 길을 찾아낸 겁니다. 그것은 예수를 정신화하고 종교화하는 길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삶의 변화를 가르쳤지만, 교회는 예배 의식 속에 예수를 박제화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가지고 현실을 변혁하려 했지만, 교회는 죽음 이후에 가는 천당 이야기로 사람들을 호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신학자들은 거칠거칠한 예수를 숨기고, 세련되고 고상하고 철학적인 예수를 만들어냈습니다. 사람들 속에 어울리기 위해 금기를 깨뜨리는 예수, 부정하다고 규정된 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던 예수는 교회당 저 꼭대기로 높여져 사람들의 삶과 무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종교를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새로운 삶을 가르치셨을 뿐입니다.
고난 주간을 앞둔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복음서가 증언하고 있는 그 예수, 참사람 예수, 참 하나님인 예수, 그분의 생생하고도 치열한 삶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사람살이의 현장에서 빚어지는 아픔과 슬픔을 쉽게 초월하지도 않고, 불의한 세상 현실로부터 달아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폭력적으로 맞서지도 않았던 예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그 뜨거운 심장이 없어 우리는 세속의 물결에 속절없이 떠밀리며 삽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변혁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세상의 악한 세력과 맞서야 하지만 그것은 정신의 힘, 사랑의 힘을 근거로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랑이야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성도들은 힘에 힘으로 맞설 것이 아니라, 어떤 힘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세상 앞에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던 빌라도 앞에서도 참으로 고요하셨습니다.
성도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생명의 표지를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따뜻함을 불어넣고, 이웃의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싹을 틔우도록 물을 주고 거름을 주어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이 주간, 세련된 주님, 말랑말랑한 주님,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기만 하는 주님 말고 거칠기 이를 데 없는 주님, 정말로 삶의 변혁을 요구하는 그 주님과 만나 여러분의 존재가 새로워지는 나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