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세종 시기(1418~1450)의 사실 답③
제시된 사료는 최만리 등이 상소를 올려 언문(훈민정음)의 창제와 사용을 반대하자 세종이 한 말입니다.
사료에 나타난 '언문', '언문(한글)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백성에게 반포'라는 것을 통해 세종 때의 사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이전 우리말을 표현하기 위해 한자와 이두가 사용되었지만, 백성은 배우기 어려워 쉽게 사용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세종은 최만리, 정창손 등 많은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현전 학자들을 중심으로 훈민정음을 창제·반포하였어요. 세종 시기에는 훈민정음을 보급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폈습니다. “용비어천가”를 지어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역사성을 강조하였으며,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를 뽑아 그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을 덧붙인 “삼강행실도” 등 여러 유교 서적을 간행하여 유교 윤리를 보급하였어요. 그 밖에도 농서, 병서 등을 한글로 번역하였어요.
한편, 조선 초기에는 국가적인 편찬 사업 등에 따라 활자 인쇄술과 제지술이 발달하였습니다. 태종 때에는 금속 활자인 계미자를 주조하고, 세종 때에는 갑인자를 주조하였어요. 그리고 종이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조지서를 설치하였습니다.
① 효종 때 청과 러시아 사이에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청의 요청으로 두 차례(1654, 1658)에 걸쳐 조총 부대를
파견하였습니다(나선 정벌).
② 경국대전은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 때 완성하였습니다.
③ 갑인자는 1434년(세종 16) 갑인년에 주자소에서 구리로 만든 금속활자입니다.
④ 숙종 때 조선과 청의 두 나라 대표는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국경을 확정하여 백두산정계비를 세웠습니다(1712).
⑤ 영조 때 군역 부담을 줄여 주기 위하여 1년에 군포 1필을 납부토록 하는 균역법을 실시하였습니다(1750).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세종(1418~1450)
(1) 유교 정치의 실현
① 의정부 서사제 시행 : 태종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여 6조직계제를 실시해 모든 결정권을 왕이 행사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왕의 권한을 의정부에 많이 넘겨주고 훌륭한 재상을 등용하여 정치를 맡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인사와 군사권은 세종이 장악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② 집현전 확대·개편
㉠ 성격 : 왕립 학술 연구 기관으로 고전 연구, 서적 편찬 등을 담당하였으며, 세종의 명으로 한글 창제를 주도하였다.
㉡ 특권 : 사헌부의 규찰을 받지 않았으며, 사가독서(학문 연구 휴가) 등의 특권을 누렸다
(사가독서제는 성종 때 독서당 제도로 연결된다).
㉢ 기능 : 왕실 교육(경연, 서연 담당), 왕의 자문 기능, 학술 연구 등을 담당하였다.
㉣ 변천 : 세조 때 폐지되었으나 성종 때 홍문관으로 그 기능이 부활되었다.
(2) 대외 정책
① 여진: 김종서와 최윤덕이 여진족을 토벌하고 4군과 6진을 설치하고, 이 지역에 사민 정책을 시행하였다.
② 일본
㉠ 쓰시마 섬 토벌(1418): 이종무로 하여금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게 하였다.
㉡ 삼포 개항(1426): 일본의 요구로 부산포(동래), 염포(울산), 제포(웅천)의 3포를 열어 무역을 허용하였다.
이곳에는 왜관이 설치되어 많은 미곡과 면포 등을 수입해 갔다.
㉢ 계해약조 체결(1443): 교역량이 지나치게 많아지자 무역량과 거류 왜인의 수를 제한하였다.
㉣ 통신사 파견(1429): 박서생 등이 사행(통신사)으로 파견되어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일본에서도 사행을 파견하였는데, 그 빈도는 조선보다 훨씬 많았다.
(3) 사회·경제 정책
① 공법 시행(1444): 조세 제도를 개혁해 연분 9등법, 전분 6등법을 시행하였다.
㉠ 전분 6분: 전세상정소를 설치해 개혁 방안을 조사, 연구하고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1~6등전으로 나누어 전세를
징수하는 전분 6등제를 마련하였다.
㉡ 연분 9등: 공법상정소를 설치해 개혁 방안을 조사, 연구하고 전세를 풍흉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20 ~ 4두까지
납부하게 하는 연분 9등법을 마련하였다.
② 의창제 실: 춘대추납의 빈민 구제를 담당하였다.
③ 금부 삼복법 시행: 사형수에 대해 3차례의 재판을 거치도록 하였다.
④ 하층민 처우 개선: 천민에게도 잡직을 주어 관직에 등용하였다(장영실). 주인이 노비를 마음대로 처벌하지 못하게
하고, 관비의 출산 휴가를 연장하였다.
⑤ 화폐 발행: 태종 때 발행한 저화가 제구실을 못하자 조선통보를 주조하여 유통시켰다.
(4) 한글 창제
① 창제와 반포(1443): 집현전에 정음청을 설치하여 중국, 몽골, 일본 등 각국 문자를 연구한 끝에, 세종 25년(1443)
훈민정음을 반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최만리 등의 반대 상소가 있기도 하였다.
② 보급: 각종 한글 서적을 편찬하였으며, 행정 실무에도 이용하였다(행정 실무를 담당한 서리들에게 한글을 시험하여
채용하기도 하였다). 국왕이 언문 교지를 내리는 때도 있었으며, 궁중 여인들의 편지에 훈민정음을 사용하였다.
구분 | 서적 | 성격 |
왕실 찬양 | <용비어천가> | 태조의 6대조 조상들의 음덕 찬양 |
불교 관계 |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등 | 석가의 일대기나 각종 불경 번역 |
언어, 한글 | <동국정운>, <사성통해>, <훈몽자회> | 한자의 한글 음을 정리 |
유교 윤리 | <삼강행실도 언해본>, <번역소학>, <소학언해> | 유교적 윤리 보급 |
외국어 교육 | <노걸대>, <박통사 언해> | 중국어 학습 교재 |
(5) 유교 윤리 보급 노력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국조오례의> 편찬을 시작하였다(성종 때 완성.)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였으며, <삼강행실도>와 <효행록>을 편찬하였다.
(6) 문화 정책
① 불교 정리: 불교 종파를 선교의 양종으로 통합하여 36본사만 인정하였다.
② 역법 개정: 원의 수시력과 명의 대통력을 참조로 하여 칠정산 내편을, 아라비아 회회력을 참조하여 칠정산 외편을 만
들었다. 서울을 기준으로 하였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③ 과학 기구 제작: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었으며, 장영실로 하여금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게 하였다.
해시계인 앙부일구도 제작하였으며, 풍향을 재는 풍기구, 물높이를 재는 수표를 만들었다.
또한 천체 관측 기구인 혼천의, 간의 등도 만들었다.
그리고 신기전 등의 새로운 무기도 만들었다.
④ 의학 정리: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등을 편찬하였다.
⑤ 편찬 사업: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동국정운> 등의 한글 서적과, <육전등록(법전)>, <고려
사(역사서)>, <신찬팔도지리지(지리서)>, <농사직설>, <총통등록(화약 무기의 제작과 사용법)> 등을 편찬하였다.
⑥ 활자 주조: 경자자, 갑인자, 병진자, 경오자 등을 주조하였다. 특히 구리로 갑인자를 주조하였는데, 이는 글자 모습이
아름답고 인쇄에 편리하게 만들어졌다.
⑦ 인쇄술 발달: 종전에는 밀랍으로 활자를 고정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였으나, 이제는 밀랍 대신 식자판을 조립하는
방법을 창안하여 종전보다 두 배 정도의 인쇄 능률을 올렸다. 그리고 종이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조지서를 설치하고
다양한 종이를 대량으로 생산하였다.
유사 기출문제
정치
26회 고급 24번 문제
24. 세종 때의 대외 정책 답②
지도에 표시된 지역은 범례에 친절하게 4군과 6진임을 알려 주고 있네요. 압록강 유역에 4군, 두만강 유역에 6징르 개척하여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보한 국왕은 세종입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여진과 일본에 대해 회유(유화)와 토벌(강경)을 병행하는 교린 정책을 폈습니다. 평상시에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교역을 허용하였으나, 침략 행위가 있을 경우에는 이들을 토벌하는 강경책을 사용하였습니다.
세종은 북방 지역에 4군 6진을 개척하고 남쪽으로는 왜구를 근절시키기 위하여 대마도를 토벌하였어요. 여진족이 살던 북방 지역에는 최윤덕 장군을 시켜 압록강 상류 지역을 확보하여 북서 4군을 설치하고, 김종서 장군을 시켜 두만강 하류 일대까지 확보하여 동북 6진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삼남 지방의 일부 주민을 대거 북방으로 이주시켜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 지역을 개발하는 사민 정책을 실시하였어요. 이 지역에는 토착민을 토관으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였습니다.
왜구의 침략이 끊이지 않고, 약탈로 인한 피해가 커지자 이종무에게 명하여 대마도를 토벌하고(1419) 일본과의 교역을 중단하였습니다. 이후 일본이 다시 교역을 요청하자 조선은 부산포(부산 동래), 제포(창원 진해), 염포(울산)의 3포를 개방하고(1426), 대마도주와 계해약조(1443)를 맺어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교역을 허락하였습니다.
① 박위의 대마도 토벌(1389)은 고려 말 창왕 때의 일입니다.
② 세종은 3포 개항 이후 왜인이 많은 미곡과 면포를 수입해 감에 따라 교역량을 제한할 필요가 생기자 대마도주와
계해약조를 맺었습니다(1443). 이에 따라 일본의 세사미두는 최대 200석, 세견선은 50척으로 제한되었어요.
③ 효종은 북벌을 추진하면서 1623년에 설치된 어영청을 확대하여 어영군의 수를 세 배 가까이 늘렸습니다.
④ 숙종 때 청과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조선과 청의 대표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서위압록 동위토문(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이라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하였어요(1712).
⑤ 태종 때 여진과의 국경 지역인 경성과 경원에 처음으로 무역소를 설치하여 제한적인 교류를 허용하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21회 고급 19번 문제
19. 세종(1418~1450)의 업적 답⑤
문제의 자료 내용에 '빗물의 양 보고', '서운관에 대를 짓고 쇠로 그릇을 만들어 비를 받아 수량을 재어' 등이 나타나 있으니, 이것이 측우기를 설명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어요. 따라서 밑줄 친 왕은 측우기를 만든 세종이겠죠?.
세종의 업적은 워낙 많아 다 열거하기 힘들지만, 주용 내용을 전체적으로 짚어보자구요.
세종은 안정된 왕권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적으로 유교 정치를 실현하며 왕도 정치를 내세웠습니다.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잡게 하였어요. 궁중 안에 정책 연구 기관으로 집현전을 두고 집현전 학사를 일반 관리보다 우대하였어요. 뒤이어 의정부에서 정책을 심의하는 의정부 서사제로 정치 체제를 바꿔 왕의 권한을 의정부에 많이 넘겨주고, 훌륭한 재상들을 등용하여 정치를 맡기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죠. 국방에도 힘써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섬을 토벌하였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두만강의 국경선을 확정하였어요.
경제 분야에서는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농업 기술과 농기구를 개발하여 민간에 보급하였고, 토지 개간을 장려하고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경지 면적이 크게 늘렸습니다. 조세 제도를 좀더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공법(貢法)을 마련하여 토지 비옥도와 풍흉의 정도에 따라 전분 6등법, 연분 9등법으로 바꾸고, 조세 액수를 1결당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를 내도록 하였습니다.
문화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한글을 창제하고 이와 관련한 서적을 편찬하였으며, 유교 윤리를 보급하기 위해 "국조오례의"를 편찬하기 시작하였고(성종 때 완성), "삼강행실도"와 "효행록" 등 다양한 서적을 편찬하였습니다.
부국강병과 민생 안정을 위하여 과학 기술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국가의 장려와 지원을 받으며 천문학, 농업과 관련된 각종 기구가 발명, 제작되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강우량을 측정하는 기구인 측우기, 시간 측정 기구인 자격루(물시계)와 앙부일구(해시계), 풍향을 재는 풍기구, 물높이를 재는 수표, 천체 관측 기구인 혼천의와 간의 등을 제작, 사용하였으며, 토지 측량 기구인 인지의와 규형을 제작하여 토지 측량과 지도 제작에 활용하였어요.
또한, 중국의 수시력과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참고로 하여 서울을 기준으로 한 칠정산이라는 역법서를 만들었습니다.
의학에서도 우리 풍토에 알맞은 약재와 치료 방법을 개발, 정리하여 향약집성방을 편찬하고, 의방유취라는 의학 백과 사전을 간행하였습니다.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농업 기술과 농기구를 개발하여 민간에 보급하였는데, 당시 편찬한 '농사직설'은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씨앗의 저장법, 토질의 개량법, 모내기법 등 농민의 실제 경험을 종합한 농업 기술서였죠.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동국정운" 등의 한글 서적과, "육전등록(법전)", "고려사(역사서)", "신찬팔도지리지(지리서)", "총통등록(화약 무기의 제작과 사용법 정리)" 등 다양한 서적을 편찬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적을 인쇄하는데 필요한 활자 주조에도 힘써 구리로 갑인자라는 금속활자를 주조하였으며, 식자판을 조립하는 방법을 창안하여 종전보다 두 배 정도의 인쇄 능률을 올렸습니다.
ㄱ - 태종은 왕족이나 공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사병을 없애고 왕이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였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통하여 개국 공신 세력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그 자신이 사병을 통해 정권을
잡았기에 그 위험성을 알고, 사병을 없애(1400) 왕이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면서 친위 군사를 늘렸습니다.
ㄴ - 주자소는 태종 때에 설치되었습니다.
태종 때는 주자소를 두어 구리로 계미자를 주조하였으며, 세종 때에는 구리로 갑인자를 주조하였어요.
ㄷ - 세종 때 편찬된 향약집성방은 우리 풍토에 알맞은 약재와 치료 방법을 개발, 정리한 의학서적입니다.
ㄹ - 세종 때 실시된 의정부 서사제는 6조에서 올린 정책을 의정부에서 재상들이 심의, 합의한 후, 이를 왕에게 올리도
록 하여 왕의 권한을 의정부에 많이 넘겨준 것으로, 이는 훌륭한 재상들을 등용하여 정치를 맡기고자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ㄷ, ㄹ로 묶인 ⑤번입니다.
13회 고급 17번 문제
17. 우리나라의 국경선의 변화 모습 답③
국경선과 관련하여 묻는 문제는 수능 등에서 출제되었던 문제여서, 언제 한번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도 출제될 것이라 예상했는데 이번에 출제되었네요.
향후 시험에서도 각각의 개별 국경선을 제시하고 그 시기의 모습을 묻는 유형의 문제가 출제될 수 있으니 이번 문제를 통해 시대별, 시기별 국경선의 변화를 꼭 알아두세요.
알아두면 하나도 안 어려워요.
(가)는 대동강 입구~원산만을 잇는 국경선입니다.
이는 신라가 나·당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삼국 통일을 완성한 후의 국경선입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비롯한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당에게 빼앗겼지만, 이후 발해가 신라 북쪽의 고구려 옛 영토를 차지하죠.
(나)는 청천강 입구~영흥만을 잇는 국경선으로, 고려 태조의 꾸준한 북진 정책 결과 확정된 것입니다.
태조는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고자 강력한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적극 개발하였습니다. 그 결과, 청천강에서 영흥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다)는 압록강 입구~도련포까지를 연결한 국경선입니다.
이는 거란의 1차 침입(성종11년, 991) 당시 서희가 거란 장수 소손녕과의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회복한 후의 모습입니다. 3차에 걸친 거란 침략 격퇴한 후 이 국경선을 따라 천리장성을 쌓았습니다.
(라)는 압록강의 초산~길주, 갑주를 잇는 국경선입니다. 이는 공민왕이 회복한 국경선입니다.
공민왕은 반원 자주 정책을 실시하면서 무력으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습니다(1356).
(마)는 압록강~두만강을 잇는 국경선입니다.
이는 조선 세종 때 4군과 6진을 개척한 이후 확장된 압록강~두만강의 국경선입니다.
③ (다)는 거란의 1차 침입 당시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회복한 후의 국경선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려는 여진이 국경을 자주 침범하자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하여, 여진족을 북방으
로 밀어 내고 동북 지방 일대에 9개의 성을 쌓았어요(1107). 동북 9성의 위치가 어디인지 명확치 않으나 (다) 국경선
넘어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11회 고급 18번 문제
18. 6조직계제와 의정부 서사제 답⑤
이 문제도 수능을 비롯해 많이 출제되는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가)는 왕의 명령을 집행하는 행정 기관인 6조에서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사안을 국왕에게 올려 재가를 받아 시행하는 6조 직계제,
(나)는 6조에서 올라오는 모든 일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중심이 되는 의정부에서 논의한 다음, 합의된 사항을 국왕에게 올려 결재를 받는 형식인 의정부 서사제입니다.
(가)의 6조 직계제는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통치 체제로 태종, 세조 때 실시되었습니다.
(나)의 의정부 서사제는 왕의 권한을 의정부에 많이 넘겨주고, 훌륭한 재상들을 등용하여 정치를 맡기고자 하였던 체제로, 세종 때 실시되었습니다.
그럼 바로 <보기>를 하나씩 알아보지요.
ㄱ - 세조 때 폐지된 것은 의정부 서사제입니다.
6조 직계제는 세종 때 폐지되었다가 세조 때 다시 실시되었죠?
ㄴ - (가)는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기 위한 체제였으므로, 왕권을 견제하는 경연이 활성화되기는 힘들겠죠?
실제로 세조는 경연을 열지 않았습니다.
ㄷ, ㄹ - 세종 때 실시된 의정부 서사제는 6조에서 올린 정책을 의정부에서 재상들이 심의, 합의한 후
이를 왕에게 올리도록하여 왕의 권한을 의정부에 많이 넘겨준 것으로,
이는 훌륭한 재상들을 등용하여 정치를 맡기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왕(세종)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였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ㄷ, ㄹ로 묶인 ⑤번입니다.
5회 고급 16번 문제
16. 고려 ~ 조선 초 영토 확장, 수복과 관련된 지역 파악 답⑤
(가) 거란의 1차 침입 당시 서희가 거란 장수 소손녕과의 외교 담판으로 얻어낸 강동 6주 지역입니다. 고려 후기에는 원이 서경에 동녕부를 두고 자비령 이북 지역을 1270~1290년까지 직접 통치하였는데, 충렬왕 때에 고려의 끈질긴 요구로 이 지역이 고려에 반환되었습니다.
(나) 고려 후기에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던 화주(오늘날 영흥)입니다.
(다) 고려 예종 때에 윤관이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족을 북방으로 밀어 내고 이 지역 일대에 동북 9성을 쌓았습니다. 고려 후기에는 원이 쌍성총관부를 두고 1258~1356년까지 직접 통치하였던 지역(철령 이북)입니다. 쌍성총관부는 공민왕 때에 이 지역의 천호인 이자춘(이성계의 부)의 도움으로 수복하였어요(1356). 이후 명이 이 지역이 원의 영토였으므로, 명의 영토라며 반환하라고 하자 이에 반발해 최영이 이성계로 하여금 요동 정벌에 나서게 하였으니,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잡는 일이 일어납니다.
(라) 조선 세종 때에 최윤덕 장군이 이 지역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북서 4군을 설치하였던 지역입니다.
(마) 조선 세종 때에 김종서 장군이 이 지역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 6진을 설치하였던 지역입니다.
① 최영이 주도한 요동 정벌은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면서 소득 없이 막을 내렸습니다.
② 충렬왕 때에 고려의 끈질긴 요구로 고려에 반환된 지역은 동녕부(평안도)와 탐라총관부(제주도)입니다.
(나) 지역은 쌍성총관부가 있던 곳으로, 공민왕 때 무력으로 회복하였습니다.
③ 강감찬 장군은 거란의 3차 침입 당시 거란군을 귀주에서 크게 물리쳤습니다.
(다) 지역은 쌍성총관부가 있던 곳으로, 공민왕 때 무력으로 회복하였습니다.
④ 윤관이 여진을 정벌한 후 동북쪽 국경 밖에 9성을 쌓아 고려의 영토로 확보한 지역은 (다)입니다.
⑤ 조선 세종 때 김종서가 (마) 지역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이 지역을 확보한 후 6진을 설치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6회 고급 16번 문제
16. 세종 때의 북방 개척 모습 답③
기본적으로 주어진 자료 출처가 "세종실록"이니 세종 때의 사실이네요. 자료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세종', '4고을', '변방', '회령, 경원, 종성, 용성' 등의 개념들을 통해 이 지역이, 세종 때 개척된 4군과 6진, 즉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 유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종은 여진족이 살던 북방 지역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의 국경선을 확보하였습니다. 최윤덕 장군을 시켜 압록강 상류 지역을 확보하여 북서 4군을 설치하고, 김종서 장군을 시켜 두만강 하류 일대까지 확보하여 동북 6진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삼남 지방의 일부 주민을 대거 북방으로 이주시켜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 지역을 개발하는 사민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이 지역에는 토착민을 토관으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려 하였습니다.
답지가 초기 국가~일제 강점기까지 통시대적으로 구성된 통합 문제네요.
답지를 하나씩 살펴보죠.
① 공민왕이 원명 교체기를 이용해 회복한 지역은 철령 이북의 쌍성총관부입니다.
글로 설명하기보다 위에 제시한 지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겁니다.
②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하였던 나라는 초기 국가인 동예입니다.
동예는 함경남도 남부~강원도 북부 지역의 해안가에 위치하였던 국가입니다.
④ 대한 광복군 정부는 1914년에 러시아의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수립되었습니다.
⑤ 대한 제국 시기 러시아가 이 지역의 삼림채벌권, 금광, 광산 채굴권 등의 이권을 얻기도 했습니다만, 러시아가
조선의 철도 부설권을 가진 적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경제
22회 고급 10번 문제
10. 연분9등법 답③
'연분', '9등분', '상상년~하하년'이라는 개념을 통해 연분9등법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연분9등법은 전세를 풍흉에 따라 9단계로 정해 그 해에 맞게 조세를 납부하도록 한 제도입니다.
조선은 건국 후 과전법의 조세 규정에 따라 한 해 수확량의 10분의 1을 조세(전세)로 내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1결의 최대 생산량을 300두로 정하고, 매년 풍흉을 조사하여 그 수확량에 따라 납부액을 조정하였습니다.
세종 때에 조세 제도를 좀더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공법을 시행해 토지 비옥도와 풍흉의 정도에 따라 전분6등법(1444), 연분9등법(1444)으로 바꾸었어요.
연분9등법은 그 해 농사의 소출을 따져 풍, 흉에 따라 9단계의 전세율을 정한 것으로 최고로 농사가 잘된 해를 상상년(上上年)으로 정하여 그 해에는 전세를 1결당 20말로 하고, 최하를 하하년으로 정해 1결당 4말을 거두도록 한 제도죠.
과전법의 조세 규정에서는 최고 30두까지 납부하여야 했는데, 이제 최고가 20두이고 그해 농사에 따라 최하 4두만 납부해도 되는 것으로 규정했으니, 농민들에게는 환영할 개혁이었죠.
전분6등급은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1결의 면적을 정하는 것입니다. 어느 땅은 비옥하여 수확이 많이 나는 곳이 있는 반면, 어느 땅은 척박해 수확이 거의 나지 않는 곳이 있는데, 두 곳에서 똑같은 전세를 내게 하는 불합리한 점을 개선해주려고 한 제도였어요. 이에 따라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수등 이척법이라 하여 양전(量田)하는 자를 달리하여 농지 면적을 측량하였어요. 이렇게 하여 1결의 면적을 1등전은 2,753.1평, 2등전은 3,246.7평, 3등전은 3,931.9평, 4등전은 4,723.5평, 5등전은 6,897.3평, 6등전은 1만1035.5평이 되는 것으로 책정하였습니다.
①, ⑤ 과전법에 대한 설명입니다.
고려 말 정권을 잡은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는 국가의 재정 기반과 건국에 참여할 사대부, 관리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조준의 건의로 전제 개혁을 단행해 과전법을 실시합니다(공양왕 3, 1391).
② 고려 시대 공전을 경작하던 농민이 납부하던 조세율입니다.
③ 연분9등법에 따라 납부하는 조세는 1결당 최고 20두(상상년)에서 최하 4두(하하년)였어요.
④ 고려의 조세 제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고려 시대에 조세는 토지를 논과 밭으로 나누고, 비옥한 정도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부과하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18회 고급 16번 문제
16. 조선 전기 세종 재위 시기(1418~1450)의 경제 상황 답④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 세종 당시의 정치, 경제, 문화와 관련된 사실들을 묻는 문제들이 정말 빈번하게 출제됩니다.
의정부서사제, 연분9등법 등의 공법, 한글 창제, 유교 윤리 보급, 과학 기술 등이 주요 출제 주제입니다.
문제에 제시된 삽화를 보면 '농사직설'이라는 농서를 완성해 바치는 장면이니, 이 왕은 세종입니다.
따라서 세종 시기의 경제 상황을 찾으면 되겠죠?
조선은 재정 확충과 민생 안정을 위한 방안으로 농본주의 경제 정책을 내세웠습니다.
이에 따라 농경지를 확대하고 농업 생산력을 증가시키며, 농민의 조세 부담을 줄여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려 하였습니다.
특히, 이러한 노력은 세종 시기에 매우 활발하였습니다.
우선,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농업 기술과 농기구를 개발하여 민간에 보급하였습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편찬된 '농사직설'은 우리 나라 풍토에 맞는 씨앗의 저장법, 토질의 개량법, 모내기법 등 농민의 실제 경험을 종합한 농업 기술서였죠.
그리고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어(1441) 전국 각지의 강우량을 측정하였고, 토지 측량 기구인 인지의와 규형을 제작하여 토지 측량과 지도 제작에 활용하였습니다.
또한, 토지 개간을 장려하고 양전 사업을 실시한 결과, 고려 말에 50여만 결이었던 경지 면적이 15세기 중엽인 세종 연간에는 160여만 결로 증가하였습니다.
세종은 조세 제도도 개혁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수확량의 10분의 1을 내는데, 1결의 최대 생산량을 300두로 정하고, 매년 풍흉을 조사하여 그 수확량에 따라 납부액을 조정하였는데, 수확량 조사 과정에서 과학적이지 못하거나 비리가 나타나 문제가 많았습니다.
세종 때에는 조세 제도를 좀더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공법(貢法)을 마련하여 토지 비옥도와 풍흉의 정도에 따라 전분 6등법, 연분 9등법으로 바꾸고, 조세 액수를 1결당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를 내도록 하였습니다.
① 광작이 나타난 것은 이앙법이 확산된 조선 후기의 경제 모습입니다.
② 상품 작물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부터입니다.
특히, 담배가 국내에 들어온 것은 16세기 말이며, 상품 작물로 재배한 것은 17세기 중엽부터입니다.
③ 장시는 15세기 후반 성종 연간에 처음 나타났으며, 조선 후기 들어서 보부상들의 활동으로 하나의 유통망으로 연계
되었습니다.
④ 세종 때 조세 제도를 개혁해 연분 9등법, 전세 6등법을 실시하였습니다.
⑤ 조선 후기의 모습입니다.
종래의 포구는 세곡이나 소작료를 운송하는 기지의 역할을 했으나, 조선 후기에 새로운 상업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포구의 상거래는 장시보다 규모가 컸기 때문에 18세기에 이르러 강경포, 원산포 등이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합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10회 고급 27번 문제
27. 세종 연분9등법 반포 당시의 경제 상황 답③
문제에 제시된 자료를 보면,
'수령이 그 해의 농사 형편을 살펴 등급을 매긴다.', '조세를 거둔다.', '상상년으로 정해 1결당 20말~하하년으로 4말씩 거두며'라는 내용을 통해 연분 9등법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연분 9등법은 세종 때인 1444년에 정한 전세에 관한 법이죠.
그 해 농사의 소출을 따져 풍, 흉에 따라 9단계의 전세율을 정한 것으로 최고로 농사가 잘된 해를 상상년(上上年)으로 정하여 그 해에는 전세를 1결당 20말로 하고, 최하를 하하년으로 정해 1결당 4말을 거두도록 한겁니다.
농민들에게는 대단히 개선된 전세 수취 제도였겠죠?
풍년이 들었을 때나 흉년이 들었을 때나 똑같은 전세를 내야 한다면 흉년이 든 해에는 전세 낼 쌀도 부족한 경우가 생길테니까요.
ㄱ - 1결당 2.2말의 삼수미를 내게 하는 것은 균역법 실시와 관계 있습니다.
균역법은 농민들이 내는 군포의 부담을 줄여준 조치로 1년에 2필씩 내던 군포를 1년에 1필로 줄여준 개혁입니다.
국가 입장에서 군포 수입이 줄어드니 이를 채우기 위해 농지 등에 여러 부가세를 부과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토지 1결에 2결을 거두던 결작, 그리고 이외에 어세(어업), 염세(소금), 선세(선박)를 거둬
부족분을 보충하게 됩니다.
ㄴ - 과전법이 실시되면서 세습되는 토지로 수신전과 휼양전이 있었는데, 1466년(세조 12
수신전과 휼양전은 폐지되었답니다.
ㄷ - 세종 때에는 전분6등급이라는 것도 정했는데 땅의 비옥도에 따라 1결의 면적을 달리하는 것이에요.
수등 이척법이라 하여 양전(量田)하는 자를 달리하여 농지 면적을 측량하였어요.
어느 땅은 비옥하여 수확이 많이 나는 곳이 있는가하면, 어느 땅은 비옥하지 못해 수확이 거의 나지 않는 곳이
있다고 할 때 똑같은 전세를 내게 하는 불합리한 점을 개선해 준 것이지요.
ㄹ - 이 당시에는 공전뿐만 아니라, 수조권이 개인에게 있는 사전에 대해서도 관에서 그해의 답험손실을 조사하는
관답험이 실시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ㄴ, ㄷ으로 묶인 ③번입니다.
7회 고급 19번 문제
19. 세종 시기의 경제 상황 파악 답④
'지금 나라에서 반포한 농사직설을 보니'라는 내용에서 이 시기가 조선 전기 세종 때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농서 보급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농사직설은 세종 때 우리 나라 풍토에 맞는 씨앗의 저장법, 토질의 개량법, 모내기법 등 농민의 실제 경험을 종합하여 편천된 농업 기술서입니다.
조선은 재정 확충과 민생 안정을 위한 방안으로 농본주의 경제 정책을 내세워 농경지를 확대하고 농업 생산력을 증가시키며, 농민의 조세 부담을 줄여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려 하였습니다.
밭농사는 조, 보리, 콩의 2년 3작이 널리 행해졌으며, 논농사도 남부 지방에서 모내기가 보급되어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해 생산량을 증가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내기는 봄가뭄에 따른 수리 문제 때문에 남부 일부 지역으로 제한되었습니다. 시비법(거름주는 법)도 발달하여 밑거름과 덧거름을 주게 되면서 경작지를 묵히지 않고 계속해서 농사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쟁기, 낫, 호미 등 농기구도 개량되었다. 목화 재배도 확대되어 의생활이 개선되었으며, 약초와 과수 재배 등이 확대되었습니다.
반면에, 검약한 생활을 강조하는 유교적인 경제관으로 소비는 억제되었고, 상공업자가 허가 없이 마음대로 영업하는 것을 규제하였습니다.
ㄱ - 광작이 나타나 있으니 조선 후기의 경제상황에 대한 자료입니다.
ㄴ - 공법에서의 수세액을 규정하기 위하여 한전, 수전에서의 수확량 조사하는 것으로 보아 세종 때의 상황이네요.
세종 때에는 합리적인 조세 수취를 위하여 공법을 통해 토지 비옥도와 풍흉의 정도에 따라 전분6등법, 연분9등법
을 마련합니다.
제시된 내용은 수전이나 한전, 또한 같은 수전, 한전이라도 토지의 비옥도 때문에 같은 면적이라도 수확량이 다
다르니 수확량을 면밀하게 조사해 이것을 바탕으로 표준화해서 조세를 걷을 수 있도록 하자는 내용입니다.
ㄷ - 조선 후기 상품 작물의 재배와 그에 따른 이익이 나와 있으니 이는 조선 후기의 경제 상황과 관련된 사료입니다.
ㄹ - 세종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상업에 대한 부정적 서술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농업을 장려하고 상업은 억제해 상공업자가 허가 없이 마음대로 영업하는 것을 규제하였습니다.
16세기 들어 국가의 농민에 대한 통제가 약화되고 상공업에 대한 통제가 무너져 가면서 이후 상공업과 무역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사실 ㄹ을 세종 때의 답지로 찾기는 힘들어 보이네요.
하지만 ㄱ, ㄷ은 확실하게 조선 후기와 관련된 사료이니 그것을 제외한 ㄴ, ㄹ을 답으로 찾으면 문제는 쉽게 풀리죠.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ㄴ, ㄹ로 묶인 ④번입니다.
문화
28회 고급 21번 문제
21. 몽유도원도가 그려진 시기의 사회모습 답①
제시된 그림만 보고도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몽유도원도는 세종 재위 시기인 1447년에 그려진 그림이라는 구체적 연도는 모르더라도, 답지에 조선 전기의 모습은 하나만 제시되어 있으니 조선 전기의 그림이라는 것만 알아도 풀 수 있는 문제네요.
조선 전기의 그림은 도화서에 소속된 전문 화가인 화원 출신인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문인 화가 강희안이 그린 고사관수도가 대표적입니다. 15세기에 그려진 몽유도원도는 안평 대군의 꿈을 소재로 그린 것입니다. 고사관수도는 선비가 바위에 기대어 엎드린 자세로 물을 바라보고 있는 유유자적한 인물의 모습을 간결하고 과감한 필치로 표현하여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잘 나타냈습니다. 한편, 16세기에는 이정, 어몽룡, 이상좌, 신사임당 등이 유명하였어요. 이 시기에는 이정의 묵죽도 등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사군자를 그린 문인화가 유행하였으며, 신사임당은 초충도 등 화초와 벌레 등의 다양한 소재를 즐겨 그렸어요.
① 삼강행실도는 세종 때인 1434년에 편찬된 유교 윤리서입니다.
유교 덕목에 모범이 될 만한 효자, 열녀, 충신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을 달았어요. 글을 모르는 백성도
삼강오륜의 윤리를 쉽게 알 수 있도록 글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렸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② 고구마는 조선 후기에 전래되어 재배되었던 신작물입니다.
기록에는 영조 때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조엄에 의해 1763년에 전래되어 재배되었다고 남겨져 있어요.
③ 장용영은 조선 후기 정조 때 설치된 왕의 친위 부대입니다.
④ 천리경은 망원경으로, 조선 후기에 전래되었습니다.
17세기 무렵 중국에 간 사신들은 베이징에 있던 서양인 선교사들과 교류하며 서양의 과학 서적과 천리경, 자명종
등의 문물을 들여왔습니다. 특히, 인조 때 정두원은 화포, 천리경(망원경), 자명종 등을 전하였어요.
⑤ 동의수세보원(1894)은 19세기에 이제마가 편찬한 의학서입니다.
이제마는 이 의학서를 통해 사상 의학을 확립하였는데, 이는 사람의 체질을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 4가지로
구분하여 치료하는 체질 의학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24회 고급 17번 문제
17. 세종(1418~1450)의 업적 답②
'대명력, 수시력, 회회력 등을 참고하여 칠정산 내편과 외편을 편찬하도록 하였다.'라는 내용이 나타나 있네요.
우리나라 서울을 기준으로 하는 역법서인 칠정산을 만든 것은 조선 세종 때입니다.
세종 때에는 중국의 수시력과 아라비아의 회회력 등을 참고로 하여 칠정산이라는 역법서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울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정확하게 계산한 역법서였습니다. 세종 이전 사용한 수시력은 중국을 기준으로 하여 만들어진 역법서이기에 우리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어요.
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태종 때인 1402년에 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지도이자 현존하는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 지도입니다.
② 삼강행실도는 세종 때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 등의 행적을 그림과 함께 설명을 붙여 편찬한 윤리서입니다.
③ 동국문헌비고는 영조 때(1770) 조선의 문물제도를 분류 ·정리한 백과전서적인 책입니다.
④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은 성종 때 편찬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군현의 연혁, 지세, 인물, 풍속, 산물, 교통 등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으며, 이를 보충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중종 때 편찬되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⑤ 동국통감은 조선 성종 때에 편찬하였습니다(1485)
이 책은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편년체 통사로서, 서거정 등이 편찬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1
20회 고급 32번 문제
32. 세종 시기의 문화 동향 답⑤
세종 시기의 정치, 경제 , 사회제시된 자료에서 설명하는 농서가 무엇인지 알아야겠네요.
제시된 자료의 내용에 '정초와 변효문이 정리해 편찬', ‘농민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풍토에 맞는 농법을 보급하기 위해 편찬’이라는 내용을 통해 세종 때 편찬한 “농사직설(1429)”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세종 때의 문화 동향을 찾으면 되겠네요.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고 이와 관련한 서적을 편찬하였으며, 유교 윤리를 보급하기 위해 "국조오례의"를 편찬하기 시작하였고(성종 때 완성), "삼강행실도"와 "효행록" 등 다양한 서적을 편찬하였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부국강병과 민생 안정을 위하여 과학 기술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국가의 장려와 지원을 받으며 천문학, 농업과 관련된 각종 기구가 발명, 제작되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강우량을 측정하는 기구인 측우기를 제작하였고, 시간 측정 기구로 물시계인 자격루와 해시계인 앙부일구를 만들었으며, 풍향을 재는 풍기구, 물높이를 재는 수표, 천체 관측 기구인 혼천의, 간의 등도 만들었습니다. 또한, 토지 측량 기구인 인지의와 규형을 제작하여 토지 측량과 지도 제작에 활용하였어요.
그리고 신기전 등의 새로운 무기도 만들었습니다.
또한, 중국의 수시력과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참고로 하여 서울을 기준으로 한 칠정산이라는 역법서를 만들었습니다.
의학에서도 우리 풍토에 알맞은 약재와 치료 방법을 개발, 정리하여 향약집성방을 편찬하고, 의방유취라는 의학 백과 사전을 간행하였습니다.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농업 기술과 농기구를 개발하여 민간에 보급하였는데, 당시 편찬한 '농사직설'은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씨앗의 저장법, 토질의 개량법, 모내기법 등 농민의 실제 경험을 종합한 농업 기술서였죠.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동국정운" 등의 한글 서적과, "육전등록(법전)", "고려사(역사서)", "신찬팔도지리지(지리서)", "총통등록(화약 무기의 제작과 사용법 정리)" 등 다양한 서적을 편찬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적을 인쇄하는데 필요한 활자 주조에도 힘써 구리로 갑인자라는 금속활자를 주조하였으며, 식자판을 조립하는 방법을 창안하여 종전보다 두 배 정도의 인쇄 능률을 올렸습니다.
ㄱ - 향약구급방은 고려 때인 1236년(고종 23)에 간행한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의서입니다.
세종 때는 우리 풍토에 알맞은 약재와 치료 방법을 정리한 향약집성방을 편찬하고, 의방유취라는 의학 백과 사전을
간행하였습니다.
ㄴ - 진경 산수화는 조선 후기에 유행하였습니다.
ㄷ - 세종 때에 만든 칠정산은 중국의 수시력(고려 충선왕 때 채용)과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참고해 만든 역법서입니다.
이는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울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정확하게 계산한 것이죠.
ㄹ - 삼강행실도는 세종 때에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 등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을 붙여 편찬한
윤리서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ㄷ, ㄹ로 묶인 ⑤번입니다.
19회 고급 21번 문제
21. 조선 초기 과학 기술의 발달 답②
조선 초기인 15세기에는 민족적·실용적인 성격의 학문이 발달하여 다른 시기보다 민족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습니다.
특히, 세종 때를 전후한 이 시기의 과학 기술은 우리나라 역사상 특기할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15세기 집권층으로 당시 문화를 주도한 관학파 계열의 관료와 학자는 성리학을 지도 이념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성리학 이외의 학문과 사상이라도 중앙 집권 체제의 강화나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는 과학 기술과 실용적 학문을 중시하여 국가적 차원의 지원을 하였기에 크게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천문 분야에서 태조 때 고구려의 천문도를 바탕으로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돌에 새겼습니다(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그리고 서역과 중국의 과학 기술을 수용하여 천문학, 농업과 관련된 각종 기구를 발명, 제작하였습니다.
세종 때 천체 관측 기구로 혼의와 간의를 제작하고, 시간 측정 기구로 물시계인 자격루와 해시계인 앙부일구 등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어(1441) 전국 각지의 강우량을 측정하였고, 토지 측량 기구인 인지의와 규형을 제작하여 토지 측량과 지도 제작에 활용하였습니다.
세종 때에는 중국의 수시력과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참고로 하여 칠정산이라는 역법서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울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정확하게 계산한 역법서였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국방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의 하나로 많은 병서를 편찬하였고, 각종 무기 제조 기술도 발달하였습니다.
세종 때에는 화약 무기의 제작과 그 사용법을 정리한 “총통등록”을 편찬하였고, 문종 때에는 김종서의 주도하에 고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전쟁사를 정리한 “동국병감”을 간행하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병장도설”도 편찬되어 군사 훈련의 지침서로 사용하였어요.
화약 무기의 제조에도 힘써 조선 초기에는 사정거리가 최대 1000 보에 이르는 화포를 만들었어요. 또한, 바퀴가 달린 화차는 신기전이라는 화살 100개를 잇따라 발사할 수 있었습니다.
병선 제조 기술도 발달하여 태종 때에는 거북선을 만들었고, 작고 날쌘 비거도선이라는 전투선을 제조하여 수군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습니다.
① 세종 때에 천체 관측 기구로 혼천의를 제작하였습니다(1432).
② “동의수세보원”은 19세기에 이제마(1938~1900)가 저술(1894)한 의학서입니다.
이제마는 이를 통해 사상 의학을 확립하였는데, 이는 사람의 체질을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으로 구분하여 치
료하는 체질 의학 이론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우리 풍토에 맞은 약재와 치료 방법을 개발, 정리하여 “향약집성방”을 편찬하고, “의방유취”라는 의학
백과사전을 간행하였습니다.
③ 세종 때의 금속 활자와 인쇄술 발달 모습입니다.
태종 때에는 주자소를 설치하고 구리로 계미자를 주조했으며, 세종 때에는 구리로 갑인자를 주조하였습니다(1434).
세종 때에는 인쇄 기술도 더욱 발전하여 종전에는 밀랍으로 활자를 고정시키는 방법 대신 식자판을 조립하는 방법을
창안하여 종전보다 두 배 정도의 인쇄 능률을 올릴 수 있었어요.
④ 세종 때 화약 무기인 비격진천뢰(1435)를 발명하고, 화차에서 발사할 수 있는 신기전을 제작하였죠(1448).
⑤ 세종 때 편찬된 농사직설(1429)은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씨앗의 저장법, 토질의 개량법, 모내기법 등 농민의 실제 경
험을 종합한 농업서입니다.
따라서 이번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조선 전기의 과학 기술
1. 과학 기술
① 발달 배경: 부국 강병과 민생 안정을 위한 국가적 지원, 서역 및 중국의 과학 기술 수용
② 인쇄술: 계미자, 갑인자 등 정교한 금속 활자 제작, 제지술 발달로 출판 문화 수준 향상
③ 천문 : 천체 관측 기구(혼의, 간의), 시간 측정 기구(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제작, 사용
④ 토지 측량 : 인지의, 규형 제작 → 양전 사업과 지도 제작에 활용
⑤ 수학: 천문학, 토지 조사, 조세 수입 계산 등의 필요 → 「상명산법」, 「산학계몽」
⑥ 역법: 칠정산(중국과 아라비아 역법을 참고로 오차를 수정, 한양을 기준으로 제정)
⑦ 무기 제 : 화약 제조술의 발달로 화포와 화차 제조, 전투선인 거북선 제작
⑧ 침체: 16세기 이후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한 사림파의 과학 기술 경시 경향으로 점차 침체
2. 과학 서적
① 농서: 「농사직설」(농부의 실제 경험을 종합하여 우리 풍토에 맞는 농법 소개), 「금양잡록」
② 병서: 「진도」(전술과 부대 편성 방법), 「병장도설」(군사 훈련 지침서), 「동국병감」(전쟁사)
③ 의서: 「향약집성방」(우리 풍토에 맞는 약재와 치료 방법 정리), 「의방유취」(의학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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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회 고급 18번 문제
18. 세종 때 만들어진 문화유산 답①
세종 시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문제는 정말 많이 출제되죠?
이 문제는 세종 때 만들어진 과학기구를 알아보는 것이네요.
문제에 세종 때라고 나와 있으니 어느 시기인자 파악해서 찾는 문제보다는 훨씬 쉬운 문제입니다.
세종 시기 때 과학기구를 다 몰라도 정약용이 제작한 거중기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으니 답을 찾기는 어렵지 않은 문제입니다.
조선 초 세종 때를 전후한 이 시기의 과학 기술은 우리 나라의 전통적 문화를 계승하면서 서역과 중국의 과학 기술을 수용하여 훌륭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특히, 천문학, 농업과 관련된 각종 기구를 발명, 제작하였다. 천체 관측 기구로 혼의와 간의를 제작하고, 시간 측정 기구로 물시계인 자격루와 해시계인 앙부일구 등이 만들었습니다.
또한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어(1441) 전국 각지의 강우량을 측정하였고, 토지 측량 기구인 인지의와 규형을 제작하여 토지 측량과 지도 제작에 활용하였습니다.
새로운 역법서로 칠정산을 만들었는데, 이는 중국의 수시력과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참고로 하여 만든 역법서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울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정확하게 계산한 것이랍니다.
그리고 바퀴가 달린 화차를 만들었는데 이는 신기전이라는 화살 100개를 잇따라 발사할 수 있는, 일종의 첨단 무기였습니다.
① 정조 때 정약용이 만든 거중기로 수원 화성 건설에 사용하였습니다.
② 한번에 수십발의 화살(신기전)을 날려 보낼 수 있었던 화차입니다.
③ 장영실이 만든 앙부일구(해시계)입니다.
④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던 천문 관측기 혼의입니다.
⑤ 비의 양을 측정하던 측우기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12회 고급 41번 문제
41. 1만원권 동안에 나타난 여러 가지 사실 파악 답③
이 문제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카페에서 진행한 12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난이도 조사에서 체감적으로 가장 어려운 문제로 뽑혔네요.
사실 답은 그리 어렵지 않은데 말이죠.
그럼에도 이 문제가 어렵게 느껴졌던 가장 큰 이유는 교과서에서 배우는 이외의 내용까지 포함하여 묻는 문제였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은 유적지, 유물과 관련한 문제들이 꼭 출제됩니다.
어떤 것은 교과 내용을 통해 배운 것들이고, 또 어떤 것들은 배우지는 않았지만 궁궐이나 유적지 답사, 책 등을 통해 접할 수 있었던 것들에 대한 문제들이죠.
경복궁, 창덕궁, 그리고 이 문제에 출제된 여주 영릉, 일월오봉도 등은 교과서에서는 배우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내용이었습니다.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었겠지만 이제부터라도 알아두시고, 앞으로도 여행지에서 접하는 문화재나 TV나 책 등을 통해 접하는 문화유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 문제지에서 잘 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곶 됴코 여름하나니
새미 기픈 므른 가마래 아니 그츨쌔, 내히 이러 바라래 가라니'입니다(다 나와 있지는 않지만...^^;).
이는 세종 때 한글을 창제하고 보급하기 위하여 지어졌던 용비어천가 2장의 내용입니다.
용비어천가는 조선왕조의 창업을 기리기 위해 지은 서사시로, 한글로 기록된 최초의 작품(악장 문학)입니다.
국어 시간, 고전 시간에도 배웠을 겁니다.
㉡ 일월오봉도입니다.
일월오봉도는 해, 달, 다섯 봉우리, 소나무, 폭포 등이 그려진 그림으로, 조선 시대에 왕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일월오봉도는 중국이나 일본 등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오직 우리나라 조선 시대에만 있었던 것입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 용상(왕이 앉던 의자) 뒤에 일월오봉도가 있음을 잘 알 수 있죠?
㉣ 혼천의는 천체의 운행과 위치 등을 관측하던 기구로, 우리나라에서는 세종 때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만원권에 있는 혼천시계는 현종 때(1669) 관상감 교수였던 송이영이 제작한 것입니다.
이 혼천시계는 혼천의에 자명종의 원리를 이용하여 추(錘)를 시계 장치의 동력으로 이용하였습니다.
㉤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조선 태조 때 고구려의 천문도를 바탕으로 하늘의 별자리를 돌에 새긴 것(천상열차분야지도 각
석)이죠.
③ 석실 대신 회격을 사용한 광릉(경기도 남양주)은 세조의 왕릉입니다.
광릉 수목원하면 잘 아시죠? 그 안에 있답니다.
㉢은 만원권에 들어간 인물로 세종이죠.
세종의 무덤은 경기도 여주에 있는 영릉(英陵)입니다.
조선시대 왕릉에 내용은 <시험전 꼭보기>방에 올려져 있으니 자세하게 읽어보세요.
다음 링크를 클릭하시면 바로 볼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hankuksalove/jPxr/33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11회 고급 19번 문제
19. 조선 초기의 과학 기술의 발달 답④
문제에 제시된 기구 각각 무엇인지 모르더라도 첫번째 자료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죠?
네...만원짜리 지폐 뒷면에 보면 거기 들어가 있는 그림입니다.
만원짜리 인물이 세종, 거기 들어간 이 과학기구는 바로 혼천의입니다.
나머지는 혼천의를 간략하게 만든 간의인 것 같습니다.
세종 때에는 천체 관측 기구로 혼의와 간의를 제작하고, 시간 측정 기구로 물시계인 자격루와 해시계인 앙부일구 등을 제작하였습니다.
그럼 세종 때, 아니 시기라고 한정지었으니 조선 전기 정도까지 폭넓게 봐야겠네요.
① 고려 시대에 발명되어 사용된 금속 활자는 조선 초기에 이르러 더욱 개량되었습니다.
태종 때에는 주자소를 설치하고 구리로 계미자를 주조하였으며, 세종 때에는 구리로 갑인자를 주조하였는데,
이는 글자 모습이 아름답고 인쇄에 편리하게 만들어졌답니다.
세종 때에는 밀랍 대신 식자판을 조립하는 인쇄 방법을 창안하여 종전보다 인쇄 능률을 올렸습니다.
② 조선 초기에 만든 바퀴가 달린 화차는 신기전이라는 화살 100개를 잇따라 발사할 수 있는 신무기였습니다.
병선 제조 기술도 발달하여 태종 때에는 거북선을 만들었고, 작고 날쌘 비거도선이라는 전투선을 제조하였습니다.
③ 세종 때에 만든 칠정산은 중국의 수시력과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참고로 하여 만든 역법서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울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정확하게 계산한 것입니다.
천문 분야에서는 태조 때 고구려의 천문도를 바탕으로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돌에 새기기도 했어요.
④ 농가집성은 조선 후기에 신속이 저술한 농서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농사직설, 금양잡록 등 농서를 간행, 보급하였습니다. 농사직설은 우리 나라 풍토에 맞는 씨앗의
저장법, 토질의 개량법, 모내기법 등 농민의 실제 경험을 종합하여 편찬한 농서입니다.
⑤ 세종 때는 우리 풍토에 알맞은 약재와 치료 방법을 개발, 정리한 향약집성방을 편찬하고,
의방유취라는 의학 백과 사전을 간행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9회 고급 43번 문제
43. 세종 시기의 문화 답③
문제에 주어진 자료에 강우를 측정하는 기구라는 내용이 나타나 있으니 (가)는 측우기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측우기를 처음 제작한 시기는 세종(1418~1450) 때입니다.
그럼 세종 때의 문화에 대해 살펴보면 되겠네요.
우리나라 역사에서 세종 때만큼 문화가 발달한 시기는 없었을 겁니다.
세종은 백성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통해 한글(훈민정음)을 창제하였습니다.
한글을 보급하기 위해 각종 한글 서적을 편찬하였으며, 행정 실무에도 이용하였으며(행정 실무를 담당한 서리들에게 한글을 시험하여 채용하기도 하였다), 국왕이 언문 교지를 내리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교 윤리를 보급하기 위해 "국조오례의"를 편찬하기 시작하였고(성종 때 완성), "삼강행실도"와 "효행록"을 편찬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와 맞는 역법을 만들기 위해 원의 수시력과 명의 대통력을 참조로 하여 칠정산 내편을, 아라비아 회회력을 참조하여 칠정산 외편을 만들었습니다.
수시력은 서울을 기준으로 하였다는 점에 특징이 있습니다.
세종 시기에는 과학기술도 꽃을 피웠습니다.
세계 최초로 강우량을 측정하는 기구인 측우기를 만들었으며, 장영실로 하여금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게 하였습니다.
해시계인 앙부일구도 제작하였으며, 풍향을 재는 풍기구, 물높이를 재는 수표, 천체 관측 기구인 혼천의, 간의 등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신기전 등의 새로운 무기도 만들었습니다.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등의 의서,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동국정운" 등의 한글 서적과, "육전등록(법전)", "고려사(역사서)", "신찬팔도지리지(지리서)", "농사직설", "총통등록(화약 무기의 제작과 사용법 정리)" 등 다양한 서적을 편찬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적을 인쇄하는데 필요한 활자 주조에도 힘써 경자자, 갑인자, 병진자, 경오자 등을 주조하였는데, 이 중 구리로 만든 갑인자는 아름답고 인쇄에 편리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인쇄술도 발달하여 식자판을 조립하는 방법을 창안하여 종전보다 두 배 정도의 인쇄 능률을 올렸습니다.
① 세종 때에는 서적 편찬 작업이 활발하였기 때문에 인쇄술이 발달하였고 그에 필요한 활자 주조도 활발하였어요.
활자는 인쇄에 필요한 글자인데, 갑인자도 세종 때 주조된 활자 중 하나입니다.
② 여민락은 세종 때 ‘용비어천가’ 의 일부를 가사로 만들어진 아악이었습니다.
③ "훈민정음운해"는 조선 후기인 1750년(영조 26) 신경준이 저술한 한글 음운 연구 서적입니다.
④ 세종 때 정초 등이 편찬한 "농사직설"은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씨앗의 저장법, 토질의 개량법, 모내기법 등 농민의 실
제 경험을 종합하였습니다.
⑤ 세종 때는 우리 풍토에 알맞은 약재와 치료 방법을 개발, 정리하여 "향약집성방"을 편찬(1433)하였어요.
또한 "의방유취"라는 의학 백과사전을 간행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7회 고급 25번 문제
25. 조선 초기 민족 문화의 발달 답②
제시된 자료 왼쪽은 태종 때 만들어진 천상열차분야지도, 오른쪽은 세종 때 만들어진 일성정시의(남과 밤의 시간 측정 기구)입니다.
따라서 두 기구 모두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이니 이때의 문화 모습을 생각하며 문제를 풀면 되겠네요.
조선 초기에는 과학 기술이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특히, 세종 때를 전후한 이 시기의 과학 기술은 우리나라 역사상 특기할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집권층이었던 관학파는 부국강병과 민생 안정을 위하여 과학 기술이 중요하다고 인식하였습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과학 기술은 국가적 지원을 받아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죠.
① 조선 초기에는 민족적이면서 실용적인 성격의 학문이 발달하여 다른 시기보다 민족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습니다.
훈민정음이 창제되었고, 우리 실정에 맞는 농업서적(농사직설), 역법(칠정산)을 비롯해 실용적인 과학 기구와 기술이
발달하였어요.
② 조선 후기의 문화적 특징이죠.
조선 후기에는 서민들이 향유하는 한글소설, 판소리, 민화 등이 유행하였습니다.
③ 조선 초기의 과학 기술 발달 배경은 부국 강병과 민생 안정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④ 건국 초에는 관학파가 정치를 주도하였으며, 이들이 문화 발달에 기여하였습니다.
⑤ 조선 초 세종 때의 모습입니다.
우리 풍토에 알맞은 약재와 치료 방법을 개발, 정리한 향약집성방을 편찬하고, 의방유취라는 의학 백과 사전을 간행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6회 고급 17번 문제
17. 조선 초기 세종 때의 민족 문화 발달 답①
제시된 자료가 강우량을 측정하던 측우기라는 것은 다 알고 있을 겁니다.
이 기구는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 기구로, 세종 때인 1441년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럼 세종 때의 문화 모습을 찾으면 되겠네요.
세종 때에는 과학 기술을 장려하여 천문학, 농업과 관련된 각종 기구를 발명, 제작하였습니다. 천체 관측 기구로 혼의와 간의를 제작하고, 시간 측정 기구로 물시계인 자격루와 해시계인 앙부일구 등이 만들었죠. 측우기를 만들어 전국 각지의 강우량을 측정하였고, 토지 측량 기구인 인지의와 규형을 제작하여 토지 측량과 지도 제작에 활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수시력과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참고로 하여 서울을 기준으로 한 칠정산이라는 역법서를 만들었습니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고 이와 관련한 서적을 편찬하였으며, 유교 윤리를 보급하기 위해 다양한 서적을 편찬하였습니다. 서적의 편찬을 위한 활자와 인쇄술 개발에도 힘써, 구리로 갑인자라는 금속활자를 주조하였으며, 식자판을 조립하는 방법을 창안하여 종전보다 두 배 정도의 인쇄 능률을 올렸습니다.
① 갑인자는 1434년(세종 16) 갑인년에 주자소에서 구리로 만든 금속활자입니다.
갑인자를 바탕으로 밀랍 대신 식자판을 조립하는 방법을 창안하여 인쇄 능률을 향상시켰어요.
② 향약구급방은 고려 때인 1236년(고종 23)에 간행한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의서입니다.
③ 조선 후기 실학의 발달기에 나타난 모습입니다.
이 시기에는 서양 기술을 이용해 정약용이 거중기를 만들어 화성 축조 등에 유용하게 사용하였습니다.
④ 동국문헌비고는 영조 때(1770) 조선의 문물제도를 분류 ·정리한 백과전서적인 책입니다.
⑤ 예학이 크게 발달한 시기는 양난 직후인 17세기입니다.
이 시기는 양난으로 인하여 흐트러진 유교적 질서의 회복이 강조되면서 예가 중시되어 사회를 이끌어 가는 하나의 방
도로서 부각되었습니다. 이처럼 예학 연구가 심화되면서 각 학파 간 예학의 차이는 전례 논쟁을 통하여 표출되었으며,
예송은 그 대립의 정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6회 고급 19번 문제
19. 삼강행실도의 편찬 목적 답①
제시된 책만 보고 맞추기 힘들 수도 있지만 답지들이 헛갈릴만한 게 없네요.
조선 시대에는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윤리와 의례에 관한 서적의 편찬 사업이 이루어졌어요. 세종 때에는 고려 말에 효행에 관한 기록을 모아 편찬하였던 "효행록"을 설순의 주도로 보충, 개정하여 편찬하였습니다. 그리고 설순의 주도 하에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 등 각각 35명씩 모두 105명을 뽑아 그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설명을 붙여 윤리서인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였습니다(1434).
성종 때에는 세종 때부터 편찬을 시작한 국가의 여러 행사에 필요한 의례를 정비한 의례서인 국조오례의를 편찬하였어요.
한편, 16세기에는 사림이 "소학"과 "주자가례"의 보급과 실천에 힘쓰면서 "이륜행실도"와 "동몽수지" 등을 간행하여 보급하였습니다. "이륜행실도"는 연장자와 연소자, 친구 사이에서 지켜야 할 윤리를 강조한 책이며, "동몽수지"는 어린이가 지켜야 할 예절을 기록한 윤리서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2회 1급 28번 문제
28. 조선 초기(세종) 의 농법서 답④
제시된 자료의 (가)에 들어갈 농서는 ‘농부들의 경험한 바를 바탕으로 우리 풍토에 맞는 곡식을 심고 가꾸는 법’을 정리한 농업 기술 서적이겠네요.
이는 세종 때 편찬한 “농사직설(1429)”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농사직설(1429), 금양잡록 등 농서를 간행, 보급하였습니다. 특히, 농사직설은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씨앗의 저장법, 토질의 개량법, 모내기법 등 농민의 실제 경험을 종합하여 편찬한 농업 서적이었습니다.
ㄷ - “농사직설”은 농업 백과 사전은 아니었습니다.
농업 백과 사전적인 대표적인 책은 조선 후기에 신속이 저술한 “농가집성(1655)”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책에는 “농사직설”의 증보 내용과 “금양잡록”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ㄱ, ㄴ, ㄹ로 묶인 ④번입니다.
효율적인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공부법
카페에서 추천하는 부담 없는 [한권으로 끝내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교재로 중요내용을 공부하고
마지막으로 카페에 올려진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출문제해설을 꼼꼼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29회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국사사랑방/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국사능력검정시험기출문제/한국사기출문제해설/
한국사능력검정시험난이도/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권으로끝내는한국사능력검정시험
첫댓글 키워드는
언문-삼강행실이네요^^
언문은 즉 훈민정음을 뜻하니
이 새로운 글자로
갑인자라는 새 활자를 개발하죠.
삼강행실은 삼강행실도 편찬으로
이어졌구요^^
제가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은 것 같네요...시작 전부터 겁이 나지만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문제를 풀 때 접근방법에서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21번 처음 문제를 보고 바로 설총- 원효- 원효 때 왕들 이런식으로 접근했는데 역시나 답을 틀렸네요...
지문을 더 주의깊게 읽도록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처럼 문제받고 조급한 마음에 대충읽고 푸는 습관을 들인 분들도 계시겠죠..?
세종시기 과학, 농업, 문화 많은 업적을 잘 정리해서 공부해야겠습니다.
정말 자세하네요~! 좋은 정보입니당!
한국사 문제가 이런 방식으로 나온다는 걸 덕분에 처음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단 전체 한국사 흐름부터 아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제를 보니.. 흐름도 중요하지만, 각각의 사실들을 명확하게 외우고 있어야 하고, 그냥 지역 이름을 외울 것이 아니라 지도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 등등을 알고 있어야 문제를 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양을 어떻게 외우지 하고 겁도 납니다..하지만 올려주신 해설을 보면서 문제를 보니, 차근차근 문제를 맞추는 재미, 성취감이 조금씩이지만 벌써 느껴집니다! ><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아직 공부전이라 난이도가 굉장히 높아보이네요 더 열심히 해서 한국사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수있었으면좋겠습니다^^ 지문을 자세히 읽고 작은것하나 놓치지 않는 습관을 길러야 겠어요~
보다보니 빠져드네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세종시대에 많은 문제가 기출이 되서 평이한 문제도 있지만 아주 디테일한 문제가 나오면
쉽게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도 출제되는 것 같아요
댓글은
감사합니다....라는 글은 달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문제에 대한 난이도, 자료 등에 대한 느낌이나
개인적인 문제풀이 접근법 등을 달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유의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댓글 단 분은 등업 안됩니다.
해설이 잘되어있어서 개념정립이 잘됩니다.
세종때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과 왕권강화에 대한 문제가 많은데..
훈민정음만 생각하다가 갑인자 활자인쇄술 이라고 하니 헤깔렸지만.. 맞추었네요 ㅋㅋ
나머지 답글이 아니였기에..
그래도 좀더 노력해야 겠습니다.
사실 동영상 강의로 한번 대충 들은 것이 전부이기에
분명 들었던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고 또한
한국사 대표 유형인 그 시기에 일어난 일을 묻는
문제로 확실히 알아야 하는 까다로운 문제 같습니다
앞으로 공부를 할 때 그 시기에 일어난 일들을
확실히 체크하며 공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세종시기에 이루어진 일들이 워낙에 많아 내용을 따라가기도 힘들정도네요 존경합니다
문제 하나에 해설된 이론을 공부하면 수많은 개념들을 한번에 정리할 수 있어 그 뒤에 풀 수 있는 문제들이 배로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세종대왕이 왜 세종대왕인지 알듯해요. 조선전기에 세종의 업적이 관여안되는게 없네요
선택지 하나하나에 답이 왜 아닌지까지 쓸 수 있어야 진짜 실력자인데..
저는 그냥 답에 대한 것만 알겠네요.
시험이 코 앞인데 불안하기만 합니다.
세종시대때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관련문제를 선지와 함께 정리해주셔서 세종관련 지식이 다 쌓이는 것 같습니다. 선지 볼때 그 틀린 이유도 적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ㅎㅎ
제가 세종대왕님을 존경해서 세종대왕님 부분은 조금더 열심히 공부했는데 그래서인지 이 문제는 한번에 풀었네요. 그래도 해설을 보니까 더 많이 자세히 알게되는것 같습니다. 해설 감사합니다.
아직 봐도 모르겠네요ㅠㅠ 노력해야겠어요
감사합니다
이런 댓글은 등업 안된다고 안내되어 있습니다....!!!
왜 답이 아닌지, 선택지마다 어느 시기의 어떤 왕의 업적인지 다 알 수 있어야 할텐데 저는 아직 모르겠네요ㅠㅠ남은 기간동안 더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좋은정보 감사드려요
오답이 단순히 정답이 아니라서 오답이다. 가 아니라 오답 4개의 각 해설과 그와 연관된 다른 문제까지 연상가능하게 설명되어 있어서 복습이 2배로 되네요.
세종대왕님 업적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있다고 생각했는데ㅠㅠㅠㅠ 문제 풀어보니 아직 멀었네요... 새로운 정보들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ㅜㅜ
세종대왕님의 업적 및 그 시기에 경제 문화 및 외세 역시 알아야 된다는 점에서 심층적인 이해가 필요하겠네요.
이거보는데 시간이꽤걸리네여ㅜ 그래도 한문제 이상 건져간느낌ㅎ
감사합니다! 이렇게 풀이되어져있으면 좋겠네요
세종대왕님의 업적이 참많기 때문에 계속해서 문제로 출제 되는것같습니다. 세종대왕님의 업적과 관련된 여러 문제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고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공부해야되는지 알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