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 3대째 전통대장간 운영 강영기씨 父子
"망치로 두드려 만든 물건은 기계로 찍은 것과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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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동 '동명대장간'의 하루
출처: 하늘나라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나라
66㎡(20평) 남짓한 대장간은 새로 들어선 주상복합 건물과 오래된 옷가게들이 뒤섞여 있는 천호동 뒷골목에 자리하고 있다. 겉에서 보면 일반 철물점과 비슷하지만, 안은 조그마한 화로와 쇠로 된 모루가 있는 옛 대장간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날씨인데 난들 덥지 않겠소. 그래도 내 일이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거지."
◆풀무질하는 아버지 보며 대장장이로 성장
강씨의 아버지는 1930년대 말 천호동(옛 광주군 곡교리)에 대장간을 세우고 뿌리를 내렸다. 매일 뜨거운 불과 싸우던 아버지를 보고 자란 강씨는 13살인 1964년부터 부친을 도와 어깨너머로 대장일을 배웠다.
"쇳덩이를 달구고 두드려 여러 물건을 만드는 작업이 재미있어 보였어요. 자꾸 해보고 싶다고 아버지께 졸랐죠. 대장장이를 천하게 여겼지만, 결국 허락을 받았죠."
대장일은 녹록지 않았다. 풀무질을 하며 너무 바람을 세게 넣어도 안 되고, 엉뚱한 모양으로 쇠를 두드리다 혼나기 일쑤였다. 망치질을 잘못하다 손가락을 찧기도 다반사였다. 그의 오른손 중지와 약지, 왼손 검지는 숱한 망치질로 단단해져 이제는 잘 구부러지지도 않는다.
그는 1979년 아버지 가게를 본격적으로 물려받았다. "밤낮없이 일했어요. 하루에 호미나 낫, 괭이 등을 100여개 만들었어요. 그때부터 건축붐이 일어 철근 자르는 도구, 목공 도구, 망치 등이 만들기 무섭게 팔렸죠."
강씨는 공장에서 만든 호미나 낫, 괭이 등을 도매로 떼어다 철물점 식으로 팔기도 하지만, 쇠를 뜨겁게 달궈 망치질하는 작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풀무질을 하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자꾸 생각났어요.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방식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재래식 담금질 고집
대장간은 IMF 경제위기로 직격탄을 맞았다. 근근이 이어오던 대장간들이 속속 문을 닫거나, 현대식 제작소·공작소·철공소로 업종이 바뀌었다. 천호동에 있던 대장간 3곳도 이때 없어졌다.
가뜩이나 장사도 잘 되지 않는 데다,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어렵게 마련한 149㎡(45평)짜리 단독 주택이 압류되기도 했다. 이 와중에 유방암에 걸린 아내 간호를 하던 강씨도 위암에 걸려 가게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이때 아들 단호씨가 나섰다.
단호씨는 전문대 건축과를 나와 취직한 건설회사를 그만두고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아버지 밑에서 대장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가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결국 승낙했다"며 "어렵고 힘들어도 요즘 찾아보기 힘든 기술을 가지고 있고, 직접 가게를 꾸리는 나를 친구들도 부러워한다"고 말했다.
강씨 부자(父子)의 솜씨를 알아주는 손님들은 3대째 이어지는 가게의 단골이 됐다. 최근에는 주말농장을 일구는 손님들이 많아졌다. 시중에서 1000원 하는 중국산 호미의 두 배 가격이지만, 여기서 만든 농기구와 건축 도구는 알음알음으로 소문이 나 전국 각지에서 찾을 정도다. 강영기씨는 "여기서 만든 농기구들을 경기도나 호남, 경남까지 택배로 부친다"며 "미국에 호미 100개를 수출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방송국 사극 소품을 만들어달라는 주문도 여러 번 있었으나, 일반 손님을 위한 호미와 괭이, 망치 등을 만드는 것이 더 좋아 거절했단다.
아버지가 말했다. "내가 만든 물건을 써본 손님들이 '기계로 찍은 물건은 영 못쓰겠다'며 다시 찾을 때 보람을 느껴요." 아들이 대꾸했다. "할아버지·아버지의 가업(家業)을 장인정신으로 이어받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제 아이가 커서 이 일을 하고 싶어하면 100년 넘게 이어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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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 3대째 전통대장간 운영 강영기씨 父子
"망치로 두드려 만든 물건은 기계로 찍은 것과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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