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 장날
*류 근 홍
멀리서 보아도 오늘이 장날이다.
장터 주변이 장날의 열기로 후끈하다. 벌써 주차장으로는 차량들이 줄을 잇는다. 예전에는 이른 새벽 천막들이 먼저 5일장을 알렸는데...
초여름 5월임에도 벌써 한여름 같은 무더위에 진천 5일장을 찾았다.
충북의 중심부에 위치한 진천은 예로부터 많은 고사(故事)와 신화적 전설을 간직한 전통고장이며, 지리적으로 내륙의 교통요지이다.
자연재해가 없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비옥한 토지, 후덕한 인심이 잘 어우러진 사람과 자연의 조화로 참 살기 좋은 고장이다. 그러기에 진천하면 생거진천(生居鎭川)이요, 농다리(籠橋)와 진천쌀과 참숯으로도 아주 유명하다.
진천 장은 진천읍내 중심인 백곡천 둔치에서 오래전 옛날부터 보부상들에 의해 대대로 자연형성 된 전형적인 시골장이다.
이후 2015년경 현대화된 지금의 새로운 장소로 이전하였단다. 과거 시골스러움의 운치와 충청도 전통의 정겨움인 느림의 여유가 다소 시대에 밀리면서, 순수 전통재래시장으로서의 아쉬움은 있다. 물론 재래와 전통에도 생존을 위한 변화와 발전의 조화는 필요하다.
시골 전통 5일장은 그 지역의 삶의 현장으로 문화이면서 역사이기에, 전통재래시장의 활성화는 곧 새로운 미래의 전통이며 문화이다.
대부분의 시골 5일장은 그 지역 특유의 토속적인 색깔과 향기가 있다. 볼거리, 먹을거리, 즐길거리, 느낄거리, 대화거리 등이 어우러져 옛날 어릴적 도떼기시장의 향수와 추억을 되살리기에는 충분하다. 그래서 시골의 5일장은 지역 사람들이 정과 흥을 북돋우고 베푸는 장(場)이며, 어울림의 한마당으로 서로가 삶을 함께 나누는 훈훈한 인심의 현장이다.
진천 5일장도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허술한 듯 세련되고, 복잡하고 무질서해 보이지만, 푸짐하고 소소한 자연스러움이 정겹다. 어쩌면 다소의 불편함이 오히려 시골 5일장만의 커다란 매력이고, 정취이며 시골향기가 아닐는지? 그래서 시골 5일장은 그 지역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세상살이 이다.
오늘은 초여름의 장인지라 각종 모종과 묘목, 채소들로 풍성하다.
장날은 장사꾼들의 특유한 몸동작과 능숙한 표정연기 그리고 호객을 위한 걸죽한 목소리의 상품선전, 풍성한 사투리의 말잔치로 밀고 당기는 흥정의 짜릿한 긴장감, 그래서 시장은 바로 우리들의 진솔한 삶의 현장(現場)이다.
장날에는 시장안 사람들 모두가 처음인데도 친숙하며, 모르면서도 다 아는 듯 서로를 우리네 식구들이라고 한다.
시장을 한 바퀴 돌고나니, 진천군 전체를 다 돌아본 듯하다.
그래도 여전히 내손은 빈손이다. 눈과 마음으로 다 샀다.
노란 양재기의 누룩막걸리와 파전과 순대에서 풍겨나는 추억의 향기와 옛날사람 냄새, 줄서서 북적대는 호떡집, 유행도 쫓겨가는 현란한 전천후 야외 의류매장, 국밥과 잔치국수의 포장마차, 농기계, 생필품, 옛날과자 등 풍성하고 역동적이며, 현란하고도 화려하다. 없는 것 말고는 다 있고, 안되는 게 없다는 신기한 도깨비 상품의 만물상은 정말 시골 5일장의 별미이다.
한쪽 노견에 널찍하게 터 잡아 예쁜 화분 꽃을 파는 아주머니는 몰려든 사람들로 신이 났다. 이꽃 저꽃 날아다니며 묻지도 않았는데, 웃음꽃으로 대답을 한다. 꽃과 함께 살아서 그런지 꽃보다 더 밝고 환하며 상냥하다. 멀리서 보니 아줌마가 가장 큰 꽃이다.
장터 가장자리에 옛 골동품 장수 아저씨는 간이의자에 앉자 벌써부터 낮잠 삼매경이다. 골동품을 파는 건지, 낮잠을 파는 건지, 아직도 꿈나라에서 진천장을 찾아 헤매는건 아닌지?
오늘은 옛날부터 시골장의 전통같은 술주정뱅이와 품바의 약장수가 보이지 않으니 조금은 아쉽다.
좌판에 마주앉은 아주머니와 할머님들의 구수하고 느긋한 충청도 사투리의 느린 대화가 진천 5일장의 가장 멋진 특산품이다. 언뜻 오랜만에 낯익은 사투리가 반가워 돌아보며, 나도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미소로 답한다. 그렇다, 시간과 세대 차이와 공존을 함께 느낄 수가 있는 곳이 바로 시골의 장이다. 전통재래시장은 현대인의 정서적 휴식처이며, 옛 정취가 묻어나는 그 시절 삶의 애환과 혼이다. 어린시절과 옛 추억들을 되살려주는 곳이기에. 부모님이나 고향의 그리움을 달래보고 싶다면, 시골 5일장 체험을 권하고 싶다, 특히 온라인 쇼핑 세대인 젊은이들에게 말이다.
불현듯 누군가가‘취미가 시골5일장 구경하는 것’이라고 했던 생각이 난다. 그렇다. 삶의 멋과 여유와 묘미가 있는 좋은 취미이다.
이제는 점점 진천의 전통 재래시장도 국제시장화가 되어가고 있나보다.
포장마차에서 동남아 외국인 노동자들이 삼삼오오 오뎅을 맛있게 먹는다.
이제는 낯설지 않는 진천풍경이다. 이미 그들은 진천장날에 많이 익숙해져 있고 즐길 줄도 안다. 우리의 트로트 장단에 맞춰 자기나라 고유의 전통춤을 추면서 향수를 달랜다. 표정은 각자 다르지만, 아마도 그들은 지금 자신들의 고향과 가족들의 그리움이 하나 되어 서로가 위로하며, 나름 진천 장을 즐기고 있다. 보고 있는 나도 즐거워 엄지 척을 하니 몸을 더 흔든다.
전통시장 앞에서 우연히 선배부부를 만났다.
공직에서 정년퇴직 후 건강상 시골로 귀농했다는 소식이후 2년여 만이다. 대머리에 검은피부, 깊은 주름은 전형적인 촌로의 모습이다. 무척 반갑다. 백곡면에서 부부가 농촌생활에 적응 다행히 건강을 회복하여 잘 지낸다며, 벌써 진천 자랑이다. 아니 그럴 수밖에 이제는 진천이 노년고향이 아니든가
선배는 연금과 책에 의지하며 편안하게 자연과 함께 잘 지낸다며, 자신은 복 받은 사람이라고 자화자찬이다. 가면서 먹으라고 시장에서 산 도너츠와 꽈배기를 내게 나누어준다. 돌아서는데 형수는 내게 다가와 선배의 병세가 매우 안 좋다고 무겁게 귀뜸한다. 순간 나는 울컥했지만, 오히려 더 활짝 웃으면서 그 선배가 준 도너츠와 꽈배기를 양 손에 번쩍 들어 흔들면서 선배에게 다시 장난끼 어린 큰 인사를 했다. 아 그렇구나. 웃으면서도 내 마음이 무겁다. 차창으로 손을 흔드는 선배의 모습에 혹시나 이것이 하는 마음에서 내가 또 돌아본다.
오늘 진천 장은 옛날로 돌아가 어린 시절의 먼 시골 고향집을 다녀온 듯, 피곤함보다 정겹고 아쉽지만 푸근하다. 빈손임에도 마음이 풍요로움은 생거진천에서의 오늘 하루가 많이 즐거웠나보다. 선배의 건강을 기원한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