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쯤 달려 도착한 유스호스텔 건물은 꽤 컸다. 우리 단과대 말고 다른 학교에서도 온 건지 이미 건물 안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까 단톡방에서 2박 3일간의 일정을 공지해주었는데, 짧게 요약하자면 낮의 일정 조금과 밤의 술파티였다.
"지성아 너 술 잘 마시니?"
"잘 모르겠어요. 살짝?"
"잘 마시는구나."
"아니 아니!"
그냥 그럭저럭 마시는 것 같아요. 친구들이랑 마실 때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사람 중 한 명이긴 했다고 박지성은 덧붙였다. 나도 1학년이지만 지성이에게서는 뭐랄까 새내기의 패기가 보인달까.
낮 일정은 조별 게임 활동의 반복이었다. 맞힐 생각이 없었지만 상품이 치킨 두 마리라는 것을 듣고 의욕이 불타올랐다. 그건 지성이도 마찬가지였다. 얘는 노래 맞히기 게임의 신이었다. 1초 동안 들려주는 반주만 듣고 어 이거..! 하면서 정답을 속삭여줬다. 사회를 진행하는 MC 친구들은 차분히 정답을 맞히는 우리보다 먼저 손 드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었는데 그게 너무 안타까웠다.
"지성아. 너도 손부터 들어봐."
"그건 좀...."
부끄럽댄다. 거대한 두 손을 펄럭거리리면서 부정하길래 정답도 모르면서 손을 들기 급급한 1명이 추가되었다. 환상의 콤비였다. 나는 노래는 모르지만 치킨에 대한 열망만큼 목소리가 컸고 지성이는 목소리는 작지만 노래는 잘 알았다. 심지어 좋니와 좋아를 구분하는 신의 귀를 소유한 사람이었다. 일단 손부터 들고 기회가 오면 족족 정답이었다.
결과는 역전승. 조원이 14명인데에 비해 치킨 두 마리는 턱없이 적은 양이었지만 얻었다는 데에 의의를 둔다. MC들은 어떻게 이렇게 잘 아냐면서 중간 인터뷰를 요청했었는데, 나는 할 말이 없었고 박지성은 어쩌다 보니 들리던데요, 하는 뻔한 멘트를 날렸다. 힘껏 놀려주고 싶었는데 자기도 말하고 귀가 빨개져 있어서 소소하게 웃어주는 걸로 끝냈다.
꿈과 희망이 가득 찬
드림하우스로 놀러오세요
- 평탄치만은 않은 처음 -
살아가며 피해야 할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떠올려 보자.
1. 과한 흡연 2. 과한 음주 3. 과한 야식.
공교롭게도 나는 1, 2, 3을 한꺼번에 체험 중이었다. 다들 술게임 도중 거나하게 취했고, 한 명이 담배를 피우러 나간다니 우르르 몰려나갔다. 여주 너도 나갈래? 한 선배가 물어봐서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는데, 그렇게 동기 한 명씩 물어봤을 때 남겨진 건 나와 지성이 둘 뿐이었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배경음악 삼으며 우리는 치킨 날개를 공략했다. 양심 없이 닭다리는 건드리지 않았는데, 담배 냄새를 풀풀 풍기며 들어오는 사람들을 봤을 때는 그러지 못한 게 후회됐다.
술게임에 종류가 왜이리 많은 것인지 알려좀 주쇼. 고등학교 체육 시간 때 강당에서 이중모션을 부쉈던 경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죄 없는 두부를 으깨거나 온갖 과일 이름을 나열해야 하는 건 고사하고 옆사람 볼까지 때려야 했다. 리버스 버전까지 암기해야 술자리의 위너가 된다. 게 중 최악의 게임은 전국노래자랑 게임이었다. 프로그램 인트로 음악인 빠라바 빠빠빠빠-를 게임 스타터가 부르면서 특정 물건을 집고 일어서는 게임이었다. 나머지 사람들도 똑같은 물건을 들고 일어나야만 하고. 전국노래자랑은 이용 당한 거지.
최악인 이유는 내가 이 게임을 못해서가 아니었다.
박지성이... 지지리도 못한다.
젓가락 한 쪽만 들어야 하는데 박지성은 한 쌍을 집었고, 소주컵을 들어야 하는데 일반 종이컵을 드는 오류를 범했다. 조금의 관용도 없는 무서운 사람들! 그때마다 지성인 울먹거리며 소맥 한 잔을 원샷했다. 선배들이 다 안 마셔도 된다고 말리는데도 처연한 얼굴로 다 비운 잔을 머리 위로 털었다. 그렇다고 다른 게임을 잘 하는 것도 아니라서 지성이가 만취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는데..., 사건은 전국노래자랑 인트로가 다섯 번째 나왔을 때 일어난다.
한 동기가 익숙한 인트로를 부르면서 소주 뚜껑을 들고 일어났는데, 박지성이 허겁지겁 제 주위를 둘러보다가 내 후드집업에 맥주병을 엎은 거다. 콸콸콸. 새로 딴 맥주라 흐르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헙."
"......."
박지성이 숨을 들이키며 맥주병을 곧바로 세웠는데도 잔뜩 지도가 그려졌다.
"헐 진짜 죄송해요 누나.... 제가 세탁해드릴게요."
"아냐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 있다. 새터 간다고 일주일 전에 구매한 후집만 아니었어도 그럴 수 있는데. 쩝. ...집 갈때는 뭐 입고 가지. 이동혁이 빼낸 여분 후드집업 하나가 눈에 아른거렸다. 역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짐을 왕창 싸야 했다. 괜히 껄껄 웃으며 후드집업 위에 휴지 뭉텅이를 뽑아냈다.
"아니 정말로요.... 주세요."
"진짜 괜찮아 걱정하지 마."
"아녜요. 주세요."
박지성은 입꼬리를 내리며 축 젖은 후드집업을 잡아 당겼고,
"어엇!"
팔꿈치로 맥주병을 건드리며 한 번 더 쏟았다. 거의 다 쏟은 줄 알았는데 뱉어낼 게 더 있었나 보네.
"어... 이건 쫌... 오바였다. 그쵸."
"너 취했지."
"아니. 아니. 그건 아닌데. 제가... 잘... 해올게요."
죄송합니다아. 취해서 볼까지 빨간 애한테 책임을 물을 수도 없고. 내가 처리하겠다고 하면 소주까지 엎을까봐 조용히 옷을 넘겨줬다. 전 손 닦고 올게요. 그래그래. 화장실로 향하는 뒤로 술게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박지성 어디 가서 술 잘 마신다고 하면 꿀밤을 때려줘야겠다. 그럭저럭 마신다는 소리도 금지.
* * *
I was very strong. 개강하고 가장 좋은 점을 꼽아보라면 철 지난 밈을 써먹을 수 있다는 거? 다행히 제노와 시간표가 꽤 비슷했다. 교양까지 합치면 3개나 겹쳤다. 비워둔 점심 시간까지 잘 맞아서 메이트처럼 다니게 됐다. 방금 끝난 수업은 3학년 전공. 삼수했다는 불안감 때문에 부러 하나 집어넣었는데, 이와 달리 제노는 수강 신청 망해서 주운 강의였다. 들어갔는데 1학년은 우리 둘 밖에 없어서 꽤나 당황했지만... 그래도 둘이나 있으니 함께 이겨내자고 동지애를 다졌다. 우리는 오티 때부터 수업을 진행한 교수님을 원망하며 학관 카페로 피신했다. 제노와 나는 아직 서로에 대해 친밀감을 쌓아가는 중이었고 이번 주제는 애인의 유무였다.
"4년?"
"햇수로 세서."
"그래도! 진짜 오래 만났네."
"응. 나도 몰랐는데 시간이 꽤 됐더라고."
대박 사건. 제노에게는 4년 사귄 여자친구가 있었다. 준수한 얼굴이니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진 않았지만 그 기간이 4년이라면 말이 달랐다. 게다가 서사도 로맨틱 했다. 제노도 22살이라 수능을 여러 번 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독일에서 유학과정을 거치고 쉬엄쉬엄 대학에 온 거였다.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 독일에서 만난 친구랑 연인 관계가 된 거고 한국으로 같이 왔다고. 와우. 학교도 가까워서 자주 만난댔다. 3연속으로 놀라자 제노가 멋쩍게 뒷머리를 쓸어내린다.
"놀랄 것도 아닌데."
"영화인 줄 알았어 나는."
"아니야."
"운명적 사랑인 건 솔직히 인정?"
제노가 눈을 휘며 웃었다. 이건 아니라고 말 안하네. 나도 이런 멋있는 이야기를 소개해주면 좋으련만. 지난 2년이 너무 단조로워 소재가 없었다. 커피를 한 입 마시며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제노가 입을 뗐다.
"그건 그렇고 여주 너 하숙집 산다고 했지?"
"으응. 맞아."
"아하."
"왜? 너도 들어오고 싶구나."
대화에 잠깐 마가 떠서 의도 없이 던진 말이었다. 당연히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고 말한 속 빈 단어들. 근데 제노가 부정 없이 커피를 한 입 마신다.
"하숙집 같은 데 살아보고 싶어. 네가 설명해준 거 생각해보면 재밌어보여서."
1학년 때 해보고 싶은 거 마음대로 해보게. 제노가 덧붙였다.
새터 때 술게임에 익숙해진 뒤, 각 조원들은 방을 돌아다니며 다른 조와 술게임을 했었는데 그때 제노를 만나 하숙집에 대해 말을 해줬었다. 지성이 들어오라고 설득하듯 열심히 말하진 않았었는데. 오히려 제노한테는 하숙집에서 얼마나 말썽인 일들이 있는지 열변을 토했던 기억이 있다. 나야 제노가 들어오면 빈 방 채우고 이모한테 용돈도 받고 좋겠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근데 지성이한테 이미 들어오라고 한 번 말해놔서. 걔 안 들어오겠다고 하면 너 들어올래?"
"그래. 안 되면 다른 데 찾아봐야겠다."
"진지하게 말하진 않았어서 아마 거절할 수도 있어."
마침 그때 학관 카페로 들어오는 지성이가 보였다. 메신저백을 한 쪽 어깨에 맨 상태였는데, 얘도 수업에서 털린 건지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새터 이후로는 처음 보는 거였다. 간간히 카톡을 좀 나누긴 했는데 얘가 내 후드집업에 가지고 있는 죄책감이 너무 커서 그 주제만 8할이었다. 손빨래하고 세탁소에 맡겨뒀다고, 찾으면 곧 주겠다고 한 게 어제였다. 눈이 마주친 박지성이 놀란 얼굴을 했다. 손을 들어 테이블로 불렀다. 마침 잘 된 타이밍이다.
"수업 다 끝났어?"
"네. 저 아침부터 연강 3개."
"미쳤다. 케이크 먹을래?"
접시를 들어보이니 제노도 턱짓으로 가리키곤 말한다. 먹어 지성아. 엄청 남았어. 함께 시켜놓고 몇 입 안 먹은 얼그레이 케이크였다. 지성이가 그럼 자기도 마실 걸 시켜오겠다며 딸기스무디를 받아왔다. 어떻게 스무디를 파는데 큰 빨대가 없을 수가 없냐며 의아해 한 박지성은 슬러시용 빨대를 가지고 한 입 맛보더니 화를 누그러뜨렸다. 나는 제노를 한 번 흘깃 보고 곧장 본론을 꺼냈다.
"지성아. 너도 하숙집 들어오고 싶다고 했잖아."
"저요?"
"으응."
"들어오라고 한 건 누난데......."
박지성이 눈을 굴리며 대답했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건 중요치 않아. 의미만 전달되면 된다.
"아니 쨌든 말야."
"생각 중이에요. 엄마는 알겠대요."
"엥 진짜?"
분명 지성이네 어머님은 자취 극강 반대파에 서계신다고 기억하는데. 이런 생각을 읽은 건지 박지성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취 외에 하숙집이라는 옵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더니 밥도 챙겨주냐는 한국인의 소울 담긴 질문이 되돌아왔고, 박지성은 거의 셰프급인 요리사가 세 끼를 챙겨준다고 장담했댄다. 나재민이 누군지도 잘 모르면서 내 말만 듣고 셰프급이라 설명한 게 웃겼다. 게다가 전부 다 같은 학교 대학생들이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고, 내가 버스 안에서 했던 말을 거의 그대로 전달한 모양이었다.
"그랬더니 엄마는 대찬성이래요."
"의외네. 그럼 너 들어올 거야?"
"아뇨. 전 아직 고민 중이에여."
새침한 대답이었다. 케이크를 잘 먹길래 쟁반을 박지성 쪽으로 더 밀어주었다.
"근데 제노도 들어오고 싶대."
"에? 형이요?"
"응. 나는 지성이 네가 들어가고 싶어하는 줄 몰랐으니까."
허허실실 웃는 제노의 말에 지성이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여유롭게 고민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광대를 올려 웃으며 공지를 내렸다. 관리자로서의 면모는 이런 데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지.
"얘들아. 너네는 이제부터 경쟁자다. 빈 방은 딱 한 개."
"......."
"승자는...... 선착순으로. 먼저 들어오겠다고 하는 사람이 그 방 차지하는 거야."
알겠지? 나 간다잉. 두 얼굴이 벙찐 상태로 잘 가라는 인사도 안 해준다. 손을 휘휘 저으며 카페를 떠났다. 말고도 나는 신경 쓸 게 많은 몸이걸랑.
* * *
가장 급한 일은 과제였다. 흐린 눈을 하면서 넘긴 과제가 4개에 육박하여 내 발끝을 태우고 있다는 사실을 주말이 되어서야 체감했다. 첫 주부터 무슨 과제냐 싶었는데, 그 중 세 개는 자기소개라는 게 어이가 없었다. 나 참, 대학에 오니까 자기소개마저 과제로 부여받는구나. 차라리 교탁 앞에 서서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자기소개 랩을 선보이는 게 편했다. 두 시간을 잡고 워드 총 7장을 작성하니 어찌저찌 끝내긴 했다.
남은 건 제노와 겹강인 3학년 전공 과제였다. 엄청나게 친절한 목소리로 첫 주니까 빠르게 오티만 진행하겠다고 하셨을 때 도망갔어야 했다. 수업까지 하시고 간단한 과제라면서 이론에 맞는 사례를 두 가지를 찾아오라고 하신 거다. 마감 기한이 좀 남긴 했는데 한 번에 끝내면 좋으니까 미리 손 좀 대려고 했다.
방안에서 의미 없는 키보드질을 한 지 몇 시간이 되자 집중력이 바닥이었다. 원래 한 곳에 오래 앉아있는 게 적성에 맞지는 않는다. 노트북을 들고 거실로 내려가기로 했다. 공용 탁자에서 텔레비전도 좀 보고, 창 열고 맑은 머리로 다시 시작해야지.
다짐을 하고 거실로 내려왔을 때 황인준이 있는 소감을 말해보시오. 배점은... 매길 수 없음.
황인준은 소파에 앉아 무한도전을 보고 있었다. 난 무한도전 보면 육성으로 웃는데 황인준은 턱을 괴고 무심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서먹한 관계라는 점이 나를 미치게 했다. 이대로 노트북을 들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가기에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소파를 등지고 앉기에는 자연스러운 모양새는 아닐 것 같아서. 머리를 빠르게 굴리며 어떻게 할 지 고민하는데, 얘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뭐해?"
"응?"
"왜 가만히 서있어."
뭐라고 대답하지. 그게, 음, 답을 미루니 황인준이 기우뚱 한 번 떨군다.
"거실 온 거 아냐?"
"맞아."
작게 고개를 주억이니 황인준이 별 관심 없다는 듯 티비로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발을 떼며 탁자에 노트북을 내려뒀다. 앉은뱅이 탁자라서 편히 쓰려면 소파를 등받침으로 삼아야 했다. 그런데 황인준이 소파 중간에 자리를 잡아둔 상태라 가용 자리가 탁자의 측면 뿐인 거다.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굽혀 앉으려는데 소파가 쓸리는 소리가 났다. 올려보니 가장자리로 이동한 황인준이 보였다. 그래놓고 시선은 계속 정면을 바라보고 있어서, 얘 자리가 원래 저기였나 의심할 정도였다. 작게 고맙다고 말하고는 소파에 기대 앉았다.
적어내리던 내용을 훑었다. 사회 이론을 현재 나의 주변에 적용시켜 찾는 과제다. 아니 이론도 제대로 설명 안해주셨음서. 이걸 응용 문제에까지 연결시킨 교수님이 사악하게 느껴졌다. 자신 주변에서 찾아보라고 범위까지 정했으니 금방 할 거라면서 생긋 웃으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제노에게 괜히 투정하는 톡을 보냈는데, 자기는 주말에 놀 거라 이미 다 해놨댄다. 화이팅~ 담백한 답장에 절절 우는 이모티콘을 보내두고 다시 워드창으로 컴백했다.
"하. 뭔데 이거어어."
멘붕에 빠졌을 때 끝음절을 늘리면 그 상태를 표현하기에 딱 좋다. 한숨 같은 소리를 내며 머리를 뒤로 젖혀 소파에 기댔다. 꾹 감은 눈을 뜨고선 꿈벅. 꾸움벅.
.......
아 맞다. 황인준 있었지.
한심하다는 것처럼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에 쫄아 길게 늘렸던 목을 회귀시켰다. 내가 원래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 아닌데. 방해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할 지 고민하다가 그냥 입을 꾹 닫았다. 텔레비전 보는 걸 방해했다고 사과하는 것도 좀 웃기니까. 큼큼. 목을 가다듬고 다시 노트북에 손을 올렸다. 감이 하나도 안 잡히니 지식인의 도움을 빌려 다른 사람의 사례를 참고해볼까 싶은 거다. 무작정 이론가와 사례를 찾고 있는데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거 아닌데."
"응?"
눈을 크게 뜨고 허리를 돌려 돌아봤다. 황인준은 고정된 자세로 텔레비전만 주시하고 있었다. 이상하다. 분명 들었는데. 헛 것을 들었나. 입을 삐죽이며 스트레칭을 한 척 다시 지식인을 탐색하는데 또 한 번 목소리가 넘어왔다.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엇.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이번엔 황인준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목소리도 그럼 잘못 들은 게 아니란 말이었다. 나는 한 톤 업된 목소리로 그 뜻을 물었다.
"뭐가 아닌데?"
나름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자랑은 아니지만, 아직 과제에 손을 댈랑말랑 하고 있었거든. 별로 한 게 없는데 뭘 보고 아니라고 하는 건지 의중을 물은 것이었다. 황인준은 길게 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그거 첫 과제지."
"응. 어떻게 알았어?"
"...... 그 수업 나도 들었으니까. 아까부터 중얼거리던 거 다 들렸어."
앗. 집중하면 중얼거리는 습관이 황인준 귀에 고새 들어간 모양이었다. 교수님이 웹페이지에 올려주신 강의 자료를 나도 모르게 소리내서 읽은 듯 했다.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있자 황인준이 한 번 더 목소리를 낸다. 까칠하고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외부에서 찾지 마."
"응?"
"자료 말이야. 밖에서 찾지 말고 네 힘으로 하라고."
뭐야. 너 교수님이야?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내 힘으로 하는 거 어떻게 하는 거냐고. 새내기가 삼 학년 수업을 어떻게 혼자서 하는데.
... 뱉지도 못할 말을 가슴 속에서 한 번 삭이고 최대한 친절하게 말하고자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황인준이 이 수업을 들었던 것 같은데 도움을 얻을 구석이 있을 것이었다. 황인준이 나를 싸늘하게 대해온 만큼ㅡ것도 개강하고까지!ㅡ나도 퉁명스럽게 대하고 싶었지만 좋지 않은 결말일 게 뻔했다.
"그럼... 살짝만 힌트 주면 안돼?"
최대한 순하고 적대심 없는 사람. 친절하고 불만 없는 사람. 그거 나다. 일부러 크게 뜬 눈이 시렸다. 친구 좋고 학연 좋다는 게 뭐야. 이런 데에서 쓰이는 거지. 황인준은 얼굴 근육을 미동도 않더니 차갑게 선을 그었다.
"당연히 안 되지. 과제부터가 네 주변에 있는 사례를 찾는 건데. 내가 알려주면 그건 내 거지 네 생각이 아니잖아."
와 대박. 얘가 이렇게 길게 말한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싹퉁바가지 없는 면모도 처음이었다. 네 생각이 아니잖아. 이 어구를 말할 때 일부러 한 쪽 눈썹을 꿈틀이고 힘주어 말했다. 그래도 몇 주간 함께 지내며 친해지지는 못 했어도 냉한 관계는 아니었는데. 내가 힌트 좀 달랬지 언제 답 알려달랬냐고. 순간 컨닝범으로 몰린 기분에 가슴께까지 억울함이 차올랐다. 따지기에도 웃겨서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물고 다시 돌아앉기만 했다. 내가 진짜 황인준 앞으로 도와주는 일 절대 없을 거임.
.......
그리고 가장 좋은 전개는 황인준의 도움 없이 김여주는 과제를 잘 마무리했습니다 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뭘 적어야 할 지 모르겠어서 자존심이 상했다. 자판을 두드리려다 말고 두드리려다 말고. 그 짓을 열 번 반복하고 나는 눈치를 보며 지식인을 다시 켰다. 분명 나 같은 겁 없는 새내기가 3학년 전공을 듣고 지식인에 질문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뒤에 앉아있는 황인준이 볼까봐 창도 작게 만들었다. 마우스 휠을 굴리며 창을 빠르게 훑었다.
도르륵. 도르륵.
도르륵.
어, 찾은 것 같다. 작은 창 때문에 눈을 찡그리며 화면에 얼굴을 가져다대는데 갑자기 창이 닫히고 내가 설정해둔 캐릭터 배경화면과 눈이 마주쳤다. 진짜 오래 찾은 건데 뭐야.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드니 황인준이 한 팔을 테이블에 짚고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범인은 황인준이었다. 반대 손에 마우스가 들려있는 걸 보고 알아챘다.
"뭐야?"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알려줘도 모르냐?"
"아니. 모르겠는데 어떡해."
"생각을 좀 해봐. 강의자료도 한 번 더 읽고."
그렇게 말하더니 혀를 한 번 쯧 찼다.
... 와 잠시만. 방금 거 진짜 기분 나빠.
쯧? 쯧??
명백하게 나를 한심해하는 행동이었다.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이래라 저래라 언질만 두는 건 뭐야? 머리가 차게 식었다. 지극한 갈등 회피 인간인데 갈등의 상황이 발생하니 속이 답답했다. 얼굴을 굳히자 황인준도 흠칫 어깨를 들썩이고는 몸을 뒤로 물렸다.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진짜 화가 났다.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말을 꺼냈다.
"너 나 도와줄 거야 말 거야."
"아까 말했잖아. 이거 네 과제니까...,"
"그래. 그럼 신경 꺼. 네 과제도 아니고 내 과제니까."
"......."
"나도 싫다는 애한테 도움 구하고 싶지 않거든?"
차갑게 쏘아붙이고 노트북을 들고 일어났다. 황인준이 눈에 띄게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참나. 나한테 뭐라고 할 때는 모르고 직접 당해봐야 알겠나보지. 발을 쿵쿵 구르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하다가 몸을 돌렸다. 씩씩대며 다시 황인준에게로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황인준의 눈이 커지는 게 육안으로 보였다.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갔을 때,
"......."
"......."
탁. 황인준 손에 들려있는 마우스를 뺏어왔다.
"이 것도 내 거잖아."
"......."
"너... 진짜 짜증나."
마우스를 쥐던 손 모양 그대로 멈춰있는 황인준의 팔을 뒤로하고 방으로 향했다. 이 기분으로는 과제고 뭐고 아무것도 못 할 것이었다. 크게 한숨을 내쉬고 침대에 엎어졌다. 뭐야 황인준. 내가 정말 싫은 건가. 근 몇 주를 돌아보며 두 손바닥으로 눈을 짓눌렀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화가 나서 눈물이 비죽 나올 것 같은 기분. 빠르게 돌아본 회상은 방금 전에 본 황인준의 손과 눈에 다다랐다. 걔도 당황한 것 같던데.
......마지막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나.
이래서 갈등이 싫은 거라고.
첫댓글 ❤️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05.10 02:45
❤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05.10 07:05
인준아 사랑해 ..
인준..왜구랬어ㅋㅋㅋㅋㅋㅋㅋ그래서 하숙집에 누가 들어올까요 제노와 지성이중에ㅋㅋㅋㅋㅋ
아 둘다 들어오면 좋겠다...인준아 쪼끔만 착하게 해주지ㅠㅠ
아이고 …. 둘이 머손일이고ㅠㅠ
인준이 엄청 당황했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05.16 08:15
둘다 들어와ㅠㅜㅜㅜㅜㅜㅜ
까칠 아기고양이 하지만 난 널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