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난주 길(고통의 길)
(2021.12.6)
'정난주 마리아묘'에서 시작해 '모슬포 성당까지 이르는 순례길'
정난주 마리아는 신유박해(1801년)에 남편 황사영(알렉시오)의
사건으로 인하여 제주도 대정에 유배.
추자도에서 아들 황경한과 생이별을 하는 슬픔 속에서도
이 고장에 신앙의 씨앗을 남기고 생애를 마쳤다.
대정현성의 성담과 돌하르방, 추사 김정희 유배지, 대정향교,
신축교안(101년)의 유적등을 만날 수 있다.
알뜨르에서는 비행장 활주로, 격납고 등 태평양전쟁 시기의 유적등을 지나
중일전쟁 이후 군사기지로서 중요한 거점이 되어
훈련병과 중국군 포로 신자들의 사목을 담당한
군사적 사연이 담긴 모슬포 성당에 이른다.
정난주 마리아 [황사영 알렉시오 부인]묘
신앙의 불모지인 이 땅에서 정 마리아는
수난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자로서 신앙의 모범을 보여준 분이다.
그녀는 1773년 나주 본관 정약현(丁若鉉)과 경주 본관 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나
명련(命連)이란 아명을 받았다.
일찍부터 천주교에 입교하여 전교에 힘썼던 당대 최고의 실학자
약전(若銓), 약종(若鍾), 약용(若鏞) 형제가 그녀의 숙부들이었고
어머니는 이 나라 신앙의 성조인 이벽(李檗)의 누이였다.
황사영(黃嗣永)과 혼인한 그녀는 1800년에 옥동자 경한(景漢)을 출산하였다.
남편인 황사영은 1775년에 태어나 약관 16세 초시, 17세에 복시에 장원급제하여
정조대왕으로부터 칭찬과 학비를 받은 매우 영특한 인재였으나
천주교를 신앙함으로써 현세적 명리에 등을 돌렸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에게 세례를 받은 그는 전교에 전력을 다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북 제천의 배론으로 피신하여 이른바 황사영 백서(帛書)를 썼다.
박해의 실상을 기술한 이백서는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발송되기 직전에 발각되어
황사영은 대역죄인으로 체포되고 동년 음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으로 순교하였다.
그 결과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에, 처인 정 마리아는 제주도에,
아들 경한은 추자도에 각각 귀양을 가게 되었다.
정 마리아는 1801년 음 11월 21일 두 살 난 아들을 품에 안고 귀양길에 올랐으며
추자도에 이르러 어린 아들과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추자도에 격리된 아들은 어부 오씨(吳氏)에 의해 하추자도 예초리에서 키워졌으며
그 후손은 현재 추자도에서 살고 있다.
제주목 관노로 정배된 정 마리아는 온갖 시련을 신앙으로 이겨냈으며,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주민들을 교화시켜 노비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서울 할머니’라 불리우며 이웃들의 칭송 가운데 살아갔다.
신앙만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고 37년 동안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다가
1838년 음 2월 1일 병환으로 숨을 거두자 그녀를 흠모하던 이웃들이 유해를 이곳에 안장하였다.
정마리아의 삶은 그 자체가 복음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신앙 증거의 연속이었기에
우리는 그녀를 ‘신앙의 증인’으로 추모하면서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이 묘역을 새로 단장, 성역화하였다.
그녀의 삶은 우리들의 신앙 생활에 새로운 결단의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는
영원하고도 소중한 표양이 될 것이다.
대정성지(大靜城址)
대정읍성은 대정현이 들어선지 2년 후인 1418년 축성됐다.
초대 대정현감 유신에 의해 1개월 만에 완성됐다.
현감은 지금의 서귀포시 강정에서 한경면 고산에 이르는
제주의 서남부 일대를 다스렸다.
대정현은 멀고 도적에 대한 방어가 허술해 성을 쌓게 됐는데
장정들이 내 자식의 일처럼 와서 공사에 참여해
한 달도 되기 전에 성을 이뤘다고 밝혔다.
성 둘레는 4890척(1481m), 높이 17척(5.1m)으로
동성리(현 인성·안성리)와 서성리(현 보성리)에 걸쳐 도읍지가 들어섰다.
성내 관아건물은 18동이 있을 만큼 규모가 컸고, 성문은 동·서·남에 설치됐다.
성 안에는 드레물(擧手井·두레박으로 떠올리는 물)이 있었지만
물이 풍부하지 않아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그래서 이 샘물은 탐관오리와 목민관에 빗댄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현감이 탐욕하면 물이 마르고, 청렴하면 물이 솟구칠 정도로 풍부해 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정현은 중죄인을 벌하기 위한 대표적인 유배지로 꼽혔다.
조선시대 500년간 제주에 유배를 온 260여 명 중
당대의 정치 거물과 대학자는 49명이다.
동계 정온은 1613년(광해군 5년) 대북파가 영창대군을 역모자로 만들어
강화도에 유배시키는 것을 계속 반대했고,
영창대군이 살해되자 책임자를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광해군과 권력의 기반이었던 대북파의 미움을 사서 대정현에 10년간 유배됐다.
그는 집 주위에 가시나무인 탱자나무를 둘러서 그 안에 유폐시키는
위리안치(圍籬安置) 형벌을 받았다.
대정현감 김정원은 집 마당에 서재용으로 두 칸의 집을 지어주었다.
정온은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동시대에 유배됐던 송상인, 이익과 어울려 시문을 교류했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대정현에서 유배문화를 꽃피웠다.
안동 김씨 세력의 정치 음모에 휘말린 김정희는
36대의 곤장을 맞고 죽음 직전에 풀려나 유배됐다.
1840년부터 1849년까지 9년간 이어진 유배기간에 김정희는
서예사에 길이 남을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했다.
자신의 신세를 빗댄 그림 ‘세한도(歲寒圖)’도는 국보 180호로 지정됐다.
시·서·화와 경학, 금석학, 불교학의 대가였던 추사는
대정현감의 묵인과 배려로 종종 외출을 했고,
다도(茶道)를 정립한 초의선사 등 많은 벗들과 어울렸다.
추사는 대정에 유배되어 8년 3개월간 귀양살이를 했다.
전후 세 차례 집을 옮겼는데 여기는 강도순의 집터에
그가 처음 살던 송계순이 집 모양을 편지에서 말한 대로 복원한 것이다.
추사에게 내려진 형벌은 '위리안치'였다.
위리안치는 유배지의 가시나무 대개는 탱자나무 울타리로 집의 사면을 둘러
보수주인(감호하는 주인)만 출입이 가능했다
안거리는 이 집의 주인인 강도순이 가족들과 함께 생활했다고 합니다
강도순은 김정희가 제주유배시절 가르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강도순의 밭을 밟지 않고는 마을을 지나갈 수 없을 만큼 부유했다고 합니다
밖거리는 김정희가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쳣던 곳이다.
김정희에게는 문하생이 많아 '추사의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는데, 제주 유배시절에도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또 하나 모거리라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추사 김정희께서 학문과 예술에 정진했다고 합니다
추사체 완성까지 벼루 열 개를 구멍내고 붓 천자루를 달아 없어지게 했다고 합니다.
추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집을 '귤중옥'이라 이름지었다.
매화나 연꽃은 육지에서도 볼 수 있으나 귤만은 제주가 이니면 볼 수 없다며
허허로운 마음으로 귀양살이를 받아들였다.
담장 너머로는 하귤 한 그루가 있다.
감자 창고라고 제주도 사람들이 생각한 추사관은 담박한 건물이다.
군더더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퓨어한 건물.
세한도 속의 집을 그대로 표방한 작품이다.
세한도(歲寒圖)
국보(1974.12.31 지정)
조선 말기를 풍미했던 김정희의 문인화 이념의 최고 정수를 보여주는 대표작.
위리안치라는 가장 가혹한 유배형에 처해진 추사는 외로움과 질병,
그리고 유배 중에 아내의 부고를 접하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지만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지인의 도움 또한 없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추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제자이며 역관이었던 이상적의 도움으로
추사는 중국에서 나온 서책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세한도는 바로 제자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1844년 그려준 그림이다.
그림의 왼편에 쓴 발문에서 추사는 공자의 논어에서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 라는 글을 인용
자신의 처지가 곤궁해졌음에도 자신을 대하는 마음에 변함이 없는
이상적에 대한 사제지정을 표현했다.
그림 끝에 작화 경위를 담은 작가 자신의 발문과 청대 16명사들의 찬시가 적혀 있고,
이어 뒷날 이 그림을 본 김정희의 문하생 김석준의 찬문과
오세창·이시영의 배관기 등이 함께 붙어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다.
대정향교
대정향교는 바굼지 오름 아래 산방산이 보이는 곳에 자리잡은
1420년 세종 2년때 지어진 유서깊은 곳입니다
제주에는 성리학을 널리 보급시키고 학문을 증진시키고자
세 곳에 향교가 있었는데요
향교는 지금으로 따지면 각 도립 대학의 역활을 하는 곳과 같습니다
제주시 용담동에 제주향교
성읍의 옛 지명인 정의현에 정의향교
그리고 바로 이 대정현에 대정향교가 그렇습니다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 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는 곳입니다
향교의 입구는 정말 작고 고개를 숙여 겸손하게 들어가야 하는 작은 문입니다.
단산(바굼지오름)
단산을 다른 이름으로 ‘바굼지오름’이라고 한다.
단산(바굼지오름)은 서귀포시 대정읍 인성리와 안덕면 사계리 경계에 있는 오름이다.
바굼지오름은 ‘바구미오름 또는 바구니오롬’의 차자 표기(借字表記)이다.
‘탐라순력도’에는 단산(바굼지오름)을 파군산(破軍山)과
파군산악(破軍山嶽)으로 표기하고 있다.
오름의 형체가 대바구니(대를 얽어서 만든 바구니)와 같다는 데서
‘바고미오롬’이라 부르다가 ‘바굼지오롬’이 되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산야가 모두 물에 잠겼을 때
단산(바굼지오름)이 대바구니만큼 보였다고 해서 ‘바굼지오름’이라고 했는데
한자로 단산(簞山 : 대나무 광주리 단)이라고 표기를 했다.
‘바굼지’는 ‘바구리’라는 말이 되기도 하는데 그와 가까운 말이 ‘바구미’이다.
‘바구미’는 박쥐의 옛 이름으로 오름이 모양새가
박쥐와 닮은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바굼지오름’의 총면적은 약 339,982㎡, 둘레 2,566m, 높이 158m이다.
오름의 서사면 기슭 자락에는 태고종 단산사(壇山寺)가 자리를 잡고 있고
남동쪽 기슭에는 제주특별자치도 유형 문화재 제4호인
대정 향교(大靜鄕校)가 위치해 있다.
사계리 발자국 화석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위치.
이 곳은 "제주 사람 발자국과 동물 발자국 화석산지" 다.
플라이스토세(홍적세) 말기인 1만9000~2만5000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섯알오름
송악산 북쪽에 알 오름 세 개가 동서로 뻗어 있는데, 동쪽 것을 동알 오름이라 하고,
서쪽 것을 섯알오름이라 하고, 가운데 것을 셋알 오름이라 한다.
한자로 쓸 때는 각각 동란봉·중란봉·서란봉으로 썼다.
섯알오름의 표고 40.7m 비고 21m
셋알 오름 꼭대기에는
일제 강점기에 설치한 고사포 진지가 있고
그 남쪽 섯알오름 기슭에는 제주 4.3사건의 아픔을 간직한 학살터가 있다.
섯알 오름 서쪽에는 일제강점기에 이용했던
비행장터와 벙커가 있다.
학살터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
백 할아버지 한 자손의 무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좌익세력이 북한 공산군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각 지구 계엄사에 좌익분자 체포.구금을 명령했다.
제주지구 계엄당국은 불순분자를 색출한다는 미명하에
보도연맹원, 4.3사건 때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사람과 무고한 양민을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검거했다.
이 때 검거된 대정. 한림 일대의 제주도민이 193명에 이르렀는데
1950년 8월 20일 새벽 2시부터 섯알오름에서 모조리 학살당했다.
새벽 2시에 처형된 이들의 시신은 유족들이 수습이나마 했으나,
새벽 5시에 처형된 132명은 사건 은폐를 위해 구덩이에 파묻고는
유족에게 그 사실을 숨겼다.
전쟁이 끝나고 6년 뒤에야 비로소 시신을 찾았지만
구덩이에 엉켜 있는 팔, 다리, 등뼈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유족들은 132명의 희생자를 한 조상으로 함께 모시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누구의 시신인지 가리지 않고 칠성판 위에
머리 하나, 팔 둘, 등뼈 하나, 다리 둘 등을 이어 맞추어
132명의 봉분을 만들고 그 이름을 '백조일손지묘'라 지었다.
재판이나 자신을 위한 변론 한마디 못해보고
죽음으로 내몰린 젊은이들의 억울함이나,
남은 가족들의 슬픔과 한을 우리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랴.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
알뜨르는 말 그대로 '아랫 쪽에 위치한 넓은 들'을 말한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비옥한 넓은 토지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비행장으로 건설되었다.
수십만평에 달하는 알뜨르 비행장과 비행기 격납고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데,
비행장은 일제시대 당시처럼 잔디 활주로가 그대로 남았있다.
이규석 삼부자 순교자묘
대정읍 하모리 출생
1900년 서귀포에 하논성당이 설립되자 가족과 함께 천주교 입교,
김원영 신부를 도와 대정군내 마을에서 열심히 선교활동을 하였다.
1901년 신축교안때 고양 모슬포에 은거하다가
6월 1일 이재수 진영에 잡혀 두 아들과 함께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이규석은 친족인 이재수의 배교 강요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저버리지 않음으로써 순교의 길오 기꺼이 나아갔다.
60년이 지난 1961년 후손들이 그의 순교를 기려서
무덤 앞에 순교비를 세움으로써 제주 교회의 표상을 기억하게 되었다.
모슬포 성당
1901년 신축교안이 발생한 이후 반가톨릭적인 분위기가 남아 있었던 모슬포에
가톨릭 교세가 호전되기 시작된 것은 6.25 전쟁 무렵부터다.
1951년 3월 21일 육군 제1훈련소와 중국군 포로수용소가 설치되는 등
군사 기지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에 따라 1951년 안달원 베드로 신부와 메리놀회 소속의 설리번 신부가
훈련병 및 중국군 포로 신자들의 사목을 위해 파견된다.
1955년 11월 육군 제1훈련소의 3대 군종 김덕제 치릴로 신부가
새 임지로 떠나게 되면서 군종 신부의 대민 사목은 종료되고,
이 지역 신자들은 서귀포 본당 관할의 모슬포 공소로 편입되었다.
1957년 초 당시 서귀포 본당의 주임 브래디 신부는
이 지역에 본당 신설 계획을 세운 후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
1958년 6월 27일 서귀포 본당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다.
사랑의 집
1952년 훈련소 내에 우리나라 최초의 군인교회인 강병대 천주교회가 준공,
군인과 인근주민, 피난민 등을 위한 미사가 봉헌되었다.
그러나 모슬포 지역의 기지촌화로 교우 수가 증가하여
이들을 위하 별도의 사목이 필요하게 되자,
1952년 말 현 본당 소재지의 부지를 매입, 이듬해 완공하였다.
신축과정에서 중국군 포로들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뜻에서
건축 공사에 참여했다고 하여 '통회의 집'으로 불렸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
감사히 잘 보고 갑니다 .
감사합니다.
일본의 굴레에서 벗어난 광복절입니다.
게다가 성모님 승천하신 기쁜 날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