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혹하는 자를 경계하라
요이 1:7-13
7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8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9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11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12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3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의 자녀들이 네게 문안하느니라
요이 1:7-13 / 거짓 지도자들을 주의하십시오. 수많은 거짓 지도자들이 사방에서 활개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진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거역하며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8) 그들과 같은 인간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까지 상을 얻으려고 애쓴 그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래야 주께서 주실 큰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9)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흘려 버리고 다른 길로 빠져 방황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모시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잘 따른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을 다같이 모실 수 있게 됩니다. 10) 만일 누가 여러분을 찾아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가르치려 하거든 그 사람을 집에 들여놓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를 격려하는 따위의 일도 하지 마십시오. 11) 만일 여러분이 그런 자와 어울린다면 여러분도 그 악한 일에 가담하는 자가 됩니다. 12) [작별인사] 아직도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편지로는 더 이상 쓰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즐거운 시간을 갖고 싶기 때문입니다. 13)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당신 자매의 자녀들이 당신에게 문안합니다.
요한이서의 두 가지 주제, 내적으로는 사랑의 실천(4-6)에 대한 말씀을 나눴고 오늘의 단락은 두 번째 주제인 이단에 대한 경계의 말씀입니다.
온전한 상을 향하여(7-8) 미혹하는 자, 적그리스도가 세상에 많이 나왔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들은 성도들에게 은밀히 접근하여 생명의 길을 잃게 하고 방황하는 영혼으로 몰아갑니다. 잘 아는 것 같으나 참되게 아는 것이 없고 그들의 말은 생명의 말씀이 아니며, 예수의 성육신을 부인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사귐과 교제는 참되지 않으며,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 빛 가운데 행하는 것도 거짓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며 신념과 철학적 이해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구원도 진리가 아닙니다. 이들은 속이고 복음을 소멸하여 헛되게 하려고 합니다. 요한은 ‘우리가 일한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잃지 말고 주님 앞에 이를 때에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고 권했습니다.
이단을 멀리하라(9-11) 진리에서 떠나는 자들이 있습니다. ‘지나쳐’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교훈 이상의 것이 있다는 기대를 가진 자들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 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는 자는 아버지와 아들을 모신 자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더 깊은 이야기가 있다든지 예수 그리스도 그 다음의 인물을 거론한다면 틀림없는 적그리스도입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은 그가 사도들이나, 오랜 친분이 있고, 뗄 수 없는 이해관계를 가진 자라 할지라도 잘못되었으면 경계해야 합니다. 이들을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하십니다. 형제를 대접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벗어난 거짓 선지자나 적그리스도들에게는 단호한 태도로 멀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약한 형제들을 잃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인사(12-13) 맺는말입니다. 쓸 것이 많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빠른 시일 내 마주 대하고 많은 이야기를 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우리는 성도들과 글로 그리고 대면하여 대화로 진리와 사랑을 나눔으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넘치게 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영적 기쁨이 충만함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적용: 진리를 속이고 소멸하는 이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말씀 안에서 주님과의 사귐으로 자기를 지켜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시고 도와주시려는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부모는 자녀의 필요한 것을 채워주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아버지 집에 있으면 모두가 자기의 것인데 자기 마음대로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의 것을 요구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를 알고 재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모두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는 죄인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제일 좋은 옷과 신발과 사랑을 상징하는 가락지를 끼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줄을 아시고 미리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 설 교 >
바른 교훈안에 거하라
요이 1:7-13 / 충일교회
서 론
20일 전 10월 3일, 개천절에 경북 봉화에서 정동진으로 향하던 기차‘해랑 4206호’ 기차의 일부가 철로를 탈선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큰 사고로 이어질뻔한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탈선의 원인은 태풍으로 인한 강한 바람이었습니다. 이외에도 기차 탈선의 원인은 다양합니다. 커브 구간에서의 과속, 철로 위의 이물질, 이상 고온으로 인한 철로의 휘어짐 등입니다.
이에 따른 탈선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 기관장은 안전수칙에 따라 운행하며, 반드시 적정 속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또한, 철도 안전 관계자들은 수시로 철로에 대한 이상 유무 점검과, 이물질 제거 작업을 해주어야 합니다. 탈선의 위험은 매일 반복해서 생겨나기 때문에 안전한 기차 운행을 위해서 매일 매일 반복되는 안전 점검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신앙을 위해서도 신앙의 안전 점검을 하라 말씀하십니다. 이단의 미혹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신앙의 탈선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점검해야 할까요?
본 론
7절 /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확한 점검의 지침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가 미혹하는 자, 이단이라 말씀하십니다. ‘미혹하는 자’의 원어 본래 뜻은 ‘속이는 자’, ‘길을 잃게 만드는 자’입니다. 이 미혹하는 자들은 교묘한 언변으로 우리를 속여 신앙의 탈선을 일으킵니다. 요한이서가 쓰여질 당시에 거짓 가르침을 주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인정하였으나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은 부정하였습니다. 단지 영으로만 이 땅에 오신 것이기에 육신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였다 주장하였습니다. 이단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해석하여 다른 결과를 도출해내거나 조금씩 성경 외의 가르침을 추가하여 가르칩니다. 이 작은 차이에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분명하게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육신이 있으셨기에 주리셨고, 아프셨고, 다 희노애락을 느끼셨습니다. 십자가에서도 중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사귈 수 있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 주일마다 사도들의 고백을 담은 사도신경을 통해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육신을 입고 태어나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을 굳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8절과 9절에 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8절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9절“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또, 요한 계시록 22장 18-19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단들은 진리 가운데 있기는 하지만 아직 굳세지 못한 성도들의 판단력을 흐리고 그들을 속여 진리에서 탈선하게 합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파멸을 맞이하게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시지 못합니다. 천국의 자리에서 제하여 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직 성경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천국으로 가는 구원 열차에 잘 탑승하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신앙의 탈선을 방지하여 위하여 이단의 교훈과 가르침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신앙의 안전 점검이 매일 이루어져야 합니다. 나의 구원열차에, 우리 충일교회의 구원열차에 탑승하여 미혹하려는 악한 이단들을 우리는 철저히 거부해야 합니다. 10절-11절의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11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이 말씀은 이단에 속한 사람들을 핍박하라, 모든 관계를 단절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를 대접하는 선한 관행이 있었습니다. 만일 복음 전도자를 가장한 이단적인 가르침을 대하게 된다면 그렇게 선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아닌, 다른 교리를 전하는 그들에게 호의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단 교리에 현혹될 빌미를 제공할 수 있기에 그것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신천지 교주 이만희가 병으로 곧 죽을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충일 교회 안에도 신천지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앞으로 많은 사람이 신천지에서 떨어져 나올 것입니다. 충일교회가 그들을 사랑으로 품을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품더라도 그들의 다른 가르침에는 반드시 주의하십시오. 그런 가르침을 듣게 되거든 귀를 닫고 마음을 닫아주십시오.
결 론
오늘 우리에서 주시는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이단을 주의합시다. 그들과 긍휼의 마음으로 관계를 가질 수는 있지만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대화하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구원 열차에서 탈선하지 않는 우리 모든 충일의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진리와 사랑안에서 미혹하는 자를 물리치십시오
요한이서 1:7-13 / 찬송 366장 / 이승현 목사
오늘 본문 7절 말씀은 성경 헬라어 원문에 있는 한 단어를 생략하여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원래 성경 원문에는 7절 말씀이 헬라어로 ‘호티’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는데, 한글 성경은 이 말의 의미가 생략되어있습니다. 이 ‘호티’라는 단어는 ‘왜냐하면...때문에’라는 뜻을 가진 접속어입니다.
그러니까 원문에 가깝게 7절을 직역해서 읽으면 “... 왜냐하면,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가 됩니다. 그러니까 앞에 나오는 1-6절까지의 말씀이 오늘 7절 이하의 말씀의 이유가 되어 연결되어있습니다. 1-6절이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5-7a절을 다시 보십시오.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왜냐하면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해야 할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사랑하는 데 실패하면 그것은 곧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는데 실패한 것이기 때문이고, 둘째 우리의 믿음을 흔들고 무너뜨리려는 거짓 이단들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까지 이단들이 드나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성도를 미혹합니까? 거짓 교사들 즉 이단들은 자신들은 항상 새로운 빛, 새로운 계시, 전에 알지 못하던 새로운 말씀을 주는 것처럼 위장하여 성도들에게 접근합니다. 그들은 기존 교회에는 진정한 말씀이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로부터 이천년 간 이어져 온 정통신앙의 가르침을 진부한 것이라고 폄하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들은 믿음의 근본 진리를 능히 뛰어넘는 초월적인 지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이단들의 모습이 사도 요한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7절을 다시 보십시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몸을 통해 분명히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고 사도들에 의해 전해진 사실입니다. 즉 성육신 사건은 기독교의 정통교리입니다. 요한복음 1:1,14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런데 사도 요한 당시에 이단은 이것을 부정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당시에 새롭게 등장하여 유행하던 영지주의 사상에 의하면, ‘영’은 거룩하고 완전한 존재이지만 ‘육’은 불완전하고 거룩하지 않은 저급한 존재라는 이원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하나님이 불완전한 육체 속에 도저히 임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기독교의 정통신앙 자체를 공격하는 적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단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들만 갖고 있다는 새로운 빛, 새로운 계시, 전에 알지 못하던 새로운 말씀이라는 것은 진리의 터 위에 수천 년 동안 다져진 기독교 정통신앙에 비추어 보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신앙인들조차 이런 거짓 가르침에 빠지고 이단에 넘어지는 것일까요? 자신이 참다운 진리와 사랑에 온전히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진보적이고 새로운 것만 찾기 때문입니다. 5절과 6절 각각 후반부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니라.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어떤 성도들은 이미 주어진 정통신앙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지키지 않으면서 새로운 교리나 가르침만 쫓아다니는 모습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9절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여기서 ‘지나쳐’라는 말의 원뜻은 ‘진보적인’, ‘혁신적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단들의 주장은 확실히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교리는 지나치게 앞서 갑니다. 무엇을 지나쳐 앞서 갈까요? 9절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교훈’ 즉 주님이 이미 가르쳐 주신 교훈을 벗어나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로 결국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인 진리와 사랑은 예수님께서 친히 전해 주시고 몸소 보여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이 말씀에 순종하여 박해와 순교의 고통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교훈을 전했습니다.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우리는 이 교훈은 잃지 않아야 합니다. 내게 그리스도의 교훈인 진리와 사랑이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이단은 강경하게 거부하고 대응해야 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집에 들이지 말라는 것과 인사도 하지 말라는 것은 적극적으로 그들과의 관계를 차단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참된 정통신앙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그리고 성령님께서 그들이 영적으로 눈먼 것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용납하거나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전에 맺은 관계 때문에 그들을 단호히 거절하지 못하고 용납한다는 것은 그들을 안심시키고 지원해 주는 일일 뿐만 아니라, 교회 스스로가 미혹의 위험에 빠지게 될 수 있는 일입니다.
혹시 어떤 분들은 그것은 너무 가혹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이 말씀하는 이 명령들이 가혹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참된 사랑에서 나온 관용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무지와 진리를 지키는 일에 대한 무관심에서 나온 관용일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깨닫고 의지적으로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진리와 사랑이라는 그리스도의 바른 교훈 안에 거하여, 어떤 미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승리함으로 영생의 상을 받아 누리는 우리교회와 온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요이 1:7-13 / 정도열 목사
1-6절에서 사도요한은 먼저 편지를 받는 성도들을 칭찬하며 정중하게 인사한 후에 진리와 사랑 가운데 행할 것을 권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단에 빠져서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 이단교리를 퍼뜨리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들의 거짓된 이론의 본질이 무엇인지 밝히고 그들을 경계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오늘날 이단들이 활개를 치며 성도들을 미혹하는 이 시대에 우리들이 어떤 자세로 그들을 경계하고, 믿음을 지켜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I.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7-9)
7절을 보십시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미혹하는 자들이 많이 세상에 나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미혹하는 자들이 세상에 많이 나타났다는 일반적인 의미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서의 내용을 볼 때 이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의 특수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이 속한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1장 4절에서 살펴 본 대로 요한은 거짓교리에 미혹되지 않고 진리를 행하는 자들 몇몇으로 인해 기뻐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진리를 따라 살며 남은 사람들보다 미혹하는 자를 따라 세상으로 나간 사람들이 더 많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요일 2:19). 이들의 가르침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요일 4:2).
그런데 요한일서 4장 2절에서는 완료분사(오신 것)를 사용했는데 여기에서는 현재 분사(오시는 것)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학자들의 해석이 분분합니다. 그렇지만 가장 신빙성 있는 해석은 특정한 행위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그 분사형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주는 요한(세례요한)이라고 할 때와 같습니다. 요한의 사역의 핵심이 바로 세례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죽은 후에도 세례를 주는 요한(현재분사형)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계속적으로 오시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육체로 오신 그 사건 자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사건을 시간을 초월한 사건이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사건은 모든 세대를 거쳐 변치 않는 진리임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바로 진리를 부인하는 미혹하는 자들이요, 적그리스도입니다(요일 2:18,22,26).
우리가 적그리스도를 구별하는 기준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천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나사렛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 하나님으로서 참 사람이 되신 것을 영접하느냐 거절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사적으로 두 종류의 이단이 있었습니다. 한 이단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단은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게린투스 이단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이단이었습니다. 이천년 전에 태어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탄생한 것을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의 모든 진리를 부인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몸으로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실 수 없었습니다.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부활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부활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구원받지 못하고 몸이 없는 유령으로 구천을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의 이론은 아주 교묘합니다. 또 아주 합리적입니다. 논리적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진리가 없습니다. 순간순간 진리를 말하는 것 같지만 지나고 보면 다 거짓말인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떨어져 마귀의 밥이 되어 버린 후입니다. 그러므로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들은 다 적그리스도입니다.
사도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성육신의 은혜와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한 마틴루터는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것 빼고는 우리와 똑 같은 분이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는 먹고 마시고 잠자고 일어났습니다. 그는 피곤하셨습니다. 슬퍼하고 즐거워하셨습니다. 그는 우셨고 웃으셨습니다. 그는 배고프시고 목마르셨습니다. 땀을 흘리셨습니다. 그는 말씀하셨습니다. 힘써 일하셨습니다. 그는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하나님이시며 죄가 없으시다는 것 외에는 우리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 만일 그리스도가 몸이 없는 유령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아무 교통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며, 진정한 의미의 구원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단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8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우리는 스스로 삼가야 합니다.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watch out 항상 주의하고 살피고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이 미혹하는 바가 무엇인지 간파해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이론이 그리스도를 부인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요즘 이단은 구원의 진리에 대해서 잘못 해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의 충분조건입니다. 그 외에 어떤 조건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구원의 완성되는 그날까지 보호하시고 지켜 주십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온전히 이루어놓으신 구원사역이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것처럼 미혹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부정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어떤 이론에도 미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1%라도 인간의 행위가 구원에 관련된다면 우리의 구원은 불확실하게 됩니다. 또 100% 은혜로만 구원 받는 복음진리에 위배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멸시하는 죄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스스로 삼가서 사도들이 일한 것을 잃지 않고, 온전한 상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일한 것은 사도들이 그들을 위해서 수고한 것들입니다. 사도들이 에베소에서 많은 수고를 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3년 동안 에베소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제자들을 세웠습니다. 디모데가 그곳에서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거기에서 수고했습니다. 그들이 이단교리에 미혹되어버리면 사도들의 모든 수고가 헛수고가 되어 버립니다(갈 4:11,19). 특히 에베소교회를 위하여 사도 요한은 평생을 수고했습니다. 그 수고한 열매로 에베소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지키고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온전한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온전한 상'은 그리스도인이 진리와 사랑 가운데 행한 응답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온전한 보상을 의미한다(벧전 1:9; 요일 4:14-16).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잃지 않고 복음 진리를 굳게 지킨 사람들에게 온전한 구원의 상을 주십니다. 상은 마라톤 코스를 완주하고 마지막 결승점을 통과했을 때 받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경주를 마친 후에 무엇을 바라보았습니까?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8) 바울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주실 의의 면류관을 사모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상은 바울에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시는 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경주를 완주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 사도 요한이 바라본 상은 조금 달랐습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환난 중에도 굴하지 않고 죽도록 충성하면 주님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상입니다. 충성스러운 야고보도 동일한 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
그런데 베드로는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4) 베드로는 예수님을 목자장으로 모시고 살았습니다. 주님께서 피로 사신 양들을 먹이며 치는 목자의 삶을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영광의 면류관을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양을 치는 모든 목자들에게 주실 상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상을 바라보고 달리는 운동선수와 같습니다. 사도 요한은 스스로 삼가서 거짓 교리에 미혹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하여 온전한 상을 받으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신앙이 어릴 때 상을 바라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유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상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한 것을 발견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도성을 바라보고 개척자로 살았습니다. 모세도 상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기로 결단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때에 상을 받습니다. 주님의 상 주심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할 때 이단에게 미혹되지 않습니다. 이단에게 미혹되는 분들을 보면 대부분 기성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상처를 받을 사람들입니다. 왜 상처를 받습니까?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서 위로를 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기대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바라보면 상처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 교회에 신앙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이 교회에 저 교회 떠돌아다니다가 이단에 빠집니다. 이단들은 어떤 의미에서 이들의 갈증을 채워줍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단체나 조직이 자기들의 구원을 보장해 줄 것처럼 여깁니다. 그 단체 안에 거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막연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보다 확실하게 보이는 이론을 좇아서 사는 것이 더 확실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만 보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생명을 사냥하는 이리가 숨어 있습니다. 목자의 탈을 쓴 이리와 같습니다. 그들의 욕구를 채워주고 그들의 영혼을 삼켜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스로 삼가야 합니다. 항상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온전히 구원해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온전한 상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라(9-11)
9절을 보십시오.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여기서 지나치다는 말은 진리를 넘어서 지나치게 나아간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복음진리를 벗어나거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의 핵심진리는 바로 성육신의 진리입니다. 그 진리 안에 모든 복음 진리가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혹하는 자들은 그 진리 안에 거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스스로 진보주의를 자처하면서 복음진리에 뭔가 부족한 것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무엇을 갖다 붙입니다. 또 복음진리만으로 부족하다 신령한 체험을 하고, 신령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야말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을 온전히 따르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는 자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십니다. 새번역에 보면 9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지나치게 나가서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한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모시고 있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그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다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요이 1:9)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복음 진리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의 원칙들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 많은 계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교훈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1-6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진리와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살면 어떻게 됩니까? 아버지와 아들을 다 모시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다. 영생이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심판에 이르지 않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오직 온전한 상을 받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지 않는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다.” 그들은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명령은 사랑의 사도 요한과 잘 어울리지 않는 명령처럼 여겨집니다(요삼 1:5-8). 그러나 본문의 '들이지도 말라'는 말씀은 물론 개인적으로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사적인 의미보다 교회적인 차원에서 대처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집'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모이던 가정을 가리킵니다(롬 16:5; 고전 16:19; 골 4:15; 몬 1:2).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순회 설교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도와 교사와 지도자들은 교회를 개척하고 방문하기 위하여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가니면서 많은 여행을 했습니다. 그들이 여행할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환영하고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이 접대를 신중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단 사상에 접하고 거짓된 교리와 연관성이 있는 설교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영접하지 말 것과 그들에게는 인사도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로부터 그들을 격리시켜 그들이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들과 교제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사하는 것은 만날 때나 헤어질 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사는 그들과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그들과의 교제는 그들이 저지르는 악한 일에 참여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런 자들과 지속적으로 교제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생각과 교훈에 물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단호하게 관계를 끊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지나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마는 우리는 성경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사랑과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는 이 경고를 우리는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사도 요한은 이 말씀대로 행했습니다. 요한 자신도 이단자 세린투스가 공중목욕탕에 들어오니까 이렇게 말하며 도망을 쳤다고 합니다. “진리의 원수 세린투스가 여기 있으니 이 건물이 우리 위에 무너질는지 모르니 어서 피하자.”
바울도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동일한 말을 했습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딛 3:10~11)
성 폴리갑은 프랑스 리용의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순교를 당하기 직전에 로마 병사가 자기 앞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풀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서 한 번도 나를 부인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주님을 부인할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폴리갑이 살았을 때에 마르키온 이단이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마르시온은 성경 중에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만 기독교 정경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양성경의 모순을 구명한 대조표를 만들어 성경을 비판했습니다. 어떻게 사람을 잔인하게 살해하도록 한 구약의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원적 신관과 그리스도 가현설을 주창하였다. 헬라의 영지주의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초기 그리스도 교회에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그리스도교의 유대적 요소를 배척하고 교회의 근본적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의 과격한 주장이 교회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단으로 단죄되자, 144년경 분리하여 새 교회를 결성하였다. 한번은 폴리갑이 마르시온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마르키온이 폴리갑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그러자 폴리갑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탄의 맏아들로 안다.”
이단들은 거짓된 교리로 끊임없이 바른 교훈을 가진 자들을 미혹하려고 접근합니다.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교회에 들어오려고 합니다. 어린양처럼 접근해 오기도 합니다. 작년에는 신천지 자매가 어린양처럼 우리교회에 들어온 적이 있습니다. 교회에 들어와서 청년회 회장과 영향력 있는 분들에게 접근하여 둥지를 트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체가 드러나자 여러 가지 변명을 하면서 떠났습니다. 또 요즘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거짓교리를 전파하는 이단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씨를 하나님으로 알고 미혹의 영에 사로잡혀 포교하는 분들이 이 동네에 많이 돌아다닙니다. 요즘은 중국유학생들을 포교하기 위해 열심을 내고 있다고 합니다.
가끔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우리는 구하려고 노력하다가 함께 이단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단들은 은밀히 관계를 맺고 교육을 시키기 때문에 이단에 빠진 것이 드러나는 경우는 이미 깊이 빠져 든 이후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이미 그릇된 확신에 사로잡혀 대적하고 더 깊이 거짓된 교리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우리 교회에 있던 분이 신비주의 신앙에 빠졌다고 신천지에 빠진 가정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내가 빠졌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구해내려고 논쟁을 버리고 도와보려고 하다가 나중에 함께 빠졌습니다. 그런 경우 전문가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혼자 애를 쓰다가 보면 함께 빠지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한 목자님은 분은 너무 안타까워서 그들을 도와주려고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자기들의 교리를 가르치고, 그 기회를 이용하고 도리어 신천지의 이론을 설득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이야기하다 보면 부분적으로 옳고 합리적인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자꾸 듣다보면 결국 미혹의 영이 옮겨와 빠져들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주고 관계를 끊도록 도와준 적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렇게 단호하게 관계를 끊도록 명한 것은 그만큼 그 문제가 절박한 문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과거에 함께 교회생활을 하던 그 정에 이끌리다보면 함께 거짓된 교리에 미혹될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신천지에 대학교수들도 많고, 고급 공무원들도 많다는 소문을 듣고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어떻게 총명하고 박사학위까지 받은 사람들이 이단에 미혹될까? 여러분은 이해가 됩니까? 그러나 미혹의 영에 사로잡히면 아무리 똑똑해도 거짓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신천지에 대학교수들도 많고, 고급 공무원들도 많다는 소문을 듣고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어떻게 총명하고 박사학위까지 받은 사람들이 이단에 미혹될까? 여러분은 이해가 됩니까? 그러나 미혹의 영에 사로잡히면 아무리 똑똑해도 거짓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III.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리라(12,13)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이 1:12) 요한은 그들에게 쓸 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종이와 먹으로 써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고 했습니다. ‘대면하여’ 라는 말은 입과 입으로라는 말입니다. 종이와 먹으로가 아니라 입과 입으로 이야기하고 싶다는 표현입니다. 글로 써 보내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요한이 정말 바라는 것은 그들에게 가서, 그들의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도 듣고 그들에게 복음진리를 확실히 심어주고 진리 가운데 행하도록 돕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진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 그들의 기쁨을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 사이의 교제를 통해서 성취될 수 있습니다(요일 1:3,4). 이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신령한 교제입니다.
5분간 마음을 터놓은 대화로 한 보따리 편지로도 못할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조심스럽게 쓴 편지도 잘못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직접 만나서 마음을 열고 대화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임을 요한은 알고 있었습니다. 성도의 진실한 교제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택하심을 받은 너의 자녀들이 네게 문안하느니라.”고 하며 편지를 마칩니다. 처음 편지를 시작할 때에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택하심을 받은 너의 자녀들이 너에게 문안한다고 했습니다. 처음이나 끝에서 사도 요한은 함께 있으나 떨어져 있는 한 가족임을 알고 안부를 전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스스로 삼가 믿음을 지킴으로 온전한 상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며 미혹하는 자들을 상종하지 않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더욱 은혜와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 언제나 동일하며 불변하다.
요한이서 1:4-13 / 노바토한인침례교회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많은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이 주신 복음과 계명을 진리 가운데 지키고 잘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축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 안에 기쁨이 충만하다고 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더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이 모든 교회를 향해 계명을 지키는 것, 그 진리를 행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함은 물론 하나님을 기쁘게 하시는 것이라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사도들이 교회를 순례하며 복음을 전할 때, 교회가 왕성히 일어날 때 그 가운데 자신의 이득을 취하기 위한 거짓 복음 순례자들 또한 다니며 거짓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미혹하고 도움을 받으며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요이1:7)
그리하여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임을 부인하는 자들이 적그리스도이며 미혹하는 자라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 모든 죄를 다 감당하시고 돌아가신 것을 다시 한 번 상기 시키고 있습니다.
당시 거짓 복음주의자들,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우리 몸은 죄로 가득차있고 더럽고 추악한 것인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어찌 이런 인간의 더러운 몸을 입고 올 수가 있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신이 인간의 육체 안에 갇혀 있다면 그것 자체가 제약이며, 육신의 몸을 입는 순간부터 이 세상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고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며 육신의 삶을 죄와 동질시하고 더럽고 추악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인간 예수가 잠깐 신기한 일을 역사하게 하실 때는 잠깐 인간의 몸을,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만 잠시 인간의 몸을 빌리셨다는 것입니다.
반면, 영은 육신의 제한을 받지 않고 성스러운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영의 구원만을 주장하고 육신의 구원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논리 가운데 육신의 삶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썩어질 육신이 아니니 육신의 삶은 이렇게 살아도 저렇게 살아도 상관없다고 하며 그들은 말과 행함이 다른 삶을 살며 그릇된 논리를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사람들을 미혹시켰습니다.
그때 당시 교회의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사도들이 날마다 복음을 전하여 들을 때, 그 복음은 날마다 똑같은 진리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이들은 아는 이야기를 듣는다고 생각하여 이것을 구태의연하고 진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영지 주의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들의 이야기가 오히려 더 깊이있고, 새롭고 참신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하고 이들에게 빠져 이들과 함께 그릇된 길로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이 서신을 쓰며 다시 한 번 바른 복음, 참된 하나님의 뜻을 교회에 알리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복음은 1600년 동안 하나의 주제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 동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다시 오실 메시야, 신약은 오신 메시야, 요한계시록은 다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는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우리 죄를 사하시고 다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에서 이런 복음을 선포하고 외칠 때, 이것을 듣는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지 돌아봅시다. 우리는 복음이 진리여서 날마다 같은 말씀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만, 어느새 이것을 다 아는 이야기, 식상한 이야기, 구태의연한 이야기로 소홀히 여기거나 다르게 받아들이지 않는 건 아닌지 돌아봅시다.
누군가 복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때 솔깃하지는 않은지, 그 논리가 세상의 것이라 해도 그럴듯해보이면 그것에 더 집중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오신 후, 2000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 후 수많은 목회자들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교리를 정리해나가고 수많은 자료들이 나오고 주석서들이 나왔습니다.
그것들을 총망라하여 신학대학에서 그것을 가르치고 목회자들은 그것을 배우고 성경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에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에만 촛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길은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오직 모든 영혼을 구원하는 것, 잃어버린 영혼을 찾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육신의 삶가운데서 구원하시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에는 오직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그 단 하나의 길, 단 하나의 진리에 밖에 촛점이 맞춰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른 종교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고 어느 정도는 믿고 있습니다. 무슬림, 천주교, 다른 이단 종교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는 예수는 어떤 예수입니까?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아니, 우리는 과연 어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믿고 있고 우리가 외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하신 분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오직 유일한 구원, 인간의 몸을 입고 성경대로 오시고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신 메시야이십니다. (요3:16~17, 고전15:3~8)
성경의 전체에 대해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특히 여러 부분에 이런 메시야를 잘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도록, 유일한 구원인 것을 이야기하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것을 전하며 성경의 말씀에 촛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논리를 말하지 말고, 세상의 것을 끌어대지 말고 성경 안에서 주신 말씀으로 옳고 그른 것을 판별하고 진리인지 아닌지 구분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성경 이외의 것을 전한다면, 그것은 결코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교회가 언제나 성경의 말씀과 그 말씀을 근거로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은 참된 진리를 전하는 것이고 우리의 교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가운데 진리가 있으니 우리는 언제나 말씀을 근거로 말씀을 증거하고 모든 우리의 판단과 행동의 기준, 교제의 자리에 이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변할 수도 없고, 달라질 수도 없습니다. 만일 진리가 상대적이거나 시대나 상황에 맞추어 적용이 다르게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없으며 우리는 구원의 확신, 그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변하지 않기에 진리이며 변할 수가 없기에 진리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변하지 않는 진리,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따라갈 때 우리의 죄가 대속되어 지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은 1600년 동안 하나의 진리, 하나의 사실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오직 복음으로 기독교의 역사는 이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으로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얻게 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항상 이 진리의 말씀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자유와 평안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생을 감사하고 살아가시는 모든 노바토 교회의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맛보려면
요한이서 / 조정의 목사
요한삼서에 이어 요한이서를 본문으로 택한 이유가 있다. 헬라어로 300자가 되지 않는 이 짧은 서신이 코로나 19로 흩어져 있는 성도를 바라보는 심정을 잘 담아내기 때문이다. 자신을 “장로”로 소개한 사도 요한은 칭찬과 격려와 권면이 필요한 성도를 돌아보기 위해 이 편지를 썼다.
이 편지가 쓰인 90-95년, 요한이 에베소에서 사역할 때, 그리스도의 교회는 외부로부터는 비방과 박해를, 내부에선 거짓 교훈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거짓 교사는 건전한 복음 사역자와 더불어 곳곳을 돌아다니며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요한은 복음의 사역자를 거절하는 교만한 성도를 요한삼서에서 꾸짖고, 요한이서에서는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자를 경계하라고 권면했다.
직접 대면하여 말할 수 없는 상황, 충만한 기쁨으로 교제하며 격려하고 붙들어주기 어려운 상황, 게다가 언제라도 거짓 교사가 성도의 집마다 찾아가 삶을 망쳐놓을 수 있는 상황,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과 같다.
그런 상황에 꼭 필요한 진리를 성령께서 요한을 통해 이 짧은 편지에 기록하셨다면, 이 편지를 본문으로 선포하는 한 편의 설교를 통해 성령 하나님께서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진리를 강력하게 선포하시리라 믿는다
1. 세 가지 권면(1-11절)
요한이 편지를 쓴 대상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이다(1절). 아마도 한 지역교회에 구성원이었던 여성도(택하심을 받은, 1절)와 그 자녀들로, 순회 사역자에게 호의를 많이 베푼 성도였을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이들을 기억하여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들이라 불렀고 자기뿐 아니라 모든 자가 그들을 사랑한다고 했다(1절).
1) 진리를 행하라(4절)
구원받고 성실히 섬기던 그리스도인 가정에 요한은 세 가지 권면을 확실하게 당부한다. 각각의 권면은 서로 깊은 연관을 갖는다. 첫 번째 권면은 칭찬 속에서 발견된다.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4절)
성도를 돌아볼 책임이 있던 장로 요한이 가장 기뻐했던 일은 바로 그 성도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고 듣는 것이었다. 여성도의 자녀들 중 진리를 행하는 자를 보고 요한은 심히 기뻐했다(“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요삼 4).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요일 1:5). 진리이신 하나님께 거짓이 조금도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분과 사귐이 있는 자라면 반드시 진리를 행해야 한다. 요한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요일 1:6).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반드시 진리를 행해야 한다(요 1:9).
“진리를 행하라”는 권면은 두 번째 권면인 “서로 사랑하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성도의 사랑이 바로 이 진리에서 시작하고 진리 위에 자란다. 요한의 사랑이 바로 그 진리에 근거했다. 1절에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라는 표현은 우리말 성경에서 번역한 것처럼 “나는 진리 안에서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요한뿐만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는 모든 자는 “진리를 아는 자”였다(1절). 성도의 친밀한 사랑은 2절에 나오는 것처럼 그들 안에 거하여 영원히 그들과 함께 할 진리로 말미암았다.
진리가 무엇인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대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순종하며 사는 것, 그것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순종해야 할 명령이다. 진리를 행하는 삶은 다른 성도의 마음을 진심으로 기쁘게 한다. 성도를 향한 사랑을 더욱더 깊게 만든다.
2) 서로 사랑하라
두 번째 명령은 직접적인 권면에서 찾을 수 있다. 5절.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5-6절)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요한이 만들어낸 새로운 계명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처음부터 “서로 사랑하라”는 그분의 계명을 가졌다(요 13:34). 또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생긴 친밀감이나 뜨거운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순종이다.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행하는 것이 사랑이다. 이런 측면에서 사랑하는 것은 진리를 행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특별히 요한이 이 편지를 통해 권하고 있는 사랑의 행위는 접대와 섬김이다. 복음 사역자들이 거리에서 머물 곳을 찾거나 먹을 것을 찾을 때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여 사랑을 베푸는 것. 그것이 요한삼서에 따르면 성도가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는 실질적인 사랑의 행위였다(요삼 8). 하나님의 말씀엔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3),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히 13:2),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벧전 4:9) 등의 계명이 있다. 이 말씀에 따라 행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많은 사람이 코로나 19속에서 점점 신앙이 나태해진다고 고백한다. 성도와 교제가 멀어져 힘들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권면을 성령께서 이 편지를 통해 하신다. 진리를 행하라. 그것이 주님과 성도의 기쁨을 충만하게 할 것이다. 서로 사랑하라. 말이나 감정이 아닌 행함으로 사랑하라. 그것이 우리가 진리를 따라 행하고 진리를 위해 함께 일한다는 확신과 만족을 줄 것이다.
3) 거짓을 경계하라(7-11절)
진리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과 함께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꼭 필요한 권면이 있다. 그것은 요한이 부녀와 그 자녀들에게 이어서 권면했던 것 곧 거짓 교훈을 경계하고 멀리하는 것이다. 왜? 거짓 교훈이 진리와 사랑을 실천하는 걸 방해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쓸 당시에 성도를 미혹하는 거짓 교훈은 영지주의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교리였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초월적인 분이시니 더러운 육신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요한은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라고 말했다(7절).
교회를 미혹하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 적그리스도는 단지 영지주의자만을 가르키는 게 아니었다. 그런 자들이 세상에 많이 나왔다(7절). 요한은 지나쳐(벗어나)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했다(9절). 그리스도의 교훈 밖으로 벗어난 모든 자, 그 교훈 안에 거하지 않는 모든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다. 성경 해석의 견해가 다른 성도를 말하는 게 아니다. 명백히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거짓 교훈을 고집스럽게 주장하고 퍼뜨리는 자를 말한다.
진리와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는 누구를 영접하고 거절할 것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8절에 요한이 경계한 것처럼, 스스로 삼가야 한다(경계하고 조심하여 살펴보라). 결코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아야 할 대상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지지 않은 자 곧 거짓 교훈으로 성도를 미혹하게 하는 자다(10절).
만일 거짓 교사를 영접하고 대접한다면 결국 그가 행하는 일 곧 교회를 미혹하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요한은 11절에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교훈에서 벗어난 것을 가르치는 사람, 책, 미디어, SNS, 기타 모든 것에서 스스로 삼가라. 경계하라. 집 안에 들이지 말고 반갑게 맞이하지 말라. 진리와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큰 장애물이 된다.
수십 년간 벌어 모은 돈을 한순간 사기로 몽땅 잃어버리면 얼마나 허탈하고 참담하겠는가? 마찬가지로 8절에 나오는 것처럼 당신이 진리와 사랑으로 열심히 일한 것을 거짓에 미혹되어 잃어버리지 말라. 당신이 모시는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온전한 상을 받기 원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바른 교훈 안에 거하기를 힘써야 한다. 따라서 거짓 교훈을 경계하고 멀리해야 한다.
2. 그 이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맛보려면…(3절)
편지의 끝 인사를 보면, 요한은 진리와 사랑 가운데 행하는 부녀와 그 자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12절). 하지만 그는 종이와 먹으로 쓰기보다 오히려 직접 그들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기 원했다.
직접 만나서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 그들의 기쁨이 충만해 질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편지를 받는 대상인 여성도에겐 믿음 안에 있는 여자 형제들이 있었는데, 그 자녀들도 요한의 편지를 통해 인사를 전했다(13절).
요한은 직접 만나 교제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이 짧은 편지를 통해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권면을 긴급하게 전달하여 당부하기 원했다. 진리를 행하라, 서로 사랑하라, 거짓 교훈을 경계하라.
우리는 거의 매주 설교 시간에 이와 같은 가르침을 받는다. 말씀을 가까이 두고 진리의 말씀대로 행하라는 권면,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는 권면, 거짓 가르침에 속지 말고 멀리하라는 권면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들었다.
그런데 왜? 왜 그래야 하는가? 때로 우리는 아무런 목적이나 이유 없이 말씀을 읽고 순종해야 한다는 막연한 의무감을 갖는다.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어렴풋한 책임감을 갖는다. 왜 그래야 하는가? 왜 우리는 진리와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가?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는 거짓 교훈을 경계해야 하는가? 3절을 주목하여 보자.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이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3절)
소망을 빌고 있는 게 아니다. 기도를 올리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며 선포하고 있다. 무엇을 선포하는가?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진리를 선포한다. 그런데 성부 성자 하나님의 은혜, 긍휼, 평강이 무엇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는가? 진리와 사랑이다.
진리를 행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맛본다. 성도를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맛본다. 그래서 진리를 행하고 서로 사랑하며 거짓 교훈을 멀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대하고 그분의 넘치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경험하기 위해서. 이것을 맛보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무슨 힘으로 지속할 수 있겠는가?
특별히 은혜-긍휼(자비)-평강은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게 점점 다가오는 사랑의 경로를 보여준다.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우리에게 긍휼로 부어지고 그것을 맛볼 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평강을 누린다. 우리가 진리를 행할 때,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은혜-긍휼-평강을 맛볼 수 있다.
삶이 평탄하고 여유로울 때 우리는 진리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그럴 때일수록 나태함을 타고 거짓 교훈이 우리를 죄로 이끌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고전 10:12; 엡 4:27-“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삶이 험난하고 어렵고 고달플 때 우리는 진리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환경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맛보는 것만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하고도 넉넉한 힘이 되기 때문이다(빌 4:7).
신약 성경의 편지 마다 ‘은혜와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는 축복으로 끝을 맺는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절대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맛보지 않으면 우리는 나태해지고 멀어진다. 진리를 행하라. 서로 사랑하라. 거짓을 경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