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온 지 4일 째 되는날.
우리는 모스크바에서 비행기를 타고 세인트 페테스부르크(상뜨 뻬쩨르부뤀)로 간다.
카잔 성모 성당
넵스 대로에서 본 운하와 멀리 피의 구세주 성당
니콜라이 1세 동상
페테스부르크는 유럽을 흠모하던 피터(표트르) 대제가 러시아의 번영을 기원하며
모스크바에 있던 수도를 유럽 가까이로 옯겨가기 위하여 작정을 하고 계획한 도시이다.
페테스부르크는 크고 작은 101개의 섬이 365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고
그 중에 12개는 큰 배가 드나들 수 있는 개폐교인 아름다운 도시란다.
더우기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에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니 더욱 기대가 크다.
게다가 지금이 마침 백야 축제 기간 중인데 300년 전통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발레 공연 대신에 베르디의 오페라 <운명의 힘>을 공연한다고 했다.
베르디 당시에 이 극장에서 초연을 했던 작품이란다.
한국에서 미리 입장권을 예매하여 좌석까지 배정을 받아가지고 온 오페라가 왜 하필
<운명의 힘>이었을까? 어쩌면 우리의 이번 여정 자체가 다 운명의 힘에
이끌리어 온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일행들은 모두 각자가 준비해 온 정장을 차려 입고 길을 나섰다.
오늘 페테스부르크에 도착해서 겨울궁전(에르미따쥐 미술관)을 관람하고는
호텔에 체크인을 하지 못한 채 저녁 먹고 곧장 오페라를 보러 가야하기 때문이었다.
여행객 티가 너무 나지 않게 정장 차림을 하고 비행기를 타니 기분이 새롭다.
모스크바에서 페테스부르크까지는 비행기로 1시간 10분쯤 걸렸다.
페테스부르크는 모스크바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모스크바는 어딘지 칙칙하고
조금은 경직되어 있는 듯한 분위기였는데 여기는 유럽풍이 강했다.
아참...모스크바에서는 하룻밤을 자도 거주신고를 해야 했다.
체크인을 하면서 여권을 호텔측에 보여 주어야 하고, 며칠을 머무를 것인지
다 문서로 작성했다.그랬다가 모스크바를 떠날 때에는 여권과 함께
그 증명서를 보여주어야 했다.
호텔에서도 키를 가지고 마음대로 다닐 수 없고,방에서 나오면 복도 끝에
지키고 있는 감시인에게 키를 맡기고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종이를
받아 가지고 다녀야 했다.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먹을 때에도 종이를 보여
주어야 하고 저녁에 방에 들어갈 때에는 그 종이를 감시원에게 주어야
키를 내주었다.로비에 있는 엘리베이터 입구에도 거구의 감시원이 떡
버티고 서서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일일이 감시했다.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의 잔재인가 보다 하면서도 드나들 때마다 왠지 불쾌하고
심기가 편하지 않은게 사실이었다. 내 스스로 자유인임을 자처하며
매 순간을 내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기 원하고 누군가에게 통제 당하는 것
자체를 지독히도 싫어하는 내 성향 때문에 조금 더 예민했을지도 모른다.
페테스부르크 공항에서 마중 나온 가이드를 만나 버스를 타고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니콜라이 궁으로 갔다.
궁전에서의 점심식사...마침 우리는 오페라에 갈 복장을 하고 있어서 붉은
카펫이 깔린 궁전의 계단과도 잘 어울렸다.천장이 우리나라 아파트의 세배
이상 되게 높고무도회를 열기에 적합한 넓은 홀에 우리의 식탁이 정갈하게
준비되어 있었다.옛 궁정의 시종 복장을 한 젊은 종업원들의 정중한 시중도
좋고 러시아식으로 요리를 한 수프와 샐러드, 쇠고기 요리도 아주 맛있었다.
무대로 쓰였을 앞쪽 가운데에 그랜드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고 혈색이 좋고
금발인 러시아 여인이 아주 경쾌한 표정으로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를 보더니 <백만송이 장미><백학>등 내가 미치도록 좋아하는
곡을 들려 주었다.음악이 지니고 있는 신비로운 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녀의 피아노 소리는 내 심장 깊은 곳을 파고 들어와 온 세포 구석구석을
다 헤집고 다니며 내 안에서 잊혀졌던 기억들과 내 속에 있는 다른 나를 다 불러냈다.
여하튼 지금은 어린 시절에 막연히 꿈 꾸었던 영화같은 순간. 내 삶 자체가
귀한 선물처럼 느껴지고 모든 것에 대한 감사로 마음이 벅차다.
이래서 인생은 살아볼만한 것이로구나. 감동과 함께 먹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겨울궁전으로 향했다.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계속)
겨울 궁전 광장
황금 공작 시계를 보는 관광객들
겨울 궁전 내부
겨울 궁전 내부 황금의 방
겨울 궁전 내부 벽화
람플란트 방-돌아온 탕아
겨울 궁전(에르미따쥐 박물관)은 예까쩨리나 2세 여제가 건립한 궁전으로
현재 대영 박물관, 루블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거대한
박물관이기도 하다.특히 이 곳에 전시된 물건들은 모두 값을 쳐서 지불하고
구입한 것으로 외국에서 훔치거나 일방적으로 약탈을 해 온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자랑이라고 했다.
1057개나 되는 방에 전시된 작품만 해도 300만점이 넘어서
하루에 8시간 동안 본다는 걸 전제로 한 작품을 1분씩만 보고 지나가더라도
한바퀴를 제대로 돌아 보려면 5년은 족히 걸린다니
그 규모에 우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공작석과 대리석과 황금과 카펫과 크리스탈로 치장을 한 내부의
화려함은 보는 이의 입이 저절로 딱 벌어지게 만들었다.가이드는 우
리가 꼭 보아야 할 중요한 방만 보여 줄테니 잘 따라오라고 하면서
작은 무선 인터폰을 우리 귀에 하나씩 걸어 주었다.
우리는 눈으로는 그 모든 보물들을 보고
손으로는 슬쩍슬쩍 사진도 찍고
귀로는 끊임없이 조잘거리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부지런히 그 많은 방들을 누비고 다니느라
총체적으로 바빴다.비록 우리 머리는 보고 돌아서는 순간
다 잊어버리고 말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건물 입구의 중앙 계단에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여왕이 긴 드레스를 입고 오르내리기 쉽게 하려고 그랬는지
다른 궁전보다 계단의 높이가 낮고 경사가 완만했다.
- 여러분, 이 붉은 카펫에서 벗어나지 마시고 당당하게 올라오세요.
이 카페트는 우리기업 삼성에서 새로 싹~ 깔아 준 것이거든요.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가이드의 상기된 목소리에 우리도 기분이 으쓱해졌다.
외국에 나가면 모두가 자동적으로 애국자가 된다더니 그 말이 맞다.
하기사 나도 20여년 전에 미국에서 살 때 거리에서 지나가는 현대 자동차만 봐도
반갑고 자랑스러워서 콧등이 찡하곤 했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