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명順命 / 백남일
“넌, 참 좋겠다!”
장례식장 영정 앞에서 향촉에 불을 댕기며 중얼거리는 김 여사의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평생 붙어살다시피 했다던 초등학교 동창생이 유명을 달리했는데, 겨우 한다는 소리가 죽어서 좋겠다고? 이 기상천외의 넋두리에 나는 그만 아연실색啞然失色할 수밖에 없었다.
죽음, 우리가 늘 두려워하면서도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죽음 아닌가. 그래서 몽테뉴는 “죽음은 우주 질서 중 가장 엄숙한 질서”라고 힘주어 말했나 보다.
그동안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철칙이야 왜 진작 모르고 살아왔나? 하지만 나는 평소 영원히 죽지 않을 것같이 ‘죽음’을 외면한 채 살아왔다. 죽음 따위는 애당초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남의 일로만 치부하고 살아온 것이다. 한데, 고슴도치 외 따 지듯 미수米壽를 코앞에 두고 보니, 이제 나도 떠날 채비를 해야만 될 것 같아 사그라져 가는 노을빛을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가친께선 고희를 목전에 두고 돌아가셨다. 그런데 나는 당신보다 15년을 더 살고 있으니 불효인가, 아니면 행운아인가? 어쨌거나 천수를 누리고 있으니 천지신명께 절로 고개가 조아려진다.
평소 김 여사의 잔병치레는 유별났다. 옆에서 보기에도 자닝스럽기 그지없었다. 당뇨에 고혈압은 흔해 빠진 노인병이니 응당 그러려니 한다지만, 늘그막에 찾아온 신부전腎不全으로 투석을 받기 위해 일주일에 3일간은 꼬박 4시간씩 병원 신세를 진다. 형편이 그러하니 여행은 고사하고 이웃집 나들이에도 숨이 차고 피로감에 녹초가 되니,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고 그미는 만날 때마다 한숨을 토해냈다.
남들은 콩팥이식을 하면 생존율이 90% 이상이라고 이식수술을 권했지만, 그 또한 평생 면역억제제를 복용해야만 하는 번거로움과 장기기증자를 구하는 것도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목숨 붙어있는 게 철천지원徹天之冤이었을 게다. 해서, 자살도 여러 번 생각해 봤다고 한다. 그러나, 안심립명安心立命이라고 시름을 잊고 천명天命에 맡기기로 작정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더라는 것이다.
요즘 신조어로 대두된 ‘고독사孤獨死’란 단어가 헌 잠방이 무엇 불거지듯 한다. 본래 고독은 어려서 부모를 잃었거나 늙어서 자식이 없는 외로움을 뜻한다. 한데, 이 무슨 뚱딴지같이 ‘외로운 죽음’이라니, 누군 즐거운 죽음을 맞이하고 있나?
독거노인의 주검이 한 달여 만에 이웃에 의해 발견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이는 대가족제도의 붕괴에서 온 가정해체의 필연적인 비극이다. 통계에 의하면 1인 가구의 비율이 40%에 육박한다니, 열 가구 중 네 집이 나 홀로 족으로 외롭게 살다가 나 홀로 죽어가는 전대미문의 기막힌 현실이다. 그러니 눈물 어린 가족이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엄숙히 죽어간다는 것은 구시대의 풍속도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최상위다. 매일 5,6명이 최후의 선택권을 미련 없이 행사하고 있으니 이를 어쩌나? 암담한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삶의 소용돌이에 부대끼다 못해 독배毒杯를 드는 그 심정인들 오죽할까?
고종명考終命은 오복 중의 하나다.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든 불행하게 살았든 간에 타고난 명대로 살다가 죽는 건 거스를 수 없는 자연현상이다. 그래서 불가佛家에선 생주이멸生住異滅이라 했다. 한데, 지상의 모든 생명체는 우주의 섭리대로 생성과 사멸을 순차적으로 이어가는데, 유독 인간만이 그 순리에 역행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나니 이는 인류의 참극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매사에 부대끼며 견디는 일이다. 병마의 고통에 견디고 군중 속의 외로움에 견디며, 개똥밭의 악취에 견뎌내며 살아가는 것이 이생의 실상이 아닐까?
삶이라는 버거운 짐을 홀가분하게 부리고 떠난 친구를 부러워한 김 여사의 소회素懷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판도라’의 비극을 떠올리곤 한다. 이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자기 부인이 부정不貞을 저질렀다고 생판 오해를 한 끝에 아내를 처참하게 살해하고 만다. 이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사실을 감지한 신神은 노발대발하여 이 살인자에게 세상에 없는 가장 혹독한 벌을 내린다.
처벌의 핵심은 ‘너는 영원토록 죽지 못할지어다’였다니, 생각만 해도 소름 돋는 끔찍한 형벌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