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전(吳主傳)
손권은 자가 중모(仲謨)이다. 그의 형 손책이 강동의 여러 현을 평정했을 때, 손권은 나이가 15세였는데, 양선현(陽羨賢)의 장(長)으로 임명됐다. 그는 군에서 효렴으로 추천되었고, 주에서 무재로 천거되었으며, 봉의교위(奉義校尉)를 대행했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손책이 멀리 있으면서도 신하로서의 책임을 다하여 공물을 상납했으므로 사자 유완(劉琬)을 보내 작위와 관복을 주었다. 유완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제가 보건대, 손씨(孫氏) 형제는 비록 각기 재능이 출중하고 사리에 통달했을지라도 모두 수명이 길지 못합니다. 오직 둘째 효렴(손권)만은 모습이 기이하고 특이하며 골상(骨相)도 평벙하지 않아 크게 귀하게 될 징조가 있으며, 수명 또한 가장 깁니다. 여러분들은 제 말을 시험삼아 기억하십시오."
건안 4년(199), 손권은 손책을 따라 여강태수 유훈을 징벌하러 갔다. 유훈을 격파한 후, ]진군하여 사선(沙羨)에서 황조를 토벌했다.
5년(200), 손책이 죽게 되자, 대사를 손권에게 맡겼다. 손권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손책의 장사 장소가 손권에게 말했다.
"효렴, 이 어찌 울고 있을 때입니까? 더구나 주공(周公)이 상례(喪禮)를 세웠으나 아들 백금(伯禽)이 따르지 않았던 것은 아버지를 거스르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 당시 부득이 상례를 시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현재 사악한 자들이 서로 각축을 벌이고 있으며, 시랑이 같은 자들이 길에 가득 차 있는데, 오히려 가까이 있는 자(손책)를 애도하려고 상례의 규정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문을 열고 강도를 불러들이는 것과 같은 것이지, 인(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손권의 상복을 바꿔입게 하고, 말에 올라 밖으로 나가 군대를 순시하도록 했다. 이 당시 손권은 오직 회계촵오군촵단양촵예장촵여릉만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중 몇몇 군은 멀리 험준한 곳으로서 아직 전부 복속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천하의 영웅과 호걸들이 각 주와 군에 퍼져 있었으며, 빈객으로 의탁하고 있는 선비들도 개인의 안위(安危)로서 자신이 가서 머물 곳을 결정하였으므로, 군주와 신하의 두터운 관계는 없었다. 장소와 주유 등은 손권이 자신들과 함께 대업을 이룰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을 맡기고 손권에게 종하여 섬겼다.
조조는 표를 올려 손권을 토로장군으로 임명하고 회계태수를 겸임하도록 했다. 손권은 오에 주둔하면서 오군의 승(丞)을 회계군으로 보내 문서와 사무를 처리하도록 했다. 손권은 장소를 태사촵태부의 예로써 대우하고, 주유촵정보촵여범 등을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재능이 걸출한 사람들을 부르고, 예로써 명망있는 선비를 초빙하였으므로 노숙(魯肅)촵제갈근 등이 비로소 빈객이 되었다. 손권은 부장들을 각지로 파견해, 산월족(山越族)을 진압하고 어루만졌으며,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토벌했다.
7년(202), 손권의 어머니 오씨(吳氏)가 세상을 떠났다.
8년(203), 손권은 서쪽으로 황조를 토벌하러 가서 그의 수군을 격파시켰으나 오직 성만큼은 함락시킬 수 없었는데, 산월족이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손권은 군대를 돌려 예장을 지나와서 여범으로 하여금 파양( 陽)을 평정하도록 하고, 정보에게는 악안(樂安)을 토벌하도록 했으며, 태사자(太史慈)에게는 해혼(海昏)을 다스리도록 했다. 한당촵주태촵여몽 등은 다스리는데 어려움이 있는 여러 현의 현령이나 장으로 임명됐다.
9년(204), 손권의 동생인 단양태수 손익이 측근에게 살해되었으므로,
사촌형 손유(孫瑜)가 손익을 대신했다.
10년(205), 손권은 하제(賀齊)에게 상요(上饒)를 토벌하도록 하고, 상요를 분할하여 건평현(建平縣)을 만들었다.
12년(207), 서쪽으로 황조를 정벌하여 그의 관리와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13년(208) 봄, 손권은 또 다시 황조를 정벌하러 갔다. 황조는 먼저 수군을 파견하여 손권의 군대를 막았는데, 도위 여몽이 황조의 선봉을 격파시키고, 능통( 統)과 동습(董襲) 등이 모든 정예부대로 황조를 공격하여 마침내 그의 성을 함락시켰다. 황조는 혼자 몸으로 달아났지만, 기사 풍칙(馮則)이 추격하여 그의 머리를 베고, 그의 부하 남녀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 해, 하제에게 이현( 縣)촵섭현(?縣)을 토벌하도록 하고, 흡현을 분할하여 시신현(始新縣)촵신정현(新定縣)촵여양현(?陽縣)촵휴양현(休陽縣)을 만들었으며,
이 여섯 현으로 신도군(新都郡)을 만들었다. 형주목 유표가 죽자, 노숙이 명을 받들어 유표의 두 아들을 위로하고, 아울러 형주의 변화를 관찰하기를 원했다. 노숙이 형주에 도착하기 전에 조조가 이미 변방지역까지 진군해 왔으므로, 유표의 아들 유종(劉琮)은 무리를 바치고 항복했다. 유비는 남쪽으로 장강을 건너려고 하다가 노숙과 만나게 되었다.
노숙은 그 기회에 손권의 뜻을 전달하고, 그를 위해 오늘 이후 일의 성패(成敗)에 대해 진술했다. 유비는 진군하여 하구(夏口)에서 주둔하면서 제갈양을 손권에게 보내 만나도록 했다. 손권은 주유와 정보 등을 유비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이때 조조는 방금 유표의 병력을 얻었으므로 형세가 매우 강성하였다. 손권의 많은 모사들은 모두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두려워하였으며, 대부분 손권에게 조조를 맞아들여 항복하도록 권유했다. 오직 주유와 노숙만이 조조에게 저항할 것을 주장하여 손권과 뜻을 같이 했다. 주유와 정보는 좌우독(左右督)이 되어 각각 1만 명을 인솔하여 유비와 함께 진격해 적벽(赤壁)에서 맞부딪쳐 조조 군대를 크게 격파시켰다. 조조는 남아 있는 배에 불을 지르고 군대를 이끌고
물러났다. 사졸들은 굶주리고 역병이 유행하였으므로 죽은 자가 대부분이었다. 유비와 주유 등은 또 남군(南郡)까지 추격했다. 조조는 그대로 북쪽으로 돌아오고, 조인과 서황에게는 강릉을, 악진에게는 양양을 지키도록 했다. 그 당시 감녕(甘寧)은 이릉(夷陵)에서 조인의 부하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손권은 여몽의 계책을 써서 능통을 남겨 조인에게 저항하도록 하면서, 그 중 절반의 병력은 감녕을 원조했다.
이 때문에 오나라 군대는 승리하여 돌아왔다. 손권은 직접 병사들을 인솔하여 합비를 포위하고, 장소에게 구강군의 당도현(當塗縣)을 공격하도록 했다. 장소의 병력은 불리했는데, 손권은 성을 공격한 지 한달이 넘었지만 함락시킬 수 없었다. 조조는 형주에서 돌아와 장희(張喜)를 보내 기병을 이끌고 합비로 가도록 했다. 조조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손권은 후퇴했다.
14년(209), 주유와 조인이 서로 대치한 지 1년여가 넘어,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매우
많았다. 조인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손권은 주유를 남군태수로 삼았다. 유비는 표를 올려
손권에게 거기장군을 대행하도록 하고 서주목을 겸임하도록 했다.
유비는 형주목을 맡아 공안(公安)에 주둔했다.
15년(210), 예장을 분할하여 파양군( 陽郡)을 만들고, 장사군을 나누어 한창군(漢昌郡)을
두었으며, 노숙을 태수로 임명하여 육구(陸口)에 주둔하도록 했다.
16년(211), 손권이 관소를 말릉( 陵)으로 옮겼다. 다음해, 석두성(石頭城)을 수축하고
말릉을 건업(建業)으로 고쳤다. 조조가 장차 침략해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유수오(濡須塢)를 만들었다.
18년(213) 정월, 조조가 유수를 공격해 손권과 한달 남짓 서로 대치했다. 조조는 멀리
손권의 군대를 보고 그들의 정제하고 엄숙함을 찬탄하고는 곧 물러갔다. 당초에 조조는
장강 북쪽 해안의 군과 현을 손권에게 탈취당하게 될 것을 걱정하여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내지(內地)로 이주하도록 명령했다. 백성들은 서로 놀랐으며
여강(廬江)촵구강촵기춘( 春)촵광릉의 10여 만 호가 모두 장강을 건너 동쪽으로 이주했다.
장강 서쪽은 그래서 텅 비게 되어 합비 남쪽으로는 오직 환성( 城)만이 있게 되었다.
19년(214) 5월, 손권이 환성을 정벌했다. 윤달에 환성을 함락시키고, 여강태수 주광(朱光)과
참군 동화(董和), 남녀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 해, 유비가 촉을 평정했다. 손권은 유비가 이미 익주를 손에 넣었으므로 제갈근을 시켜
형주의 여러 군을 돌려주도록 요구했다. 유비는 허락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양주를 취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양주를 평정한 후에 곧바로 형주를
오나라에 전부 돌려주겠습니다."
손권이 말했다.
"이는 빌렸으면서 돌려주지 않는 것이며, 공허한 말로 시간을 끌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쪽 세 군(장사촵영릉촵계양)의 태수를 두었다. 그러나 관우가 이들을 모두
내쫓았다. 손권은 매우 노여워하며 즉시 여몽을 파견해
선우단(鮮于丹)촵서충(徐忠)촵손규(孫規) 등의 병사 2만 명을 지휘하여 장사촵영릉촵계양
세 군을 취하도록 하고, 노숙으로 하여금 1만 명을 인솔하여 파구(巴丘)에서 주둔하며
관우를 방어하도록 했다. 손권은 육구에 머물면서 여러 군대를 총지휘했다.
여몽이 도착하자, 장사와 계양 두 군은 모두 복종했는데, 오직 영릉태수 학보( 普)만이
투항하지 않았다. 마침 유비가 공안에 도착하여 관우에게 병사 3만 명을 이끌고
익양(益陽)까지 가도록 했다. 그래서 손권은 곧 여몽 등을 불러 돌아가서 노숙을 원조하도록
했다. 여몽이 사자를 보내 학보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자, 학보는 투항했다. 이렇게 하여
세 군의 장수와 태수를 모두 손에 넣었으므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손교(孫皎)촵반장(潘璋) 및 노숙의 병사들과 함께 전진하여 익양에서 관우에게 저항했다.
아직 싸움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마침 조조가 한중으로 들어갔다. 유비는 익주를 잃게
될까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손권과 강화하도록 했다. 손권은 제갈근에게 유비에게 가서
응답하도록 하여 다시 동맹을 맺었다. 그래서 형주를 나누어 장사촵강하(江夏)촵계양 동쪽
지역을 손권에게 귀속시키고, 남군촵영릉촵무릉(武陵) 서쪽 지역을 유비에게 귀속시켰다.
손권은 육구로부터 돌아와 바로 합비를 정벌하려고 했다. 합비를 공략할 수 없자, 군대를
철수시켜 돌아오려 했다. 병사들이 모두 길에 올랐을 때, 손권은 능통촵감녕 등과 함께
진(津) 북쪽에서 위나라 장수 장료(張遼)의 습격을 받았다. 능통 등이 죽을 각오로 손권을
방비했다. 그 사이 손권은 준마를 타고 진교(津橋)를 넘어 달아났다.
21년(216) 겨울, 조조는 거소(居巢)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곧이어 유수를 공격했다.
22년(217) 봄, 손권은 도위 서상(徐詳)을 파견하여 조조를 만나 항복을 청하도록 했다.
조조는 사자를 보내 화의에 동의한다고 대답하고 새로 결혼하게 될 것을 약속했다.
23년(218) 10월, 손권은 장차 오군으로 가서 직접 말을 타고 능정( 亭)에서 호랑이를
쏘려고 했다. 말은 호랑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손권은 쌍극(雙戟)을 던졌다. 호랑이가 상처를
입고 물러나자, 항상 따라다니던 장세(張世)가 창으로 공격하여 사로잡았다.
24년(219), 관우가 양양에서 조인을 포위하자, 조조는 좌장군 우금을 보내 조인을
구원하도록 했다. 때마침 한수가 불었기 때문에 관우는 수군을 이용하여 우금 등의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전부 포로로 잡아 강릉(江陵)으로 압송했다. 단지 양양성만은 함락시키지
못했다. 손권은 내심 관우를 두려워했지만, 겉으로는 자신의 공을 알리고 싶은 생각으로
조조에게 편지를 써서 관우를 토벌하는데 자신이 힘을 보태기를 청했다. 조조는 이것은
관우와 손권으로 하여금 서로 대치하여 싸우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역참(驛站)에게
손권의 편지를 조인이 있는 곳으로 보내 조인이 화살을 쏘아 관우에게 보이도록 했다.
관우는 머뭇머뭇하며 결정하지 못했다.
윤달, 손권은 관우를 정벌하려고 먼저 여몽을 파견해 공안을 습격하도록 하여
장군 사인(士仁)을 붙잡았다. 여몽이 남군에 도착하자, 남군태수 미방( 方)은 성을 바치고
투항했다. 여몽은 강릉을 차지해 그곳의 노약자를 위로하였으며, 우금 등의 죄수를
풀어주었다. 육손(陸遜)은 별도로 의도(宜都)를 손에 넣고,
자귀( 歸)촵지강(枝江)촵이도(夷道)를 수복하고 이릉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협구(峽口)를
지켜 촉의 침공에 대비했다. 관우는 당양으로 돌아와 서쪽으로 맥성(麥城)을 지켰다. 손권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관우는 거짓으로 항복하고 성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 틈을 타서 달아났다. 병사들은 모두 와해되어 흩어졌으며, 단지
10여 명의 기병만이 그를 따랐을 뿐이었다. 손권은 우선 주연(朱然)과 반장을 시켜 그가
지나갈 지름길을 끊어놓았다.
12월, 반장의 사마 마충(馬忠)이 장향(章 )에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關平)촵도독 조루(趙累)를 붙잡았다. 그래서 형주는 평정됐다.
이 해, 역병이 성행하였다. 손권은 형주 백성들의 조세를 전부 면제시켜주었다. 조조는 표를
올려 손권을 표기장군으로 임명하고, 가절을 주고 형주목을 겸임하도록 했으며,
남창후(南昌候)로 봉했다. 손권은 교위 양우(梁寓)를 보내 한황실에 공물을 바치도록 했고,
아울러 왕돈(王惇)에게 명하여 말을 사들이도록 했으며, 또 주광(朱光) 등을 석방하여
위나라로 돌아가도록 보냈다.
25년(220) 봄 정월, 조조가 세상을 떠났다. 태자 조비가 부친을 대신하여 승상과 위왕이
되었으며, 연호를 연강(延康)으로 고쳤다.
가을, 위나라 장수 매부(梅敷)가 장검(張儉)을 사자로 보내 손권에게 몸을 의탁하여
보살핌을 받게 해달라고 청했다.
남양군의 음(陰)촵찬( )촵축양(筑陽)촵산도(山都)촵중려(中廬) 다섯 현의 백성 5천 호가
와서 귀속되었다. 겨울, 위나라의 사왕(嗣王 ; 조비)이 존호를 칭하고 연호를
황초(黃初)로 바꿨다.
황초 2년(221) 4월, 유비가 촉에서 제(帝)로 칭했다. 손권은 공안(公安)에서
악성(鄂城)으로 천도하고 이름을 무창(武昌)으로 고쳤으며,
무창촵하치(下雉)촵심양(尋陽)촵양신(陽新)촵시상(柴桑)촵사선(沙羨) 여섯 현으로
무창군(武昌郡)을 만들었다.
5월, 건업(建業)에서 감로(甘露)가 내렸다는 보고가 있었다.
8월, 무창성을 수축하고,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 생존할 때는 멸망을 잊지 말며, 안정되었을 때 반드시 위험을 생각해야 된다는 것은
고대의 유익한 교훈이오. 옛날 준불의(雋不疑)는 한나라의 명신인데, 태평스런 세상에서도
칼을 몸에서 떨어지게 하지 않았소. 군자는 무비(武備)에 느슨할 수 없소. 하물며 현재
우리들의 몸은 변방지역에 있고, 사랑이 같은 악인들과 접하고 있는데, 경솔하게 갑작스런
사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소? 최근에 듣기로는, 장수들이 출입할 때 각자 겸손과
절약을 숭상하여 시종과 병사를 따르게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자신을 아끼려고
생각한 행위가 아닌 것이오. 자기를 보전하고 명성을 남겨 군주와 부모를 안심시키는 것이
어찌 위험에 처하고 치욕을 받는 것이겠소? 응당 깊이 경계하고 그 큰 생명을 힘껏
숭상해야만 하며, 이것이 나의 생각과 부합하는 것이오. ―
위문제가 제위에 오른 후부터, 손권은 사자를 보내 번국(藩國)이 되기를 구했으며,
아울러 우금 등을 돌려보냈다.
11월, 위문제가 손권에게 다음과 같은 책명을 내렸다.
― 성스럽고 명석한 군주의 제도에서는 덕행으로 작위를 세우고 공로로 봉록을 제정한다.
공로가 큰 자는 봉록이 후하고, 덕행이 높은 자는 두터운 예우를 받는다.
주공단(周公旦)에게는 성왕(成王)을 보좌한 공훈이 있었고, 강태공(姜太公)에게는 상(商)을
멸망시킨 공훈이 있었으므로, 모두 토지(즉 魯[노]와 齊[제])가 나뉘어 봉해지는 대우를
받았으며, 아울러 지위를 상징하는 물건을 받았다. 이것은 큰 공훈을 표창하는 것이며,
우수한 인물을 특별히 대우한 것이다. 가까이로는 한고조가 천명을 받았을 당초에 비옥한
토지를 나누어 여덟 성(姓)의 공신들에게 주어 왕(王)이 되도록 했다. 이것은 이전 시대의
아름다운 일이며, 후세 제왕의 귀감이다. 짐은 부덕한데도 천명을 받아 한왕실의 황통을
변혁하여 모든 나라에서 군림하고 국가통치의 병권을 잡게 되었다. 이전 시대의 성명한
군주에게 제(齊)를 보고 정무를 처리하며 앉아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도록 하기를 원한다.
경은 선천적으로 충성스럽고 총명하여 세상을 구제하는 재능으로 제왕을 보좌하고, 천명의
움직임을 깊이 이해하며, 국가의 흥망의 이치를 투철하게 보고, 멀리 사자를 보내
잠수(潛水)와 한수(漢水)에 배를 띄웠다. 소식을 들은 후, 그림자가 형체에 붙듯이 우리
조정에 마음을 의탁하고 상소하여 번속(藩屬)으로 칭하려고 했다. 아울러 비단과 갈포 등
남방의 공물을 바치고, 장수들을 모두 석방하여 우리 왕조로 돌아오도록 했다. 충성심과
공경심은 내부에서부터 나오고, 성실함이 행동에 나타나며, 신의는 금이나 돌에 새기고,
대의는 산하를 덮었으니, 짐은 이 점을 매우 칭찬하노라. 지금 그대를 봉하여
오왕(吳王)으로 삼고, 사지절(使持節)촵태상(太常)촵고평후(高平侯) 형정(邢貞)에게 명하여
그대에게 옥새, 수대(綬帶), 책서, 금호부(金虎符) 첫째부터 다섯째까지, 좌죽사부(左竹使符)
첫째부터 열 번째 것까지를 주도록 하고, 대장군촵사지절촵독교주(督交州)로써 형주목의
직무를 맡도록 할 것이다. 청색 흙을 백모(白茅)에 싸서 그대에게 하사하여(옛날에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방향을 나타내는 빛깔. 즉 동쪽은 청색, 서쪽은 백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 중앙은 황색의 흙으로써 봉역(封域)을 나타냄) 짐의 명령에 응답하여 드날려
동하(東夏 ; 동중국)를 다스리게 할 것이다. 표기장군촵남창후(南昌侯)의 인수와
부책(溥策)은 반납하라. 현재 또 그대에게 구석(九錫)의 예품을 더해 줄테니, 공경하게
이후의 명을 들으라. 그대는 동남쪽 땅을 안정시키고 장강 밖의 토지를 잘 다스려 한족과
이족이 편안히 실업을 하고 어떤 사람도 반역의 마음을 품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에게
대락(大? ; 천자가 제사에 나갈 때 타는 수레)과 융락(戎? ; 천자가 진영으로 나갈 때 타는
수레) 각 한 대, 검정말 여덟 필을 주겠다. 그대는 재정에 힘쓰고 농업을 장려하여 창고에는
식량과 물자로 가득하다. 때문에 그대에게 용을 수놓은 예복과 모자를 주고, 홍색 신발을
주겠노라. 그대는 덕으로 백성들을 교화시키고 예교를 성행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그대에게
당의 삼면의 배치하는 제후의 악대를 주겠노라. 그대는 좋은 사회 기풍을 창도하고
백월(百越)을 회유했다. 이 때문에 그대에게 홍색의 큰 대문이 있는 집을 주어 살도록
하겠다. 그대는 자신의 재간과 모략을 운용하여 현명하고 방정한 사람을 관리로 임명하였다.
이 때문에 그대에게 납폐(納陛)를 주어 전에 오르도록 하겠다. 그대는 충성스럽고 용감함을
함께 발휘하여 사악한 자를 말끔히 제거하였다. 이 때문에 그대에게 호분(虎賁)의 병사
백 명을 주겠다. 그대는 무위를 먼 곳에까지 떨쳤고 무력을 형남(荊南)에 날렸으며, 흉악한
추물들을 소멸시키고, 죄인들은 처벌을 받도록 했다. 이 때문에 그대에게 부( )와 월(鉞)을
각각 하나씩 주겠다. 그대는 안으로는 문치(文治)로서 화해롭게 하고, 밖으로는 무위로써
신임을 얻었다. 이 때문에 그대에게 동궁( 弓 ; 옛날 천자가 공로가 있는 제후에게 하사한
붉게 칠한 활) 열 개, 노시( 矢) 천 개를 주겠다. 그대는 충성과 정숙함을 기초로 하고,
공경과 검소함을 미덕으로 삼고 있다.
이 때문에 그대에게 거창( ; 울창주[鬱 酒]라고도 하는데 울금초를 쪄서 창주에 섞은
술로써 옛날에 신이 내려올 때 썼다고 한다) 한 유( ; 주로 울창주를 담는 그릇을
지칭함), 규찬(圭瓚 ; 종묘에서 쓰는 제기로 옥으로 만든 것)을 쪼개 주겠다. 존경하노라!
나는 그대가 선양한 선왕의 전적을 신중히 여기고, 나의 명령에 복종하고 우리 국가를
힘껏 보좌하여 그대의 위대한 공업이 영원히 빛나도록 하겠노라. ― 이 해, 유비가 군대를 인솔하여 손권을 치러 와서 무산(巫山)촵자귀( 歸)에 이르자, 사자를 보내 무릉(武陵)의 이민족들을 회유하고 관인과 부신(符信)을 주었으며 작위와 상을
약속했다. 그래서 여러 현과 오계(五谿)의 백성들은 모두 오를 배반하고 촉에 항복했다.
손권은 육손(陸遜)을 도독으로 임명하고, 주연과 반장 등을 이끌고 유비에게 항거하도록
했다. 도위 조자를 사자로 하여 위나라로 파견했다. 위문제가 조자에게 질문했다.
"오나라 왕은 어떠한 군주인가?"
조자가 대답했다.
"총명하고 어질며, 지혜롭고 웅대하고 재략이 있는 군주입니다."
위문제는 구체적인 상황을 물었고, 조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보통 사람들 속에서 노숙을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그의 총명함입니다. 보통 병사들
가운데서 여몽을 발탁했는데, 이것은 그의 현명함입니다. 우금을 붙잡았지만 죽이지
않았으니, 이것은 그의 어짊입니다. 형주를 취하면서 병기에 피를 묻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의 지혜로움입니다. 세 주를 차지하고 호랑이처럼 천하를 보고 있으니,
이는 그의 웅대함입니다. 폐하에게 몸을 굽혔으니, 이것은 그의 재략인 것입니다."
문제는 손권의 아들 손등(孫登)을 작위에 봉하려고 했다. 손권은 손등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
유로 편지를 올려 작위를 사양하고, 다시 서조연 심형(沈珩)을 보내 사의를 표했으며, 아울
러 지방 공물을 바쳤다. 손등을 왕태자(王太子)로 세웠다.
황무 원년(222) 봄 정월, 육손의 부장군 송겸(宋謙) 등이 촉의 주둔지 다섯 곳을 공격하여
모두 격파시키고 그 장수들을 참수했다.
3월, 파양군에 황룡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있었다. 촉나라 군대는 험준한 요새에 분산하여
점거하고 앞뒤로 50여 개의 진영을 두었는데, 육손은 상대방 병력의 경중에 따라 병사를
내어 대항하여 정월부터 윤(閏) 6월까지 대대적으로 격파시켰다. 전쟁터에서 목이 베이거나
무기를 버리고 투항한 촉나라 병사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 유비는 달아나 겨우 죽음을
모면했다. 당초 손권은 겉으로는 위나라를 의탁하며 섬겼지만, 진실된 마음으로 의지된 것은
아니었다. 위나라는 시중 신비(辛?)촵상서 환계(桓階)를 보내 오나라로 가서 손권과 맹약을
맺게 하고, 아울러 손권의 아들을 불러 임자(任子)로 임명하려고 했다.
손권은 사양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을 9월, 위나라는 곧 조휴촵장료촵장패에게 동구(洞口)까지 나가도록 명령하고,
조인에게는 유수까지 병사를 출동하도록 했으며, 조진촵하후상촵장합촵서황에게는
남군(南郡)을 포위하도록 했다. 손권은 여범 등에게 다섯 군대를 인솔하여 수군을 이용해
조휴 등을 막도록 하고, 제갈근촵반장촵양찬에게는 남군을 구하도록 했으며, 주환을 유수의
도독으로 임명하여 조인을 막도록 했다. 당시 양(楊)촵월(越) 땅의 이민족의 대다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아 내부적으로 환난이 제거되지 않은 상태였다. 때문에 손권은 매우 겸허한
언사로 위문제에게 편지를 올려 스스로 잘못을 고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 만일 저의 죄악이 사면되지 못한다면, 응당 토지와 백성들을 봉환(奉還)하고
교주(交州)에 몸을 기탁하고 여생을 끝마치기를 원합니다. ―
위문제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 그대는 혼란스런 세상에서 태어나 본래는 천하를 종횡할 뜻이 있었지만, 신분을 낮춰
위나라를 받들어 현재의 작위에 있게 되었다. 그대가 오왕으로 책봉된 이래, 바친 공물은
길에 가득했다. 유비를 토벌하는 공업은, 조정에서는 그대에게 의지하여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다. 여우처럼 묻었다가 또 파는 것은 옛 사람들이 부끄러워했던 것이다. 짐과 그대 사이는
대의로 이미 확정되었는데, 어찌하여 병사들을 수고롭게 하고 멀리 장강과 한수까지
출정하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조정의 의론은 군주된 자라도 말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삼공들이 그대의 과실을 보고했는데, 모두 근거가 있었다. 짐은 밝지 못하고, 비록
증삼(曾參)의 어머니가 북을 던진 의심이 있을지라도 대신들의 말이 진실이 아니기를
희망하는 것으로써 국가의 복으로 간주하였다. 때문에 먼저 사자를 보내 수고를 위로하고,
또 상서촵시중을 보내서 이전에 맺은 약속을 실행하도록 하였으며 그대의 아들을 인질로
삼기로 결정했었다. 그러나 그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아들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여 상의하던 대신들은 그대의 태도를 의아스러워 했다. 또 이전에 도위
호주(浩周)가 그대에게 아들을 보내도록 권유했었는데, 그것은 사실 조정의 신하들이 함께
도모한 의견이었으며, 이것으로써 그대의 본심을 추측하였다. 그대는 과연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밖으로는 외효가 아들을 광무제(光武帝)에게 보내고 충절을 끝까지 다하지 않은
예를 인용했고, 안으로는 두융(竇融)이 아들을 보내지 않고 충성을 지켰음을 비유했다.
하지만 세상도 다르고 시대도 변하여 사람들은 각각 마음이 있게 되었다. 호주가 돌아와
입으로 진술하면서 손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논의하는 자들로 하여금 점점 더 그대에게
의심을 더하게 했으며, 그대가 우리 조정을 시종 잘 받든다고 한 것의 기초가 의지할 바를
잃게 되었다. 나는 그래서 신하들의 상의에 순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현재 그대가 올린
편지를 살펴보니, 깊은 성심이 넘쳐흘러 나는 내심 매우 감개하였으며 애통해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날 즉시 조서를 내려, 여러 군대에게 단지 참호를 깊게 파고 보루를 높이
쌓을 뿐 경거망동하여 진군하지 말도록 명령했다. 만일 그대가 반드시 충의와 정절을
나타내어 사람들의 회의적인 의론을 제거하려고 한다면, 아침에 손등이 직접 경성에
도착하도록 하라. 그러면 저녁에 군대를 철수시켜 돌아오도록 명령을 할 것이다.
이 말의 진실은 대강(大江)과 같도다! ―
그래서 손권은 연호를 바꾸고 장강가에서 저항하며 수비했다.
겨울 11월, 큰 바람이 불었고, 여범 등의 병사 수천 명이 익사하여, 남은 군사는 장강
남쪽으로 돌아왔다. 조휴가 장패에게 날랜 배 5백 척과 죽음을 각오한 병사 1만 명을 주어
서릉(徐陵)을 습격하도록 하여 성의 수레를 불태우고 수천 명을 죽이고 포로로 잡았다.
장군 전종(全琮)촵서성(徐盛)은 위나라 장수 윤로(尹盧)를 추격하여 목을 베고 수백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12월, 손권은 태중대부 정천(鄭泉)에게 백제(白帝)에 있는 유비를 방문하도록 하여 비로소
우호관계를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손권은 의연하게 위문제와 서로 왕래하다가 후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절교했다.
이 해, 서릉(西陵)으로 고쳤다.
2년(223) 봄 정월, 조진은 군대를 나누어 강릉(江陵) 중앙의 사주(沙州)를 점거했다.
이 달, 손권은 강하산(江夏山)에 성을 쌓았다. 사분력(四分曆)을 바꿔 건상력(乾象曆)을
사용했다.
3월, 조인은 장군 상조(常彫) 등을 파견하여 병사 5천 명을 이끌고 유선을 타고,
새벽에 유수 중앙의 사주를 건너도록 했다.
조인의 아들 조태(曹泰)는 군사를 이끌고 급히 주환을 공격했다.
주환은 병사로 방어하면서 장군 엄규(嚴圭) 등을 파견하여 상조 등을 격파시키도록 했다.
이 달, 위나라 군대는 모두 퇴각했다.
여름 4월, 손권의 신하들이 손권에게 제위에 즉위할 것을 권유했다.
손권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유비가 백제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5월, 곡아(曲阿)에서 감로가 내렸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보다 앞서, 희구(戱口)의 수장(守將)
진종(晉宗)이 장수 오왕(王直[왕직])을 죽이고 병사들을 이끌고 모반하여 위나라로 들어갔다.
위나라는 그를 기춘( 春)태수로 임명했는데,
그 이후 진종은 변방지역을 여러 차례 침범했다.
6월, 손권은 장군 하제(賀齊)에게 명하여 미방( 芳)과 유소(劉邵) 등을 지휘하여
기춘을 습격하도록 했다. 유소 등이 진종을 생포했다.
겨울 11월, 촉은 중랑장 등지(鄧芝)를 시켜 오나라를 방문하도록 했다.
3년(224) 여름, 손권은 보의중랑장(輔義中郞將) 장온을 파견하여 촉을 방문하도록 했다.
가을 8월, 사형수들을 사면시켰다.
9월, 위문제는 광릉(廣陵)까지 출병하여 대강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저곳은 인물이 있으므로 도모할 수가 없겠구나."
그리고는 돌아왔다.
4년(225) 여름 5월, 승상 손소(孫邵)가 죽었다.
6월, 태상 고옹(顧雍)을 승상으로 임명했다. 환구( 口)에서 연리지(連理枝 ; 뿌리가 다른
두 나무 가지결이 서로 이어져 하나가 된 나무로서 상서로운 징조의 하나임)가 있다고
보고했다.
겨울 12월, 파양의 적 팽기(彭綺)가 자칭 장군이라고 하고 여러 현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병사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 해, 지진이 연이어 발생했다.
5년(226) 봄, 손권이 영(令)을 내려 말했다.
― 군사를 일으킨 지 매우 오래되어 백성들은 경작지를 떠났고, 아버지와 아들,
지아비와 아내가 서로 도울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런 상황을 매우 안타까워 하고 있다.
지금 북쪽의 적은 물러나 움츠리고 숨어 있으며, 중원 밖의 지역에는 전쟁이 없다.
각 주와 군에 명령을 내리니, 정책을 느슨하게 하여 백성들을 쉬도록 하라. ― 이때, 육손은 각지의 식량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장수들에게 농지를 개간하여 확대하도록
표를 올려 명령하도록 했다. 손권은 이에 대답했다.
"매우 좋은 의견이오. 지금 우리 부자도 직접 공전(公田)을 받아 수레를 끌고 온 여덟 필의
말을 넷으로 짝짓도록 하겠소. 비록 고대의 성군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백성들과 동등하게 수고를 하려는 것이오."
가을 7월, 손권은 위문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하(江夏)를 치고 석양(石陽)을
포위했지만, 함락시킬 수는 없었으므로 돌아왔다. 창오(蒼梧)에서 봉황이 출현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손권은 세 군(丹陽[단양]촵吳郡[오군]촵會稽[회계])의 열악한 땅 10현을 분할하여
동안군(東安郡)을 설치했다. 전종을 태수로 임명하여 산월(山越)을 토벌하여 평정했다.
겨울 10월, 육손이 눈앞의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상소를 올려 진술하면서 은덕을 펴고
형벌을 줄이며 세금을 느슨하게 하고 징용을 멈출 것을 권유했다. 또 이렇게 말했다.
"충성스런 말은 전부 진술할 수 없는데, 세상에 몸을 붙이고 사는 잗달은 신하가 자주
이로운 주장으로 당신에게 간언하기를 바랍니다."
손권이 이에 대답하여 말했다.
"법령의 설치는 악함을 끊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미연에 방비하려는 것이오. 어떻게
형벌을 설치하여 소인들을 위협하지 않겠소? 이것은 먼저 명령을 내리고, 이후에 법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지 법을 범하는 자가 있게 하려는 것이 아니오. 그대는 형벌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하는데, 나 역시 무슨 이로움이 있겠소? 단지 부득이 이렇게 한 것일 뿐이오.
현재 그대의 의견에 의하면, 응당 신하들에게 새롭게 자문을 구하고 상의하여 힘껏 따라 할
수 있어야만 하오. 게다가 가까이 있는 신하들이 바른 길로 나가도록 전부 말하여 간언하고,
친척들이 주군의 부족한 면을 보충하고 조언함으로써 군주의 잘못을 바로잡고 자신의
충성스럽고 신실함을 밝히는 것이오. 《상서》에서 말하기를, '내가 당신의 의견에 동의
한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굽히고 나를 따르지 마시오' 라고 했소. 내가 어찌 충언으로써
자신의 부족함을 보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겠소? 그런데 그대는 '감히 전부 진술할 수
없습니다' 라고 했으니, 어떻게 충성스런 말이라고 할 수 있겠소? 만일 지위가 낮은 신하들
중에서 받아들여 쓸 수 있는 의견을 제시한 자가 있다면, 어찌 사람으로 말을 버리고
채택하지 않을 수 있겠소? 단지 아첨하며 자신을 파는 자에 대해서는 비록 내가
어리석을지라도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소. 징용하는 일에 대해서는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통일의 공업은 여러분들의 지지에 의지해야만 성공할 수 있소.
만일 강동(江東)을 지키며 너그러운 정치를 행한다면, 병력은 저절로 사용하기에 충분할
것인데 또 많이 징용하겠소? 단지 앉아서 강남을 지키고 있는 것은 얕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소. 만일 미리 징용하지 않는다면, 아마 때에 임하여 곧바로 쓸 수 없을 것이오. 또 나와
그대는 신분과 명분이 현저하게 다르지만, 기뻐하고 근심하는 것은 실재로 같소. 그대가
보내온 표에서 말하기를, 감히 여러 사람들을 따라 하며 자신을 허용하여 구차하게 재난을
면하지 않겠다고 했소. 이것은 확실히 내가 만족해 하는 것이며 그대에게 바라는 것이오."
그리고 손권은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법령 조문을 잘 베끼도록 하고, 낭중 저봉(楮逢)에게
이것을 육손과 제갈근에게 보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곳은
삭제하거나 덧붙이도록 했다.
이 해, 교주를 나누어 광주(廣州)를 설치했으나, 오래지 않아 원래 모양대로 회복시켰다.
6년(227) 봄 정월, 장수들이 팽기를 체포했다.
윤 12월, 한당(韓當)의 아들 한종(韓綜)이 병사들을 인솔하여 위나라로 투항했다.
7년(228) 봄 3월, 손권은 아들 손려(孫慮)를 건창후(建昌侯)로 봉했으며, 동안군을 없앴다.
여름 5월, 파양태수 주방(周?)이 거짓으로 오나라를 배반하여 위나라 장수 조휴를 유인했다.
가을 8월, 손권이 환구에 도착하여 장군 육손을 파견하여 장수들을 이끌고 석정(石亭)에서
조휴를 크게 격파시켰다. 대사마 여범이 죽었다.
이 해, 합포군(合浦郡)을 주관군(珠官郡)으로 바꾸었다. 황룡 원년(229) 봄, 공경과 백관들이 모두 손권에게 정식으로 제(帝)를 칭하도록 권유했다.
여름 4월, 하구와 무창에서 나란히 황룡과 봉황이 출현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7일, 손권은 남쪽 교외에서 황제의 지위에 즉위하였으며, 이날 대사면을 실시하고 연호를
바꿨다. 부친 파로장군 손견을 추존하여 무열황제(武烈皇帝)라고 하고, 어머니 오씨(吳氏)를
무열황후(武烈皇后)라고 했으며, 형 토역장군(討逆將軍) 손책을 장사환왕(長沙桓王)이라고
했다. 오왕의 태자 손등을 황태자로 삼았다.
장리(將吏)들은 모두 작위가 올랐으며 상을 받았다.
당초, 흥평 연간(194~195)에 오(吳 ; 蘇州)에서는 이런 동요가 있었다.
황금 수레에 黃金車
아롱진 난초 귀. 班蘭耳
창문(昌門)을 열고? ?昌門
천자가 나온다. 出天子
5월, 손권은 교위 장강(張剛)과 관독(管篤)을 사자로 삼아 요동으로 가도록 했다.
6월, 촉은 위위 진진(陳震)을 파견하여 손권이 제위에 오른 것을 축하했다.
손권은 곧 촉나라 협의하여 천하를 나누어서 예주촵청주촵서주촵유주는 오에 속하게 하고,
연주촵기주촵병주촵양주는 촉에 귀속시켰다. 사주(司州) 땅은 함곡관을 경계로 삼았다.
맹약의 말을 정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하늘이 환난을 내려 한왕실의 계통은 질서를 잃고, 반역하는 신하들이 이 틈을 타서
국가의 대권을 탈취했다. 동탁에서 시작하여 조조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흉악한 무리들이
천하를 파괴하고 중원으로 하여금 분열되게 하여 천하에는 기강이 없어지고 백성들과
신령들은 고통스러워하고 원망하여 몸을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다. 조조의 아들 조비에
이르러서는 역행하여 수많은 흉악한 일을 하고 항상 사악하고 간사한 일을 하여 황제의
자리를 찬탈했다. 그리고 도가 부족한 조예는 조비의 악행을 답습하여 병력에 의지해
토지를 빼앗았는데, 앚익 형벌에 복종하여 죽임을 받지 않았다. 옛날 공공(共工)이 천하를
어지럽혔을 때, 고신(高辛)은 군대를 동원했고, 삼묘(三苗)가 법을 범하자 우순(虞舜)은
정벌을 했다. 오늘 조예를 멸하고 그의 무리를 붙잡는 일은 한과 오가 아니면 장차 또 누가
맡겠는가? 악인을 토벌하고 흉포함을 제거하는 것에는 반드시 그들의 죄행을 선포하고 응당
먼저 그들의 영토를 분열하여 그 토지를 빼앗아 사인(士人)과 백성들의 마음으로 하여금
각기 돌아갈 바를 알도록 해야 한다. 때문에 《춘추》에서, 진문공(晉文公)이 위(衛)를
토벌하기에 앞서 그의 토지를 나누어 송(宋)나라 사람들에게 주었던 것은 이런 이치인
것이다. 게다가 고대에는 위대한 공업을 세우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맹서를 하였기 때문에
《주례》에는 맹약을 주관하는 관리가 있었고, 《상서》에는 맹서를 선포하는 문서가
있었다. 한과 오는 비록 신의가 마음속에서 나왔지만, 토지를 구분하여 경계를 정하고
마땅히 맹약이 있어야 한다. 제갈승상은 덕망과 위엄을 먼 곳까지 빛냈으며, 본국의 황제를
도와 보필하고, 밖으로는 군대를 지휘했는데, 신의는 음양을 감동시키고 성실함은 천지를
감응시켰다. 다시 맹약을 맺어 성의를 확대하고 서약의 말을 준수하여 오와 촉의 사인과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함께 이 일을 알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단을 세우고 희생을 죽여
신령에게 분명하게 고하고, 한 차례 피를 묻혀 맹세하고 서약서를 희생의 입에 넣고,
그 부본(副本)을 천부(天府 ; 천자가 쓰는 물품을 보관하는 곳)에 보관한다. 하늘은 높아도
아래쪽의 말을 들을 수 있고, 신령의 위력도 위의 성실함을 도와 실현시킬 수 있으며,
사신(司愼)촵사맹(司盟)의 신은 여러 신령들과 이곳에 와서 제사를 받지 않지 않는다. 오늘
한과 오가 결맹한 이후에 힘을 합치고 마음을 하나로 하여 함께 위의 도적들을 토벌하고,
위험을 서로 구하며 재난을 나누고, 기쁨은 함께 하며 좋아하고 싫어함을 함께 하며, 어떤
사람이든 간에 두 마음을 품는 일은 없도록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촉을 위해한다면 오가
그를 토벌할 것이고, 만일 어떤 사람이 오를 위해한다면 촉이 그를 토벌할 것이다.
각각 자기의 봉토를 지키며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이 맹약이 후대에 전해져도
시종 이와 같이 한다. 무릇 모든 맹약은 모두 맹서(盟書)에 기재된 것과 같다. 성실한
언사는 화려하지 않으며, 그 실질은 우호관계에 있다. 어떤 사람이 이 맹약을 버린다면 화를
낳고 먼저 내부에 혼란이 있을 것이다. 두 마음을 갖고 협력하지 않고 천명에 태만하면,
신령과 상제가 그를 살피고 징벌할 것이며, 산천의 모든 신들은 그를 들어 주살하고,
그 군대를 멸망시키고 그 나라를 영원할 수 없도록 할 것이다.
위대한 신령이시여! 분명하게 살펴 주십시오! ―
가을 9월에 손권은 건업(建業)으로 천도했으나, 원래부터 역소에서 살았으므로 다시 관청을
짓지는 않았다. 상대장군(上大將軍) 육손을 불러 태자 손등을 보좌하도록 하고,
무창의 남은 일을 관장하도록 했다.
2년(230) 봄 정월, 위나라는 합비신성(合肥新城)을 지었다. 손권은 조서를 내려
도강좨주(都講?酒)를 설립하여 제자(諸子)들로 하여금 교육을 받도록 했다.
장군 위온(衛溫)과 제갈직(諸葛直)을 파견하여 무장을 한 사병 1만 명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이주(夷洲)와 단주(亶州)를 구하도록 했다. 단주는 바다 가운데 있었는데 노인들이
전하는 말로는, 진시황제가 방사(方士) 서복(徐福)을 보내 어린 소년과 소녀 수천 명을
데리고 바다로 들어가 봉래(蓬萊)의 신선과 선약(仙藥)을 구하도록 하였는데, 이 주에
이르러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 자손이 대대로 이어져 오늘날 수만 호가 되었고,
그 주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회계로 와서 베를 샀고, 회계 동쪽 현에 살고 있는 자가
바다를 가다가 또 태풍을 만나 단주까지 표류해 오기도 했다.
그곳은 매우 먼 곳에 위치하였으므로, 위온 등은 결국에는 이를 수 없었다.
단지 이주(夷洲)의 수천 명을 데리고 돌아왔을 뿐이다.
3년(231) 봄 2월, 태상 반준(潘濬)을 파견하여 병사 5만 명을 이끌고 무릉의 이민족을
토벌하도록 했다. 위온과 제갈직은 모두 조서를 거스르고 공로가 업었으므로 하옥되어
주살되었다.
여름, 산야에 있는 누에가 고치를 만들었는데, 큰 것은 마치 알 같았다. 야생벼가 저절로
생장하였으므로 유권현(由拳縣)을 화흥현(禾興縣)으로 바꾸었다. 중랑장 손포(孫布)는
거짓으로 투항하여 위나라 장수 왕릉(王凌)을 유인했다.
왕릉은 군사를 이끌고 가서 손포를 영접하려고 했다.
겨울 10월, 손권은 대군을 부릉(阜陵) 등에 잠복시켜 왕릉을 기다렸는데, 왕릉은 이것을
알고 달아났다. 회계군의 남시평(남始平)에서 벼가 자란다는 보고가 있었다.
12월 29일, 대사면을 시행하고, 다음해부터 가화 원년으로 바꾼다고 발표했다.
가화 원년(232) 봄 정월, 건창후(建昌侯) 손려가 죽었다.
3월, 장군 주하(周賀)촵교위 배잠(裵潛)을 파견하여 뱃길로 요동으로 가도록 했다.
가을 9월, 위나라 장수 전예(田豫)가 이들을 맞아 반격했다.
성산(成山)에서 주하의 목을 베었다.
겨울 10월, 위의 요동태수 공손연이 교위 숙서(宿舒)와 낭중령( 中令) 손종(孫宗)을
파견하여 손권에게 번국(藩國)이라고 칭하고, 아울러 모피와 준마를 바쳤다.
손권은 매우 기뻐하고, 공손연에게 작위를 주었다.
2년(233) 봄 정월, 손권이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짐은 부덕한데 천명을 받았으므로 아침 저녁으로 걱정하고 근신하며, 휴식을 취하거나
수면을 취할 틈이 없다. 세상의 환란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여 위로는 신령님의 비호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희망을 위로하기 원한다. 이 때문에 돌아다보면서 우수한 인물
을 열심히 구해 그들과 함께 힘을 합쳐 같이 천하를 평정하려 한다. 만일 마음을 같이 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과 함께 늙어갈 것이다. 지금 사지절촵독유주(督幽州)촵영청주목(領靑州
牧)촵요동태수촵연왕(燕王 ; 공손연)은 오랫동안 위나라의 핍박을 받아 멀리 한쪽에 떨어져
있어, 비록 우리 나라에 충성을 하려고 해도 그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오늘 그는
천명에 순응하여 멀리서 사자 두 명을 보내왔다. 그의 충성스런 마음은 분명하게 나타나며,
서술한 표에는 심오한 정이 나타나고 있다. 짐이 이것을 얻었으니, 어떤 기쁨이 이와 같겠는
가! 비록 탕왕이 이윤(伊尹)을 만나고, 주문왕이 여망(呂望)을 얻었으며, 세조(광무제)가 천
하를 아직 평정하지 못할 때 하우(河右)를 얻은 것도 오늘 여기에서 정해지는 것이다. 《상
서》에서 '군주 한 명에게 기쁨이 있으면, 만백성은 이것에 의지한다(一人有慶[일인유경],
兆民賴之[조민뢰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천하에 대사면을 시행하여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려고 하니, 주와 군에 명령을 내려 모두 이 일을 알 수 있도록 하라.
특히 연나라에 조서를 내려 나의 조서와 은덕을 받들어 선양하고,
온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이 경사를 모두 알도록 하라. ―
3월에 숙서와 손종을 귀국시키고, 태상 장미(張彌)촵집금오 허안(許晏)촵장군 하달(賀達)
등을 사자로 하여 병사 1만 명을 인솔하고 금, 보물, 진귀한 물건과 구석(九錫)의 모든
물품을 갖고 뱃길로 공손연에게 주었다. 이에 대해서 오나라 조정의 대신들은 승상 고옹
이하 모두 간언하여 공손연은 아직 믿을 만하지 못한데 오히려 총애와 대우가 지나치게
후하니, 단지 관리와 병사 수백 명을 보내 숙서와 손종을 호위하여 보낼 수 있다고 했지만,
손권은 끝까지 듣지 않았다. 공손연은 과연 장미 등의 목을 베어 그들의 머리를 위나라로
보내고 그들이 지니고 있던 무기와 물자를 빼앗았다. 손권은 매우 분노하여 직접 공손연을
정벌하려고 했는데, 상서복야 설종(薛綜) 등이 간절히 간언하여 그만두었다.
이 해, 손권은 합비신성으로 진격하며 장군 전종(全琮)을 파견하여 육안을 정벌하도록
했지만, 모두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3년(234) 봄 정월, 손권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 전쟁이 장기간 그치지 않아 백성들은 부역으로 고통을 당하며, 세금이 간혹
거두어지지도 아니하니, 각종 세금을 느슨하게 하고 다시는 재촉하여 징수하지 마라. ―
여름 5월, 손권은 육손과 제갈근 등을 파견해 강하(江夏)촵면구(沔口)에 주둔하도록 하고,
손소(孫韶)와 장승(張承) 등에게는 광릉(廣陵)촵회양(淮陽)으로 진군하도록 했으며,
자신은 대군을 인솔하여 합비신성을 포위했다.
이 당시, 촉의 재상 제갈양이 무공(武功)까지 병사를 이끌고 나왔으므로, 손권은 위명제가
멀리 나갈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위명제는 병사를 보내 사마선왕을 원조하여
제갈양에게 대항하고, 직접 수군을 이끌고 동쪽 정벌에 올랐다.
위명제가 수춘에 도착하기 전에 손권은 퇴각하여 돌아왔고, 손소 역시 공격을 멈췄다.
가을 8월, 제갈각을 단양태수로 임명하여 산월을 토벌하도록 했다.
9월 초하루, 서리가 내려 곡식이 많이 상했다.
겨울 11월, 태상 반준은 무릉의 이민족을 평정하러 갔다가 일을 마치고 무창으로 돌아갔다.
조서를 내려 다시 곡아현을 운양현(雲陽縣)이라 하고,
단도현(丹徒縣)을 무진현(武進縣)이라고 했다.
여릉(廬陵)의 도적 이환(李桓)과 나려(羅 )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4년(235) 여름, 여대(呂岱)를 파견하여 이환 등을 토벌하도록 했다.
가을 7월, 우박이 내렸다. 위나라 사자가 말을 진주촵비취촵대모와 교환하기를 구하자,
손권이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모두 내가 사용하지 않는 것들이고, 말을 얻을 수 있는데 어찌 그 교역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소?"
5년(236) 봄, 대전(大錢)을 주조하였는데, 대전 하나가 5백 개의 소전에 상당했다. 조서를
내려 관리와 백성들에게 동(銅)을 내도록 하고, 그 동을 계산하여 전을 주었다. 화폐 주조에
대한 처벌 조항을 만들었다.
2월, 무창에서 예빈전(禮賓殿)에 감로가 내렸다는 보고가 있었다.
보오장군(輔吳將軍) 장소(張昭)가 죽었다. 중랑장 오찬(吾粲)이 이환을 체포했고,
장군 당자가 나려 등을 체포했다. 10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더니, 여름까지 계속됐다.
겨울 10월, 혜성이 동방에 나타났다. 파양의 도적 팽단(彭旦)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6년(237) 봄 정월,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 3년 상(喪)은 천하에 통행하는 제도로서 사람의 감정이 지극히 애통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개인의 슬픔을 버리고 국가의 예법을 따르지만, 현명하지 못한
사람은 억지로 3년 상을 고수한다. 세상이 태평스럽고 성현의 도가 통하여 아래 위에 일이
없을 때에는 군자는 인간의 감정을 빼앗을 수 없다. 따라서 3년간이라는 기간이 효자의
가문에도 이르지 않는다. 나라에 일이 있을 때는 예절을 간소화하여 그 당시의 마땅함에
따르고 상복을 입은 대로 국사를 처리한다. 그래서 성인이 법령을 제정할 때도 예절이
있어도 제때가 아니면 실행되지 못했던 것이다. 상사를 당하고도 집으로 달려가지 않는
것은 고대의 예절이 아니지만, 시대의 변화에 순종하여 대의(大義)를 중시하고 사적인
감정을 잘라낸다. 이전에는 이런 이유로 하여 처벌을 정하고, 고급관리는 직무를 맡고
있으면서 상사를 당하면 반드시 교대자가 있어야만 했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범하는 자가
있고, 비록 그 과실을 살펴 죄를 다스린다고 하더라도 공무는 여전히 황폐해진다. 현재는
일이 많을 때이고 국가도 어려움이 많으니, 무릇 관직에 있는 관리들은 응당 각자 충성을
다하고 공적인 것을 앞에 두고 사적인 것을 뒤에 두어야 하며, 이 취지를 삼가 따르지 않는
것은 매우 의의가 없는 일이다. 중앙과 지방에 있는 관료들은 다시 이 일에 관해 상의하여
법령을 적당하게 하도록 노력하고 상세하게 조목을 만들도록 하라. ―
고옹이 상주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장례의식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것에 관한 법을 세움에 있어서 가벼우면 효자의
감정을 금지할 수 없고, 무거워도 본래 사형에 처해야만 되는 죄는 아닙니다. 설사 엄격한
형벌을 더한다고 하더라도 위반하는 자는 반드시 적을 것입니다. 만일 법을 범하는 자가
있을 경우, 처벌을 가중하면 사사로운 감정은 차마 하지 못하고, 처벌을 줄이면 법령이
폐지되어 실행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고급관리로서 먼 곳에 있는 자에게는
설령 상사가 있다고 해도 통지하지 않는다면 그 형세는 반드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대리자를 선발하는 시간에 만일 소식을 전하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고급관리가 직무를 팽개치는 걱정은 없을 것이고,
효자가 중형을 범하여 처벌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
장군 호종(胡綜)이 의견을 제시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상사에 관한 예절은 비록 전장(典章)에 의한 제도가 있다고 해도, 만일 비상 시기에 있지
않으면 집행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마침 전쟁 시기로 군사(軍事)와 일반 정사를 처리하는
상황이 다른데, 고급관리가 상사를 만났을 때 금지하는 조항이 있음을 알면서도 공공연히
과감하게 법에 저촉되는 행동을 한다면, 설사 효자가 부모의 상사를 듣고 달려가지 않는
치욕은 생각했을지라도 신하된 자가 금지하는 것을 범하는 죄는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법률 금령이 본래 가볍게 만들어진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신하는 국가에
충성하고 효도로써 집안을 세우며 벼슬에 나와 신하가 되는데, 어떻게 양자를 모두 가질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충신인 자는 효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마땅히 법률을 제정하여
사형으로써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만일 고의로 법을 위반한다면, 죄를 범한 것이므로
결코 사면시킬 수 없습니다. 사형을 실시함으로써 죽을 죄를 범하는 자를 막고,
이것으로써 한 사람을 처리한 그 이후에는 후손이 반드시 끊길 것입니다. ―
승상 고옹이 신하들의 의견에 동의하여 사형을 실시할 것을 주청했다. 그후 오현(吳縣)의
현령 맹종(孟宗)이 모친상을 당해 달려갔다가 일을 마친 후 직접 이름을 드러내어 무창의
감옥에 구금되어 형벌을 달게 받기를 표명했다. 육손은 그의 평소 행동을 서술하고 그를
위해 부탁을 했다. 손권은 그래서 맹종의 직위를 한 등급 줄여 주었으며, 이후에는 이러한
예는 생각할 수도 없다고 했다. 때문에 법을 위반하며 상가로 달려가는 일은 근절됐다.
2월, 육손이 팽단(彭旦) 등을 토벌하여 그 해에 모두 격파시켰다.
겨울 10월, 위장군 전종을 파견하여 육안(六安)을 습격하였지만 공략시키지 못했다.
제갈각이 산월을 평정하는 일을 마친 후, 북쪽으로 여강(廬江)에 주둔했다.
적오(赤烏) 원년(238) 봄, 한 개가 1천 소전에 상당하는 대전을 주조했다.
여름, 여대가 여릉(廬陵)의 적을 토벌하고 육구(陸口)로 돌아왔다.
가을 8월, 무창에서 기린이 출현했다고 한다. 담당관리는 기린은 천하태평의 상징이므로
마땅히 연호를 고쳐야 한다고 상주했다. 손권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 근래 붉은 색 까마귀가 궁전 앞에 모여 있었는데, 짐이 직접 보았다.
만일 이런 신령스런 새가 길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연호를 바꾸어 응당 적오(赤烏)를 원년(元年)으로 해야만 한다. ―
신하들은 다음과 같이 상주하여 말했다.
― 과거 주무왕이 은의 주왕을 토벌할 때, 붉은 색 까마귀의 길상이 있었고, 군주와
신하들이 이것을 보아 마침내 천하를 얻게 되었는데, 이 일은 성인이 역사서에 상세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최근의 일은 길상으로 생각되며, 직접 보았으니 또 명백합니다. ―
그래서 연호를 고쳤다.
보부인(步夫人)이 죽자, 황후로 추증했다.
당초, 손권은 교사(校事) 여일(呂壹)을 신임했는데, 여일은 성격이 가혹하고 법을 매우
엄하게 집행했다. 태자 손등이 이 점을 자주 간언했지만, 손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들은 이 때문에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이후에 여일의 간사한 죄악이 발각되어
주살당하게 되었는데, 손권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자책했으며, 곧 중서랑 원례(袁禮)를
시켜 여러 대장들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도록 하고, 이 기회에 그 당시의 정사에 있어서
고쳐야만 할 점에 관해 질문했다. 원례가 돌아오자, 손권은 또 조서를 내려
제갈근촵보즐(普?)촵주연(朱然)촵여대 등을 질책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원례가 돌아와 보고한 것에는, 자유(子瑜 ; 제갈근)촵자산(子山 ; 보즐)촵의봉(義封 ;
주연)촵정공(定公 ; 여대)과 함께 서로 만나보고, 아울러 그 당시 정사에 있어서 응당
앞뒤로 해야만 되는 일에 관해 질문했더니, 각자 민사(民事)를 관장하지 않았으므로
자신들의 의견을 진술할 수 없다면서 모두 백언(伯言 ; 육손)과 승명(承明 ; 반준)에게
미루었다고 했다. 백언과 승명은 원례를 만나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슬퍼하였고, 말하는
취지는 고통스러웠고 마음속으로는 위기와 공포를 갖고 있었으며, 불안한 마음이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매우 실망했으며, 매우 기괴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엇 때문인가? 무릇
성인은 잘못된 행위가 없게 할 수 있고, 현명한 사람은 스스로 관찰할 수 있다고 본다.
사람의 거동이 어떻게 모두 적중할 수 있겠는가? 내가 여러분의 의견을 함부로 거절하고
경솔하여 스스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의심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슨
까닭으로 이 지경에 이른 것이겠는가? 내가 군대를 일으킨 지 50년 간, 부세는 모두
백성들에게서 나왔다. 천하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반역하는 자들이 아직도 있으며,
사인과 백성들이 수고하며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확실히 내가 잘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는 일은 부득이한 것이다. 나는 여러분들과 함께 일 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성장하여 머리는 희끗희끗하게 되었다. 내심과 행위를 여러분들은 십분 알 수
있으며, 공사(公私)의 감정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서로 충분히 신임할 수 있다. 여러분들이
의견을 전부 말하고 직접적으로 간언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여러분들에게 바라는 것이다.
나의 허물을 보완하는 것은 나 역시 희망한다. 과거 위무공(衛武公)은 나이가 많았어도 뜻이
매우 커서 보좌할 신하를 간절하게 구하였으며, 왕왕 혼자 탄식하고 꾸짖었다. 또 일반
평민과 사귈 때에도 인정과 뜻으로써 합쳐 친구가 되었으며, 여전히 곤란한 상황 속에서도
변심하지 않았다. 오늘 여러분들은 나와 함께 일을 하면서 비록 군주와 신하의 대의명분은
있지만 골육지친도 또 이와 같음을 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영예촵행복촵기쁨촵슬픔을
그대들과 함께 할 것이다. 충성스런 자는 감정에 빠지지 않으며, 지혜로운 자는 도모함에
있어 남김이 없고 일의 시비(是非)에 대해서는 함께 책임을 지는데, 여러분들은 어찌
한가롭게 있겠는가! 우리들은 같은 배로 물을 건너는 것과 같은데,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겠는가! 제환공은 제후의 패자( 者)였는데, 그에게 선행이 있으면 관자(管子)가
일찍이 찬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그에게 허물이 있으면 일찍이 간언하며 그치지
않았었다. 지금 나 자신은 제환공의 덕이 없음을 반성하지만, 여러분들은 간언하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여전히 의심과 비난을 품고 있다. 이 점에서 말하면, 나는 제환공과
비교하여 진실로 우수하지만, 여러분들은 관자와 비교할 때 어떠한지 아직 모른다. 오랫동안
서로 보지 못했으니, 이 일에 대해서는 웃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이 함께 대업을 세우고
천하를 통일시켜야지, 마땅히 또 누가 있겠는가? 모든 일에는 당연히 줄이고 늘림이 있으며,
다른 의견을 즐겁게 들어 나의 부족한 점을 바로잡으려 한다. ―
2년(239) 봄 3월, 손권은 사자 양도(羊?)촵정주(鄭胄)촵장군 손이(孫怡)를 요동으로 가게
하여 위나라 수장(守將) 장지(張持)촵고려(高慮) 등을 공격하게 하여 남녀를 포로로 잡았다.
영릉(零陵)에서 감로가 내렸다는 보고가 있었다.
여름 5월, 사선(沙羨)에 성벽을 세웠다.
겨울 10월, 장군 장비(蔣秘)가 남쪽으로 이민족을 토벌했다. 장비가 이끄는 도독
요식(?式)이 임하(臨賀)태수 엄강(嚴綱) 등을 죽이고 자칭 평남장군(平南將軍)이라고 하며,
동생 요잠(?潛)과 함께 영릉촵계양(桂陽) 및 교주(交州)촵창오(蒼梧)촵울림(鬱林)의
여러 군을 동요시켰으며, 병력은 수만 명이나 되었다.
장군 여대와 당자를 파견하여 토벌하도록 했는데, 1년여 만에 모두 격파시켰다.
3년(240) 봄 정월, 손권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 대체로 군주는 백성이 없으면 국가를 세울 수 없고, 백성은 곡식이 없으면 생활할 수
없다. 근래 이래로 백성들의 납세와 복역이 너무 많았고, 해마다 또 수재와 한재가 있어
한 해의 곡물 수확량이 감소하였는데, 관리들 가운데 어떤 자는 좋지 못하여 백성들의
농번기를 빼앗아 굶주림의 고통에 이르게 하고 있다. 지금 이후로 독군(督軍)과 군수는
관리들의 법을 준수하지 않는 행위를 삼가 살피고, 농사와 양잠을 해야 할 시기에 부역으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는 적벌하여 보고하라. ―
여름 4월, 대사면을 실시하고, 여러 군과 현에 조서를 내려 성곽을 수리하고 망루를
만들었으며 참호나 굴을 파서 도적들을 대비하도록 했다.
겨울11월, 백성들에게 기근이 발생하자 조서를 내렸다.
창고를 열어 빈궁한 백성들을 구제하도록 했다.
4년(241) 봄 정월, 대설이 내려 평지에도 3척이나 쌓였고,
날짐승과 들짐승 중에서 태반이 죽었다.
여름 4월, 위장군 전종을 파견하여 회남을 공략하도록 하고 작파(芍?)를 무너뜨리고
안성(安城)의 곡식창고를 불태우고 그곳의 백성들을 거둬들였다.
위북장군 제갈각이 육안(六安)을 공격했다. 종과 위나라 장수 왕릉(王 )이 작파에서 전쟁을
했는데, 중랑장 진황(秦晃) 등 10여 명이 전사했다. 거기장군 주연이 번성을 포위하고,
대장군 제갈근이 사중( 中)을 취했다.
5월, 태자 손등이 죽었다.
이 달, 위나라 태부 사마선왕이 번성을 구원했다.
6월, 군대가 돌아왔다.
윤달 6월, 대장군 제갈근이 죽었다.
가을 8월, 육손이 주( )에 성을 쌓았다.
5년(242) 봄 정월, 아들 손화(孫和)를 세워 태자로 삼고 대사면을 실시했으며, 화흥(和興)을
가흥(嘉興)으로 고쳤다. 모든 관리들이 황후를 세우고 네 아들을 왕으로 삼을 것을
상주했다. 손권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 현재 천하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백성들은 수고로우며 고달프다. 게다가 공로가 있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는 아직 기록되지 않았고,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자는 오히려 구휼되
지 못했다. 그런데 토지를 함부로 분할하여 자신의 자제를 풍요롭게 하고, 작위를 높혀
자신의 비첩을 총애하려고 하니, 나는 그다지 받아들일 수 없다. 이 건의는 방치하라. ―
3월, 해염현(海鹽縣)에 황룡이 출현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여름 4월, 진귀한 물품의 헌상을 금지시키고 태관(太官)에서 제공하는 음식의 양을 줄였다.
가을 7월, 장군 섭우( 友)촵교위 육개(陸凱)를 보내 병사 3만 명을 인솔하게 하여
주애(珠崖)와 담이( 耳)를 토벌하도록 했다.
이 해, 역병이 크게 유명하였고, 담당 관리들은 또 황후를 세우고 자식들을 왕으로 삼을
것을 상주했다.
8월, 아들 손패(孫 )를 세워 노왕(魯王)으로 삼았다.
6년(243) 봄 정월, 신도군(新都郡)에서 백호(白虎)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있었다. 제갈각이
육안을 정벌하고, 위나라 장수 사순(謝順)의 진영을 격파시켜 그의 백성들을 수용했다.
겨울 11월, 승상 고옹(顧雍)이 세상을 떠났다.
12월, 부남왕(扶南王) 범전(范 )이 사자를 보내 예인과 그곳의 특산물을 바치도록 했다.
이 해, 사마선왕이 군대를 이끌고 서현(舒縣)에서 가화(嘉禾)가 자랐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 해, 보즐과 주연 등이 각각 상소를 올려 이렇게 말했다.
― 촉나라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모두 촉은 오와의 맹약을 등지고 위와 서로 내통하려고
많은 배를 만들고 성곽을 수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장완은 한중을 수비하면서 사마의가
남쪽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위나라의 후방이 텅 비었는데도 병사를 내어 적을
견제하지 않고, 오히려 한중을 버리고 성도 부근으로 돌아왔습니다. 일은 이미 매우
분명해졌으니 또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응당 방비할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
손권은 상황을 추측해 보고는 이와 같지 않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촉을 두텁게 대우하고, 공식적인 사자를 파견하여 맹약을 맺었으며, 촉에게
불성실하게 대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를 수 있겠소? 또 사마의는 이전에
서현으로 들어왔다가 열흘이 지나자 곧 물러났소. 촉은 만리 먼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어떻게 형세의 위급함을 알고 곧 바로 병사를 내겠소? 과거 위나라가 한천(漢川)으로
들어오려고 했을 때도, 우리들은 여기에서 삼엄하게 경계하면서 또 거동하지 않고 있었는데,
마침 위나라 군대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어 출병을 멈추었었소. 촉나라가 어찌 또 이
때문에 우리를 의심할 수 있겠소? 또 다른 사람이 자신의 국가를 다스리면서 배나 성곽을
무엇 때문에 수리하여 보호하지 않겠소? 지금 우리가 여기서 군대를 훈련시키는 것이
어찌 또 촉을 방어하려고 하는 것이겠소? 사람들의 말은 매우 믿을 만하지 못하오.
짐은 여러분들을 위해 집을 허물어서 보증하겠소."
촉나라는 결국 스스로 도모하는 바가 없었는데, 손권이 헤아린 것과 같았다.
8년(245) 봄 2월, 승상 육손이 세상을 떠났다.
여름, 우레가 궁궐 문의 기둥에 떨어졌으며, 또 남진(南津) 대교의 기둥을 쳤다.
다릉현(茶陵縣)에 홍수가 발생하여 범람하였으므로 주민들의 가옥 2백여 채가 유실되었다.
가을 7월, 장군 마무(馬茂) 등이 모반을 꾀했으므로, 그들의 삼족을 멸했다.
8월, 대사면을 시행했다. 교위 진훈(陳勳)을 파견하여 둔전사병과 장인 3만 명을 데리고
구용(句容) 중도에 운하를 파서 소기(小其)로부터 운양(雲陽) 서쪽 성까지를 연결하여
상인들의 교역 장소를 만들고 식품창고를 만들도록 했다.
9년(246) 봄 2월, 거기장군 주연이 위나라의 사중을 정벌하여 천여 명의 머리를 베고
포로를 잡았다.
여름 4월, 무창에서 감로가 내렸다는 보고가 있었다.
가을 9월, 표기장군 보즐이 승상으로, 거기장군 주연이 좌대사마로, 위장군 전종이
우대사마로, 진남장군 여대가 상대장군으로, 위북장군 제갈각이 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10(247) 봄 정월, 우대사마 전종이 세상을 떠났다.
2월, 손권은 남궁(南宮)으로 갔다.
3월, 태초궁(太初宮)을 개축했고, 여러 장수들과 주군이 모두 노동에 힘썼다.
여름 5월, 승상 보즐이 세상을 떠났다.
겨울 10월, 사형수들을 대사면시켰다.
11년(248) 봄 정월, 주연이 강릉에 성벽을 쌓았다.
2월, 여러 차례 지진이 발생했다.
3월, 건업궁(建業宮)이 완성됐다.
여름 4월, 우박이 내렸고, 운양에서 황룡이 출현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5월, 파양에서 백호가 나타났지만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보고가 있었다.
손권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 고대의 성황은 선행을 쌓고, 몸을 닦아 도를 행하여 천하를 손에 넣었다. 그래서 길상의
징조가 내려 인사와 상응하였으니, 이것은 성왕의 덕행을 나타내는 것이다. 짐은 현명하지
못한데 어떻게 이 경지에 이르렀는가? 《상서》에서 말하기를, '비록 다른 사람에게
칭송되더라도 미덕이 있다고 자만하지 말라(?休勿休)' 고 했다. 공경 대신들은
힘껏 노력하여 맡은 일을 다하고 짐의 부족한 점을 바로잡아 주길 바란다. ―
12년(249) 봄 3월, 좌대사마 주연이 죽었다.
4월, 까마귀 두 마리가 까치를 물어 동관(東館)에 떨어뜨렸다.
9월, 표기장군 주거(朱據)가 승상을 대리하고, 까치를 태워 제사를 지냈다.
13년(250) 여름 5월, 하짓날에 화성이 남두(南斗) 별자리로 들어갔다.
가을 7월, 화성이 또 북두성 두 번째 별을 지나 동쪽으로 운행했다.
8월, 단양촵구룡 및 고장(故 )촵영국(寧國) 지역의 여러 산이 붕괴되었고 홍수가 발생하여
범람했다. 조서를 내려 조세를 면제시키고, 종자와 식량을 빌려 주었다.
태자 손화를 폐위시켜 고장에 배치시켰다. 노왕 손패에게는 자살을 명했다.
겨울 10월, 위나라 장수 문흠이 거짓으로 모반하여 주이(朱異)를 유인했다. 손권은 여거를
파견하여 주이가 있는 곳으로 가서 문흠을 영접하도록 했다.
주이 등이 신중하게 행동함으로써 문흠은 감히 나아가지 않았다.
11월, 아들 손량(孫亮)을 태자로 세웠다.
군사 10만 명을 보내 당읍현(當邑縣)에 도당( 塘)을 만들어 북쪽 통로를 막았다.
12월, 위나라 대장군 왕창이 남군(南郡)을 포위하고, 형주자사 왕기(王基)가 서릉(西陵)을
공격했으므로, 손권은 장군 대열(戴烈)촵육개(陸凱)를 파견하여 가서 막도록 했다.
왕창과 왕기는 모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 해, 신인( 人)이 편지를 주어 연호를 바꾸고 황후를 세우라고 말했다.
태원(太元) 원년(251) 여름 5월, 황후 반씨(潘氏)를 세웠으며,
대사면을 실시하고 연호를 바꾸었다. 당초, 임해군(臨海郡) 나양현(羅陽縣)에는 신이 있었는데, 자칭 왕표(王表)라고 했다.
그 신은 민간에서 활동하여 언어와 음식이 일반 사람들과 차이가 없었지만, 그의 형체를 나타내지는 않았다. 또 그에게는 시녀 한 명이 있었는데, 이름이 방적(紡績)이었다.
이 달, 중서랑 이숭(李崇)을 파견하여 보국장군(輔國將軍) 나양왕(羅陽王)의 인수를 받들어 왕표를 영접하도록 했다. 왕표는 이숭을 따라 함께 나왔다. 왕표는 이숭 및 지나게 된 군수나 현령과 담론하였는데, 이숭 등은 그의 의견을 반박하지 못했다. 산천을 지나면서 왕왕 시녀로 하여금 신들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가을 7월, 이숭은 왕표와 도착했다. 손권은 왕표를 위해 창룡문(蒼龍門) 밖에 진을 만들어 놓고, 측근의 사신을 보내 술과 음식을 여러 차례 갖고 가도록 했다. 왕표는 수재와 한재와 같은 작은 일에 관해 예언했는데, 왕왕 증험이 있었다.
가을 8월 초하루, 태풍이 불어 강과 바다가 범람하여 평지의 물은 깊이가 8척이나 되었고, 오군 고릉(高陵)의 송백이 뽑혔으며, 군의 남쪽 성문이 날려 떨어졌다.
겨울 11월, 대사면을 실시했다. 손권은 남쪽 교외에서 제사를 지내고 돌아와 질병으로 누워 있었다.
12월, 역마로 대장군 제갈각을 불러 태자태부로 제수했다. 조서를 내려 부역을 줄이고 부세를 감소시켜 백성들의 고통과 근심을 제거해 주었다.
2년(252) 봄 정월, 이전 태자 손화를 남양왕(南陽王)으로 임명하여 장사에 머물도록 했다. 아들 손분을 제왕(齊王)으로 삼아 무창에 거주하도록 했다. 아들 손휴(孫休)를 낭야왕(? 王)으로 임명하여 호림(虎林)에 거주하도록 했다.
2월, 대사면을 실시했으며, 연홀르 신봉( 鳳)으로 고쳤다. 황후 반씨가 세상을 떠났다. 여러 장수와 관리들이 자주 왕표를 찾아가 복을 구하자, 왕표는 달아났다.
여름 4월, 손권이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71세였고 시호를 대황제(大皇帝)라고 했다.
가을 7월, 장릉(蔣陵)에 안장했다.
출처-삼국지공략
첫댓글 실로 제왕의 상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