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 / 권명희
손녀가 운다. 울고 또 운다. 아침부터 울어대는 손녀를 달래느라 진땀을 뺀다. 마치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이 신기할 지경이다. 저 작은 몸집 어디에서 저리도 많은 눈물이 흘러나올까.
“동생은 울지 않는데 언니가 왜 자꾸 우는 거야?”
“할머니, 슬픈 일이 너무 많아서 자꾸 눈물이 나요.”
헐! 팔 년 산 인생에서 슬픈 일이 뭐가 그리 많을까. 하긴 채 걷기 전부터 엄마와 종일 떨어져야만 했고, 동생이 태어나면서는 사랑을 나눠야 했고, 학교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적응하려면 슬픈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방금 출근한 엄마가 너무 보고 싶다고 흐느낀다. 손녀는 슬퍼서 흐느끼고 있는데 맘껏 울어대는 손녀의 눈물방울이 보석처럼 느껴졌다.
세상에는 울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팔 년 산 인생이 알까. 얼마 전 읽은 할레드 호세이니《천 개의 찬란한 태양》 주인공 마리암이 떠올랐다.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그녀는 자신이 하라미(사생아를 비하하여 일컫는 말)라는 걸 다섯 살이 되어서 알게 된다. 엄마는 아버지 집 가정부였다. 마리암을 가진 것을 알게 된 세 명의 부인이 그 집에서 엄마를 밀어냈다. 아무도 없는 마을 밖으로 밀려난 모녀는 아버지가 보내주는 식량으로 겨우 목숨을 유지하며 살았다. 학교 들어갈 나이가 되었건만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엄마 한풀이를 들어야만 했다.
아버지는 세 명의 아내와 아홉 명의 자녀를 둔 잘릴 한이다. 영화관을 운영한다는 소리를 들었고, 좋은 집에서 산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엄마는 마리암이 자신의 곁을 떠나지 못하도록 온갖 방법으로 막는다. 자신의 신세를 탄식하고, 남편을 원망하며 딸과 세상을 저주하며 살았다.
“너나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타하물(참는 것) 뿐이다.”
”뭘 참아요?“
“그걸 알려고 할 필요는 없다. 그런 일은 쌔고 쌨으니까.”
남편에게는
“어미와 집에 함께 있는 게 팔자라는 걸 깨닫게 하셔야 해요. 바깥에는 저 아이를 위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배척당하고 가슴앓이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요.”
환경이 애 어른을 만들었나. 마리암은 일찍 철이 들었다. 어머니 앞에서조차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겨야만 했다. 목요일이면 찾아오는 아버지를 통해서 상상의 나래를 키워갔다. 아버지가 오는 날이면 그나마 응석을 부릴 수 있는 순간이다.
울지 못하는 마리암이 살아가야 할 세상이 얼마나 험난할지 점점 빠져들고야 말았다. 끝내 비극에 빠져버리는 마리암 운명, 그녀의 어린 시절에서 빠져나와야겠다.
오래전 딴 나라 이야기지만 지금도 히잡을 거부하며 데모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여태 그곳 여인들의 삶이 바뀌지 않음을 방증하는 것이리라. 그곳은 지금도 일부다처제일까. 겨우 열다섯 살에 아버지 같은 사람에게 얼굴도 보지 못하고 팔려 가듯 살아가고 있을까.
하긴 우리나라에서도 여자가 힘든 시절이 있었다. 여자는 배울 필요가 없다며 학교를 보내지 않았고, 조혼제도로 채 크기도 전에 결혼을 시키기도 했다. 노동이 미덕인 양 몸이 녹아내리도록 일을 놓지 못하고 살았다. 가난과 전쟁과 부당한 대우를 운명이려니 받아들이며 밀려오고 보니 새로운 세상을 만나 이방인이 되었다. 그 시절을 견뎌낸 어머니들이 이젠 자식에게 조차 밀려나 외로움에 밤을 지새운다.
너무 슬프면 눈물이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가슴안에서 머문다. 우리의 부모는 삶의 끄트머리에서 밀려나는 아픔을 겪고 있지만 울 수도 없다. 울지 못한 눈물이 고여 가슴에 눌러 붙는다. 밤마다 숨이 넘어갈 듯 기침으로 울고 있지 않은가. 내 어머니도 울지 않는다. 그저 가끔 기침하곤 한다.
한참을 돌고 왔건만 아직도 손녀의 울음이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끝내고 싶지만 여운이 남아서 그저 흐느끼고 있다. 울음을 그치려고 딴은 애쓰는 모습이 더없이 대견하기만 하다. 세상 이치를 알아가며 아픔을 잘 견디는 중이다. 맘껏 어리광부리며 울 수 있는 저 눈물이 부러운 이도 있다는 걸 어린 손녀가 알까.
울음이 그치고 나면 까불거리고 학교길을 걸어간다. 친구를 만나 쫑알거리고 할머니는 뒷전으로 밀려나서 따라간다. 가끔 등원의 밋션이 주어져 커가는 손녀의 변화를 지켜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린다. 뒤따라가며 넘치는 즐거움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저 귀여운 울보 공주가 여자라고 차별받지 않는 시대를 살아서 다행이다. 극진한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맘껏 제 마음을 전할 수 있고 제 감정을 표현할 수 있어 다행이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모습이 아까울 지경이다.
이제는 평등을 넘어 여성 상위 시대라 할만하다. 시댁보다 친정이 가까워졌고 딸 낳기를 바라는 부부가 많다. 여자들의 결정으로 가정이 돌아가고 여자들의 취향에 맞춰 시장이 돌아간다. 불과 몇십 년 만에 남녀의 상황이 급속도로 바뀌었다. 추석날 홀로 글을 쓰고 있는 나의 현실이 증명하는 게 아닌가. 주방을 벗어나지 못하던 종부의 삶도 세상의 변화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