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 탄생 200년…솔뫼·나바위성당 '북적' [고두현의 문화살롱]
출처 한국경제 : https://www.hankyung.com/opinion/article/2021112676601
4代 11명 순교 '가톨릭 가문'
금강 굽이치는 전북 익산 화산리
사제서품 후 첫발 디딘 '나바위'
당진 소나무숲 우거진 '솔뫼성지'
신학생 발탁된 용인 '골배마실'
희년 맞아 전국서 성지순례 행렬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
고두현 논설위원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 사제 김대건 신부. 그가 태어난 1821년, 전국에 콜레라가 창궐했다. 몇 달 새 1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그 난리통에 미래의 성인(聖人)이 탄생했다. 출생지는 충청도 면천군 송산리. 지금의 당진시 솔뫼로 132번지다. 솔뫼는 ‘소나무가 많은 산(松山)’의 우리말 지명이다.
이곳은 4대에 걸쳐 11명이 순교한 김대건 가문의 ‘신앙의 못자리’다. ‘한국의 베들레헴’으로도 불린다. 그가 태어났을 때 증조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는 순교한 뒤였다. 18세 때는 아버지가 순교했다. 그 또한 26세로 뒤를 이었다.
이 마을에 그의 생가가 복원돼 있다. 앞마당에는 2014년 이곳을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기도 모습을 본뜬 조각상이 앉아 있다. 교황이 다녀간 뒤로 연간 외국인 7000여 명을 포함해 40만여 명이 방문하는 명소가 됐다.
그가 일곱 살 나던 해에는 온 집안이 박해를 피해 경기 용인 골배마실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소년기를 보낸 그는 15세 때 프랑스인 신부 피에르 모방의 눈에 들어 신학생으로 발탁됐다. 골배마실에서 3㎞ 떨어진 은이(隱里·숨어 사는 마을) 공소에서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해 동갑내기인 최양업과 한 살 위인 최방제도 신학생으로 뽑혔다. 세 소년은 곧 파리외방전교회가 중국 마카오에 세운 조선신학교에서 신학과 라틴어, 프랑스어, 철학 등 서양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24세 때인 1845년 8월 17일, 그는 상하이 진자샹(金家港)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조선인 최초로 사제품을 받고 신부가 됐다. 2주일 후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11명의 교우와 작은 어선 ‘라파엘호’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풍랑으로 산둥성을 거쳐 제주 해안까지 표류하다 42일 만인 10월 12일 밤에야 금강 하류인 전북 익산 나바위에 도착했다.
이후 약 1년간 조선교구 부교구장으로 전교하다 관헌에게 붙잡혀 1846년 9월 16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그로부터 36년 뒤인 1882년 나바위에 공소가 설립되고 1907년에는 나바위성당이 건립됐다. 명동성당 설계자인 푸아넬 신부의 설계로 처음엔 한옥으로 지었다가 흙벽을 벽돌로 바꾸고, 성당 입구에 고딕식 벽돌로 종탑을 세웠다. ‘한옥’과 ‘고딕’ 양식이 조화를 이룬 성당은 이곳이 유일하다.
성당 내부를 보면 남녀 자리를 구분하던 칸막이 기둥이 남아 있다. 창문에는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니라 한지가 붙어 있다. 채색 유리판을 구하기 어려웠던 당시 신자들이 한지에 그림을 그려 붙이던 전통은 10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성당 뒤편 산책로를 따라오르면 김대건 신부 성상이 있고, 그 옆의 성모 마리아상을 중심으로 1200명이 미사를 볼 수 있는 성모동산이 있다. 산 정상으로 올라가면 1955년 김대건 신부 시복 30주년을 기념한 순교기념탑을 볼 수 있다. 지난 8월에는 귀국길에 타고 왔던 ‘라파엘호’가 복원돼 순례객을 맞고 있다. 길이 13.5m, 폭 4.8m, 높이 2.1m의 작은 배에 신부 3명과 신자 11명이 타고 모진 풍랑에 시달렸으니 고초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만하다.
미리내성지의 김대건 신부상.경기 안성 미리내성지에는 김 신부의 유해가 묻혀 있다. 그의 어머니와 사제품을 준 페레올 주교 묘도 함께 있다. 이곳 지명 미리내는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의 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은하수(미리내)처럼 보였다는 데서 유래했다.
그가 세례를 받은 은이마을에서 미리내성지까지 이어지는 길에는 세 개의 고개가 있다. 신덕고개(은이 고개)와 망덕고개(해실이 고개), 애덕고개(오두재 고개)로 불리는 이곳은 김대건 신부가 생전에 넘나들며 사목활동을 했던 곳이다. 순교 후 유해가 이 고개들을 넘어 미리내성지로 옮겨졌다.
이곳을 비롯해 그의 성지와 유산을 찾는 도보순례객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질곡의 시대를 신앙의 힘으로 넘은 순교 성인의 ‘짧고 긴 생애’가 그 길에 펼쳐져 있다. 늦가을 노을빛이 하늘 저편 미리내까지 붉게 채색하는 듯하다.
■ 일대기·순교 다룬 영화 '탄생' 내년 개봉
윤시윤·이호원·안성기 등 출연
김 신부는 유네스코에 의해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됐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이와 함께 그의 탄생 200주년을 기리는 ‘희년(禧年) 행사’를 지난해부터 펼쳤다. 27일에는 전국 교구에서 폐막 미사가 열린다. 가톨릭에서 희년은 구약성경 시대부터 유래된 전통으로 교회 역사의 중요한 사건을 50주년이나 100주년 단위로 기념한다. 김 신부 희년을 앞두고 지난 1년간 전국에서 성지순례와 캠페인 등이 이어졌다. 그의 200회 생일인 8월 21일에는 고향의 솔뫼성지를 비롯한 유적 성지들에서 일제히 기념 미사가 봉헌됐다.
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 ‘탄생’(박흥식 감독)도 제작된다. 이 영화는 청년 김대건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로 거듭나고 안타깝게 순교하는 과정을 그린다. 배우 윤시윤이 김대건 역을 맡고, 그의 조력자인 최양업을 이호원이 연기한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안성기도 출연한다. 제작진은 지난 11일 제작발표회를 연 데 이어 이달 말부터 촬영에 들어가 내년 11월 개봉할 예정이다.
한국시인협회는 당진문화재단과 함께 김 신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시집 《내 안에 너 있으리라》(시인생각 펴냄)를 발간했다. 김남조, 허영자, 이근배, 김종해, 오세영, 유안진, 신달자, 문정희, 나태주, 유자효, 정호승 등 원로·중견 시인 72명이 시를 헌정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빛viit명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
초과학의 세계
"빛viit 선생과 만난 일이 알려지고 난 후 참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옵디다. 한번은 젊은 사제들이 항의를 하는 게 아니겠소. 그래서 '그분의 힘이 어떤 방식으로 찾아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네! 그저 성경 좀 읽고 사제가 되었다고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큰 교만이 아니겠는가! 하고 크게 꾸짖어 돌려보냈지요. 추기경인 나도 이런 일을 겪었는데 그 동안 얼마나 어려움이 많으셨겠소."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처럼 사람들에게 빛viit을 전해주며 지나온 지난 세월은 무한한 우주의 축복이 함께 한 동시에 세상의 편견과 고정관념에 맞서 걸어온 시간이기도 했다.
출처 : "빛viit명상" 눈덩이 처럼 불어나는 행복순환의 법칙
2009/09/14초판 1쇄 발행
2021/06/01초판 45쇄 중 P. 54
김영환 몬시뇰
2014년 2월 1일, 이른 아침부터 전화벨이 울렸다.
“그분이 임종하셨습니다.”
이날 새벽 1시50분경 그가 83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는 슬픈 소식이었다.
그는 오랜 세월 나와 함께 인연을 이어온 김영환 몬시뇰이었다.
문득 딱 한 달 전인 1월 1일 저녁의 일이 떠올랐다. 빛viit과 함께 오래 인연을 맺어온 울산 전형미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빛viit 선생님 여기 안 오세요?”
“거기가 어딘데?”
“여기 가톨릭병원입니다. 몬시뇰님이 오늘 밤을 못 넘긴답니다. 가까운 지인들도 와서 마지막 모습을 지켜볼 예정입니다. 의료진들은 몸에 붙은 의료기기들을 떼면 99% 운명하실 거라고 합니다. 의식도 없는 상황이라 마지막 얼굴을 뵙는데 빛 선생님이 안 보여서 연락드렸습니다.”
“나는 연락을 못 받았는데…….”
“선생님께 연락이 안 갔다고요?”
몬시뇰과 나의 관계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연락이 닿아야 했다. 그런데 왜 연락이 없었을까? 짐작이 갈 만했다. 위급할 때마다 내가 가면 그가 깨어났으니 이런 기적을 지난 10여 년간 수차례 지켜본 간병인도 지칠 만도 했다. 그래도 나는 마지막으로 임종광력을 줘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톨릭 병원 중환자실에 도착하니 저녁8시 반이었다. 면회가 끝나고 외부인은 출입금지인 상황이라 간신히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9시 반이 되어서야 병실로 들어갔다.
“저, 정 선생님, 사실은 오늘 신부님이 달고 계신 호흡기를 뗀 뒤에 바로 부검을 하기로 했답니다. 도대체 이미 10년 전에 끝났어야 할 명줄이 어찌하여 이렇게 오래 버틸 수 있었는지 의학적으로 검사를 해보기로 했답니다. 이미 교구청에서도 그리 허락이 난 모양입니다. 이제 어쩌지요?”
나를 기다리고 있던 전형미 교수가 살짝 귀띔을 해주었다.
“뭐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김 몬시뇰이 빛viit을 받고 삶을 연장 받았다는 걸 아는 몇몇 의사들이 그걸 부정이라도 하듯 나서서 주선을 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들어가 봅시다.”
나는 병실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나를 보자 주치의를 비롯해 몇몇 사람들이 흠칫 놀라는 게 보였다.
“빛viit을 준다는 그분이 바로 이 분입니까? 택도 없는 소리 마시오. 안 오기로 했잖소? 오늘은 안 됩니다. 12시에 끝내고 내일 아침 7시에 부검에 들어갈 겁니다. 그러니 편안히 가십시오, 라고만 하시오!”
의사는 나를 윽박지르듯 말했다. 이미 교구청에서도 허락을 받아놓았으니 이제 호흡기만 떼면 끝날 일을 내가 망쳐 놓을까봐 겁이 난 모양이었다. 나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병실을 둘러보았다. 김 몬시뇰과 가까운 지인들이 슬픈 얼굴로 모여 있었다. 그 중에는 젊은 여성 한 사람도 와 있었다. 당시 효성여대에 근무하던 안젤라 씨의 딸 혜인이었다. 김 몬시뇰이 어린 시절부터 학비 지원은 물론 스승과 조부 역할까지 맡아 도와주던 사이였다.
“할아버지,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내 눈 좀 보고 가시면 안 돼요?”
그녀는 친손녀처럼 자신을 아껴주던 김 몬시뇰을 붙잡고 슬피 울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지인들 모두 눈시울을 붉혔다.
나는 생각한 대로 빛viit의 세상으로 가라고 임종의 빛viit을 드리기로 했다.
오늘 밤을 넘기기 어렵고 지금까지 이 상태로 10여 년을 버텼다는 게 기적이라고 했던 주치의 말이 떠올랐다.
“신부님, 이젠 정말로 떠나시는군요.”
나는 의식도 없이 병상에 누워있는 뼈만 남은 김 몬시뇰을 보다 눈자위가 뜨거워졌다. 1970년쯤이던가, 김 몬시뇰은 박상태 신부의 수석보좌신부로 내가 복사를 보던 계산 성당으로 부임해왔다. 그때부터 나와 몬시뇰은 때론 형제처럼 친구처럼 때론 사제처럼 허물없이 지내온 분이었다.
문득 김 몬시뇰이 첫 빛viit 만남을 하던 때가 떠올랐다.
1988년 그 당시 김 몬시뇰은 효성여대 총장 부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어느 날 김 몬시뇰이 내게 걱정스레 말했다.
“내 눈이 왜 이러지? 조간신문을 보는데 글씨가 쪼개져 보이기 시작하네. 눈이 피곤해서 그런가 하고 눈을 쉰 다음, 다음 날 기도를 하기 위해 성서를 펴는데 글이 또 쪼개져 보이는 거라. 이제 곧 총장 부임을 하면 각종 문서 처리 및 결제 업무가 많을 텐데 큰 걱정일세. 아무래도 안과를 가봐야겠네”
김 몬시뇰은 대구의 한 유명 안과 의사를 찾아갔다.
“신부님 큰일 났네요. 글자가 쪼개져 보이는 건 눈의 어떤 부분에 손상이 간 건데 이건 현대의학으로는 방법이 없습니다. 약도 치료 방법도 없고……, 원인을 정확히 모르니…….”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김 몬시뇰은 답답한 마음으로 물었다.
“한국의 의술로는 수술 정도는 해볼 수 있겠으나 성공 확률이 20~30%밖에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수술을 하다가 실패하게 되면 실명할 수도 있으니 불편하더라도 이대로 참고 사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김 몬시뇰은 그 길로 서울 유명병원을 찾아갔지만 똑같은 대답만 들었다.
“한 의사가 내게 눈은 독일의 의술이 최고이니 독일로 가보라고 권했네. 거기서 한방, 양방, 대체의학까지 병행해서 시술을 하고 있던 터라 의학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더군.”
김 몬시뇰은 한 의사의 권유로 독일로 날아가 안과 분야의 최고 의료진을 만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의사 역시 독일 의료기술로도 원인을 밝힐 수 없으니 치료방법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김 몬시뇰은 큰 실망감을 안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앞으로의 삶은 물론 곧 다가올 대학 총장 부임 등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 몬시뇰은 독일에서 돌아오자마자 다급하게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자네, 6개월 전쯤 나하고 나는 이야기 기억하는가?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갑자기 그 말이 떠오르지 뭔가?”
“아, 그때 말인가요?”
나는 6개월 전 김 몬시뇰을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순간 그의 눈에 어떤 이상이 감지되었다.
“신부님, 눈에 뭔가 이상이 있습니까?”
“뭐? 내 눈이 어때서? 잘만 보이는데?”
김 몬시뇰은 대수롭지 않은 듯 물었다.
“지금 그 상태에서 6개월쯤 지나면 눈에 글자가 흐트러져 보일 겁니다.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금 빛viit을 받으시면 증상을 멈출 수 있는데 지금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6개월 뒤에 받으시렵니까? 좋을 대로 하십시오.”
“에이, 아무렇지도 않은데 뭘 그렇게까지, 나중에 받지 뭐.”
그때까지만 해도 빛viit의 힘에 대해 이야기만 들었지 직접적으로 그걸 느껴 본 적이 없던 김 몬시뇰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나에게 빛viit을 줄 수 있겠는가? 현대의학으로는 내 눈을 치료할 방법이 없다네. 빛viit을 받으면 괜찮아지겠나?”
김 몬시뇰은 잔뜩 두려운 목소리로 물었다.
“빛viit을 받으시게요? 알겠습니다.”
나는 약속 장소와 빛viit 받을 시간을 정한 후 전화를 끊었다.
마침내 총장 취임을 며칠 앞두고 남산동 주교관 내 사제들만의 특별미사실로 들어갔다. 김 몬시뇰은 성당 십자가 앞에 앉았다.
“여기서 빛viit을 다오.”
나는 십자가 앞에서 빛viit을 달라는 신부님의 청이 선뜻 이해가 안 되었다. 하지만 곧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종교에서 말하는 마귀나 사탄 등 나쁜 귀신들은 십자가를 가장 무서워한다고 알려져 있다. 불교에서도 염주나 부적을 쓰면 귀신이 무서워하고 일부 민속학자는 정화수를 뿌려 악귀를 쫓는 민간풍습도 있다고 주장했다.
항간에서 어떤 종교인들은 내가 하는 일을 보고 신이나 귀신이 붙어서 해주는 일이라고 억지주장을 퍼뜨렸다. 빛viit은 법당이든 교회든 길거리에서든 그 어느 곳에서도 그 힘을 구애받지 않고 빛, 공기, 물이 함께하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지 함께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나는 이미 그런 걸 모두 포용하고 초월하였지만 김 몬시뇰은 그걸 알기에 일부러 십자가 앞이라는 성스러운 장소를 택한 것이다.
김 몬시뇰은 마침내 두 손을 벌리고 앉아 빛을 받은 자세를 취했다.
“맑아져라!”
나는 한마디로 빛viit을 보냈다. 우주 근원에서 오는 생명 에너지, 빛viit은 어떤 행위나 이론 등이 필요하지 않았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물론 김 몬시뇰도 놀라서 서로 눈을 떠 마주 보았다.
“니 뭐하노? 이거 머리카락 타는 냄새 아이가? 라이터로 머리 찌지는 줄 알았다.”
“그러게요. 타는 냄새가 왜 나죠?”
신부님은 거울을 보며 머리카락을 만져보았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이건 머리카락이 실제로 탈만큼 어떤 인위적이니 힘이 가해진 게 아니라 우주의 빛viit에 의한 초자연적인 현상이었다.
김 몬시뇰과 내가 각자의 머리를 매만지던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창가에서 ‘타탕’ 하며 돌멩이가 유리에 부딪히는 마찰음이 두세 차례 강하게 들렸다. 유리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이건 빛viit이 아주 강하게 올 때 가끔 함께하는 강력한 반사음이었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에너지도 이런 반사작용을 만들어 낼 수 없다. 다만 생명에너지 빛viit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무한 능력의 힘이므로 그에 상응하는 불가능한 물리적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김 몬시뇰은 그 순간 옆에 있던 성서를 집어 들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구절을 읽기 시작했다.
“됐다! 정상으로 돌아왔다!”
글씨가 깨져 보여 성서를 읽을 수 없었던 김 몬시뇰은 두 눈을 감싸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소리쳤다.
“누가 이 빛viit을 두고 마귀냐 사탄이냐 하고 감히 판단할 수 있겠는가? 이 장소를 택한 게 죄송스럽고 겸손하지 못했던 것 같구나.”
김 몬시뇰은 합장을 하고 두 눈을 감고는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 날 빛viit의 기적, 빛viit의 현존을 실제로 체험한 김 몬시뇰은 빛viit에 대한 기존의 편견을 다 버리고 긍정적인 자세로 계속해서 묵상에 들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였다.
“기적이다! The God of Miracle!”
묵상에서 개어난 김 몬시뇰은 다시 한 번 크게 소리쳤다.
“이 성스러운 빛viit을 두고 우선 오해나 혹평부터 해대는 현실이 참 안타깝구나. 어릴 때부터 너를 지켜보고 빛에 대해 불신에 찬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이젠 아니다. 6개월 전의 예고부터 시작해 지금 내가 체험한 이 기적을 보건대 네가 하는 일은 최첨단 과학이나 그 어떤 종교의 의식으로도 할 수 없는 초종교적이고 초과학적인 일이다. 빛viit으로 내 눈을 정상으로 되돌려 놓았잖느냐?”
빛viit을 두고 초과학, 초종교, 초자연적인 힘이라고 한 건 김 몬시뇰이 처음이었다.
이후 김 몬시뇰은 효성여대 총장에 취임하여 총장 직무를 잘 마치고 91년에는 몬시뇰에 서임되었다. 그리곤 대구 가톨릭대학교 총장으로, 학장, 교수로 활동하다가 정년퇴임 후에는 다시 중국 해북으로 사목(司牧) 활동을 떠날 만큼 건강하게 일했다.
김 몬시뇰은 평소 자신이 몸소 빛viit의 능력을 받고 빛viit의 힘을 믿는 까닭에 빛viit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도록 사회 지도층의 사람들을 많이 추천해 주었다. 특히 빛viit의 힘을 널리 알리기 위해 내가 집필한 『행복을 주는 남자』의 추천사를 기꺼이 써준 일은 지금도 큰 고마움으로 남는다. 당시 고위 성직자 입장에서 종교 밖의 힘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 빛viit의 힘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 가장 먼저 스스럼없이 그 일을 해주었다.
“내가 본 사실을 그대로, 양심대로, 원칙대로, 소신대로 쓰는 건데 누가 뭐라 그러든?”
김 몬시뇰은 흔쾌히 나와 자신의 관계를 비롯해 빛viit에 대한 긍정적인 힘에 대해 긴 서문을 써주었다.
2000년 즈음, 사단법인 빛viit명상이 자리를 잡아갈 때였다. 종교계, 학계, 법조계 할 것 없이 빛viit의 힘에 대해 오랜 세월 검증의 시간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 가운데 김 몬시뇰은 보이지 않는 힘이 되어 뒤에서 나와 학회를 지탱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당당히 빛viit의 현존을 증거 해주었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처음 지팡이를 손에서 놓던 날 함께 이를 지켜보고 후일 이 일을 증거 하기도 했다. 특히 의 · 과학이나 종교로 불가능한 많은 외부 인사들의 사례를 가져와서 함께 하고 일본의 이찌가와 국회의원을 초청해 일본이나 미국의 의학으로도 불가능한 난치병을 빛viit으로 완벽하게 치유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 몬시뇰은 내게 말했다.
“빛viit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없애주고, 그 일로 좋은 일을 많이 한다는 건 참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베푸는 일 또한 베풀었던 일을 남에게 절대 드러내지 마라. 그것이 하느님께 가장 큰 복을 받고 그 분의 뜻에 순종하는 일이다. 요즘 수재의연금이나 기부금을 내고는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기부를 하든 기증을 하든 본인의 선행이 어떤 방식으로 크고 작든 알려지게 되면 그것은 하늘의 복이 되지 않는다. 세간에 알려지면 말과 평판으로 그 복을 받았기 때문에 사후의 복을 받을 수 없다.”
김 몬시뇰은 행여 내가 빛viit으로 인해 교만이나 자만에 빠질까 염려하여 미리 경계를 하도록 일러주셨다.
“아, 신부님과의 세상적인 인연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김 몬시뇰의 추억들이 스냅사진처럼 스쳐 지나가자 나는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울컥 슬픔이 차올랐다. 계산 성당 복사시절부터 시작해서 그의 추천으로 첫 직장인 호텔에 발을 들이게 된 일이며, 빛viit의 힘을 널리 알려온 과정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의 세월 동안 그는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나는 다시 마음이 움직였다.
“신부님, 눈 뜨세요!”
함께 모인 사람들이 마지막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빛viit을 주었다.
“잠시 의식을 되찾게 될 겁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가십시오. 10분 뒤에 깨어날 겁니다.”
나는 순간 우주마음의 뜻을 담아 무의식적으로 말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이를 지켜본 의사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내 뒤통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하긴 당연히 그럴 만했다. 죽음 직전, 의식불명에 빠진 사람이 다시 의식을 되찾는 건 의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니. 정확히 10분이 지나 전 교수가 쫓아 나와 소리쳤다.
“빛viit 선생님, 깨어나셨어요!”
병실로 다시 들어가 보니 김 몬시뇰이 두 눈을 뜨고 기적처럼 깨어나 있었다.
“세상에, 어떤 의학이나 과학, 기도 그 무엇도 안 되던 사람이 깨어났잖아!”
사람들이 잔뜩 흥분하여 외쳤다.
“신부님께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으면 하십시오.”
지인들이 하나둘 신부님과 고별인사를 나누었다.
내 차례가 되어 그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좀 더 머물고 싶다는 그의 간절한 눈빛이 전해져 왔다.
“신부님, 좀 더 살고 싶으십니까?”
나는 신부님을 보며 물었다. 신부님이 눈을 깜빡였다.
“어느 정도 필요하십니까?”
내가 묻자 신부님이 손가락 하나를 까딱였다.
“1년입니까? 아니면 한 달만 하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신부님은 다시 또 눈을 깜빡였다.
한 달, 신부님은 자신이 누워있는 동안 못다 한 마지막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신부님, 이제 한 달간 삶의 기회를 더 드리겠습니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입니다. 정리 잘하십시오.”
나는 생명 원천의 주인이신 그 분의 뜻에 따라 다시 그에게 빛viit을 주었다. 10분이라는 시간이 1개월로 다시 연장되었다.
“빛viit 선생님, 정말 그게 가능한가요? 빛viit이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생명연장까지 가능합니까? 한 달을 더 살게하는 일까지 말입니다.”
한 지인이 놀라 물었다.
“내가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 하시는 일이니까요! 수녀님, 목사님, 스님 등 수많은 성직자들이 이 빛viit을 만나왔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당당하고 스스럼없이 빛viit을 이야기하신 분이기에 가능합니다. 두고 보십시오. 의료진 말대로 내일 운명하실지, 한 달 더 사시게 될지…….”
나는 빙그레 웃으며 병실을 나왔다.
그 후 김 몬시뇰은 한 달 동안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자신이 선종한 후 부검을 한다는 소리를 누워있는 상태에서 들었다며 완강하게 반대를 하였다.
“누가 나를 부검하느냐? 안 된다!”
그러던 2014년 2월 1일 그야말로 딱 한 달 후 울산 전형미 교수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빛viit 선생님, 김 몬시뇰께서 선종하셨습니다. 며칠 더 지나거나 하루 이틀 앞당겨 선종하셨다면 저희도 의료진도 선생님의 예언이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정말로 딱 한 달 만에 돌아가셨어요.”
전형미 교수는 슬픔과 놀라움에 휩싸여 전했다.
‘신부님, 그동안 참 감사했습니다.’
나는 빛viit과 함께 행복한 선종으로 들어가신 김 몬시뇰에게 우주근원으로부터 오는 영혼의 빛viit을 드렸다.
출처 : 나도 기적이 필요해 2017년 4월 17일 초판발행
2017년 5월 3일 초판 3쇄 P. 35-47
김영환 묜시놀 신부님과의 이야기
또 보아도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
고 김영환 묜시뇰 신부님과의 빛 역사이야기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빛의 글 볼수있게해주셔서 진심으로감사드립니다.
현존하는 빛과의 깊은 인연의 고 몬시뇰 김영환 신부님의 빛활동은 늘 귀감이 됩니다.
두 분의 깊은 신뢰도 감동 그 자체입니다.
귀한 빛의 말씀, 감사합니다.
고김영환
몬시뇰신부님의 빛활동 최고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초종교적 초자연적 초과학적인 빛~*.
감사와 공경의 마음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