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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당선작>
내일은 맑음
이 하 재
1
인간은 살아가면서 많은 인연을 맺는다. 각 인연은 서로에게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각자의 삶을 이루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후천적인 만남은 각자의 의지에 따라 지속하거나 단절할 수도 있지만, 선천적인 인연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맺어진 결과이다. 부부는 헤어지면 남남이 되지만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결코 남이 될 수 없는 하늘이 맺어준 천륜이다.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의 운명을 결정 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어느 하늘 아래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월가리 다락골이다. 홍길동이 산 정상에 성을 쌓고 훈련했었다는 무성산 북쪽 끝자락에 위치해 하늘만 빠끔하게 열린 깊은 산골이다. 현재는 세 집만 남아 있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열다섯 가구에 집집마다 아이들이 몇 명씩 있어 시끌벅적했었다.
나는 가난한 농부인 아버지(이건석)와 어머니(노화자)의 몸을 빌려 세상에 태어났다. 3남 4녀 중 셋째아들로 두 형과 네 명의 여동생과 함께 자랐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까지 계셨으니 열 한 식구가 좁은 공간에서 살을 부대끼며 살았다. 농번기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아궁이의 부지깽이도 소용이 되었지만 나는 형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자연 속에서 뛰어놀았다. 동생의 특권이었다.
1961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마곡초등학교 월가분교인데 임시로 마을회관을 사용하였다. 3학년 2학기가 되어서야 막두산 언덕에 새로 지은 학교 건물로 이사를 하였다. 하지만 미완의 시설이라 여전히 공사 중이었다. 교실에서 공부를 하는 중에도 밖에서는 운동장을 닦느라 부모님들이 삽질과 괭이질을 하였다. 불도저가 있었다면 며칠이면 끝날 일을 우리 부모님들은 고생을 참 많이도 하시었다. 우리도 수업이 끝나면 산 아래 냇가에서 모래와 자갈을 퍼 날랐다. 책보에 담아 낑낑거리며 언덕 위로 나르면 선생님이 손목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도장을 열 개 받고 나서야 집으로 갈 수 있었다.
학교에서 집에 오는 길은 논둑길을 지나 냇물의 징검다리를 건너고, 산모퉁이를 돌아 밭길을 거쳐 굽이굽이 언덕길을 올라야 했다. 놀이터가 따로 있지 않았으니 하굣길이 즐거운 놀이터였다. 서낭나무(느티나무) 밑에서 구슬치기와 딱지치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었다. 초여름에는 이빨이 까맣게 물들도록 버찌를 따 먹었다.
5학년 어느 여름날이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빨갛게 익은 산딸기를 배가 부르도록 따먹었다. 식곤증이었을까 집에 와서 곧장 잠이 들고 꿈을 꾸었다.
좁고 어두운 동굴 속 같은 길을 가는데 저만치에서 눈부시게 밝은 빛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보석처럼 빛이 나고 황홀하였다. 나는 그곳으로 가려 했지만,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발버둥을 쳐도 좁은 굴을 통과할 수가 없었다. 엉엉 울었다. 오랫동안 눈물을 쏟으며 서럽게 울었다.
들에서 돌아오신 어머니가 깨웠을 때 나는 다락문에 매달려 올라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서쪽 하늘로 기운 태양이 다락의 작은 창으로 강렬한 빛을 퍼붓고 있었다. 생시 같은 꿈이었다. 예지몽이었을까. 마치 나의 미래를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하고자 하는 일들이 벽에 부딪히는 경험을 하곤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고 싶었으나 집안 형편상 어려웠다. 두 형도 중학교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진학을 하지 못하였다. 집안 형편을 알면서 마냥 조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부모님의 배려로 마곡사에서 설립하고 운영하던 마곡 고등공민학교에 진학하였다. 중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고입 자격검정 고시에 합격해야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학교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2십 리가 넘는 먼 거리였지만 배울 수 있다는 기쁨에 힘든 줄도 모르고 다녔다. 13살 어린 나이에 참으로 힘든 통학이었다.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아궁이 앞에서 어머니가 차려주는 아침밥을 먹었다. 어머니는 날마다 새벽밥을 지으시고 도시락을 챙겨주시느라 고생을 많이 하시었다. 나는 책과 도시락을 보자기에 싸서 어깨에 메고 논두렁 이슬을 털며 반달음질로 학교에 갔다. 꼬박 두 시간 정도를 걸었다. 수업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었다. 학교에 다니는 일이 너무 힘들었지만, 부모님에게 힘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1학년 겨울방학 어느 날, 왼손에 물집이 생겼다. 바늘로 터트리니 누런 진물이 나왔다. 상처는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하여도 아물지 않았다. 손가락도 서서히 굽어졌다. 무릎을 구부리고 펴기가 힘들었다. 간신히 편 무릎을 뻗친 상태로 발을 끌며 학교에 갔다. 집에 올 때는 친구들이 교대로 업어주기도 하였다.
눈썹이 술술 빠졌다. 밥그릇에도 책장에도 눈썹이 묻어있었다. 왼손은 감각이 사라지고 살이 빠져 갈퀴처럼 손가락이 굽어졌다.
나의 몸은 서서히 망가지고 있었다. 심하게 아프지는 않았지만 괴로웠다. 쉽게 잠들지 못하고 가위에 눌리곤 하였다. 부모님은 야속하게 지켜만 보시였다. 팔을 잘라버리고 싶다는 협박성 푸념에 저절로 낫기를 바라시던 부모님은 마침내 마음을 바꾸시었다.
1969년 사월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공주 산성동에 있는 ‘이용주 의원’으로 갔다. 원장님은 내 몸을 자세히 살펴보고 주삿바늘로 이곳저곳을 찌르며 아프냐고 물었다. 아무 감각이 없었다. 원장님은 나를 밖으로 내보내고 아버지한테만 얘기하였다. 병원장님의 안내로 공주 보건소에 갔다. 좀 더 세밀한 검사를 마치고 담당 의사는 병원에서처럼 아버지한테만 오랫동안 설명을 하였다. 나는 보건소 현관 계단에 앉아 건너편 봉황산 위로 몰려오는 먹구름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병원에서 나와서도, 버스를 타고 마곡사까지 오는 동안에도, 버스에서 내려 십리 길을 걸어오면서도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대 같은 비가 모내기하려고 갈아 놓은 논 위로 사정없이 쏟아졌다. 종이(유지)우산을 썼지만, 아버지의 흰 바지저고리도 나의 검정 교복도 흠뻑 젖었다.
집에서 기다리고 계시던 어머니는 다그치듯 물으시었고 아버지는 힘없이 XX병이라고 하시었다. 우리 집은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는 울기 시작하였다.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의 모든 꿈이 무너지고 있었다. 울다 지치면 쉬었다가 슬픔이 밀려오면 또 울고 밤새도록 울었다. 논에서는 개구리가, 산에서는 소쩍새가 나의 마음을 아는 듯 함께 울어주었다.
학교에 갔다. 담임이셨던 전황 선생님이 병원에 갔던 결과를 물으시었다. 나는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다가 울기 시작하였다. 선생님은 친구들을 모두 교실 밖으로 내보내고 계속 캐물었지만 나는 어깨를 들먹이며 큰 소리로 울기만 하였다. 선생님은 온갖 병명을 말하며 답을 들으려 하시었고 나는 고개를 저어가며 아니라고 하였다. 답답해하시던 선생님이 XX병이라도 되느냐고 말했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서럽게 울었다. 선생님은 믿지 못하시는지 나를 데리고 공주 보건소에 가서 확인하시었다.
아버지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으신지 대전시에 있는 ‘장피부과’로 나를 데리고 가시었다. 그 병원에서도 신통한 답을 듣지 못하였다. 나는 원장님에게 학교에 다녀도 되느냐고 물었다. 원장님은 머뭇거림도 없이 학교는 안 다니는 게 좋겠다고 하였다. 혹시나 했는데 검정 테 안경을 쓴 병원장의 대답은 순진한 소년의 상처를 더 깊게 하였다.
나는 무단으로 학교에 가지 않았다. 몸도 괴로웠지만, 마음을 바로잡을 수 없었다. 나는 노중선 선생님께 편지를 보냈다. 사회와 도덕 과목을 가르치시다가 고려대학교 아세아연구소로 자리를 옮기신 선생님이었다. 며칠 후 책 한 권과 답장을 보내주시었다. 1969년 5월호 ‘신동아’ 에는 유 준 박사의 기고문이 실려있었다. 이제는 천형의 사슬이 아니며 치료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노중선 선생님은 ‘낙망落望은 금물禁物’이라고 강조하시며 희망을 잃지 말라고 하시었다.
정기적으로 보건소에 들러 약을 타다 먹었다. 부모님은 병이 빨리 낫기를 원하시어 하루치보다 많은 양을 먹으라고 강요하시었다. 이틀에 반 알씩 복용하라는 약을 하루에 두 알씩 먹었다. 약의 과다복용은 부작용으로 이어졌다. 하늘은 빙글빙글 돌았고 땅은 푹푹 꺼지는 듯 심한 현기증이 났다.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주의를 들으신 부모님은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처방 약 외에 몸에 좋다는 보약을 수시로 달여 주시였다.
학교에 안 간 지 두 달 후였다. 보리방아를 찧으려고 아버지와 함께 마을회관이 있는 큰 동네 방앗간에 갔었다. 마을회관 앞에서 담임선생님을 만났다. 7월의 무더운 날씨에 땀을 흘리시며 월가리 다락골로 나를 찾아오시는 길이었다. 선생님은 9월에 검정고시 시험이 있으니 당장 학교에 나오라고 하시었다. 아버지도 허락하시어 다시 학교에 나갔다.
두 달 동안 시험 준비를 하고 1969년 9월 21일 대전 여고에서 검정고시 시험을 보았다. 나는 선생님의 부탁을 들어주기나 한 것처럼 시험을 치르고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공부를 계속할 만큼 나의 몸과 마음은 온전하지 않았다.
환자이면서도 누워있지 않으니 남들은 내가 환자인 줄 몰랐다. 겉모습은 멀쩡하고 얼굴도 마르지 않아 누구도 나를 병자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부모님은 나의 병을 철저하게 비밀로 하였다. 혼삿길이 막힐 수도 있다며 스물한 살 된 큰 형의 결혼을 서둘러 성사시키고 입단속을 하시었다. 아직도 형수님은 나의 병력을 모르신다. 현대 의학의 발달 덕분에 나를 괴롭히던 무리는 휴면상태로 잠복을 하여 병의 진행은 멈추게 되었다.
나는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 소에게 먹일 꼴을 베었다. 꼴을 베는 동안은 산사람이 되어 자유를 만끽하였다.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불렀다. 남을 의식할 필요가 전혀 없는 산속에서 울분을 삭이곤 하였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산골에서는 겨울 땔감을 준비한다. 톱 한 자루 들고 산속에 들어가서 생을 다한 병든 나무들과 폭풍에 쓰러져 마른 가지들을 잘라서 지게에 지고 왔다. 나에게 강요된 일은 아니었지만, 하루를 보내기엔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꿈도 희망도 아무런 계획도 없이 삶에 회의를 느끼며 1년 세월을 보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며칠 전에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아 세상은 온통 하얀 도화지 같았다. 그날도 장작을 패고 정리를 하고 있었다.
‘이재하!’ 나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친구 엄기운의 방문이었다. 그의 집은 학교 근처에 있었다. 우리 집과는 반대 방향이니까 2십 리가 훨씬 넘는 먼 거리였다. 친구는 고등학교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친구는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나의 부모님에게 인사하고는 찾아온 이유를 말씀드렸다. 내일까지 공주 영명고등학교에 원서를 내면 시험을 볼 수 있으니 자기하고 같이 가자고 하였다. 당시 영고는 후기로 학생을 모집하였었다. 친구는 공주사범대학교 부속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두 시간을 넘게 걸어서 친구의 집에 도착하였다. 깜깜한 밤이었다. 친구의 집은 버스가 다니는 큰길가에 있었다. 친구의 가족들 모두가 집에 있었다. 부모님과 결혼을 한 큰형의 내외와 조카들, 대학생인 형과 동생까지 열 명이나 되는 대가족이었다. 학교에서 가까워 몇 번 갔었기 때문에 구면이었다. 부모님과 형들 모두 반갑게 맞아 주시였다.
방학이라 집에 있어도 되는데 친구는 나를 데리고 영고에 갔다.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할 의무라도 있는 듯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친구는 당당했다. 방학이라 학교는 조용했다. 교무실에는 선생님(우길현 교감 선생님) 한 분이 계시었고 친구는 씩씩하게 자기소개를 하였다. 친구는 마치 자기 학교 선생님 앞에서처럼 행동하였다. 친구가 우러러 보였다. 나는 입학원서를 작성하고 고입 자격 검정고시 합격증을 제출하였다.
전염병 환자인 줄 알면서도 학교에 다니도록 배려해주신 전황 선생님과 친구 엄기운의 도움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친구가 나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하여 멀고 험한 길을 오지 않았더라면 나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공주시 중학동에 사시던 숙부님 댁에서 숙식하였다. 숙모님은 나의 병을 아시면서도 내색하지 않으시고 사촌들과 똑같이 대해 주시였다. 하숙비도 제대로 받지 못하시면서 조카가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해 주시였다.
1년의 공백기는 길었다. 60명 이상이 바글거리는 교실 풍경은 낯설었다. 나의 학습 능력은 현저히 낮아졌고 심적인 갈등은 깊어졌다. 공주 보건소의 담장을 따라 통학하는 길은 즐겁지 않았다. 보건소에 갈 때는 친구들에게 들키지 않을까 조마조마하였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다가도 혼자일 때는 슬픔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이중적인 인격체로 굳어져 갔다. 다행스럽게 선생님도 친구들도 내가 혐오스러운 전염병 환자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1973년 <진학>지 3월호에 각 대학의 입학 요강이 실려있었다. 국립대학교의 입학 자격에 ‘법정 3종 전염병 환자는 입학을 불허한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부모님은 대학교까지는 절대로 보낼 수 없다고 선언한 상태라 진학의 길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암담한 미래를 보는 듯하였다. 몸도 마음도 괴로웠다.
나는 두통이 있어 치료를 위해 10일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겠다고 말도 안 되는 결석신고서를 담임선생님께 드렸다. 선생님은 별말씀 없이 받아 주시였다. 그때 선생님이 좀 더 관심을 두고 따져 물으셨다면 나는 말 못 하고 감추고만 있었던 신상을 말씀드리고 하소연이라도 했을 것이다.
목사 선생님은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말을 빌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고 설교를 하시었지만, 나의 꿈은 물거품처럼 하나씩, 하나씩 꺼져갔다.
위로받고 싶었다. 그러나 말을 못 했다. 담임선생님한테도 목사 선생님한테도 차마 말을 못 했다.
마곡사에서 운영하던 학교에 다녔던 인연으로 공주불교학생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학교에서는 성경 공부를, 절에서는 불법을 두루 섭렵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었다. 철학적인 사유보다 깊은 신심으로 종교 생활을 했었더라면 길이 보였을까?
평범하게 보였지만 평범하지 않았던 나의 청소년기는 미래에 대한 대책 없이 끝났다. 가슴 깊이 상처를 묻고 검은 파도가 일렁이는 세상 속으로 나침반도 없이 밀려갔다.
2
“기사 양반, 요즘 경기가 어떻습니까? 경기가 좋고 나쁜지는 택시 기사분들이 잘 아시는데….”
대화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자랑거리가 있는 손님들은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온다.
“오늘 많이 하셨어요?”
나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친절하게 대답을 한다. 내 마음이 우울하다고 손님의 마음까지 불편하게 하면 안 된다. 나는 택시 기사다.
“예, 이제부터 많이 벌어야죠.”
“몇 시까지 일하세요?”
“요즘은 일찍 끝내요. 새벽 2시면 집에 들어갑니다.”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아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3시까지는 일을 했었다. 하루에 15시간은 꼬박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체력은 감소하고 노동의 시간도 줄어드는 것이 당연한 결과이기는 하다.
손님은 정치에서 시작하고 자신의 살아온 과거, 열심히 살았다는 입지전적인 이야기를 대충 한 다음 자식의 자랑으로 말을 이어간다.
“기사님은 몇 남매나 두시었소?”
그럴 때마다 나는 건성으로, 때로는 거짓으로 답을 하며 손님의 비위를 맞추어준다. 손님은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고 하면서도 자식 자랑을 한다. 본인이 열심히 돈을 벌어 뒷바라지했고 아들도 착하고 공부를 잘해 큰아들은 검사가, 둘째는 의사가 되었다는 식이다.
“좋으시겠네요. 장하십니다. 훌륭한 자제분입니다. 요즘 세상에 그런 자식 드물죠.”
대화하면서 운행하면 먼 거리를 지루하지 않게 이동할 수 있다.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은 다 하지 못해 아쉬움이 많을 것이다.
“벌써 다 왔네. 기사님 고맙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나에게도 자식이 있다. 딸 하나와 아들 하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남매다. 비록 단칸방에서 살았지만, 새끼들이 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그 자체로 행복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은 그랬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다른 세상을 알아가기 전까지는 끼니를 거르며 일을 해도 힘든 줄을 몰랐다. 언젠가는 남들처럼, 아니 남보다 더 잘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품에 있을 때만 자식이라고 했던가, 중학생이 된 후로는 부자간의 간격이 점점 벌어져갔다. 성장하는 과정이려니 하고 지켜보기만 하였다. 딸은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기도 하였는데 아들은 안 그랬다. 똑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성격은 달랐다. 언젠가 친구네 집은 부엌이 우리 집보다도 더 크다고 한 말이 나를 슬프게 하였다. 어린 마음에도 가난한 집구석을 친구들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처지였지만 유치원 보내고, 피아노학원 보내고, 보습학원 보내고, 태권도학원 보내고, 보통의 아이들만큼은 뒷바라지했다. 학교에서 온 가정통신문은 늘 성격이 차분하고 매사에 모범적으로 장래가 촉망되니 지켜봐 주시라는 선생님의 당부 말씀이 있었다. 남에게 자랑할 일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흡족하고 행복했었다.
공부하는 환경과 조건에 따라 실력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성적이 오르지 않았다. 공부방도 없고 저만의 책상도 없이 좋은 성적을 내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자식들 모두 지방대학으로 유학을 하였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의무는 몇 살까지인가. 대학생이면 성인이다. 자신들의 앞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나이다. 아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부모와 상의를 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편이었다. 내가 능력이 없어 남들처럼 뒷바라지를 못 해 주었으니 무엇을 부탁하고 의지할 마음도 없었을 거다. 때로는 그런 자식이 고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군에 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달에 한 번 음식을 싸 들고 면회 가는 일뿐이었다. 씩씩한 모습이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웠다. 제대하고는 휴학을 하고 등록금을 벌겠다고 공장에 취직하였다. 부모의 짐을 덜어 주겠다고 생각하는 게 기특했다.
나는 친구들한테 자립심이 강한 아들이라고 자랑까지 했었는데 오래 가지 않았다. 다니던 공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지 알 수 없지만, 평소 명랑하던 아들이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대화하지 않고 시선도 피하였다. 우울한 모습이 보였다. 나의 젊은 시절을 보는 듯했다. 고민 없는 청춘이 어디 있으랴, 그저 지켜만 보았다.
공장을 그만두고는 라식수술을 하였다. 시력 교정 수술을 하면 기분이 좋아질까 생각하고 두말없이 하도록 했다. 안경은 벗었지만, 밤에는 빛이 반사된다고 만족스럽지 않은 눈치였다.
몇 달 동안 편의점 아르바이트하고는 저 혼자 전국 일주 여행을 하였다. 휴학 중에 등록금을 모으겠다는 계획이 바뀌었나 보다.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행동하는 게 마땅치 않았지만 제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워오기만을 바랐다.
군 제대 후 일 년이 십 년처럼 느껴졌다. 우울한 자식의 눈치만 보며 본인이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었다. 무엇인가를 부탁하면 나는 기뻤다.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 내가 해 주는 것이 좋았다. 넉넉하지는 않았겠지만, 용돈도 꼬박꼬박 통장에 입금해주었다.
학교에 등록하고는 자취를 하겠다고 하였다. 딸처럼 아들도 전철을 타고 통학하기를 바랐으나 거절하지 못하고 허락하였다. 대학교 2학년은 학교 근방에서 자취하며 마쳤다.
겨울방학 동안에도 집과 자취방을 오가며 지냈다. 어쩌다 집에 같이 있을 때는 무엇이 불편한지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나를 의식적으로 피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 또한 아버지하고는 많은 대화가 없었었기에 이해하며 기다렸다.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며 내가 그랬던 것처럼 때가 되면은 변하리라 여기고 지켜만 보았다. 섣부른 대화는 갈등만 키우고 관계를 악화시킨다고 여겼다.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폭력이라도 써서 감정을 풀어내야 했었다.
그날은 쉬는 날이라 집에 있었다. 밥을 먹자고 해도 묵묵부답이었다. 종일 대화 없이 한 집 안에 있는 것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재미없는 텔레비전만 보며 시간을 보냈다.
아내가 퇴근하고 돌아와서야 집안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내는 피곤한 몸으로 두 사내의 저녁을 준비했다. 육식을 좋아하는 아들에게 먹이려고 오리고기를 사 왔다.
방 안에 처박혀 있던 아들은 갑자기 컴퓨터를 켜고 무언가를 인쇄하려고 했다. 프린터기에 문제가 있는지 씩씩거리며 몇 차례 시도하였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잉크가 말랐을까.
아들은 짜증 난 얼굴로 잉크를 충전하려는지 바쁘게 나갔다.
“오늘 안 되면 내일 하면 되잖아.”
“…….”
아들은 못 들은 척 찬바람을 일으키며 현관문을 닫고 나갔다. 집안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프라이팬 위에서는 오리고기가 맛있게 구워졌다. 나 혼자 꾸역꾸역 한 끼의 식사를 마쳤다.
잉크를 충전해 온 아들은 인쇄를 마무리하고 혼자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었다. 제 엄마가 구워주는 오리고기를 꾸역꾸역 삼키고 있었다.
“은창아! 반찬은 무얼 해 줄까?”
“…….”
“전에 가져간 것은 다 먹었니?”
“…….”
“말 좀 해라!”
“…….”
“너 그러면 엄마 너무 힘들어.”
“…….”
아내는 참았던 눈물을 쏟으며 흐느껴 울었다. 아들이 제대 후 2년 동안 살얼음판 위를 걷듯 자식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 모자간에는 가끔 대화도 있었는데 그날은 아니었다.
나는 아들이 미웠다. 괘씸한 놈, 한심한 놈, 못난 놈, 소리라도 버럭 지르고 싶었으나 참았다.
아들은 끝내 웃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아니 엄마 아빠를 외면하고 찬바람을 일으키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나오지 않았다.
2012년 2월 24일 금요일 이른 아침 아내가 울부짖으며 나를 깨웠다. 나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이라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들 은창이 어떡해 우리 아들!”
아내는 실성한 듯 왔다 갔다 어찌할 줄 모르고 발을 동동거렸다. 이 무슨 험악한 광경인가.
“빨리 119에 전화 해”
나는 축 늘어진 아들을 눕히고 가슴을 압박하며 깨어나라고 외쳤다. 가슴을 누를 때 차가운 공기만 새어 나왔다. 온기라고는 어디에도 없었다. 눈동자는 빛이 없고 혓바닥은 길게 입 밖으로 늘어지고 목에는 깊은 골이 파여 있었다.
입속에 더운 김을 넣어주려 입맞춤을 했을 때 차가운 느낌이 절망적으로 다가왔다. 눈을 감기고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 가슴 압박을 하였다.
119대원이 도착했다. 눈을 뒤집어 보고 가슴의 맥박을 측정해보고는 소생이 힘들다고 하였다. 경찰서에 신고를 대신해준다면서 전화를 했다. 곧바로 경찰차가 왔다.
경찰은 타살의 흔적이라도 찾아보려는 듯 아들의 몸을 살펴보았다.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는 사건도 있는지 전후 사정을 꼬치꼬치 캐묻고는 장례식장을 안내해 주었다.
아들은 새로 산 방한복을 놔두고 감색 운동복을 입은 몸으로 응급 차량에 실려 장례식장으로 이송되었다.
형님과 동생들이 오고 친구 몇 명과 아들의 학교 동아리 친구들이 밤늦게 왔다. 나는 미소 짓고 있는 아들의 사진을 보며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하룻밤 사이에 자식의 영정을 마주하다니 아내도 나도 훌쩍거리며 울기만 하였다.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나 보다. 먹은 것도 없는데 그치지 않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2012년 2월 25일 아침, 외국에 취업 나갔던 딸이 도착하고 장례 절차가 진행되었다. 입관하기 전에 아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삼베 수의를 입고 누워있는 아들, 병이나 사고사가 아니라 얼굴은 깨끗하고 평안해 보였다.
세종시의 은하수공원에서 화장하였다. 은하수공원에 산골을 하려 했는데 논산시에 있는 지장정사에서 오신 스님이 절에 봉안당이 있으니 그곳에 안치했다가 사십구재를 하라고 권유를 하였다. 영혼이 있다면 사과하고 위로해 주고 싶었다.
얇은 나무 상자에 가루가 되어버린 아들을 담아 무릎 위에 앉히고 지장정사로 향했다.
무릎냉증이 있었는데 아들의 체온이 전해져왔다. 찬바람이 느껴지도록 싸늘했던 자식의 마지막 선물이었을까 나의 무릎은 점점 뜨거워졌다.
하나뿐인 나의 아들은, 돌멩이를 삼켜도 소화시킬 건강한 육신을 버리고 24살 짧은 생을 마감했다. 내가 젊은 시절 그러했듯이 고민하고 방황하다가 삶을 포기하였다.
나는 아비의 자격이 없었다.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학비를 대주고 용돈을 주면 되는 줄 알았다.
내가 그렇게 가고 싶고 부러워했던 대학교도, 군대도 갔다 온 놈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서운했었다. 미웠다. 상처를 줄까 봐 애써 모른 척하고 철이 들기만을 기다렸었다.
무관심으로 보였을 것이다. 꼭 안아주고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했어야 했다. 억지로라도 정신과 치료를 받게 했어야 했다.
우울증은 누구나 겪으며 사는 정신적인 감기라고 생각했었다. 나도 세상을 원망하고 나 자신을 저주하고 꿈을 포기하고 체념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었다. 나는 죽을 용기가 없었다.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있으려니 생각하며 그냥 살았을 뿐이다.
아들이 태어났을 때 나는 기뻤다. 어느 날 나와 처음으로 눈을 맞추고 웃어주었을 때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 함께 장난치고 뒹굴던 시절 나는 행복했었다. 인생은 불행한 것만이 아니란 걸 느끼게 해 주었던 아들은 이제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뉴스에는 연일 유명 연예인들과 청소년들의 자살 소식이 보도되었다. 나와 관련이 없을 때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던 뉴스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학교폭력은, 왕따는, 우울증 환자는 왜 그렇게 많아졌는지, 세상이 갑자기 변하기라도 했을까 우울한 소식들은 나를 더욱 우울하게 하였다.
산업 현장에서, 여행길에서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 젊은이도 많다. 그때마다 죽은 자식을 살려내라고 몸부림치며 통곡하는 장면들을 보았다.
천명을 다하지 못한 어느 죽음이 원통하고 서럽지 않을까마는 그 유가족들은 원망할 상대도 있고 같이 슬퍼해 주고 위로해 주는 사람도 있다. 심리치료를 받을 수 있게 도움도 주지 않는가.
자살자의 부모들은 모두 죄인이다. 원망하고 보상을 요구하거나 아픔을 하소연할 대상도 없다. 죽음을 방조한 죄인일 뿐이다. 간접 살인자, 친족 살인자이다.
슬픔은 가슴에 묻고 삭여야만 한다. 가슴에 박힌 대못을 빼 줄 그 누구도 없다. 각자의 체질에 따라 빨리 빠지거나 영원히 박혀있거나 할 것이다. 내 가슴은 단단하게 뭉쳐져 있다. 단단한 응어리로…….
3
주인이 없는 빈방은 찬 기운만이 맴돌았다. 젊은 기운으로 채워졌던 작은 방은 허무함으로 가득하였다. 자식들이 성인이 되어서야 각자의 방을 갖게 되었고 흥분된 마음으로 방 정리를 했었다.
아들의 방에 큰 거울을 걸려고 절대로 빠지지 않게 망치질을 하였었다. 내 손으로 쾅쾅 박아놓은 대못은 벽에 그대로 박혀있고 거울은 침대 위에 얌전하게 누워있었다.
잘 정돈된 책상 위에는 빨간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등록금 고지서 한 장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등록금 걱정을 덜어 주고 싶어서 그렇게도 힘든 결정을 했더란 말이냐? 정이 없었기로서니 영원한 이별을 하면서도 한마디 할 말이 없었단 말이냐?.
방바닥에는 토막 난 배낭끈과 한 움큼의 검은 머리카락이 나뒹굴고 벽지에는 손톱자국이 나 있었다. 생의 마지막 흔적이다. 불과 몇 걸음의 사이를 두고 부모는 쿨쿨 잠을 자고 사지가 멀쩡한 자식은 저승으로 가기 위해 벽에 매달려 소리도 못 지르고 몸부림을 치고 있었을 것이다. 부모의 코 고는 소리가 얼마나 야속하고 원망스러웠을까.
잊어야 한다. 지워야 한다. 부모 싫다고 떠나버린 자식 놈 깨끗하게 버려야 한다. 거울을 버리고 못을 빼 멀리 던져버리고 책상도 침대도 입던 옷도 몽땅 내다 버렸다. 노트북도. 기타도. 스마트폰도 다른 이에게 주었다. 아들의 흔적을 지워내려고 아들의 손길이 닿았던 것들을 찾아 버렸다.
집마저 버리고 이사를 했다. 방 한 칸 줄여서 작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아들의 그림자를 지우려고 함께 호흡했던 공간을 벗어나 낯선 곳으로 이동했지만, 기억만은 지워지지 않고 또렷하게 살아났다. 아침부터 밤까지 깨어있는 동안에는 어느 곳에 있든지 따라다녔다. 웃는 얼굴로, 무표정한 얼굴로, 찡그린 얼굴로 나보다 한발 앞서서 이동해 있었다.
죽은 놈은 죽었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만 한다. 새끼를 사자에게 내어주고 돌아서서 풀을 뜯어 먹는 누우처럼 먹고 살기 위해서, 남은 목숨을 부지하려고 며칠 동안 집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집을 나섰다.
거리에는 슬픈 덩어리들이 몰려다녔다. 동서울터미널에는 휴가 나온 군인들이, 아셈타워에는 소풍 나온 노란 병아리들이, 대학교에는 개학을 한 학생들이, 자양동에는 다니던 학교와 교복 입은 학생들이, 젊은 손님들은 모두 화살이 되어 내 가슴을 쑤셔댔다.
애초부터 없었던 것과 존재하다가 없어진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원래부터 없었다면 허공 그 자체이지만 존재하다가 사라졌다면, 손에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는 기억들이 어떤 매개를 접하는 순간 살아나 허공 속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갓난아기를 보면 방긋 웃던 모습이,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보면 무릎에 앉아 행복해하던 얼굴이, 유치원생을 보면 재롱 잔치하던 모습이, 군인을 보면 면회 다니던 시절이, 편의점을 보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모습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내가 무얼 잘 못 했는데…….’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
‘하필이면 네가…….’
‘왜 죽었니?’
‘왜 아무 말도 안 했니, 왜, 왜, 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목이 터져라 외쳤다. 자동차의 실내는 혼자서 소리 지르고 미친 짓을 하기에 매우 적합한 구조다. 고속도로에서 눈물을 훔치려고 안경을 벗은 채 달렸다. 세상 끝까지 달리고 싶었다.
나는 하나뿐인 아들을 무관심으로 대해 죽음으로 몰았다. 나는 정신적 살인자이고 죄인이다. 모든 사람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것 같았다.
몇 안 되는 친구들도 멀리하고 외롭게, 더욱 고독하게 나를 가두었다. 나를 가둔 벽은 점점 단단하고 높아졌다.
술을 마시고 취하고 싶었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술을 마시면 몸이 괴로워 마실 수가 없었다. 마약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데 구하지 못해 포기했다. 향락에 빠져볼까 했으나 그러기에는 돈도 없고 너무 늙어버렸다.
TV와 컴퓨터가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이고 피난처였다. 쉬는 날이면 인터넷으로 바둑과 장기, 고스톱 등 간단한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무엇이든지 깊숙이 빠져들어 현실을 부정하고 잊고 싶었다.
게임도 시들해지고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갔다. 꿈을 잃으면 의욕도 사라진다. 의욕이 없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다. 아주 작고 하찮은 것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있을 때 가능하다.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얼마나 힘든데 체념 속에 살 수는 없다. 아픔보다 괴로운 서러운 병을 얻고 애간장을 저미는 이별을 했다. 분명 까닭이 있을 터이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나의 삶은 서럽고 슬프고 한스럽고 고달프단 말인가.
망상의 수렁에서 나오려면 몰입할 수 있는 실상이 필요하다. 인터넷 검색 중에 독학사 광고를 보았다. 혼자 공부를 해서 학위를 받을 수 있고 대학교 졸업 학력으로 인정이 된다는 것이다. 집에서 컴퓨터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나 동영상 강의와 교재비를 포함하여 300만 원의 거금이 필요했다.
며칠 동안 고민을 하였다. 이대로 미쳐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삶을 살 것인가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렸을 때 꾸었던 꿈이 생각났다. 초등학교 시절 잠깐 낮잠이 들어 꾸었던 생시 같은 꿈이었다. 작은 구멍을 통과하면 보석보다 빛나는 세상에 다다를 수 있는데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어 엉엉 울었었다.
생각해보면 그 뒤로 나의 병은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하고자 하는 일도 어느 정도 진행되다가는 길이 막혀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좌절하였고 그 꿈이 생각났었다. 꿈보다 해몽이다. 지금까지 운명을 미리 알려준 것 같은 그 꿈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작은 구멍을 통과했더라면 최상의 삶에 100% 도달했겠지만 50%라도 가까이 간다면 무한 광명의 세상은 아닐지라도 아주 캄캄한 암흑의 세계는 벗어날 것이 아닌가.
대전여자고등학교에서 고입 검정고시 시험을 볼 때 대학생인지 선생님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화단 앞에서 책을 읽고 있던 분이 우리한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열심히 공부해라. 대통령이 되겠다고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면 대통령이 못되더라도 국회의원은 할 수가 있다. 아마 그분은 국회의원이 아니 되었어도 밑바닥 인생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 해보자. 어렸을 때는, 내가 병이 들기 전에는 공부를 잘했었지 않은가. 학위를 취득해서 무한 광명의 세상은 아니더라도 지옥 같은 생활은 벗어나 보자. 나에게 주어졌던 악몽 같은 시절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와 천둥이 울고 무서리가 내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동영상 강의에 등록하였다. 카드로 10개월 할부 결제를 하였다. 목돈이 들었지만 강한 동기부여가 필요하였다. 돈이 아까워서라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학과 중에서 국문학과를 선택하였다. 밥 먹고 사는 것과 무관한 시를 쓰겠다고, 시인이 되겠다고 목표를 세웠다. 교과서에 실린 작품을 제외하고는 어떤 시도 모르는 주제에, 교과서에서 배운 시인 외에는 누구도 모르는 택시 기사가 시인이 되겠다니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내가 겪어내야 했던, 가슴 아팠던 사연들을 풀어내고 싶었다. 시를 쓰는 일에 나이도 학력도 따지지 않겠지만, 학위 정도는 있어야 시인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 거로 생각하였다. 어쩌면 학력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독학 학위는 4단계 23과목에 합격하면 된다. 1단계 시험에 한 학년을 이수하는 꼴이다. 2년여의 방황을 접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공부도 적당한 때가 있는 것이다. 책을 놓은 지 40년이 지났다. 눈이 침침하여 책을 오래 읽을 수 없다. 모니터도 장시간 들여다볼 수 없다. 기억력의 쇠퇴는 난관 중의 난관이다. 돌아서면 가물가물해져 반복에 반복해서 학습해야만 되었다.
더 어려운 것은,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나타나는 망상을 떨쳐내는 일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놈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그리 자주 나타나는지 책갈피 속에서도 모니터 속에서도 불쑥불쑥 나타나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마 등록금을 내지 않았더라면 포기했을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택시 영업을 계속해야만 했다. 미치지 않으려고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착같이 일을 해도 살기 힘든 세상인데 늘그막에 안 하던 공부를 하다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모든 절차는 인터넷으로 진행되었으나 시험은 감독관의 입회하에 엄정하게 치러졌다. 대부분 시험은 거주지에서 가까운 방통대 경기캠퍼스에서 보았다. 시험장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나처럼 공부할 기회를 놓쳤던 사람도 있고 단시간에 학위를 취득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어린 학생도 있었다.
경기공고에서도 시험을 보았다. 방통대보다 교실 수가 많았고 지정된 교실을 찾기가 힘들었다. 긴 복도를 기웃거리며 걷는데 어린 소녀들이
“저 교수님! OOO 교실이 어디에 있어요?”하고 물었다.
"모르겠네요. 나도 시험 보러 왔어요.” 지나치며 나눈 짧은 대화가 나를 웃기고 서글프게 하였었다.
시험지를 받아들 때마다 가슴은 두근거렸고 손은 떨리었다. 사인펜으로 동그라미를 채우는데 자꾸 벗어나 답안지를 다시 작성하였다. 수험생 중에 꼴찌로 답안지를 제출하며 젊은 감독 선생님에게 어색한 웃음을 짓곤 하였다.
국문학을 전공하는데 영어 과목도 합격해야 했다. 교양과목 중에 국사, 윤리, 영어는 필수과목이다. 첫 번째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다른 과목은 합격하였는데 영어 때문에 4단계의 시험은 치르지 못했다. 2단계와 3단계를 통과하였지만, 필수과목인 영어를 통과하지 못해 졸업시험과 상응한 4단계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없었다.
2년 차에도 영어를 통과하지 못했다. 단어를 알아야 독해가 되고 정답을 고를 수 있는데 어휘력이 부족해 또 일 년의 시간이 더 필요하게 되었다. 1년을 더 공부했으나 오히려 점수는 떨어졌다. 단어장을 앞에 매달아 놓고 운전하면서 외웠다. 강의를 녹음해 손님이 없을 때는 반복해서 들었다.
학위취득을 목표로 공부를 시작한 지 3년 차 마침내 영어시험을 통과하고 4단계 시험까지 치렀다. 합격을 확인하고는 웃어보았다. 나에게도 기쁨이라는 감정이 숨어 있었다.
2017년 2월 22일 방배동 교원연수원에서 학위수여식이 있었고 합격 수기 장려상을 받았다. 시험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늙은 나이에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했다고 격려하는 상이다. 사각모를 쓰고 사진도 찍었다. 나도 대학교를 졸업한 셈이다. 나도 국문학사가 되었다.
시인이 되는 길을 찾아보았다.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방법 외에도 문학지에 응모하는 길이 있었다. 관심이 있으면 보인다. 문학지가 많다는 것도 시인이 많다는 것도 알았다. 시 창작 강의하는 곳도 많았고 인터넷에는 수많은 시가 떠돌아다녔다.
2 018년 몇 번의 응모 끝에 시로 등단하였다. 시인이 된 것이다. 내가 경험하고 느꼈던 것들을, 가슴속에 품고 있던 생각과 정서를 내보이고 싶었다.
나에게 시는 표출의 본능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이다. 억압된 감정을 드러내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행위다. 단단하게 뭉쳐져 가슴 깊이 가라앉은 한과 슬픔 덩어리를 끄집어내고 풀어헤쳐 나 자신을 치유하고 동병상련하는 이들과 공감하는 일이다. 기왕이면 조금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포장해 세상에 내놓고 싶다.
턱없이 부족한 배움을 보충하기 위해 서울디지털대학교에 편입하여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제껏 나는 문학과 이질적인 삶을 살아왔었다. 문인이라고 내세우기에 부족하지만,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거나 공감을 얻을 수 있다면 나의 어긋난 삶이 헛되지만은 않을 것이다.
‘재하’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60년, 상처투성이 삶을 뒤집어 보고 싶어 이름을 ‘하재’로 바꾸었다. 시인 ‘이하재’의 앞날에 옛날 꿈에서 보았던 서광을 볼 수 있을까.
시인이라는 새 옷을 입었지만, 나에게는 너무 크고 헐렁하다. 나는 여전히 택시를 몰고 다니며 궁핍한 생활을 한다. 나는 택시 기사일 뿐 내 삶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의 직업은 택시 기사다.
나는 안다. 아무리 울며 발버둥 쳐도 꿈에서 보았던 광명의 세상, 최고의 정점에는 이르지 못할 거라는 것을 잘 안다. 재주도 배경도 턱없이 모자라고 주어진 시간도 부족하지만, 가난한 영혼을 살찌워 새로 입은 옷이 잘 어울리는 시인이 되고 싶다.
많은 작품보다 많은 사람에게 기억될 한 편의 시를 얻을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어둠의 한쪽 모서리를 살짝 걷어 올리고 누군가 흘리고 갔을지 모를 작은 행복이라도 주울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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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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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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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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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혼자는 살수없다
인연이란 연결고리로 사회란 울티리에서 아웅다웅 살아가는 우리들 ~
위 사연을 읽어면서 느낌은~
서로에게 소통하는 방법을 몰랐다
누구에게도 소통하는 방법 배울수 없었다 ,,,,먹고 사는것이 더 급급했기에~
어렵고 헌난한 삶을 살아 왔던 시절엔 그 어려운 환경들을 참는것 외엔 살아가는, 소통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부모자식간
사 제간에
부 부간에도
인연있는 모든 관계에서도
서로 소통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개인의 감정들의 소중함 살필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어려운 세대를 살아온 우리 모두가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사연 이다
서로 소통하고,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방법을 알았더라면
같은 환경 같은 상황일지라도
더불어 사는 많은 인연들의 삶이
부드럽지 않았을까?
무명(무지)-->무념이 될때 부처님의 광명이 더욱더 빛나는 것처럼 소통되지 않은 불편한 마음들은 참회하고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는 선한
예쁜 마음들은 더욱 빛나게 하는
참 좋은 인연들이 되었슴 좋겠습니다
가슴아픈 사연에 먹먹해지는 아침에 몇자 적어 봅니다
_(((관세음보살)))_
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
파란만장, 구절양장의 삶을 사신
그분에게 힘껏 위로의 미소를 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다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