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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마을 백담사 이곳에서 표를 구입해서 셔틀버스를 타고 백담사 입구까지 간다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는 7,2km의 거린인데 걸어서 가도되고 힘들면 차를 타고 가면된다 일반차는 통제가 되고 셔틀버스와 그곳에 허락된 차들만 통과가 된다 이버스를 이용하는데 버스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버스라고 한다 정원이 차면 무조건 출발이다 셔틀버스는 하행시간이 6시까지라고 한다 태풍 카눈이 한반도에 다녀가시느라 비가 내렸지만 우리는 늘 비와 친구하며 일정을 택한다 이곳부터 차량이 통제되는데 잘했다는 생각이다 오염되지않는 청정계곡의 보존은 강제성이 있어야만 된다는 것! 산전체 어디고 그랬으면 좋겠다 금수강산이 망가져 가는것을 지켜가려면 억지로라도 강행해서 통제가 불가피하다는 생각으로 절대 강추다 입구에서 조금지나면 설악산 백담분소가 있다
셔틀버스에서 내려서 조금 걷다보면 이다리를 만난다 건너가면 바로 백담사다 다리 중간에서 보며는 계곡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요즘 우기철이라 물이 불어서 계곡안으로 들어갈수가 없이 물이 불어났다 물이 빠지면 들어가 돌탑쌓고 남들이 쌓아논 탑들이 장관이다 안개가 자욱하고 물이 엄청나게 불어서 무섭게 물살이 세다
이넓은 계곡에 물은 설악산 청정 일급수 최고의 물이며 들어갈수 있어서 많은사람들이 즐길수 있다 셀수없는 탑들이 비바람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많은 불자들의 정성일런지...
태풍에도 끄떡없는 돌탑 누군가 쌓았을 마음을 알수 있을 것 같다 백담사라는 사찰의 이름은 설악산에서 대청봉에서 절까지 작은 담이 100개가 있는 지점에서 사찰을 세운데서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조금 걷다보니 비가 조금더 내린다 그래도 싫치않다 물소리에 사람소리도 잘안들린다
금강문을 통과하면 백담사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
금강문 옆의 나무결이 너무 예쁘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이 절의 기원은 647년(진덕여왕 1)에 자장(慈藏)이 창건한 한계사(寒溪寺)이다. 690년(신문왕 10)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719년(성덕왕 18)에 재건했다. 785년(원성왕 1) 다시 불탄 것을 790년에 종연(宗演)·광학(廣學)·각조(覺照)·영희(靈熙)·법찰(法察)· 설흡(雪洽) 등이 절터에서 30리 아래로 옮겨 운흥사(雲興寺)라고 했다. 984년(성종 3)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자 987년에 동훈(洞薰)·준희(俊熙) 등이 운흥사지의 북쪽 60리 되는 곳에 옮겨짓고 심원사(深源寺)라고 개칭했다. 1432년(세종 14)에 또다시 불이 나자 의준(儀俊)·해섬(海暹)·취웅(翠雄)·신열(愼悅) 등이 옮겨 짓고 선구사(旋龜寺)라 개칭했다. 1443년 화재로 소실되자 1447년 옛 터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절을 짓고 영취사(靈鷲寺)라고 했다. 1455년(세조 1)에 다시 화재로 불타버리자 재익(載益)·재화(載和)·신열 등이 옛 터의 상류 20리 되는 곳에 중건하고 백담사라고 개명했다. 1775년(영조 51)에 다시 불이 나자 최붕(最鵬)이 태현(太賢)·태수(太守)와 함께 중건하고, 심원사(尋源寺)라고 개칭했으나 1783년(정조 7)에 다시 백담사로 환원했다. 1915년에 일어난 화재로 거의 모든 당우가 타버린 것을 당시 주지였던 인공(印空)이 중건에 착수해 1921년에는 응향각 등 사무실 30여 칸을 새로이 짓고, 종과 북을 주조해 낙성법회를 열었다. 절집에서 바라본 건너온 다리다
계곡 가까이 다가서서 계곡 바닥까지 내려왔다 절집에서 계곡으로 갈수있게 길을 만들어 놓았다 이곳 매점에서는 기념품과 국산차를 팔고 있으며 다기종류도 있으며 타올등등 진열되었다 일단은 밖에서 겉모습만 찍고 나중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나무밑에도 탑들이 수도없다
절집 반대편으로 건너가면 작은길도 나있다 비가 많이 내려 물이 불어서 건너갈수는 없었다
저안쪽 끝에는 수행하는 절집 주인들이 계시는가보다
처마끝에 빗물이 떨어지는 속도가 빠르다
템플스테이 장소인가보다 야광나무 한그루가 오래되었는지 엄청크다 밤에 하얗게 꽃을 피워낸다는 이나무는 벗꽃이 질고나면 바로 하얀 꽃망울을 터트려밤을 밝힌다고한다 비가 뿌리는 모습이다 바람이 약간불어 비가 곧장 내리지 못하고 날리는 모습이다 최병렬 전 대표는 “전두환 대통령의 백담사행은 사실 당시 상황에서 전 대통령이 취할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었다”며 “나는 오히려 전 대통령이 경남 합천의 고향으로 내려가길 희망했으며, 그 뜻을 전 대통령 측에도 전달했지만 단호히 거절당했다”고 밝혔다. 또 백담사로 정하기 전 월정사로 가려는 움직임도 있었다고 전했다. “전 대통령은 원래 오대산 월정사로 거취를 옮기려 했다. 그곳에 탄허스님이 쓰던 방이 있는데, 그 곳 자체가 국도변에 있고, 언제든지 시위대가 쳐들어올 수 있는 무방비 지역이어서 취소했다고 들었다.” 백담사로 확정되기까지는 당시 총무원장 의현스님의 역할이 있었다고 밝혔다. “서의현스님이 전 대통령으로부터 ‘좋은 곳이 없는가’라는 전화를 받고 스님이 내설악 백담사를 이야기 했다고 들었다.” 최 전 대표는 서의현스님이 백담사를 추천한 이유를 “워낙 오지여서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은데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수도했던 유서 깊은 내력도 있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더라”고 했다. 1988년 11월23일 전 대통령과 백담사를 갔던 서의현스님은 전 대통령 경호원들이 입을 옷을 사고, 전 대통령 부부가 세수라도 할 고무통 등 거의 한 트럭분의 생활용품을 구입했다고 한다. 당시 백담사는 전기가 없었고 화장실은 방에서 멀리 떨어진 재래식이었다.
만해스님이 예배하던 부처님 보물 1182호인 백담사목조아미타불좌상과 복장유물이 남아 있다. 극락보전 주불로 모셔진 이 불상은 조선 영조 24년(1748)에 조성된 것이다. 18세기 전반에 조성된 불상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머리에는 소라모양의 나발이 촘촘히 붙어있고, 정수리부분에는 상투모양의 육계가 금색으로 높이 솟아 있다. 얼굴은 둥근 편인데, 눈썹과 눈이 가늘게 표현돼 있고, 작은 입과 오뚝한 코가 더해져 독특한 인상이다. 두상에 비해 어깨와 가슴이 넓어 당당한 모습이다. 어깨의 Ω형 주름과 무릎사이의 옷 주름은 곡선으로 처리돼 있다. 가슴에는 또 U자형의 중복된 주름과 함께 내의(內衣)상단에 매듭을 지어놓았다. 이 불상은 특히 조성연대를 알려주는 발원문(發願文)과 많은 복장물이 발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복장에서 불상신조성회향발원문 1매와 다라니서입회향발원문 1매, 홍참의 다리연화방거 한글발원문 1매, 자식점지한글발원문1매와 만자소화(卍字小花)문 노란색단삼회장 저고리 1점, 유리와 수정 등의 파편수백점을 보자기에 싼 복장물 1괄이 확인됐다. 특히 영조 24년(1748)에 만들어진 것으로 만자(卍字)를 서로 연결한 문양과 함께 국화무늬를 단순화한 소화문을 도안으로 사용한 노란색단 삼회장저고리는 조선시대 복식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꼽힌다. 저고리 주인공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깃과 곁마기의 만자운용문 자단색으로 보아 궁중의 왕족이거나 왕실과 관계된 신분으로 추측된다. 한편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으로 활동했던 만해스님이 주석했던 이곳에는 스님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05년 연곡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백담사에서 <조선불교유신론>과 <십현담주해> 등을 집필하고 시 ‘님의 침묵’을 발표했다. 이런 인연으로, 백담사 곳곳에는 만해스님을 추모하기 위한 당우들이 세워졌다. 지난 1995년 지하 1층, 지상 1층 110평 규모로 건립한 만해기념관에는 스님의 동상을 비롯해, 저술과 사진, 오도송 등이 전시돼 있으며, 이밖에도 스님의 시비를 비롯해 만해도서관과 교육관, 연구관, 수련원을 통해 만해스님의 선사상을 고취시키고 있다.
작은 연못에는 수련도 피여 앙증스럽다 비에 젖은 수련 이세상 어느것보다 아름답다
이꽃의 이름이 무엇인지 처음보았다 분명 야생화인데...
극락보전 오른쪽 뒤편에 나한전이 자리한다. 잘 다듬어진 기단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겹처마에 팔작지붕 건물을 세웠다. 창호는 정자(井)살창을 짜아 각 각 사분합의 여닫이문을 달았다. 옆면에는 이분합의 문을 달아 출입을 하고 있다. 내부의 바닥은 마루를 깔고 천정은 반자로 마감하였다. 안에는 석가삼존상을 중심으로 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나한이란 아라한을 의미하며 응공(應供)으로 한역되며 '마땅히 공양받을 만한 자'라는 의미이다. 안에는 금동 석가여래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좌우와 뒤쪽에 1960년에 조성한 18나한상을 비롯한 500나한상, 시봉, 신장 등이 모셔진 불단이 있다. 중앙의 삼존불은 석가모니불과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상이다.
불화로는 1927년에 조성한 나한탱이 있다. 그림에는 모두 130분의 나한상이 묘사되어 있으며, 이는 오백나한도의 일부에 해당한다. 따라서 본래의 백담사에는 이와 같은 불화가 세 폭 더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불화 속에 그려진 한 스님 한 스님의 표정은 하나같이 뚜렷한 개성을 나타내고 있고, 손모양이나 자세가 모두 다르다. 비록 오래된 작품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 오백나한도가 흔치 않다는 현실에 입각해 볼 때 이 탱화는 잘 보존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만해 한용운님의 동상이다 태풍 카눈이 왕림했다 올해들어 첫손님으로 많은 비를 몰고 다녀가신듯하다 엊저녁부터 새벽엔 서울에도 엄청 퍼부어 잠도 설쳤지만 아침에 일어나니 태풍이 꽁무니를 빼는지 빗줄기가 약해지는 것 같다 백담사로 향하기로 했다 비덕분인지 평일이라 그런지 길은 뻥뚫려 거침없이 내달린다 휴게소에서 선택된 카프치노 한잔맛이 가라앉은 하늘과 커피향은 찰떡 궁합이다 탁월한 선택은 백담사 계곡의 물과 야릇한 산향기 그리고 향수보다 좋은향.. 제철만난 찰옥수수 입에 물고 셔틀버스에 몸을 싣는다 7,2km를 왕복하고나면 어두워질 것도 같고 비도 내리고 하산은 걸어내려 오기로 결정하고 창밖을 응시하니 펼쳐진 산야의 풍경들 비에 젖은 록색나무들이 더욱 짙게 보인다 그래.. 음 잘했어 오길 잘했어 수십번 되뇌여본다 비도 산도 물소리도 절집도 모두가 내편이다
주소/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22-33 사진/마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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