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왓슨 & 프랜시스 크릭
James Watson & Francis Harry Compton Crick
1953.4.25 <네이처>에 DNA구조를 밝힌 논문 발표하다
“우리는 DNA(디옥시리보핵산)의 구조를 보이고자 한다. 이 구조는 새로운 특징들을 갖고 있는데, 생물학적으로 의미심장하다.” 이렇게 시작되는 한 편의 짧은 논문이 분자생물학의 기본적인 신비를 밝혀냈고, 인간 유전체 계획 등 향후 생명과학 혁명의 단초를 마련했다. 논문의 공동 저자는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었다.
1,000단어에 못 미치는 128줄의 짧은 논문이 생명의 비밀을 밝혀내
1869년 독일에서 활동하던 스위스 화학자 요한 프리드리히 미셰르가 병원에서 사용한 붕대에 묻은 고름의 백혈구 세포에서 핵을 뽑아냈고, 핵에서 인 함량이 높고 산성을 띤 분자를 분리해냈다. 그는 이것을 뉴클레인이라고 불렀고 뉴클레인이 단백질과 핵산의 복합체라는 것을 알아냈다. 핵산이라는 용어는 1889년에 등장했다. 그리고 1940년대 중반 뉴욕 록펠러 연구소의 오스왈드 에이버리는 DNA가 유전자의 기본 물질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렇다면 DNA는 어떻게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가? 과학자들은 네 염기가 반복되는 단조로운 분자가 유전정보를 담기는 힘들다고 보았다.
이 문제를 푸는 실마리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화학자 어윈 샤가프가 내놓았다. 그는 DNA의 염기를 정량적으로 분석하여 아데닌과 타민, 구아닌과 시토신이 각각 1:1의 몰 비로 들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한편 런던 킹스 칼리지의 모리스 윌킨스(1962년 왓슨, 크릭과 노벨 생리의학상 공동 수상)가 DNA 같은 생명 분자들이 결정 구조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역시 킹스 칼리지의 로잘린드 프랭크린은 X선 회절 분석을 통해 DNA의 구조를 거의 발견할 수준에까지 도달했다. 그 밖에도 살바토어 루리아, 앨프레드 허시, 라이너스 폴링 등 많은 과학자들이 DNA 연구에 공헌했다.
DNA 이중나선 구조 모형
DNA 구조가 어떠하기에 생물의 형질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할 수 있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결정적인 대답은 <네이처>(Nature) 통권 171의 737~738쪽에 실린 1,000 단어에 못 미치는 128줄의 짧은 논문에 담겼다. 날짜는 1953년 4월 25일. 제목은 <핵산의 분자구조: 디옥시리보핵산의 구조>(Molecular structure of Nucleic Acids: A Structure for Deoxyribose Nucleic Acid), 공동 저자는 제임스 D.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었다. 이 논문은 모리스 윌킨스와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연구 데이터에 크게 빚지고 있다. 그들의 핵심 데이터는 <네이처>지 같은 호에 두 개의 다른 논문으로 실렸다. 왓슨과 크릭은 킹스 칼리지 연구자들의 성과에서 자극과 도움을 받았다는 감사 표시를 했다.
DNA에서 정보를 간직한 부분이 유전자다. 유전자는 모든 생물의 기본 특성을 결정하기 때문에 DNA는 가장 중요한 생명 분자이며, 특히 유전자는 몸의 대부분을 이루는 단백질 분자를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왓슨과 크릭의 논문은 바로 그러한 DNA의 구조를 밝혀냄으로써 유전학과 분자 생물학의 결정적 기초를 놓은 것이다.
핵 속 염색체(chromosome)는 유전물질 DNA가 감겨 있는 것으로 모든 사람의 체세포마다 46개(23쌍)가 들어 있다. 염색체의 DNA는 뉴클레오티드로 이루어진 두 가닥의 사슬이 꼬인 이중나선구조를 이룬다. 뉴클레오티드는 염기, 당, 인산으로 구성돼 있고, DNA 염기는 아데닌(A), 티민(T), 구아닌(G), 시토신(C) 등 4종류가 있으며 A는 T와, G는 C와 각각 결합한다.
크릭과 왓슨의 만나,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나와 똑 같은 첫 번째 사람
1928년 시카고에서 형편이 넉넉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난 제임스 왓슨은 어릴 때부터 지적인 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주로 책에 파묻혀 지냈으며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수금원, 어머니는 시카고 대학 비서였다. 시카고 대학은 재능이 뛰어난 학생을 일찍 입학시키는 정책을 펴고 있었다. 왓슨이 시카고 대학에 입학한 것은 15살 때였다. 어린 시절 새 관찰이 취미인 아버지를 따라 다녔던 왓슨은 조류학을 연구하려 했다. 3년 만에 생물학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계속 조류학을 연구하려 했지만 곧 관심이 시들해졌다. 생화학을 공부하기 위해 하버드 대학원에 지원했지만 떨어졌고, 캘리포니아 공대에도 떨어졌다. 결국 인디애나 대학에서 연구 생활을 시작해 1950년 생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임스 왓슨(왼쪽)과 프랜시스 크릭은 실험실에서 쉬지 않고 생물학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서로에게 지적 자극이 되었으며 연구 성과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고 받았다.
프랜시스 크릭은 1916년 영국 노샘프턴 근처 작은 마을 웨스톤파벨에서 신발을 만들어 파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가 사준 백과사전을 읽으며 과학에 대한 관심을 키우기 시작했다. “어른이 될 때쯤에 모든 것이 다 발견되면 어떻게 하지” 고민 하던 어린 크릭은 열 살 때부터 집에서 실험을 하곤 했다. 폭발성 혼합물을 병에 담아 폭발시키는 실험까지 했지만 부모는 꾸중하기는커녕 병을 물통에 담가 병 조각이 날아가지 않게 하라는 원칙을 정해 주며 격려했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물리학을 공부했고 박사학위를 받을 무렵 독일의 폭격으로 연구실이 파괴되어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전후 1947년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간 크릭은 생물학으로 분야를 바꿔 1949년부터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연구했다.
크릭은 왓슨과 처음 만났을 때를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그와 나는 쉽게 친해졌다. 서로 관심 분야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고, 우리 둘 다 천성적으로 너절한 생각을 참지 못하는 냉정함과 성급함, 다시 말해 젊은이다운 오만함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우리가 만난 첫 순간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처음 2~3일 동안 무척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는 기억은 분명하다.” 이후 둘은 매일 함께 점심을 먹으며 실험실에서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됐다. 다시 크릭의 회고다. “그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생물학을 나처럼 생각하는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첫 번째 사람이기도 했다.”
"우리가 추정한 특수한 쌍이유전 물질의 복제 메커니즘을 시사한다 "
“그 사진을 본 순간 입이 쩍 벌어지고 맥박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그 패턴은 전에 찍었던 것들보다 더 단순했다. 더구나 사진에 뚜렷이 드러난 검은 X 모양은 나선형 구조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제임스 왓슨은 킹스 칼리지의 모리스 윌킨스이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새로 찍은 B형 DNA의 X선 회절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를 위와 같이 회고했다. 당시 왓슨과 크릭은 미국의 라이너스 폴링과 사실상 경쟁하고 있었다. “만일 그가(라이너스) 조수 한 명을 보내 DNA 사진을 갖고 오라고 했다면, DNA 구조는 그가 있는 곳에서 발견되었을 것이다. 라이너스는 기껏해야 일주일 정도면 DNA 구조를 밝혀냈을 것이다.” 폴링은 1953년 2월에 발표한 논문에서 DNA를 ‘각 사슬이 나선을 이룬 세 가닥의 사슬 구조’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폴링이 발표한 구조 모형에는 원자들이 너무 빽빽하게 담겨 있어 기본적인 화학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었고, 수소 원자가 인산기에 단단히 결합돼 있다는 결함이 있었다. 폴링이 말하는 핵산은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산이 아니었다. 폴링의 구조 모형은 DNA가 유전 정보를 어떻게 지니고 있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1962년 노벨상 수상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모리스 윌킨스, 막스 퍼루츠, 프랜시스 크릭, 존 스타인백, 제임스 왓슨, 존 켄드류.
케임브리지와 런던에 있는 실험실이 미국 연구자들이 사용하는 것보다 더 좋은 X선 회절 장치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에서 얻은 X선 회절 패턴이 훨씬 더 선명했다. 런던에서 케임브리지로 돌아 온 왓슨은 크릭과 함께 DNA 구조 모형을 고안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1953년 2월 28일 저녁의 일이었다. “아데닌과 티민 쌍이 두 개의 수소결합으로 묶이고, 구아닌과 시토신 쌍이 최소한 두 개의 수소결합으로 묶이면 모양이 같아진다는 것을 갑자기 알았다. 그리고 이 수소결합들은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것 같았다. 두 종류의 염기쌍을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애 쓸 필요가 전혀 없었다. 한 분자에 세 가닥이 아니라 두 가닥이 쌍을 이루어야 하고, 한 사슬은 아래로 다른 사슬은 위로 달려야 했다.” 3월 7일에 높이 180센티미터가 넘는 DNA 분자 모형이 완성됐다. 라이너스 폴링도 4월 초에 케임브리지로 와서 모형을 보고 그것이 옳다는 데 동의했다. 왓슨과 크릭은 4월 2일 논문을 <네이처>에 보냈고, 결국 4월 25일자에 실렸다. 논문에서 중요한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가 추정한 특수한 쌍이 유전 물질의 복제 메커니즘을 시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정한 동료들과 함께 지낼 수 없다면, 과학계를 떠나라"
논문 발표 이후 크릭은 뉴욕 브루클린 폴리 테크닉으로 갔고 왓슨은 캘리포니아 공대로 갔다. 이후 그들은 한 번도 같은 연구소에서 연구한 적이 없었지만 계속 서신 왕래를 하며 주로 학회에서 만나 친분을 유지해 나갔다. 1977년에 크릭은 캘리포니아 라졸라에 있는 소크 생물학 연구소 연구원이 되었고(1994년에 소장이 됨), 이후 캘리포니아 대학(샌디에이고) 생화학과 교수가 됐다. 그는 소크 생물학 연구소에서 뇌와 인간 의식의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다가, 대장암으로 2004년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화장되어 태평양에 뿌려졌다. 그는 자신의 연구 목표를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신경생리학자들은 뇌가 어떻게 장면들을 따로 다루는지, 대뇌피질의 각기 다른 부위가 어떻게 운동, 색깔, 모양, 공간의 위치 같은 것들을 처리하는지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있다. 그러나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어떻게 뇌가 이런 것들을 하나로 모아 생생한 전체 장면을 보여주는가 하는 것이다.”
1983년 분자 생물학 심포지엄에 참석한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
왓슨은 하버드 대학 교수로 일하다가 뉴욕 롱아일랜드 북부 콜드 스프링 하버의 정량생물학 연구소로 옮겨 소장이 되었고, 1988년부터 4년 간 미 국립보건연구소의 인간 유전체 계획 책임자가 되었다. 인체의 모든 유전자를 파악하여 지도를 그리고, 인간 DNA의 모든 염기 서열을 찾는다는 목표를 지닌 계획이었다. (2001년 2월에 인간 유전체의 32억 개 염기 서열이 해독됐다.) 1972년에 쓴 ‘복제 인간을 향해: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일까?’라는 글에서 왓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과학계와 의학계의 수중에만 놓아두어서는 안 될 중대한 문제다. 모든 과학 발전이 자동적으로 우리의 삶을 더욱 뜻 깊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실험 능력을 갖춘 사람이 널리 악평을 받게 될 복제 아기를 언젠가 탄생시키리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인간 복제를 세계적으로 불법화하는 포괄적인 선언을 하는 것도 세계가 자신이 나아가고 싶은 방향을 알리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의 성과일 수 있다. 우리가 지금 당장 이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루 아침에 사라질 것이다.”
이중나선 발견 40주년 기념회의에서 이루어진 대담에서 제임스 왓슨은 ‘과학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한 몇 가지 법칙’을 이야기했다. 첫째, 승자로부터 배워라. 늘 자신보다 영리한 사람들을 쳐다보아야 하고 아둔한 사람들을 피하라. 둘째, 모험을 해라. 심각한 곤경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당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려면 제2의 부모(스승)를 포기할 준비까지 해야 한다. 셋째, 의지할 사람을 만들어라. 당신이 끝장났다고 생각할 때 구원해 달라고 매달릴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넷째, 즐겨라, 그리고 관계를 유지하라.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며, 지적인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과학자들과 어울려야 한다. 경쟁자들이 우리보다 먼저 이중나선에 도달하지 못한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고립돼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다음과 같은 왓슨의 말이다. “따라서 마지막 법칙은 이렇다. 진정한 동료들과 함께 지낼 수 없다면, 과학계를 떠나라.” 왓슨과 크릭이 서로에게 진정한 동료였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다른 많은 동료들과 어울리며 지적 자극은 물론 연구 성과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고 받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주는 말이다.
-표정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