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내리는 서산을 가다
(태안마애삼존불상,서산마애삼존불상,보원사지,안견기념관)
산수국/왕태삼
아침부터 봄비가 은가루처럼 내린다. 유년의 소풍은 화창한 날씨여야 하지만 문학기행의 봄비는 건조한 시심을 움트게 하는 반가운 동행자다. 또한 인정 많은 문우님들이 손수 장만한 음식을 꽃보자기에 싸서 정성을 풍기고 오는 날이기도 하다. 떡, 홍어회, 통닭, 담근 술 등, 문학기행 버스를 타는 일은 뱃놀이를 위해 버들잎 같은 밤배에 오르기 전의 달뜬 설렘과도 같다.
너무 하롱거렸던 탓이었을까? 아니면 마애불이 넘치는 불국정토 탓이었을까?
길도우미를 잘못 입력하여 일정에 없는 태안군마애삼존불상(국보307호)을 찾아간 것이다. 자욱한 안개처럼 잠시 서성임도 있었지만 정군수 지도교수님의 “오히려 전화위복과 덤으로 생각하자”는 지혜의 말씀을 듣고 어떠한 당황에서도 차분한 생각과 반성하는 자세를 가져야 함을 배웠다.
6~7세기 삼국시대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는 물론 일본의 불상조각에도 영향을 미친 우리나라 마애불의 효시다. 흔히 본존불은 가운데 배치가 되는데 비해 태안마애불은 왜소한 보살입상을 가운데에 모시고 좌우에 커다란 여래입상이 부모마냥 듬직하게 서있었다. 마치 어린이날 엄마 아빠가 아이 손잡고 동물원에 가는 소박하고 정겨운 석불이었다.
“꽃구경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서산시 동부시장에 있는 향토음식점으로 향했다.
서산 지방의 별미인 ‘우럭젖국’ - 쌀뜨물에 꾸덕꾸덕한 우럭과 갖은 야채를 넣고 끓여 새우젓으로 간을 하는 구수하고 해장에 좋은 풍미였다. 쌀뜨물 속에 아내의 얼굴이 보얗게 비추인다. 평소 아침 해장국을 위해 쌀뜨물을 받아 냉장고 속에 넣어 두고 밤늦게 기다리는 마음이 보인다.
봄비는 안개에 숨어 바람처럼 내린다. 봄비의 향연이다. 때로는 안개비로 내리다가 이슬비, 가랑비, 실비, 보슬비, 는개 등 제 모든 뼈와 살을 바수며 내린다. 오후부터는 계획된 문학기행 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버스는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고풍저수지를 지나 서산마애삼존불상(국보84호)으로 향했다.
오전부터 기다리던 문화관광해설사(허수정님)께서 마중을 나오며 “성춘향 이도령 기다리듯 이렇게도 만남이 어려운 줄 몰랐습니다.”라며 백제의 여인마냥 복스럽게 인사말을 건넨다. 가야산 줄기 용현계곡 다리를 건너 협곡의 돌계단을 삶의 길처럼 한 계단씩 오른다. 산비탈엔 듬성듬성 비목나무가 갈색 노루 털을 입고 서있다. 가슴에 다는 빨간 ‘사랑의 열매’가 매달린 비목나무의 가을 숲을 상상하며 오르고 또 오른다.
드디어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을 만났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의 가운데에는 산신령 같은 여래입상이, 오른쪽에는 현세를 관리하는 관음보살이 보주(寶珠)를 들고 서있으며, 왼쪽에는 내세를 관리하는 반가미륵보살이 다리를 꼬고 앉았다. 한결같이 시골 동네의 아짐이나 아재의 소박한 사람들의 표정과 흡사하다. 게다가 도톰한 볼살마다 미소까지 머금었으니 그저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근엄한 석불이 아닌 그야말로 속세의 번뇌를 씻어주는 웃음치료사였다. 그를 찾는 모든 중생들에게 차별 없이 전하는 온화한 미소를 보아라. 다행히 비와 바람이 불어도 풍화에 유배된 천혜의 자리에 계시니 천년만년 후손들에게도 ‘백제의 미소’는 영원하리라는 믿음을 가지며 오르던 돌계단을 내려온다.
그곳에서 1km 남짓 떨어진 보원사지에 봄비와 함께 도착했다. 3만여 평의 드넓은 평원은 탁 트인 바람의 놀이터였다. 백제 때 창건되어 조선시대에 폐사지가 되었지만 융성했던 흔적이 서려 있었다. 풍토 많은 역사를 당당히 견디어 온 보물들-당간지주,오층석탑,부도탑,돌물확 등 겨우 몇 줄의 단시조 같은 보원사지이지만 여백의 감흥이 충만하게 들려온다. 정물화처럼 멈춘 발굴현장을 바라보며 그 석물보다 못한 어리석음과 부싯돌 같은 인생을 보았다.
나 자신도 또 다른 나를 끊임없이 발굴해야 하지 않겠는가? 비뚤어진 주춧돌을 고쳐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다짐하며 백제 때부터 흐르던 보원사지 도랑을 건넜다.
천년이 홀로라도 외롭지 않아라
봄비는 내려와 두 귀를 씻어주고
바람은 백제의미소 산 넘어 전하네
속죄의 길인 양 두 팔 들어 하늘보네
나의 소원은 부처님 오신 날에
천상에 깃대를 다는 염화미소 탱화다
-보원사지 당간지주-
봄비는 햇살에 양보도 없이 내린다. 마지막 기행장소 꿈속에 걷는 복사꽃 마을이 있는 서산시 지곡면 안견기념관으로 향했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인 안평대군이 꿈을 꾼 후 화가 안견에게 들려주어 사흘 만에 꽃피운 몽유도원도. 왼쪽의 낮은 산은 정면에서 바라보는 시각으로 그려 답답한 현실세계를, 오른쪽의 고원지대는 하늘 높이 새가 날면서 저 아래 먹잇감을 내려다보는 ‘조감법’으로 이상세계를 그렸다.
특히 먹구름처럼 핀 바람벽에 둘러싸인 복사꽃밭은 분명 별천지의 세계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처해진 현실과 미래의 비극적 예언이 숨겨져 있다고 하며 또한 세인들은 다가갈 수 없는 이상형의 세계라고 단념하듯이 말하기도 한다.
나는 무릉도원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씨앗이나 꽃망울로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밭에 정화된 물을 주면 싹이 트고 화들짝 꽃을 피우게 되니 이게 바로 몽유도원도가 아니겠는가?
현재 기념관에 전시된 몽유도원도는 필사본이며 진품은 일본의 텐리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해탄을 건너갔다 필사적으로 구출된 세한도와는 달리
가깝고도 머나먼 나라의 지하실에서 조국의 품으로 돌아올 꿈을 꾸고 있는 몽유도원도. 그 가련한 운명을 저 봄비가 하루 빨리 씻어주기를 기원하면서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풀었다.
동행한 봄비는 어디서 내려 나를 떠난 지 모른다. 이제 내 마음속에 고인 젖은 상념을 하나씩 훔치어 본다. 문학기행은 또 하나의 스승이었다.
훌륭한 작가가 되려면 스스로 노력을 다한 후 자신의 재능을 발굴해 주고 인도해 주는 참스승이 필요하다. 그 스승은 안견을 후원했던 안평대군처럼 우리를 깨우쳐 주시는 지도교수님일 수도 있고 길을 가다가 나를 넘어뜨린 돌부리일 수 도 있다. 그리고 오늘처럼 문학기행을 통해 만난 혼이 새겨진 유구한 예술작품을 스승이라 하겠다. 오늘밤 귀갓길에 나의 무딘 정신을 대장간의 쇠모루에 맡기고 왔다. 끊임없이 벼리고 또 벼리라고.
끝으로 또 하나의 스승이 있다. 날 울린 봄비다. 소리 없이 알찬 문학기행을 준비하여 주신 분들이 바로 봄비다. 겨우내 찌든 때를 씻어 준 그 봄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2013.4.6)
첫댓글 문학기행이란 말에도 늘 가슴이 뛰는데 기행문을 이렇게 섬세하고 아름답게 올려주시니 우수에 젖었던 그날이 파노라마처럼그려집니다. 정성스럽게 차려주신 소풍날 밥상을 꿀꺽 받아 먹으면 될런지 모르겠네요 차창밖으로 봄풍경은 은가루같은 빗님에 가려 볼수 없었지만 함께 하지 못한 문우님들이 유리창에 그려지고 있었지요 문학기행을 다녀오면 머릿속에 담아온 풍경이 희미해지는데 먼지처럼 흩어지는데 산수국님 덕분에 영원토록 기억할수 있는 보물단지를 이곳에 묻어두니 아무때라도 들러 차도마시고 추억도 꺼내볼수 있다 생각하니 저절로 미소가 번집니다. 고맙습니다. 오늘하루도 소풍날처럼 행복하세욤 ^*^..
형편상 문학기행 못 가신 분들 위해 매번 글 올려 주시는 산수국님의 내공은 정말 인정해주고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문학으로 통하다! 월천문학 앞에 월천님들이 모이면 그곳이 몽유도원이요. 백제의 미소처럼 온화한 미소가 번지고 정이 두터워 지지요. 완전 만족 ! 감사합니다.
아유! 우리 산수국님!!11 어쩌면 그렇게 자상하개 기억하시고 기록이 펄처져 나는 다시 문학 기행 갔다 방금 도착 했어요
역시 나는 인덕이 많다더니 이렇게 좋은 분들이 병품처럼 둘러 계시니 난아주 행복합니다 수양대군 안평대군도 다 까먹었다가
미제사 만나보았어요 써놓은 글만 읽어보기도 팔만 대장경 보듯 아수무라 헌디 어찌 다 펄쳐 ㅆ셨는지 거듭 박수 박수.....
하루 기행을 하고 이렇게 세세히 표현할 수 있음에 깜짝 놀라네요. 언어의 연금술사인 둣 싶습니다.언어를 그리 술술술 풀어가는 비결은 무엇인지요 그림을 감상하듯 보고 갑니다.
"기행문은 이렇게 쓰는거구나" 하고 절로 감탄사가 터집니다. 여행에서 눈으로 직접 본 것과 자신의 생각을 담담하고 쉽게 독자들의 마음이 쏙~ 빠지도록 그리셨네요. 시를 쓰면 수필도 예뻐진다더니 산수국님의 글을 두고 한 말 같아요. 또한 산수국님은 마음과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구나 하고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시간의 오솔길을 걸어가는 듯한 느낌으로 여행의 기쁨을 다시 느낍니다. 출발지에서 목적지를 돌아오며 우리가 그날의 주연배우로 한편의 드라마에 출연했습니다. 모두 즐거운 하루가 되었지요. 시를 공부하며 지치고 힘든 일들을 말끔히 떨쳐버리고 왔기를 기대합니다. 산수국님의 자상함이 돋보인 설명을 좋아합니다. 즐감합니다.
과제물때문에 정신없었는데 이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기행수필을 읽습니다. 차분히 봄비처럼촉촉하게 그려지는 글이 참좋습니다. 읽는시간동안 다시 떠나는 문학기행의 맛을 느꼈습니다. 당간지주 시도 참좋군요. 정말 날 울려주는 수필입니다. 고뇌하면서 쓰셨을 감성 물컹한 글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