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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역사와 문화의 중심, 캔디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도시에 도착했다. 알프스 소녀 캔디가 사는 것도 아닌데 도시명이 캔디라니....이름 유래가 궁금해졌다. 캔디는 스리랑카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꼭 찾는 도시로 주변에 역사문화유적지가 많고 무엇보다 부처님 치아 사리가 모셔져 있기 불치사(佛齒寺)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내게는 관광보다는 인도비자 신청이 먼저이었기 때문에 관광은 뒷전에 밀어두고 일단 서둘러 인도비자센터로 향했다.
시내에 들어서자 멋진 인공호수가 도시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게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평온해 보이는 호수와 달리 캔디 시내는 복잡하고 사람들로 엄청나게 붐볐다. 스리랑카에 온 이후 이렇게 커다란 도시는 처음이었다. 그동안 가는 곳마다 생김새가 다른 이유로 스리랑카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는데 캔디에서는 아무도 흥미로운 눈길로 쳐다보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관광센터에 들려 인도비자를 신청할 수 있다는 인디안 하이 코미션(India high commision) 위치를 알아냈다. 산에 위치하고 있는 바람에 찾아가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찾아간 센터에서 더 이상 비자발급 업무를 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작년에 캔디 외곽에 새로운 비자센터가 열리면서 이곳은 비자발급 업무를 중단했다는 것이다. 아니 일반 관공서도 아니고 그것도 관광센터에서는 작년에 새롭게 생긴 비자센터도 모르고 이곳을 가르쳐 주다니....참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고생해서 여기까지 올라 온 보람도 없이 새롭게 알려 준 새 비자센터 위치를 알아내 페달을 밞았다.
(앞으로 캔디에서 인도비자 신청하실 분들은 참고하세요.)
새롭게 문을 연 비자센터는 캔디 중심가에서 4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다행이 비자업무가 끝나기 직전에 도착해 비자신청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이것으로 인도여행을 위한 첫 번째 스텝은 마무리 되었다. 인도야 기다려라 내가 간다!
인도비자는 신청한 날부터 열흘이 지나야 나온다기에 10일 후 다시 캔디에 돌아와야만 했다. 그래서 일단 캔디관광은 나중으로 미뤄두고 카우치서핑을 통해 알게 된 럭키를 만나기 위해 캔디시내를 벗어났다. 럭키집은 캔디 도심에서 35km 정도 떨어진 마와넬라(mawannela)라는 작은 도시에 위치하고 있었다.
럭키를 만난 건 정말 럭키(lucky)했다. 럭키는 자신의 취미가 외국에서 온 여행자들을 돌봐주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정말 초대된 여행자들에게 정성을 다하는 호스트였다. 도착했을 때 럭키집에 머무는 여행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벌써 수많은 배낭여행자들이 럭키 집을 거쳐 갔다고 했다.
럭키라는 좋은 친구를 만나 그동안 스리랑카 동부를 가로지르며 더위, 오르막 그리고 갈증과의 싸움에 지친 몸을 다스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두 다리 뻗고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게 좋았다.
럭키 덕분에 이틀간 편안한 휴식을 취하며 여행기도 정리하고 몸도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비자가 나오려면 열흘 이상이 소요되기 때문에 마냥 기다리며 럭키집에 신세 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간도 아깝기에 이번엔 스리랑카 북쪽으로 짧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필요 없는 겨울옷, 전자기기 그리고 자전거용품을 럭키집에 맡겨 놓고 필요한 여행 짐만 챙겨 자전거에 세팅해 보니 한손에 번쩍 들릴 정도로 무게가 확 가벼워 져 버렸다. 이 정도면 하루에 140km 이상은 눈감고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북쪽에 모여 있는 역사유적지까지 멀지 않아 구지 서둘러 갈 필요가 없었다. 시간도 넉넉하고 짐도 가볍고 빨리 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사람 사는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작은 길을 찾아 천천히 가기로 했다.
허겁지겁 달려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인사하던 인상 좋은 아저씨....스리랑카 사람들은 이처럼 대부분 눈을 마주칠 때마다 항상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인사했다. 앞뒤로가 아니고 좌우로 말이다. 처음에는 좌우로 흔드는 모습에 뭘 저렇게 몰라 하는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진짜 뜻은 ‘알았다’라는 긍정의 의미였다. 스리랑카 여행 시작한지 3주가 가까워지자 어느새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인사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전거 여행의 별미는 역시 차갑고 깨끗한 계곡물에서 벌이는 시원한 샤워 한판이 아닐까 생각한다. 옆에서 손빨래하는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약간 미안하기는 했지만...ㅡ.ㅡ
스리랑카는 무조건 크리켓, 크리켓, 크리켓이다. 시골에서 도시까지,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스리랑카 최고 스포츠는 크리켓이다. 할 줄 아는 스포츠가 크리켓이 유일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온 나라가 크리켓에 미쳐있었다.
곁에서 한참을 있으며 크리켓 하는 모습을 지켜봤는데 도대체 경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룰이 무엇인지 아무리 봐도 알 수 없었다. 룰이 야구와 전혀 달라 보였다. 공을 멀리 쳐 보내고 양쪽 베이스를 왔다갔다 오가는 게 초등학교 점심시간 때 주로 했던 짬뽕과 비슷해 보였다.
경기 빈틈을 찾아 크리켓 배트를 한번 휘둘러봤다. 야구배트와 달리 면적이 넓었기 때문에 공을 맞추기는 쉬웠는데 문제는 배트를 휘두르는 방식이었다. 야구만 해봤기 때문에 영락없이 야구경기 할 때처럼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배트 휘두르는 모습에 주변사람들 모두 다 배를 잡고 자질러 졌다. ㅋㅋ
이날도 밤을 보내기 위해 시골에 위치한 조용한 절을 찾았다. 스리랑카를 여행하는 동안 어떤 시골구석에서도 적어도 2~3개 절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스님~
넉넉한 웃음과 친절로 맞아주신 스님은 아침식사까지 든든히 챙겨 주셨다.
스리랑카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유적지며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된 시기리야(sigiriya) 입구에 도착했다. 사자산이라는 뜻을 가진 시기리야는 이번 스리랑카 여행 중 최고 하이라이트 중의 하이라이트였다. 기대만빵으로 거대한 돌 위에 사자가 사는 유적지를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밞았다.
입구에서 10km 달리자 멀리서 시기리야 유적지의 웅장한 모습이 들어났다. 시기리야는 477년에 카사파 1세가 적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정상부에 궁전을 세우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카사파 1세가 죽은 후 불교사원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헐~~무시무시한 입장료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려 입장료가 30불...훨씬 크고 볼게 많은 앙코르왓도 3일짜리 패스가 40불이었는데 커다란 돌덩이 위에 새겨진 고대문명 흔적이 다인 이곳에서 입장료가 30불이나 하다니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순간 심한 갈등이 찾아왔다. ‘30불짜리 가치가 있을 정도로 굉장한 곳일까?’ ‘30불이면 무려 6일치 여행 자금인데 그냥 멀리서 구경한 것으로 만족하고 그냥 발걸음을 되돌릴까’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버리기에는 아쉬웠다. 그것도 2000루피화에 자랑스럽게 그려진 스리랑카 최고의 문화재인데 말이다. 결국 떨리는 손으로 거금 30불을 지불하고 입장했다.
30불이나 줬는데 하나하나 찬찬히 둘러보기로 했다. 과거 스리랑카인들이 커다란 돌덩이에 어떤 역사의 흔적을 그려 놓았을까 말이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돌계단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바위산 주변으로 불교유적지와 과거 생활모습을 표현한 프레스코화가 500점이 넘게 그려져 있다고 들었기에 눈 동그랗게 뜨고 흔적을 찾아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돌덩이 뿐이었다.
시기리야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바위산 절벽에 그려진 22점의 프레스코화로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는 낭떠러지 절벽을 따라 설치된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만 했다.
동굴 안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는 1,500년이 지났다고 하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완벽히 보존되어 있었다. 벽화 속 연인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림은 생생하고 아름다웠다. 깊숙한 동굴에 있어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었고 절벽이 도굴로 인한 훼손을 막아 1,500년이 된 생생한 벽화를 이렇게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시기리야 정상에 오르려면 사자의 벌어진 입처럼 생긴 입구와 목구멍처럼 생긴 좁은 통로를 거쳐야만 했다. 시기리야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정상으로 연결되는 통로 모양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사자산 꼭대기에 오르자 왕국이 존재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불가사이했다. 절벽 꼭대기에 이런 평지가 있고 거기다 이곳에 왕궁을 지을 생각을 했었다니 말이다. 그 당시 왕이 어지간히 외부인과 적들의 침입이 걱정스러웠나보다.
사자산 꼭대기에 올랐으니 흔적을 안 남길 수는 없지...멋지게 셀프카메라도 박아줬다. 사실 멋진 유적지이기는 했지만 30불을 주고 구경하기에는 규모나 역사적 가치는 그렇게 대단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시기리야를 내려오는 동안 자꾸 입장료가 생각났고 배가 아팠지만 돌산 위에서 구경했던 멋진 풍경과 프레스코화 안에서 생생히 춤추고 있던 여인들만 생각하며 잊기로 했다.
시기리야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아무도 찾지 않는 조용한 숲속을 찾아 밤을 보냈다. 역시 야영의 참맛은 이런 깊은 숲속에서 해야지 느낄 수 있다.
전날 시기리야에 이어 고대도시 탐험의 두 번째 목적지는 덤불라(dubbula)에 위치한 석굴사원이었다. 덤불라 석굴사원은 동굴에 남겨진 부처님상과 벽화가 유명한 곳이다. 석굴사원 입구에는 높이가 30m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부처님상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계셨다.
15분 정도 산 위로 올라가자 석굴사원의 웅장한 모습이 두 눈에 들어왔다.
5개 구역으로 나눠진 덤불라 석굴사원에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불상이 동굴 안에 조성되어 있었다. 천장 암벽 위에는 촘촘히 부처님과 불교교리를 가르치는 그림이 촘촘히 그려져 있었다.
BC103년에 왕위에 오른 발라감바(valagamba)왕이 타밀족의 침입을 받았을 때 14년간 스님들의 보호를 받으며 이곳에 은밀히 숨어있다가 마침내 BC 77년 타밀족을 전부 내쫓고 수도를 탈환해 왕위에 복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왕위에 다시 오른 후 자신의 망명생활을 도와준 부처님과 승려들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이 석굴사원에 불상을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그 뒤에 추가로 불상과 벽화가 조성되어 19세기에 이르러 지금과 같이 웅장한 석굴사원로 변모한 것이라고 한다. 동굴 안에 그려진 벽화 하나하나에 정성이 듬뿍 담겨 있어 보였다. 어둑한 석굴사원에 앉아 불공을 드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니 이들이 이런 깊숙한 곳까지 찾아 거대한 석굴사원을 만든 이유가 수긍이 갔다. 석굴사원을 돌아보며 불심으로 가득한 스리랑카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정말 편안한 모습으로 목욕하는 코끼리와 정말 힘들게 목욕시켜주는 조련사가 대비되며 한참을 웃었다.
얼굴 마주치면 언제나 웃으며 반갑게 인사해 주는 스리랑카 사람들...이들이 있기에 스리랑카 여행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지평선 너머로 해가 지고 이날도 잠자리를 찾기 위해 주변 탐색이 시작됐다. 그런데 이날 저녁 커다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원래 밤을 보내기 위해 주로 절을 찾기 마련이었는데 이날따라 마을 논 한가운데 있는 정자에 꽂히고 말았다. 주변 풍경도 좋고 민가와 떨어져 있었기에 밤을 보내기에 문제없어 보였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어둠을 틈타 텐트를 치고 밤 9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밤 10시가 넘어 갑자기 텐트를 향해 돌이 날아왔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박쥐나 새가 그런 줄 알고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몇 분 뒤 다시 돌이 날아왔다. 화가나 후레쉬를 들고 누가 돌을 던지는지 주변을 비춰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곧이어 등 뒤에서 또 돌이 날아왔다. 소리를 질렀지만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은 논과 무성한 잡초뿐이었다.
결국 자리를 피해 가까운 절이나 경찰소로 자리를 옮기기로 결정하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짐을 다 챙기고 갈 채비를 마쳤을 때, 또 등 뒤에서 돌이 날아와 팔을 맞췄다. 너무 화가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돌이 날아 온 곳으로 뛰어갈 찰라...우당탕!! 갑자기 자전거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자전거가 있는 곳을 돌아봤더니 누군가 자전거 옆에 있는 게 아닌가...결국 범인은 한명이 아니었다. 한명이 돌로 내 주위를 흩트려 놓는 동안 다른 한명이 내 짐을 훔쳐가려던 계획이었던 것이다.
자전거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고 자전거 옆에 있던 도둑놈도 도망치기 시작했다. 한밤의 추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깜깜한 밤에 도둑놈이 두 명, 아니 세 명일 수도 있기에 한 놈 쫓는 동안 다른 것까지 도난당할 수 있었다. 결국 서둘러 다시 자전거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자전거는 땅 바닥에 쳐 박혀 있었다. 정말 하늘이 노래졌다. 떨리는 마음으로 사진기, 아이팟, 여권, 각종 귀중품이 들어있는 핸들백을 확인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사진기, 귀중품 모두 안전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가까운 마을을 찾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지나가는 사람이 보이기에 도움을 요청했고 다행히도 그 분이 마을에서 영어 할 줄 아는 분을 데리고 오셨다. 있었던 일을 소상히 말씀 드리자 가까운 힌두교사원에서 잘 수 있도록 잠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그리고 헐크처럼 생긴 스리랑카 군인을 데리고 오시더니 이 분이 마을을 지켜주고 계시니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까지 시켜주셨다.
텐트를 치고 다시 잠에 들려고 했지만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여행 시작하고 처음으로 당한 강도행위였다. 도난당할 뻔했던 아슬아슬했던 순간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스리랑카에 온 이후 좋은 추억만 있었기에 전혀 이런 도둑놈들을 만날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 일이 벌어진 후 좋았던 추억들이 나쁜 경험 하나로 모두 덮여버리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캠핑을 하는 동안 정말 조심하고 가능하면 마을사람을 통해 텐트 칠 장소를 찾아봐야 되겠다. 첫 번째 강도와 만난 밤은 이렇게 저물어 갔다.
주변이 시끄러워 일어나 보니 오전 5시 반이었다, 해가 뜨기 전부터 마을사람은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제 밤 강도와의 만남으로 깜짝 놀란 몸이 더 자고 싶다고 아우성 쳤지만 새벽부터 따뜻한 차를 대접해 주며 깨워주는 마을사람들 덕분에 아침형 인간으로 탈바꿈했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대부분 따뜻한 차만큼 따뜻한 마음을 가진 민족이기 때문에 어제 저녁 일은 말끔히 잊기를....아니 잊으려고 노력했다.
마을을 떠나기 전 어제 밤 강도를 만난 현장을 방문했다. 너무나 조용한 시골마을이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 전혀 상상도 못했는데 막상 당하니 언제 어디서고 조심해야 되겠다는 경각심을 일깨워줬다.
여행이 1년을 넘어가면서 별별일 이 다 벌어지고 있다. 교통사고에 강도까지 말이다. 다행이 사건, 사고가 경미해서 다행이지 크게 벌어졌다면.....아니 그런 경우를 상상하기도 싫다. 앞으로도 조심 또 조심해야 되겠다. 멋지게 건강한 모습으로 그리운 고국으로 귀환하기까지 말이다.
6일 간의 스리랑카 북부 여행을 마치고 인도비자 발급 일에 맞춰 캔디로 향했다. 인도비자 신청일로부터 발급일까지 10일이 소요되기 때문에 정말 목 빠지게 기다렸었다. 이날 오전까지 캔디에 도착하지 못하면 다음주 월요일까지 3일을 더 기다려야하기 때문에 주변 풍광구경은 뒤로 밀어둔 체 서둘러 캔디를 향해 페달을 밞았다.
드디어 캔디입구에 도착!
열흘 만에 다시 도착한 캔디는 역시나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겨우겨우 비자발급시간인 오전에 맞춰 가까스로 비자센터에 골인했다. 그런데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었다. 열흘 전 신청한 인도비자가 아직까지 안 나왔다는 것이다. 이럴 수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유를 물어보니 자신들은 비자신청과 처리만 담당하지 승인은 인도대사관 몫이기 때문에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는 대답만 반복했다. 다음 주 목요일이면 스리랑카 비자기간도 끝나고 인도 뭄바이행 비행기 예약까지 맞췄는데...정말 눈앞이 깜깜해 졌다.
어떻게 해서든지 다음 주 화요일까지는 비자를 받아야만 했기에 직원들을 붙잡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기 작전에 돌입했다. 데스크 앞에 서서 목요일에 스리랑카를 떠나야하며 화요일까지는 어떻게든 받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비자센터 직원들에게 계속 도움을 요청했다.
비자센터 문을 닫을 시간까지 물고 늘어진 끝에 화요일에 비행기 티켓을 가지고 다시 비자센터에 방문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 때 인도대사관에 내 처지를 소상히 설명하겠다며 말했다. 다시 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일단은 직원을 말을 믿을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비자센터 문을 나오며 머릿속에서 수많은 경우의 수가 그려졌다. 당장 캔디를 뜰 수 없으니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 구경은 물 건너갔고 만약 수요일까지 비자가 안 나오면 비행기 티켓 날짜변경부터 스리랑카 비자연장까지 할 일이 산더미같이 생기는데...정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비자문제는 뒤로 밀어두고 10일 전 첫 방문 때 그냥 지나쳤던 캔디를 본격적으로 탐험해 보기로 했다.
비자문제 때문에 캔디관광명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부처니 치아사리가 모서지 있는 불치사에 방문하려고 했지만 마음도 신난하고 부처님 사리도 직접 눈으로 볼 수 없다는 말에 멀리서만 구경하고 그냥 건너 띄기로 했다.
그런데 비자일로 인해 정신적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전날 강도와도 만나고 비자일도 그렇고 정말 우울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스리랑카에 도착하자마자 비자신청 먼저 하는 것인데...후회감이 밀려왔다. 인도에 첫 번째 방문이고 특별한 범죄경력도 없는데 곰곰이 생각해 봐도 비자를 주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머리를 빡빡 밀고 찍은 증명사진 때문에 내가 범죄자처럼 보여서 그런 것일까? 별에 별 상상이 다 들었다.
대신에 짧게나마 캔디 국립박물관을 구경하기로 했다.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음도 싱숭생숭해 입장료를 5,000원이나 받으면서 열악한 박물관 전시시설과 형편없는 영어설명에 투덜거리기만 했다. 박물관을 이처럼 대충 둘러보기는 처음이었다. 모든 게 인도비자 때문이었다. 인도비자여...정말 너 왜 이러니...ㅜ.ㅜ 하지만 인도비자 걱정만 해봤자 시간낭비고 비행기티켓 들고 화요일에 다시 가보는 방법밖에 없었으니 그 때까지 최대한 잊어버리기로 마음먹고 박물관 구경에 전념했다.
박물관 구경을 마친 후 럭키집으로 향했다. 캄캄한 밤에 도착해 보니 럭키집에는 코치서핑을 통해 찾아 온 여행자가 두명 더 머물고 있었다. 이들과 강도를 만난 일부터 비자일까지 썰을 풀다보니 어느새 깊은 밤이 찾아왔다.
3일 간 럭키네 아이들(맨 왼쪽은 옆집 아이)과 함께 놀고 푹 쉬며 몸에 쌓인 피로와 속상한 일로 인해 마음에 덮인 때를 말끔히 씻어냈다. 마음이 힘들 때 의지하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고마울 수 있는지 럭키와의 만남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또한 함께 나누려하기 보다는 속 좁게 생각하고 내 것만 챙기려고 했던 삶의 태도를 반성하는 계기도 되었다. 앞으로 내 주위 사람들 챙기고 아껴야 되겠다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되겠다.
3일 간의 짧다면 짧았던 휴식시간이 후딱 지나가고 인도비자를 받기 위해 다시 비자센터로 향했다. 이날 하루 종일 기다린 끝에 얻은 성과는 다음날 그러니까 수요일에 인터뷰를 하고 통과하면 비자를 받을 수 있다는 확답을 들은 것이었다. 당장 목요일에 떠나야 되지만 어쨌든 비자를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만 확인한 것만으로도 정말 다행이었다.
다음날 캔디 도심에 위치한 인도대사관(캔디에 도착한 첫날 잘못 찾아간 곳)에서 인터뷰를 받았다. 인터뷰 내용은 고작 “왜 한국에서 인도비자신청 안하고 이곳에서 하나” “중국비자는 왜 가지고 있냐. 한국에서 직업은 뭐냐“ 고작 이게 다였다. 대답은 모두 자전거여행으로 통일됐다. 3분도 안 돼 인터뷰 통과....이것이 2주 동안 비자 안 내주며 걱정하게 만들었던 것들이었다니 정말 황당했다. 어쨌거나 인도에 가야되니 인도 법을 따라야지. 비자를 받았기에 천만다행이었다.
밤 10시 비행기 시간에 맞춰 적어도 오후 6시까지는 콜롬보 공항에 도착해야만 했기에 다음날 새벽닭이 울리자마자 짐을 챙겨 갈 채비를 마쳤다. 럭키집이 있는 캔디에서 공항까지는 110km, 서둘러 출발해야만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여행 시작하고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럭키 집에서 머물었던 나날은 정말 고맙게 소중했기에 절대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간직될 거 같았다. 럭키와 기념사진을 마지막으로 힘차게 스리랑카 마지막 라이닝을 시작했다.
정말 정신없이 페달을 밞았더니 110km는 어느새 60km까지 줄어들어 있었다. 그래도 중간에 커다란 산이 있을지 모르기에 최대속력을 유지하며 계속 달려야만 했다.
서둘러 가야만 됐지만 중간 중간 볼거리를 놓칠 수 없는 법! 길 한가운데 갑자기 출몰한 코끼리가 바쁜 발길을 잡아 세웠다. 관광지에서 보는 조그마한 코끼리가 아닌 정말 제대로 훈련 받은 거대한 코끼리였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사진만 찍고 갈 수 밖에 없었지만 만약 시간만 충분했다면 시간을 두고 코끼리 발걸음을 천천히 뒤 쫓아 갔을 텐데....사진만 찍고 코끼리와 작별인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스리랑카에서 하는 마지막 식사는 코투로 해결했다. 코투는 다양한 야채와 소고기, 그리고 로띠를 잘게 썰어 불판에 함께 볶아 만든 스리랑카 음식으로 양도 많고 맛도 있어 값도 싸고 여행하는 동안 미감과 배를 동시에 충족시켜 주었던 고마운 음식이었다. 이런 코투와 작별인사를 하려니 아쉬웠다. 인도에서도 맛볼 수 있기를 바라며 코투야 안녕!
정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발에 부리나케 달렸더니 오후5시 쯤 예상했던 시간에 딱 맞춰 공항에 도착했다. 한 달 전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깜깜한 밤이어서 주변에 뭐가 있는지 공항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낮에 다시 방문한 공항은 색다롭게 느껴졌다.
스리랑카 수도인 콜롬보를 못보고 떠나야 된다는 게 아쉬웠지만 인도비자를 받아 스리랑카를 떠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스리랑카....생각하면 정말 아름답고 깨끗한 나라로 기억될 거 같다. 면적은 우리나라보다 작지만 가지고 있는 문화와 자연환경의 다양성은 공작새 날개처럼 화려했던 스리랑카, 자전거 여행의 즐거움을 정말로 흠뻑 느낄 수 있었던 지난 한달 이었다. 물론 강도와의 만남만 빼면 말이다.
인도에서는 어떤 예상치 않는 만남, 어떤 색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를 한껏 가지고 뭄바이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진입했다.
블로그- http://eletto02.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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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진도 멋지시고 글도 맛깔스럽게 쓰시는군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시고 여행을 하시는듯 합니다
그 아름다운 마음이 이 글과 행함에 흠뻑 묻어나 앞으로 더 좋은 여행 하시기를........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나면서 정말 힘들지 않게 여행하고 있는거 같습니다.
물론 가끔식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만나지만요...하지만 바퀴는 멈출 수 없죠.
앞으로도 쭉 즐감해주세요.^^
님의 여행기 잘 보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항상 즐감하고 있습니다.
시기리야유적은 참 보기 어려웠는데, 덕분에 무료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ㅋㅋ....엘레또님께서는 30불을 주셨지만 저는 무료로ㅎㅎ~~~감사합니다~~
항상 장도에 건강과 기쁨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헐 어떻게 무료로 들어가셨죠?
아무튼 스리랑카 입장료는 정말 짜증나더구요.
기본이 10불이고 거기다 시기리야는 30불까지 하다니, 거기다 현지인들은 거의 무료로 입장 가능하니 더더욱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더구요.
응원 감사드리고 항상 건강하고 안전한 여행이 될 수 있도록 부탁드릴게요.
드디어 인도까지 가셨군요.
대단하십니다.
항상 조심하시고요 또 건강 잘 챙겨서 화이팅 하시길 바랍니다.
잘 보고 있습니다~
어찌어찌 달리다 보니 벌써 인도까지 왔네요.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느낀 것은 정말 세계는 넓고 다닐 곳은 많다는 것입니다.
언제 여행이 끝날지 모르지만 시간과 돈, 그리고 체력이 되는 한 세계 끝까지 가보려고 합니다.
앞으로도 쭉 지켜봐주세요.
한동안 소식이 없어 궁금했습니다. 안전여행 하시기를
즐감하고 갑니다........................
잘보았습니다. 저도 스리랑카는 꼭 갈려고 합니다. 건강히 여행하시고 인도편기대합니다.
자전거 도 비행기에 실어주나요?
넵, 대부분 실어주지만 저가항공사 같은 경우는 수하물 무게에 따라 추가요금을 매기죠.
제가 이용한 스리랑카 항공은 다행히 추가요금 없이 자전거 실어줬습니다.
꼭 스리랑카 가 보세요. 정말 깨끗하고 친절한 나라라고 느꼈습니다.
스리랑카도 무척 아름답네요..덕분에 낯선풍경 정겹게 잘 보았어요
덕분에 스리랑카 구경 잘하고 갑니다 ~~인도 여행기 기대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