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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17일 온라인- 제 11회 김유정학술대회가 있었다. 강버들은 여기에서 '김유정과 나' 라는 제목의 특별강연을 하였다.
김유정과 나
( 一) 들어가며
가을의 허리가 휘어졌다. 식물의 초록은 여물어 황록이나 적황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덮쳐오는 가을의 물결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산골의 가을은 왜 이리 고적할까! 앞뒤 울타리에서 부수수하고 떨잎은 진다. 바로 그것이 귀밑에서 들리는 듯 나즉나즉 속삭인다. 더울 몹쓸 건 물소리 골을 휘돌아 맑은 샘은 흘러내리고 야릇하게 음률을 읊는다.
퐁! 퐁! 쪼록 퐁!
바깥에서 신발소리가 자작자작 들린다. 귀가 번쩍 띄어 그는 방문을 가볍게 열어 제친다.
가을은 아지 못하는 사이에 사람을 고독하게 한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외진 곳, 혼자임을 의식할 때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가슴을 휘젓고 지나간다. 혼자 있을 때에 귀는 예민하게 반응한다. 가을에 듣는 계곡의 물소리는 사람 가슴을 쥐어뜯는 한 줄기 음률이고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는 이 모든 고독과 서러움을 한 방에 날려보내는 구원 투수가 된다.
<산골나그네>를 읽다보면 가을의 속성은 우리들 속에 잠재해있던 외로움과 기다림의 감동을 일깨워 준다. 어디 그뿐인가. 또다른 속성으로 가을은 화사함과 흐뭇함도 지니고 있다.
“퍽도 쓸쓸하지유? ” 하며 손으로 울 밖을 가리킨다. 첫밤 같은 석양판이다. 색동저고리를 떨쳐입고 산들은 거방진 방아소리를 은은히 전한다. 찔그러쿵! 찌러쿵 !
입으로는 가을이 쓸쓸하다고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가을은 ‘첫밤 같은 석양판’이다. 지는 해가 더욱 아름답다는 석양녘은 울긋불긋한 산야가 마치 색동옷 입고 맞았던 첫날밤의 기억을 환기시킨다. 또다른 가을의 풍경을 묘사한 <가을>에서는 해가 막 떨어지는 저물녘의 산골은 ‘영롱한 저녁노을’로 덮여 태양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덩어리’가 되고 ‘노기 가득찬 위엄’마저 보여준다. 가을은 쓸쓸하고 그립고 그래서 기다려지고, 첫밤을 맞는 이처럼 행복과 두려움에 가슴설레이게 한다. 그런가하면 가을날의 석양은 불같이 뜨겁고 위엄 가득한 계절로 그려진다. 가을에 대한 묘사가 이렇게 간결하면서도 다양하고 호화로운 이미지들로 전개되는 문장을 어디에서 또 찾아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유정의 문학을 처음 접해본 것은 아마 고등학교 고급반 시절이었다. 사실상 김유정의 작품이 처음 고등학교 국어교재에 수록되기는 <동백꽃>이 1989년에 , <봄·봄>이 1995년 순이었다. 그러니 책이 귀하던 시절, 1960년대 중반에 고교생이었던 우리는 교과서 외의 명작이라는 명목으로 국어선생님께서 특별히 수업시간에 소개해주신 김유정의 작품 한두 편을 만났을 뿐이었다.
김유정이라는 작가에 처음 눈길을 두게 된 것은 대학시절 삼악산 등반을 하고 걸어서 시내로 들어오던 길이었다. 그때 의암땜 옆에 세운 ‘김유정문인비’ 받침대 위에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도대체 김유정이라는 작가는 어떤 작품을 어떻게 썼기에 저렇게 경춘선 국도변에 그의 문학비를 세워주었을까 궁금했다. 그때는 김유정과 내가 삼십 년 이상 고락을 함께 하게 될 줄은 예상도 하지 못하였다. 대학을 졸업후 고등학교 교사로 4년 반을 보내고, 신촌에 있는 한 대학교의 대학원에 진학했다.
( 二 ) 새로운 학문의 세계에 눈 뜨다
문학연구에 있어서, 한국에서는 50년대에 미국으로부터 신비평 연구방법이 도입되었다. 그것들이 오랫동안 문학연구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70년대로 들어서면서 구라파 쪽으로부터 이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문학연구방법론이 도입되었다. 내가 선택한 수강과목을 가르치시는 분은 해외에서 막 일어나기 시작한 새로운 방법론을 강의시간에 소개해주셨다. 러시아 형식주의, 신화비평, 현상학적 비평, 구조주의 등이 그것이었다.
그 무렵 우리 학계에 처음 도입된 구조주의 방법이 조심스럽게 소개되고 있었다. 문학연구 방법론 시간에 롤랑 바르뜨가 그가 창안한 방법에 따라 발자크의 소설 S/Z를 분석, 지금까지 우리가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텍스트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 앞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교수님께서는 S/Z의 분석방법을 한국의 30년대 작품에 적용해 보이셨다. 나도 그렇게 작품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신촌에 있는 3개 대학에서는 대학원생들에게 연합강의를 허용했다. 인근 대학의 또 다른 진보적 연구방법을 가진 교수께서는 <보바리 부인>에 나타난 카메라 아이(Camer eye) 적인 서술방법에 대한 강의를 하셨다. 그도 또한 매력적인 방법이었다.
석사학위 논문의 주제를 제출해야 하는 때가 오고 있었다. 새로운 방법론에 의한 논문을 쓰되 누구를 쓸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이어령교수께서 박태원의 <천변풍경>을 추천해주시었다. 그러나 이 텍스트는 금서로 분류되어 있었다. 이교수님께서 ‘문학사상사’ 자료조사실장과 동행, 중앙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특수자료실에서 원본 <천변풍경>을 복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었다.
날마다 롤랑 바르뜨의 S/Z와 그의 또다른 논문들, 프로프, 토도로프의 논문들, 그리고 카메라 아이 관련 논문들 모두 영역판을 가지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이들 새로운 이론을 담고 있는 문헌들에 대한 한국어 번역본은 거의 없었다. ( 국내에서 S/Z는 2006년에 번역본 출간됨)
( 三 ) 10. 26 사태, 김유정과 만나다
시월 하순의 어느 날이었다. 날씨는 청명했다. 습관적으로 이른 새벽에 기상, 서둘러야 했다. 학교 가는 길에 영어학원에서 강의를 듣고 학교로 들어가 강의를 듣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이 나의 정해진 일과였다. 조간신문으로 하루를 시작하시는 어머니께서 집 안팎을 오가시며 아직 신문이 오지 않았다고, 신문사 지국에 연락을 해야 하나 어쩌나 하시며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고 계셨다. 그때, 이문동 전철역 부근에 살고 있었다. 이문역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되는 거리였다. 전철역 부근 집집마다 조기가 걸려 있었다. 이문역 전철 플랫홈에는 배차 시간이 길어지면서 사람들이 겹겹이 늘어서서 전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댔다. 그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사람들마다 목청을 높였다. 왜냐고 옆 사람에게 물었다.
“지난 밤,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로 쳐들어가 대통령을 살해 했대요!”
그제서야 아침부터 쌓여왔던 의문의 퍼즐이 맞추어지기 시작했다. 조간신문이 배달되지 않았던 것, 이문역 부근 골목집마다 걸려 있던 조기들, 갑자기 배차시간 간격이 뜸해진 전철, 굽이굽이 줄을 지어 차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웅성댐, 눈물을 닦아내는 사람들. 모두들 김신조 때처럼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잡히고 사태는 일단 진정되었다고도 했다. 집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고, 영어학원에서도 강의를 할 것 같지 않았다. 일단 학교까지 가기로 했다. 종각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고 신촌까지 갔다. 그러나 학교 앞, 한 떼의 무장군인들이 살벌한 표정으로 교문 앞을 막고는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학교 교문 앞에 서서 한동안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상황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고. 74년 광복절에 일어난 육여사 피살사건. 그들 부부의 죽음도 안타까웠지만 실은 우리들 국민의 앞날이 더 안타까웠다. 그리고 나의 일도 문제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일단 중앙청 앞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리고 적선동에 있는 문학사상사로 찾아갔다. 전화연락도 없이 문학사상사 주간실로 들어갔다. 이어령교수께서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셨다. 그리고 곧 눈치를 채시고 말씀하셨다.
“ 박태원 관련 자료 다 없애 버려! ”
“ …… ”
“ 김유정으로 바꾸어라 ”
1979년 10월 27일의 일이었다. 세상이 바뀌었다. 대통령 시해자를 잡기는 했다지만 꼭 짚어 말할 수 없는 국가적인 시련의 날이 시작되고 있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내가 춘천 출신임을 알고 계신 이교수님께서 그 대안으로 제시해 주신 것이 ‘김유정’ 이었다.
김유정문학과의 만남은 그렇게 한국의 역사적 사건인 10.26 사태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김유정의 작품을, 원본에 가까운 텍스트를 구해야 했다. 그리고 김유정의 작품을 정독해 나가기 시작했다. 읽고 즐기기에 좋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배워온 소설이론에 따라 분석하고 재단해서 새로운 해석과 평가를 끌어내기에는, 이론과 실제가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황당하기만 했다. 게다가 1970년대 초에 처음 들어온 구조주의, 그 가운데서도 당시에 첨단의 이론으로 분류되었던 후기 구조주의자이며 해체주의자이었던 롤랑 바르뜨의 이론과는 궁합이 맞지 않았다.
기본적으로는 롤랑 바르뜨의 이론을 바탕에 깔면서, 이것이 김유정 작품에 맞도록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와 이해가 필요했고, 그렇게 되기까지는 충분히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실제로 많이 울었다. 어느 날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밤 9시가 조금 늦어서 일어섰다. 신촌에서 종로까지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차가 오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버스 정류장에서 발을 구르며 차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어렵게 종로행 버스가 와서 올라탔고, 버스는 굴레방다리쪽으로 나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돌리더니 서강대 쪽으로 갔고, 그쪽에서 또 어떻게 길을 돌고 돌아 두어 시간 뒤에야 종로까지 갔다. 갑자기 버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시위 진압용의 최루탄이 날아 들어왔다. 눈물 콧물 흘리면서 버스에서 탈출했다. 교통이 마비된 서울의 늦은 밤거리를 울면서 이문동 집까지 밤을 새워 걸어야 했다. 12. 12 사태가 일어난 그날의 일이었다.
세상은 미쳐가고 있었다. 광주에서는 5.18 민주화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언로가 막힌 서울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돌았다. 동료 대학원생들과 함께 모여 옥중 김재규의 육성이 녹음된 테이프를 들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이남덕 교수님댁에도 찾아가고, 덕수궁 옆에 있는 성공회 성당에서 주교님을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래도 논문은 써야 했다.
논문 심사를 받을 때에도 전통적 문학연구방법에 익숙하시던 심사위원들께서는 그분들이 생각하는 문제점들을 지적 하셨다. 그때마다 미리 작성해 놓았던 예상문제 목록을 보면서 곧바로, 가지고 간 참고문헌들에서 해당 페이지를 열어 보이면서 그에 대한 대답과 해명을 했다. 그렇게 해서 「김유정 소설의 구조분석」이라는 제목의 논문심사가 끝났다. 복도로 따라 나오신 이어령 교수께서 부르셨다. 그리고 “석사 졸업 후에도 내 강의 계속 들어와 .” 하셨다.
1980년 후기 졸업을 했다. 졸업 후에도 이교수님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다음 해 봄에 박사과정에 진학했고 같은 해 가을, 강원대학교 교수공채에서, 전임강사로 채용되었다.
( 四 ) 학위논문을 쓰다.
80년대 전반부에는 강의준비와 박사과정 공부로 서울 춘천을 오르내리며 많이 바빴다. 박사논문 주제를 정해야 했다. 이쪽저쪽 다 접근해 보았지만, 결국은 김유정쪽으로 정해졌다. 석사학위 논문을 쓸 때 30편 남짓한 소설가운데 7편만을 선정해서 정밀 분석을 해야 했기로, 그때 작품 전체를 다루지 못했던 아쉬움이 컸던 것이다.
작품분석은 구조주의 방법을 원용하되 이번에는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에 의지 하기로 했다. 박사논문에 필요한 참고문헌들 대부분은,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것들이었다. 롤랑 바르뜨나나 토도로프 모두 불어 판본이었다.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 은 소수의 불문학자들에게나 알려져 있었을 뿐이었다. 불어를 해독하지 못하는 나에게 아무리 좋은 참고문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그림의 떡이었다.
마침 미국유학을 마치고 서강대 영문과에 부임하신 이태동교수께서 영역본 『공간의 시학』을 소장하고 계시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어령교수께서 이태동 교수께 직접 전화를 걸어주셨다. 당시 국내에서 그 책을 갖고 있는 이는 2~3명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태동교수의 호의로 영역본 책을 복사해왔다(이 책은 2003년에 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논문에 꼭 필요한 참고문헌들은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들이 태반이었다. 고맙게도 강원대 도서관에 제자가 사서로 있어서 그가 해외대학 도서관에 협조공문을 보내서 영문본 자료들을 구해주었다.
80년대 전반은 계엄령과 휴교로 이어진 날들이었다. 학교 부근 인도 블럭은 시위대에 의해 모조리 뜯겨져 나가고, 최루가스가 캠퍼스와 학교 인근 골목과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연구실에서 강의 준비나 논문준비를 하다보면 전화벨이 울리고, ‘선생의 지도학생 o o o가 시위대에 있으니 나와서 데리고 가라’고 연락이 온다. 나가보면 교문 부근에 천여 명 학생들이 앉아서 농성 중이고, 그곳을 뚫고 들어가 지도학생을 찾아 데리고 나오다보면 최루가스에 연신 눈물 콧물을 흘려야 했다. 그래도 학생들이 착해서 지도교수를 따라 연구실까지 와서 엉덩이 붙이고 잠깐 앉았다가 화장실 가야한다고 머리를 긁는다. “다치지 말고 ~ 잘 도망쳐~” 하면 신이 나서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한번은 학생처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도 학생 o o o 가 시위대 주동학생인데 집이 도계이니 가서 부모를 만나고 오라’는 출장명령이었다. 어쩔 수 없이 춘천에서 원주까지는 버스로, 원주에서 도계까지는 기차로 이동했다. 탄광에서 일을 하다가 연락을 받고 달려나온 학생의 부모와 나는 그저 마주 손잡고 함께 울기만 했다.
석사논문이 서구이론과 한국작품 사이의 적용문제로 괴롭혔다면, 박사논문은 교수로서의 복무시간과 연구자에게 필요한 시간, 그 둘 사이의 불협화음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그 와중에도 학위 논문 「김유정의 소설공간」이 나왔다.
“유 박사! 축하합니다.”
마지막 논문 심사가 끝나자 심사위원장 연세대학의 신동욱 교수께서 악수를 청하셨다. 처음 들어보는 박사 칭호였다. 1985년 후기졸업식에서 학위를 받았다.
( 五) 김유정문학촌에서 많은 추억들을 만들다.
강원대 부임 이후, 해마다 삼월, 김유정 추모일이 되면, 소설전공 학생들과 의암땜 옆에 있는 김유정추모비, 그 앞에서 거행되는 추모식에 참석했다(2003년 이후 추모제는 실레마을 김유정문학촌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해마다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하루 날을 받아 현대문학전공 학생들과 함께 학교에서 20릿길, 김유정의 생가터가 있는 실레마을로 답사를 나갔다. 마을을 돌아보고, 미리 연락해 두었던, 김유정의 금병의숙 시절의 제자분을 모셔서 그분에게 김유정선생에 대한 회고담을 듣고는 했다. 실레마을 탐방행사는 퇴직하기 직전까지 연례행사로 진행되었다. 추모제 참석도 마찬가지였다.
2002년 8월 6일, 김유정 생가터에 김유정의 생가를 복원, 그 옆에 김유정기념관도 세우고 ‘김유정문학촌’이 개관되었다. 초대 문학촌장으로 전상국 교수가 부임하셨다. 그날 나는 김유정 생가 대청마루에 앉아서 찾아온 탐방객들을 상대로 <총각과 맹꽁이>를 만담식으로 풀어나가며 소개했다. 이 작품의 퇴고일이 1933년 8월 6일이었다. 이후 김유정문학촌에서는 다양한 문화행사가 진행되었다. 한림대학의 전신재 교수, 그리고 전상국 교수와 나, 세 사람이 자주 모여 행사 내용과 진행에 대해 의논했다. 사람들은 이들 세 사람을 가리켜 김유정의 삼남매라고 불렀다.
문학촌에서는 김유정과 김유정문학을 알리기 위한 행사가 중점적으로 이루어졌다. 학생과 일반을 위한 백일장이 열리는가 하면 여름에는 문학캠프를 열었다. 문학축제 의 많은 프로그램 가운데에서 ‘김유정소설 입체낭독’과 ‘ 점순이를 찾습니다’는 장수 프로였다. 문학촌에서 행사가 있을 때면, 현대문학 전공의 강원대 학생들이 많이 참석했다. 백일장과 입체낭독, 점순이 찾기에서 강원대 학생 수상자가 많이 나왔다.
많은 프로그램들이 세월에 따라 가감되었지만 가장 오래 기억되는 것은 ‘김유정문학기행 열차’였다. 경춘선 열차를 타고 청량리에서 김유정역까지 오는 동안, 김유정과 그의 문학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새벽에 첫차를 타고 청량리로 가서 그곳에서 문학기행열차 참석자를 차에 탑승시키고 2시간 남짓, 열차 안에서 문학강연을 했다. 2003년부터 시작된 문학기행열차는 2010년 경춘선 전철이 개통되면서 중단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기행열차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좋은 추억이 내게 남아있다.
문학촌에 자주 드나들면서 들었던 진기한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춘천에서 20리 거리, 자동차로 15분 정도 걸리는 작은 마을, 도시 외곽지대의 농촌 사람은 순박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 나름대로 생활력이 강하고 그러다 보면 발언권도 센 사람들이 산다. 실레마을도 그렇다. 김유정이 이곳에서 활동했던 1930년대로부터 70년 여년 세월이 지나고 어느 날 갑자기 ‘김유정문학촌’이 생기고 수많은 방문객들이 실레마을을 찾기 시작했다. 경춘선이 지나던 조용하던 마을이 언제부터인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김유정문학촌에 대해 좋은 시선만을 보내게 되지는 않았을 터. 여기에 믿거나 말거나의 이야기가 있다.
1. 실레마을과 문학촌 터의 풍수지리: 문필봉/ 실레마을이름
2. 마을의 흉사와 영혼결혼
3. 진오귀 새남굿 :무형문화재104호 이상순 만신
김유정탄생 100주년(2008년) 기념행사가 한 해 내내 치루어졌다. 100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장이 이어령교수셨다. 대대적인 학술행사와 문화행사가 함께 진행되었다. 훗날 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 된 중국의 모엔도 실레마을을 이야기마을로 선포하는 데에 참석했다.
그 이전부터 전상국 문학촌장께서는 내게 김유정 학술단체를 구성해 보라고 하셨다. 그러나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느 범위, 어느 수준으로 조직해야 할지 두렵기만 해서 미루고 미루었다. 그러다가 100주년 행사를 치루고 보니 김유정학회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 六 ) 김유정학회를 설립하다
어느 날 문득 달력을 보다가 나에게 주어진 공적인 날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년퇴직하기 전에 김유정학회를 조직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일었다. 두 분 전교수님께 김유정학회 설립에 대한 계획을 말씀 드렸다.
2010년 2월 9일, 오전에 춘천시 문화계인사들, 그리고 문학촌 이사들과 처음 조성된 실레이야기길을 답사했다. 오후에 문학촌 이사회가 열린 자리에서 였다. 전상국 교수께서 참석자들에게 2010년 후반기 사업계획으로 김유정학회를 조직할 계획이라고 발표하셨다. 머뭇거리고만 있는 나에게 어서 학회조직을 서두르라는 모종의 압력이었던 것이다.
마음이 급해졌다. 2010년 3월 13일, 김유정학회 설립의 당위성을 밝히는 초안을 작성해서 두 분 전교수께 그 내용을 검토하시게 하고, 발기인 모임을 갖자는 데에 의견을 굳혔다. 같은 달 17일 봄내통신 1신을 통해 김유정 관련 논문을 쓴 논자들에게 동참을 호소하는 초안원고가 이멜로 전송되었고 동참 희망자들이 회신이멜을 보내왔다.
2010년 4월 27일 발기인 대회를, 같은 해 10월 8일 김유정 문학촌 생가 대청마루에서 김유정학회 제 1회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김유정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표정옥 김화경 선생이 논문을 발표했다. 참석자는 교수 10명, 학생 20여명이었다.
2011년 4월 16일 강원대학교에서 김유정학회 제 1회 학술연구발표대회 및 창립총회가 열렸다. 서울대 조남현 교수가 기조발제를 해주셨고 이날 발표자는 10명, 교수 및 대학원생 50여명 학부생 70여명이 참석, 성황을 이루었다. 이화여대 김현숙 교수, 아주대학 송현호교수, 서울과기대의 박정규교수께서 석사 및 학부생들을 인솔해 오셨고, 강원대에서도 석사 및 학부생들이 참석했다. 창립총회에서 초대 학회장에 유인순이 추대되었다.
김유정학회의 조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다른 학회와의 차별화를 두어야 했다. 김유정학회에서는 학술연구와 김유정관련 문화 컨텐츠 연구 및 개발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학술논문 발표는 여타의 학회에서도 수행되고 있는 것인 만큼, 김유정 문학을 바탕으로 한 장르교체( 시, 수필, 희곡, 시나리오) 및 매체 교체( 무용, 연극, 영화, 오페라, 판소리, 애니메이션) 에도 관심을 갖기로 했다. 말하자면 김유정 문학을 문학의 영역에서 문화의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학회 조직의 강화를 위해서는 참석자들이 재미를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을철 학술 세미나에서는 김유정문학촌이 있는 실레이야기길을 함께 걷거나, 금병산을 등반하기도 하면서 산등성의 바위 위나 솔밭 그늘에 앉아 김밥을 먹으며 학술논문을 발표하도록 했다. 봄철 학술연구발표회는 격년제로 한번은 강원대학에서 한 번은 서울 소재의 대학에서 열기로 했다. 그리고 이들 학술발표회에서는 학술논문과, 문화컨텐츠 발표가 함께 이루어지게 했다. 실제로 1회부터 3회까지 학술논문 발표회에서는 논문발표, 그리고 김유정의 생애와 작품을 바탕으로 한 발레, 판소리, 오페라 공연 영상을 감상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김유정관련 창작 소설작품들은 첫회부터 지금까지 매년 1-2 작품씩 지속적으로 발표 되어오고 있다. 이것은 김유정 작품이 단순히 읽히는 작품이 아니라 새로이 쓰여지는 작품임에 주목한 것이다.
학술지의 경우, 타 학회에서 1년에 3~4번씩 내는 것에 비해 김유정학회에서는 발표된 논문들을 꼼꼼히 수정하게 하여 이들을 모아 1년에 한번, 하드 커버의 전공학술연구 단행본으로 발간하게 했다. 지금까지 이 연구단행본은 모두 9 권이 발간되었다. 내용도 알차고 소장본으로서 품격을 갖춘 학술지로 인정받아 국회도서관에서 학회지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아 매년 국회 도서관에 우송해가고 있다.
( 七 ) 나가며
오늘 제 11회 학술연구발표회가 열리는 날, 지난날을 돌아보며, 감사와 기쁨을 느낀다. 전신재 전상국 두 분 교수가 옆에서 격려하고 재촉하지 않으셨다면 김유정학회를 설립하는데 더 오랜 기간이 걸렸을 것이다. 김유정학회를 도와주시는 고마운 분들이 계셨기에 오늘 날의 김유정학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
( 현대소설학회의 역대 학회장님들- 한승옥, 송하춘, 김현숙, 우한용, 송현호, 이정숙 최병우 학회장들, 그리고 한계전, 김상태, 전혜자, 박정규 ,이덕화교수께 감사드린다. 이분들은 김유정학회 발표회에 열심히 참석해주실 뿐만 아니라 본인이 직접, 혹은 그 후배나 제자들을 발표자로 천거해 주셔서 김유정학회의 학문적 수준을 높여 주셨다. 한중인문학회의 젊은 교수들도 발표자와 토론자로 적극 참석해 주셨다. 모름지기 우수한 학회는 우수한 논문이 많이 나와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선후배 교수님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없었더라면 오늘 날의 김유정학회로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김유정학회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데 직접 몸으로 뛰어준 분으로 오랫동안 총무이사를 맡아왔던 최성윤 교수와 그 동료들, 강원대학교 국어과의 최충헌, 김숭원 조교선생에게 그리고 한테크 대표인 노영일 시인에게도 뒤늦은 감사를 드린다. 또 발표회 현장에서 접수를 보고 시중을 들어주던 나의 고교교사 시절의 제자들에게도 감사한다. 이분들이 안 계셨더라면 어떻게 김유정학회를 6년씩이나 이끌어 올 수 있었을까. )
더욱 감사를 드려야 할 분들이 있다. 현재 김유정학회장이신 임경순 교수, 총무이사이신 정진석교수가 그분들이다. 이분들이 계셨기에 김유정학회에 대해서 기대하는 바가 크다.
요즘의 나는 여전히 김유정작품집을 옆에 놓고 있다. 지난 10년 가까이 김유정 작품이 발표된 자료(신문, 잡지, 단행본)들을 찾아 그것을 현대어로 고치는 작업을 해왔다. 지난 1월 말에 퇴고하여 출판사로그 원고들을 넘겼다. (지난 2005년에 문학과지성사에 김유정작품 22편을 현대어로 편집, 『동백꽃』이란 서명으로 출판한 바가 있다. )
내년에 나오게 될 『정전김유정전집』에는 원본과 수정본 관계인 <솥>과 < 정분> 포함 모두 32편의 소설과, 번역소설 2편, 수필들, 서간문등을 하나로 묶었다. 다른 하나는 김유정의 지인들이 쓴 김유정 실명소설 작품 4편, 지인들이 김유정에 대해 쓴 회고문들, 서간문들, 김유정의 작품목록, 연보, 증보된 참고문헌자료들로 묶어보았다.
돌아보니 지금까지 내가 쓴 김유정관련 연구단행본이 3권, 김유정관련 논문들이 30여편 된다. 사람들은 내게 김유정연구 논문만 썼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구조주의 이론을 공부하면서 ‘프로프의 러시아민담 ’을 함께 읽다보니 구비문학에 재미를 느껴서 그들과 현대소설의 수용관계, 그런가 해외문학과 한국문학 사이의 비교문학 관련 논문들이 김유정 관련 논문보다는 훨씬 더 많은 편이다.
요즘은 코로나 19로 인해 잠시 쉬고 있지만 지난 3년간, 김유정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유정의 독서’팀과 함께 격주로 김유정의 작품을 읽고 토론하는 만남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는 유정의 작품 외에 유정의 지인들인 구인회 작가의 작품들도 곁들여 읽고 있다. 이 모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김유정과의 본격적 만남은 10.26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지금 와서 보면 그것은 운명이었다. 사람들이 농담처럼 지적하듯 전생에서 나는 그의 딸이었는지도 모른다.
2020. 10. 15. 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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