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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모산 성주사(佛母山 聖住寺)(3)
불모산 성주사
위치:경상남도 창원시 천선동 불모산(佛母山) 서쪽 기슭에 있다.
소속: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의 말사이다.
지리적 환경
역사
성주사의 창건에 대하여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오고 있다. 그 하나는 가야시대 장유화상(長有和尙) 창건설이고,또 다른 하나는 신라 흥덕왕때의 무염국사(無染國師) 창건설이다.
첫 번째 설은 가야불교의 인도 직수입설(불교남방전래설)을 주장하는 것인데,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오면서 함께 온 사촌오빠 장유화상(허보옥)이 머무시도록 김수로왕께서 창건한 가야시대의 고찰로서 김수로왕과 왕비 허황옥 사이에 난 아들중 일곱 명이 모두 불모산으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는데 당시에 창건 되었으리라는 것이다.
두 번째 설은 827년(신라 흥덕왕 2년)에 동쪽으로부터 왜구가 바다를 메우듯 병선을 이끌고 침범하자 왕이 왜적을 격퇴할 방안을 여러 신하들에게 묻자 서로 결론을 얻지 못하기를 연 5일이 되었다. 5일째 되는날 밤에 어떤 신인이 왕께 현몽하여 말하기를 지리산중에 무염이란 화상이 있으니 화상을 불러 격퇴방안을 문의하면 왜적을 격퇴하기가 어렵지 아니하다 하거늘 왕이 곧 사자를 보내어 무염화상을 불모산에 주거케하고 격퇴계책을 물었다.이에 무염화상이 곧 석장을 산 위에 새우고 왼손으로 배를 치니 그 소리에 천지가 진동함과 동시에 철갑을 한 병사가 즉시 출현하여 산의 주위에 둘러 쌌다.왜적이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 분산 도주 하였다. 왕께서 이것을 보고 크게 기쁘하며 무염화상을 왕사로 모시고 또 사은을 갚는 뜻으로 밭 360결과 노비 100호를 내려서 불모산 아래에 절을 창건토록하고 성인이 상주하는 절이라 해서 “성주사”로 이름을 지은 것이다.그후 1592년(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때 전소되었는데 1604년(선조37년) 진경대사(眞鏡大師)가 산세와 절터를 보고 중창할 뜻을 품은뒤 불당을 짓고 석탑과 석등을 찿아낸뒤 사찰을 중건하고,1682년(숙종8년) 또 한 차례의 중수를 거친뒤 1817년(순조17년) 동래 범어사에 있던 등암(藤巖)이 이 절로 옮겨와 주석하면서 중흥의 대업을 이룩했다.또한 성주사를 웅신사(熊神寺),속칭 곰절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도 두 가지의 이야기가 전한다.첫 번째 이야기는 진경대사가 원래의 성주사터에 가람을 중건하였을대 본래의 자리는 지금 위치에서 약 400m 북쪽에 있었으나 하룻밤 사이에 곰이 전 목재를 현재의 자리에 옮겨 놓아 부처님의 뜻으로 알고 그 곳에 절을 세웠다는 이야기다.
두 번째 이야기는 옛날 어느 때 불모산에 살던 곰이 있어 배가 고파 내려왔으나 성주사의 스님들이 좌선삼매에 들어 수행에 열중하고 있어 배고픔을 잊고 스님들의 자세를 흉내내곤 하다가 그것이 공덕이 되어 후생에 그 곰이 사람으로 태어났다.그 사람이 자라면서 인연을 따라 성주사에서 부목(負木:절에서 땔 나무를 하는 사람)일을 하게 되었는데 전생이 곰이라 밥이 타는지도 모르고 삼매에 들어 불을 때다가 마침 공양간을 지나던 주지 스님이 그 광경을 보고는 지팡이로 머리를 치며 깨우는 순간 깨닫는 바가 있어 그의 전생인과가 곰이었는데 스님의 흉내를 내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알고 더욱 정진하여 큰 스님이 되었다 한다.성주사는 대웅전, 영산전, 삼신각, 설선당, 안심료 등의 당우와 삼층석탑, 관음보살상, 부도군의 문화재가 있는데 지방유형문화재 제134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전은 조선 숙종 7년 (1681년)에 중건한 것으로 추정되며,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는 다포계 양식의 맞배지붕으로 전면 포작을 화려하게 조각하였으며, 대웅전 내부에는 화려하고 규모가 큰 닫집을 시설하여 법당 내부를 장엄하게 꾸민 조선후기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성주사는 가야시대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비인 허씨가 일곱 아들을 입산시켜 승려가 되게 하였다는 전설이 담겨있는 불모산(해발 801m) 의 서북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창원 공단의 끝자락인 불모산 기슭인 창원시 천선동에서 만나는 사찰이 성주사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의 말사이다. 도력으로 왜구를 물리친 무염(無染) 국사를 기리기 위해 835년(흥덕왕 10) 창건되었다. 당시 해안지대에는 왜구의 침략이 잦아 왕이 몹시 고민하였는데, 지리산에 있던 무염이 이 산에 와서 신통력으로 신병(神兵)을 불러 물리쳤다고 한다. 이에 왕이 밭 360결(結)과 노비 100호(戶)를 내려 절을 창건하게 하고, 성인이 상주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성주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1604년(선조 37) 진경(眞鏡)이 중건했다.
성주사는 한때 "곰절, 웅신사"란 별명이 따라 다녔는데 이는 진경이 중건 할 당시 곰이 불사를 도와 건축자재를 날라 주었다고 하여 하여 웅신사 또는 곰절이라는 별칭이 생겼다는 설화가 있다.
전설 때문으로 높은 산은 아니 지만 인근의 장유사와 함께 창원에서 사랑받는 사찰임은 분명하다. 사적기에는 진경이 이곳에 당도하여 산세와 절터를 보고 중창할 뜻을 품은 뒤 불당을 짓고 석탑과 석등을 찾아냈다고 한다.
1682년(숙종 8) 또 한 차례의 중수를 거친 뒤 1817년(순조 17)에 동래 범어사에 있던 등암(藤巖)이 이 절로 옮겨 주석하면서 크게 중흥했다. 이후 근대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1993년에 주지 원종이 설법전을 중수하였고. 2005년에는 주지 원정이 지장전을 건립 하였다.
성주사내 지방유형문화재 제25호 삼층석탑, 지방유형문화재 제134호 대웅전, 지방유형문화재 제336호 감로왕탱, 문화재자료 제267호 동종, 지방유형문화재 제335호 관음보살입상 이 있고.보타전(寶陀殿)·명부전(冥府殿)(현재는 지장전을 신축) ·설선당(說禪堂)·염화실·불모당(佛母堂)·용화전·요사채가 있다.
용화전에 있는 석조관세음보살입상은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용화전을 세울 때 매몰되어 있던 것을 찾아낸 것이다.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경남유형문화재 25)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 좌우에는 2기의 석등이 있고, 1773년(영조 49)에 세운 원혜(園慧)의 부도와 1781년(정조 5)에 세운 경세(慶世)의 부도 등 부도 4기가 있다.
성주사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방 유리광세계의 교주인 약사여래부처님과 오른쪽에 서방 극락세계의 교주인 아미타부처님을 삼존으로 모시고 그 전각을 대웅보전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이때의 부처님들은 공간적으로 3세계를 대표하므로 삼세불이라 부르는데, 조선시대에 조성된 큰 사찰에서는 대웅보전 내에 삼세불상과 함께 삼세불화를 봉안한 곳이 많다. 처음 1681년(숙종 7)에 지은 뒤 1817년(순조 17)에 중수하였다. 건축 양식은, 앞뒷면에만 공포를 짜 올리고 옆면에는 생략하였다. 공포는 화려하고 장식적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뒷면 내부의 공포만 간략한 교두형(翹頭形, 圓弧形으로 깎아낸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의 특징이다.
외부 벽화 가운데 왼쪽 면 두 곳에 곰의 그림이 있는 것은 진경 대사가 1604년 성주사를 중창할 때 도움을 준 곰을 그린 것이다. 최근에 중수하면서 기단부 앞에는 대웅전 앞으로 오르내리기 위한 출입 계단을 두고, 오른쪽에는 장애인의 편의를 위해 경사로를 두었다.
내부 좌우 벽에는 무염국사 진영(1907년), 포암당 대총스님 진영, 등암당 찬훈스님 진영, 서봉당 의정스님 진영이 모셔져 있으며, 목조 소원화통 1점(1661년:순치 18년), 청동금고(반자) 1점(1758년:건륭 21년), 대고 1점(연대미상), 상단후불탱 1점(1991년), 닷집및 좌대(1992년), 신중탱 1점(1991년)등을 소장 하고 있으며,대웅전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3칸의 규모로, 현재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34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 주련
世尊坐道場 淸淨大光明 比如千日出,照耀大千界
세존좌도량 청정대광명 비여천일출 조요대천계
영산전(靈山殿)
영산전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인도의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시던 당시의 광경인 영산회상을 재현해 모신 곳으로, 석가모니부처님과 10대 제자, 16나한 또는 5백나한을 모시기도 하고, 영산회상도나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단계로 구분하여 묘사한 팔상도를 봉안하기도 한다.팔상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인 여덟장면을 탱화나 존상으로 모신 곳인데, 팔상 탱화를 봉안하고 달리 존상을 모실 경우에는 석가모니부처님과 함께 좌협시에 미륵보살, 우협시에 제화갈라보살을 모신다.
따라서, 석가모니부처님과 더불어 이 두 협시보살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상징하고 있는 이른바 시간삼세불인 것이다. 영산회(靈山會)란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취산이라는 곳에서 많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가르침을 베풀던 모임이다.
이 설법중에 석가모니께서 꽃을 들어보이시고,한 제자가 빙그레 웃었다는 그 유명한 "염화시중의 미소" 그 장면이다.영산은 영취산이라고 하니 바로 영축산이 아닌가. 아라한(阿羅漢;Arahan)은 모든 사람의 우러름을 받을 만한 사람이란 뜻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들을 말한다.
대웅전 왼쪽에 자리한 영산전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를 하고 있다. 영산전(1930년)에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불석:강희 19년:1681년)모셔져 있다. 그리고 십육나한(16점), 나한시자(2점), 나한시동(4점)(1681년:강희 19년), 영산 후불탱(1926년),나한탱화(1967년 보봉스님) 이 모셔져 있다.
삼성각(三聖閣)
지장전(地藏展)
관세음보살과 함께 중생구제의 큰 원력으로 많은 대중들의 귀의처가 되고 있는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을 지장전 혹은 명부전이라고 한다. 지장보살은 특히 지옥중생의 구세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그 때문에 명부전에는 지장보살과 그 협시인 도명존자 및 무독귀왕 이외에도 염라대왕을 위시한 지옥의 10왕상을 봉안한다.
한편 지장보살의 형상은 본래는 보살형으로 보관과 영락으로 장엄한 모습이었지만 『지장십륜경』에 의해 차츰 삭발을 한 사문의 모습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사문형의 지장보살은 지옥문을 깨뜨린다는 육환장(석장)과 장상명주라는 어둠을 밝히는 보주를 들고 있는데, 석장의 여섯 고리는 육바라밀을 상징한다. 육환장의 윗부분에는 화불을 모시기도 하는데, 그 부처님은 지장원찬 23불의 첫 번째인 ‘각화정자재왕여래’라고 한다.
도명존자와 무독귀왕:도명존자는 『환혼기』라는 중국의 영험설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설화에 나타나는 도명존자는 중국 양주에 있는 개원사의 승려로서 우연히 사후세계를 경험하고 지장보살의 협시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무독귀왕은 지장보살의 전생 이야기 속에 지장보살의 안내자로 등장하고 있는 재수보살의 전신이라고 한다.
지옥시왕(十王)
성주사 지장전은 본래의 명부전(1940년)에서 새로이 건물을 완공하면서 옮겨온 것이다, 2005년 주지 원정 스님이 신축하여 대웅전 왼쪽에서 현재의 장소인 공양간 앞마당으로 옮긴 것이다. 지장전 내부에는 지장보살, 도명존자, 무독귀왕(불석:3점),(진경대사조성/1604년):상문스님조성(1681년),그리고 시왕(10위:석조:1681년 상문스님), 시왕 시자상(6위 불석), 시왕 동자상(10위:불석), 금강역사 2점(불석), 지장후불탱(2007년:이전 후불탱은 1926년),시왕후불탱 10점(1977년 보봉 스님),그리고 삼배바탕에 채색된 감로왕탱화(경남 유형문화재 제 336호:1682년 영조 5년)가 소장되어 있다.
성주사 감로왕탱화는 가로 274㎝, 세로 205㎝의 크기로, 삼베 바탕에 홍색과 녹색을 주조로 하여 채색하였다. 화폭의 상단에 7불과 관음보살을 그려놓고, 그림 한가운데에 아귀를 중심으로한 아귀지옥을 표현하였으며, 아래쪽에는 인간세상의 고통스런 장면을 그렸다.
조선 영조 5년(1729) 다시 화원이었던 비구 인행 등이 그린 것으로, 홍색과 녹색을 주조로 사용했던 조선 후기 불교 회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주사 3층 석탑:
탑(塔),
탑’이란 말은 인도의 옛말 스투파에서 유래되었는데, 그것을 졸도파, 수두파, 탑파 등으로 번역하여 쓰다가 줄여서 탑이라고 하게 되었다. 탑은 본래 부처님의 유골인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축물에서 비롯되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신후 다비(화장)를 하였는데, 그때 나온 사리를 인도의 여덟 나라에서 나누어 가져다가 각기 탑을 세우고 생전의 부처님처럼 모셨다고 한다. 이것을 근본 8탑이라고 하는데, 말하자면 이때부터 사리신앙과 더불어 불탑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약 100년이 지난 뒤 인도를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한 마우리야왕조의 아쇼카왕이 이전에 세운 8개의 탑을 해체한 뒤 사리를 다시 8만4천으로 나누어 전국에 8만4천개의 사리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이나 우리 나라에 불교가 들어와서는 부처님의 진신사리 대신 불경이나 불상 등의 법신사리를 봉안한 탑도 건립하게 되었다.불탑은 사용된 재료에 따라 목탑, 석탑, 전탑, 모전석탑, 금동·청동·철탑 등으로 구분된다.
부도(浮屠)
범종(梵鍾)
동종은 성주사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일주문은 비록 없지만 용화전을 지나 처음 만나는 동종으로 건룡 48년(1783)에 제작되었다. 동종의 높이는 111cm, 직경 84cm, 무게 600근으로 조선시대 작품이다. 용뉴부에 음통은 없고 쌍룡으로 용뉴를 장식하고, 종신 가운데 4개의 유곽이 독립적으로 자리 잡고 그 사이에 보살상이 배치되어져 있다. 흔히 타종부분으로 새겨지는 당좌가 이 종에서는 없는 것이 특징으로 조선시대 동종연구에 자료가 되고 있다.
범종은 일반적인 기념종이나 다른 종교의 종들과는 달리 불법의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범종은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법구이다. 즉 범종의 소리는 우주의 모든 중생의 영혼을 교화하고 제도하기 위하여 울리는 대자대비의 음성인 것이다.
실로 조선초기에 제작된 갑사종(보물 478호)에는 지장보살이 조각되어 있다. 오른손에는 석장을 왼손에는 보주를 받쳐들고 있는 이 지장보살의 형상은 탱화 속의 지장보살과 조금도 차이가 없는 전형적인 양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모습은 지장보살이 지옥세계에서 고통받고 있는 중생들을 구원하고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서 계시는 모습인 것이다.
한국 범종의 역사와 양식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범종은 상원사종이며,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는 성덕대왕신종은 그 외형의 아름다움이나 크기, 소리에 있어서 세계의 최고의 종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의 구조는 크게 둘로 나누어 종을 매달 수 있게 하는 종고리부와 두들겨 소리를 내는 종몸체로 구분된다. 그런데 같은 문화권인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 3국의 범종들은 모두 종고리 장식으로 용을 이용하고 있는바 이미 그 유래가 문헌상으로 밝혀지고 있다.
많은 문헌에는 용의 아홉 자식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용의 아홉 자식 중에는 포뢰라는 자식이 있었는데 소리내어 울기를 좋아해서 종고리의 상징적 장식물로 이용하였는 바 여기에는 종이 훌륭한 소리를 내기 위한 소망이 담겨 있으리라. 또한 그 포뢰는 물속의 큰 물고기를 두려워하는데 그 물고기가 포뢰를 공격하면 포뢰가 큰 소리를 내어 운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종을 때리는 타봉의 형상을 큰 물고기 모양으로 조각하여 이용하였다.
한국범종의 모습은 시대에 따라 신라양식과 고려양식, 조선양식으로 약간씩의 양식변천을 이루었다. 신라종과 고려종의 양식은 순수한 우리 선조의 창의력에서 이루어진 형식인데 반하여 불교 배척시대였던 조선조 범종 양식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이른바 한·중 혼합양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다시 신라종 형식이 한국종의 절대적인 양식으로 널리 유행하여 조성되고 있다.
한국, 중국, 일본 등 같은 문화권에서 만들어진 종이지만 한국종에서는 중국종이나 일본종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장식으로써 종고리 부분의 음관을 들 수 있다. 즉 중국종이나 일본종의 종고리 양식은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머리를 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쌍룡 양식으로 한국종과 같은 음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종은 한 마리의 용이 화려하게 장식된 대나무 형상의 원통을 등에 지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중국종이나 일본종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인데,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양식으로서 한국종의 탁월한 창의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덕대왕신종은 우리 나라 에서 가장 우수한 범종으로 다른 불교국가에서도 그 유례를 보기가 어렵다. 또한 한국종의 전형적인 양식을 갖추었고 문양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주조기술 역시 뛰어나 8세기 중엽 신라시대 예술의 발달상을 여실히 대변하고 있다. 성덕대왕신종에는 양쪽 비천상 사이 두 곳에 걸쳐 1,000자가 넘는 장문의 명문이 양각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이 부왕인 성덕왕을 위하여 동 12만근을 들여 주조하려다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서거하자 다음의 해공왕이 부왕의 뜻을 이어 동왕 7년에 완성했다고 하는데, 종을 만들기 시작된 해를 경덕왕 1년으로 잡는다면 대략 30여년이나 걸린 셈이 된다.
어수각
지금의 위치는 약간 아래쪽으로 옮겨져 있슴.
용화전(龍華展)
성주사에서 만날 수 있는 여러 풍경 중 돌로 만든 두 마리의 돼지조각품과 용마루 좌, 우에는 각기 다른 형상이 배치되어져 있다.
설법전(說法展)
‘안수정등도’ 벽화는 『불설비유경(佛說譬喩經)』에 나오는 인생에 대한 비유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나그네 한 사람이 큰 벌판을 걷다가 미쳐서 날뛰는 코끼리 한 마리를 만났다. 그는 크게 놀라 달아나다가 다행히 우물을 발견하였다. 마침 우물 안으로 뻗어내려간 등나무 넝쿨을 붙잡고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곳에는 네 마리의 독사가 사방에서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고, 또 밑바닥에는 무서운 독룡이 노려보고 있었다.
위에는 미친 코끼리, 발 밑에는 독룡과 뱀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게 된 나그네는 등나무 넝쿨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흰 쥐와 검은 쥐가 나타나서 등나무 줄기를 갉아먹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 때였다. 어디에선지 꿀물이 나그네의 입술에 떨어졌다. 그러자 그 달콤한 꿀맛에 나그네는 그에게 닥친 두려움과 괴로움을 잊고 꿀물이 떨어지는 쪽으로 눈을 돌리니 머리 위의 큰 나뭇가지에는 몇 마리의 꿀벌들이 집을 짓느라 앉았다 날았다 하였는데 그 때마다 꿀이 떨어져서 입에 들어갔다. 나그네가 꿀의 단맛에 취해 있는 동안 들불이 일어나 사방을 휩쓸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사람의 삶을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나그네는 인생 그 자체를 말하며 벌판은 무명장야(無明長夜)를, 코끼리는 무상(無常)을 이르며, 우물은 나고 죽는 일〔生死事〕이 험난한 이 세상을, 한 줄기의 넝쿨은 우리의 생명을 각각 뜻한다. 그리고 검은 쥐와 흰 쥐는 밤과 낮을, 네 마리 독사는 우리의 육신을 이루고 있는 사대(四大:地水火風)를 가리키며 꿀물은 오욕(五欲), 벌은 삿된 생각을, 들불은 늙고 병듦을, 독룡은 죽음을 각각 상징한다.
‘안수정등도’ 벽화는 위의 내용을 대체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꿀물의 달콤함에 취하여 정신을 잃은 나그네를 통하여 그릇된 관념에서 벗어나서 삶의 참모습을 깨닫고 정행을 하도록 이끌어 준다.
※ 광야 -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영혼의 밤. 미친코끼리 - 시간의 덧없음(無常:무상) ,옛 우물 - 삶의 현장 ,등나무 줄기 - 생명줄 ,검은 쥐, 흰쥐 - 밤과 낮 ,네마리 독사 - 현상과 육체의 기본 구성원소인 사대(四大 : 흙, 물, 불, 바람), 다섯 방울의 꿀 - 오욕락(재물욕, 색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
벌들 - 잘못된 견해, 들불 - 늙음과 병고 ,우물바닥의 괴물 - 죽음
※ 이것이 바로 인간이 사는 모습을 비유한것이다.
선가의 그림 '십우도'
불가(佛家)에서는 오래 전부터 ‘소’를 진리의 상징으로 보고 심법전수의 수단으로 삼았다. 절마다 소찾는 그림(尋牛圖)’을 벽에 둘러가며 그려 붙인 것이 그것이다. 최초로 심우도를 그렸던 송나라때의 곽암선사는 화엄경이 말하는 미륵불(彌勒佛)의 출세를 상징화하여 그렸다.
그러나 심법(心法)을 닦는 것이 본 업이 되다보니 현재 불교의 심우(尋牛)는 미래불(未來佛-미륵불)과 관계없는 심우(心牛)가 되고 말았다.
예로부터 소는 인도나 중국에서 농경생활의 필수적인 동물이므로 사람과 매우 친숙하다. 세존께서 성불하기 이전에 '고타마'태자였는 데 이 '고타마'가 곧 소를 의미하기도 한다. 자급자족을 내세우는 선종에서 노동과 관련 있는 소를 등장시켜 선수행의 단계를 비유하 여 마음을 조복받는 10가지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십우도에 관한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宋代의 곽암사원(廓庵師遠)스 님의 작품이 가장 유명하며 석고희이(石鼓希夷)라는 스님이 화답하 는 게송을 지었으며 다시 괴납대련(壞衲大璉)스님이 화답게송을 넣 고 있다.
심우(尋牛)
첫번째는동자승이 소를 찾고 있는 장면이다.
우리는 무엇인가에 시달리고 있다. 자기의 본성을 잊고 수많은 유혹 속에서 소의 발자취를 잃어 버린 것이다.
망망발초거추심 (茫茫撥草去追尋) 우거진 풀 헤치며 소의 자취 찾노라니
수활산요로갱심 (水闊山遙路更深) 강은 넓고 산은 멀고 길은 더욱 깊구나.
역진신피무처멱 (力盡神疲無處覓) 힘 다하고 지쳐서 찾을 길 막막한데
단문풍수만선음 (但聞楓樹晩蟬音) 단풍숲엔 매미 우는 소리만 들리누나.
심우(尋牛)는 소를 찾는 동자가 망과 고삐를 들고 산 속을 헤매는 모습이다.이것은 처음 수행을 하려고 발심한 수행자가 아직은 선(禪)이 무엇이고, 본성(本性)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지만 그것을 찾겠다는 열의로 공부에 임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견적(見跡)
수변임하적편다 (水邊林下跡偏多) 물가와 나무아래 수많은 발자국
방초리피견야마 (芳草離披見也마) 우거진 풀 헤치며 발자국을 찾아본다.
종시심산갱심처 (縱是深山更深處) 비록 이 산 깊더라도 골짜기가 깊다해도
요천비공즘장타 (遼天鼻孔즘藏他) 하늘 향한 콧구멍 어찌 그걸 감추리오.
견적(見跡)은 동자가 소의 발자국을 발견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본성을 찾으려는 일념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다가 보면 본성의 자취를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황앵지상일성성 (黃鶯枝上一聲聲) 나무 위엔 꾀꼬리 꾀꼴꾀꼴 노래하고
일난풍화안류청 (日暖風和岸柳靑) 화창한 날 언덕 위엔 버들가지 푸르네.
지차갱무회피처 (只此更無回避處) 오직 다만 이것이니 어찌 다시 회피하리.
삼삼두각화난성 (森森頭角畵難成) 삼삼한 쇠뿔은 그리기가 어려워라.
견우(見牛)는 동자가 멀리 있는 소를 발견한 것을 묘사한 그림이다. 이는 오랜 노력과 공부끝에 본성(本性)을 깨달음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음을 상징하고 있다.
네 번째는 득우(得牛), 즉 '소를 얻다' 이니, 동자승이 드디어 소의 꼬리를 잡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발견하긴 했지만 아직도 마음은 갈 길을 잡지 못하고 헤메고 있다.
갈진정신획득거 (渴盡精神獲得渠) 정신을 가다듬어 야생소를 얻었지만
심강역장졸난제 (心强力壯卒難除) 사납고 힘이 세어 다루기 어렵도다.
시유재도고원상 (時有재到高原上) 어느 때는 겨우겨우 높은 산에 올랐다가
우입연운심처거 (又入煙雲深處居) 또 어느 땐 구름속에 깊이 잠겨 버린다네.
득우(得牛)는 동자가 소를 붙잡아서 고삐를 낀 모습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견성(見性)을 표현한 것으로, 마치 땅 속에서 아직 제련되지 않은 금광석을 막 찾아낸 것과 같은 상태이다. 이 때의 소의 모습을 보면 어두운 색으로 표현하는데, 아직 삼독(三毒)에 물든 거친 본성이 제거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목우(牧牛)
편색시시불리신 (鞭索時時不離身) 잠시라도 몸에서 채찍 고삐 놓지 않고
공이종보입애진 (恐伊縱步入埃塵) 행여나 티끌 속에 걸어갈까 저어하네.
상장목득순화야 (相將牧得純和也) 이젠 서로 익어져서 길들고 순화되어
기쇄무구자축인 (羈鎖無拘自逐人) 고삐를 안 잡아도 절로 사람 따르도다.
목우(牧牛)는 고삐와 채찍으로 쉴사이 없이 거친 소를 길들여서 서로가 친숙해 질 때까지 길들여서 자연스럽게 놓아 두어도 저절로 가야할 길을 갈 수 있도록 함을 묘사한다. 이것은 삼독의 때를 지운 보임(保任)의 단계로서,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이 보임의 단계에서 마음을 잘 단속해야지 애써 길들인 소가 자칫 달아나면 큰 일이듯이 닦아온 본성이 수포로 돌아가면 큰 일이기 때문이다. 이 때 소는 길들여진 정도에 따라 차차 어두운 색에서 흰색으로 바뀌어 간다.
기우귀가(騎牛歸家)
기우이려욕환가 (騎牛이麗欲還家) 비스듬이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네.
강적성성송만하 (羌笛聲聲送晩霞) 강적의 피리불며 저녁노을 보내나니
일박일가무한의 (一搏一歌無限意) 한 박자 한 곡조 무한한 뜻 담겼는데
지음하필고진아 (知音何必鼓唇牙) 한 곡조 아는 이라 말할 필요 있겠는가.
기우귀가(騎牛歸家)는 동자가 구멍없는 피리를 불며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때의 소는 완전히 흰색으로서 백우(白牛)가 되어 특별히 지시를 하지 않아도 동자와 일체가 되어서 피안(彼岸)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이 때 구멍 없는 피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가히 육안으로 살필 수 없는 본성의 자리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를 상징한다. 이미 본성을 찾았으니 모든 것이 완숙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망우존인(忘牛在人)
모든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기우이득도가산 (騎牛已得到家山) 소를 타고 본향인 내집으로 오고보니
우야공혜인야한 (牛也空兮人也閑) 소는 이미 없어지고 사람은 한가롭다.
홍일삼간유작몽 (紅日三竿猶作夢) 해 뜨도록 늦잠자도 오히려 꿈이거니
편승공돈초당간 (鞭繩空頓草堂間) 쓸데없는 채찍 고삐 초당간에 던져두네.
망우존인(忘牛存人)은 집에 돌아와 보니 애써 찾던 소는 온데간데 없고 자기만 있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결국 소는 마지막 종착역인 심원(心源)에 도착하게 하는 방법이었으므로, 이제 고향집과 고향 산천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방법은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뗏목을 타고 피안에 도달하면 뗏목은 버려야 한다는 기르침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인우구망(人牛俱忘)
편삭인우진속공 (鞭索人牛盡屬空) 채찍 고삐 사람과 소 모두 다 텅 비니
벽천요활신난통 (碧天遼闊信難通) 푸른 하늘 멀고 넓어 소식 전키 어려워라.
홍로염상쟁용설 (紅爐焰上爭容雪) 이글대는 난로 위에 눈을 어이 용납하리.
도차방능합조종 (到此方能合祖宗) 이제야 바야흐로 조종과 합치되네.
인우구망(人牛俱忘)은 소를 잊은 다음 자기 자신도 잊어버리는 상태를 묘사한 것으로서 텅 빈 일원상만을 그리게 된다. 원상은 주객분리 이전의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렀다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초월한 경지에 이르니 전부가 오직 공(空)한 것이다.
반본환원(返本還源)
반본환원이비공 (返本還源已費功) 본향으로 돌아옴도 공연히 애썼구나.
쟁여직하약맹롱 (爭如直下若盲聾) 어찌하여 마치 바로 귀머거리 장님같이
암중불견암전물 (庵中不見庵前物) 암자에 있으면서 바로 앞을 못 봤던고.
수자망망화자홍 (水自茫茫花自紅) 물은 절로 흐르고 꽃은 절로 붉게 피네.
반본환원(返本還源)은 이제 주객이 텅 빈 원상속에 자신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침을 묘사한다.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조그마한 번뇌도 묻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상징한 것이다.
입전수수(入전垂手)
노흉선족입전래 (露胸跣足入廛來) 가슴 풀고 맨발로 저자 거리 들어가니
말토도회소만시 (抹土塗灰笑滿시) 흙과 재를 덮어써도 얼굴에는 웃음 가득.
불용신선진비결 (不用神仙眞秘訣) 신선의 참된 비결 무슨 소용 있으랴.
직교고목방화개 (直敎枯木放花開) 곧바로 마른 나무 꽃을 피게 하리로다.
입전수수(入廛垂手)는 큰 포대를 메고 지팡이를 짚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저자거리를 찾아 나서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때 큰 포대는 중생들에게 베풀어 줄 복과 덕을 담은 포대로서, 불교의 궁극적인 뜻이 중생의 제도에 있음을 상징한 것이다.
벽화(壁畵)
흰뼈와 검은뼈의 비유
"세존이시여, 여래는 삼계의 큰 스승이시고 사생의 아버지이시옴에 여러 사람의 기이하고 공경하는 터이온데 어찌하여 해골 더미에 예배하시나이까.."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하시었다.
"아난아, 네가 비록 나의 큰 제자로써 출가한지 오래지만 사리를 널리 하지 못하는구나. 이 한 더미 해골이 허곤데 전생도 부모도 되었을 것이었다. 여러대의 내 부모도 되었을 것이므로 내가 지금 예배하는 것이로다."
"아난아, 네가 이 한 더미 해골을 가지고 두 몫으로 나누어 보아라. 만일 남자의 뼈라면 희고 무거울 것이요, 여자의 뼈라면 검고 가벼울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남자와 여자가 살아 있을 때에는 그 의복과 생긴 모양으로 능히 구별할 수 있지만 죽은 뒤에는 마찬가지 백골이었거늘 저더러 어떻게 분간하라 하시나이까."
"아난아, 만일 남자라면 세상에 있을적에 가서 경읽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삼보앞에 예배도 하고 염불도 하였을 것이므로 뼈가 희고 무거울 것이요,
여자는 아기를 한번 낳을적마다 서말 서대의 피를 흘리고 여덟석 너말의 젖을 먹이어야 하므로 뼈가 검고 또 가벼우니라."
아난이 말을 듣자 가슴을 오린 듯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오면 어머니의 은혜를 갚사오리까."
"아난아, 자세히 들어라. 내가 이제 너를 위하여 어머니가 아기를 배어 낳느라고 열달 동안의 겪어야 하는 지독한 고통을 말하리라. 어머니가 아기 밴지
첫 달에는 풀끝에맺힌 이슬 방울이 아침에 있다가도 한 나절이 지나면 없어지듯이 새벽에는 모여 있다가 흩어져 버리느니라.
둘째달에는 잘 끓는 우유죽이 한 방울 떨어진 것 같으니라.
셋째달에는 응기의 진 피와 같느니라.
넷째달에는 점점 사람의 모양을 이루고,
다섯달이 되면 어머니 뱃 속에서 다섯 부분의 모양이 보브니라. 머리가 한 부분이요, 두팔이 세 부분이요, 두무릎이 다섯 부분이니라.
어머니가 아기 밴지
여섯째 달에는 어머니가 뱃 속에서 여섯 정기가 열리나니, 눈 한 정기요, 귀가 두 정기요, 코가 세 정기요, 입이 네 정기요, 혀가 다섯 정기요, 뜻이 여섯 정기니라.
그리고
일곱째 달에는 어머니 뱃 속에서 삼백 육십 뼈마디와 팔만 사천 털구멍이 생기느니라.
여덟째 달에는 뜻과 지혜가 생기고 아홉 구멍이 자라느니라.
아홉째 달에는 아기가 어머니 뱃 속에서 먹기를 시작하는데 복숭아 오얀 바늘이나 오곡은 먹지 않느니라. 어머니의 생장은 아래로 향하고 숙장은 위로 향하여 한 더미 산이 있는데, 이 산 이름이 세 가지니, 한 이름은 수미산, 또 한 이름은 업산, 다른 한 이름은 혈산이니라. 이 산이 한 번 무너지면 한 줄기 피로 흘러 아기의 입으로 흘러 들어가느니라.
어머니가 아기밴지
열째달에는 마침내 낳게 되는데 아기가 만일 허순한 자식이면 두손을 합장하고 나오면서 어머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오욕의 자식이면 어머니의 태를 깨뜨리거나
다리로 어머니의 골반을 헛디디기도 하여 어머니로 하여금 천개의 칼로 배를 찌르는 듯, 만개의 창으로 가슴을 쑤시는듯 하게 하느니라.
임제 의현 선사
(?)
임제는 마조도일(馬祖道一:707~786)이 대성한 남종선의 전통을 더욱 철저히 하여 '무위(無位)의 진인(眞人)'이라는 절대 주체를 세우는 도(道)를 확립했다. 즉 '무위의 진인'이라는 이상적 상태야말로 선(禪)의 경지라고 하여, 간명하고도 직각적으로 분별하는 말로써 그것을 설했다. 아울러 스승인 황벽희운(黃檗希運:?~850)의 선풍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선사상과 준엄한 선풍을 확립함으로써 임제종을 형성했다. 이후 송나라(960~1279) 때는 두 파로 갈리면서 크게 번영하여 중국불교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즉 석상초원(石霜楚圓)의 제자로 황룡혜남(黃龍慧南:1002~69)과 양기방회(楊岐方會:992~1049)가 배출되어 이들로부터 각각 황룡파와 양기파가 성립했다. 임제종의 사상적 특질은 온갖 속박을 벗어난 자유로운 '무위의 진인' 또는 '무의(無依)의 도인'을 추구하는 인간관에 있다. 눈앞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지금 살고 있는 인간을 문제삼아 인간의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를 추구했다. 자유로운 절대 주체의 생활방식을 행동을 통해 파악하려 했던 것이다. 인간의 적나라한 삶을 긍정하면서 진정한 견해를 얻는 자유인을 추구한다. 이리하여 마조로부터 비롯되는 홍주종(洪州宗)은 임제에 이르러 생기가 넘치며 활동하는 선, 즉 대기대용(大機大用)의 선으로 총괄되어 임제종의 전통을 형성한다. 송대 이후 임제종은 수행자의 견성(見性)을 위한 수단으로 선사의 언행록인 공안을 사용하는 공안선 또는 간화선(看話禪)을 고취했다. 이 간화선은 공안을 통해 본래 지닌 불성을 자각하여 지혜에 의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선이지만, 좌선을 경시하여 선 본래의 방식으로부터 벗어났다는 비난을 받았다.
한국의 임제종
한국의 선종(禪宗)은 대체로 임제종의 전통을 받아들였다고 하나, 중국 임제종의 법맥이 좀더 뚜렷하게 계승된 것은 고려말의 태고(太古)와 나옹(懶翁) 이후부터이다. 그러나 임제종이라는 명칭으로 교단이 설립된 적은 없다. 그후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일제가 원종(圓宗)의 종정 이회광(李晦光)이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연합체맹(聯合締盟)에 합의하는 등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종속시키려는 데 대항하여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1910년 10월 전라도의 박한영(朴漢永)·진진응(陳震應)·김종래(金種來) 등을 중심으로 광주 증심사(證心寺)에서 승려대회를 열었으나 호응이 미비했다. 이에 한용운(韓龍雲)·오성월(吳性月) 등이 가세하여 격문을 돌리는 등 크게 운동을 일으켜 1911년 1월 영남과 호남의 승려들을 규합하여 순천 송광사(松廣寺)에서 총회를 열고 임제종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조선의 선종이 태고보우(太古普愚) 이래로 임제종 계통이었다는 이유로 종명(宗名)을 이처럼 정했다. 임시 종무원을 송광사에 두고 관장(管長)으로 선암사(仙巖寺)의 김경운(金擎雲)을 선정했으나 한용운이 대리 관장으로 종무를 맡았다. 1912년 하동 쌍계사(雙溪寺)에서 제2차 총회를 열고, 종무원을 범어사(梵魚寺)로 옮겼으며 광주·서울·대구·동래 등지에서 포교당을 개설하는 등 서울의 원종과 대립했다. 그러나 1911년 6월 반포된 사찰령(寺刹令)에 의해 전국의 사찰이 30본산(本山)체제로 전환됨에 따라 점차 힘을 상실하고 해체되었다.
<아쇼카왕의 전생이야기>
'부처님께 무엇이든지 공양을 올리면 큰 복을 받는다고 하던데...'
이렇게 생각한 아이는 신발에 밥이라며 담아 놓은 모래를, 동생을 엎드리게 하고는 그 위에 올라가 부처님께 정성스럽게 올렸다.
부처님께서는 모래밥을 받으시고는 빙그레 웃으시며 아난에게 건네 주셨다.
"이 모래를 가지고 가서 내 방의 허물진곳에 바르도록 하여라."정사로 돌아온 아난이 말씀대로 방의 허물어진 곳에 바르고 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린 두 아이가 환희심으로 모래를 보시하였으니, 그공덕으로 다음에는 국왕이 되어 삼보를 받들고 여래를 위하여 팔만사천 보탑을 세울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찌 한 줌 흙의 공덕으로 그와 같이 큰 공덕을 성취할 수 있읍니까?"
"과거에 한 국왕이 있었는데, 부처님께서 출현하시니 임금과 신하들이 모두 부처님께 예배드리고 법을 청하여 들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왕은 마음의 문이 열리고 깨닫는 바가 참으로 많았다. 왕은 이 기쁜 마음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 부처님의 형상을 팔만사천 장을 그려 보시하였으며, 그 공덕으로 팔만사천의 탑을 건립할수 있는 과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국왕이 바로 오늘 모래를 공양한 소년이다."
기원 전 삼세기 중엽에 인도를 통치한 아쇼카 왕이 바로 그소년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는 인도 역사에서 가장 넓은 땅을 통일하고 다스린 국왕이었다. 그러나 그는 인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전쟁의 비참함을 통감하고, 인생의 무상함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러한 까닭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성전을 베풀었다.아쇼카 왕은 참다운 평화의 의미를 이해하고 터득하였다. 인생과 사회에서 누구나 구하는 평화란 무기나 군대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덕치로써 노력하여야만 가능함을 깨달았다.
아쇼카 왕 자신은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올바른 가르침을 널리 펴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느꼈다. 그는 자신뿐만이 아니라 왕비와 왕자, 대신들에게까지 불법을 배우게 하였으며, 일반 백성들에게도 널리 불법을 펼쳤다.왕위에 오른지 열일곱 해가 되었을 때는 천 명의 승려로 하여금 경전을 편찬케 하는 결집을 주최하였고, 시리아, 이집트, 마케도니아, 키프러스, 스리랑카와 같은 여러 나라에 불교사절단을 파견하였다.
또한 살생을 금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렵을 막아 동물의 생명까지도 귀하게 여겼으며,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도 평등한자유를 부여하였다.스스로도 불교의 생활 규범에 철저하였던 아쇼카 왕은, 이처럼 모든 인류에게 불교의 진리를 전파하여 생활 속에서 구현할 수 있게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오늘날 인도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아쇼카 왕의 석주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전쟁에 의한 승리보다 자비에 의한 정복이 훨씬 훌륭한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이러이러한 선행을 행하였다 하여 스스로의 선한 점만을 보려고 하며, 자신이 저지른 악행과 자신이 지니고 있는 번뇌와 같은 나쁜점은 보려고 하지않는다."
선혜(善慧) 행자의 구도행(求道行)
“부처님, 진흙을 밟지 마시고 부디 제 머리털과 몸을 마치 마니구슬의 판자로 된 다리를 밟는다 생각하시고 지나가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저에게 영원한 이익이 되고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며 지극한 마음으로 큰 행원을 일으켰다.이 때에 연등부처님께서 선혜 행자를 향하여 찬탄하셨다.
“장하다 선혜여! 그대의 보리심은 참으로 갸륵하구나. 이같이 지극한 공덕으로 그대 오는 세상에 결정코 부처되리니, 그 이름을 석가모니라 부르리라.”면서 선혜 행자를 칭찬하신 뒤에 꽃을 공양하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며 예를 마치신 뒤에 떠났다.
설산동자의 구법
설산동자는 雪山大士(설산대사)라고도 하는데, 석가모니불이 아득한 과거세에 菩薩因行(보살인행) 할 때의 동자로 눈 쌓인 산에서 수행하던 시절의 이름이다. 설산동자는 오로지 해탈의 도를 구하기 위해서 가족도 부귀영화도 모두 버리고 설산에서 고행을 하고 있었다.
이 偈頌(게송)을 들은 설산동자의 마음은 비길대 없이 기쁘고 환희로왔으며 깨달음의 등불이 바로 눈앞에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고행을 하던 설산동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금 게송을 설한 분은 누구입니까?]하고 주위를 살펴봤다. 그러나 거기에는 무서운 나찰 이외에는 아무도 다른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설산동자는 나찰에게 물었다.
[지금 게송의 반을 읊은 자가 바로 그대인가?] [그렇다.]
[그대는 어디서 과거 부처님이 설 하신 반게를 들었는가? 나에게 그 나머지 반도 마저 들려주기 바란다. 만일 나를 위해서 게송의 전부를 들려준다면 나는 평생 그대의 제자가 되리다.][그대, 바라문이여! 그렇게 물어봐도 아무 소용이 없단다. 나는 벌써 며칠이나 굶어 허기에 지쳐서 말을 할 기력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대가 먹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묻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단지 사람들을 무섭게 할뿐이니까.] [여기에는 너와 나밖에 없으니 어서 말해 보아라.]
[정 그렇다면 말하지. 내가 먹는 것은 오직 사람의 살이고, 마시는 것은 사람의 피다.] 설산동자는 한참동안 생각하였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좋다. 그렇다면 그 뒤에 나머지 게송을 마저 들려다오. 그 반게를 듣기만 한다면 나는 이 몸뚱이를 기꺼이 그대의 먹이로 바치리라.]
[어리석도다. 그대는 겨우 8자의 게송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려 하는가?]
[참말로 그대는 무지하구나! 옹기 그릇을 깨고 금 그릇을 얻는다면 누구라도 기꺼이 옹기그릇을 깰 것이다. 무상한 이 몸을 버리고 金剛身(금강신)을 얻으려는 것이니 게송의 나머지 반을 들어서 깨달음을 얻는다면 아무런 후회도 미련도 없다. 어서 나머지 반게송이나 들려 다오.] 나찰은 지긋이 눈을 감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나머지 반게를 읊었다.
[生滅滅已(생멸멸이)이면 寂滅爲樂(적멸위락)이니라.]
나머지 반게를 읊은 나찰은 지체 없이 설산동자의 몸을 요구하였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설산동자는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대로 죽으면 세상 사람들이 이 귀중한 진리를 알 수 없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諸行無常(제행무상) 是生滅法(시생멸법) 生滅滅已(생멸멸이) 寂滅爲樂(적멸위락)]이라는 게송을 세상 사람들에게 남기려고 결심을 했다. 그래서 바위나 돌, 나무, 길 등에 이 게송을 많이 썼다. 그리고 높은 바위 위로 올라가서 나찰이 있는 곳을 향해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설산동자의 몸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나찰은 다시 제석천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커다란 손으로 설산동자를 받아 고이 땅위에 내려 놓았다. 그리하여 제석천을 비롯하여 모든 천상의 사람들은 설산동자 발 아래에 엎드려 찬미하였다.
諸行無常(제행무상)....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 무엇이든 항상함이 없도다.
是生滅法(시생멸법).... 이것이 생멸하는 우주만물 속에 내재해 있는 진정한 법칙이다.
生滅滅已(생멸멸이).... 그러므로 생하고 멸하는 것 마저 이미 멸해버린다면
寂滅爲樂(적멸위락).... 고요하고 고요한 진정한 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되리라.
목탁의 유래
스승이 깊은 선정(禪定)에 잠겨 고기의 전생을 살펴보니, 이는 바로 병들어 일찍 죽은 자기 제자가 방탕한 생활의 과보(果報)로 물고기로 태어나 고통받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를 알고 가엾은 생각이 들어 수륙천도재(水陸薦度齋)를 베풀어 고기의 몸을 벗게 하여 주었습니다. 그날 밤 스승의 꿈에 제자가 나타나서 스승의 큰 은혜를 감사해하며 다음생에는 참으로 발심하여 공부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등에 있는 나무를 베어 고기 모양을 만들어 부처님 앞에 두고 쳐주기를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고, 강이나 바다의 물고기들은 해탈할 좋은 인연이 될 것이란 말입니다.이렇게 해서 고기 등에 자라난 나무를 베어 고기 모양의 목어(木漁)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차츰 쓰기에 편리한 목탁(木鐸)으로 변형되어, 예불이나 독경을 할 때 혹은 때를 알릴 때에도 사용하며, 그밖의 여러 행사에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일설에는 고기는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자므로 수행자도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해야 불도(佛道)를 성취한다는 뜻에서 고기 모양의 목어를 만들어 아침 저녁으로 치게하였다고 합니다.
<세조와 문수동자>
그러나 그 후 단종의 복위운동을 했다하여 성삼문 등 사육신을 무참하게 죽이고 영월 청령포에 유배됐던 단종 마저 사약을 내려 죽이고 말았다. 이러한 그의 비인간적인 행동은 세인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왕권강화와 학문 장려 등의 정책을 펴 나갔지만 어린 조카와 많은 신하들을 죽인 것을 인하여 항상 불안감과 죄의식 속에서 생활하였다.
어느날 밤 꿈에 단종의 어머니이며 문종의 아내되는 형수가 나타나서 세조를 호되게 꾸짖다가 "에이 못된 것! 어린 조카를 죽이다니! 조카의 자리가 그렇게도 탐이 났더냐? 에이! 더러워라"하면서 세조의 얼굴에 침을 탁 뱉었다. 그 후 세조는 꿈 속에서 침에 맞은 곳에 종기가 나기 시작하더니 온 몸에 퍼져서 결국은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고 온갖 좋다는 약을 다 써보고 각지의 온천과 약수를 찾아 다녀 보았으나 효과를 볼 수 없었던 차에 마침내 오대산 상원사를 찾아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면서 병치료와 속죄를 하게 되었다.
하루는 세조가 상원사에서 500m쯤 떨어진 관대거리에 나가 관대와 띠를 풀고 맑은 계곡 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하는데 아무리 씻어도 가려움증이 가시자 않아 길가에 한 소필승(동자)이 나타나기에 "얘 너 이리 와 내 등을 좀 밀어 줄 수 있겠니?
"하니 사마승이 "예 그러지요."하고 대답을 한 후 한참 등을 밀어주자 가려움증이 씻은 듯이 가시며 몸이 날 것만 같아졌다.
목욕을 끝낸 후 세조가 "참 그놈 기특하다만 어디 가든지 임금의 등을 밀어 주었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하자
사마승이 "예. 그러나 대왕께서도 다른 사람에게 문수동자가 와서 등을 밀어주었다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하고는 몇 걸음 걷더니 사라져 버렸다. 그러고 나서부터 몸의 병이 점차 씻은 듯이 낫자 세조는 동자를 찾기 위해 상원사 뿐 아니라 오대산 전 암자를 뒤졌지만 끝내 그 동자를 찾을 수 없었다. 세조는 그제서야 자기의 병이 나은게 약효나 우연이 아니라 오직 부처님의 힘인 것을 알고 등을 밀어준 사미승이 다름이 아닌 문수동자의 화신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세조는 즉시 이름난 화공을 불러 자신이 보았던 문수동자의 모습을 자세히 설명하고 화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두 번을 그려도 모양이 같지 않더니 세 번째에 가셔야 겨우 자신이 본 문수동자와 비슷하였다. 이렇게 그려진 문수동자상은 상원사에 받들어 모시고 강릉 신석평 7백석지기를 하사하여 문수동자상에 매일 불공을 드리도록 했다고 하는데 지금 문수동자의 화상은 없어졌고 본당의 오른쪽에 목각 문수동자상이 모셔져 있다.
한산습득도
한산은 국천사 뒤에 있는 寒巖(한암)이라는 굴속에 살았으며, 항상 다 해어진 옷을 입고, 커다란 나막신을 덜덜 끌며, 식사 때가 되면 국청사에 와서 대중들이 먹다 남은 밥찍기나 나물들을 얻어먹었다. 가끔씩 절 경내를 거닐기도 하고 하늘을 보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욕을 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절에 스님들이 작대기로 그를 쫓아냈는데, 그러면 한산은 큰 소리로 웃으며 손뼉을 치며 가버렸다고 한다.
습득은 풍간스님이 길에서 주어 왔다고 습득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국청사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 일을 하였다. 그러다가 남은 밥이나 나물이 있으면, 소쿠리에 모아 두었다가 한산에게 주곤를 하였다.
그 시절 여구윤이라는 사람이 그 고을 자사로 부임해 왔는데,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중병에 걸려 어떤 약을 써도 낳지 않고 백약이 무효하여 곧 죽게 되었다. 이를 안 풍간이가 자사를 찾아가서, 병세를 듣고, 그릇에 깨끗한 물을 받아놓고 주문을 외우니 자사의 병은 씻은 듯이 낳아버렸다.
자사가 깊이 감사하고 설법을 청하니「나보다 문수와 보현이 있으니, 그들에게 청하여 보시오.」하였다.
「두분 보살님은 어디 계시는지요.」
「국청사 부엌에서 그릇을 씻고 불을 때는 한산과 습득이 바로 그 보살입니다. 」
자사는 예물을 갖고 국청사로 한산과 습득을 찾아가니, 한산과 습득은 화롯불을 쬐며, 앉아 웃고 있었다. 자사가 그들 가까이 가서 절을 올리자, 그들은 무턱대고 꾸짖기만 하였다.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다른 스님들이 깜짝 놀라 「대관께서는 어찌하여 이 미치광이에게 절을 하십니까?] 하였다.
그러나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산은, 「풍간이 실없는 소리를 하였군. 풍간이 바로 아미타불인 줄 모르고 우리를 찾아오면 뭘하나.」
이 말을 남기고 한산은 됫산 굴속으로 들어간 다음, 다시 절에 오는 일이 없었다. 습득도 뒤따라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여구윤은 성인을 만나고서도, 더 많은 법문을 들을 수 없었던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리하여 숲 속 나뭇잎이나 바위에 써 놓은 세분의 시를 모으니 모두 삼백수나 되었다.
그 시 속에 세분의 고결한 가르침이 잘 담겨 있었다.
다음 寒山(한산)이 남긴 시 한 수를 읽어보면, 寒山(한산)이 어떠한 사람인지 더욱 잘 알 수 있다.
사람들이 한산을 보고 말한다.
미친 사람이라고 얼굴은 세상의 눈을 끌지 않고 몸엔 다만 베옷을 걸쳤을 뿐 내 말은 납이 모르고 남의 말은 내가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알린다
왕래하는 자는 한산에 가볼 것이라고‥‥‥
오늘은 이 절 내일은 저 절, 절간 수챗구멍에 흩어진 나물가지, 밥 그룻에 붙은 밥티를 그 대통에 담아 그것으로 연명하면서도 부족함이 없고 항상 즐겁기만 한 그들이었다. 한산과 습득이 서로 만나면 손뼉 치고 노래하며 하늘을 보고 웃는다. 개구리를 만나면 놀려주고, 호랑이를 만나면 겁도 없이 때려준다. 무상도 잊고 열반도 잊었던 사람들! 그들의 웃음 속에 지금도 아름다운 菩提(보리)의 꽃이 핀다. 한산의 시 한 수 더 읊어본다.
지저귀는 새 소리에 정을 못 이겨 혼자 草庵(초암)에 누워 듣고 있나니
앵두는 알알이 붉어 빛나고 버들은 줄줄이 드리워 있네
아침햇빛은 푸른 산을 머금고 개는 구름은 맑은 못을 씻는다.
누가 저 티끌 세상 능히 벗어나 이 한산 남쪽으로 올라 올 줄 알련고!
혜가 단비도
중국 당대에 형성된 선종은 근원적인 본래심(本來心) 즉 불성(佛性)을 자각하고 그 지혜와 덕성을 일상 속에서 완성하고 전개하였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장 본질 적인 가르침이 선
(禪)수행이라고 여겼기에 이 전승의 출발은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시작한다. 첫번째 조사는 가섭 존자이며 두 번째는 아난 존자이다. 이후 27조 반야다라 존자를 잇는 28조가 바로 달마(達磨) 대사이다.
남인도 향지국의 태자였던 달마 대사는 인도 28조이면서 중국 초조(初祖)가 된다. 그로부터 2조 혜가(慧可) 대사, 3조 승찬(僧璨) 대사, 4조 도신(道信) 대사, 5조 홍인(弘忍) 대사에 이르렀고, 홍인에게서 6조인 혜능(慧能) 대사가 나왔다. 그래서 서천(西天) 28조와 동토(東土) 6조를 합쳐 33조사를 헤아리고, 이를 지혜의 등불을 잇는 전등(傳燈)의 정통으로 삼는 전통이 생겨났다. 이제 벽화를 보자.
혜가단비도(慧可斷臂圖:팔을 잘라 도를 구하다)
대사의 말없는 교화가 9년째이던 어느 해 엄동설한에 유불선(儒佛仙)의 이치를 통달한 신광(神光)이라는 스님이 찾아와 법의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러나 대사는 면벽한 채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신광은 춥고 눈내리는 긴 겨울밤을 인내로 지세웠다. 그러나 대사는 하룻밤의 얄팍한 덕으로 큰 지혜를 얻고자 하느냐며 꾸짓자 신광은 칼을 빼어 왼쪽 팔을 잘라 구도 결심의 척도를 보였다.
이에 땅에서 파초잎이 솟아나 팔을 받쳤고 대사는 신광의 입문(入門)을 허락하여 혜가(慧可)라 하였다. 혜가는 달마 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중국 선종의 제2대 조사가 되었다. 혜가단비도는 벽화 뿐만 아니라 예로 부터 회화의 소재로 많이 그려지기도 하였는데, 어느 것이나 위의 내용을 사실적이고 인상적으로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육조도정도(六祖搗精圖:혜능이 방아를 찧다)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 몸은 깨달음의 나무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 마음은 밝은 거울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 언제나 털고 닦아
勿使若塵埃(물사약진애) 먼지 묻지 않도록 하리
이 시를 본 혜능대사는 그 옆에 다음과 같은 게송을 적어 놓았다.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 菩提(보리)라는 나무는 본래 없고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 명경도 또한 대가 아닐세
本來一無物(본래일무물)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何處惹塵埃(하처야진애) 어느 곳에 티끌이 일어나리요
이 게송을 본 오조 스님은 혜능스님의 공부가 이미 도통경지에 들어갔음을 알고, 남의 눈을 피해 몰래 방아간에서 방아를 찧고 있는 육조 혜능을 찾아갔다. 그리고 쌀을 찧고 있는 혜능을 보고
[쌀은 다 찧었느냐?] ( 공부는 다 되었는가 하는 뜻)하니,
혜능은
[쌀은 다 찧었는데 아직 키질을 못했습니다.] (공부는 다 되었으나 아직 印可(인가)를 못 받았습니다 라는 뜻) 라고 대답하였다.
오조스님은 돌연 지팡이로 방아머리를 탁, 탁, 탁, 세번 치고 뒷짐을 지고 묵묵히 돌아 가버렸다. 혜능은 선듯 그 뜻을 알아들었는데, 지팡이로 방아를 세번 친 것은 밤 三更(삼경)을 뜻하는 것이요, 뒷짐을 지고 가신 것은 뒷문으로 오라는 의미 였다.
그날 밤 삼경에 조실 방에 가니, 그곳에서는 병풍이 돌려 있고 그 병풍 뒤에 앉아서 오조스님으로부터 법통을 이어 받았다.
그리하여 六祖(육조) 慧能禪師(혜능선사)는 양자강 이남에서 禪宗(선종)을 크게 선양해서 南宗(남종)의 조종이 되었다.
무착선사 이야기
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없이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무착은 문수보살을 직접 뵙고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더욱 정진하여 마침내 앙산(仰山) 선사의 법을 받아 깨치고 대자유인이 되었다. 어느 해 겨울, 무착 스님이 동지팥죽을 쑤는데 김이 나는 죽 속에서 문수보살의 모습이 거룩하고 장엄하게 나타났다. 그러자 무착 스님은 팥죽 젓던 주걱으로 사정없이 후려쳤다. 문수보살은 “내가 바로 자네가 그리도 만나고자 했던 문수라네 문수!” 하니 무착스님은 “문수는 문수고 무착은 무착이다. 석가나 미륵이 나타날지라도 내 주걱 맛을 보여주겠다.” 하니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무착 스님이 깨닫기 전엔 원불(願佛)로 모시고 친견코자 하였으나 깨달은 뒤에는 오히려 호령을 하며 주걱으로 갈긴 것이다.
구정선사 이야기>
비단을 팔아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비단장수 청년이 있었다.
궁금하게 여긴 비단장수 청년이 노스님에게 다가가서
『대사님께서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하고 묻자,
노스님께서 자비로운 미소를 띄우시며『잠시 중생들에게 공양을 시키고 있는 중이네.』
이 말을 듣고 더욱 궁금해진 비단장수 청년이
『어떤 중생들에게 무슨 공양을 베푸십니까?』하고 재차 묻자
『내가 움직이면 옷 속에 있는 이나 벼룩이 피를 빨아 먹기 불편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내가 잠시 꼼짝 않고 서있는 것이라네.』
이 말을 들은 청년은 큰 감동을 받았다. 갑자기 세속의 생활이 하찮게 느껴지고 자기도 노스님의 제자가 되어 수도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다.
한번 마음이 굳어지자 비단보퉁이도 팽개쳐 버리고 산길을 오르는 노스님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비단장수 청년은 노스님의 뒤를 따라 오대산의 동대관음암이라는 곳에까지 오게 되었다.
『저는 비단을 팔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노스님의 인자하신 용모와 거동에 마음이 끌려 문득 저도 노스님을 따라 수도하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쫓아왔습니다. 부디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다.
『네가 중이되겠다고?그렇다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겠느냐?』하고 물었다.
『예!스님께서 시키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습니다.』하는 다짐을 받고서야 겨우 출가를 허락받았다. 그 다음날부터 노스님께서는 새로 들어온 행자에게 인욕과 하심을 가르쳐 주기 위한 방편으로 부엌에 커다란 가마솥을 옮겨 거는 일을 지시하셨다.
비단장수하던 청년이 노스님께서 시키는 대로 흙을 파다 짚을 섞어 이기고 솥을 부엌에 걸어 마쳤을 때는 벌써 한 낮도 기울고 있었다.부엌에 들어와 솥 걸어 놓은 것을 보신 노스님께서는 『솥은 잘 걸었다만 이쪽은 필요가 없겠으니 저쪽 아궁이로 옮겨 걸도록하여라.』하고서는 나가 버리셨다.
청년은 다음날도 일찍부터 어제 정성스레 걸어놓은 솥을 다시 떼어 옆의 아궁이에 다시 정성을 다하여 옮기고 잔손질까지 다 마쳤을 때 노스님께서 다시 들어 오시더니 화난 목소리로 『이놈!이게 솥 걸어 놓은거냐? 한쪽으로 틀어졌으니 다시 걸도록 하여라.』하고는 짚고 있던 석장으로 솥을 밀어내어 내려 앉혀 놓고 말았다.
청년이 보기에는 틀어진 곳이 없었지만 다시 하라는 분부에 한 마디 불평도 없이 묵묵히 시키는 대로 다시 할 뿐이었다. 이렇게 하여 솥을 걸고 허물어뜨리기를 9번을 반복하였다.
드디어 노스님께서도 구도심을 인정하시고 솥을 아홉 번 고쳐 걸었다는 뜻에서 구정(九鼎)이라 법명을 내리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구정은 뒷날 크게 수행하여 명성을 떨친 구정선사가 되었다.
<조과선사와 백낙천>
당시 항주의 진망산에 도림(道林)이라는 덕망 높은 스님이 계셨는데 이 스님께서는 항상 산중의 나무가지에 앉아서 좌선을 하고 있어서 마치 새의 둥지처럼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조과선사 또는 작소선사라고들 하였다. 때마침 백낙천이 그곳을 지나다가 선사를 보고
"아니 상관하지 마시오. 위험한 것은 오히려 당신이구려."하고 말했다.
백낙천은 "나는 위험한 곳에 있지 않습니다."라고 하니까,
선사는 "당신의 마음은 마치 나무섶에 불이 붙어 활활 타고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백낙천은 그만 화가 나서 "그렇다면 묻겠는데 불교의 극치는 무엇인가 ?"라고 물으니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이라고 답했다.
해석하면 여러 가지 착한 일을 행하고 악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 이것이 바로 불교의 궁극적인 참뜻이란 말이다. 그런데 백낙천은 또 "그런 것쯤은 세 살 먹은 아이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하고 말하니, 선사께서는 "세 살 먹은 아이들이 알고 있더라도 팔십 노인도 그것을 행(行)할 수 없는 것이다."고 답했다.
<관음보살의 전생>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느날 저녁, 새어머니는 사공과 짜고 바다 위에서 아버지가 기다린다며 아이들을 조각배에 태워 바다에 띄워 보냈다. 잠자다가 엉겁결에 조각배에 타게 된 조이와 속이는 어느 정도 나아가다가 번개와 태풍을 만나 부등켜 안고 춥고 무서워 어머니를 부르며 울어댔지만, 아무도 구 주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의하여 야속하게도 조각배는 뒤집혀져 바다 속으로 침몰하게 되었다.
한편 새어머니는사공과 정을 통하고 바다에 빠진 아들들을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조이와 속이는 정신을 잃은 채 파도에 쉽쓸려 어느 무인도에 당도하게 되었다. 무인도에서 얼마를 지내고 생활하던 추운 어느날, 조이는 굶주림에 지쳐 울면서 서원했다. "속이야, 이제 우리 목숨이 다 된 것 같다. 살 려해도 살 수 없는 우리 신세가 가련하다. 그러나 세상에는 우리와 같은 신세를 가진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와 같이 부모형제를 잃고 기한에 떠는 자, 벗이 그리워 애통한 자, 풍랑에 쉽싸여 고생하는 자, 독충 악귀에 시달려 고난이 많은 자, 부처님을 만나지 못해 해탈을 얻지 못한 자, 그런 자들을 위해서 우리는 이 산의 신 (神)이 되어서 그들에게 알맞는 몸을 나투어 구제해 주자. " 하고 그들은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찢어진 옷자락에 이 같은 32응신의 서원을 써서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죽었다.
한편 장나장자는 안나라산에서 무역을 하여 많은 돈을 벌어 집에 돌아오게 되었으나 아이들이 없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부인에게 물으니
"아버지를 찾으러 바다에 나갔다 돌아오지 않았어요. 사람을 풀어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장나장자는 미친듯이 직접 배를 몰아 사방으로 찾으러 다녔다. 그렇게 오랫동안 찾아 헤맨 끝에 무인도에서 아이들의 해골을 발견하고, 또 아이들이 써놓은 서원을 읽고는 까무러쳤다가 다시 깨어났다. 장나장자는 아이들과 같이 구도심을 발하여
'원컨데 나도 모든 악한 중생을 제도하고 조속히 불도를 이루어지이다'하고 서원을 세웠다.
그뒤 조이는 인도 바라문교의 신노파(神奴派) 여신이 되어 백성을 수호하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불교에 귀의하여 관세음보살이 되었다. 동생 속이는 대세지보살이 되었고, 후처는 제바달타(불교교단을 분열시키려 했던 배반자)의 전신이었으며 장나장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었다.
성주사 33계단
1,삼학(3계단)
1)계,(계율): 불살생, 불투도,불음행,불망어,불음주
2)정(선정): 마음을 한곳으로 집중시키는 법을 닦는 선정.
3)혜(지혜):사성제를 관하여 번뇌를 끊는 무루의 경지
2, 사성제(4계단)
1,고성제:모든 존재는 고통스러운것.
2)집성제: 이 고통은 어디서 일어 나는가?
3) 멸성제: 무명과 갈애를 제거하여 멸한 상태.
4)도성제:멸에 이르기 위한 방법.
3. 육바라밀(6계단)
1)보시:조건없이 배풀고
2)지계: 어김없이 지키며
3)인욕: 어려움을 참고
4)정진: 끊임없이 노력하며
5)선정: 고요히 생각하여
6)지혜: 수행으로 반야를 득함.
4, 팔정도(8계단):사성제를 이루기 의한 바른 길.
1) 정견:편견없이 바로 보는 것.
3)정어: 바른 말.
4)정업: 바른 행동.
5)정명: 바른 생활.
6)정진: 바른 노력.
7)정념:바른 마음의 수행.
8)정정: 바른 집중.
5,12연기(12계단)
1) 무명: 연기의 근본 원인, 진리에의 무지,무아나 연기의 이치를 모르는 것.
2)행: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모든 행동을 뜻하며 무명이 끊임없이 활동하는 상태.
3)식:인식작용을 뜻하며 행위의 원동력이 된다.
4)명색: 분별의식에 의해 일체의 존재가 나타남, 명(정신세계), 색(물질세계)
5)육입:눈,귀,코,입,몸,의식의 여섯가지 감각 기관,감각과 지각의 능력을 의미.
6)촉: 육입이 빗깔,소리,냄새,맛,몸의 촉감,의식 육경에 접촉하는 상태.
7)수:접촉한 결과로 즐겁고,괴롭고,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8)애:고통을 피하고 즐거움만 추구하는 욕망,애착,열망,갈애.
9)취: 애에 의하여 추구된 대상을 버리는 실제행동.
10)유:애와 취로 인하여 업을 짓는 것.
11)생:업의 인연으로 미래의 생을 받게 되는 것.
12)노사:생의 현실로 마침내 늙고 병들어 죽음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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