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6 1940년 ∼ 해방 전
2. 개화기의 연극 - 국민극 시대
3. 1910년대의 연극 7. 해방공간의 연극
1. 신파극 시대 8. 1950년대의 연극
2. 창작희곡의 등장 9. 1960년대의 연극
4. 1920년대의 연극 10. 1970년대의 연극
1. 학생극운동 1. 전통극 운동
2. 토월회의 연극 2. 실험극 운동
3. 신극 운동 11. 맺는 말
⑴ 신극 운동론
⑵ 신극 작품
4. 프롤레타리아 연극 운동
5. 1930년대의 연극
1. 신극
2. 프롤레타리아 연극
3. 대중극
한국 연극사
- 차 례 -
Ⅰ. 들어가는 말 Ⅵ. 1940년 ~ 해방 전
Ⅱ. 개화기의 연극 - 국민극 시대
Ⅲ. 1910년대의 연극 Ⅶ. 해방공간의 연극
1. 신파극 시대 Ⅷ. 1950년대의 연극
2. 창작희곡의 등장 Ⅸ. 1960년대의 연극
Ⅳ. 1920년대의 연극 Ⅹ. 1970년대의 연극
1. 학생극운동 1. 전통극 운동
2. 토월회의 연극 2. 실험극 운동
3. 신극 운동 Ⅻ. 맺는 말
⑴ 신극 운동론
⑵ 신극 작품
4. 프롤레타리아 연극 운동
Ⅴ. 1930년대의 연극
1. 신극
2. 프롤레타리아 연극
3. 대중극
Ⅰ. 들어가는 말
본고는 개화기부터 1970년대까지의 한국 연극사의 흐름을 살펴 보고자 한다. 한국 연극사의 흐름을 살펴봄으로써 연극사에 대한 통시적 고찰을 수행함과 동시에, 나아가 전문적이고 세분화된 연구과제를 검토해 보고자 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연극사의 시기 구분은 논자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본고는 편의상 신문학사의 경우와 같이 10년을 단위로 하여 각 시기의 연극 및 비평활동, 그리고 희곡작품에 대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1940년대의 경우는 해방을 전후로 하여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그 변화가 확연하므로, 해방 전․후의 두 시기로 나누어 살펴 보겠다.
본고는 따로 참고문헌을 정리하지 않는다. 각주를 참고하여 주길 바란다.
Ⅱ. 개화기의 연극
개화기의 연극은 사회적인 변화로부터 시작되었다. 주변 강대국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청국인과 일본인이 다량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고, 더불어 그들의 연희도 함께 유입되었다. 또한 쏟아져 들어온 서양의 새로운 문물도 대중을 자극하게 된다. 이러한 외적 변화는 연극의 흐름을 바꿔놓기 시작하는데, 옥내 극장의 출현과 창극의 발전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옥내극장은, 자료상 정확한 연대를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19C말 즈음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 「황성신문」 1899.4.3.참고
으로 보인다. 아현 무동 연희장, 용산 무동 연희장, 광무대, 단성사, 연흥사, 장한사 등이 그것으로, 공연만을 위한 극장은 아니었고, 이러한 극장들은 그 규모나 시설에 있어서 보잘 것이 없어 연극발전에 큰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1902년 여름, 황실극장인 협률사의 등장은 한국연극사에 중요한 변화 그 변화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연극은 실내에서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뿌리내림.
② 연극의 중앙집중화가 이루어짐.
③ 연극이 전문화의 길로 접어듬.
차범석 外 共著, 「한국 희곡론」, 한국방송통신대학(1991), p.116
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협률사에서는 판소리, 가면극 등의 전통극을 공연하였다. 협률사는 일본극을 모방할 것을 강요하는 일제의 탄압과, 풍기가 문란해짐을 이유로 폐지를 요구했던 지식인들에 의해 폐관된다.
1908년 같은 자리에 원각사가 들어서게 되는데, 이는 민간주도의 첫 극장이라는 의의가 있다. 원각사는 신연극을 표방하면서 이인직의 <은세계>를 공연하였다. <은세계>의 형식은 창극으로 이전의 판소리 다섯마당을 각색한 창극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창작창극이었기 때문에 늘 같은 내용에 식상해 있던 관객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은세계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최원식의 「은세계연구」, ꡔ민족문학의 이론ꡕ (창작과 비평사) 를 참고할 것.
창극은 계속되는 일제의 탄압으로 위축되었으며, 그런 가운데 일본 거류민을 따라 들어온 신파극이 일인 전용극장에서 활발히 공연되면서 우리 극계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10년대에 들어, 신파극은 우리 극계의 주류로 발전한다. 따라서 수백 년 동안 흘러온 재래의 전통극은 중앙무대를 잃고 변두리로 밀리면서 급속히 퇴조해 간다.
Ⅲ. 1910년대의 연극
1910년대는 일본에서 들어온 신파극 양식이 우리 극계를 주도했던 시기로, 일본 신파의 형식과 레파토리가 그대로 유입된다. 신파는 진부한 주제와 통속성으로 인하여 대중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한편, 이 시기에는 창작희곡이라 불릴 만한 작품들이 등장하는데, 형식에 있어 신파적 요소가 다분하며 그 주제에 있어서도 봉건성을 드러내고 있다.
1. 신파극 시대 신파극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다음을 참고할 것.
강영희, 「일제강점기 신파양식에 대한 연구」, 서울대 석사, 1989
김방옥, 「현대 연극사에 있어서의 신파극의 의미」 ꡔ이대어문논집ꡕ 6
서연호, 「한국 신파극에로의 접근」 ꡔ고대문화ꡕ 1968
______, 「한국 신파극연구」, 고려대 석사, 1969
한갑수, 「1910년대 극단사 연구」, 고려대 석사, 1988
신파극은 일본에서 발생, 성숙하여 한국에 유입된다. 따라서 그 레파토리도 일본의 신파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일본의 신파는 처음에는 정치극으로 시작되어 군사극, 탐정극, 가정비극으로 발전되었는데 우리나라에는 그 모두가 한꺼번에 수용되었다. 그 중 특히 인기를 모은 것은 가정비극이었다. 가정극들은 거의가 ‘통속적이고 봉건적인 의리 인정의 비극’으로, 전근대적인 유교 모랄을 긍정하며 권선징악을 그 주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신파는 당시 대중에게 정신적 자각은 커녕 퇴영과 안주에 빠지도록 하는 부정적 기능을 하였다. 유민영, 「신파극시대의 희곡」, ꡔ현대문학ꡕ (1988.9.) p.64-65
우리나라 최초의 신파극단은 1911년 12월에 조직된 임성구의 「혁신단」이다. 그는 곧바로 창립공연에 들어가 어성좌에서 <불효천벌>이라는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데, 이 작품도 역시 일본신파의 번안물이다. 「혁신단」의 두번째 작품 <육혈포 강도>는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였고, 임성구는 대중적 스타로 자리잡게 된다.
임성구 등에 이어 신파극에 가담한 사람은 이기세, 윤백남, 조일재 등의 인텔리층이었다. 그들은 동경에 유학하여 신파를 배운 사람들로 신파를 제대로 소개하고자 노력하였다. 윤백남은 이기세와 힘을 합쳐 「예성좌」를, 김정진과 함께 「민중극단」을 조직하여 연극현장에 몸담았으며, 동아일보(1920.5.4-16)에 「연극과 사회」라는 자신의 연극관을 담은 글을 발표하 는 등 연극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선구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는 30년대에 들어서는 극 예술연구회 창립동인으로 참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상 임성구 등의 신파와 크게 다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백남은 그의 평론, 「연극과 사회」 9회 (1920.5.15)에서 이를 밝히면서, 그 이유로 조선극 계 전반의 8가지 악조건을 지적한다.
2. 창작희곡의 등장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 희곡양식이라고 이름붙일 만한 문학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 최초의 창작희곡이 조일재의 <병자삼인> 조일재, <병자삼인>, ꡔ매일신보ꡕ 1912.11.16-25
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주제의식에 있어 진부하고 전근대적인 도덕관을 지니고 있으며, 형식에 있어서도 신파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병자삼인>은 희곡사나 연극사적 의미가 크지 못하며 다만 희곡문학이 불모일 때 발표되었다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유민영, 「신파시대의 희곡」, ꡔ현대문학ꡕ (1989.9) p.67
조일재와 같은 시기에 신파극을 주도했던 윤백남도 1910년대에 두 편의 희곡을 남겼다. 1918년을 전후해서 쓴 <국경>과 <운명> 두 편이 그것이다. 윤백남의 희곡에는 남성이 갖고 있는, 여성에 대한 전근대적이고 동양적인 모랄과 구습에 대한 비판이 함께 나타나 있다. 이는, 이 시기의 극작가들이 시대조류에 따라 서구적인 근대모랄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려 하면서도 의식저변에 깔려있는 유교적인 도덕관만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유민영, 위의 글, pp.65-69
이광수도 소설 <무정>을 쓸 무렵, 두 편의 희곡 <규한> 이광수, 「규한」, ꡔ학지광ꡕ 1917.1.
과 <순교자> 이광수, 「순교자」, 1920.
를 발표한다. <규한>은 자유연애사상을 담은 작품이고, 순교자는 그가 한 때 관심을 가졌던 천주교도들의 순교를 다룬 것이다.
그 밖에 1910년대 발표된 희곡에는 최승만의 <황혼> 최승만, 「황혼」, ꡔ창조ꡕ 1호 (1919.2)
, 유지영의 <이상적 결혼> 유지영, 「이상적 결혼」, ꡔ三光ꡕ 1호 (1919.2)
등이 있다.
1910년대에 희곡을 발표한 작가는 몇 명 되지 않으며, 작품도 수 편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작품의 주제도 진부하고, 전문적인 극작가로서의 의식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3․1운동을 계기로 하여 연극계 전체가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에 따라 희곡도 근대적인 면모를 갖추게 된다.
Ⅳ. 1920년대의 연극
3․1운동 이후의 연극에 대한 여론은 대체로 1910년대의 연극계를 비판․반성하면서 새로운 연극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에 치중되었고, 한편으로 언론기관을 통한 서구 근대극 소개활동이 본격화 된다. 근대극 역시 신파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1920년대로 들어서면서 우리의 극계는 일본의 근대극운동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신파에서 탈피하여 근대극을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이에 따라 신파와 구별되는 新劇 양승국은, 그의 논문 「1920~30년대 연극운동론 연구」 (서울대 박사, 1992) 서론에서 한국 연극사에 있어서의 ‘신극’의 개념에 대하여 자세히 논하고 있다.
이라는 용어가 대두된다. 서연호, 「한국근대희곡사연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p.97
20년대 연극의 주도 세력은 학생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일본에서 신극을 배워와 신파를 벗어난 근대극 개념을 정립하고자 신극운동을 전개한다. 그들은 신극운동론을 전개하는 한편, 신극을 무대 위에 실현하고자 노력한다. 학생극 운동의 한 갈래로 프로극 운동도 전개되는데, 구체적인 공연활동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1. 학생극 운동
1920년대 연극은 일종의 민족운동의 성격을 띤 계몽운동으로전개되었는데, 이러한 성격으로 대표될 수 있는 것이 학생극운동이다. 서연호, 위의 책, p.95
1920년 봄, 동경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극예술협회」는 근대극을 통한 학생극운동의 대표로, 주요 멤버는 김우진, 조명희, 유춘섭, 진장섭, 홍해성, 조춘광, 손봉원, 김영팔, 최승일 등의 20여명이다. 이들은 1921년, 동경 유학생과 노동자들의 모임인 동우회의 요청으로 하기방학을 맞아 귀국 순회공연을 전국에 걸쳐 하기 시작한다. 이들의 레파토리 중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은 조명희의 <김영일의 死>로, 이로 말미암아 한국연극사는 ‘근대극’의 출발을 다질 수 있게 된다. 임화는 <김영일의 사>에 대하여, ① 그 시대의 상황을 담은 창작극이라는 점 ② 신파조의 형식 을 탈각하였다는 점 ③ 이후 연극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근대극의 기치를 처음으로 올린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임화, 「조선근대극 발달과정」, ꡔ연극운동ꡕ 창간 준비호 (1932.5)
양승국, 앞의 글에서 재인용, pp.31-32
이와 때를 같이 하여(1921년 7월 - 9월) 학생들이 중심이 된 소인극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데, 「갈돕회」, 「송경학우회」, 「형설회」 등이 대표적이다. 1920년대에는 전국에 걸쳐 소인극운동이 활성화되는데, 학생극 중심의 소인극운동 외에도 종교단체, 애국운동을 벌이던 청년회 등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다. 소인극을 통한 민족계몽운동은 풍속개량이라든가 신교육 사상고취, 또는 종교를 통한 사회개선 등의 관념적 차원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물산장려나 기아구제, 수재민 구호사업 등의 실질적인 면으로 방향을 돌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학생과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소인극운동은 20년대 연극전반에 민족의식을 강하게 투사함으로써 연극을 단순한 오락이 아닌 사회 변혁의 기능으로 존재토록 하였다. 학생극운동과 소인극운동은 다음 논문을 참고로 하여 기술하였다.
김미도, 「1920년대 리얼리즘 연극 연구」, 고려대 석사, 1988
김재석, 「1920-30년대 사회극 연구」, 경북대 박사, 1992
양승국, 「1920-30년대 연극운동론 연구」, 서울대 박사, 1992
학생극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이후 계속적인 평론 활동과 희곡창작, 연출 등을 통해 전문 연극인으로 변모하며, 계속적으로 신극운동을 이끌어 나간다.
2. 토월회의 연극 토월회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다음의 글을 참고할 것.
박승희, 「토월회 이야기」, ꡔ사상계ꡕ 1963.5-6
문한성, 「토월회 연구」, 단국대 석사
20년대의 학생극운동은 연극의 완성도에 있어서 당대의 최고 수준을 이루고 있다.이러한 학생 중심의 소인극운동은 전문극단으로 발전하여 한국연극사에 뚜렷한 획을 그어놓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土月會」이다. 「토월회」는 박승희, 김기진, 김복진,박승목, 이서구, 김을한 등의 동경 유학생들이 1922년 5월에 조직한 친목회의 명칭이다. 양승국, 위의 글, p.36
이들은 1923년 7월 4일부터 조선극장에서 제1회 공연을 한다. 레파토리는 박승희의 <吉植>을 제외하고는 체홉, 버너드 쇼오, 유진 필롯 등의, 서양의 근대 단막극이었다. 「토월회」의 공연은 사실적인 무대장치와 자연스러운 대사, 신파의 티가 없는 스토리 등 청신한 맛을 느낄 수는 있었으나, 관객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격이 높은 작품을 선택한 것과 출연자의 연기력 미흡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김우진도 토월회 공연의 실패 원인을 그의 글 「우리 신극운동의 첫 길」에서 지적하면서, ‘관중을 만들 것’을 주장하고 있다. (ꡔ조선일보ꡕ 1926.5) , 김우진 전집Ⅱ, 전예원(1983)
「토월회」는 1924년 1월의 제3회 공연부터는 박승희를 중심으로 한 프로듀서 시스템을 갖추고 전문극단을 표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후의 공연은 상업극으로 변질되어 갔으며, 25년에 이르러서는 극단의 제도를 합자회사 체제로 만들고 극장 광무대를 전속으로 계약하여 완전한 흥행극단으로 변신한다. 토월회는 26년 일단 해산되었다가, 28년 10월 재기 공연을 가졌으나 신통치 않았다. 29년 11월에 다시 재기하여 박승희 작, <아리랑 고개>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으나 갈 수록 저질작품의 부실공연이 이루어져 결국 창립 9년만인 1931년에 다시 해체된다. 그후 토월회는 1932년부터 1936년 완전 해체될 때까지 태양극장이란 간판을 내걸고 전국을 유랑하며 신파극단으로 전락한다.
토월회는 학생극단으로 시작하여, 학생극 → 중간극 → 신파극의 세 단계의 길을 걸어간 극단이다. 문한성, 토월회 연구, 단국대 석사 p.ⅳ
토월회는 그 초기 활동을 통해 사실주의 무대를 시도하여 리얼리즘에 근접한 연극을 보여줌으로써, 20년대 연극계에 뚜렷한 성과를 남겼다.
3. 신극 운동 이 부분은 양승국의 전술한 논문과 김미도의 전술한 논문을 참고하였다.
⑴ 신극운동론
우리 연극사에서 1920년대 이전의 연극에 대한 이론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김미도, 앞의 글, p.35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론으로 알려져 있는 이광수의 「문학이란 何오」 매일신보, 1916.11.10-23
에 처음으로 초보적이나마 연극의 개념에 대하여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20년대에 들어서면, 실제공연현장에서의 ‘근대극운동’과 병행하여 근대극으로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연극이론들이 발표되는 양상을 보인다.
윤백남의 「연극과 사회 - 竝하야 조선현대극장을 논함」 동아일보, 1920.5.4-16
은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 연극론이다. 윤백남은 이 글에서 연극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특히 시대와 사회의 필연적 요청으로서 ‘민중극’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그의 연극에 대한 기본적 시각이 다분히 계몽적임을 알 수 있다.
윤백남의 계몽주의적인 연극이론은 현철에 이르러 더욱 분명해 진다. 현철은 일본에서 신극을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연극학교를 세우는 등, 초창기 근대극운동에 있어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특히 활발한 평론활동을 벌였는데, 「연극과 오인의 관계」 현철, ꡔ매일신보ꡕ, 1920.6.30-7.3
를 시작으로 「희곡의 개요」 현철, ꡔ개벽ꡕ, 1920.11-1921.2
,「현당극담」 현철, ꡔ조선일보ꡕ 1921.1.24-4.21
현철의 이 평론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의 50회(21.3.18)까지는 자신의 연극론 이고, 그 나머지는 이기세와의 ‘신파극 신극 논쟁’이다. 현철의 이상론적인 신극론과 이기세의 현실적인 신파극론이, 다분히 인신공격성을 띠고 감정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양승국, 앞의 글, pp.38-61 참고
,「문화사업의 급선무로 민중극을 제창하노라」 현철, ꡔ개벽ꡕ 1921.4
, 「극계로 본 우리의 민족운동」 현철, ꡔ동광ꡕ, 1927.1
이 글에서는 계몽주의적 연극관이 더욱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는데, 그는 연극을 ‘민족운동’의 방편으로 이용할 것을 주장하며 연극의 교훈성을 강조한다.
등 다수의 글 현철과 그 외 선구자적 연극인의 평론에 대하여는 양승국의 전술한 논문을 참고하시오.
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현철의 논리는 당시 극계의 현실에 미루어 볼 때 다분히 이상주의적이다. 또한 그의 논지 전개의 태도에 있어, 일본에서 정통으로 신극을 배웠다는 지나친 자부심으로 일관하고 있어, 그의 주장은 논리성을 잃고 감정에 치우쳐 있다.
현철의 논리가 다분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임에 비해, 김우진의 평론들은 훨씬 구체적이고 설득력있는 논지전개를 보여준다. 그의 최초의 평론 「소위 근대극에 대하야」 김우진, ꡔ학지광ꡕ, 1921.6 - 김우진 전집Ⅱ (pp.110-119)에 재수록
는 우리나라에서 ‘근대극’의 이론을 가장 먼저 소개한 글로, 논지의 탁월함과 문제의 핵심을 간파한 주장으로 분명한 의의를 갖는다. 이러한 논의가 더욱 구체화된 글이 홍해성과 공동집필한 「우리 신극운동의 첫 길」 ꡔ조선일보ꡕ, 1926.5
이다. 이 글은 한국 근대 연극비평사에서 유일하게 공동 집필의 형식을 취한 글이라는 점, 일본의 「축지소극장」의 활동을 묵도하고 얻은 나름의 실천방안이라는 점, 그리고 그 논의가 현실적이라는 점에서 연극사적 의의를 지닌다. 양승국, 앞의 글,pp.69-75
이들 20년대의 논의들은 당시에는 실제의 공연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활발한 이론의 전개는 당시 연극인들을 고무시켰고, 그 이론들을 實演으로 이어가려는 노력들도 보이게 된다. 그 예로 이기세와 현철의 ‘신파극 신극 논쟁’ 이후 이기세의 신파극 공연에는 확실히 변화가 생 겼던 것 같다.
현철, 「예술협회극단의 제1회 시연을 보고」, ꡔ개벽ꡕ 1921.11
⑵ 신극 작품
근대극 이론의 전개와 함께 근대극을 표방하는 희곡들이 창작되고 무대에 올려지기 시작한다.
1921년 동우회 극단의 전국 순회공연에서 인기를 끌었던 <김영일의 死>는 조명희가 정식으로 문단에 데뷰하기 전인 1920년 동경에서 문학수업을 하던 시기에 습작한 처녀작이다. 이 작품에는 자유와 평등, 박애의 추구, 관념적인 인도주의, 이상향의 추구,사회주의의 수용 등 조명희의 복잡한 생각들이 나타나 있다. 김미도, 앞의 글, pp.68-72
<김영일의 사>는 이후 연극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근대극의 씨를 뿌린’ 선구적 의의를 지닌다. 양승국, 앞의 논문, p.33-34
운정 김정진의 희곡은 비록 그 당대에는 상연되지 못하였으나, 그의 희곡들은 드라마투르기면에서 월등 차범석 外 共著, ꡔ한국희곡론ꡕ (방송통신대학, 1991) pp.139
하였으며 그 주제도 사회적인 문제들을 담고 있어 매우 돋보이는 것이었다. 그가 작가로 활동한 기간은 1924년 <기적불 때> 김정진, <기적불 때>, ꡔ폐허 이후ꡕ 1924.1
이 작품은 <김영일의 사>와 함께 경향적인 희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와 <십오분간> 김정진, <십오분간>, ꡔ개벽ꡕ43호, 1924.1
이 작품은 물질만능의 풍조를 꼬집은 사회풍자극으로, 드라마투르기상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연호는 이 작품을 가리켜 ‘당대에 보기 드문 수작’이라고 평가한다. (앞의 책, pp.152)
으로 데뷰한 후 약 10여 년 동안이었다. 운정은 일본에서 신문학을 수업하고 돌아온 이후, 1936년 작고할 때까지 언론인으로서 일생을 보냈다. 그는 윤백남이 주도하던 「민중극단」에 관여하였으며, 다수의 연극평을 남기기도 하였으나 연극인이나 문인으로는 그다지 각광을 받지 못한 것 같다. 현철은 ꡔ조광ꡕ 1권 제2호(1935.12)에 실린자신의 글 「조선의 극계도 이미 二十五年」에서,
‘조선의 극계를 위해 많은 관심으로 노력’하고 ‘애만 쓴 이’라고 운정을 평가하고 나서, 그러나 ‘공적도 없고 생색도 없는 희생자에 더욱이 가엾은 희생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서연호는 그의 논문, 「일제하의 희곡연구」 (고려대 박사, 1981)에서 운정을, 1920년대 누구보 다도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극작가로서 성공적인 一家를 이루었다고 할 수 는 없고, 그 나름의 다양한 실험을 계속하다가 생애를 마쳤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판이하게 다른 경향의 희극과 비극 <기적불 때>와 <십오분간>은 비슷한 시기(1924년 1월)에 발표되었다.
을 동일한 시기에 쓰는가 하면, 서양의 가극을 실험 <그립은 밤>, ꡔ개벽ꡕ44호, 1924.2
하고, 음향효과와 조명을 효과적으로 이용 <전변>, <찬우슴>, <그 사람들>에서는 음악, 푸른 빛의 조명, 청각적 효과들이 극의 분위기를 조 성하는데 있어 중요하게 다루어 지는데, 이는 당시의 다른 희곡과 비교하였을 때 주목할 만한 사 항이다.
하였으며, 삽화적인 구성을 시도 <약수풍경>, ꡔ현대조선문학전집ꡕ (조광사), 1938.10
하는 등 창조적이고 실험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의 이러한 창작의지는 높이 사야 할 것이다.
김우진의 희곡도 당대에 상연되지 않았음은 김정진의 경우와 같다. 그 당시의 조선극계의 현실을 생각해 볼 때, 김우진 자신도 그의 작품이 당대에 상연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그의 희곡은 모두 5편 <정오> ( ? ), <이영녀> (1925.9), <두더기 시인의 환멸>(1925.12), <난파>(1926.5), <산돼 지>(1926.7)
이 전해지는데,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25년 8월에 발표된 그의 평론 「창작을 권합내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 글에서 창작의 4가지 테마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의 작품은 모두 그것을 수렴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4가지 Theme와 해당 작품은 다음과 같다.
① 계급적으로 눈 뜰 필요가 긴박 : <정오>
② 윤리적으로 우리 주위의 모든 가치를 전환 : <두더기 시인의 환멸>, <난파>, <산돼지>
③ 연애․결혼․모성 등 여성의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다루어야 : <이영녀>
④ 인생 철학․생명․죽음․신․이상 등이 취급되어야 하는데, 이는 모두 절대적인 것이 아닌 사회적 생활 속에서 고려되는 문제이다. : <난파>, <산돼지>
김우진의 희곡에는 표현주의 색채가 강하며, 이은경, 「김우진 희곡작품 연구」, 숙명여대 석사, 1987
인습타파 등의 민족적 개혁의지가 보인다.
이 외의 20년대 작가로는 김유방, 최인준, 윤수봉, 홍사용 홍사용의 희곡에 대한 연구로는, 송재일 「露省 홍사용의 희곡에 관한 고찰」 ꡔ한국언어문학ꡕ 26호 를 참고할 것.
등과 카프 관련 작가들을 들 수 있다.
4. 프롤레타리아 연극 운동 이 부분에서 참고한 논문은 다음과 같다.
김성희, 「한국프로희곡연구」, 이화여대 석사, 1987
김재석, 「1920-30년대 사회극 연구」, 경북대 박사, 1992
박환용, 「프로희곡과 프로연극운동에 대한 비판적 고찰」, ꡔ한국언어문학ꡕ 25, 1987
손종훈, 「일제강점기의 프로희곡연구」, 계명대 박사, 1992
손화숙, 「1930년대 프로연극 연구」, 서울대 석사, 1990
윤여탁, 「1930년대 전반기 연극운동과 희곡의 한 양상」, ꡔ국어국문학ꡕ 97
신극운동의 초기인 1920년대에 계급의식을 자각한 사람들에 의한 연극운동이 전개되는데, 그 핵심은 역시 학생들이었다. 손종훈은 전술한 그의 논문에서 <김영일의 사>가 최초의 프로희곡이라는 위상을 지닌다고 하였 다. 그는 또, 기존에 사용되어 오던 ‘신경향파’, ‘경향파’라는 개념의 모호함을 들어 ‘초기 프로 희곡’ 이라고 지칭하겠다고 하였다. 이러한 ‘경향’이라는 개념의 문제점은 이미 김성희의 전술한
논문에서도 지적된 바 있다.
1922년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예술단체인 염군사가 조직되어 그 산하에 「염군」이라는 연극부를 두었다. 멤버들은 최승일, 송영, 김영팔, 심훈 등으로 공연을 올리지는 못하였다. 이후 1923년 말경에 김기진이 귀국하여 「파스큐라」를 조직하지만 역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25년 8월에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이 발족되면서 본격적인 계급주의 예술운동이 전개는데, 여기에는 세 명의 극작가 (김영팔, 송영, 이기영)가 참여하고 있다. 1927년 카프 연극부 소속의 김기진, 박영희, 김동환, 조명희, 안석주 등이 「불개미극단」을 조직하였으나 큰 활동은 하지 못한다. 20년대의 프로 연극은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으며, 30년대에야 활기를 띠고 본격적인 공연활동을 벌이게 된다. 따라서 20년대에 창작된 프로희곡은 김영팔과 송영을 중심으로 한 몇 작품에 불과하다.
김영팔은 프로문학의 맹장은 못되었고 다만 프로문학시대에 좌경했던 초창기 작가이다. 그는 1930년대 초에 경성방송국에 취직함과 동시에 카프에서 제명된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프로문학의 냄새를 짙게 풍기고 있어, 송영과 함께 프로극의 선구적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차범석 外, 앞의 책, p.147
그의 이러한 경향을 나타내는 작품으로 <싸움>, <불이야>, <부음>, <곱장칼>, <마작> <싸움>, ꡔ개벽ꡕ, 1926,3
<불이야>, ꡔ문예운동ꡕ, 1926.5
<부음>, ꡔ문예시대ꡕ, 1927.1
<곱장칼>, ꡔ조선지광ꡕ, 1929.1
<마작>, ꡔ삼천리ꡕ, 1931.10
등을 들 수 있다.
송영은 프로희곡의 선구적인 인물로 그의 초기 프로극에는 계급의식이 전면적으로 노출되고 있다. 그는 등장인물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눈 뒤, 지배계급의 타락상을 폭로하는 형식을 취한다. 그의 이러한 초기 프로극 송영의 초기 프로극으로는 <모긔가 없어지는 까닭>, <정의와 칸바스>, <아편장이>를 들 수 있다.
은 형식에 있어 많은 단점들이 보이는데, 이러한 성향은 30년대로 접어 들면서 풍자기법을 사용, 어느정도 극복된다. 전윤경, 「송영희곡연구」, 숙명여대 석사, 1993 pp.33-35
巴人 김동환은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극단에 관여하면서 희곡을 쓴 극작가이기도 했다. 그는 1927년에 발족한 「종합예술협회」의 일원으로 각본부에 속해 있었는데, 이 극단은 성격상 경향극단이었다. 그는 연극수련을 제대로 쌓지 못한 관계로 아마추어 극작가의 수준에 머물고 말았으나, 그의 이데올로기적 성향만은 매우 강렬하였다. 박환용, 앞의 글, p.189-190
그의 이러한 경향이 잘 나타난 작품에 <역천군>(1927)이 있다.
Ⅴ. 1930년대의 연극 1930년대에 대한 부분은 ꡔ한국연극학ꡕ 제5집에 실린, 김미도의 박사논문 초록을 기본틀로 하고 그 외의 글을 참고로 하였다.
1930년대는 해방전 연극사에 있어서 우리 무대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의 연극은 대략 3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우선 「극예술연구회」와 ‘일반 신극작가군’ 김재석은 그의 논문에서, 카프에도 극연에도 참가하지 않은 채 극작활동을 한 작가군을 ‘일반작 가군’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에 해당하는 작가는 가장 많은 작품을 발표한 채만식을 비롯하여 김상명, 김장석, 박서민, 유동맹 등이 있다.
을 중심으로 한 신극을 들 수 있다. 「극예술연구회」는 본격적인 근대극운동으로서 리얼리즘극이 자리를 잡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며, 많은 유능한 극작가를 배출한다. 한편, 「극연」계열의 작가군은 아니지만 역시 사실주의 연극을 추구해온 ‘일반 작가군’도 나름의 치열한 의식을 갖고 이를 작품에 투영하고자 노력한다.
다음으로 프롤레타리아 연극 프로극 역시 사실주의 양식을 지향했으나, 서로의 이념이나 실천과정이 확연히 구분됨으로 따로 언급한다.
김미도, 앞의 책 p.224
을 들 수 있다. 프로극은 카프의 선도 아래 사회주의 이념을 지향해 나간다. 카프는 제도권 안에서 합법적으로 극장공연을 실연하고자 노력 한다. 그러나 제도권 공연의 한계를 인식한 카프 내 일부 연극인은 소인극 운동에 전력할 것을 주장한다. 카프는 소인극 운동 외에도 슈프레히콜을 실험하는 등 나름의 노력과 꾸준한 모색을 한다.
마지막으로 대중극 김미도는 기존의 ‘흥행극’이나 ‘상업극’이 해당 연극 행위의 본질을 호도할 수 있다고 하여 대중 극이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대중극은 1910․20년대의 신파를 극복하고, 동양극장이라는 최초의 전문 공연장을 가짐으로써 기술적인 면에서 세련되게 발전해 나간다. 기술면에 있어 당대 어느 연극 부류에도 뒤지지 않았던 대중극은 이를 바탕으로 신극과 대중극의 조화를 모색하게 된다. 이것이 「중앙무대」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중간극 이론’이다.
1930년대에는 이 들 세 유형의 연극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변화하게 된다.
1. 신극
신극운동은 1930년대 들어서서 「극예술연구회」의 창립과 더불어서 본격화 되기 시작한다. 「극연」의 활동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해외문학파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시기(1931.7 - 1935.10)로 서양연극의 소개와 번역극 공연이 중심을 이룬다. 이 때의 중심인물은 홍해성, 이헌구, 김광섭 등으로, 이들은 우리에게는 연극 전통이 없음을 전제로 하여 서구 번역극의 수용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프로문학계로부터 소부르조아 지식계급의 예술지상주의라는 비난을 면치 못한다. 「극연」 1기의 활동은 아마추어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제2기는 유치진이 주도권을 잡은 시기(1935.11 - 1938.3)로 창작극 공연의 강화와 전문화 단계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기간은 「극연」의 통속화 과정이기도 하다. <토막>,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 등 사실주의적 작품을 창작하여 무대화하던 유치진은 그의 작품 <소>가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 고초를 겪은 후 점차 통속성과 타협을 해 나가게 된다. 「극연」은 <춘향전>, <카츄샤> 등 대중적 작품을 상연 작품으로 택하며, 공연장도 기존의 소극장 위주에서 흥행성을 고려한 대극장 위주로 전환한다. 이렇게 「극연」의 성격이 대중극과 별 구별이 없어지자 일부는 탈퇴하여 「중앙무대」로 간다. 「극연」은 계속되는 당국의 압력과 스스로의 통속화로 인해 1938년 해산한다.
제3기는 「극연좌」로 이름을 바꾸고 공연활동을 재개한 시기(1938 - 1939.5)로, 상업화가 더욱 노골화된다.
「극연」은 초기의 <토막>,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 등의 창작극을 시도한 점, 비록 실패하였지만 <소>의 공연을 시도한 것 등은 민족주의 연극의 지향을 보여 준 귀감으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또한 「극연」을 통하여 유치진을 비롯한 수많은 극작가가 배출되었다는 사실은 한국희곡사를 풍부하게 해 준 분명한 의의를 지닌다. 총 24회의 공연을 통하여 이 땅에 근대극의 개념으로서의 ‘신극운동’을 정착시키려한 「극연」의 공적도 높이 사야할 것이다. 양승국, 앞의 글 pp.166-167
극연계열의 대표적 작가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유치진 <토막>, <버드나무선 동리의 풍경>, <소>, <獸>
이광래 <촌선생>, <석류나무 집>
이서향 <제방을 넘은 곳>, <다리목>
한태천 <토성낭>
남궁 만 <청춘>
함세덕 <동승>, <낙화암>, <서글픈 재능>
30년대에, 극연에도 카프와도 관련을 맺지 않고 활동한 극작가를 일반작가군 이들에 대한 연구는 김재석의 전술한 논문에 자세히 되어있다. 본 글도 이를 참고로 하였다.
이라 부를 수 있다. 그 이유는 작가마다 다르겠지만, 대체적으로는 양편의 폐쇄성에 반발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 중 가장 대표적인 작가는 채만식으로, 그를 제외한 작가들의 작품 수가 많지 않음은 어느 조직에 속해 있지 않고서는 극작활동을 하기 어려웠던 당대의 사정 때문이다.
채만식은 <제향날>을 비롯하여 약 27편의 희곡 김숙현은 그의 논문 「채만식 연구」에서, 채만식의 희곡이 상연을 고려하지 않은 일종의 레제 드 라마라는 기존의 논의를 점검하여, 그가 매우 투철한 희곡관을 갖고 있었음과 나아가 우리 고전 판소리를 극 속에 수용하고자 노력했음을 밝히고 있다.
을 남기고 있다. 채만식의 작품은 당대에 상연되지는 않았으나, 그의 희곡에는 공연조건까지 명시된 경우가 많아 그가 현장에서의 공연을 기대하면서 창작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는 농촌문제를 다룬 희곡 이에 해당하는 작품은 다음과 같다. <간도행>, <부촌>, <죠고만한 기업가>, <미가 대폭락>, <농 촌 스케취> 등
과 노동자 문제를 드러낸 희곡 <밥>, <코떼인 지사>, <감독의 안해> 등
을 다수 남기고 있는데, 극연계열작가와는 달리 조합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카프계열의 작가들과 다른 점은 계급의식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계열에 속하는, 채만식 외의 작가와 작품으로는 김상명의 <봄> ꡔ신조선ꡕ, 1935.12.
, C생의 <농촌 스케취> ꡔ농민ꡕ, 1930.11
, <공사마당> ꡔ농민ꡕ, 1932.8.
, 김장석의 <정호의 죽엄> ꡔ조선일보ꡕ, 1933.1.8 - 1.11.
, 백효의 <맑아지는 시선> ꡔ농민ꡕ, 1931.9
, 유동맹의 <남어잇거라> ꡔ조선중앙일보ꡕ, 1933.1.11 - 1.18
등이 있다.
이들 일반작가군은 식민지 시대의 모순과 그 해결을 제시함에 있어 극연계열 작가보다 적극적이다. 그러나 작품의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는 극연작가군이나 프로작가군에 비해 뒤떨어진 느낌이 든다.
2. 프롤레타리아 연극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프롤레타리아 연극은 카프의 볼셰비키화에 영향을 받아 한층 활발하게 전개 프롤레타리아 연극의 조직과 활동은 김성희의 논문 「한국프로희곡연구」 (이화여대 석사,1987)에 정리되어 있다. pp.30-34
된다. 대구의 「가두극장」(1930. 이상춘 중심), 개성의 「대중극장」(1931. 민병휘 중심), 해주의 「연극공장」(1931. 송영 중심) 등이 조직되었으나 공연은 없었던 것 같다. 윤여탁, 「1930년대 전반기 연극운동과 희곡의 한 양상」, ꡔ국어국문학ꡕ 97, p111.
카프 산하의 대표적 극단은 「이동식 소극장」이다. 「이동식 소극장」은 1931년 8월 추완호, 김유영, 석일양, 이엽, 최정희 등이 「시대공론」에 모여 조직한 것으로 각본부에 이효석, 유진오 등이 있다. 이들은 1932년 6월 「메가폰」으로 개칭하였고, 1932년 7월에 다시 「신건설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계속적인 활동을 하였다. 「신건설사」는 기관지 ꡔ연극운동ꡕ을 발간하는 등 어려운 당시 상황에도 불구하고 연극을 통한 문화운동에 힘을 기울인다. 윤여탁, 위의 글, pp.111-112
카프의 ‘연극대중화’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지는데, 그 하나는 임화를 중심으로한 카프 중앙 문인의 입장으로, 카프의 지도하에 전국적인 프로극단을 연계하여 공연활동을 벌이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신고송을 비롯한 전문 연극인의 입장으로 검열하에서의 공연을 포기하고 소인극 운동에 힘을 기울이자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합법적 극장공연이 노동자․농민과는 거리가 있는 소부르조아 관객을 위한 공연이라는, 카프지도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민병휘에 의해 제시되었다. 신고송은 이를 더욱 심화시켜 카프 지도부가 소인극에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이에 대하여 카프의 지도부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다. 김재석, 앞의 글, pp.168-195
그 후 카프 지도부는 객관적 정세의 악화로 합법적 공연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소인극에로의 관심을 표명한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카프의 지도역량이 쇠진한 후여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신건설사 사건’ 1933년 3월, ‘ꡔ연극운동ꡕ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는 한편으로 신건설이라는 좌익연극단을 조직하여 적화를 기도’했다는 죄명으로 이상춘, 강윤희, 김태진, 양준영, 이필용, 김대균, 추정호 등 핵심 맴버 7명이 검거되는데, 이것이 다시 이듬해 대대적인 좌익 문인 및 연극인 검거사건으로 확대된 다. 이것이 속칭 ‘신건설사 사건’으로 80여명이 검거되고 박영희를 비롯한 22명이 기소되었다.
유민영, 「한국현대희곡사」, (기린원, 1991) pp.227-228
을 계기로 카프는 해산되고 만다.
만일 카프 지도부가 좀더 일찍부터 소인극운동에 관심을 보여 집중적 역량을 투여 했더라면, 카프 해산이후 프로극작가들이 상업극단으로 흡수되거나 연극계를 떠나지 않고서도 지속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해방이후의 진보적 연극운동이 소인극에 상당한 비중을 부여하고,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일제강점기하의 모색과 경험이 밑바탕을 이루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하겠다. 김재석, 위의 글 pp.195
김재석은 전술한 그의 논문에서 소인극운동과 카프와의 관계와 그 의의를 상세히 밝히고 있다.
프로작가군의 주된 관심은 20년대와 마찬가지로 노동문제이며, 농민에 대한 관심은 동반자 작가라 할 수 있는 유진오 <박첨지>, ꡔ시대공론ꡕ 1932.1
, 전일검 <아버지들>, ꡔ예술ꡕ 1호, 1935.1
에 의해 발표되었을 뿐이다. 30년대에 활약한 프로극작가는 송영 <호신술>, <신임 이사장>, <일체 면회를 거절하라> 등
, 김남천 <조정안>
, 이북명 <그래도 나는 가야한다>
, 한설야 <총공회>, <저수지>
, 이기영 <인신교주>
등으로 합법적인 공연을 염두에 두어 우회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이 특기할 사항이다.
프로극은 이동극 외에도 슈프레히콜 슈프레히콜은 특별한 무대의상이나 장치없이 다수의 등장인물이 이미 창작된 시를 간단한 몸짓과 함께 낭독하는 것으로, 간결함과 선동성이 특징이다.
손화숙, 「1930년대 프로연극 연구」(서울대 석사, 1990)에는 슈프레히콜의 성격과 특성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을 실험하였는데, 이에 해당하는 작품으로는 백철의 <국민당 제26로군>, <재건에>, <수도를 걷는 무리>, 박세영의 <橋> 등이 있다. 슈프레히콜은 독립적인 공연이라기보다 선전․선동을 위한 부수적인 공연이었으므로 노동자․농민들의 행사와 결합되었을 때, 제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30년대 프롤레타리아 연극은 대중속으로의 활동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꾸준히 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3. 대중극
1930년대 전반기의 대중극은 신파적 색채가 농후했고 관객들의 말초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데 급급했다. 이러던 것이 1935년 11월 「동양극장」이 생기면서 대중극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동양극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전용 상설극장으로 쟁쟁한 스텝진과 배우진을 갖추고 기술적으로 잘 만들어진 연극을 대량공급한다. 동양극장의 설립은 연극 종사자들에게 전문적인 직업인의 위상을 갖게 했다는 의의를 지닌다. 또한, 동양극장의 연극은 초기 신파에 비해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연기면에서 신파조를 지양하고 사실적인 무대를 표방했다. 동양극장에서 가장 많은 수의 공연을 연출한 홍해성은 일본 축지 소극장에서 신극교육을 받은 자로 신파극의 질적 향상을 꾀하였다. 동양극장 외에도 「중앙무대」, 「아랑」, 「고협」 등의 대중극단이 사실주의와의 절충을 표방하며 활동하였다.
그러나 30년대 대중극은 그 소재면에서 여전히 화류비극이나 가정비극이 주류를 이루었다. 동양극장 최고의 레파토리인 임선규 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와 이서구 作 <어머니의 힘>은 그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따라서 대중극에서는 식민지 치하라는 정치적․역사적 배경은 찾아 보기 힘들다. 대중극에서는 가능한한 이러한 것이 배제된 개인적 욕망에만 주목하고 있다.
대중극은 비록 기술적인 면에서는 자신감이 있었으나 그 이면에는 신극에 대한 선망과 호감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시도가 「중앙무대」의 ‘중간극 중간극이란 당대 여러 상업극단에 소속되어 있던 의식있는 연극인들이 연극의 예술성과 상업성의 절충적인 대안물로 제시한 연극형태를 말한다.
중간극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양승국의 전술한 논문 pp.223-232 를 참고할 것.
’ 이론이다. 「중앙무대」는 카프 해산 이후 동양극장에서 활동했던 극작가 송영, 박영호와 배우 박제행, 남궁 선, 서월영 등이 주축이었고, 여기에 「극예술연구회」 출신의 맹만식, 이원근이 가세하였다. 그들은 창립 성명서를 통해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실현하고자 함 그들의 이러한 취지는 그들의 창립선언에 명시되어 있다.
양승국, 앞의 글 p.227 참고
을 제시한다.
그러나 실제 공연에 있어서는 종래의 대중극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이운속, 「중앙무대공연평」, ꡔ동아일보ꡕ 1937.7.9. 참고
,이들의 신극과 흥행극의 결합시도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중앙무대」의 해산을 맞는다. 이후 이러한 노력은 「고협」 등에 의해 계속 진행되는데, 뚜렷한 성과를 거두기 전에 40년대 국민극 시대를 맞게 됨으로 하여, 신극의 전문화와 대중기반의 확보라는 숙원은 해방 이후로 미루어 진다.
30년대의 대표적인 대중극 작가로는 이서구, 임선규, 박승희, 김건, 최독견, 김춘광 등과 카프 해산 이후의 송영, 박영호 등을 들 수 있다.
Ⅵ. 1940년 ~ 해방 전
- 국민극 시대 서연호, 「한국근대희곡사연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82) pp.280-303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본격화되자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한국내에서 노골적인 친일극이 나타나는 것은 1939년 「협동예술좌」의 활동을 통해서이다. 이 단체는 연극인들을 널리 규합하고자 「중앙무대」, 「극연좌」, 「낭만좌」 등과 교섭을 벌여 이서향 등을 끌어들인다. 이 단체는 1940년 「조선연극협회」가 결성된 이후에는 언급된 기사를 찾아 볼 수 없다.
1940년 12월에 결성된 「조선연극협회」(회장 이서구)는 총독부 관할하의 단체로 회원들에게는 회원증을 발급해주었으며 많은 혜택을 주었다. 이 협회는 9개 극단체 3백여명을 흡수하였는데, 이는 가입하지 않은 단체는 전국 어디에서도 무대공연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의 대표적 국민연극 단체는 유치진이 대표로 있었던 「현대극장」이다. 이 극단의 진용에는 前 토월회, 극예술협회, 동경학생예술좌의 회원들과 일부 상업극단,영화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극작가들은 협회 산하에 따로 「극작가동호회」를 조직하였는데, 회장에 유치진, 간사에 임선규, 홍개명, 회원에 김영수, 박영호, 이서향, 함세덕, 이서구, 박향민, 김 건 등이 있다. 당시의 대표적인 국민연극으로는 유치진의 <흑룡강>, <대추나무>, <북진대>, 함세덕의 <에밀레 종>, <촌장 이사벨라>, 박영호의 <산돼지>, <물새>, <별의 합창> 등이 있다.
일제는 국민연극경연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제1회 경연대회는 1942년 9월 18일부터 11월 25일까지 열렸다. 이때의 수상작은 유치진의 <대추나무>이다. 이어 2회 대회(1943.9.16-12.26)에는 송영의 <역사>가, 3회(1945.2-3) 대회에서는 김승구의 <산하유정>, 임선규의 <상아탑에서>가 작품상을 수상했다. 전윤경, 앞의 글 p.22
국민연극운동은 1945년 해방 직전까지 게속되었다. 1939년 이후 약 5년 간에 걸쳐 이 연극운동은 일제가 필요로 했던 ‘전체주의적 신체제’를 달성하는데 기여하였으며, 정치 선전극, 戰意를 고취시키는 목적극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당시 연극인 대부분이 이러한 연극운동에 몸소 투신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뼈아픈 일이다.
Ⅶ. 해방공간의 연극
해방 후부터 1948년 남한 단독 정부수립까지는, 좌․우익의 대립이 심화되었던 시기이자 연극운동의 전성기였다. 먼저 좌익계열의 연극운동을 살펴 보면, 1945년 8월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가 건설되어, 그 산하에 송영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연극건설본부」 그 외의 참가자는 안영일(서기장), 나웅, 김태진, 이서향, 박영호, 김승구 등이다.
가 설치된다. 이들은 남로당 계열로, 조선연극의 건설, 조선연극의 해방, 연극전선의 통일을 주장한다. 1945년 9월에는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 연맹」이 결성되는데, 그 산하에 나웅을 위원장으로 하는 「프로연극동맹」 참가자는 강호(서기장), 박영호, 김욱, 신고송 등이다.
을 두었다. 이들은 북로당 계열로 프롤레타리아적 당파성을 주장했으며, 연극을 사회주의 혁명의 수단으로 삼는다. 같은 해 12월 「조선 문학가 동맹」 산하에 「조선연극동맹」이 조직되는데, 이들은 다음의 세 시기 조선연극동맹의 전개는, 「연우무대」의 기획 시리즈 ‘한국연극의 재발견Ⅱ’로 공연된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1993.4.15 - 5.9)의 프로그램에 실린, 양승국의 글 「심포지엄 발제 1 - 남북분단 과 전쟁 그리고 한국연극사」를 참고로 하였다.
를 거친다.
1. 태동기 (45.8.15 - 46.3) :
3․1 기념공연으로 <독립군>(조영출 作, 나웅 연출), <3․1운동>(김서향 연출), <님>(박영호 作, 박춘명 연출) 등을 공연.
2. 전성기 (46.4 - 47.8) :
46년 7월 희곡의 밤을 개최, 김태진, 박영호, 안영일, 이서향 등의 강연과 함세덕의 희곡 <감자와 족제비와 여교사>를 낭독.
47년 3월, 전국 문화단체 총연맹 주최 3․1기념공연에서 <태백산맥>(함세덕 作, 이서향 연출>, <위대한 사랑>(조영출 作, 안영일 연출)을 공연.
이 외에도 47년 7월, 「조선연극동맹」 주최로 소인극 경연대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한다.
3. 침체기 (47.8 이후) :
조선연극동맹 산하 7개의 극단이 4개로 개편되고, 연극인들이 월북하기 시작한다.
조선연극동맹 소속 작가들이 문학지나 종합지를 통해 발표한 희곡은, 신고송의 <결실>, <철쇄는 끊어졌다>, <서울 가신 아버지>, <눈 날리는 밤>, 박영호의 <겨레>, 함세덕의 <고목>, 이기영의 <닭싸움> 등이다.
송영, 신고송 등은 월북 후 「북조선연극동맹」을 결성한다. 월북 작가들의 북한에서의 작품으로는 한태천의 <바우>(1946), <성장>(1948), 박령보의 <태양을 기다리는 사람들>(1947), 함세덕의 <산 사람들>(1949) 등이 있다. 한편 오영진은 주영섭 등과 「평양예술문화협회」에서 활동하였으나, 월남하여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해녀뭍에 오르다」, 「동천홍」 등의 희곡과 「맹진사댁 경사」, 「배뱅이 굿」 등의 시나리오를 쓴다.
우익측의 활동은 주로 좌익측에 대한 대항과 정부수립에 대한 계몽운동으로써 활동하였다. 1945년 10월 조직된 「민족예술무대」에서는 이광래, 맹만식, 신재현, 박상익, 남궁연 등이 활동하였다. 1946년 가을에 결성된 「전선」에는 이화삼, 이해랑, 김동원 등이 관계했는데, 이들은 1947년 3월 유치진의 <조국>을 공연하였다. 유치진의 활동이 본격화 되면서 1947년에는 「극예술협회」가 결성된다. 그들은 유치진의 <자명고>, <마의 태자> 등을 공연하면서, 정치주의 예술에 대한 순수예술로써의 일대 도전이었다고 주장한다. 1947년 10월에는 좌익 진영에 대항한, 이서구, 유치진 중심의 「전국연극예술협회」가 설립된다. 이 단체는 우익 진영 연극단체의 모체로, 후에 「한국 무대 예술원」이 된다.
1948년 남한에 단독 정부가 수립되고 좌익운동이 불법화 되면서, 연극도 남북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게 된다. 남한에서는 1949년 「한국연극학회」가 결성되어 제1회 남녀 대학 연극 경연대회를 개최하면서, 극예술협회에서 오영진의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를 공연한다. 49년 10월 18일에는 대통령령 제195호에 의해 중앙국립극장이 탄생하여 유치진이 초대 극장장으로 결정된다. 1950년 1월에는 「신극 협의회」가 결성되는데, 「신협」(이광래)과 「극협」(윤방일) 두 극단이 국립극장의 전속단체가 된다. 국립극장의 공연은 전쟁 전 「신협」에서만 두 번 이루어지는데, 1회 공연은 유치진의 <원술랑>(이화삼, 허석 공동연출), 2회 공연은 <뇌우>(조우 作, 김광주 譯, 유치진 연출)이다. 이어 3회공연을 준비하던 중 전쟁이 발발한다.
해방 이후 약 5년 간 연극계의 판도가 바뀌면서 극작가의 활동도 그 모습을 달리하였다. 우익 진영의 작가 중 그 활동이 활발한 사람으로는 유치진, 김영수, 김춘광, 조건 등과 뒤늦게 이북에서 내려온 오영진을 들 수 있다. 이 들의 작품과 그 성격에 관한 논의는 차범석의 「변혁․변환기의 희곡문학」, ꡔ현대문학ꡕ (1988.12) pp.347- 355을 참고 한다.
유치진은 <조국>, <은하수>, <별>, <대춘향전> 등 일련의 역사극을 발표하면서 이른바 낭만주의적 리얼리즘을 주장했다. 그는 민족주의의 개안을 촉구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는데, 일제치하에서의 자신의 과오를 청산하고 작가로서의 변신을 꾀하고자 한 몸부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영수는 멜로드라마적 재미와 사회 풍속도적인 시사성을 조화시켜 나간 극작가로, 후일 방송작가로 활동 한다. 이 시기의 그의 희곡은 극단 「문화극장」에 의해 공연된 <민중전>, <불>, <황야>, <꽃피는 언덕>, 극단 「신청년」에서 공연한 <오남매>, <사랑의 가족>, <여사장>, <혈맥>, <사육신> 등이다.
오영진은 본래 영화지망생으로 오늘날 남아있는 희곡도 본래는 시나리오로 쓴 것을 후일 각색한 것이다. 그의 대표작인 <맹진사댁 경사>, <한네의 승천>, <배뱅이 굿>, <風雲> 등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그는 우리의 민속적인 정취나 한국적 해학을 희곡문학에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작가로 평가 받는다.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나 <정직한 詐欺漢>은 그의 이러한 면모를 잘 나타낸다.
이 외의 작가와 작품으로는 김진수의 <코스모스>, <유원지>, 이광래의 <홍길동과 홍도>, <백일홍 피는 집>, <정열의 사랑>, <최후의 밤> 등이 있다.
8․15 해방부터 6․25까지의 불과 5년에 불과한 기간동안 우리 극계는 숨가뿐 변화를 겪었다. 이 시기는 정치계와 그 맥을 같이 할 수 밖에 없었는데, 따라서 48년 정부수립 이후에는 극작가의 판도가 바뀌어 종전의 주도세력이었던 송영, 함세덕, 박영호, 신고송, 조영출, 박노아 등은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 유치진, 이광래, 김영수, 김진수, 오영진 등이 그 세력을 잡게 된다. 이후 더욱 심화된 분단의 결과, 남북은 연극에 대한 개념도 상이하게 정립하면서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고, 곧이어 전쟁을 맞게 된다.
Ⅷ. 1950년대의 연극 50년대의 연극 상황은 ꡔ현대문학ꡕ 1월호에 실린, 이미원의 「전란이 남긴 희곡」을 기초로 하고, 그 외의 글을 참고로 했다.
국립극장의 개관과 함께 시작된 50년대는 전쟁으로 인하여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9․28 수복 후 정부의 특별한 배려로 극단 <신협>을 중심으로 한 문예중대가 군대내에 설치되었는데, 반공극을 위시하여 세익스피어와 사르트르 등의 고전을 공연하였다. 국립극장 재건에 관한 건의는 51년부터 계속되어 왔는데 별 진행이 없자 유치진은 극장직을 사임한다. 그러던 중 53년에야 대구에서 국립극장이 재건되고 서항석이 극장장으로 취임하여, 윤백남의 <야화>를 개관공연으로 올린다. 그러나 이때 대부분의 극단들은 이미 서울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고, ꡔ신협ꡕ은 유치진의 주도하에, 유치진 作 <나도 인간이 되련다>, 오상원 作 <녹스른 파편> 등을 공연하였다. ꡔ신협ꡕ은 국립극장 창립 당시의 전속극단이었으나 극단장이 서항석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재계약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ꡔ신협ꡕ과 국립극장은 서로 반목하게 되어 극계는 한동안 침체를 겪는다.
이러한 침체기 중에도, 1954년에는 국방부 주최로 6․25 기념공연 <불더미 속에서>(김진수 作)가 무대에 올려졌고, 같은 해 문교부 주최의 제2회 연극경연대회와 한국연극학회 주최인 대학극경연대회가, 53년에는 역시 연극학회 주최로 전국남녀 중고등학교 연극경연대회가 개최되어 연극계의 활력을 불어넣고자 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침체기를 뚫고 새롭게 연극을 중흥하고자 한 연구극단이 생겼는데, 바로 「제작극회」 「제작극회」는 58년 생겨난 원각사를 중심으로 소극장운동을 전개하여 극계에 활력을 불러 일으켰 다. 그러나 2년만인 1960년 원각사는 燒失되고 소극장운동과 「제작극회」의 활동은 부진하게 된 다.
유민영, 「우리시대연극운동사」, 단국대학교 출판부(1990), p.296-297
이다. 「제작극회」는 대부분 대학연극경연대회 출신의 대학극 주도 신인들이었다. 이들은 성명서 「제작극회」의 선언문은, ꡔ한국연극ꡕ 1985년 6월호 p.51 을 참고하시오.
를 통해 ‘사실적이건 상징적이건 간에’ ‘현대극 양식’을 표방하며, 1956년 7월 <사형인>(차범석 번역, 차범석 전근영 공동연출)을 창립공연으로 올린다. 이들의 의의는 많은 신진들의 배출에 있다고 하겠는데, 극작가에 차범석, 김자림, 박현숙, 연출가에 오사량, 김경옥, 허규, 최창봉, 연극학자에 이두현 등으로 연극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한편 이들 이외에도 국립극장 희곡현상, 신춘문예, ꡔ현대문학ꡕ 등을 통하여 하유상, 이용찬, 임희재를 위시하여 오학영, 김상민 등의 극작가가 등단했으며, 58년에는 ITI(국제극예술협회)의 한국본부가 창립되어 국제적인 연극 교류의 길을 텄다.
50년대의 희곡은 6․25를 소재로 다루기 시작했는데, 이데올로기의 문제에 있어 민주주의는 선이요, 공산주의는 악이라는 흑백논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유치진의 <통곡>, <나도 인간이 되련다>, <푸른 성인>, <청춘은 조국과 더불어>, <한강은 흐른다> 등이 있다.
한편, 차범석의 희곡에는 6․25의 상처가, 다른 사회문제와 얽혀서 종종 그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빈궁을 다룬 작품 <밀주>, <사등차>, 물질과학문명과 구세대의 몰락을 그린 작품 <불모지>, <계산기>, 윤리적 부패와 위선을 고발한 작품 <공상도시>, <귀향>, 휴머니즘이 나타난 작품 <성난 기계> 등이 그러한 경향의 작품이다. 차범석의 작품은 전란 그 자체나 이데올로기 문제보다는 그것이 우리에게 남긴 상흔에 주목하고 있다.
1955년 신춘문예에 <奇留地>로 등단한 임희재는 <복날>, <무허가 하숙집>, <꽃잎을 먹고 사는 기관차>, <고래>, <종전차> 등의 작품을 발표한다. 그 역시 전후에 전란의 상처를 안고 빈궁하게 살아가는 삶을 그렸는데, 애정 어린 따뜻한 시각이 깔려 있다.
이 외에 주목할 만한 작가와 작품으로는, 하유상의 <딸들 자유연애를 구가하다>, <젊은 세대의 백서>, 이용찬의 <가족>, <모자>, <기로>, 김자림의 <돌개바람>, 박현숙의 <사랑을 찾아서>, 오상원의 <녹스른 파편>, <잔상>, 김상민의 <비오는 성좌>, <향연의 밤>, 김경옥의 <슬픈 종말>, <잔해>, <배리>, 오학영의 <꽃과 그림자>, <생명은 합창처럼>, <심연의 다리>, <항의> 등이 있다.
50년대의 주목할 만한 사실에 연극교육기관의 등장을 들 수 있다. 1953년 10월 최초로 서라벌예술학교가 연극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59년에는 중앙대학교에 연극영화과가, 60년에는 동국대학교에 연극영화과가 생겨 연극인 양성의 길을 확고히 하였다.
50년대의 희곡은 나름의 꾸준한 노력과 실험이 보이기는 하였으나, 해방과 전란이라는 사회적 혼란으로 인하여 충분한 문학적 수련을 쌓을 시간과 여유가 없었던 까닭에 극의 형식이나 깊이에 있어 새로움을 주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축적된 노력은 60년대에 들어 현대극으로 도약하는 발판이 된다.
Ⅸ. 1960년대의 연극
1960년대는 4․19와 5․16이라는 정치변혁으로 인하여 기존의 가치와 제도에 많은 변화가 생긴 시기이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 전반에 걸쳐 일어났고, 연극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변혁기를 맞아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많은 극작가들이 등장하는데, 오태석, 신명순, 김의경, 박조열, 이재현, 오재호, 윤대성, 노경식, 전진호, 조성현, 김용락, 김기팔, 정하연, 천승세, 고동율, 서진성, 황유철, 윤조병, 이만택, 전옥주, 오혜령, 김현숙, 하경자, 강성희 등의 20여 명이 단 몇 년 사이에 등장하여 기존의 기성작가들과 함께 60년대의 극계를 외형적으로나마 풍성하게 만든다.
60년대 극계는 同人制극단 유민영, 앞의 책, 단대 출판부(1992) pp. 309-331 참고.
의 출현으로부터 활력을 되찾기 시작한다. 동인제극단의 선두주자는 「실험극장」으로, 대학극 출신의 젊은이 주요 맴버는 김의경, 최진하, 허규, 양태조, 한경완, 이순재, 유달훈, 배병권, 박순명, 이기하, 이진연, 김성옥, 유용환, 양우성, 피세영, 여운계, 이낙훈, 정해창, 황운진 등으로, 대학을 갓 졸업한 연극반 출신들과 고교나 대학에서 연극을 하다가 다른 직업을 갖고 있던 사람들, 그리고 대학 재학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들이 그 구성원이다. 이후 <민중극장>, 1963년 정월, 극작가 이근삼을 대표로 창단. 교수, 관리, 소장 연극인, 대학생들로 구성.
<동인극장> 등 동인제 극단이 잇달아 등장하여 이른바 동인제극단시대를 이루었으며, 1962년에는 드라마센타가 개관하여 우리 극계에는 잠시나마 연극중흥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드라마센타의 준공은 한국연극사에 있어 획기적인 일로, 연극전문극장으로서는 1935년 동양극장 이래 두번째가 된다. 드라마센타는 기성과 신인을 막론하고 당시의 연극인을 모두 끌어들여 막강한 진용을 갖추고 공연을 올렸으며, 연극강좌와 극작 워크샵 등 후진양성에도 힘을 쏟는 등 연극중흥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관객동원의 실패로 인한 재정난과 유치진의 독주로 인한 내부 갈등으로 1년만에 공연을 중단하고 대관극장으로 변질되고 만다. 유민영, 위의 책, pp.299-309
60년대의 희곡은 그 경향에 있어 매우 다양했는데, 20년대 이후 극작가들이 꾸준히 추구해온 리얼리즘 기법이 완숙미를 보여주었는가 하면, 부조리극이나 서사극적인 기법을 도입한 실험성이 짙은 작품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오영진의 경우 60년대에 들어 정치적인 문제를 다룬 작품을 다수 발표하였는데, <허생전>을 비롯하여 <해녀 뭍에 오르다>, <나의 당신>, <아빠빠를 입었어요>, <모자이크 게임> 등을 통하여, 군사정권의 대일정책에 대한 강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우리 희곡사에 있어 처음 나타난 본격적인 정치극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유민영, 「희곡문학의 다양성」, ꡔ현대문학ꡕ, 1989.2 pp.334-335
오영진과는 달리 정통 사실주의를 계승한 차범석은 변천하는 현실을 리얼리즘을 기조로 하여 작품에 투영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그는 항구나 섬 등을 배경으로 한 로컬리즘 계열의 작품 <밀주>, <귀향>, <霧笛> 등
과 전쟁 후의 사회문제들을 여러 측면에서 다룬 작품 <껍질이 깨지는 아픔없이는>, <태양을 향하여>, <공중비행>, <산불>, <청기와집>, <파도가 지나 간 자리> 등
들을 통해 시대변화에 따른 피해자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묘사했다. 이 시기의 작품 중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산불>은 리얼리즘 기법의 성숙이며, 동족전쟁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역작으로 평가 받는다. 유민영, 위의 글, pp.345-346
미국에서 희곡을 공부한 이근삼은 사실주의 기법에서 탈피한 다양한 드라마투르기를 보여 극계에 신선함을 가져왔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서사기법, 표현주의 등을 가져와 문학성보다는 극장성을 강조한 작품을 썼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우리 전통의 희극정신과는 전혀 다른 시니컬한 희극세계를 보여주는데, <원고지>, <거룩한 직업>, <광인들의 축제>, <제18공화국>, <대왕은 죽기를 거부했다> 등은 그러한 그의 작품 경향을 잘 보여준다.
60년대에 등장한 신인 작가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은 오태석이다. 67년 「웨딩드레스」로 등장한 그는 극계의 돌연변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독특함을 보여준다. 그는 매년 두․세 편씩의 장․단막극을 펴낼 만큼 정력적인 활동을 보이는데, 그가 주목받는 이유는 작품의 전위성과 난해성 그리고 신선한 감각 때문이다. 그의 작품의 플롯은 해체되어 있고 대사는 즉흥적이며 객기 넘치는 요설과 사설이 작품을 산만하게 하여 주제마저 모호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점에서 우리 근대 희곡사의 주조로 내려온 리얼리즘의 고루성을 대담하게 깨뜨리고, 현대성이라는 새 틀을 부여한 작가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유민영, 위의 글, p.351
이 외에 60년대의 주목할 만한 작가와 작품은 박조열 박조열에 대한 연구로는 ꡔ한국연극학ꡕ 제5호에 수록된 이미원의 「박조열 작품론」이 있다. 그는 이 글에서 박조열 희곡 전작품을 조명하고 있다.
의 <토끼와 포수>, <행진하는 나의 분신들>, <모가지가 긴 두 사람의 대화>, <불임증>, 이재현의 <바꼬지>, <사하린스크의 하늘과 땅>, <해 뜨는 섬>, 천승세의 <물꼬>, <만선>, 윤대성의 <출발>, <망나니>, 신명순의 <전하> 등이다.
이상과 같이 1960년대의 희곡문학은 40여 년을 추구해온 사실주의가 정착기를 맞이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사실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양식의 실험이 보였고, 수 많은 신인 극작가들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60년대의 현상들은 70년대의 극계가 심상치 않게 전개될 것임의 암시이기도 했다. 유민영, 앞의 글, pp.351
Ⅹ. 1970년대의 연극
1970년대는 사회 전반에 걸쳐 체제 비판적 성향이 강화되고, 서구 중심의 문화에서 탈피해서 우리의 것을 되찾자는, 이른바 자주성 회복운동이 태동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비판적 내용의 연극은 당국의 엄격한 통제로 결코 허용되지 않았고, 다만 일부 극단(「민예」 등)과 대학생들이 시도했던 우리문화와 연극의 접합이, 이후 우리 극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또한 그 당시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창작극 부진에 대한 우려가 높았는데, 73년 대학극회들의 대학인의 무대와 77년 대한민국연극제가 한결같이 창작극 활성화의 기치를 내건, 창작극 중심의 연극행사였다는 사실은 눈여겨 볼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가시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세한 대부분의 극단은 흥행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아무리 조잡한 번역이라도 작가와 작품이 지명도가 높으면 무조건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은 기성연극을 모방한 대학생들의 연극에서도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한편 기존의 연극경향을 탈피하려는 실험적 움직임도 전혀 없지는 않아서, 작가겸 연출가로 그 활동이 활발한 오태석의 작업(태, 초분 등)과 방태수의 에저또극단의 활동이 두드러 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둘 다 연극계의 판도를 바꿔놓지는 못했다. 오세곤, 「70년대의 연극문화」, 연우무대 기획 ‘한국 현대연극의 재발견Ⅱ’, <파수꾼> 공연 (1993.7.8-8.1) 프로그램 중에서.
1. 전통극 운동 70년대에는 마당극이나 민족극 등의 명칭이 아직 사용되기 前인 까닭으로, 전통극 운동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70년대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이 전통연희에 대한 관심이다. 60년대 말에서 70년 초에 걸쳐 한국연극계에 나타난 두드러진 현상으로, 가면극․인형극․판소리 등 한국의 민속극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전통연희 형태에 대한 흥미와 관심에서 출발하여 일부 극작가와 연출가는 그와 같은 형태의 특징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수용하여 현대화 시켜보려는 시도가 보였고, 그에 따른 논의로 ‘연극에 있어서 무엇이 한국적인 것인가’, ‘놀이의 정신을 오늘날의 연극은 어떻게 살려야 할 것인가’ 등에 대한 극계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궁석기, 「연극개관」, ꡔ문예총감ꡕ (한국문화예술진흥원) p. 403
70년대에는 연극 60년을 기념하는 양주별산대놀이 공연이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것을 비롯하여 봉산탈춤, 꼭두각시 놀음 등이 자주 공연되었다. 또한 대학극계 대학극계는 70년대에 들어 상당히 활발한 활동을 하였는데, 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은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며 실습의 일환으로 연극을 하는 경우와, 서로 전공은 달리 하면서 극회라는 이름으로 모여 활동하는 경우 등이다. 이 중 첫번째 부류는 78년 전국대 학연극축전(전국 중앙학도호국단 주최, 중앙대 학도호국단 주관, 문공부․문교부․연극협회 후 원) 이후 일반 극회와 확실한 차별성을 확보했고, 현재 대부분 제도권 연극에서 활약 중이다. 또다른 부류인 일반극회 소수 학생들은 73년 그들 중 일부(서울대 문리대, 이대 문리대, 고대 극회, 연대 극회, 서강대 극회, 그 후 2회부터 숙대 극회의 합류)가 시작했던 대학인의 무대가 76년 외적 제약(공연을 비롯한 학생운동 전반에 대한 통제와 간섭)과 내적 갈등(연극의 사회 비 판적 기능과 연극 고유의 예술성에 대한 인식차)을 극복하지 못하고 와해된 후, 80년대를 거치 며 개인적 활동으로 제도권 연극에 편입됐는가 하면, 마당극과 민족극, 민중극 등, 소위 비제도 권 연극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도 ‘우리 연극’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으며, 오태석은 1972년 몰리에르의 작품을 번안한 <쇠뚝이 놀이> 등을 통해 전통극의 현대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전통연희의 현대적 수용이라는 점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한 극단은 「민예극장」이다. 「민예극장」은 판소리와 가면극, 인형극 등 우리 고유의 전통극을, 지금하고 있는 연극형태와의 접목 내지 용해작용을 시도하여, 민족극 - 또는 한국연극에 있어서의 하나의 방향을 찾는 작업 허규의 <다사라기>, <물도리동> 등
을 꾸준히 계속하였다. 이진순, 「연극개관」, ꡔ한국예술지ꡕ (대한민국예술원) P.166 참고
민속극에서 형식을 취한 희곡의 예로는 이언호의 <멋꾼>, 김상렬의 <탈의 소리>, 이근삼의 <요지경>, 김정률의 <판소리 황진이>, 윤대성의 <너도 먹고 물러가라>, 장소현의 <양심> 등을 들 수 있다.
70년대의 이러한 관심들은 80년초 마당극 양식론 70년대부터 관심이 집중되어 온 전통극은 그에 대한 논의인 마당극 양식론을 가져온다. 마당극 양식론은 80년대 초와 80년대 중반 이후에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지는데, 그 첫번째 논의 과정에 서는 처음으로 ‘마당극’이라는 명칭이 시작되었고 놀이정신과 마당정신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마당극은 형식적인 전통의 수용과 리얼리즘정신이 결여된 관념적이고 도식적인 마당 극이었음으로 인해, 대학 마당극의 쇠퇴 등 퇴조를 보인다. 두번째 마당극 양식론은 민족극 전 개로 발전되는데, ‘마당극적 극 논의’로서 정서에 있어서의 민중적 성격과 건강한 변혁체로서의 극을 강조하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한 참고 문헌은 다음과 같다.
임진택, 「새로운 연극을 위하여」
------, 「마당극에서 마당굿으로」
------, 채희완 공저, 「한국의 민중극」
정이담, 「문화운동시론」
채희완, 「70년대 문화운동」
최승운, 「문화예술운동의 현단계」
을 거쳐 ‘민족극 한마당’을 중심으로 한 민족극(또는 민중극)으로 정착되거나, 오태석과 같은 작가들에 의해서는 개인적 미학성의 추구로, 연출가 손진책에 의해서는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마당극으로 다양하게 진전되어 나간다.
2. 실험극 운동
70년대 연극계는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요소를 도입해 보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이에 수반되어 활발한 소극장 운동 소극장운동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시오.
정진수, 「소극장연극, 1974년의 현실」, ꡔ연극평론ꡕ, 1974. 겨울호
______, 「소극장운동개관」, ꡔ문예진흥ꡕ 제6권. 4호 (1979.4)
특집 - 한국연극의 현주소 : 소극장, ꡔ한국연극ꡕ, 1986.8
이 전개되었다. 1969년 4월 문을 연 까페 떼아트르를 시작으로, 코리아나 소극장, 에저또 소극장, 까페 빠리, 삼일로 창고극장, 민예극장 민예극장은 연습장겸 소극장으로 전통연극의 현대적 수용을 주로 실험하였다.
, 7․6 소극장 76년에 개관한 7․6 소극장과 민중소극장은 주로 젊은 연극인의 워크샵 활동을 위해 쓰여졌다.
, 공간사랑, 엘칸토 예술극장, 실험소극장 등 연극실험장이 생겨났다. 소극장운동은 기성 연극의 상업화․기업화에 끊임없이 저항하면서 새로운 연극 이념과 방법을 찾고 실험하는 연극 서연호, ꡔ문예연감ꡕ p.290
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뜻에서 극단 「에저또」는 다분히 실험적인 성격의 것으로 종래의 사실주의적인 연극미학에서 대담한 탈출을 시도하였고, 우리나라에서 시도한 소극장연극들 중에서 가장 서구의 反기성연극운동으로서의 소극장연극을 닮은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또한 극단 자체내에서 마련한 창고극장은 재래식의 프로시니엄아치형에서 탈피하여 강한 개방 무대(open theatre) 형식을 취하여 연극의 실험성 추구에 알맞은 소극장무대를 마련하였다. 정진수, 「소극장운동의 개관」, 앞의 책, pp.9-10
정정희, 「70년대 한국희곡문학의 경향과 문제점」, 이화여대 석사,(1980) p. 10 에서 재인용
그러나 이후 소극장은 점차 실험적 공간이 아닌 흥행위주의 상업극 공간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실험극 작품에 대한 언급은 정정희의 전술한 논문을 참고한다.
으로는 부조리극 형식의 작품인, 이언호의 <어항>, 오태영의 <두뇌 단면도>, 상징적 수법을 사용한, 오영진의 <나의 당신>, 이어령의 <기적을 파는 백화점>, 윤조병의 <축제>, 우화적 수법을 사용한, 이강백의 <알>, <파수꾼>, <셋>, 서사극 기법을 시도한 윤대성의 <마스게임>, 순환구조의 수법을 사용한 이현화의 <0.917> 등이 있다.
70년대의 이러한 시도들은 80년대로 접어들면서 나름의 연극이론들과 내적 성숙으로 조금씩 결실을 보게 된다. 70년대의 마당극 운동은 80년에 들어 연우무대의 <장산곶매> 공연과 민족극 한마당 등을 통해 극장내의 새로운 양식과 내용으로 자리잡게 된다.또한 계속적인 소극장의 중흥, 이윤택․오태석 등의 한국적 서사극의 시도는 나름의 실험적 성과를 인정받는다. 한편 80년대로 들어서 81년 공연법의 일부가 개정되고 87년 공륜의 검열이 폐지된 것은 우리 극계의 커다란 사건이자 변화라고 할 수 있다.
Ⅺ. 결 론
이상으로 개화기부터 70년대까지의 연극과 희곡의 개괄적 흐름을 살펴 보았다. 본고는 해방 이후의 연극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한 한계가 있다. 이후 좀더 많은 자료의 검토와 연구를 통해 보충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본고를 바탕으로 하여, 연극운동론과 작가론, 작품론 등 충실한 개별 연구가 뒤따라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