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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어 스크랩 영도자료
소반 추천 0 조회 42 07.05.22 17: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희망의 불 밝히니 신선도 긴 잠 깨리라

 

 
영선(瀛仙) 신선(新仙) 청학(靑鶴) 봉래(蓬萊·신선이 살았다는 산). 영도의 동명에는 유달리 신선과 관련된 것이 많습니다. 대교(大橋) 남항(南港) 등 일제시대 이후 지어진 무미건조한 이름과는 대조적입니다. 일제시대 무차별적인 벌목 전만해도 영도는 울창한 숲을 자랑했다고 합니다. 거기에다 일망무제로 트인 바다까지. 가히 신선이 깃들일 만합니다.

일제의 침탈과 6·25는 신선의 보금자리를 앗아갔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영도다리는 수탈과 발전의 양면을 껴안고 있습니다. 게다가 전쟁의 흔적까지 덧씌워져 오늘의 영도를 만들었습니다. 신선들이 노닐던 봉래산 기슭은 닥지닥지 전쟁의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 그 피란민들의 후손을 안고 말이죠.
 
  현재 영도의 전경(위)과 1920년대 모습(아래 사진).
그래도 아직은 천혜의 바다가 남아 있습니다. 태종대와 해안 산책로는 여전히 국제급 보물입니다. 바닷가 절경은 옛 명성을 잇기에 충분합니다. '해양도시 영도'의 미래는 밝습니다. 웅자를 드러낸 남항대교는 2년 뒤면 영도와 서구를 이어줄 것입니다. 2010년께면 남구 감만동과도 바닷길이 연결됩니다. '섬아닌 섬' 영도는 이제 육지로, 아니 부산의 교통요충지로 떠오를 전망입니다.

올해로 영도등대가 100년을 맞습니다. 지난 한 세기 영도등대 불빛이 그랬듯, 영도는 부산을 상징하는 한 줄기 희망의 빛으로 영원할 것입니다.

                   글 = 장재건기자 jjk@kookje.co.kr   사진 = 박수현기자 parksh@kookje.co.kr

 

애환의 생명줄, 굴곡의 역사 관통하다


영도다리의 추억  /  1934년 개통식 부산 15만명 인구 중 5 ~ 6만 몰려
섬주민 삶의 혁신… 전찻길 주위 늘 인파로 북적 
6·25땐 객지생활 고통 탓 몸 던지는 피란민 많아

 
 
#70여년 역사가 오롯이

중앙동에서 영도다리를 건너 영도경찰서 옆. 구슬픈 노랫가락이 귓전에 울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라고 현인 선생이 불렀던 '굳세어라 금순아'의 한가락이다. 영도 영선동에서 태어난 고 현인선생의 노래를 기려 세운 현인노래비가 이곳에 있다. 노래비 옆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고인의 노래에서 핍진했던 전쟁당시 모습들이 겹쳐진다.

영도다리는 영도 이상의 그 무엇이다. '영도대교'라는 공식명칭은 왠지 생경하다. '영도다리'여야 이물감을 벗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단순히 입에 자주 오르내린 이름이었다는 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영도, 더 넓게는 부산과 한국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코드가 그 이름에 새겨진 탓이리라.

길이 214m, 폭 16m 도개(跳開)식 다리. 이 무미건조한 다리의 제원에 덧씌워진 역사의 더께를 찾아나서는 여행은 그래서 흥미롭다.

1934년 11월23일. 3년1개월간의 공사 끝에 영도다리는 마침내 준공됐다. 일본의 대륙침략 전진기지를 위한 목적이었지만 어쨌든 당시로서는 일대 사건이었다. 도선을 타고 뭍으로 나들이하던 영도주민들에겐 '섬사람'의 설움을 씻어내린 한줄기 빛이었을 터. 더욱이 하루 7번씩 들어올려지는 다리는 부산은 물론 전국에서 구경꾼들이 몰려들 정도로 명소가 됐다.

"과거기록이나 원로들의 전언에 따르면 다리 개통식날 5만~6만의 구경꾼들이 몰려 들었다고 하지. 당시 부산인구가 15만명 정도였으니 영도다리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해. 다리가 들려질때면 양쪽으로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기다리는 모습조차 외지인들에게 볼거리였어." 영도토박이면서 시내로 통학했던 김이곤(66·영도도서관 운영위원회 위원장)씨의 회상이다.

 
  1966년 도개가 중단되기 전 매일 7차례씩 들어 올려지던 영도다리 모습. 다리 주위로 수많은 인파가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삶과 죽음, 애환의 가교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른 가수 현인 선생의 노래비. 영도다리를 건너 영도경찰서 옆에 위치해 있다.
영도다리의 애환은 6·25전쟁과 겹친다. 남부여대, 물밀듯이 밀려드는 피란민들이 봉래산 기슭 곳곳에 자리잡으면서 영도는 그야말로 거대한 피란민촌이 됐다. 다리 건설 이듬해인 1935년 급격한 인구증가로 남항동까지 전차가 연결되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힘들고 배고픈 시절이었다. 당시만해도 번화가였던 자갈치시장이나 국제시장 등에서 날품팔이로 입에 풀칠할 정도. 김이곤씨는 "요즘이야 다리를 걸어서 건너는 사람이 드문드문 하지만 당시엔 도로 중간 전찻길 주위는 늘 인파로 북적였다"며 "고달픈 산동네에 살아도 다리만 건너면 시내와 가까우니 이들에게 영도다리는 삶을 이어주는 생명줄이었던 셈"이라고 말했다.

신산스러운 생을 영도다리에서 마감하는 이들도 많았다. 특히 외롭고 힘든 객지생활을 견디지 못한 많은 피란민들이 이곳에서 몸을 던졌다. 이 때문에 당시 부산수상경찰서(오늘의 영도경찰서)에서는 인명구조반까지 따로 편성할 정도였다고 한다. 영도다리는 삶을 놓고 죽음으로 가는 가교이기도 했던 것이다.

영도다리의 명성과 애환도 1960년대 후반 이후 퇴색된다. 늘어나는 교통량을 감당못해 1966년 9월1일 마침내 다리의 도개를 중단한 것. 이후 1980년 '부산대교'가 준공되면서 그 기능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영도다리가 현재 '영도대교'란 공식명칭으로 바뀐 것은 부산대교의 준공 이후. 원래 영도다리는 '부산대교'가 공식명칭이었으나 새 다리에 그 이름을 넘겨주고 지금의 '영도대교'란 이름을 얻게 됐다. 역사만큼이나 이름도 우여곡절을 겪은 셈이다.

이제 영도다리는 또 한번의 진통을 겪고 있다. 철거와 보존을 놓고 오랜 논란 끝에 부산시는 기존 왕복 4차로를 6차로로 확장하고 도개기능을 복원키로 계획중이다. 그러나 최근 문화재청이 영도다리를 지방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권고, 확장 및 복원방법을 둘러싸고 또 한차례 논란이 예상되고 있다.

 

신라이후 목마장으로 명성


일제 강점기땐 저탄장으로  /  절영도의 유래와 역사

절영도(絶影島). 영도의 옛이름이다. 육지에 인접한 섬이어서 지리적으로나 기후적으로 영도는 신라시대 이후부터 말을 방목한 목장으로 유명했다. 영도의 말이 달리면 그림자가 끊길 정도로 빨랐다고 해 절영도라 불렸다고 한다. 해방 이후 절영도의 앞글자가 떨어져 나가 오늘의 영도로 불리게 됐다.

동삼동 패총에서 보듯 영도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시대로 들어서 영도는 변한 12국 중 독로국에 속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지증왕 6년 거칠산국으로 편입된 영도는 당시 기록에 '절영산(絶影山)'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신라 성덕왕이 통일을 이룬 김유신의 손자에게 절영산 말 한 필을 하사했다는 내용으로 이때부터 영도는 명마가 많은 국마장으로 이름났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조선시대 영도는 동래현, 동래부 소속이었다. 특히 고려말 이후 왜구의 잦은 출몰로 거주민이 많이 줄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때문에 조선후기까지 영도는 목마장과 벌목장으로 운영됐으며 바닷가에 소수의 어촌주민만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개항이후 한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영도는 급격한 변화에 내몰린다. 주변 제국열강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일본 해군의 저탄장(貯炭場)으로 조차되기도 했다. 1904년 러일전쟁후 일본의 한반도 지배권이 확립되면서 영도의 노른자위 땅 대부분이 일본인에게 넘어갔다. 이때부터 영도는 한적한 어촌을 벗어나 인구가 급속히 유입되기 시작한다.

1914년 부산부와 동래군이 분리되면서 영도는 부산부로 편입됐다. 1934년 마침내 영도다리가 개통됨으로써 영도는 뭍과 연결됐다. 이듬해엔 남항동까지 전차가 연결되면서 수산 및 조선 중심지로 탈바꿈하게 된다.

6·25전쟁은 영도를 또 한번 바꿨다. 당시 부산의 중심지였던 중·동·서구와 마찬가지로 도심과 가까운 영도로 피란민들이 몰려들었다. 봉래산 중턱 아직도 다닥다닥 붙은 집들은 당시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4000여년 신석기 흔적 가득


영도는 패총 유적지의 요람

 
  동삼동 패총 유적지와 패총 전시관.
 
아치섬과 해양대가 빤히 바라다 보이는 방파제 입구 오른쪽. 8000년 전 신석기인들이 살았던 동삼동 패총유적지다. 영도의 오랜 역사를 웅변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처음 발견된 이래 1969~1971년 3차례에 걸쳐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발굴돼 우리나라 신석기문화를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유적이다.

동삼동패총은 출토유물의 특징에 따라 5개 문화층으로 나뉜다. 약 8000년 전부터 3500년 전까지 4000년이 넘는 긴 세월의 흔적을 켜켜이 담고 있는 것이다. 발굴 당시 패총에서는 다양한 빗살무늬토기, 석기, 뼈연모, 토제품, 의례도구를 비롯해 당시의 생활환경을 보여주는 동물뼈와 어패류 등이 출토됐다. 특히 일본 규슈지방 신석기인들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죠몽토기와 흑요석 석기가 나오기도 했다.

지난 1999년 부산박물관의 발굴조사에서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독무덤과 조, 기장이 발견됐다. 7000여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독무덤은 당시의 매장관습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와 함께 집자리에서 발굴된 불탄 조와 기장은 잡곡을 중심으로 한 원시농경사회의 증거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2002년 개관한 동삼동패총전시관에는 이곳에서 출토된 100여점의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제1전시실에선 신석기시대 전반을 비롯해 동삼동패총 발굴지 모형, 동삼동패총인의 생활 영상 등을 관람할 수 있다. 제2전시실엔 당시 마을풍경, 식생활, 빗살무늬토기, 생활도구, 어로활동과 도구, 조개팔찌와 장신구, 신앙과 의례, 무덤, 대외교류에 관한 갖가지 유물이 전시돼 있다.

영도에는 이곳 외에도 패총 유적지가 더 있다. 동삼동패총에서 서북쪽으로 약 1.5㎞ 떨어진 동삼초등학교 아래 바닷가의 동삼동 상리패총은 신석기 말기 소규모 패총으로 알려져 있다. 또 해양대가 있는 아치섬과 영선동 1520번지 일대에서도 패총유적이 발굴됐으나 현재는 각종 개발로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동삼동 패총전시관은 월요일 휴관하며 관람료는 없다. (051)403-1193

 

메우고 잇고… 오지에서 요지로


영도의 오늘과 내일  /  주민숙원 육지연결망 남·북항대교로 가시화
21만평 동삼동 매립지 해양혁신 클러스터로

시청·법원 등 핵심 동력이 모두 빠져 나간 채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중부산권. 그 가운데 섬이란 지리적 한계로 '오지 아닌 오지'로 전락, 서러움을 가장 많이 받아온 곳 중의 한 곳이 영도다. 하지만 이런 영도에도 서서히 옛 영광을 되찾아 줄 '장밋빛 청사진'들이 기다리고 있다.

척박한 땅을 사통팔달 교통요충지·해양관광지로 탈바꿈시킬, 이미 상당수 본궤도에 올랐거나 계획 중인 개발프로젝트들을 들여다 봤다.

#부산의 오지서 교통 요충지로

 
  내년 연말 완공을 위해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남항대교(서구 암남동~ 영도구 영선동·1.93km). 북항대교와 더불어 향후 영도의 새로운 교통동맥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육지와의 불편한 교통은 영도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요인이자 주민들의 오랜 숙원이었다. 부산대교와 영도대교 외에 영도의 새로운 발전 지평을 열어줄 루트가 서구~영도구~남구를 한 축으로 연결하는 남항대교와 북항대교의 건설이다.

서구 암남동과 영도구 영선동을 잇는 남항대교(1.93km 왕복 4~6차선)는 내년말 완공 목표로 공사가 한창이다. 현재 공정률 48%. 영도구 청학동과 남구 감만동을 오가는 총연장 3.33km의 북항대교(사장교 1.01㎞·일반교량 2.32㎞)도 우여곡절 끝에 2010년 완공 목표로 늦어도 올 하반기께 착공에 들어갈 예정이다.

두개의 연륙 도로망이 구축되면 현재 서구에서 남구쪽으로 자동차로 40분 이상 걸리던 우회 거리가 10분 이내로 단축된다. 또한 기존의 광안대교를 비롯해 2009년 각각 준공될 명지대교와 가덕대교 등 5개의 순환 도로망이 부산의 모든 해안을 감싸게 된다. 엄청난 물류비용의 절감, 도심 교통량 분산 효과 외에도 해안과 바다를 다리 위에서 조망할 수 있는 관광자원으로도 활용가치가 무한하다.

현재 고가도로로 추진하려던 영도구 내 2.44km의 남·북항 접속도로 건설은 도시 슬럼화 등을 우려한 주민들의 반발로 잠정 중단된 상태다.

영도 지역의 교통수요를 처리하기 위해 경전철 건설도 계획 중이다. 부산역~중앙동역~영선로터리~영도구청~태종대를 잇는 11.8km의 경전철은 중앙로축을 따라, 부산역과의 연결성을 강화해 시내 교통량 분산효과와 함께 영도 주민들의 대중교통 이용의 편리성을 가져다 줄 것으로 보인다.

#해양메카로 변신하는 동삼동 매립지

 
지난 1978년부터 1995년까지 부산항의 준설토 투기장으로 조성된 이후 개발 용도를 찾지 못해 장기간 방치돼온 동삼동 일대 21만여평의 거대한 매립지가 '해양 혁신 클러스터' 지역으로 조명받고 있다.

우선 지난 2004년부터 국비 55억원을 들여 2.1km인 생태하천 조성공사를 시작으로 크루즈부두, 해양친수공원, 해양박물관, 해사고등학교 등이 매립지에 잇따라 들어선다. 이 중 8만t급의 초대형 유람선 접안이 가능한 1선석 360m 규모의 크루즈 전용부두 건립은 올 하반기 마무리 될 전망이다. 크루즈여객부두가 완공되면 이용인구는 하루 1만명 정도. 또 다른 파생효과가 창출된다. 올해 첫 삽을 뜰 8만7000평 규모의 해양친수공원은 잔디광장과 자연학습장, 인라인스케이트장 등 다양한 시설을 설치, 향후 해양종합레포츠타운으로도 활용된다.

매립지는 친수공간 외에도 해양 관련 공공기관을 유치할 최적지로 거론되고 있다. 분산배치 여부로 오랜 논란을 거듭한 끝에, 최근 해양 관련 공공기관 전부를 동삼동 매립지에 옮겨 오기로 사실상 마무리가 된 상태. 이런 결정은 영도구가 부산지역의 16개 구·군 가운데 가장 낙후된 지역 중 한 곳이라는 배려가 작용된 것으로 분석된다. 영도에 유치될 것으로 보이는 공공기관은 한국해양연구원, 국립해양조사원, 한국해양수산개발원, 국립수산물품질검사원 등 4곳. 연구인력 1271명에 한 해 예산만 1734억원에 이른다. 하지만 아직 국가균형발전위의 최종 확정은 나지 않은 상태다. 현재 영도구청은 "영도는 해양수산 혁신클러스터의 최적지로서 해양관련 기관의 전원 유치를 낙관한다"고 밝혔다.

영도다리 바로 건너편에 들어설 112층 규모의 제2롯데월드도 영도의 도약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경기 활성화와 하루 2만명에 달하는 유동인구의 증가는 영도의 관광지로 자연스럽게 연계되기 때문.

그밖에 해양수산부는 영도구 남항동에 선박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공급하는 국제선용품유통센터를 2009년까지 건립할 계획이다. 모두 260억원을 들여 건립하는 선용품센터는 항만서비스 향상, 고용창출과 함께 한 해 171억원 상당의 생산유발효과도 기대된다.
                                                                         글 = 김성한기자 shkim0@kookje.co.kr

 

복합문화공원사업에 애착


정부 예산·개발 지원 절실

 
  박대석
 
"영도는 인공적인 때가 전혀 묻지않은 자연 그대로의 관광지입니다. 봐도 봐도 싫증이 나지 않죠. 사람이 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땅입니다."

동삼동매립지와 아치섬 그리고 멀리 오륙도가 훤히 보이는 영도구청의 접견실에서 만난 박대석(67·사진) 구청장은 대뜸 영도의 자랑거리부터 이야기했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쳐진 보석 같은 경관. 영도의 비전과 경쟁력은 이런 천혜의 자연 조건에 있다는 의미일 게다.

박 구청장은 지난 1995년 허남식 전 구청장으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은 이후 민선단체장으로 11년째 영도의 수장을 맡아 왔다. 지방선거법의 '자치단체장 3선연임 제한' 규정에 따라 얼마후 구청을 떠나야 하는 그는 홀가분한 심경으로 그간의 소회를 밝혔다.

"각종 개발사업의 추진력과 연속성 측면에서 민선 구청장은 관선 때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자랑 같지만, 영도구의 살림을 도맡으면서 도시계획·문화·교통·행정서비스 등에서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고 자부합니다."

자신이 내건 29개의 공약 가운데 95% 가까이 달성했거나 현재 진행 중이라고 밝힌 박 구청장은 그 중에서 가장 애착을 갖는 사업으로 복합문화공원의 건립을 꼽았다. 오는 2008년에 완공될 복합문화공원은 문예회관, 도서관, 체육시설 등을 갖춰, 문화·여가 공간이 부족한 영도에 문화의 갈증을 풀어 줄 것으로 기대된다.

박 구청장은 시와 중앙정부에 대한 섭섭함과 함께 당부도 숨기지 않았다. "지나간 일이지만 시청이 빠져 나간 탓에 중구·동구·영도구의 피해가 막심합니다. 부산이 해양수도를 자처한다면 시청은 당연히 바닷가에 있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과거에 비해 영도는 많은 것이 열악합니다. 지역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예산과 개발사업에 더 많은 배분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오는 6월이면 야인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에게 지난 지방선거때 '기록에 남을' 박빙승부에 대해 넌지시 물었다. 당시 불출마선언 이후 다시 무소속으로 출마한 박 구청장은 한나라당 안성민 후보에게 재검표 결과 14표차로 신승했다. "선거운동할 시간이 부족했지만 떨어질 거라곤 전혀 생각 안했습니다. 하지만 재검표 때는 가시방석이었죠. 정말 하늘이 도왔습니다. 그래도 3선 연임한 기초단체장 32명 중 제가 유일한 무소속 출신입니다."
                                                                                                                 영도구청장

 

깡깡이 아주머니 아시나요?


수십년째 수리 선박 녹 제거작업 전담  /  일감줄고 배울 이 없어 곧 역사속으로…

 
 
각종 조선소와 선박수리업체들이 빼곡히 몰려있는 영도의 봉래동과 대평동 바닷가. '깡~' '깡~' 이곳에서 청아한 듯 맑게 퍼지는 '깡깡이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깡깡이(chipping)란 선박 수리시 도장을 하기 전에 외판에 낀 녹을 벗겨내기 위해 해머로 쳐내는 작업을 말한다.

규모가 큰 수리조선소에서는 이런 해머질 대신 유압송출방식으로 모래를 살포해 녹을 털어내지만 중소형 업체에서는 여전히 깡깡이로 녹을 제거한다.

육상으로 건져 올려진 거대한 선박, 외줄 밧줄에 묶인 나무판자 위에 몸을 지탱한 채 거의 온종일 그라인드 작업과 육중한 망치질을 해대는 여인들. 바로 영도의 '깡깡이 아주머니'들이다. 영도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깡깡이 아주머니들은 대략 60~70명. 태반이 경력만 40년을 넘긴 65~70세의 고령들이다.

깡깡이의 노동 강도는 '중노동' 수준. 유독 먼지 등을 피하기 위해 한여름에도 방독면과 긴 소매를 입어야 할 만큼 현장은 위험하고 열악하다. 웬만한 장정들도 10분이면 파김치가 돼버릴 정도. 그러다보니 아이러니하게도 '남자 깡깡이'는 한명도 없다. 일감이 부정기적인 데다 너무 힘들어 남자들이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았기 때문. 그렇게 깡깡이는 '금남의 영역'으로 인식된 채 수십년이 흘렀다.

영도의 조선소에서 42년 동안 깡깡이를 해왔다는 김순혜(가명·68)씨는 "수십년간 이 일을 했지만 여전히 힘들어. 그래도 깡깡이로 자식들 다 키웠으니 고맙게 생각해야지, 그런데 갈수록 일감이 줄어 큰일이야"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 부산 조선산업의 근간이었던 영도. 업종 자체가 이미 사양길에 접어든데다 정부의 어장축소와 어선감축 정책 등으로 인해 폐업과 도산이 줄을 이었다. 현재 대평동과 남항동 일대의 조선관련 업체는 IMF외환위기 전에 비해 절반도 남지 않은 상태다.

깡깡이 아주머니들이 고령인 탓에 몇년 후 이들이 퇴역하고 나면 대체 인력이 전무한 실정이라고 한다. 대림조선소의 형남진 이사는 "작업이 워낙 고되 이 일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다"며 "깡깡이 아주머니들이 그만두고 나면 당장 대책이 없는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녹의 여인' 깡깡이 아주머니, 생계를 위해 망치를 들었지만 한국 조선산업을 태동시킨 알려지지 않은 산업역군들이다.

 

태종대서 나홀로 부산 관문 100년을 밝혔다


영도등대 100년  /  직원 4명 파도·바람 등과 싸우며
입·출항 선박 안전 운항 '파수꾼'  /  개·보수 통해 해양문화공간으로

 
  태종대 앞바다에서 영도 등대를 바라본 모습. 암벽위에 솟은 흰 등대의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바다를 빼고는 말할 수 없는 도시 부산에는 유인 등대가 3곳 있다. 영도 등대, 가덕도 등대, 오륙도 등대. 그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영도 등대. 일명 태종대 등대로도 불리지만 정확한 이름은 영도항로표지관리소다. 영도 등대는 1906년 12월 우리나라에서 10번째로 설립됐다. 올해로 100년째 되는 영도 등대는 지난 2004년 대대적인 개보수를 통해 해양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천혜의 자연경관 태종대와 더불어 해양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영도 등대를 돌아보자.

#영도 등대를 지키는 사람들

 
  영도항로표지관리소(영도등대) 김흥수 소장이 등대 맨 꼭대기에 있는 등대 전등을 살펴보고 있다. 이 전등은 18초마다 3번 깜박여 흰 빛을 내보낸다.
영도 등대에는 소장 1명, 부소장 1명, 직원 2명 등 총 4명의 직원이 근무한다. 하지만 이 4명이 한 자리에 모이기는 대단히 어렵다. 일반 회사처럼 직원 전체가 참여하는 행사나 회식 등은 아예 불가능하다. 저녁 퇴근 시간인 오후 6시 이후부터 다음날 출근 시간인 오전 9시까지 밤을 꼬박 새우는 당직 직원이 매일 한 사람씩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등대지기들은 고독과 친구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도 등대는 국내 최초로 오전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하는 출퇴근제를 실시하고 있다. 4일에 한 번씩 당직이 돌아오긴 하지만 다른 등대지기들과는 달리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을 좀 더 가질 수 있다.

등대지기들이 외로운 것은 가족이나 친구들과 가까이 있을 수 없기 때문. 하지만 영도 등대는 그런 점을 보완해 국내의 다른 등대 근무자들의 부러움을 산다. 사무실 창 밖으로는 끝없는 바다가 펼쳐져 사무실이라는 느낌이 전혀 없을 정도다.

영도항로표지관리소 김흥수(39) 소장은 "태풍이 오면 컵 속에 담긴 물이 출렁댈 정도로 등대가 흔들리고 저 앞 생도가 파도로 다 뒤덮일 정도지만 경계 근무에 집중하다보면 금방 익숙해진다"며 살짝 웃었다. 영도 등대는 초속 70m의 강풍에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됐다. 지난 2003년 태풍 매미때 가덕도에서 측정된 가장 센 바람이 초속 65m였고 당시의 그 바람으로 부산항 컨테이너 크레인이 넘어졌던 것을 고려하면 대단히 강한 바람에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영도 등대의 역할

등대 본연의 임무는 바다를 지나는 배들의 안전한 운항을 도와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낮에도 배에서 등대가 잘 보이도록 모든 등대는 흰색으로 칠한다. 밤에는 잘 보이지 않으므로 프리즘 렌즈 등명기를 사용해 18초마다 3번씩 빛을 발사해 24마일까지 보이게 한다. 안개, 비 등으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을 때는 전기혼을 사용해 45초마다 뱃고동 소리 같은 '뿌우 뿌우' 소리를 5초간 낸다. 혹시나 이마저 들리지 않을 것을 우려해 인공위성에서 GPS 위치정보를 수집해 오차를 수정한 DGPS 정보를 전파로 제공한다. GPS 정보의 오차는 200m 이상일 경우도 있지만 DGPS는 10~15㎝ 정도로 거의 완벽한 위치 정보를 제공해 배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도와준다.

#해양문화공간으로서의 영도 등대

영도 등대는 등대동, 휴게동, 전시동, 기타시설로 나뉜다. 등대내에 갤러리, 도서실, 영상관 등을 설치해 등대 자체의 기능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 체험도 할 수 있게 탈바꿈 한 것. 지난 17일에는 부산예총이 주관한 '바다와 문화예술의 첫디딤'이라는 행사를 가져 음악, 미술, 무용 등 모든 분야의 예술과 해양을 조화시키려 노력중이다. 영도 등대를 새단장 하는데에는 총 45억원이 들었다. 지난 2004년 개보수 이전까지는 등대로 내려가는 계단이 모두 돌계단이었다. 돌계단은 비가 오면 너무 미끄러워 안전사고 위험도 많았을 뿐더러 직원들이 하루에도 몇차례씩 오르내리다 보면 다리에 무리가 올 정도로 힘들었다고. 하지만 바깥의 모든 계단을 나무 덱으로 교체하고 나서는 흰 등대와 미적으로도 잘 어울릴 뿐만아니라 관람객들도 보다 안전하게 관람할 수 있게 됐다. 덱을 내려오는 중간 중간에는 부산 해양 관련 시설을 소개하는 패널들이 설치돼 있는데 패널 주위에는 가족단위의 관람객들이 관심있게 살펴보는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다.

'See&Sea 갤러리'는 한쪽면이 다 창으로 돼 있어 다양한 예술작품을 전시할 수 있다. 오는 28일까지는 계간 '버질'소속의 김영신 화가가 서양화 전시회를 연다. 영도등대는 부산의 관광명소인 태종대 안에 있다. 태종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전형적인 해안단구가 발달한 곳으로 마치 시루떡을 여러겹 쌓아 놓은 듯 켜가 보이며 그 위는 평평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또 이 일대가 부산시지방문화재기념물로 1972년 지정돼 왔으며 지난해 11월 명승 제17호 국가지정 문화재가 되었다. 특히 주변에 위치한 옛날 신선들이 노닐던 곳으로 전해지는 신선바위는 가장규모가 큰 파식대다. 왜구에 끌려간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도 등대 오른쪽으로 보인다.

영도항로표지관리소 김 소장은 "앞으로 상시 공연장도 150여평에 관객석 200석 규모로 건립할 예정이며 전문 큐레이터나 학예사의 도움을 받아 전시장 안내나 문화공연도 마련할 계획"이라며 영도등대가 시민들의 문화공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영도항로표지관리소에서 관리하는 곳은 등대 왼쪽의 자갈마당과 오른쪽의 망부석이 있는 신선바위까지 모두 포함된다. 등대 내 모든 관람료는 무료. 이용시간은 오전 10시~오후 5시. 갤러리 대관이나 문화공연 관련은 홈페이지(www.yeongdolighthouse.go.kr)에서 안내받을 수 있다. (051)405-1201

 

"영도는 부산서 가장 아름다운 곳"


성은 물 '하' 이름은 '1'이라는 의미  /  영도 하씨 시조

 
  하일씨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의 이름을 자신의 본관으로 삼아 성씨를 만든 사람이 있다. 영도 하씨의 시조인 하일씨와 전화 인터뷰를 통해 영도 사랑의 마음을 들었다.

방송인으로 잘 알려진 하일(미국명 로버트 할리)씨는 지난 1997년 하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하씨는 "성을 하(河)로 정하게 된 것은 자신이 지난 92년부터 97년까지 살았던 영도구 청학동 때문"이라고 밝혔다. 바다로 둘러싸인 영도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있던 그가 물 하 자를 성으로 선택한 것. 일 자는 자신이 본관을 영도로 하는 영도 하씨의 시조로 가장 처음이라는 숫자 1의 발음에서 따 왔다. 하일이란 이름은 자신의 미국 이름이었던 로버트 할리와 발음이 비슷하기도 하다.

그는 "지난 97년에 귀화하면서 귀화신청서를 법무부에 제출할 때 한국 이름이 필요해 짓게 됐다"며 이름을 바꾸는 것에 대해 아내 명현숙씨도 대 찬성이었다고. 하씨는 "아내가 저를 많이 사랑하니까 한국 사람으로 귀화하며 이름도 바꾼다고 생각하는 듯했다"며 "일종의 사랑의 표현 아니겠냐"며 웃었다.

그는 한국 이름을 갖고 나서는 어디서든 영도 하씨 시조라고 자랑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하씨가 신혼집을 차린 곳은 아내의 친정이 있는 진해와 부산 가운데인 경남 용원. 그러다 직장이 있던 중앙동과 가까운 가까운 영도로 이사를 왔단다.

하씨는 영도 토박이처럼 영도에 관한 설화를 말해줬다. 영도 봉래산 산신은 여성으로 '봉래산 할매'라고 불린다. 이 산신은 영도로 이사를 들어오는 사람들은 이쁘게 봐 하는 일마다 잘 되게 해주고 성공하게 도와준단다. 하지만 영도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면 그 복을 앗아간다고. 더 재미있는 것은 옮긴 장소에서 봉래산이 보이면 화를 입고 아예 멀리 떠나 산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으면 그렇지 않단다.

하씨는 "저는 서울에 있고 광주, 전주에 왔다갔다 하니까 아직 할매가 이뻐하는거 같애예"라며 웃었다. "거(영도)서 오래 살면서 방송도 시작하고 여러모로 좋은 일 많았지예. 다 봉래산 할매가 도와주시가 그랬다 생각합니더"라며 정감있는 부산 사투리로 영도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문제는 모든 신분 증명 문서와 카드. 신용카드, 은행 통장, 항공사 마일리지 카드 등 모든 카드의 소유주를 로버트 할리에서 하일로 바꾸느라 고생했단다. 게다가 그는 이민법을 전문으로 다루는 국제변호사로 미국을 자주 방문했어야 했다. 그런데 귀화할 때 영사들이 한국으로 귀화하면 나중에 미국 비자를 받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그에게 충고했었단다. 하지만 정작 귀화후 비자신청하러 가서는 간단하게 받았다고. 개명후 특별히 어색한 것은 없었다. 단지 사람들이 사인해 달라고 할 때 하일이라고 써야 하나, 로버트 할리라고 써야하나 고민된 적은 있었다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하씨는 "영도는 부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며 "매일 봉래산 꼭대기까지 운동삼아 등산하면서 점점 영도의 경치에 빠져들었다"며 영도를 그리워했다. 그는 귀화하고 나니 주위분들이 더욱 좋아해주는 느낌을 받아 항상 마음이 푸근하다고 말했다. 지금은 서울 여의도에 살고 있고 여전히 부산도 자주 온단다.

현재는 전라도 광주외국인학교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좋은 일들을 갚아줄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세계서 하나 뿐인 캠퍼스 내 부두


섬 전체가 학교 부지로 한국 해기사의 요람  /  한국해양대와 아치섬

 
  한국해양대학교와 학교가 들어선 아치섬의 모습.
 
영도라면 빼놓을 수 없는 두 군데 명소가 있다. 한국해양대학교와 그 곳이 들어선 섬, 아치도다. 영도와 불과 1.8㎞ 떨어져 걸어서 갈 수 있는 아치도와 해양대에 대해 알아봤다.

해양대는 두 가지 면에서 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우선 섬 한 곳 전체를 학교로 사용하고 있는 곳은 한국해양대 뿐이다. 또 학교 내에 배를 댈 수 있는 캠퍼스 부두가 있는 곳도 이 곳이 유일하다.

해양대가 있는 조도(朝島)의 다른 이름은 아치섬. 해양대 조옥래 홍보팀장은 "예전에 누울 와 자를 써서 와치섬이라고 부르던 것이 세월이 지나며 발음이 변해서 아치섬이 되었다"며 아치섬의 이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치섬의 꼭대기에는 해군 레이더 기지가 있다. 학교내에 레이더 기지가 있다는 것도 해양대의 특이한 점. 영도에서 해양대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동삼동패총전시관'도 있다. 영도구 동삼동에서 나온 패총과 관련된 유물을 전시한 곳으로 매주 토, 일요일에는 문화유산해설사가 전시장 안내를 맡는다. 오전 9시~오후 6시까지 개관하며 신석기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해양대는 1945년 경남 진해에 설립된 진해고등해원양성소가 시발점이다. 그 이후로 인천, 부산 거제리 등으로 교사를 옮기다 1974년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 원조자금 35만달러로 해양대학을 아치섬에 신축했다. 당시는 해운인력이 외화벌이의 가장 큰 역할을 담당했으므로 국가적인 지원이 활발했었다. 해양대의 실습선인 한바다호는 75년 일본 우츠리 조선소에서 만들어 해양대에 제공됐다. 이때부터 현재의 해양특성화 대학의 면모를 갖춘 것.

현재 국내 선장, 기관장, 항해사 등 고급해운인력인 사관들과 해기사들의 90% 이상이 이곳 해양대 출신이다. 해양관련 산업에서 해양대가 미치는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바다에서는 활발한 활동을 자랑하지만 육상에서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이 해양대의 단점. 이에 대해 조 팀장은 "남·북항대교가 건설되고 경전철이 지나는 2010년 이후로는 영도가 교통의 중심지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며 "동삼동 매립지에 해양·수산관련 기관들이 모여 마린 테크노빌리지를 형성하면 학교와 더불어 시너지효과를 낼 것"이라고 기대했다.

 

천혜의 해안절경… 최고의 눈요기


파도와 함께 거닐 수 있는 보석같은 산책로  /  유람선 타면 풍광에 '멀미'
강식염온천수 피로 회복에 그만

 
 

# 관광 명소

감히 말하고 싶다. 영도를 마음먹고 차분히 둘러보면 전국 여느 관광지 못잖은 천혜의 명소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오래전 시쳇말로 회자되던 '공갈산의 영도'가 아니라 '아니 이렇게 아름다운 해안절경이었나'하며 회한의 감정이 분명 앞설 것이라고 확신한다.

태종대, 2송도길이라 불리는 절영해안도로와 그 아래 바다쪽 절벽과 울창한 숲 사이로 도심과 푸른 바다, 그리고 기암절벽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는 새 명소 절영해안산책로는 분명 나그네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 제17호 태종대

 
  태종대의 얼굴 신선바위와 망부석. 생도(주전자섬)도 왼쪽에 보인다.
 
작금의 태종대는 운동선수로 치자면 '국제용'이다.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부산보다는 전국, 더 나아가 해외라는 큰 물에서 더 빛을 발하는 명소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부산시민들에게 평가절하돼 왔다.

현장의 목소리도 이를 뒷받침한다. 태종대유원지사업소에 따르면 유료 탐방객의 60%가 외지인이고 부산시민들의 재탐방 사이클도 무려 3년이다. 3년 만에 찾는 이유도 외지에서 친지나 친구들이 오면 안내하는 정도란다. 보석같은 명소를 이렇게 홀대하다니 그저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1975년도에 조성된 75광장.
신라 태종무열왕이 이곳에서 활을 자주 쏘았다 해서 붙여진, 영도의 맨 끝자락에 위치한 태종대. 오랫동안 부산시지방문화재 기념물 제28호에 머물다 지난해 11월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 제17호로 승격됐다. 혹자들은 얼핏 바다와 접한 해안경관만을 떠올리겠지만 알고보면 해발 250m 태종산이 바다와 만나 일궈낸 대자연의 오묘한 작품이다. 4.3㎞의 일주도로는 산허리를 개발한 것.

이와 관련, 태종대유원지사업소 최해관 소장은 "정상에 주둔한 군부대가 걸림돌이긴 하지만 태종산에 등산로가 개설되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탐방객이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뭐니뭐니해도 태종대의 얼굴은 신선바위. 30m쯤 바다를 향해 튀어나온 대(臺)다. 애초에는 하나의 대였겠지만 풍화와 해식(海蝕)작용에 의해 둘로 갈라져 있다. 바다를 바라보고 오른쪽은 망부석이 외로이 서 있는 신선바위, 왼쪽이 태종암(바위)이라 한다. 최근 영도등대가 새로 들어서면서 신선바위로 내려서는 길이 국립공원 탐방로처럼 목재덱으로 조성돼 불편함이 전혀 없다.

 
해양대 앞바다 일출.  
머리 위로는 등대와 이를 상징하는 조형물, 그리고 하늘을 향해 치솟는 듯한 기암절벽과 그 절벽이 이뤄놓은 천연벽화가 금상(錦上)이라면 '공룡의 무도장'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공룡발자국이 난무하고 산산이 부서지는 포말, 그리고 코 앞에 자리매김한 일명 주전자섬인 생도의 전망은 첨화(添花)라 불러도 무난할 듯하다.

전망대 또한 스쳐갈 수 없는 명소. 한때 자살바위라고도 불렸지만 지금은 새 건물로 말끔히 단장돼 있다. 30년전 당시로는 거금인 290만원으로 조성된 모자상도 그대로다. 먹고 살기 어려울 때 워낙 이곳에서 자살하려는 사람이 많아 모자상 옆에 천막을 친 구명사(救命寺)라는 절이 생겨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는 사실이 이제 전설아닌 전설로 내려온다. 전망대 공사로 인해 일주도로 인근으로 이주한 구명사는 지금도 그때의 영혼을 위로하고 있다.

태종대의 진면목을 보기 위해선 유람선이 필수. 선착장이 네 곳이다. 곤포의 집, 자갈마당, 등대 선착장은 태종대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근 감지해변에서도 탈 수 있다. 해양대가 위치한 아치섬(조도)까지 다녀오는 유람선(왕복 35분)을 타면 주전자섬 전망대 자살바위 신선바위 망부석 오륙도 아치섬과 태종대의 수려한 해안절경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이 중 곤포의 집 선착장과 붙어있는 곤포의 집 풀은 유년시절의 추억을 떠오리게 해 눈길이 쉬이 옮겨지지 않는다.

#영도의 새 명소 절영해안산책로
 
  영도의 새 명소로 떠오르는 절영해안산책로.
사실 내로라하는 전국의 해안절경 가운데서도 절영해안산책로처럼 포말이 부서지는 하얀 파도소리를 들으며 직접 해안가를 산책할 수 있는 꿈의 길은 거의 전무하다. 영도의 숨은 보석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점은 영선동 반도보라아파트 뒤 남방방파제 끝단. 입구에는 정박한 배 모양의 하얀 관리동과 '절영해안산책로'라 적힌 커다란 간판이 걸려있으며 종점은 부산남고 인근의 동삼동 중리해변. 총 길이 3.3㎞, 왕복 3시간 정도 걸린다.

영도역사를 41편의 테마로 조성한 타일벽화를 시작으로 영화촬영지로 유명한 피아노 계단, 백련사 밑 이송도파고라, 파도광장, 무지개 분수대, 대마도 전망대, 낚시터, 절영전망대, 장미터널, 태평양 전망대를 출렁다리, 철계단, 나무계단, 돌계단을 오르내리며 등산하는 기분으로 산책한다. 한마디로 테마 산책로다. 가까이는 송도 암남공원, 멀리는 대마도까지 볼 수 있다.

산책로 곳곳에는 75광장 등 해안도로로 오르는 11곳의 길이 열려있어 체력에 맞게 걸으면 된다.

산책 도중 만나는 해녀촌에선 갓잡은 고둥 멍게 등 해산물을 맛볼 수도 있다. 최근에는 입소문을 타 부산국제영화제를 위해 부산을 찾은 전국 젊은이들의 단골 순례코스로 인기를 더해가고 있다.

#태종대온천 자유랜드, 그리고 영도사격장
 
  태종대 자갈마당.
금정산 산행 후 동래온천이 있다면 봉래산 산행과 태종대 탐방 후엔 태종대 온천(051-404-9001)이 있다. 태종대 입구에 위치한 태종대온천은 국내에선 드물게 식염성분이 많이 함유된 강식염온천수. 물의 부력을 이용한 6개의 건강탕과 한약재를 섞은 다시마탕, 노천탕이 인기다. 지난해 10월부턴 찜질방도 동시에 운영하고 있는데 굵은 소금으로 찜질을 하는 소금찜질방이 독특하다.

절영해안도로변 함지골수련원 바로 앞에 위치한 영도관광사격장(051-405-9130)은 부산 최초의 실탄 사격장으로 외국인 특히 일본인들이 즐겨찾는 명소. 최근에는 내국인들도 점차 늘고 있다. 22구경에서 45구경 등 구경별로 모든 권총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중 9㎜베르타, 357매그넘이 인기다. 10발 1만5000~3만원.

자녀와 함께라면 태종대 정문 우측에 위치한 자유랜드도 가볼 만하다. 바이킹 대관람차 등 19종의 놀이시설을 갖추고 있다.    글 = 이흥곤기자 hung@kookje.co.kr
                                                 사진 = 박수현기자 parksh@kookje.co.kr

 

 

외지까지 입소문 정통 복요리 전문점


뼈 끓인 지리국물 일품… 30년 맛자랑  /   풍광과 맛에 두번 놀라는 가족식당
추천 맛집 셋

 
 
#복어요리의 진수 제주복국

복 마니아들이 즐겨찾는 영도의 정통 복요리 전문점. 영도뿐만 아니라 해운대 기장 심지어 울산 등지에서도 일부러 찾아온다. 오랫동안 바깥주인이 복어 유통업에 종사해 무엇보다 신선한 재료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복지리와 복매운탕도 일품이지만 안주인 백은자씨의 추천메뉴는 '복샤브샤브'. 복을 장만한 후 나오는 복어 머리와 뼈 등을 끓인 육수에 얇게 저민 복어살을 살짝 데쳐 버섯이나 야채와 함께 양념장에 찍어 먹는 맛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별미로 기억된다. 복튀김과 복껍질을 버무린 복초회도 기본으로 나오며 마지막에 제공되는 복죽 또한 깔끔하다. 1인분 3만원. 복국(은복) 8000원. 그 유명한 남천동 초원복국 안주인이 친언니다. 동삼동 부산체고 근처에 위치. 태종대서 차로 10분 거리. (051)405-5050

#원조 영도포항물회

 
영도대교를 지나 KT 영도지점 후문 물회골목에서 가장 오래되고 맛있는 집. 횟집을 겸하는 다른 집과 달리 오로지 물회 하나만을 고집한다. 포항이 고향인 안주인이 옛 '영도물회'를 30년간 운영하다 3년전 100m쯤 떨어진 이곳으로 확장해서 옮겼다. 사시사철 언제나 눈볼대 회만 고집한다. 무채 오리 파 배 상추 고추 마늘 깨소금 당근 참기름 등을 담은 물회가 나오면 여기에 흑설탕 식초 고추장을 취향에 맞게 넣은 다음 비벼 먹는다. 포를 뜬 후 남은 뼈를 끓인 맑은 지리국물이 특히 일품이다. 지리국물만을 먹기위해 찾는 손님이 생겨날 정도다. 6000원. (051)417-5388

#공원인가 음식점인가 가족식당 목장원

 
한마디로 부산을 대표하는 전통 가족식당. 처음 찾는 사람들은 주변 풍광에 놀라고 맛에 또 한번 놀란다. 절영해안도로변 봉래산 손봉 기슭에 위치, 동화 속에서 본듯한 하얀 언덕위의 집을 연상케 한다. 푸른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배들과 맑은 날이면 대마도까지 조망할 수 있는 망원경, 언덕에 배치한 모형 소들의 아기자기함은 가족 단위 모임으로 안성맞춤이다. 목장원의 모태인 숯불갈비, 피자와 스테이크를 전문으로 하는 레스토랑 랜치가 있다. 고기 맛 좋기로 소문난 안동이나 횡성의 한우를 주로 사용하며 가자미 식해, 묵은지, 물김치 등 밑반찬 또한 웬만한 한정식집보다 맛있다. 오는 3월말부터는 기존의 콩요리 전문점 대신에 횟집도 운영할 계획이다. (051)404-5000

 

1893년 돛 없는 거룻배로 출발


지금 직장인·학생이 주로 이용  /  한적한 운치 데이트 장소 인기
대평동~자갈치 영도도선

 
  영도구 대평동과 중구 자갈치를 오가는 추억의 영도도선. 느릿느릿해 보여도 육상교통수단보다 3분의 1가량 시간이 단축된다.
 
"와! 하나도 변한 게 없네요. 아직 이 배가 다닐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멀리 대구에서 왔다는 장용철(37)씨. 10여년 전 우연히 타 본 나룻배를 다시 보자 옛 친구를 만난 듯 미소를 지었다.

영도경찰서 뒤편 대평동 도선장. 이곳에는 유구한 세월 영도 앞바다를 가르는 나룻배 한 척이 있다. 영도대교를 벗삼아 느릿느릿, 그렇다고 굼뜨지는 않다. 직선거리로 오가는 덕에 대평동~자갈치가 4분이 채 안걸린다. 네발 달린 육지의 교통수단을 타면 돌아돌아 15분은 족히 걸릴 것을.

영도 대평동에서 남포동 자갈치를 하루에도 쉼없이 오가는 영도 도선(渡船). 뱃길이 열린 것은 1893년부터, 당시에는 돛도 없는 거룻배로 출발했다. 1934년 영도대교가 놓이기 전까지 영도와 뭍을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1910년께 세미디젤 동력선으로 바뀐 도선은 엔진에서 '통~통~' 소리가 난다고 해서 그때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통통배'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후 1987년, 통통배는 당시 최신 선박으로 한번 더 새 단장을 하고 지금에 이른다. 더불어 '통통'대는 추억의 뱃고동은 더이상 들을 수는 없다.

도선 운행은 일출 전 30분부터 일몰 후 30분까지. 운행시간이 일출·일몰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해상교통안전법 때문. 어른 900원, 소인 500원. 두평 남짓한 대합실은 대평동과 자갈치 두 군데 있지만 요금은 대평동 선착장에서만 징수한다.

옛날 호시절에 비할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쏠쏠하게 사람들이 배를 오르내린다. 주 이용층은 영도와 남포동 쪽을 오가는 인근 직장인과 학생들, 그리고 자갈치에 장을 보러가는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교통수단이다. 맑은 날이면 재미삼아 도선에 오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현재 대평동~자갈치를 오가는 도선은 48명 수용 가능한 12t짜리 아담한 여객선. 선실 내부는 사람들이 걸터 앉을 수 있는 간이 의자가 양쪽으로 놓여 있고, 선창을 통해 보이는 영도 앞바다가 꽤 정겹다. 너른 선미 쪽에도 의자가 있어 바닷바람을 쐬면서 갈매기들과 경주하는 재미를 맛볼 수 있다. 운치있다는 소문에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종종 애용된다. 자갈치축제나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이면 때 아닌 대목을 맞는다고.

지난 1986년부터 도선을 인수해 운영하고 있는 김희수 사장은 "한때 하루 1000명이 넘던 이용객이 근래들어 많이 줄었다"며 "그래도 육상보다 이동시간이 훨씬 짧고 경제적이어서 사람들이 꾸준히 찾는다"고 말했다.

영도 남항동에서 서구 충무동까지 다니던 또 다른 도선은 승객 감소 등으로 폐업, 지난해부터 뱃길이 끊겼다.

 

빼어난 절경·접근성 뛰어난 '꾼들의 천국'


태종대권 부산 최고 낚시터 즐비  /  생도, 대물일색의 알토란 포인트
중리권, 철따라 다양한 어종 손맛

 
  영도는 섬 전체가 낚시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낚시꾼들의 천국이다. 사진은 감성돔의 묵직한 손맛을 볼 수 있는 동삼중리 꽃가리 일대.
 

# 낚시터

 
부산의 수많은 낚시터 중 영도는 부산꾼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곳이다.

경관이 빼어난 데다 접근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갯바위 낚시터 포인트엔 배로 10분이면 진입 가능하다.

이처럼 접근성이 좋다 보니 영도의 갯바위와 방파제 낚시터에는 평일 휴일 가리지 않고 많은 꾼들이 찾고 있다.

태종대와 중리 그리고 남항방파제가 특히 꾼들이 많이 몰리는 곳이다.

#태종대 일대

부산권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낚시터다. 도심에서 가까우면서 먼 바다를 바로 접하고 있어 원도권 못잖은 갯바위 여건을 갖춘 곳이 지천에 널려 있다.

이 때문에 어종도 다양한 데다 어종 불문하고 대물들이 많이 잡힌다. 요즘처럼 근거리 낚시터들이 휴어기로 접어든 듯한 느낌이 들 때에도 이곳 태종대 일대의 갯바위만큼은 항상 꾼들로 북적댄다.

▲이층바위=태종대 유원지 내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바로 아래 보이는 자그마한 돌섬이 이층바위이다. 발판이 편하고 많은 인원이 내려도 한꺼번에 낚시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갯바위의 여건이 좋다. 주로 감성돔과 참돔을 노리는 꾼들이 많이 찾는다. 요즘에는 감성돔 망상어 학꽁치가 잘 잡힌다.

 
  태종대 전망대 아래 물개바위.


▲물개바위=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이층바위 동쪽에 위치한 비스듬한 바위섬이다. 이 바위 또한 어종 불문하고 대물급 일색이라 꾼들에게 대단히 인기가 있다. 하지만 비스듬하기 때문에 안전에 유의해야 한다. 특히 너울파도가 있는 날에는 상당히 위험하다.

▲동백골=하리 선착장에서 출발할 경우 이층바위나 물개바위에 도착하기 전 육지로 약간 들어간 만에 있는 지점이다. 겨울철 북서풍이 심할 경우에도 낚시가 가능하다. 감성돔의 씨알이 아주 굵고 마릿수 또한 좋아 태종대에서 상당히 인기있는 포인트다.

▲꿀베미=물개바위 서쪽에 위치한 포인트다. 잡히는 어종이 다양하고 씨알이 특히 굵은 데다 마릿수까지 좋아 자리 다툼까지 일어나는 곳이다. 물밑의 환경이 물고기가 서식하기 좋아 사시사철 다양한 어종을 만날 수가 있다.

▲조도 방파제=해양대학교가 있는 아치섬 뒤편에 있으며 태평양의 거센 파도를 제일 먼저 막아주는 부산항의 외곽 방파제이다. 수심이 깊어 낚시하기에 다소 어려움이 있으나 그만큼 대물급이 많이 어슬렁거린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곳이다. 가족들과 함께 편하게 낚시할 수 있어 만만하게 보기 쉬우나 결코 동네낚시터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일명 주전자섬이라 불리는 생도.

▲생도=누가 뭐래도 태종대권에서 가장 인기가 있으며 전국의 꾼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섬이다. 일면 주전자섬이라 불리며 전망대에서 정면에 보이는 조그만 섬이다. 섬의 경사가 급하고 지형이 험해 낚시할 때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이곳은 한번 걸면 대물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대물일색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다. 한겨울에는 낚시인구가 다소 주춤하지만 나머지 기간에는 감성돔 참돔 돌돔 농어 벵에돔 등 고급어종들을 모두 만날 수 있는 도심 속 알토란같은 낚시터이다.

#동삼중리 일대 낚시터

중리 선착장에서 선외기로 10분이면 갯바위 낚시터로 진입 가능할 정도로 출조하기에 편하다. 철수도 전화 한통이면 바로 가능해 한 물때를 노리고 진입하는 낚시꾼들도 상당히 많을 정도로 철수와 진입이 용이하다.

▲꽃가리 일대=지난해 가을 '꽃가리 파동'이라 할 정도로 감성돔이 잘 잡혔다. 주변 수심은 6~8m 정도. 교과서적 감성돔 낚시터다. 영등철에도 감성돔이 잡힐 정도로 인기가 좋다. 요즘도 망상어 등 잡어의 성화만 잘 피하면 묵직한 감성돔의 손맛을 즐길 수 있다.

▲기지밑 일대=동삼중리 선착장에서 꽃가리 쪽으로 가다보면 툭 튀어나온 곳부리 일대를 말한다. 조류의 흐름이 좋고 수심이 약간 깊어 대물 감성돔들이 수시로 출몰한다.

▲금강산바위=중리 일대의 갯바위 포인트 중 최고라 해도 손색이 없는 곳이다. 목장원 건너편 75광장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밑에 보이는 조그만 바위섬이 이곳이다. 사시사철 꾼들이 몰린다. 고기가 한창 잘 잡힐 때에는 선착장에서 밤을 새워가며 줄을 설 정도이다.

▲절영해안 산책로 일대=도보로 갈 수 있는 포인트가 즐비하게 산재해 있는 곳이다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가는 곳마다 낚시 포인트가 즐비하다. 사시사철 고등어 전갱이 망상어를 비롯한 잡어들이 득실거리기 때문에 동네꾼들에게는 돈 안들이고 손맛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산책과 함께 낚시의 묘미를 함께 즐길 수 있다.

#남항 방파제 일대

영도의 서쪽에 자리잡은 방파제. 규모가 크고 안전해 동네꾼들이 가장 선호하는 자리이다. 철따라 다양한 어종이 잡히는 잔손맛풀이에는 그저그만인 곳이다. 요즘에는 전어와 망상어 학꽁치가 잘 잡혀 동네 단골꾼들이 많이 찾고 있다. 인근의 영선동 반도보라아파트 앞 테트라포드에서도 씨알 굵은 전어와 망상어가 잘 잡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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