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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리더, 실패한 리더
내가 생각하는 성공한 리더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이다. 먼저 정주영 회장을 소개하면 현대그룹의 창업자로 아호는 아산(峨山)이다.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리 아산마을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의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한 살림살이로 인하여 열 살 무렵부터 농사일을 하였으며, 1930년 열다섯 살의 나이로 송전소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진학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농사를 도왔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차례 가출을 반복한 끝에 1937년 9월 경일상회라는 미곡상으로 사업을 시작하였다.
1940년 서울에서 가장 큰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으로 일하고 있던 이을학의 소개로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1946년 4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였고, 1947년 5월에는 현대토건사를 설립하면서 건설업을 시작하였다. 1950년 1월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 현대그룹의 모체가 된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71년부터 현대그룹 회장을 지냈다.
1950년의 6·25전쟁 후 점차 늘어가는 건설수요를 감안하여 현대건설은 1964년 6월 시멘트공장을 준공하였고, 1970년 1월 현대시멘트주식회사로 독립하였다. 이후 해외건설시장 개척과 울산 조선소 건설, 서산 앞바다 간척사업 등 대규모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면서 현대그룹은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1987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되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정주영은 1992년 초 통일국민당을 창당하여 대표최고위원이 되었으며, 제1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전국구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같은해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통일국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하였다. 1993년 초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위원직을 사임하고 1993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되었다. 2000년 5월 명예회장직을 사퇴하였으며, 2001년 3월 21일 폐렴으로 인한 급성호흡부전증으로 사망했다.
1969∼1989년 지역사회학교후원회 회장, 1977∼198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1982∼1984년 대한체육회 회장 겸 한국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 1983∼1987년 한국정보산업협회 회장, 1989∼1992년 한·소경제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1975년 경희대학교에서 명예공학박사, 1982년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명예경영학박사, 1985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경제학 박사, 1985년 서강대학교에서 명예정치학박사, 1986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1995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1995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명예인문과학박사 등 학위를 받았다.
1998년 6월 16일 정주영은 판문점을 통해 북한 방문길에 오름으로써, 분단 이후 정부관리의 동행 없이 판문점을 통과한 최초의 민간인이 되었다. 특히 그는 ‘통일소’라고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연출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후 여러 차례 더 방북하며 남북 민간교류의 획기적 사건인 ‘금강산관광’을 성사시켜 1998년 11월 18일 첫 출항하였다.
우수경영자상(1968), 제1회 한국경영대상(1987), 국민훈장 무궁화장(1988), IOC훈장(1998), 노르웨이 왕실훈장(1998) 만해상 평화상(2001) 등을 수상하였고, 타임지 선정 ‘아시아를 빛낸 6인의 경제인’(1996), 매일경제신문사와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뽑은 ‘20세기를 빛낸 기업인 1위’(1999)에 올랐다. 주요저서에 회고록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1991), 자서전 《이땅에 태어나서―나의 살아온 이야기》(1998) 등이 있다.
한국의 대표적 기업인 현대(現代)를 창업, 한국 경제의 발전을 이끌어 온 아산 정주영. 그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분단, 그리고 통일 한국으로 나아가는 한국 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큰 족적을 남기며 시대를 이끌어 온 거목이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하루세끼 먹을 수 없는 지독한 가난의 성장기. 어려서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운 후 송전 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조상 전래의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16살에 가출을 감행했다. 첫 번째 가출에 성공한 정주영은 인천 부둣가에 하역 막노동을 뛰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정주영 회장의 유명한 일화인 빈대이야기는 정주영이 첫 번째 가출해서 노동자 합숙소에 머물 동안 빈대로 인한 고생이 심했는데, 그 때 한낱 미물 또한 생존을 위해 비상한 지혜와 온몸을 내던지는 실천을 불사한 것을 본 이후 그의 삶속에서 목격되는 캔 두 이즘(can do) 즉, 할 수 있다는 정신의 계기를 배우게 되었다.
언제나, 무슨 일에나 최선을 노력을 쏟아 부으면 성공 못할 일이 없다는 교훈을 ‘빈대’한테서 배웠다는 정주영. ‘하물며 빈대도 목적을 위해서 저토록 머리를 쓰고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서 성공하지 않는가? 빈대한테서 배울 것이 있다면 배우자.’
정주영의 현대 창업 과정을 자세히 보면 1937년 쌀가게 점원: 4번의 가출 끝에 드디어 서울로 상경하여 취업. 북흥상회 쌀가게 점원으로 일을 하게 되면서 근면성실한데다 영리해 주인의 신뢰를 얻게 되었고 후에 쌀가게를 넘겨받고, 경일상회라 개명.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사업이었다. 그러나 1939년 일본의 전시체제령과 조선총독부의 쌀배급제 실시로 경일상회는 문을 닫게 되었다.
1940년 아도서비스 자동차수리공장: 아도서비스로 두 번째 사업을 하는데 직공의 실수로 공장이 전소하는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다른 공장에서는 열흘 걸린다는 수리시간을 사흘로 단축시킴으로써 많은 수익을 창출하였다. 1943년 일진공작소와 강제합병을 당해서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
1943년 홀동광산: 홀동광산을 인수하여 세 번째 사업에 착수했지만 일본인의 강제인수로 문을 닫게 되었다.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 설립: 해방 후, 현대자동차공업사(자동차수리공장)를 설립하였다. ‘현대(現代)’라는 상호 최초사용. 뜻은 현대를 지향해서 발전된 미래를 살아보자는 의도.
1947년 현대 토건 설립: 현대건설의 모태. 그는 건설업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으나 단지 건설업자들이 돈을 더 많이 번다는 이유로 시작하였다. "일단 뛰어들고 밀어붙인다" 이는 이후 정주영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사업 스타일로 굳어졌다.
한국 전쟁 후의 건설 특수를 이용, 압도적으로 많은 건설 수주를 따냄으로써 일약 한국 제일의 건설업체 중 하나로 떠올랐다. 정주영이 건설업으로 성공한 것은 그의 탁월한 지능과 초인적인 집념 때문이었다. 1952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 미군은 정주영에게 양변기와 난방 공사를 맡겼다. 문제는 태어나서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양변기. 정주영은 용산 일대를 전부 뒤져 양변기를 만들 수 있는 모든 물품과 정보를 찾아왔고, 12일간 밤낮을 샌 끝에 기어코 공사를 끝마쳤다. 1953년엔 이런 일도 있었다. UN 사령부는 사절단 참배에 앞서 부산의 유엔 군 묘지에 푸른 잔디를 깔아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때는 한겨울. 모든 건설업체들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거부했으나, 정주영만은 공사비를 3배로 올려 받고 낙동강 근처의 겨울보리를 떠다가 묘지에 심었고, UN군 묘지를 푸른 풀밭으로 바꿔 놓았다. 이 두 가지의 일이 있은 후 미군의 대규모 건설 수주는 모두 정주영에게 떨어졌다.
이런 불도저 같은 추진력은 정주영에게 몇 차례의 시련을 안겨 주었다. 1954년 고령교 복구공사에서 6500만 환이 넘는 어마어마한 적자를 본 것. 당시 국가가 발주한 공사 중 최대 규모였던 이 교각 복구는 지독하게 불리한 건설 환경, 열악한 장비, 거기에 인플레까지 겹쳐 정주영에게 사상 최대 규모의 적자를 안겨주었다. 정주영은 이 빚을 갚는 데만 20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비록 적자는 보았으나 정주영은 정부의 신용을 얻어, 1957년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따내는 등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1965년 국내 최초 해외 건설시장 진출: 한강 인도교 공사 이후 승승장구, 1960년 이후 도급순위 1위로 한국 건설업계 평정하였고, 1965년엔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따내면서 해외진출을 시작하였다. 이후 1966년 전쟁 중의 베트남 복구사업, 메콩 강 준설공사에도 참여하였다.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살아남을 길은 수출뿐이다 라며 1965년 국내 최초로 해외진출을 시도했고 1965년 해외 건설시장 개척을 위해 태국으로 진출, 해외시장 진출의 포문을 열었다.
1967년 현대자동차주식회사 설립: 정주영은 원래 20대 때부터 자동차 서비스업으로 사업을 꾸렸으나, 자동차 생산을 시작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1968년 미국 포드 자동차와 합작으로 현대 자동차의 첫 번째 작품인 ‘코티나’ 시판. 이때까지 현대 자동차는 포드 자동차의 부품 조립 생산기지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주영은 100% 국산 자동차를 제작하는 것이 살길이라 판단, 1억 달러를 들여 연간 5만대의 자동차 생산 공장을 건설하였다. 이는 정주영 일생일대의 도박이었다. 당시 국내에 연간 판매되는 자동차의 수는 1천대도 되질 않았으며, 당시 현대가 갖고 있던 자금 규모로 연간 5만대의 자동차 생산 기지를 만든다는 것은 지극히 무모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수출로 돈을 벌면 된다"며 밀어붙였다. 자동차 개발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정주영은 아예 해외시장을 공략해 수익을 얻겠다는 기개를 보여주었다. 정주영은 자동차는 ‘달리는 국기’라는 표현을 했다. 국산차 개발과 기술의 국산화에 대한 집념은 대단히 강했다. 자동차 생산이 100% 국산화되면 우리나라 기계공업은 발전될 것이고 발전은 국가에 기여하기 때문에 자동차에 대한 막대한 투자와 노력을 쏟아왔다.
결국 1976년 대한민국의 첫 번째 독자적 자동차 브랜드인 ‘포니’를 출시하였다. 그 해 국내 승용차 시장의 43% 장악, 에콰도르를 시작으로 아프리카, 중동 등지에 수출되기 시작, 첫해에만 1만 대가 판매됐다. 1970년 말부터 연간 5만대에서 10만대로 생산을 늘렸다. 포니의 대대적인 성공에 힘입어 1982년 ‘포니2’ 출시. 첫해 국내에서 4만대 판매, 1983년 캐나다 수출, 1986년 한해에만 8만대를 판매하였고, 1985년엔 미국 현지 법인 설립, 한국 기업 최초로 미국 3대 방송국에 "Cars that make sense"라는 슬로건으로 TV 광고를 띄웠다. 1986년 또 다른 신형차 ‘엑셀’을 출시해 1987년 미국 시장에서만 26만대를 판매해 미국 수입 소형차 시장에서 판매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1970년 현대시멘트주식회사 설립, 경부고속도로 건설: 세계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건설된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12월 각계의 반대 속에서 단군 이래 최대 토목공사인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시작했고 1969년 9월 11일 착공한 지 290일 만인 1970년 7월에 경부고속도로 428km가 개통됐다. 이는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 최단기간에 건설된 것이었다.
1973년 조선소 건설과 동시에 배를 전수시킨 세계 최대의 현대조선소 설립: 자동차 산업과 건설 산업 이후, 그는 또 다시 새로운 사업에 도전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조선사업. 현대조선소의 창업 당시의 일화는 유명하다. 정주영이 조선업에 진출하고자 할 때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모두들 반대하고 무시했지만 정주영은 강인한 추진력으로 조선소 건설을 위해 영국으로부터 8000만 달러의 외자 유치에 성공하였다. 당시 현대가 외자 유치를 위해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완벽하게 준비된 사업 계획서, 그리고 오백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 이야기로 끝내 돈을 빌리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리스의 선박회사로부터 배 두 척을 선주문 하겠다는 계약까지 따내는데 성공하여 당당히 사업을 시작한다. 이렇게 울산 조선소 건설 서산 앞바다 간척사업을 성공하며 기업을 확장하게 된다. 이러한 패기와 용기,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창조정신, 불가능을 가능으로 살리는 도전정신은 나로선 그저 너무나 놀라울 따름이다. 1972년부터 배를 생산하기 시작한 현대 조선은 1973년 세계 조선시장 점유율 2.64%를 차지하며 다시 세상을 한번 놀라게 하였다.
그런데 1973년 석유 파동으로 조선과 건설업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이때 정주영은 석유 파동의 근원지인 중동으로 가서 일을 해야 돈을 안정적으로 벌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베트남과 태국에서의 악몽을 떠올린 회사 중역들은 몸을 던져 정주영의 계획을 저지하려 했으나 정주영은 이들을 모두 진압하고 중동에 진출, 9억 3000만 달러짜리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내었다. 세계 굴지의 건축 회사들이 모두 입찰했던 이 공사 수주에서 현대가 이긴 것은 가장 저렴한 금액에 공사 기간을 8개월이나 단축시킨다는 약속 때문이었다. 이때 현대가 벌어온 건설 수주액은 한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외화였다. 이후 현대의 해외 건설 수주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1981년 126억 달러를 기록, 한국의 경제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현대는 이로써 건설, 자동차, 조선 3개의 주력 사업을 세계 시장에 성공시켰다.
1971년 현대그룹 창립
1973년 현대조선중공업주식회사 설립
1977년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 설립
1983년 현대전자주식회사 설립
사업에 이어 정주영은 사회활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974년 한.영 경제협력위원회 한국대표
1976년 한국.아랍 친선협회장
1981년 88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
1987년 유전공합연구조합 이사장
1987년 세종연구소 이사장
1987년 현대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 1992년 정계 입문 제 14대 국회의원 당선
1994년 한국지역사회교육 중앙협의회 이사장
1998년 김대중 국민정부 출범을 시작으로 정주영은 다시 한 번 주목을 받는다. ‘금강산 개발 사업 추진’
1998년 소 500마리를 끌고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방문하였고, 남북협력사업 추진을 논의했다. 민간 기업인으로서는 최초로 북한 최고 지도자 김정일을 만났다. 이곳에서 정주영은 금강산 관광 사업을 성사시키고, 이후 현대의 개성공단 진출의 물꼬를 틀었다.
정주영 회장 최후의 업적이라 일컬어지는 남북 경협사업 체결 당시. 젊은 시절 소 한 마리를 훔쳐 야반도주했던 빚을 갚기 위해 소 500마리를 몰고 방북한 당시 에피소드는 해외에서도 굉장한 화제였다.
1998년 11월 18일 금강산 관광을 위한 배가 출발하였다.
1999년 현대아산 설립
정주영의 리더십비결, 성공비결과 경영이념을 보면 기업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해 현대를 창업, 한국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수행했고 오늘날 현대를 국내 정상은 물론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당당히 경쟁하는 세계 속의 현대로 일구어 냈다.
정주영은 건강한 신체와 긍정적인 생활철학, 창조성과 혁신성, 결단력과 리더십, 성실과 신용, 강인한 정신력과 높은 성취욕구 등 성공한 기업가의 자질을 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신속ㆍ정확한 결단력과 강력한 리더십- 그 중에서 경영환경의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며 현대를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은 정주영의 신속ㆍ정확한 결단력과 강력한 리더십이다.
리더십이란 조직을 구성하고 조직의 목표를 실현시키는데 조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여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기업가의 능력이다. 정주영이야말로 바로 뛰어난 리더십의 소유자이다.
항상 남보다 먼저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는 혜안을 갖고 있는 정주영은 주변 사람들이 매 사업마다 그 당시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고,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사업진출을 망설일 때, 과감히 승부수를 던져 일사불란한 리더십으로 전 임직원을 이끌었다.
정주영은 신속ㆍ정확한 결단력과 탁월한 리더십으로 현대의 모든 사업을 확대해 나갔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5년 국내 최초로 해외 건설 시장에 진출, 1967년 현대자동차를 설립해 1976년 국내 최초로 순수 우리기술의 ‘포니’ 개발, 거북선이 그려진 지폐 한 장과 울산 미포만 백사장 사진 한 장으로 1973년 세계 최초로 조선소 건립과 유조선을 수주해 중화학공업의 기틀 마련, 1983년 현대전자 설립이후 반도체, LNG선, 무공해자동차 등 끊임없는 신기술 개발, 1998년 소떼몰이 방북과 금강산 관광 사업을 시작으로 남북화해와 이해의 기틀을 마련하면서 그 빛을 발했다.
성공에 대한 강렬한 열망- 나는 절대 머무르지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하루 3끼를 꼬박 먹을 수 없었던 가난한 생활에 회의감을 느꼈던 그는 평생을 농사꾼으로 살 바엔 고향을 떠나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다. 무슨 일을 하든 농사에 들이는 노력 만큼이면, 농사보다는 소득이 더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첫 번째 가출에서부터 두세 번째 가출마다 그는 아버지에게 잡혀 고향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세 번째 가출 실패 후 아버지의 뜻을 따라 마음을 잡고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지만 흉년이 들어 실패하고 말았다. 양식문제로 자주 다투시는 부모님의 모습에, 정주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서울로 가서 농사가 아닌 다른 일로 꼭 성공하고 말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집을 나가면 철도공사장이고 막노동판이고 가릴 것 없이 돌아다녔다. 고려대학교 교정 안에 있는 석조건물도 상당부분 그가 돌을 쌓아 이룩한 것이다. 네 번의 가출 끝에 집을 나오게 된 그는 이후 모든 사업마다 그의 강한 독립욕구의 기반 위에서 성공한다. “나는 자력으로 크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커 왔다”고 훗날 그는 말하였다.
강인한 추진력 및 활동에너지- 사업을 수행하면서 경영자가 지시만 내려놓고 뒷전에서 수수방관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경영자가 일선에서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근로자의 기본이 서게 되는 것이다.
정주영 회장은 현대건설사정 당시부터 공사현장을 일일이 챙기러 다닌 것으로 유명하다. 그 시절 ‘현장의 호랑이’라 불렸던 그가 경영자로서 얼마나 현장 지향적이었는가를 다음의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당시 단양 시멘트 공장 건설은 사원들이 ‘현대건설의 31운동’으로 불렀을 만큼 획기적인 사업이었다. 착공에서 준공까지 24개월 동안 그는 매주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청량리역에서 중앙선 야간열차를 타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일 앞에서 게으름피우는 것에는 선천적으로 혐오감을 갖고 있는 그였기에, 회사에서는 현장에서든, 또 그 사람이 누구든, 그에게 잘못 걸렸다 하면 불벼락을 맞았다.
정주영이 이렇게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의 성장과정과 기업 활동에서 나타난 성실과 신용, 검소한 노동자적 생활, 민족애적 기업가 정신, 희망의 철학 등을 노동자들과 함께 현장에서 몸소 실천해 왔기 때문이다.
성실과 신용- 정주영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근검함과 성실함을 본받았다. 어릴 적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워 세상의 이치와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깨우쳤다. 정주영은 신의와 실력만이 당당히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하여 청년시절 서울 상경 이후 주경야독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사업을 확대해 나가면서도 초지일관 성실함과 신용을 보여줘 주위의 신망을 쌓아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자신이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와 신용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게 되고, 그 결과 쌀가게 주인과 주위 사람들에게 신용을 얻게 된다. 그리고 스물일곱 되던 해, 정주영은 자동차 정비공장을 차려 자동차 정비공장 문을 연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화재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빚을 얻어 시작한 정비공장이 전소되자, 정주영은 빚 위에 또다시 빚을 지게 되고 다시 일어서야 할 그때, 정주영에게 돈을 빌려 준 사람들은 쌀가게 시절 알던 사람들이었다. 결국 정주영이 다시 일어나 오늘 현대그룹의 발판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신용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 고령교 복구사업이다. 그 당시 극심한 인플레로 적자가 늘어났지만 정주영은 기업인은 ‘주판알을 엎고 일할 때도 있다“면서 마침내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고 공사를 완료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신용과 공신력을 쌓았다. 결국 정주영이 쌓아온 신용과 공신력으로 현대건설은 그 후 국내외 굵직굵직한 대형 공사들을 수주할 수 있었다.
근검절약 실천- 또한 정주영은 극도로 검소한 생활을 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아끼는데 있어서는 누구 못지않은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한번은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맥주 다섯 병에 안주 한 접시를 시켰는데 나갈 때보니 맥주 두병을 마시지 않은 걸 보고 두병 값을 깎아 돈을 지불한다. 또 17년 전 작업복을 입고, 구두를 한번 신으면 뒤축을 갈아가며 10년 이상 신었으며, 언제나 외제차가 아닌 현대 중형차를 타고 다녔다. 30여년 전에 지은 그의 집엔 20여년이 넘은 소파와 10년이 다 된 17인치 TV가 전부다. 극빈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83개가 넘는 사업체를 일으키고, 130조원이 넘는 매출을 내는 세계적 기업을 세운 정주영의 마지막 청운동 자택에는 낡은 구두, 구멍 난 면장갑, 낡은 금성 TV 수상기가 있었다고 한다.
민족애적 기업가 정신- 정주영은 각종 도로, 항만 등 국가기간산업을 진두지휘하면서 노동자들에게 기업인과 노동자는 단순히 이윤과 임금만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민족애적 사명감을 갖고 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는 한 나라의 모든 분야의 근간이 되기 때문에 기업인과 노동자는 부국(富國)에 일익을 담당하는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며 현대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역사적 사명의식을 고취시켜 나갔던 것이다.
노동현장에서 다져진 인간적인 매력- 정주영은 "난 성공한 기업가가 아니라 단지 부유한 노동자" 라고 표현하며 항상 현장에서 사원들과 땀 흘려 일했다. 정주영은 사막의 건설현장에서, 혹한의 남극기지, 자동차 조립공장, 조선소 야드 등 국내외 어디서나 사원들과 함께 하며 기업을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휴식시간에는 대포 한잔과 노래자락으로 서로의 고충을 달래가며 사원들과 자연스럽게 융화되었다. 특히 현대 공채 1기 출신들은 정주영 회장을 "아버님"이라 부를 정도로 굉장한 유대감을 자랑하였고, 사원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가족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능했다.
정주영은 모든 임직원들과 협력업체 가족들 모두를 “한 솥 밥 식구”라고 표현한다. 젊었을 때는 체육대회 때마다 사원들과 직접 살을 부대끼며 씨름대회에 참가했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신입사원 수련대회에 꼭 참석한 것을 보면 현장에서 다져진 정회장의 독특한 인간적인 매력이 그의 리더십의 근간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주영은 보스로서 탁월한 인간적인 매력을 갖고 있다. 한번 사람을 신임하면 절대 버리지 않았으며, 언젠가 반드시 중용했다. 사람을 보는 눈이 좋아 능력에 맞는 인물을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알았다. 그래서 그의 주위에는 그를 진심으로 우러르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를 위해서 ‘충성’을 다했다.
희망의 철학 - 긍정적 사고. 이렇듯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정주영이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현대를 일구어낸 또 다른 비결은 ‘희망의 철학’이다. 정주영이 얘기하는 희망의 철학이란 바로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요약된다.
사업을 확대해 나가면서 “할 수 있을까? 잘될까?”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는 사람과 “잘 할 수 있다”는 강한 신념으로 일을 시작하는 사람과는 추진력과 성취욕 면에서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나타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주영은 후자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정주영은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를 통해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나는 매사를 나쁜 쪽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좋은 쪽으로 생각하며 느끼고, 그 좋은 면을 행복으로 누릴 수 있는 소질을 타고난 사람인 것 같다』며 자신이 지니고 있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표현한 바 있다.
또 정주영은 자신이 가난한 농가의 맏이로 태어나 소학교 정도의 교육만을 받았지만 언제나 행복하다고 생각했을 뿐 자신의 처지에 한 번도 실망하거나 좌절한 적이 없다고 한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타고난 건강에 부모님으로부터 배운 근면함만 있으면, 내일은 분명 오늘보다는 발전할 것이고, 모레는 분명 내일보다 한 걸음 더 발전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행복했고 활기찼다』고 말하는 정주영. 그 평범한 말속에 정주영이 강력한 리더십으로 한국 현대사를 이끌어온 원동력을 느낄 수 있다.
한국 경제의 신화, 전설이 된 CEO, 정주영
대한민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가장 존경 받는 기업인 중 한 명. 매일 풀 죽으로 끼니를 때우던 극도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며 맨주먹으로 대한민국 최대 기업을 키워낸 장본인. 그는 가장 최악의 상황에서도 매번 기적처럼 회생했으며, 가장 불가능해 보이는 "기회"마저도 끝끝내 성공시킨 무서운 집념의 사나이였다. 오늘날 한국이 자랑하는 건설, 자동차, 조선 산업은 모두 정주영 혼자의 힘으로 시작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나라의 경제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 정주영은 1947년 현대를 창업해 중화학산업을 비롯한 국가기간산업 발전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고, 가장 먼저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임으로써 한국경제의 세계화를 주도했다. 또 기술의 국산화를 주창해 건설, 자동차, 중공업, 전자 부문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었고, 일찍이 민간주도형 시장경제체제와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선진 기업경영을 강조하였다.
☞ 정주영은 언제나 남보다 먼저 미래를 계획하는 창조적인 사고와 불굴의 개척정신을 지닌 기업인이다. 정주영의 기업 활동을 돌이켜 보면 그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벤처정신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정주영은 건설경험을 바탕으로 선박이란 물위를 떠가는 탱크일 뿐이라는 CAN DO 정신으로 과감히 조선업에 진출하고, 울산의 황량한 벌판에 세계 최대의 조선소를 일구어 냈으며, 현대자동차의 고유브랜드를 고집하며 미국시장을 개척해 세계적인 자동차업체로 발전시킨 것도 모두 이런 정신과 신념의 결과인 것이다.
☞ 정주영은 전후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한국산업 사회에서 하나하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왔다. 국가경제발전의 바탕이 되는 도로, 항만 등 기간산업의 건설, 해외 건설시장의 개척, 조선공업, 자동차산업, 전자, 철강 등을 개척했다.
정주영 회장의 어록
- 우리가 잘 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것이며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우리가 잘 될 수 있는 길이다.
- 어떤 연유로든 일단 ‘자리’를 받아들였으면 그 자리를 맡은 사람의 소임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 나는 인간이 스스로 한계라고 규정짓는 일에 도전하여 그것을 이루어내는 기쁨과 보람으로 기업을 해왔고 오늘도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해내는 법이다. 의심하면 의심하는 만큼밖에 못하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는 것이다.
- 무슨 일에든 절대 중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을 쏟아 붓는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 안된다고 보는 사람이 많을수록 기어코 해내고 말겠다는 결심은 더 굳세어지고, 일이 되도록 하기 위한 노력을 더욱 더 치열하게 할 수 밖에 없어진다.
- 어떤 실수보다도 치명적인 실수는 일을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 사람은 적당히 게으르고 싶고, 적당히 재미있고 싶고, 적당히 편하고 싶어 한다. ‘적당히’의 그물 사이로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빠져나가게 하는 것처럼 우매한 짓은 없다.
-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보통사람의 10배, 100배의 일을 해낼 수 있다.
노는 자리에 가서 노는지 마는지, 일하는 시간에 일하는지 마는지, 자는 시간에 자는지 마는지 하는 사람을 질타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 나를 세계적인 대기업을 경영하는 한국인으로 평가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부유한 노동자일 뿐 이다.
- 내가 평생 동안 새벽 일찍 일어나는 것은 그날 할 일이 즐거워서 기대와 흥분으로 마음이 설레기 때문이다.
- 내가 행복감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을 아름답고 밝게, 희망적으로,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 직장은 월급 때문에 다니는 곳이 아니고 자신의 발전 때문에 다녀야 한다.
- 사람은 누구나 나쁜 운과 좋은 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운이란 시간을 말하는 것인데 하루 24시간, 1년 사계절 중에서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좋은 운이다. 이것을 놓치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나쁜 운이 들어올 틈이 없다. 운이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게으르다.
- 자기 자신의 실패는 가슴깊이 새겨 두어야 한다. 실패를 망각하는 사람은 또 다른 실패가 있을 뿐 이다.
- 배를 만드는 것도 어려울 것이 없다. 우리가 하는 건축공사를 육지에서 수상으로 장소를 옮겨서 건축하는 차이일 뿐이다.
- 나는 이날까지 어느 공자이고 땅을 마련하는 데서부터 시작해, 말뚝을 받고 길을 닦아서, 그 위에 내 손으로 내가 지어서 시작하지 않은 공장이 없다.
- 기업의 성공에는 모든 모험적인 정보, 모든 모험적인 노력, 모든 모험적인 용기가 필수적이다.
- 국제 경쟁력은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는 정책 대안을 어느 국가, 어느 기업이 더 빨리 더 제대로 강구하는가에서 판가름 난다.
- 우리는 혹독한 시련을 견디고 뛰어넘는 산 공부를 해가며 강인해졌다.
- 세상을 밝게 맑게 바르게 보고 이 사회에 보탬이 될 목적으로 살면 할 일은 태산처럼 많다.
- 사회 각 분야에서 열심히 훌륭하게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존경과 찬사를 보낼 수 있는 나라가 제대로 발전한다.
- 우리는 원대한 꿈과 긍정적인 청사진을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한다.
- 인류의 모든 발전은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다.
- ‘시간은 돈’이라고들 하나, 나는 ‘시간은 생명’이라고 하고 싶다.
- 참다운 지식은 직접 부딪혀 체험으로 얻는 것이며, 그래야만 가치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 길이 없으면 길을 찾고 찾아도 없으면 길을 닦아가면서 나가면 된다.
- 시련이란, 뛰어 넘으라고 있는 것이지 걸려 엎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 ‘한강의 기적’속에 ‘기적’은 없다. 다만 성실하고 지혜로운 노동이 있을 뿐이다.
- 신용은 나무처럼 자라는 것이다. 또한 신용이란 명예스러운 것이다.
- 긍정적인 사고가 행복을 부른다.
- 그 사람은 성실하다, 정직하다는 신뢰만 얻으면 그것을 자본으로 자신의 생애를 얼마든지 확대,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 하루 부지런하면 하룻밤을 편히 잠들 수 있고, 한 달 부지런하면 생활의 향상을 볼 수 있고, 1년 2년 10년... 평생을 부지런하게 생활하면 누구나 자타가 공인하는 크나큰 발전을 볼 수 있다.
- 모든 일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해낼 수가 있다.
- 나는 어떤 일을 시작하든 ‘반드시 된다’는 확신 90%에 ‘할 수 있다’는 자신감 10%로 100%를 채우지, 안 될 수도 있다는 회의나 불안은 단 1%도 끼워 넣지 않는다.
- 불굴의 도전, 모험정신 이것으로 누구나 다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면에는 치밀한 검토와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 부의 근원은 근검이다.
- 설혹 우리 앞에 놓인 일이 어렵고 복잡하더라도 우리는 주저함과 두려움 없이 무난히 해낼 수 있는 자신과 용기가 있다.
- 어려울 때일수록 진취적 기상과 모험심, 불같은 열정으로 부단히 노력하여 극복하여 배운다. 창업의 가장 근본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낙관적인 사고와 자신감이라고 말할 것이다.
- 작은 일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큰 일을 할 수 없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큰 일에도 전력을 다한다.
- 모든 일의 성패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사고와 자세에 달려있다. 진취적인 정신, 이것이 기적의 열쇠이다.
- 이것은 다만 우리의 시련일 뿐이지 실패한 것은 아니다. 꿈을 버리지 않는 한 실패란 있을 수 없다.
- 나는 생명이 있는 한 실패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있고 건강한 한 나한테 시련은 있을지언정 실패는 없다.
이러한 말 들은 정주영의 리더십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정주영의 리더십 파워는 창조정신, 도전정신, 진보정신, 성공정신, 기업가정신 등 총 다섯 가지로 설명된다. 젊은 시절 인천 부두에서 막일을 하다 깨달은 빈대철학과 “이봐, 해보기나 해봤어?”라는 말 한 마디로 직원들을 이끌었던 리더십, 1971년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들고 차관을 빌리러 간 영국 등 유명한 일화 속에 숨은 정주영의 경영정신을 배울 수 있을 듯하다.
정주영이 성공한 리더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렇게 업적을 봐서도 알겠지만 우리나라가 이토록 성장할 수 있게 된 것도, 외국에게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알릴 수 있는 것에도 한 몫하였다. 자동차와 조선사업 진출. 현재 자동차회사 세계 5위, 그 당시 무모한 도전이었던 조선 사업은 현재 세계 1위로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현대는 대한민국 경제의 심장으로 자리 잡았다.
역사속의 한 인물이 된 아산 정주영. 그가 남긴 것은 참으로 많다. 끈기 있고 도전정신이 투철한 사람으로 참 배울게 많은 사람이다. 나는 그의 창업정신을 높게 평가하고 이 말을 되새겨본다. “해보기나 해봤어?”
내가 생각하는 실패한 리더는 태광그룹의 이호진 회장이다. 태광그룹은 1950년 창업주 고 이임용 회장이 설립한 태광산업을 모태로 석유화학·섬유, 종합금융,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서비스·레저, 육영 등의 분야에서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기업집단이다. 태광산업은 나일론, 아크릴, 면방사, 직물 등의 합성섬유제품과 석유화학제품을 제조, 판매하는 국내기업으로서 태광그룹의 모기업으로 1950년 10월 태광산업의 모체인 동양실업에 투자한 것이 출발점이다. 3년 후인 1953년 10월 동양실업을 완전 인수한 뒤 1954년 7월 태광산업사를 설립했다. 1961년 9월 태광산업(주)으로 법인 전환을 하고 이임용 초대사장이 취임했다. 1966년 8월 ‘피죤 텍스(PIGEON TEX)’ 상표를, 1968년 11월 태광산업 주식회사에 대한 상표를 각각 등록했다. 1969년 8월 본사를 가야에서 부산 동래로 이전하고 부산공장을 준공했다.
1971년 8월 동양합섬을 울산공장으로 흡수합병하고, 오늘날 흥국생명 여자배구단의 전신인 태광산업 여자배구단을 창단했다. 1975년 9월 본사를 서울 KAL빌딩으로 옮겼다. 1975년 12월에는 증권시장에 주식을 상장했다. 1979년 2월 스판덱스 생산공장을 준공했다.
1980년 6월 서울시 중구 장충동으로 본사를 옮겼다. 1982년 2월 일본 오사카 지사를 열었다. 1983년 12월 태광전자를 전자사업부로 흡수합병하고, 안양공장을 완공했다. 1985년 4월 동래공장 화재로 인해 소모방 5만 9000여 추가 전소됐으나, 이듬해 3월 완전 복구함으로써 세간의 화제를 모았다. 1987년 1월 구미 면방공장을, 1988년 2월 태광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
1993년 3월 태광중앙연구소를 대덕연구단지 안에 세웠다. 이듬해인 1994년 2월 광진섬유공업(주)을 흡수합병했다. 1995년 7월 석유화학 1공장(PTA)을, 1997년 4월에는 석유화학 2, 3공장을 준공했다.
1997년 (주)한국케이블TV 안양방송을, 2000년 1월 (주)이채널을 세웠다. 2000년 7월 (주)한국케이블TV 수원방송, 2002년 (주)한국케이블TV 경기연합방송을 인수하고 (주)ABC어드벤쳐TV, (주)ABC애니메이션TV를 세웠다.
2003년 4월 상해사무소를 열고, 12월에는 스판덱스 태광화섬(상숙)유한공사를 세웠다.
국내 상장법인 대한화섬(주), (주)티브로드한빛방송, (주)큐릭스를 비롯해 비상장법인 (주)세광패션, 흥국생명보험(주), 흥국증권(주), (주)고려상호저축은행, 태광관광개발(주), 해외법인으로 태광화섬(상숙)유한공사와 태광산업(주)개성 등 51개의 계열회사를 두고 있다.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은 누구
조용한 ‘은둔형’ 오너, 기업 확장에 앞장선 공격형 경영자.
비자금 조성과 정·관계 로비 의혹이 제기된 태광그룹 이호진 회장의 두 얼굴이다. 그는 평소 남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한다는 평을 들어왔다. 이 회장의 서울대 경제학과 동기(81학번) 중에서도 그를 뚜렷이 기억하거나 활발히 교류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조용한 성격답게 술도 잘 마시지 않는다. 아침부터 밤까지 회사 일에만 매달린다고 한다.
그가 이끄는 태광그룹도 비슷하다. 50여 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순위 40위권의 기업이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외부와 소통을 꺼리는 사풍 때문이다. 회사 관계자에 따르면 태광그룹은 1990년 창립 40주년 행사를 한 뒤로 20년간 별다른 행사를 하지 않았다.
이런 사풍은 회사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가 창업자 고(故) 이임용 회장의 처남이다. 회사 관계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엔 거의 매년 세무조사를 받았다”고 말했다. 1979년엔 6개월 동안 세무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고난은 5공 때도 이어졌다. 자연히 ‘눈에 띌 일은 하지 않는다’는 분위기가 생겼다.
고 이임용 회장은 생전에 “기업은 (다른 일에 나서지 말고) 사업만 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태광그룹은 90년 일주학술문화재단을 만들어 지금까지 장학사업에 300억원이 넘는 돈을 썼다. 하지만 그룹 측은 이를 외부에 널리 알리려 하질 않는다. 이호진 회장도 이런 스타일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태광과 인연을 맺었던 한 재계 인사는 “회장이 이사회에도 잘 안 나타날 때가 많았다”며 “기업 분위기가 보수적이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태광은 ‘짠돌이’ 기업으로도 유명하다. 75년부터 쓰고 있는 서울 장충동 사옥은 옛 동북고등학교 건물을 고친 것이다. 이 회장은 물론 계열사 사장들도 출장 땐 항공기 이코노미석을 타곤 한다. 하지만 이 회장은 기업 확장에 나설 때만큼은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줬다. 그는 96년 아버지인 이임용 회장이 작고한 뒤 97년 서른다섯의 나이에 태광산업 사장이 됐다. 태광산업을 중심으로 한 석유화학과 흥국생명 등 금융업이 주력이던 태광은 그후 유선방송 사업에 뛰어들어 공격적 확장을 계속했다. 결국 케이블방송사 큐릭스를 약 4000억원에 사들이면서 종합유선방송사업자(SO) 업계에서 확고한 1위에 올랐다. 빠르게 사업을 키우는 과정에서 투명성에 대한 문제 제기도 나왔다.
흔들리는 태광그룹, 위기의 이호진 회장
노조 갈등 스판텍스 시장 뺏겨 주가 하락
90년대 중반기까지 우리나라 섬유업계에서 가장 주가가 높고 유동자금(현금)보유율이 높았던 태광산업. 전산업계를 통틀어 우량기업 순위에서 항상 상위권을 맴돌았던 이 회사가 90년 후반기부터 악재들이 겹치면서 흔들리고 있다. 황금알을 낳는다는 말까지 나돌았던 스판덱스사를 한동안 독점 생산해 부를 축적했던 이 회사는 노동조합과의 갈등이 야기 되면서 불안한 조짐들을 잉태했었다.
창업주 고 이임용 회장이 타계할 당시에도 태광산업은 노조 측과 심각한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 상태였다. 암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이회장 이었지만 주변 기업에서는 노조 때문에 화병으로 타계했다는 루머까지 나돌 정도였다.
창업주의 셋째 아들인 이호진 사장과 이식진 부회장(장남), 처남지간인 이기화 회장 등 가족 등이 경영권을 이어 받았지만 노조와의 갈등이 여전히 지속되면서 기업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안겨주고 있다.
게다가 과거 엄청난 흑자를 내며 국내시장을 석권했던 스판덱스 품목에서 효성과 동국무역, 듀폰, DSI 등이 추격하면서 태광의 설자리를 좁게 만들었다. 특히 스판덱스 분야에 집중적인 투자를 진행한 효성의 공략은 태광산업을 스판덱스 생산 1위 자리에서 끌어내리며 태광산업의 주가를 떨어뜨렸다.
효성은 듀폰 「라이크라」와 맞서기 위해 국내외에서 「크레오라」 브랜드를 부각시키며 브랜드 인지도를 높인 반면, 태광산업은 과거 보수적인 영업 전략을 그대로 가져가면서 시장을 내주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태광의 계열사인 대한화섬 역시 폴리에스터 시장이 침체되면서 수익률이 악화되고 주가도 크게 떨어지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태광산업은 올해 30대 기업군에 편입됐고 그 결과 공정위로부터 내부 부당 거래조사까지 받게 됐다. 여기에다 계열사 흥국생명이 IMF 이후 확정금리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엎친데 덮친 격이 되고 있다.
태광산업이 흥국생명 신축빌딩을 비싼 값에 매입했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해외주주들의 반발까지 불러왔고 급기야 감사를 변경하라는 주주들의 불만까지 터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한때 황금주로 부상해 임원들의 주식 재산이 엄청나 화제가 되기도 했으나 주가가 빠지면서 이 회사 임직원들의 사기도 많이 떨어져 있다.
이 같은 상황 하에서 태광·대한의 주력 공장이 모두 가동을 중단했고 노사양측은 회사가 망하더라도 절대 타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어 암울한 먹구름이 짙게 드리우고 있다.
불법 농지취득 그리고 투기 의혹
불법농지취득으로 현행 실정법 위반 도마. 태광그룹 총수인 이 회장은 법률을 무시한 채 국가의 정책인 농지법을 위반하고 농업기반을 흔드는 불·편법 행위를 저지른 셈이다. ‘동림CC'와 관련된 경제 논리는 도덕적 접근으로는 상당한 문제가 있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CEO로서 자질을 의심받고 있는 이호진 회장
이외에도 태광그룹 이 회장은 설상가상으로 ‘장하성 펀드’로부터 대표이사 해임청구소송에 휘말려 CEO로서의 자질을 의심받고 있다.
한국지배구조펀드는 9월 말 이번 해임 건 처리를 위해 임시주주총회 소집을 요청했으나 회사 측이 거부하자 마지막 방편으로 소송을 제기했다는 입장이다. 한국지배구조펀드와 태광의 싸움은 지난 2006년에 시작됐다. 그해 8월, 한국지배구조펀드는 대한화섬 지분 5%를 매입했다. 그리고 이 회장과 회사에 대한 지원성 거래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자 태광은 상장 폐지론을 흘리며 맞불 작전을 폈다. 양측은 한 치 양보 없이 각을 세우며 대립했다. 하지만 그해 12월 양 측은 기업 지배구조개선에 전격 합의하면서 싸움은 일단락됐다. 그런데 태광은 사외이사 선임을 제외한 한국지배구조펀드와 합의했던 중요 부분들은 미적미적 이행을 미루고 있다가, 이 회장의 이사 해임안 소송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불·편법으로 내실경영 무너지다
태광그룹의 내부 비리 의혹이다. 태광그룹이 케이블TV 방송 사업을 확장하려고 수천억대 비자금을 조성해 정·관계 로비를 벌였다고 한다. 2006년 태광그룹의 계열사 티브로드홀딩스는 당시 14개의 케이블방송 권역을 갖고 있었다. 태광그룹은 6개 케이블방송 권역을 갖고 있던 큐릭스홀딩스를 인수하려 하지만 당시 방송법 시행령에는 한 사업자가 15개 이상의 케이블 권역을 갖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태광그룹은 큐릭스홀딩스를 인수할 수 없었다. 이와 관련해 태광그룹은 방송법이 바뀌기 전인 지난 2006년, 군인공제회와 계약을 맺고 큐릭스의 지분을 선매수했다. 태광그룹 계열사인 티브로드가 방송법 개정을 위해 청와대와 방송통신위원회 관계자 등을 대상으로 로비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다. 2008년 12월 한 사업자가 25개의 권역을 가질 수 있도록 방송법 시행령이 개정되어 태광그룹이 큐릭스홀딩스를 인수하게 되었다. 방송법 개정 로비로 인해 시행령 개정은 태광을 위한 맞춤형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태광그룹 이호진 회장의 비자금 조성 의혹도 검찰의 수사 대상에 올랐고, 태광그룹 이호진 회장은 16세인 아들에게 재산과 주식을 불법으로 상속했다는 의혹도 불거지고 있다. 초등학생 딸에게도 2개의 계열사 주식 49%씩을 보유하도록 했다는 의혹도 함께 나왔다. 검찰은 이 회장이 간부들의 이름으로 수천억 원대의 그룹 차명 주식과 지난 1996년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주식 일부를 현금화해 차명계좌로 관리해 왔다는 정황을 포착했고, 태광그룹의 비자금이 많게는 1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결국 이호진 회장은 징역 4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이호진 회장 모, 이선애 태광그룹 상무도 자금 수백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 되었다.
그동안 강도높은 세무조사에서 태광이 건재할 수 있는 근본 원인은 고 이임용 회장 때부터 은행 등 외부로부터 거의 돈을 차입하지 않고 내실을 중요시 여기는 경영 때문이었다. 이처럼 태광그룹은 고 이임용 회장의 탄탄한 내실경영으로 그 숱한 시련을 소리도 없이 특유의 뚝심과 돌파력으로 위기를 극복해왔다. 그러나 아들이 젊은 나이에 회장을 이어 맡게 되면서 무너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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