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년 歷仕의 이씨 가문.
♣ 李庄이란 義庄(지혜로운 재산 형성과 그 回向- 자신이 닦은 공덕을 중생에게 돌림)의 뜻이나, 범중엄(范仲淹)의 의미(義莊)가 없음으로, 義를 대신하여 李라 하고, 농막 庄은 스스로 낮춘다는 의미로 이장가라 칭하였다.
▶ 義莊 <역사> 중국에서, 동족(同族)이 공유하는 전답을 두고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부조(扶助)하던 시설. 1050년에 북송(北宋)의 범중엄(范仲淹)이 고향인 쑤저우(蘇州)에 설치한 범씨(范氏) 의장에서 비롯되었으며 양쯔 강(揚子江) 유역 이남에 현저하였다.
농막 庄(장)자를 써 스스로를 낮춘다는 의미로 이장가라고 부릅니다. "이장가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 전부터 해방까지 우리나라 굴국의 역사처럼 격동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장가는 근대기 문화계, 학계, 스포츠계, 항일운동까지 사회 전 분야에 진출해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이끌었던 가문으로, 대구 계몽운동의 씨앗을 뿌린 금남 이동진 선생이 문호를 열었고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를 길렀던 소남 이일우, 그의 조카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민족시인 이상화, 독립투사 이상정 장군에다 여기다 우리나라 초대 IOC위원이었던 이상백선생까지. 모두 이장가의 사람들입니다.
대구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독립운동하며 중국군 장군(중장)으로 활동한 이상정(1896~1947)의 손자 이재윤(69) 씨의 독백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월세 15만원짜리 쪽방에서 힘겹게 사는 그에게는 더없이 적합한 말이다. 이상정 장군은 저항시인 이상화의 큰형이자, 우리나라 첫 여성 비행사로 대한독립군 대령 출신인 권기옥 여사의 재혼 남편으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 이상정 장군 손자의 힘든 삶이다. 일흔을 눈앞에 둔 손자 이재윤(69) 씨. 그는 1950년 3세 때 소아마비로 장애가 된 불편한 몸으로 월세방에서 힘겨운 삶을 버티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이장가 후손의 그늘로 독립운동을 한 후손들에 대한 대접이 이정도니 누가 독립운동을 하랴! 안타깝다고 매일신문 정인열 논설위원이 말한다.
이것만으로도 집안에 대한 자긍심은 마땅하다. 할아버지가 죽은 다음 해인 1948년 태어나 얼굴조차 모르지만 자랑스럽고 그의 말처럼 충분히 어깨에 힘을 주고 지낼 만하다. 그가 할아버지 집안을 자부해도 될 일은 더 있다. 먼저 종증조부 이일우로, 증조부(이시우)의 형이다. 이일우는 바로 할아버지의 4형제(상화`상백`상오)가 세상에서 말하는 ‘용봉인학’(龍鳳麟鶴)의 인재가 되도록 뒷바라지한 인물이다.
그리고 고조부(이동진)가 있다. 증조부 형제(이일우`이시우)를 낳은 인물이다. 고조부를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가난한 3대 독자였지만 이웃과 집안 후손들을 위해 남긴 행적 때문이다. 근검과 스스로 노력해 재산을 일궈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꺼이 부(富)를 사회에 내놓았다. 나아가 ‘밭 260두락(마지기)과 논 994두락 가운데 밭 80두락과 논 150두락을 친지들에게 고루 나눠 주고 논 400두락은 종족에게 농사를 짓도록 하여 의식 걱정이 없도록 하면서 종족과 이웃이 함께 잘 사는 길을 열어주고 실천’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고조부는 힘들게 불린 재산을 이웃과 함께 후손들이 고루 혜택을 누리도록 한 셈이다. 경주 이씨로서 대구에서 ‘이장가’(李庄家)라는 별도의 이름을 붙여 만든 까닭은 이웃과 종족 사람들의 어울림과 나눔을 통한 ‘함께 잘 사는 길’을 바랐던 정신 때문임은 그와 아들 이일우를 기린 문집 ‘성남세고’(城南世稿)에 잘 녹아 있다.
[영남타워] 李庄家 재조명과 우현서루 복원을
▶백승운 사회부 특임기자 겸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팀장
이장가(李庄家). 대구지역 근·현대 역사의 중심에 섰던 경주이씨 가문을 일컫는다. 대를 이어 대구에 살았고 지금도 후손들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장가는 대구의 부호이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이동진이 시작이다. 그의 아들 이일우는 일제 강점기 우현서루(友弦書樓)를 운영하며 계몽운동에 나섰다. 이일우의 아들 상악, 조카 상정·상화·상백·상오 형제 또한 이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하지만 역사는 민족시인 이상화만 주목하고 있다. 때문에 이상화 외의 이름은 다소 생소하다. 낯선 이름들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 이력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모두가 시인 이상화만큼 큰 발자취를 남겼기 때문이다.
이장가의 뿌리로 볼 수 있는 이동진은 우현서루를 실질적으로 설립한 인물이다. 우현서루는 1904년 이동진이 사재를 털어 세운 민족지사 양성 교육기관이면서 근대도서관이었다. 국내외에서 모은 책이 1만여 권에 달했다. 당시 이곳을 거쳐간 인물만 150여 명이나 됐다고 한다. 1905년 이동진이 세상을 뜬 이후에는 장남 이일우가 맡아 운영했다. 우현서루는 당연히 일제의 눈엣가시였다. 결국 1911년 강제 폐쇄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우현서루를 운영했던 이일우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에 헌신하기도 했다. 국채보상운동은 김광제·서상돈이 중심이 된 광문회가 물꼬를 텄지만, 이일우가 이끌었던 광학회 또한 중심 축이었다. 광학회는 대구 단연상채회(斷煙償債會)가 전 국민의 동참을 촉구할 당시 큰 힘을 보탰다.
이일우의 조카 상정·상화·상백·상오 형제의 이력 또한 놀랍다. 4형제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이일우 밑에서 자랐다. 이일우는 아버지 이상의 존재였고, 형제들은 자연스럽게 민족 성향의 기틀을 잡을 수 있었다. 첫째 이상정은 1923년 망명해 중국 국민정부의 중장까지 오른 독립운동가다. 임시정부 시절에는 대중(對中) 외교통으로 활약하며 광복군 창설에 기여했다. 민족시인 이상화는 굳이 부연설명이 필요 없는 인물이다. 셋째 이상백은 국내 출신으로는 둘째로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서울대 교수 재직 시절에는 사회학과를 처음 만들기도 했다. 수렵인으로 유명했던 넷째 이상오는 대한체육회 사격연맹회장을 지냈다.
근·현대사만 볼때 한 집안에서 이만큼 많은 인재가 나오기는 드물다. 독립운동부터 체육계·학계 등 분야도 다양하다. 모두가 지역을 넘어 대한민국 역사의 중심에 선 인재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장가 출신 인물들은 대구의 자부심이자 자긍심이다. 하지만 역사는 하나의 사안을 두고 유난히 특정인만 부각시키는 경우가 많다. 국채보상운동만 보더라도 김광제·서상돈에게만 집중돼 있다. 다른 한 축을 담당했던 이일우는 지금도 ‘들러리’ 정도로 여기고 있다. 이상정·상백·상오 형제는 시인 이상화에 가려 있다.
지금이라도 이장가 출신의 인물들을 깊이있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중구에 있는 이일우 고택을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 특히 고택에서는 지난해부터 수천 점의 문헌들이 발견돼 큰 관심을 받았다. 지역의 상·공 발달 과정을 추적할 수 있는 자료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당시 현안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들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우현서루를 하루 빨리 복원해야 한다. 우현서루는 이장가 출신 인물들의 근간이 된 곳이면서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의 상징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복원 후에는 이일우 고택에서 발견된 수천 점의 문헌을 전시하고 지금은 경북대에 있는 우현서루의 도서들을 옮겨와야 한다. 대구지역 독립운동의 산실로 키우고 그들의 정신을 배울 수 있는 교육장으로 가꾸어 갈 필요가 있다.
역사를 평가할때 특정인만 부각한다면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대구도 하루빨리 새로운 인물, 새로운 역사, 새로운 현장을 찾고 조명할 필요가 있다. 역사의 스펙트럼은 넓을수록 가치가 있는 법이다.
▶성남세고(城南世稿)
나라사랑과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한 경주이장가의 글을 들여다보다
이번 2016년에 출간된 ≪성남세고≫는 경북대학교도서관 소장본을 저본으로 역주한 국역본(國譯本)이다.
번역문은 쉬운 우리말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번역문을 상단에 두고 원문을 하단에 배치하였다. 단, 한시는 번역문을 왼쪽에 원문을 오른쪽에 배치하였다.
본래 경주이장가(慶州李庄家)를 일으킨 금남(錦南) 이동진(李東珍)과 그 아랫대 소남(小南) 이일우(李一雨)가 작성한 문집인 ≪성남세고(城南世稿)≫는 1936~1939년 사이에 유학자 최종한(崔宗澣) 선생이 서문을, 상악(相岳) 선조가 유사(遊事)를, 상무(相武) 선조가 발문(跋文)을 쓰고 편집과 마무리를 하여 석인본(石印本)으로 대구에서 출간되었다. 한지에 석인본으로 2권 1책이며 사주쌍변(四周雙邊)으로 반곽이 18.6×14.0cm 크기이며 계선이 있으며 10행 21자로 상하향사변화문어미(上下向四瓣花紋魚尾)로 책의 판형 크기는 26.8×18.6cm이다.
≪성남세고≫의 저자 중 한 명인 금남 이동진은 중후한 인품과 총명한 기개를 겸비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3대 독자 소년가장으로 가업을 일으켜 대성하였으나 늘 겸손하게 학문을 존숭하고 가난하고 힘든 이웃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이장가(李庄家)의 문호를 열어낸 분으로 조선말 사회적 격동기에서도 가난한 이웃을 본심으로 도와주는 부의 사회적 환원을 몸소 실천한 경세가로서 훗날 대구 지역의 계몽운동의 씨앗을 뿌린 인물이기도 하다.
금남 이동진의 아들인 소남 이일우는 일제강점기에 대구광문회와 함께 대구광학회 대표로서 국채보상운동을 공동으로 추진한 핵심 인물이다. 또한, 1905년 <우현서루>를 개설하여 많은 우국지사를 배출하였고, 또 교남학교 등의 설립 기반을 마련한 계몽 교육의 선구자며, 구한말 대구를 중심으로 아들인 상악(相岳) 선조와 더불어 광산개발, 섬유산업, 주정회사, 금융기관, 언론기관 설립 및 운영을 통한 민족자산을 축적하고 근대 산업화를 추진한 인물이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상정(相定), 일제저항 시인 상화(相和), 초대 IOC위원 상백(相佰)과 대한체육회사격연맹 제4대 회장 상오(相旿) 등 집안의 인재 양성과 지원뿐만 아니라 많은 독립지사들을 후원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시와 글을 모아 책으로 엮은 ≪성남세고≫를 통해 그들의 기개와 나라사랑 정신, 이웃 사랑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