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시선 137
오래된 습관
지은이/강준모
펴낸이/문창길
초판인쇄/2018년 10월 25일
초판펴냄/2018년 10월 31일
펴낸곳/도서출판 들꽃
주 소/04623 서울 중구 서애로 27(필동3가) 서울캐피탈빌딩 B202호
전 화/02)2267-6833, 2273-1506
팩 스/02)2268-7067
출판등록/제2-0313호
E-mail:dlkot108@hanmail.net
값 8,000원
* 파본된 책은 바꾸어 드립니다.
ISBN 978-89-6143-204-7 03810
강준모@2018
┃자서┃
어제는 비가 종일토록 내려 기분이 울적하더니 오늘은 나들이 공원에 햇살이 한가득하다. 우울을 찾아 볼 틈새가 없다. 가을과 구름이 나의 심약을 무참하게 공격하고 있다. 부모와 함께 나온 아이들의 고성이 심장의 고막을 두드린다. 길가에 박힌 화살나무가 막바지에 이른 것 같다. ‘화살’이라고 입으로 뱉어본다. 화살 같았던 시가 가슴에 박힌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간직한 채 여러 해가 지나갔다. 이파리가 붉어 떨어진 지가 몇 해이던가. 매년 가지가 굵어지고 있다. 시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단지 내 욕구의 배설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는, 한 쪽으로 기울어진 생각도 해 본다. 그래도 한 명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무일푼의 노력이 위안이 될 수도 있겠다는, 다른 쪽의 마음을 다잡아 본다. 뒤늦게 재기한 시작, 늦바람이 무섭다고 흔들림 없이 쓰겠다고 단단히 결심을 해보지만 매년 다가오는 이 가을은 문청처럼 어느 신문사 문전을 헤매고 있다.
내 시의 페이지를 장식했던 바람이 불고 있다. 몸 안에서도 흐른다. 앞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용기를 기록하기를 스스로에게 기대한다. 그것이 한 명의 독자를 더 확보하는 일임을 아는 까닭이다. 그간 내 시를 만들게 했던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내 영혼을 성숙하게 했던 이 세상의 햇살과 바람과 문패 없는 방황들 그리고 낮게, 빛 없이도 가난을 행복으로 알고 살아가는 이들의 아름다움을 시의 교과서로 알고 갈 것을 첫 시집 발간을 즈음해서 깃발로 삼아 본다.
2018년 가을에
강 준 모
차례
자서 / 5
제1부 본질적인 것은
청소기를 돌리면서 _12
개인택시 _14
습작기 _16
둥글다는 것은 _17
발톱을 깎다 _19
오래된 습관 _20
간짜장을 기다리며 _21
선이 벽을 재다 _22
마루 _24
주광성 _25
앤트로피 _26
낯선 어둠 _27
계절 여행 _28
대한민국 장례식 _30
분리수거를 하면서 _31
스크린도어 수리공 _32
본질적인 것은 _33
고백 _34
찐 계란을 먹는 것은 _35
사서 _36
제2부 자판기의 변명
서랍들 _40
대식가 _42
모래 _43
반달 _44
해삼 _45
사막 개미 _46
짱뚱어 _47
진눈깨비 _48
정형외과 _50
승강기 _51
소용돌이에 관하여 _53
자판기의 변명 _55
지하주차장 _57
시계 _59
변기 _61
황복 _62
마을버스 _63
캠핑카 _65
터널 _66
초승달 _67
제3부 감나무가 보이는 다락방
노가리 _70
내가 김을 좋아하는 이유 _72
망우역 _74
부적합 _76
한탄강에서 _77
벚꽃이 갈래꽃으로 흩어지는 날 _78
내부순환도로 _80
대학병원 휴게실에서 _82
못에 대한 소묘 _84
열정과 쇠락 _86
탑골 공원 _88
오래된 모자 _89
가난 박물관 _90
식구 _91
칠레산 홍어 _92
느티나무 _93
엄지 _94
반의어 _96
나목 _98
감나무가 보이는 다락방 _100
제4부 독서하는 나무
목련 _102
의자 _104
아지랑이를 게걸스럽게 먹은 산수유 _105
나무의 작법 _106
꽃샘 추위 _107
바닷가 미술관 _108
아침에 바이칼을 보다 _109
지침 _110
편백나무 숲·2 _111
담쟁이 _113
담쟁이·2 _114
장마 _116
장봉도 _117
마음이 긴바지를 입는다 _118
가을은 힘이 세다 _119
폭설 _120
춘장대 _121
겨울 비가 _122
독서하는 나무 _124
어떤 풍경 _126
작품해설┃이종섶·사물의 공간성과 자의식 _128
청소기를 돌리면서
일요일 오후
창밖의 가을비는 막걸리처럼 탁하다
청소기에 나를 꽂는다
청소기가 어눌하게 하는 말이 있다
날마다 돌려도 쌓이는 말들이 몸통에서 빙빙 돈다
머리카락 붙잡고 죽자사자 뭉치던
한 움큼의 슬픔이 잡힌다
알 수 없는 곳에서 날아온
바람의 시체들을 모은다
먼지를 쓰레기통에 털면서
어제 일들은 잊자고 다짐을 한다
거실 바닥에 얼룩진 식구들의 그림자를 닦으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비의 본적은 고독이다
빈둥거려도 택배처럼 찾아오는 외로움
때로는 먼지와 같아서 어느 틈엔가 또 쌓인다
공복에 마신 막걸리 같은 오후
가을비에 빨래 건조대가 쉬는 날이다
이런 날은 낮잠을 늘어지게 자는 것이다
무중력의 잠이
외로운 말들을 빨아들일 것이다
개인택시
푸른 지도가 내장된 택시는 유목민이다
난봉꾼처럼 밀려오는 황사
가자는 대로 군말 없이 달리는 바퀴는 둥글다
지독한 외로움을 위해서
붉은 입술의 그녀가 내려도 욕망은 기억하지 않는다
가끔은 신이문 고가도로 교각의 습한 그늘에서
의자의 각도를 바꾸며 낮잠을 즐긴다
택시는 달려온 거리를 숫자로 기억한다
죽음의 공포를 제거한 숫자들
덜컹거리는 바퀴가 남은 거리를 진단할 뿐
건널목처럼 불쑥 나타나는 태양의 신기루는 유목의 습성이다
달리는 동안 나는 팔뚝에 태양을 문신하고
돈벌이가 괜찮을 때는 사창가 뒷골목을 배회할 것이다
빨간 전구 밑에선 서로의 내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흐린 날에는 백미러로 탑승자의 결핍을 추측하고
뼛속을 달그락거리는 고독을 위해서는
달리는 차창으로 담배 연기를 뱉는다
비가 오면 유쾌한 슬픔을, 눈이 오면 즐거운 우울을 튼다
택시는 음악의 내면을 먹이 삼아 달린다
나는 바람의 지도를 따라 핸들을 돌린다
습작기
비둘기는 목을 흔들며 플랫폼을 분주히 다닌다
기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고
조팝꽃 같은 팝콘은 어디에도 없다
비둘기는 각자 흩어져
플랫폼에 깔린 정처 없는 햇살만 쫀다
사람들이 얼마나 다녔을까
반들반들한 바닥을
구구구,
비둘기는 타자를 치고 있다
온 몸을 흔들며 뱉어내는 소리는
델리만쥬 빵 같은 자음과 모음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 간 긴 의자에 앉아
비행을 접고 팝콘 같은 언어를 찾는
비둘기를 본다
둥글다는 것은
둥글다는 것은 처음과 나중이 만나는
순대국집 탁자이다
나는 우림시장 입구에서 혼자
순댓국을 먹고 있다
저녁의 출출함을 달래고 있다
이 순간 날선 근심을 내려 놓는 것이다
망우역 비둘기처럼 거산하던 그리움이
원탁으로 모이는 시간이다
술 고픈 노동이 모이는 곳이다
둥근 탁자에 모여
고추 탕기, 들깨통, 뚝배기, 술잔, 공기밥 모두가
둥글게 반창회를 한다
채우고 비우고 배고프고 배부르고
처음과 나중이 다시 손을 잡는 둥근 탁자이다
벽에 절은 때 같은 슬픔도
어찌 보면 벽시계의 12시와 1시 사이처럼
갔다가는 오고 다시 가는 것일 게다
둥글다는 것은 추억이 피고 지고
백열등 아래서 순댓국의 둥근 탁자가
배고픈 노동을 달래고 있는 것일 게다
발톱을 깎다
출근 전에 거실에 앉아 발톱을 깎는다
발톱에는 통각이 없다
나무처럼 끊임없이 자란다
며칠 새 부쩍 자랐다
내 안에 남아 있는 나무
바닥에 이파리처럼 떨어진 시간의 각질들
발이 아침까지 꿈길을 걸어와서는
말 못하는 먹먹함을 내민다
휴지에 하나 둘 모은다
나무가 되지 못하고
살이 기억하고 있는 무통의 저편
창밖으로 가을이 지나간다
나는 살 속에 끈질기게 뿌리 내린
발의 뿔을 본다
오래된 습관
나는 큰 주머니인 양 가방을 항상 메고 다닌다
내 가방엔 사계절 같은 옷만 입는 그림자가 산다
길을 걸으면 그림자는 가방에서 나와 나를 따른다
해가 지면 그림자는 어느새 가방으로 숨는다
내 가방엔 허기가 빈 도시락통처럼 달그락거린다
마저 읽지 못하고 페이지 끝을 접어놓은 저녁이 있다
시 나부랭이같이 쓰다 만 어젯밤이 구겨져 있다
술 먹고 가방을 술집에 놓고 나온 적이 몇 번이던가
그때마다 나를 잃고 혼자 버려진 그림자
회기역 플랫폼에 의자가 길게 눕는다
가방이 그림자를 부르는 시간이다
나는 그림자를 메고 전철을 기다린다.
간짜장을 기다리며
주방 음식 출입구 사이로 둥근 잔등이 보인다
그는 홀로 육중한 침묵을 돌리고 있다
모든 말들은 프라이팬으로 들어간다
슬픔을 볶고 절망을 능숙하게 뒤집는다
미사여구 같은 돼지고기 몇 점을 떨어뜨린다
이내, 햇살보다 눈이 시린 양파 껍질을 잔뜩 넣고
외로움보다 진한 춘장을 넣고 식탁으로부터 날아온
한 장의 허기를 볶는다
아내가 가끔 주방에 들지만 프라이팬은 언제나 그의 몫
여름은 양은냄비처럼 불끈 달아오른다
춤추는 불꽃은 과묵의 프라이팬을 희롱한다
혁명의 온도는 순식간에 가슴에 옮겨붙고
한 줌의 소금과 국자의 통제에 따라
주방의 날 것들은 차례로 투신한다
그는 한 그릇의 배고픔을 위해 프라이팬을 돌린다
선이 벽을 재다
벽은 키를 잰 선을 앨범처럼 간직하고 있다
키를 잰 선들이 입을 다물고 있다
김치 냉장고에서 아내 몰래 소주 빼먹듯 키를 재 본다
오래 입은 런닝구 앞가슴 늘어지듯 선이 조금씩 내려가고 있다
책 모서리 세우고 발뒤꿈치로 종이 한 장 두께만큼만 올리면
벽은 나의 뒤통수를 머쓱하게 읽는다
이사를 다녀도 선은 밥숟가락과 함께 따라왔다
벽이 직립을 고집하고 있는 반면에
선은 언제나 별일 없다는 듯 누워 있다
언제나 세상 안식처가 되었던
벽은 잘못 삶은 바지처럼 형편없이 쪼그라들고 있다
그래도 벽은 선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벽은 선을 안고 무너지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장의사가 한 마디 할 테지
넉넉하게 선을 긋지요
그곳에선 발톱이 좀 더 자랄 수도 있고 나의 노래도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선은 자벌레처럼 벽과 함께 나를 따라왔다
마루
한나절 머금었던 빛을 토한다
빛을 밟고 간 수 만의 발자국을 회상한다
절구에 고인 물에 하루를 못 참고 익사하는 바람들
외할머니 잔소리는 가마솥 안에 감금되고
여름은 밤이 깊도록 벌레를 소집한다
헛기침이 건너오는 동안
마루 밑 백 년 묵은 어둠에서 묻어나는
통증은 삐꺽대다
오랫동안 얼룩이 얼룩으로 닦여질 때
마루는 어둠의 빛으로 바닥을 다진다
과묵한 대들보를 싫증나도록 바라 본 착한 나무
처마 끝 허공에서 별은 내려와
마루에 쌓인다
주광성
망우역 승강장 틈새로 햇살이 들고
사람들이 모인다
수억 광년을 지나 대기권을 통과한
해의 마음은 모나지 않아
그림자들은 해를 찾는다
몸의 뒤편을 비로소 바라다 본다
바닥을 납작 엎드린
그림자는 우울한 나의 직분을 감추고
앞차를 놓쳐 한 칸씩 밀린 시간이 아쉬운 듯
목을 길게 뺀다
사람의 일생을 하나의 색으로 요약한 기법
누구에게나 공평한 죽음의 색이다
내면이 무거운 그림자는 땅을 어슬렁거리다
전철이 도착하고
몸들은 다시 그림자를 거둔다
시간의 문은 닫히고
햇살은 플랫폼에 남는다
┃작품해설┃
사물의 공간성과 자의식
이 종 섶┃시인
강준모 시집에는 사물이 많이 등장하면서 그 시집 속에서 주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사물들은 그 자체로 존재적이며, 존재인 만큼 공간적이거나 영역적이며, 공간과 영역을 가진 만큼 그에 따른 특정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사물들은 각기 자기 방식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모든 사물들은 자연의 부동의 질서로 세워진 차이를 보존한다.”고 말한 루크레티우스의 말처럼, 강준모의 사물들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발전하면서 자신이 세워진 부동의 질서에 따라 그 차이를 보존한다. 그것이 강준모가 보여주는 사물이라는 세계의 관점이자 그 관점을 담아내는 하나의 틀이다. 그 점에 있어서 강준모가 보여주는 사물들은 각각의 특성이나 역할이 극명하게 구현된다. 그렇지 않으면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고, 나아가 사물의 성질을 가졌다고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강준모의 사물들은 철저하게 사물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원형과 내성의 법칙을 따른다. R. W. 에머슨이 “사물에도 인간처럼 법칙이 있다. 그러나 사물은 자신들의 법칙에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 것처럼, 강준모의 사물도 법칙을 가지고 있으나 그 법칙에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이 말은 곧 강준모의 사물이 가진 법칙은 사물 자신을 제한하고 억압하거나 그 반대로 방임하고 방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인간과 법의 관계에서 법은 인간에게 공포를 주고 인간은 법에게 공포를 느끼는 그런 관계가 사물과 사물의 법칙 사이에는 없다. 그러므로 사물과 법칙의 관계에서 그 법칙의 역할이나 기능은 사물성을 드러내거나 제한하는 일에 있어서 어그러짐이 없다. 오히려 사물성의 구현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제일의 법칙이요 유일한 법칙이다.
1. 그림자의 말과 욕망
나는 큰 주머니인 양 가방을 항상 메고 다닌다
내 가방엔 사계절 같은 옷만 입는 그림자가 산다
길을 걸으면 그림자는 가방에서 나와 나를 따른다
해가 지면 그림자는 어느새 가방으로 숨는다
내 가방엔 허기가 빈 도시락통처럼 달그락거린다
마저 읽지 못하고 페이지 끝을 접어놓은 저녁이 있다
시 나부랭이같이 쓰다 만 어젯밤이 구겨져 있다
술 먹고 가방을 술집에 놓고 나온 적이 몇 번이던가
그때마다 나를 잃고 혼자 버려진 그림자
회기역 플랫폼에 의자가 길게 눕는다
가방이 그림자를 부르는 시간이다
나는 그림자를 메고 전철을 기다린다
- 「오래된 습관」 전문
「오래된 습관」에는 “나”라는 1인칭 화자가 등장하지만 이 “나”는 주체적으로 등장하기보다 “가방”이라는 사물을 부각시키는 역할로 함께 등장한다. “나”라는 존재가 “가방을 항상 메고 다”니는 한 가방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 “가방엔 사계절 같은 옷만 입는 그림자가” 산다. “그림자를 탈탈 탈수하”(「소용돌이에 관하여」)려고 해도 그림자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길을 걸으면 그림자는 가방에서 나와 나를 따”르다가 “해가 지면 그림자는 어느새 가방으로 숨”어버린다. 숨어버린 가방 속 공간에는 “허기가 빈 도시락통처럼 달그락거”리고, “마저 읽지 못”해서 “페이지 끝을 접어놓은 저녁이 있”고, “시 나부랭이같이 쓰다 만 어젯밤이 구겨져 있다”. 가방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때도 더러 있었다. 가끔씩 “술 먹고 가방을 술집에 놓고 나”올 때마다 “혼자 버려진 그림자”가 애처롭기도 했다. 그래서 이제는 “가방”이 아닌 “그림자”를 메고 다닌다.
여기서 “가방”은 공간성을 가지고 있는 사물로 존재한다. 가방이야 원래부터 무엇을 담는 것이니 그 공간성도 새로울 것이 없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그 “가방”에 일 년 내내 “그림자”가 사는 것을 설정해서 가방이라는 공간에 생명과 주거의 성향을 부여한다. 그런 “그림자”를 통해 보여주는 자의식은 가방과의 관계에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떠남과 회귀의 모형이다.
일요일 오후
창밖의 가을비는 막걸리처럼 탁하다
청소기에 나를 꽂는다
청소기가 어눌하게 하는 말이 있다
날마다 돌려도 쌓이는 말들이 몸통에서 빙빙 돈다
머리카락 붙잡고 죽자사자 뭉치던
한 움큼의 슬픔이 잡힌다
알 수 없는 곳에서 날아온
바람의 시체들을 모은다
먼지를 쓰레기통에 털면서
어제 일들은 잊자고 다짐을 한다
거실 바닥에 얼룩진 식구들의 그림자를 닦으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비의 본적은 고독이다
빈둥거려도 택배처럼 찾아오는 외로움
때로는 먼지와 같아서 어느 틈엔가 또 쌓인다
공복에 마신 막걸리 같은 오후
가을비에 빨래 건조대가 쉬는 날이다
이런 날은 낮잠을 늘어지게 자는 것이다
무중력의 잠이
외로운 말들을 빨아들일 것이다
- 「청소기를 돌리면서」 전문
“청소기”라는 사물은 “어눌하게 하는 말”을 가지고 있다. 말은 보통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고 타자와 소통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청소기”라는 공간 안에서는 “날마다 돌려도 쌓이는 말들이 몸통에서 빙빙” 돌기만 한다. 말을 할 줄 몰라서 그러는 것도 아닐 텐데 도대체 왜 그럴까.
말을 하기 어려운 어떤 상황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래서 “머리카락 붙잡고 죽자사자 뭉치던/한 움큼의 슬픔이 잡”히고, “알 수 없는 곳에서 날아온/바람의 시체들을 모”으고, “먼지를 쓰레기통에 털면서/어제 일들은 잊자고 다짐을” 하는 한 사물의 공간 안에서 발성되는 소리의 언어를 듣게 되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일들을 거쳐 “낮잠을 늘어지게 자는” 때에도 “무중력의 잠이/외로운 말들을 빨아들”이는 청소기는 말이 있으나 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리를 먹고 산다”(「자판기의 변명」)고 해도 된다. 말을 저장하는 것을 넘어 말을 빨아들이기까지 하면서도 일하는 순간에만 어눌하게 말을 할 뿐 도무지 말을 내뱉거나 쏟아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말은 통제되고” “몇 개의 단어만 통용”되어 “말이 줄어들 수밖에”(「승강기」) 없기 때문이다. 청소기라는 사물의 자의식이 이렇게 규명된다.
푸른 지도가 내장된 택시는 유목민이다
난봉꾼처럼 밀려오는 황사
가자는 대로 군말 없이 달리는 바퀴는 둥글다
지독한 외로움을 위해서
붉은 입술의 그녀가 내려도 욕망은 기억하지 않는다
가끔은 신이문 고가도로 교각의 습한 그늘에서
의자의 각도를 바꾸며 낮잠을 즐긴다
택시는 달려온 거리를 숫자로 기억한다
죽음의 공포를 제거한 숫자들
덜컹거리는 바퀴가 남은 거리를 진단할 뿐
건널목처럼 불쑥 나타나는 태양의 신기루는 유목의 습성이다
달리는 동안 나는 팔뚝에 태양을 문신하고
돈벌이가 괜찮을 때는 사창가 뒷골목을 배회할 것이다
빨간 전구 밑에선 서로의 내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흐린 날에는 백미러로 탑승자의 결핍을 추측하고
뼛속을 달그락거리는 고독을 위해서는
달리는 차창으로 담배 연기를 뱉는다
비가 오면 유쾌한 슬픔을, 눈이 오면 즐거운 우울을 튼다
택시는 음악의 내면을 먹이 삼아 달린다
나는 바람의 지도를 따라 핸들을 돌린다
- 「개인택시」 전문
“택시”에는 “푸른 지도가 내장”되어 있다. 그래서 “유목민”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유목민”이라는 말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속성이 있다. “난봉꾼처럼 밀려오는 황사” 앞에서도 “가자는 대로 군말 없이 달리는” 차원에서는 그야말로 “유목민”의 속성과 닮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가도로 교각의 습한 그늘” 아래에서 “낮잠을 즐”기기도 하지만 “지독한 외로움을 위해서/붉은 입술의 그녀가 내려도 욕망은 기억하지 않”거나, “돈벌이가 괜찮을 때는 사창가 뒷골목을 배회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다시 “흐린 날에는 백미러로 탑승자의 결핍을 추측하고/뼛속을 달그락거리는 고독을 위해서는/달리는 차창으로 담배 연기를 뱉”기도 한다. “비가 오면 유쾌한 슬픔을, 눈이 오면 즐거운 우울을” 틀면서 “바람의 지도를 따라 핸들을 돌”리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청소기를 돌리면서」가 집 안에 있는 사물의 공간성과 자의식을 보여주고 있다면, 지금 살펴본 「개인택시」는 집 밖에 있는 사물의 공간성과 자의식을 보여준다. 이 둘의 대비를 통해서 “청소기”라는 사물의 자의식 속에 무엇이 웅크리고 있는지 “개인택시”라는 사물의 자의식은 또 어떻게 그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지 잘 알게 된다. 더불어 「오래된 습관」에 나오는 “그림자”와 함께 살펴보면 그림자의 말이 “청소기”에 있고, 그림자의 겉으로 보이는 생활과 숨겨진 욕망은 “개인택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2. 배설과 충돌, 그리고 소멸
내 변기는 바다에 닿아 있다
스위치를 내리면 내장을 스친 욕정들이 흐른다
주상 복합 상가 정화조로 감쪽같이 공간이동 한다
이마트 큰 도로 밑에 복개천이 있다
거기에는 어둠을 먹고 싸는 박쥐가 서식한다
나의 똥은 바다가 그립다
물을 내린다
소리에 민감한 밤의 뼈
누군가 물로 물을 행군다
변기는 밤을 조금씩 바다로 흘려보내고 있다
박쥐는 흐르는 밤의 뒷면을 본다
어둠이 하수로에서 풀처럼 자라고
복개천변의 포플러는 똥 묻은 바지를 입는다
변기는 서둘러 물을 내리고
박쥐는 복개천을 빠져 나온다
며칠 뒤면 나의 똥은 서해의 아침을 만날 것이다
- 「변기」 전문
가방 속 그림자의 말과 생활에는 유목민의 그것으로 포장된 욕망이 이미 내재되어 있었다. 그것은 결국 욕망의 배설과 충돌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이어지는 사물의 공간적 자의식에서도 그 흐름의 과정과 상황이 그대로 나타난다.
「오래된 습관」과 동일하게, 시작할 때 1인칭 화자가 등장하지만 이 역시 “변기”와 “똥”을 매개로 해서 “욕정”을 드러내고자 하는 ‘나-변기’의 동일 장치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 “변기는 바다에 닿아 있”어 “스위치를 내리면 내장을 스친 욕정들이” 흘러간다. 그 “욕정들”은 배설물에 불과할 터인데도 “똥은 바다가 그”리운 것이다. “변기는 밤을 조금씩 바다로 흘려보내”면서 “며칠 뒤면 나의 똥은 서해의 아침을 만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는 것이다.
이런 욕정의 배설은 “복개천”에서 “어둠을 먹고 싸는 박쥐”의 환경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박쥐”가 “흐르는 밤의 뒷면을” 보고, “어둠”은 “하수로에서 풀처럼 자라고/복개천변의 포플러는 똥 묻은 바지를 입”고 “박쥐는 복개천을 빠져 나온다”는 설정은 변기에서 욕정을 배설하는 그것의 오마주일 것이다.
나들이 공원 공사판 구석에
허리가 휜 못이 각목에 삐져나와 허공을 찌르고 있다
지나가는 행인은 못 밟을까 눈살 찌푸린다
못은 집의 견고함을 위하여
방과 창을 만들고 편리와 편리를 이어주었다
세상살이에 지친 육신 쉬어가라고
망치의 힘을 안간힘을 다해 간직했다
웃고 있는 지붕 아래서 울고 있는
못의 등골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못이 비에 젖고 있다
붉은 눈물이 끄트머리에 맺혀
녹이 못을 먹고 있다
육중한 시간이 트럭처럼 굉음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가을비에 노년이 공원 벤치에 앉아 있다
등 굽은 허리는 집을 추억하고 있다
- 「못에 대한 소묘」 전문
「변기」가 사물의 공간 밖으로 빠져나가는 욕망의 배설을 보여주었다면 「못에 대한 소묘」는 사물의 관통을 통해 또 다른 욕망의 충돌과 소멸을 보여준다. “공사판 구석에/허리가 휜 못이 각목에 삐져나와 허공을 찌르고 있”다. “지나가는 행인은 못 밟을까 눈살 찌푸”리는데 그런 못도 한때는 생의 중심에서 “집의 견고함을 위하여/방과 창을 만들고 편리와 편리를 이어주었”다. “세상살이에 지친 육신 쉬어가라고/망치의 힘을 안간힘을 다해 간직했”다. “웃고 있는 지붕 아래서 울고 있는/못의 등골”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생이었다.
그렇게 살아왔던 “못이 비에 젖고 있다”. “붉은 눈물이 끄트머리에 맺혀/녹이 못을 먹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가을비에”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노년”으로 전이되면서 “등 굽은 허리는 집을 추억하고 있”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여기서 못과 노년의 절묘한 병치를 통해서 ‘각목에서 삐져나온 못이라는 사물’과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등 굽은 노인’ 간의 상호적인 해석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허리가 휜 못”이라면 못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 있겠으나 그보다는 못을 박는 행위에 더 문제가 있을 여지가 많다. 그러니 ‘등 굽은 노인’도 그 자신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그 노인을 그렇게 만든 세상이 더 문제일 거라는 생각에 동의하게 된다.
그렇다면 결국 욕망의 충돌에 이은 소멸이란 스스로 택한 길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강요된 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터, 가까이는 「변기」의 배설물이 흘러가는 바다가 사실은 소멸하는 장소이고 멀리는 「오래된 습관」의 가방 속 그림자와 「청소기를 돌리면서」의 청소기 안에 있는 말이 결국은 ‘외출과 회귀’의 반복 끝에 그리고 ‘발설과 침묵’의 기형적인 반복 끝에 소멸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다. 한 공간에서 또 다른 공간으로 전이되는 것의 결국은 현재 위치에서는 희망적이나 목적지인 그 공간에서는 소멸하게 되는 것, 이것이 공간 이동이나 위치 변동의 추적에 따른 자의식의 변화라고 하겠다.
3. 기다림의 자세와 무게
의자는 아무래도 앉을 수 없다. 사람들은 짧은 다리 때문에 앉아 있다고 여길 테지만 의자는 다리를 접은 적이 없다. 겨우내 비탈에 서 있던 나무들은 봄을 기다렸다. 금방 떠나는 봄을 아쉬워하듯 목련꽃은 투신한다. 운동장에서 여학생들의 고성이 하얗게 날아오르고 의자를 떠났던 시간들이 다시 돌아와 엉덩이를 붙이는 대낮의 교실. 의자의 다리는 불온하다. 비분절음은 관절에서 삐꺽거리고 짧은 다리는 길게 그림자를 늘인다. 의자에 앉았다 떠나간 기다림의 무게들. 그 하중에도 그림자는 떠나지 못하고 봄이 다시 지나가는 중이다. 꽃잎 날리는 동안 의자는 봄이 앉아 갈 수 있도록 종일 서 있다.
- 「의자」 전문
「못에 대한 소묘」에 나오는 공원 벤치는 자기 위에 앉았다 간 등 굽은 노인의 체온이나 흔적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혹시라도 의자마저 등 굽은 노인을 무시하거나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렇지 않았다. 의자는 그 순간에도 편하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의자가 붙박이로 고정되어 있는 터라 의자는 앉아있다고 생각하기가 쉬웠다, 아니,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은 것이 의자가 무슨 수고를 할까 하는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짧은 다리 때문에 앉아 있다고 여길 테지만 의자는 다리를 접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자의 자세는 “의자를 떠났던 시간들이 다시 돌아와 엉덩이를 붙이는 대낮의 교실. 의자의 다리는 불온”했다로 이어진다. “비분절음은 관절에서 삐꺽거리고 짧은 다리는 길게 그림자를 늘”였다. 사람들이 의자에 앉았다가 의자에서 일어서 의자를 떠났다가 다시 의자로 돌아와 의자에 앉는 그 모든 순간과 여정에서도 의자는 사람의 행동과 관계없이 언제나 앉지 않고 “종일 서 있”었다. “겨우내 비탈에 서 있던 나무들”이 “봄을 기다”리듯 의자도 기다렸다. 의자에게 익숙하게 갖춰졌던 외형적 자세의 의미가 내적으로 밝혀지는 순간이다.
“의자에 앉았다 떠나간 기다림의 무게들”을 과연 잴 수 있을까. “그 하중에도 그림자는 떠나지 못”했다는데 그렇다면 가방에서 나와 가방으로 들어가는 그림자도 의자처럼 종일 서 있지나 않았는지 “무릎처럼 꺼부정한 몸의 그림자들”(「소용돌이에 관하여」) 생각에 뒤늦은 안쓰러움이 밀려온다. 그 그림자에게도 봄이 오기를. 그리하여 “봄이 앉아 갈 수 있도록 종일 서 있”는 의자 하나쯤 가방 속에 두고 살기를.
“의자에 앉았다 떠나간 기다림의 무게들” 중에서 그 의자에 앉아있던 노인의 무게도 달아본다. 한 공간에서 떠나온 노인이 또 다른 공간인 의자에서 감정을 추스리고 있다. 그 감정을 받아내고 있는 의자라는 사물은 “아내와 말다툼하고 공원에”(「부적합」) 올랐던 노인의 기억이나 습관의 관성에 익숙했을지도 모른다.
공원 벤치에 앉아 있던 등 굽은 노인이 “집을 추억하고 있”(「못에 대한 소묘」)었다는 사실은 그때 내렸던 “가을비”와 맞물려 쓸쓸함과 애처로움을 자아낸다. “집을 추억”한다는 사실은 집이 있었다는 것이요 집을 그리워한다는 것인데, 그 노인은 알고 있을까. “멀리 나간 입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어서 “거실 구석에서/식탁”이 애가 타도록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식구」)는 것을.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은 혹여 “이름 모를 희망”에 기댄 그것이 “어제의 절망”(「망우역」)으로 바뀐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는 절망이 다소 위로가”(「편백나무 숲 2」) 되어 “기억들은 폐업에 들어갔”는데도 여전히 “가족사진들이 깊이 잠들어 있”는 “기억의 납골함”(「서랍들」)을 붙잡고 울고 있는 노인. 사람들의 눈에는 마음의 어깨를 의자에 기대고 앉아 있는 노인이 보이겠지만 사물을 제대로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진 사람이라면 “탑승을 거부하지 않는/벤치가 오래 앉아 있”(「오래된 모자」)는 것을 마음의 깊은 눈매로 보게 될 것이다. 노인이 앉았다 간 “공원 벤치에 나무가 눕는”(「나무의 작법」) 것 또한 노인의 이야기와 감정을 들은 의자와 교감하려는 여지와 여운의 아늑한 장치가 된다. 이러한 내용이 바로 의자가 잰 기다림의 무게요 서정인 바, 한 인간의 무게와 관련된 의자의 공간적 자의식과 관성이 따뜻하고 훈훈하다.
4. 사물 듣기
R. M. 릴케는 그의 「눈먼 여인」이라는 시에서 “나는 들을 수 없는 사물을 들었다.”고 했다. 사물이란 본디부터 속성상 무엇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물을 들었다”고 했을 때는 그것이 시인의 통찰이요, 시인이라면 마땅히 사물을 통찰해서 사물의 내면에서 나오는 깊은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하겠다.
강준모의 시집에는 도처에서 사물의 소리가 들린다. 마치 사물의 소리를 채집해서 수록해 놓은 시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소리들은 사물의 공간에서 사물의 내면을 공명해서 울린다. 그 소리들은 사물의 자의식을 드러내거나 파헤친다.
이러한 구조는 사물을 대상으로 쓰지 않은 시에서도 같은 구조를 형성한다. 즉 A가 있을 때 그 A 안에 b가 속해 있는 형태다. 그 A는 b를 감싸고 포함하면서 b를 반응하게 한다. b는 A 안에서 기능하거나 영향을 받으면서 A로 말미암은 결과물이나 감정 같은 것을 드러낸다. 이런 맥락에서 강준모의 시들은 일정한 틀을 형성하고 공유한다. 사물 듣기를 바탕으로 대상 듣기가 시도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물 듣기는 ‘사물의 소리를 듣는 사물 듣기’로 출발했으나 강준모에 이르러서는 ‘사물이 소리를 듣는 사물 듣기’로 그 영역과 기능이 확장된다. 사물이 또 다른 사물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이때도 사람이 사물 곁에 등장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겠으나 사물에게는 타자라는 존재가 사물과 사람으로 나뉘기보다는 사물 이외의 또 다른 사물로 존재할 뿐이다. 오히려 사물 밖의 사물로써 사람이라는 존재는 생각과 표현과 감정과 온도와 이야기가 구체적이고 생생해서 그것을 듣기가 더 쉽다는 장점이 있다.
강준모의 사물 듣기를 통해 드러난 것은 사물의 공간성과 자의식이다. 각각의 사물마다 자신만의 공간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공간의 구조와 관계에 따른 자의식은 이후로 더욱 세밀해지고 깊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강준모는 사물의 소리를 듣는 것을 넘어 사물이 듣는 그 소리를 들을 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강준모는 이미 사물화 되었거나 하나의 사물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집 속에 나오는 사물들이 귓속에 몰래 들려준 말이다.■
표4글
강준모 시인은 일상의 그림자로 시를 쓴다. 그런데 이 그림자는 여러 가지 색깔로 변하며, 때로는 걸어 다니기도 한다. 시인은 그 그림자에게 말을 걸고 귀 기울인다. 이 그림자는 외로움의 벗이자 그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너무 그리워 결국 그림자로 데리고 사는 것. 그 그림자를 시로 바꿔도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청소기를 돌리면 한 움큼의 슬픔이 잡히고”(「청소기를 돌리면서」), “할 말은 투박하게 빈 컵으로 떨어지고”(「자판기의 변명」), “택시는 음악의 내면을 먹이 삼아 달리는”(「개인택시」) 그림자를 시인은 본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 그림자를 한 장 한 장 감상할 것이다. 물컹하면서도 딱딱한 그림자. 시집을 다 읽고 다 덮을 때 즈음 나의 그림자가 무척 보고 싶어지리라.
- 현택훈(시인)
하이데거는 言語에 대해 인간과 인간 사이의 통로가 되는 기호이자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존재가 불안을 탁본할 때조차 그 언어는 타자와 엮여있는 것이다. 강준모의 시에서는 작고 사소한 것을 다독이는 뜨거운 침묵이 느껴진다. 숨소리를 크게 내지 않으면서도 인간과 사물이 긴밀하게 내통한 질서가 치열하면서도 순연하다. 그의 시에서 오래 궁글린 냄새가 난다. “오른쪽으로 틀면 왼쪽으로 쏠리는 미련”과 화해의 냄새가 난다. 혹자는 조용하면서도 강렬한 그의 속내를 닮았을 법한 “살 속에서 끈질기게 뿌리내린 발의 뿔”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원숙한 호흡이란, 타자의 숨을 들어주는 밤을 지나 묵은 마음에서 돋아난 뿔을 다듬고 있는 아침에 이르는 미덕임을 배운다. “벽이 선을 배반하지 않듯”, 그의 詩들은 詩人 강준모에게 도착했다. 서로를 버텨준 따뜻한 무게가 기분 좋은 문을 열고 있다.
- 박주하(시인)
약력
1961년 서울 출생. 경희대학교 및 동 대학원 국어국문과 졸업. 2017년 <창작21> 신인상으로 등단. 공동작품집 <발톱을 깎다> <수상한 가족사> 외. 창작21작가회 회원. 현재 경희여자고등학교 국어 교사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