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청나라는 중국인의 해외이주를 불법으로 간주하여 정부가 나서서 이들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러나 서구제국과의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후 화교들이 사는 곳에 집중적으로 공식적인 대표단을 파견하는 등 화교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는 청의 근대화를 이루려는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적극적으로 화교를 근대화에 활용하려는 움직임이었다. 화교들은 쑨원의 혁명정부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투자에 적극적이었다. 1914-1930년간의 송금액수는 매년 중국화폐로 2억원에 달했고, 1930-36년의 기간에는 3억원에 달했으며, 송금의 대부분은 꾸앙똥(廣東)과 후우지엔(福建) 지역으로 보내졌다.
송금의 주요 수령자인 국내화교들과 그 영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50년대 중국 꾸앙똥에는 6백만 이상의 교권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국내화교와 함께 성 전체 인구의 1/5를 차지하고 있었다. 교권의 가족은 대개 노년층, 여자, 어린이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유휴노동력의 해외이주로 인해 정상적인 농가보다 노동력 부족현상을 겪었으며, 이 때문에 이들은 생활을 농업경영보다는 해외에서 오는 정기적인 송금에 의존하였다.
1957년 자료에 따르면, 교권의 1/3이 송금을 주요 수입원으로 했고, 나머지 중 1/3이상이 부수입원으로 생각했다. 해외송금 중 90%이상이 가족부양에 사용되었고, 2-3%는 저축과 투자에 사용되었다. 1911년 이후 화교의 투자는 크게 증가했고 1920년대에 이르면 국내화교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어 귀교와 교권중 벼락부자가 나오기도 했다. 또한 개평현 적간진의 관씨 성의 종족조직의 경우에는 1920-30년대 화교들의 송금으로 종족조직의 힘을 강화하고 이러한 송금을 토대로 학교설립, 종족도서관의 건립, 그리고 잡지를 발행하여 결속력을 강화하였다.
1949년 이후
1949년 공산정권의 수립이후 해외화교와 국내화교에 대한 중국의 정책은 변화하였다. 중국은 토지개혁에서 집체화과정에 이르는 사회주의 개조과정에서 국내화교들을 지주계급으로 간주해 토지와 집을 몰수하고 송금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를 가하였다. 또한 문화혁명기에는 국내화교들을 자본주의를 전파하는 사도로 간주하고 많은 탄압을 가하였다. 한편 이 기간 중국은 해외화교들을 세계혁명전략의 도구로 삼으려는 시도를 하였다. 1965년 인도네시아의 9.30사건, 버마, 태국, 인도 등에서의 혁명수출 실패는 화교에 대한 동남아 국가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함께 동남아 제국가들은 중국배척운동과 함께 반화교폭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화교와 중국과의 관계는 거의 단절되었다.
그러나 1970년 중국은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관계회복을 꾀하며 화교를 우호사절로 이용하였다. 친선협회, 화교의 고국방문과 송금의 허용, 화교와의 무역증진은 화교 거주국과의 신뢰회복을 위한 합법적인 통로로서 화교공동체의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 취해진 중국의 조치였다. 또한 이러한 조치는 개방화 정책을 통해 더욱 활성화되어 화교와 중국과의 관계 역시도 많이 개선되었다.
중국과 화교 그리고 동남아시아 국가와 화교의 관계를 살펴볼 때, 화교들은 주로 주재국과의 관계변화에 따라 중국과의 관계 역시도 변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중국의 정책에 따라 화교의 중국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거주국과 중국과의 관계에 문제가 발생하였을 경우에는 주로 주재국의 정책에 따라 중국과의 관계가 변하였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중국과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는 화교들은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하였고 개선될 때에는 화교 역시도 중국과의 관계를 맺고 있다.
개방-개혁의 선도자
화교기업의 해외진출에서 가장 괄목할 신장세를 보이는 지역은 다름아닌 중국 대륙이다. 떵 샤오핑(鄧小平) 체제가 출범한 이래, 중국은 개방과 개혁을 통해 엄청나게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는 중이다. 당연히 많은 자본과 기술을 밖으로부터 흡수해야만 했기 때문에, 중국은 미국 다음으로 외자를 많이 쓰는 국가가 됐다. 이같은 상황에서 문화적 동질성을 지닌 화상이 대륙투자의 선두에 나서는 것이야말로 너무나 자연스럽다.
중국대륙에 대한 외국인 투자에서 화상의 몫은 절대적이다. 예를 들어, 1994년에 338억 불의 신규외자가 유입됐는데, 이중 홍콩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70%로 압도적이다. 홍콩자본에는 순수한 홍콩인이 차지하는 비중도 크지만, 상당액이 다른 지역의 화교가 세운 현지법인의 몫이다. 기실 동남아 화상들이 해외로 진출할 때, 우선 홍콩을 거점으로 삼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흥미롭게도 화교의 투자는 동남부에 집중되어 있다. 왜냐하면 화교의 출신지가 바로 꾸앙똥(廣東)이나 후우지엔(福建) 등의 동남부 연해지역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동남부 지역은 중국의 최대 수출기지로 탈바꿈하여 개방경제를 이끌고 있다. 최근 이 지역에서 급속한 경제성장에 비해 도로나 항만 등 사회간접시설이 뒤따르지 못하게 되자, 화교자본이 점차 북상하는 현상도 보인다.
화상은 중국진출에 있어서도 그 진가를 어김없이 발휘한다. 무엇보다도 언어나 습관의 동질성을 무기로, 현지의 관리나 노동력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중국에서 사업할 때, 정부 관리의 중요성은 새삼 여기에서 강조할 필요가 없겠다.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로부터의 이행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다른 개발도상국보다도 훨씬 정부 관리의 목소리가 드세다. 이들과의 관계는 거의 외국기업의 사활을 결정할 정도다. 이러한 환경에서, 화교는 자신들이 직접 관리들과 접촉할 수 있는 언어나 생활 습관을 지녔을 뿐 아니라, 동향관계나 친족관계를 적극 활용할 수 있는 잇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화상들은 중앙정부보다 지방정부의 관리와의 관계를, 대규모보다는 소규모의 투자를 선호한다. 현재 진행중인 경제개혁의 핵심사안 중 하나는 지방분권화다. "각자의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자"라는 구호아래, 각 지방정부는, 특히 성(省)정부는 경제의 운영을 중앙의 간섭없이 독자적으로 꾸려나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정부는 외국 투자가들에게 세금이나 부지면에서 훨씬 매력적인 조건을 내놓는다.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는 현재 중국경제의 최대 골치거리중 하나인 국영기업과의 합작을 왕왕 억지하다시피 권유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실패의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그 결과, 외국기업들은 지방정부와의 사업을 선호하는데, 혈연과 지연을 활용하기 용이한 화교는 단연 유리한 위치에 서있다.
동일한 맥락에서, 중앙정부의 규제 등 장벽이 비교적 적으면서 지방관리들에게 더욱 매력적인 소규모 투자를 화상들은 중시한다. 대규모 투자는 중앙정부의 규제가 비교적 많으며 지방재정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몫이 상대적으로 적다. 그러므로 화교들은 소액투자로 시작하여 차츰 대형투자로 규모를 확대하거나, 대형투자를 여러개의 작은 프로젝트로 나눈 다음 나중에 하나의 대기업으로 합병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결국 중국사회의 저변에 파고드는 화교기업의 존재가 다른 다국적 기업보다 일반 중국인에게는 훨씬 피부에 와닿는다. 따라서 화교의 역할은 기업활동 이상의 영역에까지 미치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외부세계와의 연결고리가 되기 때문에, 화교는 현지 중국인의 귀와 입이 된다.
기실 1989년 6.4천안문 사태가 발발했을 당시, 홍콩을 포함한 해외의 화교들이 펼치는 활동상은 대단했다. 이후 6.4사태의 주역들을 해외로 도피시키거나 그들의 석방을 촉구하기 위한 조직적 활동이 해외의 화교사회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최근 인권운동가 해리 우(Harry Wu)의 사건에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정치적 개혁에 대한 화교들의 관심은 왕왕 중국정부의 이해와 충돌하기도 한다. 미국 의회에서 중국의 인권상황을 비판하는 우의 행동이야말로 중국정부의 입장에서는 고작 '화평연변'(和平演變)이라는 평화적 방법을 통해 외세가 침략하는 수단의 하나로 밖에 인식되지 못했던 듯하다.
경제적으로 화교는 '제 2의 중국혁명'이라 불리우는 경제개방에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제 5의 현대화라는 정치제도의 개혁에도 상당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중국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는, 화교의 역할이 항상 긍정적인 것은 아닐지 몰라도, 중국사회 전체의 미래를 고려할 때, 그들은 다방면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매우 긍정적인 존재들이다.
전세계 화교의 분포와 정황
1. 연구의 필요성
화교 네트워크는 보이지 않는 帝國이다. 대만, 홍콩에서 아세안국가 그리고 북미, 호주로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중국인, 국경의 붕괴와 통신망의 발달은 전 세계 화교의 대 융합이란 전대미문의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형체를 드러내지 않던 화교는 글로벌 시대의 개막과 동시에 선두주자로 나섰다.
94년 현재 中華經濟의 交易量은 전세계 교역량의 8.4%의 중화경제권 역내의 상호교역은 2.5%를 점한다(대한 무역투자 진흥공사 자료). 이들이 갖고 있는 돈(외환 보유고)의 규모를 보면 전율할 힘이 느껴진다. 중국을 포함한 대중화경제권의 94년 현재보유고는 2천 3백 93억달러로,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 1위인 일본의 외환보유고 2천 1백억 달러를 제압한다. 화교의 자산규모는 중국을 빼고도 2조 달러선이고, 화교는 1인당 자산에서 1위인 일본에 못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화교 경제력은 더욱이 세계최대의 開發途上國인 중국과 결합되면서 세계를 호령하고도 남을 것이다. "용의경제권"의 규모는 일본과 미국을 이어 제 3의 경제력을 갖고 있다. 화교 경제권은 더구나 바닥을 제대로 헤아릴 수 없다는 데 두려움이 있다. 자금력을 노출시키지 않는 것이 화상들의 동물적인 본능이기에, 이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居住國의 탄압에 대비하여 돈을 안전한 곳에 은닉하는 것으로, 화상들의 파워는 일반적인 생각보다 훨씬 높을 수도 있다. 동아시아에선 한국과 일본을 제외하고는 이 땅의 지배자들이다. 그들은 동남아에서 모든 교역과 투자를 지배하는 손이다.
94년 중국판 포브스잡지 자본가의 보고서에서, 아시아10대의 중권시장(서울, 타이베이, 홍콩, 방콬, 콸라람푸, 싱가폴, 자카르타, 마닐라) 의 1천 大企業중 51%가 화교가 주인이라는 충격적인 보고가 내려왔다. 주식 총액 기준의 5천4백10억 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일본 후지쓰 연구소의 보고서는 더욱 놀랍다. 아세안 6국을 대상으로 기업 소유 현황을 조사하였는데 화교는 상장기업중 태국의 81%를, 싱가폴 81%, 말레이시아 61%, 필리핀 50%,를 수중에 넣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을 일명 `환태평양의 제후들'이라 불린다.
홍콩 반환과 천안문 사태는 태평양 저편에 새로운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있다.
소리없이…… 그리고 99년 마카오 반환, 머지 않아 이뤄질 대만과의 통일은 대 중국으로 가는 밑거름인 것이다. 그리고 대중화 경제권의 외곽에 자리잡고 있는 5천만의 화교들이 전 세계를 묶는 대중화 네트워크를 추진하고 있다. 이에 화교들의 전 세계에의 분포와 그들의 경제력을 알아보고 그들이 미치는 영향과 향후 중국의 세계화 전략에 앞서 대중화 경제권의 구상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2. 세계 화교 인구의 분포
1. 華僑의 起源과 歷史
`화교(華僑)'란 단어는 청말무렵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1883년 정관응(鄭觀應)이 이붕장(李鵬章)에게 준 한편의 상신서중에서 "남양의 각 부두의 화교인(南樣各埠華僑)"이란 글이 발견되면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중국인의 해외 이주는 훨씬 오래 전 1천4백년전의 고대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 화교사(華僑史)의 분기(分期)
1. 일반적인 시각: 당대(唐代)를 상한으로 보았음.
이는 첫째, 唐代 남해 교통과 무역의 발달, 둘째로 중외 왕래의 증가, 셋째로 해외 화교들이 자신들을 "당인(唐人)" 이라 자칭함. 넷째 일련의 고서 중에서 중국인의 해외 이주 기록이 기재되어 발견되었다는 근거에서 비롯되었다.
2. 진벽생(陳碧笙)교수: 송대(宋代)를 상한으로 보았음.
이는 첫째, 중국의 이민은 연해 지역의 개발과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서 유래, 둘째 상품화폐경제의 발전, 셋째 계급구조의 변화, 넷째 조선과 항해 기술의 진보등 크게 4가지를 근거로 하고 있다.
(2) 송대(宋代)이후 中國人의 海外移住
제 1기- 12c南宋 해안 상품경제의 급격한 발전에서 시작하여 16c후반기 명대(明代) 해금(海禁)개방까지의 약 4, 5백년간이다.
중국 역사상, 이는 봉건사회 경제의 최고조 시기이며,
화교사상, 화교의 대량 출현이 나타나고 광범위하게 분포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 대다수의 화교들이 오늘날의 인도와 싱가폴, 베트남, 태국, 필리핀 등지의 中西 교통무역의 중심으로 이주하였으며 그 수는 약 10만이 넘는다.
제 2기- 16c하반기 海禁 개방부터 1840년 아편전쟁(阿片戰爭)이 일어나기까지의 약 300년간이다.
중국역사상, 이는 자본주의 萌芽출현의 시기이며,
화교사상, 이는 화교 출국의 대량증가와 화교가 점점 각국에서 사회경제의 기초를 정립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동쪽으로는 일본. 조선, 서쪽으로는 인도 동부해안과, 남쪽으로는 인도네시아, 북쪽으로는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약 100만 이상의 인구가 증가하였다.
제 3기- 1840년 아편전쟁에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성립까지 109년에 이르는 시기이다.
중국역사상, 이는 반식민지. 반봉건사회의 시기이며,
화교사상, 화공(華工)의 대량출국과 화교라는 민족의식을 점점 인식하고 자각하는 시기였으며, 현지 거주민족으로서의 자리 매김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이때 그 수가 1000만에 이르렀고, 그들의 활동범위 또한 아시아에서 미주와 유럽, 아프리카, 대서양주 등으로 확산되었다.
제 4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출범 이후부터 지금까지 약 40년이 넘는 시기이다.
중국역사상, 이는 사회주의 사회 시기이며,
화교사상, 화교, 화인이 각지에서 사회의 경제적, 정치적 지위 방면에서 중요하고 커다란 변화가 발생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화교와 화인의 수는 급속히 증가하였으며 세계 140국이 넘는 국가와 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하였고 그 수는 3000만이 넘는다.
(3) 華僑 出國의 原因-
화교들이 해외로 나가게 된 그 이유와 배경을 시기별로 살펴본다.
제 1기- 明代 海禁開放이전까지, 당시 중국은 아시아의 最先進國家로서, 비교적 낙후한 동남아의 각지역과는 경제발전 수준상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이때, 동남아 각지에서 해외 무역을 하는 중국 상인, 선원들의 일부분이 그곳에서 정착을 하여 제 1대 화교를 성립하였다. 이 시기는 경제상의 원인이외에도, 정치상의 원인으로 해외로 도피한 이들 또한 화교를 구성하였다.
제 2기- 明代 海禁開放에서 阿片戰爭까지, 제 1시기와 같은 이유로 출국한 인원이 대다수였지만, 이 시기에 또다른 새로운 상황이 출현하였다. 동남아 부분지역은 이미 서방국가의 식민지 또는 무역 중계자로 변해 있었고, 그 현지의 상품경제는 더욱 강대한 力量과 광범한 前途를 구축하고 있기에 많은 화교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 외에도 노예를 잡아다가 판매하였고, 국내에서 근거를 두지 못한 해상무장, 그리고 국외의 비교적 높은 생활 수준이 동경의 대상이 된 노동인민들을 끌어들여, 이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출국하였다.
제 3기- 阿片戰爭이후, 中國은 점점 半植民地. 半封建社會로 접어들어 이 시기의 화교들이 출국한 규모가 대단히 컸으며, 그 분포에 있어 광범위하였다. 이 시기에 이들은 커다란 고난을 맛보아야만 했는데, 이는 國內的, 國外的 양 방면에서 연유한 것이다.
국내로는 정치의 암흑시기로써,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한 생활의 어지러움과 빈곤 속에서, 국외로는 帝國主義宗主國으로부터 식민지의 경제적 약탈과 노동력을 헐값으로 착취하였다. 때문에 이러한 특수한 역사상황아래, 상당수의 華工들이 조국에서부터 아시아, 미주, 유럽, 아프리카, 대서양주 등으로 이주하였으며, 오늘날 화교들이 세계 각국에 널리 퍼지는 그 근본적인 기반을 다지었다.
제 4기- 中華人民共和國 성립후, 중국은 社會主義로 진입하였고, 노동인민생활의 기본적 개선과 더불어, 일부 국가가 화교의 入國을 제한하여, 국내 인민의 대량출국 현상은 이미 기본적으로 멈추었다. 하지만 동서방 경제발전의 차이와 미국, 캐나다, 호주 등의 國家移民政策의 조정으로 여전히 적지 않은 중국인이 빠져나갔고, 친인단체 또는 유학 등의 방법으로 계속적으로 해외로 이주하였다. 때문에 이 시기에 華人經濟의 發展과 人口의 自然的 繁昌으로 인해, 해외 화교의 수는 여전히 증가하였다.
2. 現 華僑 人口의 狀況
현재 전세계의 화교 인구를 논하는데 있어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혹자는 약 2000만명, 혹자는 약 4000만명, 심지어는 5000만명 이상에 이르렀다 한다. 이러한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바로, 華僑人과 現地人이 결혼함으로써 이를 바라보는 각도에서 사람들이 華僑와 華人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누구도 오대양주의 화교, 화인의 전면적 인구조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大陸과 臺灣 그리고 海外의 비교적 일치한 통계 수치는 약 5000만으로 헤아려진다.
<표-1>世界華僑華人人口統計表
국가 (지역)
국가 총인구
화교화인인구
자료원
아시아
일본
121,950,000(89년)
139,847
89년 中報
조선
18,180,000(86년)
10,000
華人月刊
한국
48,120,000(86년)
30,000
태국
52,900,000(86년)
4,813,000
88년 4월 明報
싱가폴
2,610,000(87년)
2,100,000
90년 世界日報
말레이시아
16,109,000(86년)
5,097,000
88년 聯合晩報
필리핀
55,576,000(87년)
1.100,000
88년 4월 明報
인도네시아
184,000,000(90년)
6,000,000
各國 華僑華人
베트남
62,000,000(87년)
961,702
90년 報刊資料
미주
캐나다
22,500.000(86년)
600.000
各國華僑華人
미국
239,400,000(86년)
1,260,000
91년 華聲報
멕시코
78,404,500(85년)
20,000
86년 參考消息
쿠바
10,250,000(86년)
7,000
88년 報刊資料
파나마
2,180,000(85년)
100,000
91년 海光報
유럽
영국
56,618,000(85년)
200,000
人民日報 海外版
프랑스
55,278,000(86년)
200,000
聯合晩報
포루투칼
10,230,000(85년)
10,000
聯合晩報
스위스
6,523,100(87년)
13,286
海外報刊資料
독일
75,600,000(85년)
46,000
各國華僑華人
위의 통계표 안에서 우리들은 전세계 140여개국에 이르는 화교와 화인은 약 2540만 여명에 달함을 알 수 있다. 이 통계 자료는 가장 늦은 것이 1978년, 가장 빠른 것은1991년에 조사한 것으로, 모두 80년대 중. 후반에 기점을 두고, 약 12년정도의 기간동안 완성된 것으로, 이러한 통계와 3000만의 예상측정은 어느 정도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각종 통계와 같이 화교들이 전세계에 광범위하게 세계 오대양 주에 분포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시아 33개국에 약 2200만명이, 미주 32개국에 230만명이, 유럽 24개국에 67만명이, 대양주 15개국에 34만명이, 아프리카 32개국에 10만명이 각기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90%의 화교들이 모두 자신들 거주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다.
3. 華僑 華人의 流動, 그리고 歸化
華僑, 華人은 해외에 이민한자를 말한다. 移民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을 고정적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닌 流動人口로 볼 수 있다. 고로 화교, 화인의 인구 이동 문제는 상당히 주의시 되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화교들이 이동하고 증가하였는데 이는 곧바로 이전의 생산력과 당시 생산력의 많은 차이를 가져왔고, 또한 생산 중심지의 이동에 있어 영향을 주었다. 이는 대규모의 정치성 이민의 출현 외에도 경제성과 기술성 이민의 출현에 영향을 미치고 자본, 지식 및 기술적 기능을 가지는 화교, 화인이 이민국의 지역에 들어와, 보다 나은 생활 문화와 발전을 가져왔다.
결국 이러한 대량 화교와 화인의 재 이민은 전쟁후, 각 국가와 지구에 정치, 경제, 과학적 발달의 불균형 속에서 각국이 보이는 화교 정책의 차이를 조성하게 되었다.
과거 화교 사업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한가지 공통점은 장기투자나 회임 기간이 긴 사업을 피한다는 점이었다. 정착이 아닌 "임시로 머물고 있다."는 마음가짐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당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고, 이러한 마음가짐이 바뀌어 현재 많은 화교들이 현지에 장기투자를 하며, 현지사회에 동화하고, 귀화하여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대게 네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번째, 귀환형은 재산을 처리하고 중국으로 되돌아가는 경우인데, 이는 거의 배제되고 말았다. 아직도 중국 본토보다는 정착지에서의 생활과 돈벌이가 훨씬 용이하기 때문이다. 또한 안정성과 사업수익을 유지하기 위하여 더욱이 외국에 그대로 정착하고자 한다.
두번째는, 현지 동화 및 현지 유력층과의 체류형인데, 현지 사회문화에 완전히 융합할 수 없으므로, 그 동안 모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현지 유력층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나, 이들은 완전한 동화를 꺼리고 여전히 중국적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
셋째로, 체류형은 복수의 국가에 기업활동 근거지를 마련해 놓고 여러 화교사이에서 언제든지 재산을 이동시킬 수 있는 준비를 갖춰 놓는 이들이다.
넷째로는. 귀화형은 축적한 부를 이용해 귀화한 나라나 지역사회의 지도층이 되어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중국의 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가운데 귀화한 나라의 충실한 시민임을 자처한다.
중국 문화에 관한 화교인 들의 집착 속에는 정치적 요인 같은 것은 없다. 단지 중국계로 남아 있고자 하는 것이지, 중화인민공화국의 시민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들은 중국이 귀화국과의 교역량을 늘리고 귀화국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도록 힘쓰고 있으며 中國系란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현재, 그들의 90%이상이 거주지역에 歸化해 그 나라 시민이 되었고, 겨우 200만명의 화교들이 중국 국적을 그대로 지니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이후에도, 세계 각국간의 경제적 불균형과 계속된 차이의 존재아래, 낙후된 지역에서 부유한 지역으로의 이동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3. 각국의 對화교 政策
매 국가들의 이민을 다루는데 있어서 각국은 모두 그에 상응하는 入境, 入籍 그리고 其他經濟, 文敎, 社會團體 등 여러 방면에서 政策을 펴고 있다. 이러한 정책은 모두 관계당국의 서로 다른 歷史期와 國內의 政治, 經濟 狀況에 근거하여 제정되어 온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정책은 결국 그 나라의 정치적, 경제적 利益을 반영한 것이다.
서로 다른 국가, 지역의 화교, 화인 정책은 상당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이는 북미, 대양주 등의 선진자본주의 국가와 동남아 지구의 양대 지역으로 분리할 수 있다.
시기상으로는, 세계 2차 대전의 전후로 두단계를 나눌 수 있다.
2차 세계 대전 이전, 동남아의 많은 지역이 비교적 관대한 이민정책을 채택하였다. 이는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까운 이유 등이며, 이에 동남아 지구는 해외화교, 화인이 가장 집중된 곳이었다. 단 2차 대전 후에 이르러 동남아 지구는 보편적으로 모두 중국이민의 대문을 닫고, 비교적 엄격히 중국인의 入境을 금지하였다. 이에 상반하여, 북미와 대양주의 선진국가들은 전쟁 전에는 비록 장기간동안 非華政策을 실행하였지만 전쟁 후에는 오히려 전세계적 화교, 화인에 한정적으로 이민의 문을 열어 놓았다.
이러한 국가들에 의해 화교, 화인의 이민과 재이민의 이동이 생성되었다. 북미, 대양
주, 동남아를 막론하고, 2차 대전이후엔, 세계각국은 잇달아 화교들을 받아들이고, 華僑入籍의 걸음걸이에 박차를 가하였다. 어떤 나라는 비교적 진보적으로, 어떤 나라는 강제 또는 반강제적으로 채택하였는데, 전자는 放任型으로 환영을 받았지만, 후자는 壓迫型으로 화교들로 하여금 받아들이기 어렵게 하였음이 분명하다. 여하튼, 이러한 정책과 현당정부의 이익은 화교, 화인이 당국에 오랫동안 생존, 발전하는 목표를 두고 있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역사의 발전은 많은 곡절 위에 이루어지지만 그 앞날의 전망은 밝은 것이다. 각국의 희망적 설계와 화교. 화인의 경제적 발전이, 화교와 당국인의 민족적, 경제적 矛盾을 제거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공정하고, 문명적이며, 합리적인 정책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고 있다.
1. 서양에 대한 華僑의 影響
1980년대에 이주한 화교들의 새로운 물결이 금세기 말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4개의 지역이 있다. 바로 미국의 서부해안(캘리포니아), 캐나다, 호주, 영국 등이다. 이에 그들의 모습을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1) 미국
1849년 중국인들의 이민이 시작된 이후로 샌프란시스코는 19세기 동안 중국인에게 황금의 산으로 알려졌다. 이 이후로 서부해안의 소규모의 화교 사회가 존재해 왔다. 최근 화교사회의 비약적인 성장은 샌프란시스코를 넘어 로스앤젤레스와 캘리포니아 해안의 다른 도시에까지도 화교 사회가 존재하게 됐다. 이것은 유럽, 남미,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미국 이민 사회변화의 일부이다. 최근의 홍콩이나 중국으로부터의 이민의 영향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데, 그 이유는 그들이 이미 서부해안의 대규모 화교 사회에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중국계 사람들이 가장 잘 모이는 곳 중의 하나는 샌프란시스코 교외의 버클리 같은 주요 대학의 캠퍼스이다. 주요 이슈는 대학 입학 허가에 있어 인종간에 쿼터(Qurter)를 적용하는가 하는 문제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학문적 성공은 다른 인종 집단 사이에서의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켜 왔다. 그러나 이들이 이룬 성과는 결국 그들이 학문에 열중했기 때문이며, 이런 경향은 특히 최근에 미국에 유학 온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예를 들면, 1989년 6월의 천안문사태 이후의 중국 유학생들 중 몇몇은 우수한 과학자들이며, 미래에 미국의 학문과 과학에 중대한 공헌을 하게 될 것이다.
캐나다처럼 미국도 꾸준한 아시아 자본 유입의 혜택을 입어 왔다. 자본 유입은 주로 일본에서 비롯, 투자의 대부분이 부동산 분야에 이루어졌는데, 주 대상지역은 서부해안, 텍사스, 뉴욕 등이다. 또한 합작투자와 기업인수에 있어서도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새로운 이주자들의 유입은 미국과 지속적으로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아시아계 회사 및 개인들의 투자는 미국에게 틀림없는 이익이 될 것이다.
(2) 캐나다
1980년대 홍콩 출신의 숙련된 이주민들 중 50%이상이 캐나다 시민권을 획득했다. 그들이 선택한 목적지는 벤쿠버와 토론토로써 그 사이에 고루 분포해 있다. 이곳에는 주로 홍콩 출신이며, 대만 출신이 포함되어 있는 화교집단 150만이 전체 도시 인구 중 거의 20%를 차지한다. 이러한 새로운 이주자들의 영향력은 지난 10여 년간의 벤쿠버의 부동산가치 상승으로 확연히 알 수 있다. 지방의 실업률이 15%에 이르러, 새로운 고용기회 창출과 자본 유치의 필요성이 절실하던 1970년대 후반, 브리티시 콜롬비아 정부는 대담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역 경제의 많은 부분이 여전히 목재와 펄프 산업에 치우쳐 있었지만 캐나다의 어떤 지역보다도 매력적이고 따뜻한 기후와 관광사업을 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자연공원과 스키 휴양지를 가지고 있었다. 홍콩인들은 캐나다화로 약150,000달러를 지불하면 여권을 얻을 수 있었으며, 거주 자격요건이 미국보다 덜 엄격했다.
홍콩 기업인들의 괄목할 만한 투자는, 캐나다 엑스포 지역에 30억 달러의 사무실과 아파트를 위탁 건설한 것이었고, 다른 많은 건물들이 홍콩 출신의 부유한 투자가 등에게 매입되었다. 가장 상징적인 일은 지난 25년 동안 벤쿠버에서 부동산 개발로 번 재산으로 박애정신과 시민으로서의 책임감을 발휘한 데이비드 램 박사가 부지사에 임명된 것이다. 그의 임명은 1 세대 이민자도 영향력 있는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국에서조차도 예외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부유한 이주민들, 즉 화교집단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공헌도 높은 시민으로 변화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캐나다는 대체적으로 화교가 가져온 기술, 투자, 그리고 새로운 아이디어의 혜택을 받을 것이며, 또한 장기적으로 캐나다, 홍콩, 중국 사이에 구축될 관계에서도 많은 이익을 차지하리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호주
얼핏보기에 중국과 호주는,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나라의 바로 남쪽에 인구 밀도가 가장 적은 대륙이 위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광대한 천연자원을 가진 호주와 엄청난 인적 자원을 가진 중국은 분명히 상호 보환 관계에 있다.
호주에 살고 있는 이십여 만명의 중국인들은 매우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은 최근에 도착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한 세대 이상 호주에서 살고 있다. 순수하게 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것에서부터 경험을 쌓고 정치에 발을 들여놓는 것까지 점진적으로 변화해 왔다. 예를 들면, 시드니에 사는 첫 아시아인 출신의 국회의원 헬렌 샴 여사는 new south wales의 자유당 소속으로, 캐나다의 데이비드 램과 같이 30년 전 홍콩에서 온 시드니 화교 사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1970년까지 백호주의를 주장하던 호주사회를 상기하면 화교사회의 빠른 성장과 영향력의 확대는 매우 인상적이다. 그 중에는 기술을 가지고 온 많은 중국인 의사, 회계사 그리고 변호사도 있다. 또한 대다수의 화교는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호주를 보다 안정적이고 안락한 생활 및 자녀들에 대한 양질의 교육이 가능한 국가로 여기고 있다. 1980년대 말에 호주는 홍콩, 대만, 마카오, 중국으로부터 매년 약 1만명의 이주자를 받아들였지만, 이는 경제적인 압박 때문에 그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무역과 투자 측면에서의 호주와 아시아의 밀접한 관계 유지가 양 방향으로의 불가피한 대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fraser는 호주와 뉴질랜드가 태평양 무역협회를 형성하려면 아시아의 주요국가들에게 가담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다. 만약 이러한 기본적인 초점의 변화가 호주의 사업, 교육, 정치에 뿌리를 내린다면 호주의 미래는 매우 밝아질 것이다.
(4) 영국
1990년 9월 영국정부는 5만의 홍콩 출신 중국인들에게 영국 여권과 영주권을 부여했다. 캐나다, 호주, 미국의 경우와는 달리 이들이 영국으로 이주하도록 강요하지는 않았다. 대신 이 정책은 천안문사태로 홍콩 지도층이 가지게 된 공포를 완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원래 이 정책은 학교교육이나 가정교육을 통해서 좋은 영어를 구사하고 영국과 일정한 유대가 있으면서, 전문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젊은 가정의 흥미를 끌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다. 이 정책의 결과는 실망스러운 것이었지만, 많은 이주민들이 이 기회를 통해 영국에 정착하였다. 또한 이들에게 있어 유럽공동체의 진입자격은, 영국 여권을 가지는 홍콩인들에게는 큰 매력으로 작용했다. 영국 역시 이주민들의 소규모의 투자의 지속적인 혜택을 입어 왔으며, 이들의 유대관계는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것이다.
앞에서의 이러한 예들은 모두 좋은 유대관계에서의 모습들이었지만, 그 이면에 화교들의 범죄와 마약, 매춘, 그들의 암흑사회의 확산속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요소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외견상 보이는 모든 현상들은, 특히 중국인들의 세계에서는 믿을 수 없는 것들이며, 그들의 서구에 대한 영향은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것이다. 특히 의학과 법률분야에 있어서 중국의 전통사상은 매우 강력한 것이고, 21세기초가 되면서 동양에 대한 서양 압력의 조류는 반전될 것이다.
2. 韓國의 華僑 정황
제2차 세계대전 후, 초기한국화교가 한차례 증가하였다. 1948년, 17000여명에서 1953년 21000명, 1954년 22000여명에 이르렀고, 최고 80000명의 화교들이 한국에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 증가의 수와 폭이 그리 크지 않았고, 한국정부의 압박으로 근 20년동안 화교가 부동산을 사들이는데 제한이 엄격해져, 생계를 도모하는 것이 어려웠기에 어쩔 수 없이 많은 화교들이 출국의 길을 찾게 되었다. 노약자들은 주로 대만으로 다시 자리를 옮기고, 적지 않은 인원이 미주로 옮기었다. 이에 한국의 화교 인구는 점점 감소하였다. 법무부의 1989년말 통계에 따르면 한국화교 인구는 겨우 23585명으로 나타났고, 지리. 역사적인 원인으로 한국화교의 90%는 산동사람으로 나타났다.
현재, 그들의 대부분은 대 도시에 집중되어 있는데 서울에 가장 많이 약 8000여명이 있으며 인천, 부산, 대구 등 48개 도시에 거주하여 살고 있다. 한국화교의 경제 사업은 가장 먼저 주단(비단과 공단)무역 경영에서 시작하여, 이로부터 식당을 경영하거나 채소 등의 재배에 이르렀다. 목전에 화교의 주요한 사업으로는 여전히 식당과 잡화 업에 그 주를 이르고 있으며, 이밖에 여러 식품공장과 철공업, 중의원, 중약방 등이 있다. 근 몇 십년동안 화교의 식당업은 커다란 성과를 이루었으며, 50년대 식당업은 화교의 독점시기였으며, 60년대 화교경영의 사업이 축소되는 추세였지만 여전히 식당업은 활발하여 4000여개에 이르렀다. 70년대후, 한국인들이 앞을 다투어 새로운 형식의 식당들을 투자경영하여 화영식당은 그들과의 경쟁에 어려움을 느끼고, 미주 등지로 자리를 옮기었고, 1985년에 단지 1000여개의 식당만이 유지되고 있었다. 또한 서울의 아서원, 진화원, 대려도, 중화루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모두 중형 식당들이다. 잡화업은 화교의 제2의 사업으로 약5%를 차지하며, 모두 소자본 경영이다. 현재는 화교 개설의 중약점이 상당한 호응을 받고 있으며, 이를 "한약포"라 일컫는다. 1983년 전국의 화교 경영 중의원이 59개에 이르고 중약방이 61개에 서의원이 7개 서약방이 15개에 이르렀다.
한국 화교는 비록 두터운 경제적 실력은 없지만, 자녀들의 교육에 있어서 더욱 중시하여, 화교 문화, 교육은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청말에서부터 시작하여 각지에 수많은 사숙과 학당을 창설하였고, 통계에 따르면, 한국엔 현재 화교 국민학교가 30개, 중학교가 서울, 인천, 부산, 대구에 4개가 있다 한다. 이 화교 학교는 전부 자신들이 직접 관리하고 경영하며, 졸업자 모두는 대만 학위를 받게 된다. 최근에 화교 인구의 감소와 경제적인 불황 때문에 화교측은 적지 않은 경비와 관리에 있어 많은 어려움에 처하여 있다.
한국의 화교 조직은 비교적 발달하여 아주 오래 전부터 "華僑 商會"와 동우회 등의 조직이 생기었고, 1949년후엔, 각지에서 "華僑 協會"가 성립되어 거대한 규모의 조직이 서울과 인천, 부산, 대구에 자리잡고 있다.
4. 反 華僑의 기류
1. 반 중국 동맹의 가능성
일본을 비롯한 여러 서양국가는 중국이 이미 잠재적, 위협적인 존재라고 인색하고 있다.이에 중국을 배제한 형태에서 지역 동맹관계를 위한 일본의 정책과 전략은 중요한 연구 대상이다. 화교 자본이 현지 국가에 대한 투자보다 대륙에 대규모 투자를 실행할 경우 현지 토착인과 중국인의 민족갈등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예로, 1994년 4월 인도네시아에서는 반중국인 노동자 폭동이 일어나, 중국계 기업인이 죽고 150개 이상의 화교 상점, 자동차, 가옥이 파괴되었다. 필리핀에서도 이와 유사한 폭동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현상으로 전체 동남아 중국계의 대부분은 중국을 더이상 모국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투자동기 또한 민족정서, 유대감, 귀향의식이 아니라 이윤동기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다.
여기세 화교 1대의 토착적인 경영방식과 구미의 경영을 배운 세대와의 갈등, 즉 동양적 경영과 구미를 둘러싼 중국과 인근국가의 문제가 야기되어 대중화 경제권이 경제협력이 정치, 군사적 문제로 확대될 개연성도 배제 할 수 없다.
이에 따른 세계 각국들의 중국의 진로를 변경할 수 있는 외부 사건의 가능성을 살펴본 결과, 아시아로부터의 미국의 전략적 철수, 일본의 핵무장, 한반도에서의 전쟁, 석유 사정의 대혼란, 대만의 독립선언, 러시아 연방에서의 극동러시아의 탈피, 핵무장한 북한등을 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