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縣北面(현북면)
*지금의 각북면 일대
羅立里(나립리)
在縣北七里 萬戶辛夢台所居
재현북칠리 만호신몽태소거
나립리 현의 북쪽 7리에 있다. 만호 신몽태가 살았다.
*나립이라는 지명에 대해서는 의아한 점이 있다. 나복이라고 소개 된 자료도 있지만 통칭 羅北(나북)으로 소개되고, 현재 절효선생의 묘가 있는 곳은 나부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羅立은 羅北의 오기로 생각된다. 나부라는 이름은 지금도 쓰고 있는데 ‘나비’라는 뜻이다.
밀주 구지에도 羅立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다른 기록이 이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명대리이다.
明大라는 관명은 明洞(명동. 아직 나부 안쪽에 明洞池가 있다)과 美大(미대. 米泰라고도 쓰며 윗미대와 미대가 현존하여 명대1리이다.)에서 각각 한 자씩 따서 명대라고 이름 하였다.
松洞(송동)
東北有節孝金克一墓
동북유절효김극일묘
송동 동북쪽에 절효공 김 극일의 묘가 있다.
*나부 아래에 지금도 송동이라는 이름이 있다.
역시 지금의 명대리
밀주구지에는 ‘克一淸道學行者’(극일 청도 학행자)라는 기록이 더 있다.
多代(다대)
東南有三士巖 巖東北有米泰卽淸道郡界
동남유삼사암 암동북유미태즉청도군계
다대. 동남쪽에 삼사암이 있다. 삼사암 동북쪽에 미태가 있는데 청도군 경계이다.
*多代는 밀주지, 밀주구지에도 다대로 기록 되어 있으나 明代의 오기이다. 삼사암 의 동북쪽에 있다는 미태는 미태촌으로 美大라고도 쓰는데, 밑 즉 아래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의 명대1리 이며, 미대 웃미대 마을이 있다.
밀주구지에는 삼사암의 위치로 ‘北川橫其前 柳藪在其南. 북천횡기전 유수재기남’라고 되어있다.
따라서 ‘북천, 즉 한내가 삼사암 앞에 가로질러있고, 버들숲이 그 남쪽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볼 때 지금의 노깔, 즉 녹명의 한내 북편에 삼사암이 있는 것이다.
牛谷(우곡)
世稱壽洞 僉知琳秀 失姓年九十一 僉使鄭奇南年八十一 其子年八十四所居
세칭수동첨지림수실성년구십일첨사정기남년팔십일기자년팔십사소거
세칭 수동이라고 한다. 첨지 이름이 임수, 성을 잃었는데(알지 못하는데)나이 구십일세 이었고, 첨사 정기남은 팔십일세 그 아들은 팔십 사세 까지 살았다.
*우곡은 지금의 풍각 성곡리 우실이다. 밀주지에는 첨지의 성명이 鄭琳으로 기록되어 있고, 첨사 정기남은 팔십 일세에 아들을 얻어 그 아들이 팔십 사세까지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밀주구지에는 ‘첨지 鄭琳, 나이 구십일세에 이르렀고, 첨사 정기남은 나이가 팔십일세에 이르렀다.’ 고 기록되어있다.
陳邑村(진읍촌)
古者建縣於此故因以名之壬亂府使李邦佐朴慶新李英留住處
고자건현어차고인이명지임란부사이방좌박경신이영유주처
옛날에 여기에 현을 세웠으므로 생긴 이름이다. 임란 때 부사 이방좌 박경신 이영이 머물렀던 곳이다.
*진읍촌이라는 이름은 지금 없다. 그러나 전해오기로는 삼평2리의 풍산마을이 예전에 현이 있었다고 전해온다. 사미정이 진읍촌의 동남산록에 있었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풍산마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부사 이방좌 박경신 이영은 임란 전후의 밀양부사이다.
밀주구지의 기록도 같다.
四美亭(사미정)
在陳邑村東南山麓 白石平鋪 溪水湲湲 登臨引望 眼豁東南 惑云亭之始成 亭下孫姓武人等第 三月三日設恩榮宴于此其日先進輩命名云 未詳孰是 古人詩曰
亭名聞已久 今日始來尋 溪舌淸人耳 山顔悅我心 帶沙筠壟淺 分水稻畦深 坐久湥幽與 陶然不覺吟 此詩本是尹祥詠陜川澄心樓詩而摟字改亭字未詳其故耳
孫起陽詩曰
世事登竿上 人心炊釰頭 奔忙眞俗子 閒適是仙流 可笑樊籠鳥 誰馴浩蕩鴝 古來賢達士 元不事王侯
재진읍촌동남산록 백석평포계수원원임인망안활동남 혹운정지시성정하손성무인등제삼월삼일설은영연우차기일선진배명명운미상숙시고인시왈정명문이구금일시래심계설청인이산안열아심대사균롱천분수도휴심좌구돌유여도연불각음차시본시윤상영합천징심루시이루자개정자미상기고이손기양시왈
세사등간상인심취일두분망진속자한적시선류가소번롱조수순호탕구고래현달사원불사왕후
진읍촌 동남 산록에 있다. 흰 돌이 평평하게 펴 놓였고 계곡물은 졸졸 흐른다. 정자에서 바라보고싶은 마음은 동남쪽이 시야가 훤히 트여있기에. 혹은 말하기를 정자를 처음 지은 사람은 정자아래의 손씨 성의 무인이 등과하여 삼월삼일에 급제한 것을 축하하는 연회를 여기에서 베풀었는데 그날 선배들이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고 하나 무엇이 옳은지 확실하지 않다. 옛사람의 시에 이르기를
정자의 이름 들은 지 오래인데
오늘에야 비로소 찾아 왔네
시내소리 사람의 귀를 맑게 하고
산모습 내마음 기쁘게 하네
모래를 띤 대밭은 얕고
물 가득한 논두렁은 깊다네
오래 앉아 그윽한 흥취를 탐하다가
즐거움에 취하여 나도 모르게 읊노라
이 시는 본시 윤상이 읊은 합천 징심루 시 인데 루에 있던 것을 정자에 고쳐 쓴 연유를 알 수 없다.
(※ 첨삭 : 호(號) 사미정(四美亭), 자(字) 통중(通仲), 휘(諱) 형달(亨達) 선조(先祖)는 점필재(佔畢齋) 선생의 제자로 통례원 인의(通禮院 引儀)를 역임하시고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에 봉(奉)해졌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예측하시어 불취(不就)하시고 현풍(玄風) 백산(栢山)에 은거(隱居) 하셨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재종숙(再從叔) 오졸재(迂拙齋) 한주(漢柱)등 제현(諸賢)들과 교유(交遊)하신 분인데 이분이 사미정을 지으셨고 그 사미정에 김종직선생이 들러 저 시를 지으셨다.)
손기양의 시에 이르기를
세상일은 장대 끝에 오르는 것이라
인심은 둔한 머리에도 열이 나게 한다.
바쁘기만 한 것은 오로지 세속 사람이요
한적한 것이 신선의 풍류로다
가소롭다 새장속의 새여
누가 호탕한 새를 길들이랴
옛 부터 현명하여 이치에 통하는 선비는
원래 왕과 제후에게 종사하지 않았다.
*사미정에 대하여는 밀주지에 기록이 상세히 있으나 손기양의 시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 위치에 대하여 현지의 주민들도 전혀 아는 사람이 없다. 청도 향토사학회에서 현지를 조사하여 율정마을 건너 풍산입구로 비정하였다. 다행히 마을지명유래집에 의하면 ‘사미정산’이라는 지명이 남아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며 사미정의 위치는 풍산마을 입구라고 생각된다.
밀주구지에서는 有古人記, 고인의 기록이 있다, 라고 간단히 되어 있다.
只谷里(지곡리)
今枝村 在縣北二十三里 有老松數十株立於洞口稱之曰萬年松
금지촌재현북이십삼리유노송수십주립어동구칭지왈만년송
지금의 지촌이다. 현의 북쪽 이십삼리에 있다. 노송 수십그루가 동구에 서 있는데 만년송이라고 부른다.
*지슬리이다. 只谷의 谷은 ‘실’로도 부르기 때문에 지실이라고 부르다가 지금의 지슬이 되었다.
만년송이라고 부르던 노송은 최근까지 마을 입구에 있었다.
盤泉寺(반천사)
古址在只谷東
고지재지곡동
옛터가 지곡 동쪽에 있다.
*밀주지에는 盈泉寺라고 기록되어 있다.
밀주구지에도 ‘東有盈泉寺古址, 동쪽에 영천사 옛터가 있다’라고 기록되어있다.
初更山(초경산)
一云最頂又云崔夐 山勢疊險四面阻隔 故壬亂賊鋒不至
일운최정우운최형 산세첩험사면조격 고임란적봉부지
한편 최정,최형산이라고 한다. 산세가 첩첩하여 험하고 사면이 막혀있으므로 임진왜란 때 왜적이 닿지 못했다.
* 이 밀주승람에서는 ‘한편 최정(最頂)’이라고 언급했으나 밀주지에는 ‘혹은 최형산’만 기록되어있다. 최정산은 달성 지역의 해발 905메타의 산으로 통정령, 즉 청산재 옆에서 달성 가창의 주리와 정대 경계로 뻗어나간 산이다.
그러나 청도군 관내도 에서는 지슬의 북편, 상심미기 오른쪽 ‘범바위등’을 최경산으로 표시하고 있으며, 넓은 범위에서 이 일대를 최정산이라고 볼 때, 처음 들어서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범바위등을 初자를 쓴 초경산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밀주구지에는 ‘惑云璀瓊’으로만 기록되어 있어 한자가 다르다. 나머지 기록은 밀주지와 같다.
金谷(금곡)
南有一千亭 村人一千者所封植云 世稱壽洞 八十歲之人代不絶焉
남유일천정 촌인일천자소봉식운 세칭수동 팔십세지인대불절언
남쪽에 일천정이 있다. 마을사람 일천명이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세칭 수동이라고 하는데 팔십 세의 사람이 대대로 이어져 끊이지 않았다.
*지금의 금천리로 쇠실이라는 이름이 아직 있다. 일천정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금천리 앞 개울 옆을 ‘일천지’라고 하여 그 이름이 지금 남아있다.
밀주구지의 기록도 대동소이하다.
土峴(토현)
在初更山西麓縣北二十八里距本府九十里 路抵大邱府星州花園縣
재초경산서록현북이십팔리거본부구십리 로저대구부성주화원현
초경산 서쪽 산기슭에 있다. 현의 북쪽으로 이십팔리,본부(밀양)과 구십리 떨어져 있다. 길이 대구부 성주 화원현에 닿는다.
*통칭 헐티라고 부르는 재이다. 지금은 용천사를 거쳐 달성 가창의 정대리로 이어지는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헐티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혈(穴)티, 허기티, 등등의 여러 가지 설이 있었으나 ‘흙티’라는 말의 경상도 발음이다.
밀주구지 기록도 같다.
松羅寺(송라사)
古址在土峴南
고지재토현남
옛터가 흙티 남쪽에 있다.
*송라사 옛터는 지금의 금천리 송내마을이다.
밀주구지에도 ‘土峴 남쪽에 松羅寺 古址(옛터)가 있다’ 고 기록되어있다.
烏里院(오리원)
俗傳新羅時所設今廢
속전신라시소설금폐
세속에 전해오기를 신라 때에 설치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용천사 아래에 있는, 지금의 오산2리 마을이다.
밀주구지 기록 동일.
孤山(고산)
前有孤山故名 西南有鳳臺
전유고산고명 서남유봉대
앞에 고산이 있은 연유로 이름했다. 서남에 봉대가 있다.
*고산은 지금 오산1리이다. 이름의 연유가 된 고산은 현재의 당산을 말한다. 현풍산이라며 세를 거두어 갔다는 설화가 전하는 산이며
서남에 있은 봉대는 털왕버들나무의 그림자로 시간을 알았던 돌무더기와 관련이 있은 것 같다.
(※ 첨삭 : 털왕버들나무와 당산 설화는 덕산의 것이다.)
밀주구지에는 ‘孤山前郊有 운운’ 하여 ‘郊’자가 더 있다. 그러니 그 고산은 고산마을 앞, 개울 건너이다.
湧泉寺(용천사)
在琵瑟山東北 下有幽地庵 中有湧泉 旱不渴 雨不加 雪湥而溫流 金則冷 李陶隱 題 僧舍 曰
俗客驅東道 孤(高)僧臥小亭 雲從朝暮白 山自古今靑 往事追松子 羈遊媿(愧)地靈 殷勤(慇懃)汲澗水 一掬煮蔘苓
재비슬산동록 하유유지암 중유용천 한불갈 우불가 설돌이온류 금칙냉 이도은 제 승사 왈
속객구동도 고승와소정 운종조모백 산자고금청 왕사추송자 기유괴지령 은근급간수 일국자삼령
비슬산 동북에 있다. 아래에 유지암이 있고 가운데에 용천이 있는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비가와도 늘지 않는다. 눈이오면 따뜻하게 흐르고 복더위에는 차다. 이도은이 지은 승사 라는 시에는
속세 나그네는 유학하기 급급했는데 고승은 한가로이 정자에 누웠네.
구름은 아침 저녁 늘 희고, 산은 예나 지금이나 늘 푸르네.
예전에 도교를 따르던 나그네는 땅에게 까지 부끄러우니
(귀의하여)산골 물 길어다가 한줌 삼령차나 달여볼까. . .
*유지암은 지금 자취가 없다. 혹 지금의 오산1리 마을에 있는 부서진 석불 자취가 그 흔적인지 알 수가 없다.
용천은 아직도 좋은 물이 계속 흘러내린다.
이도은의 시는 그 해석이 구구각색인데 東道는 유교, 즉 유학을 뜻하는 것이며 追松子는 적송자를 따른다는 말로 도교를 좇았다라는 말이다.
밀주지에서는 追를 退로 적고 ‘신선을 물러나게 한일 ’이라고 해석하였으나 追자를 잘못 쓴 데에 따른 착오이다.
孤僧이라고 되어 있어 뜻이 통하지만 高僧의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媿와 愧, 慇懃과 殷勤은 같이 쓸 수 있을 것이다.
밀주구지에는 이도은의 시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는데 다만 蔘苓을 茯苓으로 기록하고 있다.
褐方庵(갈방암) 避方庵(피방암) 宋雲庵(송운암)
俱在湧泉寺上
구재용천사상
모두 용천사 위에 있다.
*金敦仲의 詩가 밀주승람에는 없고 밀주지와 밀주구지에 기록되어있다.
躋攀直上最高峯
제반직상최고봉
回首塵寰一片紅
회수진환일편홍
徙倚烟霞得幽趣
사의연하득유취
風流不媿晉羊公
풍류불괴진양공
가장높은 봉우리 힘들게 바로 올라
속세를 돌아보니 한 점의 꽃이로다.
안개노을 따라 그윽한 정취를 얻으니
진양공의 정취에 부끄럽지 않도다.
*그러나 이 시는 김돈중이 지리산에서 지은 시로 동문선에 기록이 있는데 어떻게 인용 되었는지 알 수 없다.
琵瑟山(비슬산)
出勝覽 출승람
승람에 나온다.
幽地庵(유지암)
在琵瑟之東壬亂縣人避賊於此終不保
재비슬지동임란현인피적어차종불보
비슬의 동에 있다. 임란 때 현의 사람이 왜적을 피했으나 끝까지 보호되지 못했다.
*앞의 용천사 설명에 언급된 바와 같이 용천의 아래 이므로 고산, 즉 지금의 오산1리에 있었던 듯 하나 상세히 알 수가 없다.
鸎淵(앵연) 三千淵 (삼천연)
俱在湧泉寺下 縣人祈雨處
구재용천사하 현인기우처
모두 용천사 아래에 있다. 현의 사람들의 기우제 장소이다.
*용천사 아래에 작은 못이 여럿 있으나 몇 개가 매몰 되었다. 꾀꼬리 못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으나 차차 알아볼 계획이다. 삼천 못은 삼천동이라는 지명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지금의 오산 1리와 오산 2리의 중간, 용천사로 가는 길의 우측으로 들어간 마을이다.
南山(남산)
古無人居 萬曆戊申成村落 參議朴壽春 進士朴復坦 世居
고무인거 만력무신성촌락 참의박수춘 진사박복탄 세거
옛날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만력 무신년 (1608년 선조41년)에 촌락을 이루었다. 참의 박수춘과 진사 박복탄(?)이 대를 이어 살았다.
(※ 첨삭 : 박복탄이 아니라 박이탄(朴履坦)이다)
*현재의 남산2리이다. 남강서원에 국담 박수춘선생을 제향하고 있다.
德山 (덕산)
副護軍 朴胤祖 所居
부호군 박윤조 소거
부호군 박윤조가 살았다.
*지금의 덕산초등학교 인근 덕촌2리이다.
밀주구지에는 기록이 없다.
松須旨(송수지)
監察 朴霖所居
감찰 박림소거
감찰 박림이 살았다.
*송수지는 밀주지와 밀주구지에 공수지(公須旨)로 기록되어있다.
공수지는 지금의 남산2리에서 덕촌1리 각골로 가는 길 중간에 있다. 松은 公의 오기인 듯하다. 공수말이라는 지명이 아직 있다는데 ‘공수’는 ‘관에서 사용하는 들’등에 붙는 명칭이다.
枝洞(지동)
壬亂府使李英留駐處
임란부사이영유주처
임진왜란 때 부사 이영유가 머물었던 곳이다.
*지동이라는 명칭은 사용되지 않는데 지금의 남산3리 가말을 한자로 표기 한 지명이고 가말 못이 있다.
*밀주구지에는 이영유가 머물었던 시기를 丁酉 秋冬으로 기록하고 있어 1597년 가을과 겨울이다.
無盡臺(무진대)
在枝洞西 朴愼所築 古人詩曰
溪割平蕪抱曲來 山爲橫檻石爲臺 何人更起登臨恨 華鶴依然月夜回
재지동서 박신소축 고인시왈
계할평무포곡래 산위횡함석위대 하인갱기등림한 화학의연월야회
가말의 서쪽에 있다. 박신소가 쌓았다.
(※첨삭 : 박신소가 쌓았다가 아니라 박신(朴愼)이 쌓았다이다. 諱가 愼이신 분은 국담선조의 부친이시며 號가 무진재(無盡齋)이시다. 무진재공이 친히 쌓았기에 무진대(無盡臺)인 것이다.)
옛사람의 시에 이르기를골짜기는 평평한 곳을 가르며 한 굽이 돌아와서
산을 헌함으로 삼고 돌을 대로 삼았네.
누가 다시 올라 보는 정취 일으키겠나
아름다운 학만 예대로 달밤에 돌아오네.
*무진대는 돌로 축조 한 것으로 보인다. 가말의 서쪽, 지금의 남산3리 입구에 돌로 다소 크게 축조된 성황단(?)이 있는데 이것과 관련이 있는지는 더 검토 할 필요가 있겠다.
밀주구지의 기록도 대동소이
只谷川(지곡천)
在無盡臺下 其源有二 一出初更山 一出琵瑟山 合流而入于楡川 有牛山石橋方旨張機所月背斧洞錦洞百嘉等村 而 今不可考
재무진대하 기원유이 일출초경산 일출비슬산 합류이입우유천 유우산석교방지장기소월배부동금동백가등촌이 금불가고
무진대 아래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초경산이고 하나는 비슬산에서 나와서 합류하여 유천으로 들어간다.
우산석교방지장기소월배부동금동백가등촌이 있는데 지금은 알 수 없다.
*지곡천은 지곡, 즉 지금의 지슬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그 근원의 하나로 초경산을 꼽은 것으로 보아 지금 가창에 있는 최정산의 범위를 지슬 북쪽 달성 가창 경계인 범바위 등으로 본 것이 확실하다.
또하나의 근원은 당연히 비슬산이다.
우산은 당연히 지금의 우산으로 보고 방지도 삼평1리가 방지라고 부르고 있으니 이곳이 틀림없다. 장기는 삼평2리 진읍촌인 풍산의 고개넘어 지금의 현리 상류 장기로 본다. 석교는 율정 부락에서 말하는 팔경중에 거론되는 명칭인데 삼평2리에 있었던듯 하다. 소월은 풍각의 수월을 말하는 듯, 배부동은 밀주구지에는 背釜洞 이라고 기록되어있고, 금동과 같이 그 어감으로 보아 지금의 금천리 지역으로 보는데 좀 더 고증이 필요하다. 백가는 알 수가 없다.
역주후기
밀주승람의 역주를 해 보는 연유는
청도 중 일부지역의 내용이 밀주지와 밀주구지 밀주승람에 기록되어있기 때문이다.
밀주지 번역본이 이미 발간되었으나 현지와 부합 되지 않은 부분이 있고, 밀주 승람 또한 그러한 부분이 더러 있다.
그러니 밀주구지, 밀주지 밀주승람을 대조해 보면서 검토해야 하는 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荏苒 세월만 보내니 바루어 놓지 않으면 영영 잘못 알려질 우려도 있다는 걱정도 되었다. 청도의 일부지방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또 모르는 것은 물어 볼 수 있는 지금, 늦었고 미흡하나마 괴발 새발 시도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부족한 역주의 뜻이 여기에 있으며 잘못된 부분, 미흡한 부분은 차차 바루어 나갈 계획이며 閑寂을 얻는 대로 여행 삼아 현지답사를 해 볼 계획이다. 관심 있으신 諸賢의 叱正을 바란다.
2012. 6. 白又
참고문헌 : 밀주승람 필사본 복사책
밀주지지 지리편 밀양문화원 국역본
밀주구지 필사본 복사책
[출처] 청도의 옛모습, 밀주승람기록, 각북편 (현북면)|작성자 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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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 가문과 관련된 명칭의 유래와 詩에 대해 잘못 전해진 것이 많다. 서핑하다 퍼왔는데 차차 수정하고 원저자에게도 수정을 요구할 예정이다. 현재까지는 수정하지 않았다.
우리 선조와 관련된 곳의 오기는 오늘자로 바로 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