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의 시
역병의 시대를 건넌다.
올해는 끝이 보일 것이다.
서정의 시세계를 탐구하겠다.
위로가 되는 시세계를 찾아가겠다.
*단순한 어휘 속에 담긴 소박한 서정이 삶의 진실과 닿아 변함없는 감동을*
무엇을 쓸 것인지, 어떻게 쓸 것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여유롭게 살며 쓸 것이다.
미발간 시집들 목록
시추의 날들
갠지스강의 산다화
북국의 늪
호수에 잠든 차령산맥
저, 미치도록 환한 사내(장시)
여강
강물은 몇 굽이를 돌고 돌아 여기까지인가
여기에 와서 흐름을 멈춘 여강의 차가운 휴식을 본다 흐름을 멈춘 것은 강물 소리 깊던 시간이다 얼음장 아래 여강은 푸르게 숨쉰다
지금은 다만 묵묵한 시간 위에 강 얼음을 건너는 겨울 햇살이 눈부실 뿐
섬강은 언제나 근친이다 섬강은 급류를 여강에 밀어넣는다 멀리서 들리는 물소리만으로 서로의 상사를 안다
강안에는 마른 목숨들 조용히 주저앉는다 이제는 여강, 떠날 때가 된 것이다 먼 곳에서 봄이 오고 있는 걸 보았다는 뜻이다
겨울 해 언 여강 위에 붉게 타오른다
노을 속에 누가, 서 있다
용서
겨울 삼합에서 남한강을 멀리 보고 있다 먼 강과 먼 산이 가슴에 조용히 담긴다 느린 걸음으로 강을 따라 내려간다
맵찬 바람이 좁아진 등을 민다
언 눈을 생애인 듯 조심스럽게 밟는다 꺾이기 시작한 햇살이 어깨를 잡고 있다 다시 걸음을 멈춘다
달맞이꽃 마른 꽃대가 파르르 떤다 저 몸으로 기어코 차가운 달빛을 맞겠다 그 모련이 애처롭다 강여울에 머무는 겨울 햇살이 눈부시다
젊은 날의 찬란이 저랬을 것이다 풀꽃이나 물소리를 돌아서던 어리석음이 이제는 깊은 강물에서 터져나오는 회한이다
먼 강과 먼 산은 용서를 아는 회한이다
봄은 어디 쯤인가
그 자리에 느티나무를 심었다면 심은 사람은 천 년을 내다본 것이다
세상이 하얗게 얼어붙는 혹한이 며칠째 계속되고 있다 완만한 등성이 위에 백 년 된 한 그루, 느티나무는 흰 도화지 위에 그려진 연필화다 섬세하게 수많은 작은 가지를 살려냈다
눈 위에는 어떤 흔적도 없다, 백 년 나무 그림자가 유일한 흔적이다
칼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갈 뿐, 백 년 나무는 깊은 생각에 들었다 풍경은 때론 감동이고 때론 슬픔이지만 흰 눈 속의 한 그루 나무는 무념이다
백 년 동안 겨울 햇살은 나무에 머물며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백 년 나무는 사색의 시간들을 뿌리로 내려보내며 혹한을 견딘다 혹한은 백 년 나무에게도 가혹한 시련이다
봄은 어디쯤인가
모란꽃 지다
네 앞에서 어찌 슬픔을 말할까
삶보다 죽음이 빛이었던 너를 보내며 목관을 준비했다 관 속에 갖가지 꽃잎들을 채웠다 마지막으로 뿌려진 꽃잎이 찔레꽃이었다
네가 붉은 치장을 한 것은 바람의 노고였다 바람은 새벽까지 정성껏 화장 해주었다
너는 그림자를 남기지 않았다
품위를 잃지 않으려는 낙화라서 너를 향해 성호를 긋는 흰 손들은 다 알고 있었다 바람이 너를 향해 머리 숙인다
너는 웃는 듯 아닌 듯 표정을 멈춘다
관 뚜껑을 덮는다
너, 찬란했던 날 매일 찾았던 나비가 관 뚜껑에 내려앉아 떠나지 않는다
편지
-사프란에게
가슴 미어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여름 생태습지의 무성한 갈대를 생각했다
어머니의 긴 암 투병과 죽음 앞에서 詩는 분에 넘치는 사치였고, 시가 죽음 넘어 그 위에 있다고 착각하며 살았던 나에게 삶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그녀는 시인보다 더 날 것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적인 냄새가 난다는 자각이 들었다고 고백한다
그 무렵 그녀는 웹디자인을 배우기 시작했었고 내 홈피를 개설해주었다
홈피는 15년 만에 폐쇄에 이르렀고 백업작업은 고단한 일이었다
홈페이지가 오픈되었던 2006년 가을까지 닿는 길이 이렇게 많은 시들을 대면해야 하는 길인지 미처 몰랐습니다. 천 페이지에 달하는 시 한 편 한 편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선생님의 단단한 씨앗 하나라고 썼던 그녀다
제가 습작했던 시 속의 여자, 30대, 40대의 여자가 그렇게 내 인생을 통과해 갔습니다
그녀를 생각하면 서해로 지는 붉은 해를 잊을 수 없다
밤의 호수와 낯선 마을로 드는 아름다운 길과 노을 비끼는 하늘, 그리하여
안산 생태습지의 갈대꽃이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이 있다
이제는 50대의 여자로 저는 치열하게 아슬아슬한 무게감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습지의 물 냄새가 밤새 어둔 하늘로 흩어지고 있다
타타타Tathātā
나는 일 년 내내 여여如如하다
정말 여여하다 외출 안 하고 사람 안 만나고 밥 먹고 잠자고 TV 보는 일로 여여하다 뉴스 시간마다 확진자 수를 확인하며 두려워하거나 안심하는 일로 여여하다
문학 계간지가 쌓이고 보내준 시집이 늘어나도 나는 여여하다 잡지는 잡지일 뿐이고 시집은 시집일 뿐이다 내가 읽어도 그만이고 읽지 않아도 해가 뜨고 진다 시는 시로 여여하고 시인은 시인으로 여여하다
가까이 혹은 멀리 보이는 첩첩 산이 밤새 내린 눈으로 하얗다 산은 산으로 여여하고 눈은 눈으로 여여하다 마음에 내린 눈으로 온 몸이 환해졌다
누가 나를 이 여여한 곳에 던졌을까
이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한 곳에 던져 역병을 피하느라 전전긍긍하게 했을까
나는 깨달음 없이도 여여하다
악마의 문장이다
악마의 문장이다
그 문장에는 수많은 죽음이 있다 종려나무 잎은 시들었고 사제는 지쳤다 죽음은 일상이 되었고 사신은 대륙을 건너고 레퀴엠은 병원, 교회, 카페, 식당, 결혼식장, 거리와 거리에서 울려퍼진다
악마의 문장 속에 숨겨진 세상의 끝을 먼저 읽은 자는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전파하지 않는다
문장을 본 늙은 자들은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 이 불문율을 깨면 유년의 험한 터널을 건넌다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문장을 본 젊은 자들은 비판자가 되거나 방관자가 된다 옹호자가 되면 혹독한 대가를 치룬다
죽음이 멀리 있지 않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문장 속에서 사랑이 시들고, 세상이 삭막해지고, 도시가 어두워지고, 아이가 태어나지 않고, 수술용 혈액이 부족하고, 사람들은 서로 경계하는데
페친이 복수초 노란 꽃을 페북에 올렸다
봄은 온다
꽃상여*
마을을 나서는 꽃상여는 비를 맞으며 출렁이었다
지리산이 비안개에 아랫도리를 내주고 있었다 하중대 마을은 할머니를 보내고도 조용하다
마을 할머니들은 서로의 죽음을 건너다보며 이월 홍매화처럼 파안했다 죽어서도 섬진강 물소리 듣는 것이 소원이어서 유택은 섬진강이 보이는 양지바른 곳이다
섬진강은 붉어지는 몸빛으로 영혼 맞아 한참을 머뭇거릴 것이다 영혼이 돌아와 홍매로 붉게 피려면 어느 물굽이에 머물러야 할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청매 늘어진 가지들이 꽃상여를 향해 고개 숙인다
청매 속에는 오래된 살과 뼈와 웃음소리가 들어 있다
*이원규의 『지리산에 살다』
사해, 무수한 발이 담긴다
소금 정령들이 저처럼 투명한 몸으로 출렁이는데 죽음의 바다라니!
소금 정령들은 달빛을 기다려 결정체의 몸을 푼다 달빛은 몇 번의 굴절을 건너 소금 정령을 만난다 바닷물은 더 투명해지고 소금 정령의 고요한 표정까지 다 보인다
소금 정령들이 살고 있는 바다는 순수다 순수라서 하늘을 담고 순수라서 마음을 담는다 먼 길을 걸어온 사람의 발은 담지 않는다
먼 길을 걸어온 사람의 영혼을 담는다
영혼으로 소금 정령들이 스민다 먼 길을 온 사람들의 영혼이 투명해진다 영혼이 투명해지면 몸이 투명해진다
투명해진 몸을 소금 정령들이 받아 안는다 그제서야 먼 길 걸어온 사람의 발을 안는다
발은 얼마나 가여운가 얼마나 눈물겨운가
그 후의 발은 신의 세계다
종려나무 가지가 없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는 사람은 없다 성이 몇 번을 헐려짓는 동안 사람들은 범죄에 빠져 자신을 허물었다
거대한 빌딩이 파괴되고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학살이 뉘우침 없이 진행되고 난민이 바다 위에서 표류하다 떼죽음을 당하고 쓰나미로 원전이 폐허가 되고 잊을 만하면 어린 자식을 학대해 죽음에 이르게 한 젊은 어미가 얼굴을 가리고 카메라 앞에 나타나는
고래의 뱃속은 플라스틱 조각들로 차고 근해에서는 자웅동체의 조개들이 서식하고 가로수를 누렇게 말리는 산화황과 산화질소는 사람들 폐를 채우고 온갖 세제는 마트마다 범람하고 정자 수의 감소로 불임이 늘어나는
지옥이 어디인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을 사람들은 외면 한다 사람들은 권력의 맛을 알게 되고 바다가 아프다고 하늘이 아프다고 땅이 아프다고 강이 아프다고 소리쳐도 듣는 귀가 없다 반성을 모르니 역병으로 떼죽음을 당하는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성이 허물어지고 마침내, 몸의 작은 성이 허물어지는데
종려나무 가지가 없다
그 여자*
그 여자는 걷는 일이 불편하다 몸을 약간 앞으로 구부리고 저는 듯 발걸음을 옮긴다 그 여자는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린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이면 무엇이나 그린다 꽃이
떠오르기도 하고 나무가 떠오르기도 하고 나비가 떠오르기도 한다 호수가 떠오르기도 하고 하늘이 떠오르기도 하고 길이 떠오르기도 한다
사람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 여자에게 사람은 기억에 없다 그 여자에게 임신 시키고 떠난 남자도 떠오르지 않는다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죽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이를 보지 못했으니 아이가 떠오르지 않는다 아이를 그리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 여자의 등이 굽은 것은 하루 종일 고개를 숙이고 그림을 그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 여자는 그림에 영혼을 불어넣는다 나비를 그리면 나비가 날고 꽃을 그리면 꽃이 피어난다 시냇물을 그리면 물소리가 들리고 숲을 그리면 고요가 찾아온다 그 여자는 그림에 영혼을 불어넣기 위해 붓을 천천히 움직인다 꽃 한 송이를 하루 종일 그린다 나비는 이틀을 그린다
그 여자가 낡은 침대에 그림으로 누워 며칠째 일어나지 않는다 그 여자의 영혼이 가끔 돌아와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떠난다 그 여자의 흰 뼈꽃이 그 여자의 마음 속에 떠오를 것이다 언젠가는 그 여자가 흰 뼈꽃을 그릴 것이다
*캐나다 출신 화가 모드 루이스의 별칭
삶과 영혼
삶이 고통이면 영혼 또한 고통이다
삶은 움푹 패이고 거칠게 벗겨지고 꺾여서 접혀 있다 삶이 이런 모습이었다니, 굴신의 나날이었다니, 시집 『저, 미치도록 환한 사내』의 척추가 붉게 물든다
삶이 고통이라고 세상이 더 보이지는 않는다
영혼은 투명한 책장을 넘긴다 영혼이 펼치고 있는 책장은 눈물로 젖어 있다 저자의 눈물은 수백 년이 지나도 마르지 않는다 영혼은 눈물로 젖은 책을 말리기 위해 행간 사이를 분주히 오간다 영혼은 책의 행간에 숨겨진 비밀한 문을 찾아가는 일로 고통스럽다 서른넷의 비의를 짚어낼 수 없어 산맥 같은 가시가 생긴다 눈물은 가시에 질려 흩어진다
영혼이 고통이라고 생각이 더 깊어지지는 않는다
광야
가슴이 광야다 생각이 광야다
가슴으로 독수리가 날고 생각 위로 전갈이 기어간다 가슴으로 붉은 산맥이 일어선다
오래된 서재가, 먼 그녀가 광야다
서가에는 광야에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의 문장들이 낡아가고 있다 문장들은 카타콤을 향한다 카타콤은 그들이 살아가던 책속의 세상이고 책속의 세상은 죽은 자의 이름보다 빨리 늙어간다 산 자들의 이름은 지상을 향한다 산 자들이 가고자 하는 지상은 광야다 광야에는 그들의 활자가 산으로 쌓여 있다
그녀는 대륙의 어두운 밀림을 보는 일로, 혹은 검고 큰 눈의 하얀 웃음을 보는 일로, 혹은 해안 습지의 무성한 맹그로브 숲을 보는 일로, 혹은 니제르강의 붉은 낙조를 보는 일로 한 계절이다 웅장한 빗소리와 숨 막히는 폭염을 견디는 것이 그녀의 광야다
독수리는 가슴을 떠나지 않는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산책
호프가르텐 성을 걷자 했습니다
대지는 오래 전부터 은폐와 개진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언어는 지금도 뜨겁게 달구어져 한창 아름다운 꽃들을 경련케 합니다 5월이어서 신록으로 물든 정원은 자주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화려한 색깔을 드러내는 일로 햇살은 자지러지기도 했는데 낙화의 고요한 시간은 가난한 시인의 창에 닿습니다 우리들 또한 그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호프가르텐 성의 오솔길을 자줏빛으로 물들게 한 휠덜린이 손짓합니다 궁핍한 시대에 시인이 무얼 해야 하는 지를 생각 했습니다 언어가 말한다는 명제로 이 산책길을 수없이 오르내렸습니다
궁핍한 시대의 시인의 사명을 고뇌한 것은 저처럼 무어라 정의 할 수 없는 오월의 찬란한 햇살 때문이었습니다
햇살 아래 남루하지 않은 무엇이 있겠느냐고
지옥은 내 안에서 시작되고 내 안에서 깊어진다
예기치 않게 변하는 호수의 물빛이나 뜨거워지는 입술에 닿으려는 봄꽃들은 미선나무 흰 꽃의 순결을 넘지 못했다
절망하는 것들은 지옥이다
타인들은 지옥이 아니다*
떨리는 포옹과 찻잔이 놓인 밤, 첼로의 낮은 선율과 미명의 안개와 새순 적시는 따스한 계절이 있어
타인들의 웃음소리, 타인들의 불빛, 타인들의 잠, 타인들의 노래는 지옥 아니다
너무 일찍 저 버린 미선 꽃이, 몇 달을 기다리는 메일이, 서녕으로 돌아간 시인이, 광야에서의 잠이 지옥이다
지옥은 내 안에서 시작되고 내 안에서 깊어진다
*아담 자가예프시키
낯선 도시
그 도시에는 출구가 없다
사람들은 도시의 어둔 골목을 찾아 쓸려다니고 이방인은 낯선 도시의 그늘이 두렵다
크림맥주를 마시며 입술의 뜨거움을 알았던 술집은 폐점을 했고 폐점된 가게는 도시의 경향을 잊고 방황하고 있다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계절이 계속 된다
그 도시의 경향이나 방향을 말하던 자는 사라지고 도시는 빈자들을 변두리로 내몰아 슬픈 어둠을 만든다
그 도시에 정규직의 빌딩은 설탕으로 지어졌고 비정규직의 빌딩은 안개로 지어졌지만 누구를 탓할 수 없다
복면의 도시에는 빈 방에 검고 어린 꽃들이 핀다 검고 어린 꽃들은 사람들 가슴에도 피어난다 사람들은 가슴에 피는 검고 어린 꽃들이 부끄러워 어둠 후에 외출한다
그 도시에는 출구가 없다, 그건 비극 아니다
더 큰 비극이 예비 되어 있어 검은 꽃들은 몰래 커진다
불과 물
퐁네프의 다리에서 너를 만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불꽃놀이를 볼 수 있다면 물과 불의 아름다운 절정을 기억하는 것으로 여생이 얼마인들 아쉬울 게 없겠다
소설가가 꿈인 너에게 아이를 배게 하고 출산을 기다리는 동안 쓰레기통을 뒤지고
마약 운반으로 병원비를 마련하며 웃음을 잃지 않겠다
밤마다 불꽃처럼 타오르고 해 뜨면 강물에 너의 얼굴을 비춰보는 일로 반년쯤 보내고 싶다
불러오는 배를 쓰다듬으며 걱정 말라고 눈물 그렁이며 약속하겠다
불과 물의 황홀하고 눈부신 퐁네프다리로 또 다른 젊은이들의 약속이 올 것이다
언약처럼 눈이 내린다
니제르의 여인
니제르의 여인이여!
니제르의 경건한 낙조를 함께 보자 했던 약속은 지킬 수 없게 되었다
강 물빛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붉어질 것이다
전생이 그랬다
붉은 강물에 낡은 생각을 떠내려 보내고 긴 배에 오른다 뾰족한 선수가 순결한 가슴을 찌르고 들어와도 당신을 멈출 수 없다
니제르 강에 수백 번을 흘려보낸 당신이다
붉은 해는 니제르 유유한 흐름에 장엄한 소멸로 당신을 기록할 것이다
소멸이 끝난 것은 아니라고 당신은 말했었다
소멸 다음에 무엇이 올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고 언약의 비릿한 내일을 믿을 수 없었다 니제르의 하루하루가 심장의 멈추게 했다 고통은 회한에 가깝다
당신은 회한에 겪게 한 첫 떨림이었다
니제르를 떠난 후 니제르에 서서 강물 하염없겠지만 강물은 강물로 한 생애였던 것을 소명하지 않을 것이다 생애라는 말이 벅차오르던 니제르를 이제는 무어라 말해야 되는지 모를 일이다 해가지지 않는 니제르가 좋았다 사람이 사람에게 지는 모습은 처연하고 안타깝다 니제르만이 한 생 강이었고 소멸의 물길인 것을 당신은 짐작했다
니제르 붉은 강물이 붉은 눈빛들을 모은다
사내들은 물고기를 잡고 아녀자들은 마른 갈대를 태워 훈제로 만드는 강안으로 푸른 안개가 흐른다 아이들은 강물로 뛰어들며 자지러지게 웃는다
붉은 강물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린다
당신이 더 빨리 어두워 질 시간이다
자미, 붉은 꽃잎을 기다리다
자미, 어디 있는지 모른다
자미 붉은 마음에 빠져 몇 봄을 앓는다 자미는 연모거나 배반의 징표여서 걷는 길마다 나타난다 백일을 핀다 들었으나 내게는 천일의 꽃이다 천일을 지지 않으니 꽃물 들어 붉게 살아간다
나무시장마다 순례해도 자미는 보이지 않는다
지난 해 심은 자미가 뿌리를 내리지 않고 한 해를 보내더니 꽃몽우리를 숨겨 떠났던 것이다 자미 떠날 무렵의 사람은 사람 아니었다 자미에게 못 할 짓은 한 것을 후회한다 15 년 전 자미 두 그루를 심었었다 자미가 늦게 잎을 밀어올리는 줄 몰랐던 탓이다
여름날의 자미 붉은 꽃을 보고 있노라면 고요한 안식이 온다
자미를 얻는다면 자미 붉은 꽃 아래 술잔을 놓아야겠다 술잔 속으로 꽃잎 떨어져 술이 향기를 갖기까지 얼마를 애태워야하는지 모를 일이다 자미가 절벽이 되었다 자미가 절망이 되었다 자미가 상사가 되었다 자미가 눈물이 될 수도 있겠다 이 나이의 자미는 연모거나 배반이다
자미는 대륙의 강물에 얹혀 수십 년을 흐를 것을 안다
절리에 핀 꽃
모든 뿌리들이 향하는 곳, 비와 구름과 바람이었으니
차가운 달빛 받아 빛나고 싶었던 나들이 있었다 죽음도 함께였다 무덤 없이도 기억되는 묘비명을 읽고 떠나자하던 꽃
절리는 날카롭고 어둡고 진한 피다 뿌리 내릴 수 없는 거암의 횡포 어떤 꽃도 뿌리내리지 못한 빙벽
그곳에 꽃을 피우자했던 무모한 상사, 밤마다 문이 여리고 옷자락소리 들리던 환청의 날들이었다
메아리조차 들어갈 수 없는 절리의 완벽한 틈
그곳에 피우지 못할 꽃을 피우려는 무모한 용기였다 환상이었나 절리에 꽃이 피었다
잎 없이 피었으니 상사화라 불러도 될 꽃은 잠시 피었다 진다 순간의 일이었다
어디에도 꽃이 피었다는 기록은 없다
니제르의 기억
니제르 강물 붉게 물들이며 선홍빛 불덩이가 강물로 뛰어드는 대륙의 선망, 네가 보인다
며칠을 앓는 꿈
내게는 없는 니제르의 기억, 입 주변을 검게 화장한 니제르 여자들, 안고 있는 아이의 잇몸이 붉다
입술을 검게 화장하고 나타난 너는 미몽, 티 테이블에 앉자마자 흐르던 눈물은 선몽이었거나 악몽의 연속이다
꿈에서 깨어나서도 꿈꾸는 무서운 밤
백일이 갔다 백일은 절망으로 드는 긴 통로 까마귀 떼의 울음이 들리는 곳으로 천일이 가겠다
누가 장문의 서간을 읽어 내려갈 것인가
강물의 흐름이 멈추지는 않는다 멈추는 것은 너를 향한 숨결일지도 몰라 니제르는 산 자의 내일이자 죽은 자의 안식이다
니제르를 버리고도 살아 있는 행간
라브 여관Auberge Ravoux
마지막 작업실, 이곳이 묘지, 작업실은 내 커다란 목관, 목관을 영혼의 색채로 채워나갈 날들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걸 예감한다
볕 잘 드는 쪽을 향해 이젤을 세우고 페인팅을 하면서도 시신을 처음 보게 될 사람을 위해 그림 한 점을 헌정한다면 오베르 시청*을 남겨야겠지
살아 있는 묘지는 파리 외곽 오베르쉬즈오아즈 러브 여관 이층 좁고 누추한 다락방이다 하루 3프랑에 세 들어 산다 세 들어 죽어간다 아우는 가끔 들려 그림을 가져가지만 팔리지 않을 것을 안다 그래도 방세는 꼬박꼬박 내준다
살아 있는 묘지는 적막하고 캔버스를 거칠게 훑는 붓 소리가 창문을 넘어 바람에 몸을 섞는 순간의 짜릿한 흥분, 그 광기
실탄은 딱 한 발, 그것으로 운명을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내일을 어떻게 아는가 우울한 날들의 절망과 깊은 나락의 죄의식과 색으로 표현되지 않는 고절감 그리고 패배감과 소외감, 미친 듯이 그것들과 싸운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그들이 미친 것이다
닥터 가셰가 내 죽음을 예찬하리라 나를 초조하게 하는 밤이 길어지고 하루에 한 점씩 완성해야하는 그림들은 생명을 파먹는다 며칠을 굶었는지 붓을 든 손이 떨리고 텃치는 점점 거칠어질 때
새벽이 온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비몽
너는 골목에 나를 세웠고 짧고 격렬한 무엇이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하철역을 몇 번씩 오르내리며 안타까운 눈빛 꺾이고 도시의 불빛은 차가웠고 비몽은 끝나지 않아서
너는 젊은 날의 그리지 못한 그림
아련한 밤의 고백, 소도시에 작은 양장점을 내자던 약속은 파기되어 너를 병상에 눕게 했던 쓸쓸한 예후
꽃그늘로 구름과 바람을 모으는 연꽃
미래의 암울한 시간들이 흘러가는 그곳의 그림자는 몇 구간을 꺾여 있었고 골목을 떠돌며 이름을 부르던 청춘은 청춘 아니어서
수십 년이 순식간에 펼쳐지고 접혀지던 너
연지에서 듣는 너의 조용한 숨소리
산사나무 붉은 꽃
산사나무 아래 너를 세우고 북쪽으로 날아가는 새들을 보며 서간이 어떻게 낡아가는지 말하고 싶었던 시간들이 이슬이 되고 바람이 되는 묘비가 되고 검붉은 흙이 되는
너는 침묵으로
산사나무 붉은 꽃을 낙화에 이르게 하고 어떻게 다음 생을 예비하며 고뇌 하는지 지는 꽃들의 비명은 그 고뇌였는데 듣지 못한 채
돌아서며 어깨를 접었고 네 어깨는 날지 못하는 새, 우수수 지는 산사나무 붉은 꽃들이 너의 힘겨운 말인 것을 알아 마음 마디 꺾이던 날
그렇게 한 생이 저무는 것
묵상
대륙, 가야할 미지의 세계였다
붉은 사막 어디쯤 오아시스 마을이 있어 잠시 지친 영혼을 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길의 끝에 또 길이 시작되는 두려움을 견딜 수 있다면 사막에 피는 붉은 모래 꽃을 보게 될
묵상은 슬프고 아름다운 것이다
영혼이 영혼을 바라보는 일은 물의 뼈들이 서로 부딪쳐 상처 입히는 일이었다 상처는 바다에 이르기까지 낫지 않았다 흐르며 덧나기를 반복하다 참혹한 영혼으로 묵상은 계속되는 것이다 그 후는 소금의 언어로 살아가야 하는
묵상은 시간의 가혹함을 정면으로 맞서는 경배다
대륙, 둔중한 바람이 온다 바람은 사막의 붉은 모래 언덕을 짓고 허물며 일몰의 장엄한 빛 속에 한 사내를
항전
여자는 아이들과 굴속에서 몸을 숨겨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처참한 광경을 떨며 보고 있다
다급하게 집으로 달려온 가장들은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아내를, 떨고 있는 아이들을 살해하며 천국에서 만나자 나도 따라간다고 외쳤다 저항군 남편들은 자신의 칼로 죽인 가족들을 위해 잠시 기도하고는 뛰쳐나갔다
칼에서 흐르는 핏물을 닦을 시간이 없었다
참혹한 광경은 집집마다 일어났다 마을은 비명과 흥건한 핏물과 비릿한 피 냄새로 지옥이었다
저항군들은 집결해서 열 명씩 조를 짜 제비를 뽑았다 뽑힌 병사가 아홉 명을 칼로 쳐 죽였다
저항군 936 명은 마지막 한 사람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 대장이 남을 때까지 장열한 자결의 항전은 계속되었다
대장은 모든 병사들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 자신의 목을 찔러 숨을 거두었다 그것으로 마사다 요새는 난공불락이었다
AD 73년 4월 16일의 마사다 전투였다
요새에는 패하고도 승리한 자들의 피가 먼 미래까지 흐르고 있다
판 호흐
나는 내가 느끼는 것을 그리고 내가 그리고 것을 느끼고 싶다*
별들은 밤마다 폭발하고 해는 이글거리며 모든 것을 태운다 필경은 스스로를 불태워 장엄하게 지평선으로 추락한다
그는 순결한 여자를 사랑한다 수많은 남자에게 안겼으나 어떤 남자도 사랑하지 않은 정절을 알고 있는 그는 그녀에게 무릎 꿇고 싶은 순간이 많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미쳐있다고 아우에게 말하고는 혼자 웃었다
아우는 마침내 형의 <붉은 포도밭>이 400프랑에 팔렸다고 와인을 땄다 그가 살아서 팔린 유일한 작품을 산 사람은 벨기에 화가 외젠의 누이였다 그녀는 호흐의 광기가 화폭을 찢을 듯 움직여간 정신의 자국을 보았던 것이다
발작과 광기의 나날은 보이는 모든 것들을 악몽에 이르게 했다 그는 화폭 위에 존재하는 사물들이 고통스러워 뜨겁고 강열한 색채로 자신의 영혼을 달랬다
그는 몽환의 시인이었으며 저주의 가객이었다
미래의 채색 세계를 보는 예언자였다
그의 예언이 천년을 지배할
*빈센트 반 고흐
모란꽃 지다
새벽에 꽃잎 지는 소리 들었다
낙화의 부드러운 접지였지만 대지가 잠간 경련에 들었다 열흘이었으니 미련은 없겠다 보랏빛 황홀한 여백의 탄성을
마치 여명이듯 펼치던 꽃이다
한 왕조의 몰락은 슬픔으로 오지 않는다 왕궁의 기둥들이 보라색으로 물들어 온다 그 후 허망한 사초의 기록들이 경련하듯
저 허망한 낙화의 순간을 기록하며 눈은 먼 곳을 응시한다
툭 떨어지는 꽃잎 위에 다시 떨어지는 꽃잎들 후궁들의 치마가 뒤집히고 겁탈이 시작된 비운의 왕조
왕조가 무너지는 황홀한 몰락의 영토에 밀려오는 탄식들, 퇴락하는 햇빛들
초대 받지 않은 손님
그림 한 점이 팔렸다 낭만적인 시절이었다
모델리아니*는 친구들을 초대하고 어둠이 깃들기를 기다렸다 그는 보랏빛 어둠이 밀려올 때 초대하지 않은 그의 단골 술집 ‘지붕 위의 황소’ 주인이 들어섰다
순간 모델리아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술집 주인은 파티장 안을 둘러보고는
몸을 돌려 나갔다
모델리아니는 불안했다
그가 다시 나타난다면 파티는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초대한 친구들이 들어설 때마다 과장된 표정으로 친구들을 맞았다 그러나 눈은 현관에 가 있었다 마지막 친구가 들어서자 모델라이는 안도의 표정이 되었다
그 순간 단골 술집 ‘지붕 위의 황소’주인이 술병을 한 아름 안고 나타났다 그는 모델리아에게 술병을 넘기며 한 마디 했다 이 곳의 모든 집기, 테이블. 식탁보, 술잔, 심지어 안주까지 모두 우리 가게 건데 술만 아니라는 게 말이 안 됩니다 술까지 우리 가게의 것을 씁시다
단골 술집 주인은 호탕하게 웃고 사라졌다 모델라이의 친구들은 발을 굴렀다
*이태리 출신 화가, 싼값에 팔리던 그의 그림은 사후에 재평가되어 엄청난 고가에 거래되었다.
화사한 그늘들
산 후박나무를 보게 된 것은 우연이다
울안에 심은 은행나무가 커지면서 이팝나무 꽃이 흰 빛을 잃었다 이팝꽃이 우수수 쓸려 떨어지는 모습 뒤로 희고 커다란 후박 꽃을 보았던 것이다
어떤 하늘도 기다리지 않았을, 어떤 바람도 기다리지 않았을 홀로 피고 이울기를 몇 십 년이었을 그 꽃을 본 것이다
산색 모두를 모아 하얀 색깔로 피어 있는 후박 꽃을 위해 떼새들도 후박나무에는 앉지 않는다
잡목 숲이 우거진 앞산의 산 후박나무 흰 꽃을 달빛이 안았을 거지만 그런 밤을 기다리지는 않았을 산 후박나무는 밤마다 차령을 옮겨 다니며 꽃망울을 키웠을 것이다
새벽녘 제 자리로 돌아와 희디흰 꽃 몇 송이 넓은 잎 사이에 숨겼을
늦봄 정오 무렵의 화사한 그늘들
홀(笏)
그것 하나를 손에 쥐자고 가정사를 모두 까발리는 자리에 앉아 온갖 모욕을 견디는 사람은 성인인가 보다 하루 종일 지겹도록
어느 판이던지 그것 하나를 쥐면 군림할 수 있으니 그것은 신분상승의 증표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손에 쥐기까지 견디어야 하는 수모를
영의정 후보자는 타고 다니는 가마가 교통법규 위반 범칙금 미납으로 수십 번 압류 된 것에 머리를 숙였지만 백성들은 작은 법도 못 지키는 자가 큰 법은 어찌 지킬 것인가 염려하게 되었고 판서 후보로 나온 관리는 엄청난 양의 영국제 명품 도자기와 상젤리를 외교행낭으로 들여와 판매한 것을 추궁 당하자 아내가 취미로 모았던 것들이고 중고품이라고 변명하느라 진땀 흘리는데
그것 하나를 들고 근정전 문무백관들이 서는 자리의 앞줄에 서기 위해 이틀 씩 견디어내는 온갖 비아냥과 모멸을
그것 하나를 위해서
오로지
우준愚蠢
시 한 편이 내게 오는데 시간이 걸린다 시의 발걸음은 무겁고 느리다 시의 눈빛은 흐려 있고 흐린 눈빛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느라 더 늦어진다 나는 느린 시를 기다린다 느린 타법으로 자판을 두드리고 느린 생각으로 말을 기웃거린다 말을 찾아 이리저리 살펴보지만 그 말이 그 자리에 딱 맞는 건지 알 수 없다
쉽게 떠오르지 않는 어휘의 느린 환기, 선명하지 않은 이미지들의 느린 행보
속도가 젊음이라는 걸, 방향이 삶이라는 걸 깨닫는 나이다
나이 듦의 날들은 바닥이 보이는 샘물이다
영구차가 느린 속도로 평화의 숲으로 들어선다 상주가 느린 걸음으로 운구행렬을 따른다 중천의 뜨거운 해가 느리게 움직여 중심을 넘어간다 한 생의 끝 날은 그림자도 느리게 흐느끼고 슬픔도 느리게 온다 다음 생이 어디쯤서 기다리고 있는지는 죽은 자가 안다 죽은 자의 영혼이 그 곳의 느린 시간을
속도가 죽음이라는 걸, 방향이 분골이라는 걸 깨닫지 못한 길은 느리고 무겁다
자판 위의 손가락이 떨린다
난제
정원은 다듬어지지 않았다 15년 전에 심은 나무에서부터 올 해 심은 나무까지 서로를 향해 가지를 뻗는다 나무들은 호수 쪽으로 기운다 큰 나무 옆의 작은 나무는 반대방향으로 자란다 큰 나무의 자장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무엇이 난제인가
대추나무는 소낙비의 기세로 자랐다 굵은 가지들을 잘랐다 처음 해본 전정이었다 가지가 잘려나간 곳에 하늘이 들어섰다 하늘은 달의 자리를 비워두어 허전했다 몇 년이 지나야 공간으로 대추나무 새 가지들이 자랄 것이다 가지를 내준 대추나무는 대추를 달지 않았다 저항은 몇 년이나 계속 될지 모르겠다
난제라면 난제다
배롱나무를 가지고 싶었다 병산서원에 얻은 병이다 몇 년 전에 두 그루를 심었었다 오월이 지나가는데도 싹이 나지 않아 베어버렸다 벤 자리에서 새싹이 나왔다 배롱나무가 늦게 싹을 틔운다는 걸 몰랐다 싹을 키워 삼년 전부터 꽃을 보았다 그 배롱나무가 올 해는 싹을 틔우지 않았다 동해를 입어 죽은 거다 배롱나무가 동사하리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베어낸 자리에서 또 새싹이 돋는다
배롱나무는 난제다
그 나무가 쪽동백이라는 걸 요즘 알았다 십 몇 년, 이름을 모르는 채 종처럼 생긴 아름다운 꽃을 보아왔다 거실의 창으로 가득 다가서는 쪽동백은 향기가 짙었다 향기에 취할 수 있는 날은 열흘을 한참이나 넘긴다 몇 년 전부터 꽃가지들을 아래로만 늘어뜨려 꽃을 피웠다 윗부분은 무성한 잎들로 덮었다 나무를 감고 오르는 이름 모를 줄기들이 쪽동백을 칭칭 감아 점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꼬박 이틀간 자르고 쳐냈다 몇 년을 점령당한 쪽동백은 중심부에 커다란 허공을 가지게 됐다 어떻게 해야 옛날의 수형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참담하다 나보다 쪽동백이 더 고민스러울 일이다
난제 중의 난제다
붉은 장미의 방
커다란 붉은 장미 한 송이로 가득 채운 방이 있다 그는 이 그림을 레슬러의 무덤이라 명명했다 레슬러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다 죽었다면 무덤이 붉은 피로 가득하겠다 싯다운 파워 밤이나 라스트라이드 파워밤이나 피니셔를 당해 영원한 잠에 들었다면 그 피투성이 레슬러의 무덤은 붉은 장미 한 송이로 보여지겠다 레슬러는 고급한 기술로 관중을 사로잡고 화가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시선을 사로잡으면 끝이다
정말 끝인가
화가는 현실을 초극하려고 얼마나 많은 내상을 입고 피를 흘렸을까 젊은 날, 말을 왜곡하고 전복하는 것으로 이미지에 상처를 내고 상처 낸 이미지들을 껴안고 살았으니 말과 이미지들의 공격으로 화가는 피투성이였을 것이다 말 탄 여자가 숲속을 지나가는 그림은 ‘백지위임장’이다 말의 부분들이 사라진 그림은 누구든 마음대로 읽어도 좋다는 의미겠다 화가에게는 말도 창이고 이미지도 창이다 말도 이미지도 화가를 찌른다 목덜미에서 눈에서 심장에서 피가 흐른다 피가 멈춘 다음 캔버스에 번지는 물감은 화가에게 최초의 컬러겠다
화가의 피를 마시고 싶다
노랑나비
여강 건너는 그를 초여름이 따라온다 온통 초록으로 흐르는 강물이다 그의 표정이 어둡지 않다 손에 든 새 악보 때문이다 새 악보에는 몽환의 발라드가 그려져 있다 양철지붕 빗소리를 듣지 못해 통기타의 선율이 어둠의 깊은 골짜기를 찾아가진 못했지만 새벽 시간의 음계는 한 옥타브를 울려 불러도 감흥이 살아났다 그가 부른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는 잊혀 질 노래를 위해 젊은 날을 음계와 음계의 벼랑을 건너뛰며 미몽의 삶을 이어왔다 궁핍은 라면의 뜨거운 국물로 달래거나 햇반의 부드러운 기억으로 잊곤 했다 어느 날 깊은 샘을 품고 있는 여자가 카페의 야외 의자에 앉아 그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여자를 위해 곡을 쓰고 노래했다
여자는 양철지붕 아래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는 박수 없이 노래하고 박수 없이 무대를 내려온다 숙연한 그의 옆얼굴을 보아줄 사람이 없다 그의 노래가 여강으로 달려나가는 이유다 여강변의 작은 카페는 늘 외롭고 주인 여자는 언제나 커피의 원산지 맛을 찾아 헤매거나 구석에 숨은 어둠을 찾아낸다 그는 창가에 앉아 종일 떠오르는 멜로디를 오선지에 옮긴다 지금 막 완성한 곡이라고 주인 여자에게 들려주지만 주인 여자는 여강에 던지고 있던 시선을 거두며 좋네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늘 듣던 말이다 그는 씨익 웃고만다
주인 여자는 카페 문을 닫고 나서야 그의 악보를 구음으로 읽는다
그는 거처로 돌아오는 길의 밝은 흙길과 빛나는 햇살과 폐부 깊숙히 박히는 강바람이 좋다 그것들 때문에 여강 건너 머문 지 십 년이다 여강을 건너면 작은 면소재지다 일 년 내내 조용하지만 장날이 되면 외지의 장꾼들이 철 지난 옷가지와 신발과 뻥튀기과자와 냉동 어물과 제철 과일과 족발과 잡화를 펼쳐놓는다 그는 잡다한 상품들이 지니고 있는 일상의 매혹에 빠진다 중고 가죽 등산화를 눈여겨 보아놓고 장터를 돌아본다 난장의 소리들을 유심히 듣고나서 중고 가죽 등산화를 집어든다 발보다 마음이, 마음보다 걸어가야 할 앞길이 편할 거 같다 누군가의 발이 오래 머물렀을 등산화는, 산정으로 가는 비탈과 돌부리와 무수한 길들을 어딘가 내장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발을 따뜻하게 감싸줄 다른 발의 기억이 있다는 게 좋았다 그는 중고 등산화를 가슴에 품고 단골 노점의 막걸리에 취한다
비가 온다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신비의 음계다 비 오는 날은 여강을 건너지 않고 곡을 쓴다 그의 곡은 비와 바람과 강물을 훔친 것이다
그의 노래는 흐린 어둠으로 들고 여강은 그의 가슴을 더 느리게 흐른다
대문 밖,
언제부터인지 비속에 카페 여 주인이 서 있다
벽화
삼흥리에서 사흥리 쪽으로 새 도로가 깔렸다 나는 그 길을 걷고 있었다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나의 진행 방향은 남쪽이었고 사내의 진행 방향은 북쪽이었다 서로 마주보고 걸었다 차령산맥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뻗어 있었다 높고 우람했다 사내가 가까이 오면서 흰 피부를 볼 수 있었다 흰 얼굴과 희고 가는 팔이 병약한 사내라는 걸 알게 했다
유월의 햇빛은 찬란해서 사내의 가늘고 긴 몸은 애처로웠다 새로 깔린 도로는 아스팔트의 새까만 색깔이 그대로였다 도로는 어디까지 뚫려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내를 스쳐지나갔다 눈 그늘이 깊었다 새 도로를 한 시간쯤 걸었다 길은 동막골이라는 산골마을에 닿았다 새 길의 끝이었다 차령 계곡에 숨어 있는 마을, 동막골은 인적이 없었다 낡은 담장에 언제 누가 그렸는지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벽화는 메주를 만드는 사람들과 달을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림 속 사람들은 이미 동막골을 떠나 영원한 이주를 했을 것이다
뒤돌아 걸어나왔다 그 사내가 어디를 걷고 오는지 도로를 건너 산쪽으로 난 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걸으면서 사내를 보고 있었다 사내는 산 중턱을 행해 천천히 걷고 있었다 나는 사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사내가 걸어가는 방향에 흰색의 작은 간이주택이 있었다 사내가 그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멀어서 보이지 않았다
유폐의 하루하루
페인팅나이프의 밤이겠다 말의 벽돌을 맞추어가는 고통이겠다 치병의 나날을 홀로 버티는 중환의 세월이겠다
어느 것으로도 저의는 밝혀지지 않고
그것이 세상을 두렵게 하고
아프게 하고
어디 누구?
나무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세상은 끝간 데 없는 숲이고 숲은 조용히 아침을 맞고 강물을 보낸다 골목과 골목을 나무 그림자들은 물처럼 흐른다 나무 그림자들은 서로의 그림자를 겹치며 웃고 그림자를 풀며 운다 태양은 숲을 지상에 뿌리며 숲 뒤로 숨는다 밤은 환한 숲의 그늘이다 꽃은 꽃에게로 가고 새들은 새들에게로 간다
숲은 모르는 사이 슬픔의 거처로 변한다
세상의 슬픔은 숲으로 들고 숲은 슬픔을 받아 나무마다 매단다 바람이 숲을 흔들 때 나뭇잎들이 솨솨 우는 것은 슬픔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시에라리온의 숲에는 시에라리온의 슬픔이 나뭇잎을 흔들고 미얀마의 숲에는 미얀마의 슬픔이 나뭇잎을 흔들고 아프카니스탄의 숲에는 아프카니스탄의 슬픔이 나뭇잎을 흔든다 솨솨 우는 나뭇잎에서 솨솨 붉은 피가 흐른다 숲에서 피 흐르는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나무들은 비탄의 노래를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나무의 귀로 세상을 들을 수 있을까
나무의 눈으로 몰락의 순간을 볼 수 있을까
보이는 것은 너의 체취다
너는 사라진다 그리고 돌아온다 네가 보인다 보이는 것은 네가 아니고 너의 체취다
너는 나보다 먼저 사라졌고 나보다 먼저 돌아왔다 너는 보이는데 나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네게서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사라진 내가 너를 본다 너는 그곳에 있고 그곳은 비어 있다 비어 있는 그곳이 어둠이라면 음모의 깊이다 사라진 네가 내게 속삭인다 별은 언젠가는 검게 죽는 거야 죽지 않는 별은 없는 거야 그러니 별을 두고 손가락 걸지 마 다 속임수야 속임수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네 앞에 서 있는 내가 속임수인 걸 알았다면 네 앞에서 사라진 나는 더 큰 속임수인 걸 알았다는 거다 그런대도 귓속말을 할 수 있는 네가 두렵다
너는 비밀스럽게 루즈를 꺼낸다 너는 루즈 색깔 하나로 내게 여러 가지를 암시 한다 커피일 때도 있고 포옹일 때도 있고 키스일 때도 있고 섹스일 때도 있다 루즈는 너의 비밀 무기다 변화무쌍한 감정선의 진행방향이다 나는 그 미묘한 차이를 읽는다 언제부터 루즈의 비의를 읽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루즈의 색깔에 길들여지는 사이 문자 메시지는 도착 한다 서로의 음모가 결속으로 가는 동안 사람들은 달빛에 길들여지고 더러는 역병을 얻어 죽기도 했다 네가 사라지고 돌아오고 내가 사라지고 돌아오고를 반복하며 일어난 일이었다
너의 음모를 어찌해야 될까, 나의 음모를 어찌해야 될까, 서로의 음모는 밤으로 뿌리내리고
음모는 홀로 켜지지 않고
막달라의 여인
그녀가 가족들에게 이끌려 호수로 간다
오빠들은 그녀에게 달라붙은 마귀를 쫒아야한다고 그녀를 호수 속에 집어넣었다 꺼내기를 반복했다 그녀가 실신하자 호수에서 그녀를 건져냈다 애비는 말없이 어둠 속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다
그녀에게 청혼한 청년이 그녀의 집에 머무는 동안 그녀가 눈길을 주지 않는 것이 마귀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가문의 수치였다 그녀는 사는 일이 기도였다 누군가 무언가 보이는 듯 했지만 희미했다
그녀는 언덕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는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눈빛이 맑았다 열 명이 넘는 사내들이 남자를 따랐다 그녀는 남자를 따라나섰다 애비가 말렸고 오빠들이 데리고 가려 했으나 그녀는 돌아가지 않았다
남자는 그녀에게 빛이었다 남자는 그녀의 순결한 마음을 알았고 그녀는 언제나 함께 하리라 약속했다 그녀는 약속을 지켰다 남자가 피 흘리며 죽어갈 때 그녀는 남자 옆에 있었다 그를 따르던 사내들이 두려워 도망한 후였다
황무한 땅에 피가 돌게 하는 그녀
갈대밭에 누워 있는 그녀
자갈길을 걷는 그녀
바위틈에 앉아 있는 그녀
구름 속 달을 바라보는 그녀
보일 듯 말 듯 미소 짓는 그녀
용서라는 말을 생각 하는, 피가 돌지 않는 밤하늘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막달라의 그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나라님의 은혜로움이 천지간에 넘친다
역병으로 살기 어려워진 백성들에게 구휼미를 퍼주느라 나라 곳간은 이미 텅텅 비었는데 백성의 아우성을 두고 볼 수 없어 또 수십조의 구휼미를 구하는 중이다
나라님의 은혜로움이 천개의 강에 내리는 달빛이다 천개의 강은 이미 저물었고 달빛은 흐려졌다 달빛이 흐려졌다면 천개의 강물이 잘못이다 천개의 강물에 내리는 달빛이니 어찌 여일 하겠는가 어느 강물엔 덜 내리고 어느 강물엔 더 내리기도 했을 것이다 설사 달빛의 기회가 평등하지 않으면 어떤가 과정이 공정하지 않으면 어떤가 결과가 정의롭지 않으면 어떤가 천개의 강물이 아니던가
달빛 받은 모두는 후대에 엄청난 부채를 안겨준 악마들, 달빛에 취해 사리분별 못했던 망나니들
달빛 공범들
비비추꽃을 믿어도 될까
비비추꽃은 왕벚나무 아래 가까스로 피었다
왕벚나무의 그늘을 사랑했던 것이 죄라면 죄일 것이다 햇살을 향한 간절한 기원으로 연보라빛 계절을 보내는 너는 비원을 버렸다 너는 늘 그늘이었다 창백했고 우울했다 늦게 온 몽유를 어찌
모히또를 마시며 지구의 반대편 어느 지점을 생각한다는 말을 믿는다
너의 그 잔잔한 슬픔을 믿는다, 너의 니제르강물 출렁이는 눈물을 믿는다, 너의 둔중한 빗소리의 불안을 믿는다
비비추꽃 연보랏빛 색깔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을
마담, 포토 플리스
그녀는 뿌리에서의 기억이 아련하고 미칠 것 같다
캘커터 행 티켓을 다음 날 티켓으로 바꾸지 않은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거나 차버린 한 생 아니었을까 지구를 다 뒤져도 만날 수 없는 눈동자를, 기막힐 일이다 다질링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뿌리에 닿는 여정이었다 뿌리는 인도 동편의 바닷가 마을, 똥 해변으로 유명하다 불가촉천민들이 사는 바닷가에는 화장실이 없다
그녀는 바닷가에서 마을 남자들이 배 한척을 부려서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하루 종일 보았다 기껏 열 마리 쯤, 미친 짓이지만 남자들은 웃으며 헤어진다 뿌리의 어부들, 뱃전을 떠나고 바다는 조용히 저문다 점점 짙어지는 바다가 그녀의 가슴에 대고 철썩철썩 말을 건네지만 동부의 방언이다
허벅지가 딴딴해진다 허벅지는 그녀의 자산이다 수천 킬로를 걷게 한 힘이다 그녀는 바다를 버리고 시장 입구에서 릭샤를 기다린다 문득 티베트의 시간이 떠오른다 내일과 다음 생 중 어느 것이 먼저 찾아올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니, 그 후 잠드는 것이 두려웠다 다음 생이 먼저 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은 여행지의 새벽마다 그녀를 웃게 했다
싸이클 릭샤가 그녀 앞에 멎는다 그녀는 낡은 릭샤의 너덜거리는 시트와 남자의 더럽고 추한 모습이 먼저 들어왔다 그녀는 과일을 고른다 노랗고 붉은 것들, 들었다 놓았다 시간을 보낸다 릭샤를 끌고 온 남자의 눈길을 등으로 느낀다 과일을 고르는 동안 남자의 눈질은 그대로 그녀의 등에 꽂혀 있다
얼마쯤 짜증스런 시간이 흘렀다 그 때 등 뒤에서 남자의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마담, 포토 플리스” 그녀는 그 목소리에 감전된 듯 뒤돌아본다 그곳에는 형형한 눈빛과 깊고 사려 깊은 눈동자가 있었다 낡고 때 묻은 모자의 채양 아래 깊숙이 그 눈은 신비하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그의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뿌리의 모든 빛들이 그의 눈동자에 들어가 있었다 그의 맑고 깊은 눈동자에는 무수한 구름 궁전이 서 있었다 이 남자와 나머지 생을 건넌다 해도 후회는 없을 것 같은 남자의 그윽한 눈동자, 그 후 몇 시간이 꿈결처럼 흘렀다
영혼이 번개 맞아 크게 상처 입었던 젊은 날의 저주를
깊은 눈빛이 기만이라고 하더라도 그 눈빛과 살 섞고 싶은 욕망을
부드러운 목소리에 죽음으로 드는 문을 숨겨 달빛을 깔았던 음모를
갈릴리
바다는 배반과 고뇌의, 두려움과 회한의 말씀이다 빛이었으나 그 끝은 음침한 골짜기의 어둠이었다 번뇌는 그물을 깁는 손끝의 경련, 죽음으로부터의 탈출이었으나 더 죽음으로 가까이 간, 비겁한 자의 눈물이 저처럼 푸르다 언약의 허망을 보여주는 한낮의 햇살, 모든 나는 두렵다
아주 먼 길을 온 순례자가 첨벙 뛰어드는 저 수많은 죄의 물결, 당신에게 뛰어들었던 시간의 출렁이던 영혼의 물결, 당신의 깊은 눈빛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기억 한다
내가 걸었던 당신의 몸은 붉게 물들어 설레고 있을, 지금은 속죄의 시간, 삶이 죄 위에 죄를 더하는 일이어서 물길은 투명하고 깊다
그 물길의 끝에서 어떤 영혼을 만날지 알 수 없다
물에 젖지 않는 검은 빛을 보았다
해인海印
한 여자가 실루엣으로 바다를 향해 섰다
바다가 검은 꽃으로 핀다 꽃잎마다 달빛이 담겨 일렁인다 여자는 검은 꽃과 달빛을 삼킨다 뱃속의 아이는 수만 개의 달을 가지고 논다 여자는 아이를 향해 나간다 아이는 달빛을 바다에 쏟으며 웃고 있다 아이는 여자의 몸으로 오지 않는다
달빛이 된 아이는 바다를 노래한다 아이의 노래로 여자가 바다가 된다 바다 위로 달빛이 은총처럼 내린다
여자는 지금도 그 바닷가에 서 있다
여자는 어린 아이의 신발을 들고 있다
가난은 가난한 자의 책임이니
서기 1756년은 영조 32년이니 건륭 21년이다 태평성대인 듯 했으나 백성은 굶주림으로 피폐해 갔다 그 해 3월 1일 진휼청에서 굶주린 백성 5,450 명을 선정해서 5일에 한 번씩 양식을 나누어 주었다 한성의 원호는 3만 8천 108호였고 인구는 19만 7,452 명이었다 팔도의 원호는 173만 3,242 호였고 인구는 712만 907 명이었다 도처에 굶주린 백성이 넘쳤다 양인 여자 안낭이(安娘伊)는 조세희에게 다섯 냥에 자신을 노비로 팔았다
‘건륭 21년 병자 2월 20일 조세희 앞으로 글로써 밝힙니다. 죽음의 세월을 살아낼 방도를 찾을 수 없고 험난하고 즐겁지 않지만 노모를 살릴 방도 또한 없습니다. 부득이 다섯 냥을 받고 제 몸을 팔겠습니다. 또 이후 자식이 생기면 아이 또한 영원히 노비로 팔겠습니다. 만약 훗날 이에 대해 말이 나오거들랑 이 문서를 관아에 제시해 바로잡을 일입니다.’
가난은 가난한 자의 책임이니
나를 다섯 냥에 팔겠습니다
비탄
서기 1786년은 정조 10년이니 국정을 꿰뚫을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백성을 구휼하지 못해 자신이나 가족을 노비로 파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정일재는 흉년이 들어 노모를 부양할 수 없게 되자 본인이 물주가 되어 일가족 일곱 명을 서른다섯 냥에 판다 자신을 팔지 않은 것은 노모를 보살펴야 했기 때문이었다
‘건륭 51년 12월 22일 최생원 댁 노비 유성 앞에서 문서로 밝힙니다. 흉년을 당해 팔십 노모를 부양할 방도가 없기로, 마흔 먹은 아내와 스무 살짜리 둘째아들 창운, 열여섯 먹은 셋째 딸 홍련과 열두 살 먹은 아들 용운, 여덟 살인 다섯째 용재, 세 살 난 창돌이를 각각 다섯 냥씩, 그리고 뒤에 태어날 일곱째 아이까지 노비로 영원히 파나이다. 문제가 있으면 관에서 바로잡기 바랍니다.’
노모의 나머지 삶이 비탄이었다
비탄은 애비에게 애비의 애비에게 그 애비의 애비에게 선혈로 낭자했을
아기연이
서기 1793년은 정조 17년이다
이 해 1월에 정조는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고 신도시 건설을 주관할 총리대신에 채제공을 임명했다 대역사의 시작이었다 화성 성역의 건설 계획은 흉년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가라앉게 했지만 기근과 역병의 두려움을 꺾지는 못했다
‘저 아기연이는 양인입니다. 매일 사람이 죽어나가는 끔찍한 흉년에 기근과 역병이 만연해 생명을 보전 못 할까 두려워 저와 열세 살 맏아들 용복과 여섯 살 딸 초래를 스물다섯 냥에 노비로 팔았습니다. 남편 원차제와 아이들 삼촌 원명순이 증인입니다.’
증인이었던 애비는 가슴에 떡 피가 앉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