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美石 박수근
“나는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 부농가집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고운 옷에 갓신만 신고 자랐습니다”. 박수근이 김복순에게 보낸 편지에서
1914년 일본강점이 시작될 때 38선 이북 접경지역 양구면(楊口面) 井林리 물 좋고 나무 좋은 동네 부호의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박향지 (享智)와 어머니 윤복주(尹福珠)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7세에 부친이 당시흥망이 있는 광산업에 손댔다가 실패해서 가세가 급속히 기울고 폐농하였다. 더불어 농지가홍수로 떠내려가 폐농되었다. 부자는 망해도 3년 간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서 3~4학년까지는 부농로서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동네 글방에서 한문을 배우고, 1921년 (1911년에 개교) 양구보통학교를 입학하여 도화(圖畵)에 소질을 보이자 담임교사와 일인교장의 지원을 받는다. 당시는 보통학교만 나와도 면서기를 할 수 있었고, 시골에서는 중학진학이 극소수 이었다. 졸업 후 중학진학을 못하고 당시 아주 깊은 마을 인제군에서 그림독학을 한다. 거북이 같이 꾸준히 그림을 그리다 1932년(18세)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서양화부에 처음으로 ‘봄이 오다, 입선한다.
이 그림은 향토적 조선민가로 중앙하단에 깊은 밭고랑을 중심으로 양측에 이랑이 양 날개같이 있고, 중앙에 원뿔(김치저장고)이 있고, ㄱ자 기와집 건너에 함석지붕광(당시 신문명재료)이 있고 건너에 작은 노적가리가 있고 우물과 이불빨래가 공간을 돋보이는 풍토적 지방적 농촌풍경이다.
1935(21세)년 다산(多産)을 하고 젓을 먹인 어머니가 유암으로 사망하는데 이는 당시 병명이 밝혀졌다는 것은 가내와 주변의 의학상식이 높음을 의미한다.
춘천시 거주시대
춘천에 나가 하숙과 노동하며 22세에 “일하는 여인” 수채화를 출품 2번째 입선하고 23세에는 봄으로 3번째 입선하고 24세에는 ‘농가의 여인’으로 입선하는데, 이 그림은 어둠을 배경으로 강원도적 큰절구와 여인을 표현하고, 상의는 현대적 저고리 하체가 크게 강조되고 하단은 완만한 s라인이 있다. 25세는 여일(麗日)로 입선한다.
춘천시청 지인으로 도청사회과장 삼길(三吉)은 개인전을 후원하였다. 춘천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많은 의미가 있는데, 4번의 입선이다. 1930년대 사진으로는 큰 키에 허여 말 숙한 얼굴 든든한 체격 멋진 코트착용은 여유 있고 매력적인청년으로 보인다.
1940년 2월10일 27세에 이웃 부잣집 춘천여고를 나온 독녀 김복순과 5회 입선 화가자격으로 결혼한다. 신부 네는 여유 있는 집으로 춘천의 의사집과 약혼을 파혼한 결단이 있었다. 양가에 친어머니가 없는 집안이었다. 장인은 “화가는 돈이 많아서 뒷바라지를 잘해야 성공한다는데, 기왕 사위가 되었으니 앞으로 돈이 필요할 땐 서슴치 말고 내개 말해라“고 하였다.
장인의 재산은 처남 김영규가 미성년이라 얼마간의 재산이 배당되고 김복순이 주로 상속받게 된다.
평양시 거주시대
결혼후 삼길 과장은 박수근을 면서기나 군서기도 어려운 평남도청 서기로 취직시키는데 박봉이지만 그 지위는 대단하였다. 평양 기림리 창동교회 집사의 사방6자 문간방 월세12원의 작은방이다. 32원 봉급에 동생처남네 식구가 함께 기거하였다, 평양별거 시 금성에 부인과 많은 편지가 오갔는데 급한 피난으로 편지의 손실은 미술사에 손실이다. 이어 처남과 동생도 도청에 취업시킨다. 이는 장남으로서 큰 역할이다. 아내를 모델로 해서 그린<맷돌질하는 여인>이 41년 20회 21회<모자>가 선전에 입선되었다. 기림리 시장 옆으로 셋방을 옮기고 아내를 모델로 그린<실을 뽑는 여인>이 제22회 선전에 입선되었다.
1940년 초부터 1944년까지 8월15일경가지 평양에 머물면서 최영림, 장리석, 황유엽, 장기표,변철한, 홍건표 등의 서양화가들이 모여 주호전(珠壺展)을 만들어 매년 회원전을 열었으며 당시로는 드문 미술활동 이었다.
평양거주시대 전하는 그림은 없으나 소재와 도상을 반복하면서 연마하는 것으로 보아 ‘강변’(1950년경) 그림에서 대동강변과 강 건너편을 구도로 그렸다고 본다.
금성시대
해방이 되고 미석을 끌어주던 일본인들이 귀국하자 평남도청 사회과서기를 그만두고 11월 평양에 가기 전에 살던 금성소재 금성중학교 교사 미술선생으로 일한다. 교사직은 작가생활에 지장이 있지만 장남으로서 생계수단으로 화가로서 가까운 자리이다. 금성시대 전하는 그림은 없으나 주식인 감자, 나목, ㄱ자 배치집 등에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미석의 북한시대 작업은 그림이 없다. 소주됫병에 넣어 봉하고 땅에 뭇고 피신했다고, 가족들이 알고 있다.
6,25전쟁이 터지자 황급히 피신하여 군산에가 부두노동을 한다. 김복순도 여러 차례 고문을 받은 후 경황없이 피난해 안양피난민수용소에 기식하며 날일로 한강자갈채취 후 서울에 잠입하여 창신동 동생 집에 들어간다. 트럭에 몰래 타는 한강 도강비용은 2만원 가족상봉후 작은처남에게 7만원으로 3만원 트럭운전사에게 주도록 하고 4만원으로 안양수용소에 있는 자녀들을 데려왔다.
창신동 전성시대
1952년에서 53년 무렵 돈을 모아 창신동에 35만원으로 집을 사 8월 그 집으로 들어가 건너방에는 동생내외가 살고 안방에는 박화백이 사용 작은 대청은 작업실로 사용하였다.
집 위치는 비교적 금성과 가까운 곳이며 전차로 명동화방이나 다방에 다니기 편리한 곳으로 상공인들이 살던 동네로 백남준의 출생지이다,
박수근은 생계를 위해 미군PX초상화부에서 인견조각에 간이그림은 1달러30센트이고 초상화를 그리면 5달러이었다. 반품시(빠구시) 1달러30센트를 고스란이 물어내야했다. 초상화를 사갈 때 사인이 없어 한점도 발견 되지 않음이 아쉬운 일이다.
전쟁시대와 전후 어려운 시대에는 보리밥과 감자가 주식이다, 보리밥이나 강원도감자바위 같은 이미지는 그의 그림 속을 흐른다. 외국인들은 생각이 누적된 한국적그림에 눈을 주고 수집하게 되어 주변에 인정을 받는다.
집과 인물과 풍경이 나오는데 인물의 발은 건축적으로 튼튼하게 표현되어 안정감을 준다.
공무원, 미술교사, 부두노동자, 초상화가, 전업화가로 가족과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중섭보다는 반대로 현실생활의 기반위에 반석을 세워 피어난 야생초 같은 질김 있다.
나목은 전후 헐벗은 산하를 보여주고 있다. 국전낙선은 스트레스로 질병을 얻게 되었을 것이며 술에 빠지는 계기가 되었지만 해외 판매로 예술성을 이어나간다. 51세 사망 천재는 단명한다, 현대로 보면 아쉬운 일생이다.
박수근 그림은 밀레그림 같이 씨를 뿌려 해외진출의 교두보가 되어 오늘날의 인정받는 한국 근현대 미술의 튼튼한 기단석이 되었다.
전시기간중 2021.11,11~2022.3.1. 11.28 2.23 양일방문하고 이글을 준비하였다. 글:건축가 최승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