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은 우리나라에도 민족기업을 마련하는 발판이 되었다.
일제 아래서의 한국인 기업은 김연수의 경성방직, 박흥식의 화신백화점, 이종만의 대동광업 등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해방이 되자 많은 기업인들이 기업을 일으켰다. 오늘날 대농의 박용학이 정주영과 같은 고향인 강원도 통천에서 간장공장을 경영하다가 해방을 맞아 서울로 내려왔으며, 이양구는 함흥에서 내려와 서울에서 자전거로 과자행상을 하다가 1948년 서소문동에 동양식품회사를 만들었다. 오늘날의 오리온인 동양그룹의 전신이다. 신동아그룹의 창업주인 최성모는 사리원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다 공산당의 등쌀에 서울로 내랴와 고무공업회사를 열었고, 코오롱그룹의 창업주 이원만은 일본에서 욱공예라는 모자공장으로 돈을 벌어 거금 180만 원이라는 돈을 쥐고 귀국해 경북기업이라는 섬유회사를 시작했다.
또 쌍용그룹의 창업주 김성곤도 이 무렵 서울로 이주, 안양의 조선직물을 불하받아 금성방직을 창업한 것이 오늘날 쌍용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오늘날 LG그룹의 창업주인 구인회도 1945년 부산에서 조선흥업을 설립, 대마도를 상대로 목탄무역사업을 하다가 풍랑으로 사업에 실패하고 화학공업에 뛰어든 것이 이때다.
말하자면 해방과 더불어 우리나라도 본격적인 국내기업들이 여기저기에서 창업을 하고, 그런 기업들이 오늘날 대기업의 초석이 된 것이다.
1945년 광복을 맞자 이병철도 서울로 올라왔다. 대구의 삼성상회와 조선양조가 날로 성장해 갔으나, 서울에서 좀더 크게 사업을 벌여보고 싶어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
이병철이 대구에서 서울로 거처를 옮긴 것은 그해 5월이었다. 대구에서 양조장과 삼성상회를 경영하던 그가 식솔을 거느리고 옮긴 거처는 혜화동 125번지의 한옥인데, 이 집은 오늘날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을 만든 영화제작사 명필름의 사무실로 되어있다.
여기서 이병철은 1년 반 동안 자신이 해야할 사업에 관한 구상을 하다가 무역업을 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물자가 부족한 때인 만큼 무역업이 가장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1948년 11월 종로 2가 영보빌딩 근처(지금의 YMCA)에 이길수 소유의 2층 건물 100여 평을 빌려 삼성물산공사란 간판을 걸었다. 오늘날 세계적인 대기업 삼성의 출발도 남의 집에서 사업을 시작하던 때였다. 회사이름을 공사로 한 것은 당시 국내무역상의 주요 거래선이 마카오ㆍ홍콩 등의 화상(華商)이었으므로 그들의 이해를 빠르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삼성물산공사는 주식회사체제로 출발했다. 이병철이 75%를 출자했고, 조홍제(훗날 효성물산 창업주), 김생기(훗날 영진약품 창업주), 이오석, 문철호, 김일옥 등이 나머지 25%를 댔다. 이병철이 사장을 캍았으며, 전무에는 조홍제, 상무에는 김생기를 앉혔다. 이병철이 독자적으로 자본을 전부 대지 않고 합자를 하게 된 배경에는 나름대로의 경영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병철의 회사운영 기본방침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이것은 그가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구상항 기본 틀이었다.
첫째, 일정한 자본금의 규모를 정하지 않고 사원이면 누구나 응분의 투자를 하고, 이익의 배당을 투자액에 비례해 공정하게 받을 수 있는 제도를 채택한다.
둘째, 사장이거나 평사원이거나 간에 공존공영의 정신으로 일에 몰두하는 것은 물론, 능력에 따른 대우와 신상필벌(信償必罰)의 기풍을 마련한다.
셋째, 사원의 생활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운영에 지장이 없는 범위 안에서 가능한 한 우대해 가족적인 분위기가 항상 유지되도록 한다.
당시 이병철이 임원들에게 25%의 출자를 하게 한 이유는 출자자들에게 회사의 이익이 곧 자기 이익이므로 서로 분발하도록 유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요즘에야 전 사원의 주주화를 실시하는 회사가 나올 정도로 이런 현상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이런 것도 하나의 파격이었다. 사원이면 누구나 응분의 투자를 하고 이익배당금을 받게 하며, 지분이 있으므로 모두 내 회사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하게끔 가족적인 분위기를 만든 것이다.
대신 이병철은 사원들이 먹고살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사원들을 우대해주었다. 오늘날에도 삼성은 봉급을 많이 주고, 후생복지를 잘 하는 회사로 알려져 잇다. 그리고 이런 전통은 이때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병철이 사원 대우를 잘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해방 직후 대구에서 일어난 폭동사건을 본 후부터라고 한다. 그는 당시 폭동사건의 원인을 먹고살기가 힘들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때 그는 돈을 벌어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장사꾼이라면, 기업가는 돈을 벌어 남과 함께 공유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돈을 벌면 같이 일한 식구, 즉 직원들에게 잘 해주어야 하며, 더 나아가서는 국가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것이 나중에 삼성 사훈의 하나인 「사업보국(事業報國)」으로 발전한다.
삼성물산공사가 시작한 것은 무역업이었다. 당시의 무역은 홍콩ㆍ마카오 등에서 온 무역선이 물건을 싣고 부산이나 일본 등으로 들어오면 그 물건을 사서 국내시장에 팔거아 국내의 물품을 그들에게 팔아 이익을 남기는 식이었다. 말이 무역이지 소매점식의 서고파는 장사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병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삼성물산공사의 조홍제 전무가 마른 오징어 3만 근을 배에 싣고 직접 홍콩으로 떠났다. 조홍제 전무는 홍콩에서 교포 무역상에게 오징어 위탁판매를 부탁하면서 대신 면사 50곤을 외상으로 샀다. 말하자면 오징어를 담보로 면사를 외상거래한 것이다. 또 거래선인 찬넬상회로부터도 오징어 3만 근을 담보로 주고, 면사 50곤을 역시 외상으로 샀다.
이병철은 말하자면 무역다운 무역을 최초로 시작한 것이다. 조홍제 전무가 가지고 온 면사는 수입가의 두 배가 넘는 가격으로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다. 이후 이병철의 삼성물산공사는 무역업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이병철은 홍콩ㆍ마카오ㆍ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 지역으로부터 설탕ㆍ면사ㆍ재봉틀ㆍ의약품ㆍ철판ㆍ비료 등의 생필품을 수입하는 한편, 마른 오징어ㆍ한천 등의 면실박을 수출했다. 당시에는 만성적인 물자부족시대여서 무역업은 큰 활기를 띠었다.
사업은 이병철의 오랜 시장조사와 무역동향에 대한 분석으로 금세 확대되었다. 철강재 등 원자재까지 취급하면서 취급품목은 수백 종으로 늘어났고, 상대국도 미국 등 선진국으로 다변화되었다. 수입상품은 일용잡화와 같은 자질구레한 것이었지만 통관되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국내시장의 수요를 면밀히 분석하고 수입한 데 따른 결과였다.
이병철이 설립한 삼성물산공사는 설립 이듬해인 1949년 무역업 거래액 면에서 국내 7위를 기ㅐ록해 당시 대무역회사였던 찬우사. 동아상사. 대한물산, 경향실업 등과 어깨를 견주어나갔고, 불과 1년 반 후에는 국내 무역 1위를 차지하면서 기반을 다져나갔다. 설립 1년 후인 1950년 3월 결산에서 1억 2,000만 원의 이익금을 낼 정도였다.
그러나 운도 잠깐. 6ㆍ25가 터졌다. 전쟁이 터지면서 삼성물산공사가 수입해 보관하고 있던 설탕ㆍ면사ㆍ한약재ㆍ염료 등의 물건이 모두 불타버린 것이다. 그가 타고 다니던 시보레 자동차도 공산당이 빼앗아 남로당 당수였던 박헌영이 타고 다녔다. 이로써 이병철은 전재산을 날리고 알거지 신세가 된다.
1946년 정주영은 지금의 서울 충무로 명보극장 자리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열었다. 매제인 김영주와 친구 최기호, 오인보 등과 함께 였다.
1939년 일제의 전시체제령에 따른 쌀배급제 실시로 경일상회가 폐쇄되자 정주영은 자동차수리공장을 운영키로 하고 합자회사 '아도서비스'를 설립, 재조업을 운양하는 등 첫 경험을 쌓다가 1943년 일제에 의해 그만두고 나서 두 번째의 제조업이었다. 말이 좋아 제조업이지 사실은 자동차 수리점이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는 자동차를 제조할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재조업의 범위에 든다고 하였다.
이무렵 특기할 일은 '현대(現代)'라는 상호가 처음 등장한 것이다. "현대를 지향해서 발전된 미래를 살아보자"는 뜻에서 지은 것이었다.
현대자동차공업사는 처음엔 미국 병기창에 가서 엔진을 바꾸어다는 일을 하다가 점차 고물 일제차를 개조하는 일을 했고, 1.5톤짜리 트럭의 차체 중간부분을 잘라 2.5톤짜리 트럭으로 고무줄처럼 늘리는 일 등을 했다.
그러던 정주영은 자동차수리 대금을 받으러 관청에 갔다가 정신이 번쩍 드는 광경을 보게 된다. 자신은 자동차수리로 고작 몇백 원을 받아가는 데, 건설업자들은 몇만 원을 받아가는 것이었다. 정주영은 그날로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 안에 '현대토건사' 간판을 하나 더 걸고 건설업을 시작했다. 이때가 1947년 5월 24일이었다.
그러나 동업하던 친구 오인보, 매제 김영주는 적극 만류했다. 경험이 없는 일이어서 까딱하면 망하기 십상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주영은 토건업이 전혀 생소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보성전문학교(오늘날 고려대학교)의 본관을 지을 때 공사판에서 일한 경험도 있고 또 토건업을 하려면 그리 큰 기술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어서 견적 넣고 계약고 수리해주고 돈 받기는 자동차사업이나 마찬가지라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 토건업계는 미국 시설관계 공사가 대량으로 발주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른바 일류업자 열댓 명 외에는 3,000여 개가 넘는 군소업자들이 난립해 치열한 수주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정주영은 공업학교 교사 출신 기술자를 한 사람 채용하고, 기능공 10여 명을 데리고 다니면서 미군정청 관리들과 교제를 트고 첫 해에 1,530원의 계약액을 기록했다. 출발부터가 성공적이었다.
이를 계기로 자동차공업사와 사무실을 같이 쓰던 현대토건사는 광화문 평화신문사 빌딩으로 본사를 옮기고 본격적인 수주경쟁에 뛰어들었다. 건설업자들이 관청에서 자신보다 더 많은돈을 가져가는 것을 보고 그날로 토건회사 간판을 하나 더 달았다는 정주영의 토건사업 투신은 일견 우스워 보였지만, 그는 돈이 어느 곳에 몰려 있는지를 본능으로 아는 직관적인 기업인이다.
여기이서 이병철과 정주영의 사업에 대한 차이점을 엿볼 수 있다.
이병철은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주도면밀한 시장상황을 분석하고 판단한 후 사업에 뛰어들지만, 정주영은 일단 뛰어들고 나서 밀어붙이는 스타일인 것이다. 이병철이 생각하고 나서 뛴다면, 정주영은 뛰고 나서 생각하는 스타일이다. 오늘날 이병철과 정주영 두 거인은 모두 삼성과 현대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켜놓았으니 어느 것이 더 나은 방법이라고는 얘기할 수 없다.
또 현재에도 삼성이나 현대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에도 삼성은 철저한 계획을 바탕으로 시간을 두고 면밀하게 사업계획서를 작성한 후 시행하지만, 현대는 일단 사업을 벌여놓고 나서 돈을 벌어나가는 방식이다. 요즘 말하는 스피드경영, 즉 판단이 빠르고 거기에 따른 추진이 신속하다는 면에서는 현대가 삼성을 앞지르지만, 질적인 면, 즉 경영성과나 수익구조 면에서는 역시 오랫동안 검토하고 분석한 삼성이 앞서고 있다.
두 기업 간의 경영관은 우열을 가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시대가 어떤 경영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본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공사판에서는 현대와 같은 진취적인 기상을 가진 기업의 마인드가 필요하지만, 이미지를 파는 소비재 산업에서는 시장상황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그에 따른 조치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가령 영상 60도의타는 득한 더위에 인부들이 일사병으로 쓰러지는 중동의 고속도로 공사현장 같은 곳에서는 지휘관의 신속한 판단이 요구되지만, TV를 비롯해 냉장고ㆍ컴퓨터ㆍ반도체 같은 상품을 팔 때는 공장라인 건설만 해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고, 그 이후 시장변화에 대한 예측까지도 요구되므로 상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현대가 고전하고 있다고 해서 현대의 기업정신 자체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 과거의 배트남 특수, 중동 특수의 경우처럼 시베리아 특수경기라도 터지면 몽골제국의 기마군단 같은 현대의 기업정신이 재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가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홍하상 『카리스마 vs 카리스마 이병철ㆍ정주영』한국경제신문
첫댓글 다음이 궁금해요.................빨랑 연재해 주세요^^
허허허... 술 값 버느라고 바빠서리...